'2017/07'에 해당되는 글 6건

  1. 2017.07.23 과거와 현재
  2. 2017.07.23 플라톤의 공동양육
  3. 2017.07.23 9년만에 다시 본 <매트릭스>
  4. 2017.07.23 그들이 못 본 것
  5. 2017.07.23 니체와 대중문화
  6. 2017.07.23 그린피스, 제니퍼 모건의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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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지하듯 192명의 무고한 시민이 희생되었던 대구 지하철 참사는 2003년 2월 18일에 일어났다. 오래전 일이지만 나는 여전히 그날을 생생히 기억한다. 그때 나는 중학교 2학년이었으며 참사의 슬픔으로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여하간, 뉴스를 보면서 문득 떠올랐다. 당시 대통령은 김대중 대통령이었고(2월 24일까지 재임), 노무현 대통령의 재임은 그 다음날인 25일부터이다. 원칙적으로 보면 김대중 대통령의 재임 당시에 벌어진 참사이다.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은 공공부문 민영화를 추진했던 인물이다. 항간에서는 그 사태의 원인을 공공부문 민영화 등을 비롯한 당시의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의 한 일환으로 이어졌던 1인 승무, 인력감축, 교육원 폐지 등으로 보기도 한다.

이러한 객관적 사실를 앞에 두고 나는 지난 2003년의 사태와 지난 2014년의 사태를 비교해보고 싶어졌다. 2003년의 사태에 우리는 어떻게 대응했던가? 김대중 정부 역시 국민 생명 보호의 의무를 저버렸고, 박근혜 정부 역시 국민 생명 보호의 의무를 저버렸다. 그런데 그 당시에 대통령과 정부에게 책임질것을 지금과 같은 수준으로 엄중히 요구했었나? 무능한 정부를 비판하는 목소리보다는 슬픔에 젖어 사회 전반이 우울감에 빠져있었던것 같다. 그리고 그 슬픔은 분노로 바뀌지 않고 슬픔으로 끝났다. 즉, [2003: 1단계 사태->2단계 슬픔->3단계 슬픔]의 구조를 가진다. 오늘날은 참사의 슬픔이 분노로 바뀌었다. 즉, [2014:1단계 사태->2단계 슬픔->3단계 분노 -> (이후 각종 탄핵사유가 드러나며) -> 4단계 폭발]로 이루어졌다.

그때와 지금은 무슨 차이가 있길래 슬픔이 분노로 이어지지 못했을까? 왜 그때는 정부의 무능을 비판하는 항의의 집회가 아닌 추모집회만 있었을까? (뉴우스의 댓글은 나의 댓글이 아님)

http://news.naver.com/main/read.nhn…


2017.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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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모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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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23&aid=0003286408&sid1=001


자녀 양육, 이제는 국가가 책임져야 하지 않을까?
유치원도 중요하지만, 우선 국공립 보육원(영.육아원:0~18세)을 늘려야 한다. 즉 두 가지 방향에서 인구정책을 진행해야 한다는 것. 유치원이야 허다하게 나왔으니 차치하자.
유치원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보육원이다. 보육원 아이들의 양육권자는 국가가 되어야 한다. 보육교사의 수를 늘리고 교사당 학생 수는 대폭적으로 줄이는 식으로 양육의 양질을 보장해야 할 것이다. 
미성년 시기의 실수로 혹은 원치 않는 이유로 낳은 아이를 버렸다거나 방치하여 살해했다는 기사를 심심찮게 보았을 것이다. 거의 일주일에 한번은 보는 것 같다. 이런 아이들을 a to z 까지 국가가 맡아 양육한 다음 나라에 필요한 인재로 만들어야 한다. 성년이 될 때까지, 아니 독립하여 자립할 준비가 될 때까지 보육원은 한 아이의 집이 되주어야 한다. 군인이 필요하면 군인, 기술자면 기술자, 과학자면 과학자.
플라톤의 공동양육이 생각나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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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모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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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 9년 만에 영화 <매트릭스>를 다시보며, 짧은 에세이를 남긴다. 아마 9년 전의 글이 있다면 그 전과 후의 관점, 영화를 보는 관점, 맥락이 많이 달라져있지 않을까 싶다. 
영화 <매트릭스>의 교육철학적 해석 - 극복하는 인간!

  모두가 주지하듯, 매트릭스의 큰 주제는 빨간 약 대 파란 약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이 영화의 모든 주제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없고 그 외 다양한 많은 것들이 담겨 있음은 자명한 사실이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위 “진부”하다고 할 수 있는 이 케케묵은 주제를 선택한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다. 바로, 이 주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중요한 화두를 우리에게 던져주기 때문이다. 차근차근 살펴보겠다.

  빨간 약은 진리를 상징하며 파란 약은 거짓을 상징한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행복을 목적적으로 추구하는 존재자(최고선으로서의 행복,eudaimonia)라고 가정하고 또 이것이 참이라고 가해보자면 이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질문은 다음과 같다. ‘행복(치)은 진리(치)와 비례하는가?’ 여기서 만약 행복치와 진리치가 비례한다고 한다면 다시 두 가지 경우가 나타난다. 이는 행복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의 차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 만약 진실된 행복만이 나에게 참된 행복을 준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라면 빨간 약을 선택할 것이다. 진실된 행복만이 나에게 참된 행복을 준다고 생각하는 입장일 것이다(a). 반면 그것이 참이든 거짓이든 상관없이 나에게 행복을 주는 것이기만 하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하다는 입장일 경우파란 약을 선택할 것이다(b). 아마 극중 인물에서 사이퍼가 이에 속할 것이리라.

  다음으로, 진리치와 행복치는 일치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지닌 측이 있을 것이다. 이 역시 마지막의 최종적 결과는 두 가지로 나타난다. 만약 진리치가 행복치와 무관하게 추구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빨간 약을 선택하게 될 것이다(c). 반면 진리치와 행복치는 전혀 상관관계가 없다고 규정한 상태에서, 만약 진리치를 선택할 경우 나의 삶에 고통이 야기될 것이 자명한 것으로 결론지은 상태인 자의 경우는 당연히 파란 약을 선택할 것이다(d). d의 경우는 계산되는 행복(쾌락)의 양에 따라 파란 약을 선택할수도, 빨간 약을 선택할 수도 있겠다. 지금까지 ‘진리치는 행복치와 비례하는가’하는 질문과 ‘빨간 약 대 파란 약’이라는 선택지를 통해 총 네 가지의 경우를 도출하였다. 나는 여기서 우리가 교육철학적으로 주목해야할 바는 바로 (a)와 (c)의 인물상에 있다고 판단한다. 그리고 경계해야 할 바는 (b)와 (d)의 인간상에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밝힌 바와 같이, (a)인물상은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이다(대전제). 그리고 행복은 참된 실상 속에서 얻어진다고 파악하는 인물이다. 즉 행복이라고 다 같은 행복이 아니라는 바를 함축한다. 전형적인 학자적 인간상이라 할 수 있다. 공리주의 사상가 존 스튜어트 밀의 말을 잠시 빌리자면 (a)형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이야말로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자의, 진정한 쾌락’, ‘고급 쾌락’, ‘지속 가능한 쾌락’이며 (b)형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은 ‘속박된 저급한 쾌락’, ‘육체적 쾌락’, ‘감각적 쾌락’이 되겠다. 매트릭스 속에 들어간 인간들이 느끼는 쾌락은 사실상 저급한 쾌락에 지나지 않는다. 전형적인 돼지 같은 인간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맹목적으로 행복(쾌락)만을 추구하는 인간인 셈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교육적으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인간상의 방향은 다름아닌 a인 것이다.

  다음으로, c인간상을 살펴보겠다. 밝힌 바와 같이, c인간상은 역시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이다(대전제). 그런데, 그가 생각하기에 진리치와 행복치는 반드시 비례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때로는 진리치와 행복이 일치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인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극중 네오를 보더라도 그러하다. 참된 실상은 성분을 채 알 수 없는 죽을 먹으며 살고 있으나, 가상 세계인 매트릭스에서는 나름대로 인간답다고 할 수 있는 식사를 먹을 수 있다. 이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리를 선택한 것은, 곧 진리는 쾌락, 행복 등의 그것과 무관하게 추구할만한 가치가 있다는 판단이 선행되어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이는 혁명가적 인간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 반면 d의 경우는 기회주의자적 인간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교육적으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인간상의 방향은 다름아닌 c인 것이다.

  이를 우리의 현실 역사와 비교해보면 흥미로워진다. 우리내의 역사 속에서 a,b,c,d의 인간형을 모두 살펴볼 수 있다. 특히 주목해야할 시점은 해방전후사라고 할 수 있겠다. 해방 전후로 여운형, 김구와 같은 a(학자)형 인간이 있었으며, 전통 대지주 혹은 친일 지주, 해방 후 재벌그룹 등을 대표로 할 수 있는 b(돼지)형 인간상이 있었으며, 이봉창, 윤봉길, 그 외 항일운동과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던 c(혁명가)형 인간이 있었으며, 이승만을 비롯한 친일제파와 친미제파, 親-자본주의파로 대표될 수 있는 d(기회주의자)형 인간이 있었다. 이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a와 c의 인간상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 긍정적이라는 사실이다. 또, b와 d의 인간상이 득세하였을 경우 벌어진 다양한 역사적 사태들을 반성할 수 있다. 이를테면, 을사늑약과 한일합병, 해방 후에는 신탁통치와 미군정기, 미소 분할 점령의 사태, 전쟁 후에는 군 독재정권의 난립이 그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할 것이 있는데, a인간상과 c인간상을 비교하여 더 훌륭하다고 말할 수 있는 인간상은 바로 c인간상이라고 것이다. 만약 행복이 진리치와 비례하며, 참된 진리속에서 얻어지는 행복만이 우리에게 참된 행복만을 준다고 생각하는 입장에서 보자면 빨간 약을 먹고 고군분투하는 것이 연역적으로 지극히 타당한 것이 된다. 반면, c의 경우는, 말 그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위한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나에게 해가 될 것임이 자명함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만행으로부터 투쟁을 해왔고, 나에게 해가 될 것임이 자명함에도 불구하고 미제로부터 투쟁을 해왔고, 나에게 해가 될 것임이 자명함에도 불구하고 독재자로부터 투쟁하여 민주주의를 이룩하였다. 나에게 해가 될 것임이 자명함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사회의 부조리로부터 투쟁하며 더 나은 사회를 추구하였다. 나에게 해가 될 것임이 자명함에도 불구하고 친일 친미 기회주의자와 독재의 잔재로부터 투쟁하여 민주주의를 한층 더 성숙시켰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 수 있는 결론 또한 도출되지 않는가? c인간상이야말로 고귀한 격정의 사나움을 쾌락과 고통에 대한 통제(절제)와 인내(용기)로 승화시킨, 즉 c야말로 올바로 양육된 thymos를 지닌 인간이며, c야말로 자기 자신을 극복하고 인간 자신과 세계를 긍정하여 나의 삶에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의미를 완성시키는 주인의 역할을 하는 존재, 그러니까 현실의 고통, 쾌락(행복)과 진리치의 불일치성에 고통스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결단을 통해 그 고통 앞에서 환하게 웃는 자로 변화된 사람, 즉 반대의 가능성을 향해 능동적으로 기투하는 자! 바로 위버멘쉬(Übermensch, overman)적 인간상에 다름이 아닐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교육을 통해 우리가 육성해야 할 최종적 인간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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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m.1ga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8216


무엇이 옳은 것일까?


 두 가지 "옳음"이 충돌한다. 하나는 시민단체 및 학계의 것, 다른 하나는 지역주민의 것이다. 전자에서는 근대 문화유산의 보존 필요성을 주장하는 것이고, 후자에서는 주차장이라는 실용을 주장한다.

 이런 사례는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다. 시민사회 및 학계에서는 평창의 500년 원시림을 보존할 것을 주장한 반면, 지역주민들은 개발할 것을 주장하였다. 

 지금까지의 경향성을 보면 늘 보존보다는 개발, 성장, 경제, 편리의 논리가 승리해왔고, 예측하건대 이 뉴스에 나온 근대 건축물도 머잖아 사라지리라. 그 자리에는 늘 그렇듯 작은 팻말과 사진 한 장이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진짜 승리인가? 누구의 승리인가? 지역주민의 승리인가? 건설업자의 승리인가? 공직자의 승리인가?)

 시민단체는 보고 지역주민은 못 본 것은 무엇인가? 그들의 입장차이를 좁힐 방법은 없는 것일까? 우리는 유럽이, 중동의 몇 나라들이, 그리고 일본이 과연 옛것을 부수고 그 위에 새것을 세워 지금의 문화 선진국이 된 것인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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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3&oid=028&aid=0002365711


니체에 의하면 예술은 현실의 한계로부터 오는 일종의 불안을 대안적으로, 그러니까 임시적 위안감을 안겨 주는 매개물이자 수단이다. 다시 말해, 인간으로서 지닌 현실의 불완전함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고, 비록 현실에서는 그렇지 못할 지라도 예술을 매개로 하여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준다. 이를테면, 니체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최악의 상황에 빠진 인간이 능숙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싶다는 소망은, 현실에서는 충족될 수 없는 욕구이다. 현실에서는 너무 당황스러워서, 그래서 아름다운 말 따위는 도저히 입에 담을 수 없을 듯한 그런 생사의 벼랑 끝에서, 비극의 주인공은 이런저런 말과 논거와 웅변적 몸짓, 그리고 전체적으로 맑은 정신을 보여 주어 우리를 기쁘게 한다. 이런 자연으로부터의 일탈은…” 


 여기서 최악의 상황에 빠진 인간은 바로 현실 속의 우리 보통의 인간들을 말한다. '능숙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싶다는 소망'은 현실적으로는 결코 그럴 수 없는 존재인 나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우리의 헛된 희망을 뜻한다. 즉 현실에서는 결코 충족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최소한 보통의 사람들은 그렇다. 물론 어떤 신화나, 스토리, 위인전에 등재된 극소수의 인물들은 제외하고 말하는 것이다. 대다수 보통의 존재인 우리는 매 하루 하루를 "생사의 벼랑 끝"에서 살고 있다. 항상 어떤 것이 내게 다가올 것인지, 어떤 위험이 혹은 어떤 긍정 또는 부정적인 것이 내게 다가올 것인지 쉽게 예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드라마를 찾고, 극장을 찾아가고, 헐리우드 액션극을 찾아보는 것이다. 이것들은 현실을 잊고 잠시나마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주는 예술물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니체는 넒은 의미의 예술로 음악, 리듬에 대하여 말을 한다. 음악과 시는, 사실은 비합리적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비합리적 행위속으로 스스로를 던지는 것은 다름 아닌 그것으로부터 "이익"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가진자들의 이익이란.


“인간은, 자신이 음악을 들을 때 경험하는 근원적 압도감에서 이익을 얻고자 했다. 리듬은 말하자면 하나의 강제력이다. 리듬은 그것에 굴복하고, 또 영합하도록 하는 누르기 어려운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이는 니체가 우리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던져주는 촌철살인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그런 것이다. 우리의 소비사회, 천민적 자본주의 세상을 날카롭게 비판할 수 있는 무기를 제공해준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광고의 대홍수 속에서 살아간다. 마트나 백화점, 기타 소매점, tv에서의 광고, 라디오에서의 광고를 생각해보자. 그곳에는 항상 리듬과 음악이 있다. 그런 리듬은 우리로 하여금 억누르기 어려운 욕망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이러한 식의 예술들은 비유하자면 “마약”, “아편”과도 같은 것들로, 우리의 이성능력, 지성을 통해 제거하고 없애나아가야 할 속성의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류의 예술, 그러니까 우리로 하여금 억누르기 어려운 욕망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예술들은 우리를 도취시키며 우리를 강하고 고양된 느낌의 순간으로까지 강제로 끌어올리려고 노력한다. 즉 기득권자, 가진 자들의 잔악한 횡포인 것이다. 그것은 마르크스의 말을 빌리자면 “인민의 아편”이다. 인간에게 환상의 행복인 가짜 리듬과 가짜 예술을 제거하는 것은 인간의 진정한 행복을 위한 필요조건인 것이다. 


 다른 측면에서 예술은 우리를 압도하고 휘어잡으려 한다. 현실의 삶에 피곤하고 그런 삶에 소위 말해 “찌들어”있는 우리 존재들에게 그러한 도취 수단은 우리로 하여금 술에 취한 듯, 우리의 영혼을 그렇게 만들어버리고자 한다. 열광하게 하고, 감격하게 만든다. 그러면서 우리로 하여금 ‘그것은 나쁘지 않다’, ‘그것은 즐거움이다’, ‘그것은 교양이다’ 라고 말하게끔 조장한다. 이와 관련하여 대표적으로 무수히 많은 예능 프로그램들이 있다. 현대 예능 프로그램이 대표적인 것들이다. 이를테면, '무한도전', '런닝맨', '라디오스타', '해피투게더', '1박2일' 등이 있다. 이들은 속물적이며, 우리를 도취하게 만든다. 사실 우리는 그것을 보며 구토감을 느껴 마땅한 것들이다. 거기에 자기 삶은 빠져 있으며, 그저 공허한 것, 도취인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스스로도 충분히 행복과 아름다움, 기쁨, 즐거움, 유머를 체험하고 경험하고 있는 사람에게 과연 그러한 예능 프로그램들이 필요할까? 단연코 아니다. 자신의 삶이, 그러니까 내가 생각하는 이상과 현실의 갭이 크지 않은 사람들에게, 과연 그 갭을, 그 갭으로부터 오는 불안이나 불완전함의 느낌을 잊게 해줄 어떤 카타르시스감이 필요한가를 생각해보자. 결코 그렇지 않다. 그런 사람에게 그것은 필요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충분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미 내 안에 웃음을 가지고 있다. 즐거움을 이미 가지고 있다. 우리는 그런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비유를 하자면, “아이언맨에게 극장의 아이언맨이 무슨 소용인가?” 이미 충분히 즐거운 자에게 그런 식의 일회성이고 소모적이고, 소비적이고, 허무적이고, 인위적이고, 조약하기 짝이 없는,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것들은 천박하기 이를 데 없다. 천박하기 이를데 없는 그런 즐거움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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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중심 동북아 체제 정비론 5단계론  (0) 2021.11.05
Posted by 모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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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3일. 후원하고 있는 단체 중 하나인 그린피스의 사무총장인 제니퍼 모건이 한국을 방문했다. 대담시간에 몇 가지 질문이 있었으나 기회가 주어지지 못하여 아쉽다. Q1: 그린피스 활동 보고서를 보면 과학자, 엔지니어가 주축을 이루어 화석연료와 기후변화, 생태계, 기타 환경문제와 관련한 과학적 근거와 데이터를 축적하는 작업을 꾸준히 그리고 활발하게 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그런데 그린피스 이념에 대한 철학적 정립이나 윤리학적으로 정밀한 이론적 연구작업에 대한 보고서는 본 적이 없다. 그린피스 내에서 이와 관련한 철학자 및 윤리학자들의 연구작업은 없는 것인가?

 Q2. Q1의 질문은 그린피스가 지향하는 가치와 이념을 대중 일반 그리고 지역사회에 효율적으로 설득하고 또 학생들을 교육하는 방법과 연결된다. 사실 현대 사회는 항상 경제논리가 이기는 사회이다. (먹고 사는 문제) 그린피스가 추구하는 가치와 이념은 현재와 미래사회, 미래 인류를 함께 끌어 안고 깊이 숙고하는 태도이며 그것은 윤리적 방향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전 인류가 따라야만 하는 방향(명령)임에도 틀림이 없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는 합리적 이기주의자들이 분명 적잖이 있다. (그리고 그런 이들이 지어낸 여론은 반생태적 정책과 문화를 낳는다.) 그들은 교사들에게 말한다. "왜 윤리적이어야 하는가? 왜 생명과 생태를 고려해야 하는가? 당장 나, 아니 내 주변, 혹은 내 자식 세대, 혹은 나의 계보만 잘 살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리고 내게 충분히 그럴 능력을 지니고 있다면 왜 내가 존재할지도 존재하지 않을지도 알 수 없는 미래세대를 위해 나의 욕망,욕구를 자제해야 하는가?", 혹은 "당장 먹고 사는 문제가 달려 있는데 환경과 생태와 윤리가 밥을 주나 돈을 주나?" ("왜 아껴야 하지? 당장 오늘 내일 죽을지 살지도 모르는데, 펑펑 쓰다가 죽으면 그만 아닌가? 미래 세대의 고통은 내가 죽은 다음 아닌가? 그들의 고통은 나의 고통이 아니다")

 엔지니어와 과학자들이 양산해내는 과학적 데이터, 수치, 근거만으로는 이들을 설득할 수 없다고 본다. 사실 이러한 데이터들은 너무 무미건조하게 느껴진다. 당장 돈이 된다면 500년된 원시림을 파괴하는 인간들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항산의 문제에 얽메어 당장 지금도 수십만톤의 일회용품을 양산하고 소비하고(버리고) 있다. 그런 토대 위에 자리잡고 살아가고 있다. 그런 이들을 설득하고 그린피스의 가치 내로 포섭할 수 없다면 인류의 미래는 묘연한 것이 되어 버린다. 따라서 이들을 설득하고 실천적이고 계몽된 인간을 만들기 위해서는 데이터 이상의 것, 그러니까 정밀한 윤리적 철학적 성찰과 이론적 작업이 필요할 것이라 본다. 결론적으로, 합리적 이기주의자들인 아이들과 대다수 기성 세대들을 어떻게 설득해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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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모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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