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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2019년 8월 즈음) 고려대학교 커뮤니티에서 정은혜씨의 민주당 비례대표와 의원직 승계 대한 비아냥과 인격모독이 판을 쳤던 적이 있다.
최근에 고려대학교에사 세종캠에 대한 혐오주의와 천박한 엘리트주의가 다시금 기어 오른다는 기사를 보고,
그때의 일을 회상하며 글을 정리한다.

"신라대는 어디에 있는 대학인가요? 농담 아니고 진짜 처음 들어보는 대학인데"
"역시 고려대보다 신라대"
"줄을 잘 서니까 신라대 나와서 금뱃지도 다네요ㅋㅋ"
"중립기어를 넣으려 해도 적폐 냄새가"
"서울에서 신라대 가는 것도 드문 일인데 신라대 나와서 국회의원 하는 것도 참"
"학력세탁이 예술이네 순식간에 하버드생 행"
"정치권 줄 서니까 강력한 추천서 받고 명문대도 갔군요 ㅋㅋ"
"신..뭐요?"
"집에 돈은 정말 많나 보네요. 후원금 내면서 딸 밀어넣은 모양새인데"

위의 사례들 모두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실제로 했던 진술들이다. 이처럼 학벌로 비꼬며 사람을 모욕주는 것은 정말 지극히 비열하고 지성인으로서 어울리지 않는 행태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개인의 후천적 노력, 능력으로 지금의 위치에 있는 것을 수 있는데, 학벌로 비꼬는 것은 참으로 저급하고 천박한 행동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다.

신라대를 나와도, 아니 지방 전문대를 나왔다고 하더라도, 후천적 노력으로 좋은 위치에 오를 수 있는 것이니까.

고려대, 서울대 나왔다고 다 인간됨이 훌륭한가? 그렇지 않다고 본다. 사람 탈만 썼을 뿐 그 똑똑한 두뇌로 더 독버섯같고 이기적이고 금수같이 행동하는 종자들을 우리는 무수히 보아왔다. 학벌을 가지고 차별하고 이렇게 놀리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도리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즉 학벌주의는 참으로 편벽되고 수구같은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

회상해보자면 정은혜씨는 그래도 나름 신라대에서 연세대 대학원, 하버드대 대학원싸지 졸업할 실력을 키웠다고 보여진다. 필자가 보기에도 이 정도 하려면 자본도 자본이지만 학부 수준과 실력을 극복하기 위한 개인의 피나는 노력 없이는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연세대나 하버드대 정도면 입학도 쉽지 않을 뿐더러 그냥 돈 내고 다닌다고 졸업장 주는 곳도 아니라고 판단한다. 또한 경력을 보더라도 아래서부터 차근차근 올라온 사람이라고 판단된다. 청년 정치인, 청년 정책단장.. 공부만 잘한다고 바로 들어가는 자리 아니다.

추천서와 관련하여, 인맥이 작용했을 수 있다는 혐의도 있다. 그런 혐의는 십분 이해를 한다. 또한 대학원 입학이 학부 난이도와 비교해 수월하다는 점은 옳다. 하지만 소위 '급' 낮은 학부 출신일수록 명문 대학교에서는 대학원 입학 시 본 교의 교육과정을 무사히 마칠 수 있을지를 더욱 엄격히 따지게 된다.(면접에서) 또한, 진학이 쉽다고 졸업까지 쉬운 것은 아니다. 졸업을 위한 논문도 마찬가지이다. 졸업논문은 학교 및 지도교수의 명예와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졸업논문의 지도교수 도장은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관련하여 종합해보자면 정은혜씨는 최소한 정치학 분야에 대한 석사급의 전문성 내지 실력은 갖추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인맥과 관련하여도 첨언하자면, 일단 인맥이 성공적이기 위해서는 그 사람에 대한 조직 내부적인 인정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특히 정은혜씨의 경력/이력을 보면 그러하다.

우리는 고려대학교에서 또 다시 천박한 엘리트 의식을 만나게 되었다. 세종캠에 대한 배제의식과 폄하를 볼 때부터 심히 느낀 부분이다. 참으로 적나라하고 노골적인 천박한 엘리트 의식이 판을 치고 있다.  고려대학교 학생들은 학벌 하나를 가지고 그 사람의 이전과 이후의 모든 노력을 폄하하는 경향이 있으며, 평생의 꼬리표로 낙인 찍어버리는 행동을 한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의식에서 제거해야 할 거만과 엘리트 의식이다.

정치에 관심 있는 학생들이 이처럼 편협하고 천박한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앞으로 고려대학교 출신의 교우가 정치를 하게 될 때 표를 주어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부분에 대한 증거로 보여지기도 한다.

인간의 격이라는 것은 성실성으로 표현될 수 있다. 하지만 성실성만이 사람됨을 전적으로 대표하는 것도 아니고, 또 성실성과 좋은 학벌이 항등식으로 성립하는 것도 아니다. 비례대표와 의원직 승계의 근본적 문제를 가지고 비판하는 것은 타당하다. 그러나 한 사람의 인생을 학벌 하나만을 가지고 평가절하하고 낙인찍는 것은 참으로 비열하고 천박한 엘리트의식, 우얼의식의 다름이 아니다.

서울대, 고려대 등 명문대 출신에게 나라를 맡기는 것이 두려워진다. 그 좋은 이성능력을 가지고 얼마나 또 사람을 도구적으로 조종하고 가르치려들고, 간사하게 자기 권력과 이익을 탐할지 뻔히 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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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모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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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반도 핵무장에 대한 단상, (보론: 종속이론에 대한 논의)

국제정세를 보면 알 수 있다. UN이 얼마나 비도덕적이거나 무기력한지에 대한 부분을 말이다.

국가(나라)는 존엄성을 지닌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큰 나라이든, 작은 나라이든, 도시국가이든. 마치 개개인의 인간 생명성이 절대 존엄한 고귀성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개개의 나라 역시 규모, 경제력, 종교 등을 떠나 오직 국가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 존엄성을 보장받아야 마땅하다. * 이것은 자연 법칙이 아니라 당위로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명제이다.

사실상 이것을 실현시키는 것이 UN의 정당한 역할이었다. 그러나 UN은 실질적으로 그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이에 따라 필자는 핵무기만이, 강국이 소국을 함부로 대하지 못할 수 있는 열쇠, 즉 상호 주권과 존엄성을 보장할 수 있는 열쇠라고 이해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 핵무기야말로 국제 분쟁에 있어서 최종적인 '법관', '판단자' 역할을 할 수 있다.

생각해보면 다음과 같다. 상호 간 확증 파괴가 가능할 만큼의 핵무기를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비윤리적 액션을 취할 수 있겠는가? 혹은 어떤 조건이 있어야 국가 상호 간(관계에 있어서) 비윤리성을 절대적이고 항구적으로 제거할수 있는가?

이를테면, 팔레스타인 민족이 지금과 같은 상태에서 재래식 핵탄두를 보유하고 있었다면? 아니, 애초에 이집트, 시리아, 리비아 등 중동 국가들이 핵무장을 했더라면 영국과 미국 등에 의해서 지금처럼 중동이 피폐해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만약 팔레스타인이 핵무장을 하고 있었다면, 지금처럼, 침략자인 이스라엘과 유대인들로부터 고향을 약탈당하고 빼앗기고, 주권과 자유를 잃는 상황은 없었을 것이다.

남아메리카 전체가 확증 파괴가 가능할 만큼의 핵무기를 보유한 국가들로 구성되어 있었다면, 과연 미 제국의 자본이 남미를 경제적으로 종속시키는 일이 가능하기나 한 일이었을까?

티벳 민족이 한 서너 개의 핵 탄두라도 지니고 있었다면 지금처럼 민족이 강제로 병합되는 일이 발생했을까? 단연코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까지 예시나 사례로 제시한 것들 모두 사실상 모두 UN에서 적절히 개입하여 국제 사회의 정의(justice)를 다시금 바로 세웠어야 했던 일들이다. 결국 각종 이해관계로 인하여 UN은 제 기능을 못한 것이다.

결론은 이렇다. UN 회원국 모두 평등하게 핵무기를 보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핵 무기만이 지구의 최종적 헌법이자 세계 헌법이 될 수 있다. 흔히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린다는 말을 하고는 한다. 대국이 소국을 건드리는 순간 최소한 한두발의 핵무기라도 날릴 수 있는 꿈틀거림의 힘은 쥐어줘야 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역시 북한과 중국에 정당하고 옳게 대응하기 위해서는 핵 무기를 개발하고 무장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비로소 북한의 협박과 공갈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고, 중국의 야만성에 대하여 저항할 수 있으며, 궁극에는 동북아시아의 국제관계에 있어서 균형과 정의, 항구적으로 윤리성을 지닌 국제 관계를 수립할 수 있을 것이다.

진정한 평화는 힘의 균형에서만 가능하다.

*평화에 대하여, 그리고 종속에 대하여.
모두가 무기를 내려놓고 밥 잘 먹고 잘 살게 하는 것이 최선의 평화일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지금의 자본주의 경제구조 속에서 '밥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하다. 바로 이윤율을 의한 희생이다. 이를테면, 저렴한 임금의 노동시장을 필요로 한다거나, 혹은 생태나 인간 건강에 파괴적일 수 있는 행위들을 규제하는 다양한 규정들을 완화하여 다국적 기업에게 유리한 입지를 제공한다거나, 또는 많은 수요를 창출하여 큰 시장이 되어야 하는 것 등이다.

혹자들은 지금의 구조는 그러한 약탈적 구조가 아니라고들 한다. 그러나 근본을 보자면 과거와 비교했을 때 외연만 달라졌을 뿐, 본질은 그대로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노예와 주인의 관계,가 근러자와 기업가의 관계로 바뀌었을 뿐이다. 국제관계에서는, 종속된 국가와 거대국가(혹은 자본기업 또는 기축통화를 장악한 거대자본주의국가)의 관계로 그 외연만 바뀌었을 뿐이다. 다시 말해, 그저 약탈의 다름 아닌 그 구조가 가시적인 잔인성에서 비가시적인 잔인성으로 변모한 것일 뿐이다.

다시 돌아와, 핵무장이 아닌 방안으로는 즉, 지금의 국제정치의 비윤리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힘을 가진 자(국가)가 힘을 적게 가진 자(국가)에게 힘의 불균형으로 인한 어떠한 손해도 초래하지 않을 것임을 우선적으로 천명하고 확증해주어야 한다. 이를테면, 미국이 북한에게 주권을 보장할 것임을 확증하는 것이며, 중국이 티벳에게 주권 보장을 확증하는 것이다. 또한,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주권 보장을 확증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국가 간 약속은 어떻게 보장하는가? 바로 내가 약속을 어길 시 나를 처벌하거나 제재할 수 있는 확실한 수단을 상대에게 주는 것 뿐이다.)

하지만 미국, 중국, 영국 등을 위시한 강국들은 국제사회에서 그렇나 액션을 취하지 않는다. 따라서 현재의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가능성 있는 열린 위험성(정치문화경제적 존속, 체제 존속의 위험, 주권의 위협 등) 을 감수하고 무기를 내려놓으라는 것은 참으로 한심한 주장이 아닐 수 없다. 즉, 세계가 급진적으로 국제 정치구조의 변화를 동시적(* 동시적이라는 것의 성격은 아주 중요하다)으로 보여주지 않는 이상 약소국들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별로 없는 것이다.

한편, UN 상임 이사국을 비롯한 핵무기 보유국들이 핵포기 선언을 동시적으로 하고 동시적으로 파기하는 것을 상상해보는 것은 어떠한가? 그리고 범 세계적 상호불가침 조약과 평화조약을 맺는 것은 어떠한가? 사실상으로 참으로 비현실적이라 할 수 있따. 더 강한 무기를 가진 나라가 조약한 무기르 ㄹ가진 나라에게 먼저 무기를 내려 놓으라 한다면 받아들일 수 있는가? 아닐 것이다.

정리하자면, 지금의 비윤리적 국제정세는 치킨게임과 같다. 미국, 중국, 이스라엘, 영국 등은 대형 덤프트럭을 몰고 있고 한국, 팔레스타인, 북한 등은 소형 모닝을 몰고 있다. 그런데 이 와중에 주변 사람들이 모닝을 몰고 있는 사람더러 먼저 핸들을 돌리거나 브레이크를 밟으라고 한다. 모닝을 몰고 있는 사람 입장에서는 열린 위험성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상징적 비유이지만 결국 지금의 이 치킨게임에서 빠져나올 방법은 양자 혹은 전체가 동시에 핸들을 돌리거나(핵무장을 포기하거나), 혹은 자본주의 체제나 비윤리적 국제관계에 대한 근본적 변화를 도모(브레이크 밟기) 하거나, 혹은 힘의 균형(동시 핵무장)을 통해 치킨게임의 가속도를 줄임으로써 갈등을 방지하는 방법 뿐이다. 이중에 (이상적이 아닌 현실적으로) 그나마 가장 현실적이라 할 수 있는 길은 후자라고 필자는 판단한다.

최악은 부딪히는 것이고 차악은 어느 한 쪾이 어떤 형태로든 지배다앟거나 종속당하는 것이다.

*추가: 종속에 대하여
종속이론이 폐기됐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필자의 생각이 일정 부분 종속이론의 영향이 들어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폐기됐음'이라는 것 역시 아직 그저 사태를 바라보는 하나의 입장이나 방법일 뿐, 그것이 확증된 것은 아니다. 하물며 자연과학이론마저 반증가능한 시대에, 사회이론을 가지고 이미 폐기된 이론이니 주장에 설득력이 없다는 이유로 이를 비판한다면, 그것은 확증편향이 아닐 수 없다.

*반론에 대한 반론
반론으로 제시된 코스타리카의 사례에 대한 반론을 하겠다. 코스타리카는 인텔이라는 거대 자본 회사에 개방한 이후 과감한 투자와 인푸라 확충으로 결과적으로 치안수준, 국갖거 인프라, 소득 등이 남미에서는 손 꼽히는 나라가 됐다는 사례이다. 다시말해, 인텔에 의해 교역량이 증가하고, 인프라가 갖춰지면서 물류의 중간지대로서 역할도 하게 됐다는 점이다. 그리고 선진국 그룹과 개도국 그룹 간 소득격차가 어떻게 변하는지에 대한 연구의 결과, 종속이론이 폐기되었다는 반론이다. 즉, 종속 이론대로라면 코스타리카는 실패 사례가 되었어야 한다는 점이다.

해당 부분에 대한 반론 내지 보론을 하자면 다음과 같다.
즉, 거대 자본의 유입이 성공적으로 정착한 경우도 없지 않다. 그러나 성공적이지 못했던 부분을 우선적으로 논하고 해결해야 그 말의 순서가 맞을 것이다. 100% 성공이 아니면 그 이론이 참이 아니며(연역적 성공사례가 아니며), 또한 실패 사례를 통해 진보하는 것이 이론과 탐구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즉 99%의 실패 중 1%의 성공이 있었다고 하여 그 1%의 실례를 근거로 이론이 옳았다고 말할 수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우리는 99%의 실패사례에 주목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99%가 성공했다고 하여도 마찬가지이다. 1%의 실패 사례가 있다면 그 이론은 (연역적으로) 틀린 것이며, 따라서 여러 방향에서 그 원인을 찾아 해결해야 한다. 만약 1%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해결할 수 없다면 우리는 그 이론을 폐기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코스타리카의 사례는 종속이론이 현실을 잘 해석해주고 있음을 오히려 방증해주고 있다.

다시 돌아와, 어떻게 보면 성공적인 사례들은 자본의 독점과 종속 심화라는 현상으로부터 물론 지혜롭게 극복한 사례라고도 말할 수 있을 뿐, 그것이 종속이론의 실패를 증명하는 것은 아니라고 판단한다. 그러니까, 다국적 자본주의에로 편입된 결과로 반전되고 향상된 부분이 있는 반면 종속된 부분도 또한 있다는 것을 우리는 보아야 한다. 많은 사례에서 발전된 부분의 이면에 종속된 부분의 폐해가 드러나고 있다.

일례로, 에티오피아의 경우, 커피 자본의 유입과 함께 전체적인 자본의 총량은 늘어났지만 커피 재배면적의 증가로 인해 식량 곡물 생산량이 감소하였고 이에 따라 때때로 기아에 시달리는 현상을 겪게 되었다. 커피 재배로 받는 푼돈 몇 달러로 겨우 입에 풀칭르 하는 현상이 있으며, 이마저도 해외 식량곡물을 수입하기 위해 쓰이고 있는 상황이다.

또 다른 사례로, 우리가 현재 가지고 놀 수 있는 축구공, 농구공, 운동화 등 많은 부분이 현재까지도 개발도상국에서 제작되고 있다. 단 돈 몇 백원에 제작되거 그 곳 노동자들이 받는 돈은 하루 2~3달러에 불과하다.

현재 남아프리카에는 수많은 GMO 작물들이 실험 및 실제적으로 재배되고 있다. 경제적으로 해외 선직국 및 거대 시장으로 수출하기에 유리한(수요가 있는) 상품들을 위주로 생산하고 있따. 모산토 또한 GMO로 인한 토양오염(DNA오염)으로 인해 GMO 영향을 받지 않은 작물을 키우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는 상황이다. (이는 종의 다양성을 해치는 잔인극악무도한 행위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커피가 이토록 일반화되고 때로는 놀라울만치 저렴하게 마실 수 있는 것은 바로 개발도상국들의 자본 종속이라는 원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네슬레의 분유 사태를 한번 살펴보자. 이 역시 자본 종속의 폐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남미에서 물(수도사업)의 민영화로 인한 폐해도 적잖이 드러나고 있다. 이 역시 해외 거대 자본의 유입으로 인한 결과이다.

우리나라는 어떠한가? 외국인 노동자들을 절며한 값에 들여와 최저임금에 노동을 부리고 있다. 이것도 종속이다. 개성공단은 어떻나가? 역시 종속이론으로 바라볼 수 있다. 중국으로, 베트남으로 우리의 공장을 이전하는 것은 어떠한가? 이것 역시 종속이다. 기업들이 공공연히 자행하는 최저가 입찰제, 단가 후려치기, 하청의 재하청, 비정규직 근로자 등 모두 경제 구조적 힘을 독점적으로 쥐고 있는 기업들로부터 행해지고 있는 자본의 폭력이자 종속이다. 이는 곧 종속 및 독점 강화의 현상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필자는 자본의 종속을 다름 아닌 바로 다음과 같이 정의내리고자 한다. '값 싸고 저항할 수 없는 힘 없는 노동을 경제적이라는 이유로 활용하는 행위 일체'를 뜻한다. 더 나아가, '한 개체를 목적 그 자체가 아닌 수단으로서 대하는 행위 일체'를 필자는 종속이라고 정의내리겠다.

우리나라에서 시급 1만원을 주고 노동자를 고용한다면, 우리가 공장을 베트남으로 이전하든 중국으로 이전을 하든, 똑같이 우리나라에의 1만원에 상응하는 대가를 그들에게 지불해주어야 한다. 이것이 윤리적이며 공정한 것이자 올바른 것이고 정의이다. 그런데 실상을 그렇지가 않다. 경제논리와 시장논리에 따라 다만 합리적으로 의사결정을 할 뿐이다. 그리고 이렇나 합리성과 이윤율에 반대되는 이론을을 그들은 이미 폐기된 이론이라고 치부하며 거부하고 있다.

국내에외는 여전히 이 종속으론을 연구하고 이를 통해 현상을 해석 설명하려는 사람들이 필자를 포함해 여전히 많이 있다. 국내외의 여러 이슈들을 적절히 해석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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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생애와 저술 

2   사상적 배경지식-데카르트 답습 

3   생각과 감각의 관계

     3.1   감각론

     3.2   상상론

 

4   말브랑슈의 신 

     - 유일한 참된 원인으로서의 신 cf) 기회원인론

5   말브랑슈와 인간의 자유

6   신 안에서의 영원한 진리의 파악

7   말브랑슈, 스피노자, 데카르트, 버클리(말브랑슈의 업적) 

 

 

1   생애와 저술

  1638년 파리 생. 라 마르셰(La marche)대학에서 철학을 공부, 그곳에서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대해 비호감, 이후 소로본에서 신학을 공부.

  1664년 목사로 임명되는 해에 데카르트의 유고 <인간론>을 접한다. 데카르트 철학에 큰 감명을 받고 데카르트 저술에 관한 공부를 시작. 

  말브랑슈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에, 보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플라톤주의, 아우구스티누스주의적인 전통 강하게 이끌리게 된다. 데카르트주의와 아우구스티누스주의로부터 받은 영감을 결합한 것이 그의 철학의 특징이다. 데카르트의 철학이 도달한 대부분의 견해가 모두 참이며 이 철학이 경험과 실재를 해석하는 도구로서 아리스토텔레스주의보다 훨씬 우위에 있다고 주장한 점에서 데카르트주의자이기도 하다. 말브랑슈는 철저한 기독교 사상가이다. 

  그는 데카르트주의의 철학을 새로운 종합을 구성하기 위한 도구로 간주하면서도, 아우구스티누스주의적인 전통[1]에 따른 철학자라는 인상을 준다. 그래서 단지 데카르트주의자, 단지 아우구스티누스주의자라고 분류하기에는 어패가 있다. 말브랑슈는 이 두 부류에 모두 속한다. 말브랑스 스스로는 자신의 철학은 아우구스티누스와 데카르트 그리고 스콜라철학의 반대가 종합된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사상에서 중세 스콜라 철학의 영향을 받았음 부인하기 어려워 보인다.

 

A.   생애

        i.        말브랑슈는 1638년 파리 생.

        ii.        라 마르셰(La Marche) 대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철학 공부-흥미를 가지지 못함.

        iii.        소르본에서 신학 공부.

        iv.        1660년 오라토리오 수도회 가입.

        v.        1664년 목사로 임명. 바로 그 해 데카르트의 유고작 [인간론]을 접한다.

        vi.        이어서 데카르트 철학에 큰 감명- 본격적인 공부 시작.

 

B.   저술

        i.        [진리의 탐구] (1674-75)

                 착각과 오류의 원인들을 탐구하면서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올바른 방법에 관하여 논의하다.

        ii.        [진리의 탐구에 관한 설명] (1678)

                  진리의 탐구에 이어 등장한 저술

        iii.        [자연 및 은총론] (1680)

                  기회원인론의 주장을 초자연적인 질서에 적용하는 것과 인간의 자유를 신의 은총의 효력과 조화시키는                      것 등의 주제가 다루어지다. 1689년 말에 가톨릭의 금서목록에 오르게 된다.

        iv.        [기독교적 성찰] (1683)

        v.        [도덕론] (1684)

                  오직 하나의 참된 도덕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기독교의 도덕이며, 스토아 학파와 같은 다른 도덕적 체계들                    은 참된 도덕성의 기준을 만족시키지 못한다는 주장을 펴다.

        vi.        [형이상학에 관한 담화] (1688)

                   말브랑슈 자신의 체계를 요약하여 설명하다

        vii.       [운동의 전달에 관하여] (1692)

                  순전히 과학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다.

        viii.      [신의 사랑에 관하여] (1697)

                   보쉬에(Bossuet)가 대단히 칭찬하였던 페늘롱(Fenulon) 신의 순수한 사랑에 관한 이론을 논의하다.

        ix.        [기독교 철학자와 중국 철학자의 대화] (1708)

                   신의 현존 및 본성과 관련된 주제를 다루었다.

        x.        [물리적 전() 운동에 관한 고찰] (1715)

                  말브랑슈 최후의 저술이며 얀센주의를 대변하는 부르지에(Boursier)의 말브랑슈에 대한 반박서인 [창조에                    관한 신의 활동 또는 물리적 전 운동에 관하여] (1713)에 답하기 위하여 쓰다.


[1] 아우구스티누스는 교부학 혹은 교부론의 대표자다.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중세의 사고 형성에 큰 역할. 플라톤의 위계질서의 원리(감각, 그림자, 이데아..)를 따름. 이를테면 가장 낮은 것은 물체, 그 다음 인간의 영혼, 그 다음 신. 이런 식. 그리고 신만이 가장 탁월한, 완전한 존재, 피조물은 불완전한 존재. 지식이라 함은 이처럼 불완전하고 변화하는 것으로부터 얻을 수 없다. 불완전하기 때문에. 

 

2   사상적 배경지식-데카르트 답습 
  말브랑슈는 두 종류의 실제가 있다고 말한 데카르트의 구별- 즉 정신적이고 비연장적인 실체와, 여러 가지 다른 형태로 변형될 수 있으며 운동 가능한 물질적인 실체 또는 연장성 사이의 구별을 받아들인다. 

  물질적인(비정신적인) 실체와 연장성[2]을 동일시함으로써 그는 물체의 성질에 관한 한 데카르트와 동일한 결론을 이끌어낸다. 그러나 이 사실이 감각적 지각들을 검토하면서 말브랑슈가 단지 데카르트의 주장을 그대로 따랐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물체에 관하여 상당히 자세히 검토함으로써 물체의 특징들을 나름대로 지적하고 있다. 

  또 말브랑슈는 진리를 탐구함에 있어 지켜야만 하는 몇 가지 규칙들을 제시한다. 이중 가장 중요한 일반 규칙은 우리가 확실한 관념을 지닐수 있는 대상들에 대해서만 추론을 해야 하며, 가장 단순하고 쉬운 것으로부터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데카르트를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는 감각은 서로 다른 네 가지 요소로 구별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네 가지란 1. 대상의 작용(예를 들면 개체의 운동과 같은), 2. 감각기관 및 신경-두뇌의 변화, 3. 정신 내에서 일어나는 감각 또는 지각, 4. 정신이 내리는 판단. 이 그것이다. 이에 대한 부가설명은 없다. [3]


[2] 외부 공간에 대한 느낌. 물질적인 것. 

[3] 이런 요소들은 함께 별현되고 또 순간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이들을 혼동하여 감각이 순전히 나의 정신 내에서 일어나는 정신적 사건이며, 나의 육체 또는 다른 어떤 곳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는 점을 잊어버리곤 한다- 오류. 그리고 이는 어떤 위계적 모습이라 볼수 있지 않을까 싶다.

 

3.   말브랑슈의 오류론-오류의 원인으로서 감각

말브랑슈에 따르면: 오류는 인간의 비참함의 원인.

즉(다시 말해) 이 세계에 악을 만들어 내는 것의 원인은 잘못된 원리-즉 오류에 있다.

  But) 이 말은 인간이 필연적으로 오류에 빠진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말브랑슈는 사람은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존재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 능력을 지닌 존재). 그 가능성에 대한 일반규칙이라 할수 있는 것은 데카르트의 그것과 유사하다. 이를테면 이런 것 : 우리는 자명하게 파악한 것을 제외하고는 다른 어떤 것에도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독실한 기독교도가 되기 위해서는 무조건 믿는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철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명하게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말브랑슈는 오류의 원인에 대해 검토하면서 먼저 인간의 지각능력을 살펴본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지각능력은 세가지 것이 있는데 : 상상력(상상력은 뒤에서 다른다), 순수오성[4], 감각이 그것이다. 이 요소들은 함께 발현되고 순간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혼동, 즉 오류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말브랑슈에 따르면 인간을 속이는 것은 감각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선입견이 우리를 속인다고 한다. 풀이하자면 사물과 우리 사이의 관계에서 물자체로서의 사물의 본성은 실제로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이 아닌데 우리의 선입견이 그것을 실제로 확실히 나타난다고 판단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말브랑슈의 말을 빌려 예를들자면, 온기를 느낄 때 우리는 온기를 느낀다고 믿는 사실 자체에 의해서 속임을 당할수 있다. 그 온기가 그것을 느끼는 정신의 외부에 있는 것이라고 판단한다면 우리는 속임을 당한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그는 감각은 서로 다른 네 가지 요소로 구별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는 반드시 감각을 동반하는 자연적 판단 또는 자동적 판단, 그리고 비록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가능한 한 억제하여야만 하는 임의적 판단을 구별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즉 이것이 우리 자신의 선입견이라고 할수 있다. 

  결론적으로 감각에 대한 말브랑슈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 우리의 감각능력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물체들과 우리의 육체 사이의 관계를 알려주는데에는 충실하지만, 감각은 물자체로서의 물체들이 어떠한가를 우리에게 알려줄수는 없다. 감각능력은 오로지 건강과 생명을 보존하는데에만 사용해야 한다. 우리의 감각능력은 오로지 우리의 육체의 보존을 위하여 주어진 것일 뿐이다.

 

 Cf) 추가사항 : 말브랑슈는 생리적인 과정도 감각에 포함된다고 말한다. 신경조직: 동물정기가 통과하는 미세한 관 또는 통로. 외부의 대상이 우리의 감각기관에 영향을 미치면 신경조직의 말초적 표면이 운동을 시작하며 동물정기가 이를 두뇌에 전달한다. 그리고 그런 생리적 과정에서 이 동물정기는 두뇌에 어떤 흔적들을 남긴다. 두뇌의 섬유조직에 찍혀있는 흔적들- 그리고 인간은 이런 흔적들에 영향을 받아서 일종의 정신적 심상을 낳게 되는 것이다. 이때의 심상은 비자발적 심상이다. 기계론적 설명과 같다. 그리고 그 흔적들은 상호 영향을 끼친다. 이러한 흔적의 결합은 생명의 보존을 위해 필요한 것이다. 이를테면 위험에 대한 태도. 이를테면 63빌딩에서 아래를 내려다봄으로써 아래로 떨어질 위험이 있다는 흔적, 거대한 바위가 어떤 물체 위로 떨어지며 부서지는 모습의 흔적, 이런 흔적들은 상호작용하여 죽음이라는 개념으로 확장되게 된다. 

 

4.    말브랑슈에게 상상력이란?

  상상력은 물체에 대한 심상을, 그 물체가 현존하지 않을 경우에도, 즉 우리가 지금 그 물체를 실제로 지각하고 있지 않을 경우에도 산출하고 재산출하는 능력이다. 이 상상력은 오류의 다른 근거 또는 원인이다. 상상력의 산물은 일반적으로 감각보다 약하지만 때로는 그 상상력의 산물이 매우 뚜렷하여 생리적인 관점에서 볼 때 감각과 똑 같은 호소력을 지니는 경우도 있다. 이럴 경우 우리는 오류에 빠지게 된다. 이 상상력에 관한 논의는 [진리의 탐구] 3장에 있다. 말브랑슈에 따르면 몇몇 사람들의 두뇌는 전혀 중요하지 않거나 비교적 별로 중요하지 않은 대상으로부터 매우 깊은 흔적을 받아들인다고 한다. 이 자체는 잘못이라고 할수 없으나 만일 상상력이 이러한 흔적들에 의해서 지배된다면 이는 오류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감각과 상상력의 오류는 육체의 본성과 성향으로부터 생겨나며 정신이 육체와는 무관하다는 점을 인지함으로써만 알 수 있다고 본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만일 물체에 대한 심상이 그 물체와 우리와의 관계가 아니라 물자체로서의 물체를 나타낸다고 판단한다면 우리의 판단은 오류에 빠지게 된다.

 

 

5.    말브랑슈의 신- cf)기회원인론[5]

-유일한 참된 원인으로서의 신 

앞에서 외부의 대상이 우리의 감각기관을 자극하며 동물 정기가 두뇌의 섬유조직에 흔적들을 만들고 그 만들어진 어,,, 심상이나 관념들은-상상 등- 이러한 생리적 과정에 기인한 것이거나 그 결과인 것인데,

 다시 말해 정신이 동물 정기의 움직임을 일으킬 수 있으며 그 결과로 경우에 따라서는 상상력이 자극되거나 아니면 육체를 이루는 각 부분들이 움직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신과 물체 중 어느 하나도 결코 다른 하나에 직접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말한다. 육체로부터 정신이 독립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또 이상하게도 그들 둘 사이는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음을 말한다. 말브랑슈는 이를 둘 사이의 상호작용이 아닌 대응관계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정신은 사고하지만 육체를 움직이지는 않는다. 육체는 신에 의해서 정신에 적합하도록 만들어진 일종의 기계일 뿐이다. 정신이 육체에 힘을 불어넣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 물리적 사건과 정신적 사건 사이의 대응관계- 말브랑슈는 양자 사이의 어떤 필연적인 연결, 인과성을 찾을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우리 자신이 팔의 움직임의 자연적인 원인임은 분명한 것이나 결코 참된 원인은 아니라는 것이다. 적절한 비유일지는 모르겠지만 이를테면 시계가 움직일 때 시계의 시침과 분침과 시침에 대한 자연적인 원인은 침 아래 있는 나사와 부품, 테옆들이지만 그것이 결코 근본적인 동자(動者)는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팔을 움직인다고 해도 그것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동물 정기를 통해서 자신의 손가락을 움직이려면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팔을 움직일 수 있겠는가? (즉 어떻게 움직이는지는 모르고 움직이니까 움직인다 또는 감각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 이를테면 내가 그렇게 감각하니까) 이런 사실들은 나에겐느 매우 명백한 것으로 보이며 단지 모든 것을 감각적으로 받아들이려는 사람들은 이를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깊이 있게 생각하여 받아들이려는 사람은 이를 명백하게 깨닫으리라 나는 생각한다  즉 진정한 인과적 행위자는 자신이 행위하고 있다는 사실(우리는 사실만 알 뿐이다)과 , 어떻게 행위하고 있는가를 모두 인식할수 있어야만 한다는 가정을 하고 있다. 이렇게 말한다.  참된 원인이란 우리의 정신이 그 원인과 결과 사이에서 어떤 필연적인 연결점을 지각할 수 있는 그러한 원인이다. 우리는 생각하며 움직일수 있으되 왜, 어떤 이유로 생각하며 움직일 수 있는지는 모르는 것이다. 말브랑슈의 결론은 : 참된 원인이 된다는 것은 창조하는 행위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어떤 인간도 그러한 창조하는 행위자가 될 수 없다. 신이 그런 능력을 인간에게 전해줄수도 없다.[6] 그러므로 신이 팔을 움직여야겠다는 나의 의지 작용을 기회로 삼아 나의 팔을 움직인다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다. 신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일어나는 모든 것을 의욕한다 (창조주로서의 신은 모든 의욕을 행함에 있어서 자신 이외에는 다른 어떤 궁극적 원인도 지니지 않는다.)

 

  예를 들어 a 뒤에는 항상 b가 뒤따른다고 생각해보자. 이 질서는 항상 보존된다. 이 질서가 왜 보존되는지 우리는 모른다. 겉으로 볼때는 a 뒤에는 항상 b가 따르기 때문에 a가 b의 원인처럼 보인다.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 왜 그런 질서가 보존되는지는 모른다. 그 질서가 보존되는 힘이야말로 진짜 b의 원인이다. 그 보존은 신만이 할 수 있다. a는 그저 신의 활동기회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a와 b 사이의 결합과 관련하여 반복적인 연속성의 관계 이상의 것을 발견할수 없다. 그리고 이것은 정신과 육체의 관계에서도 적용된다. 

 

6.    말브랑슈와 자유

  말브랑슈에 따르면 오직 육체들의 창조자만이 육체들을 움직이는 자가 될 수 있다. 말브랑슈에 따르면 우리 스스로는 장소를 바꾸거나 팔을 움직이거나 단 한마디의 말조차 할수 없다. 우리 스스로는 아 우주 안에서 가장 미미한 변화도 만들 수 없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육체를 움직이는 것, 팔 움직이는 것과 같은, 이 가능하다고 생각했을까?

그의 말처럼 신이 유일한 참된 원인이고 우리의 모든 의지 작용의 원인이라면 우리 인간의 자유는 부정되어야 한다. 그런데 말브랑슈는 인간의 자유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 자유를 부정하지 않기 위해 말브랑슈는 인간의 자유와 참된 유일원인으로서의 신을 조화시키고자 한다. 그 논증에 대한 이해는- 본인은 감각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으로서 누군가에게 이해시켜 줄만큼 납득하거나 이해할수 없었다. 그렇기에 생략한다.

 

  먼저 그는 가정한다: 신은 정신적인 피조물의 내부에 자신을 향한 성향을 심어놓았다고. 이 심어진 성향이 어떤 성향인가 하면 선 일반을 향한 성향이라. 본성과도 같은 것이다. 그런데 우리 세계는 유한한 세계이다. 그렇기에 지금 상태의 우리는 유한한 선이나 유한한 선들의 집합만을 추구할 수 있는데, 유한한것은 유한하기 때문에 우리는 결코 만족할수 없게 되는 것이다. (참고로 여기서 말하는 우리가 선 일반을 향한 성향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는 본성적으로 행복을 획득하려는 성향을 지니고 있다는 말과 같은 의미이다. ) 그런에 아까 말했든이 유한하기 때문에 어떤 유한한 선도 선 일반, 즉 궁극인, 즉 최고 성향의 완전한- 무한한 선에 이를수 없다. 이는 유한한 세계 안에서의 인간의 타락의 발생을 초래한다. 그리고 그렇게 타락은 무지, 무질서, 오류를 낳고, 또 우리의 상태를 바로 의식하지 못하게-즉 오류라는 큰 패러다임 틀 속에 있게끔 만든다.

 

 말브랑슈에 따르면 이 최고의 무한한 선인 완전한 선, 즉 완전한 행복, 궁극적 행복은 오로지 신 자신에 의해서만 충족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돌아와 말브랑슈는 지금까지 이렇게 말해온 일련의 본성이나 성향, 선-행복을 추구하고자 하는, 신에의해 심어진 그 기질을 자연적 성향, 자연적 운동들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고 이 패러다임 안에서의 자유라는 것은 말한 것처럼 그러한 경향을 통해 특정한 끝맺음-신의 선- 에 이를수 있게 만드는 능력인 한에서의 자유가 있는 것이다. 이 경향은 저항할 수 없는 것이다. 심어진 자연적 본성이자 성향이니까. 따라서 특정한 유한한 선과 관련해서 볼떄, 즉 유한한 의 체계-그 패러다임 내에서 한해, 유한한 것을 통해 끊임없이 무한함을 찾으려는 움직임 몸부림- 그 틀 속에서의 몸부림, 비록 불가능하지만 갈구하는, 불가능하기에 다양한 방식으로 찾아가는 틀 속의 다양한 몸부림의 방식에 한해, 우리는 자유롭다는 것이다. 

 

  참고로 말브랑슈는 만약 우리의 본성이 아담과 이브의 범죄에 의해서 타락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정신의 기본적 경향성들을 직접 인식할수 있었을 것이라 말한다. 즉 타락 이전의 인간은 심신병행론적인 법칙들의 작용을 유보시킬 수 있는 초자연적 능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타락 이후에는 인간 두뇌의 주된 부분에 흔적들을 남기는 물리적 사건들의 연쇄가 필연적으로 두뇌에서의 생리적 현상들보다 앞서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물체들이 인간의 두뇌에 흔적을 남길 때마다 정신의 운동이 그 결과로써 뒤따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7.   말브랑슈의 정신과 관념 관계

 말브랑슈에 따르자면 어떠한 작용에 의해 정신이 얻게 되는 사물에 대한 여러 관념들은 그 관념에 대응하는 물체로부터 생겨난 것도 아니며(철저히 단절되어 있기 때문에) 그리고 인간의 정신 자체로부터 생겨난 것도 아니다. 인간 자신으로부터 생겨난다고 한다면 이는 신의 창조적 능력의 지님을 전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정신 내부에 태초부어 있었던 완벽한 본유관념이 있었다고 볼만한 근거도 없다고 생각한다. 말브랑슈는 우리가 지니는 관념들을 타당하게 설명하기 위해서 성 아우구스티누스[7]의 권위를 빌어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우리는 신 안에서 모든 것을 파악한다

 말브랑슈는 우리가 신의 안에 있는 우리의 관념들을 파악할 수 있다고 전제나 공리로서 가정하는 것 같다. 그 관념 안에서 우리는 영원한 진리- 정확하게는 진리의 관념들을 파악할 수 있다. 

 

8.   말브랑슈 사상의 의의와 영향

A.   말브랑슈 사상의 의의

 말브랑슈의 사상은 완전한 원인으로서의 신을 도입한다는 점에서 중세 신학자들과 별반 다른 것 같지는 없다. 하지만 혹자는 그를 데카르트와 스피노자 사이를 연결하는 인물로서 간주하는, 나름 후한 역할자로서의 가치를 부여하기도 한다.

 그리고 데카르트를 따르고 있으면서도 데카르트와는 다소 다른, 즉 일말의 독창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 그 일말의 독창성이라 함은 명백히 신 중심적이고 신 존재에 대한 전제적 패러다임을 지니고 있다는 것과, 물체-감각(육체)-정신 사이의 인식관계를 신이 보증해 준다고 하였던, 그래서 정신과 육체 사이의 상호작용이 가능하고 그것을 신이 보증해준다고 말했던 데카르트와는 달리 물체와 정신 사이의 완전한 단절을 주장했다는 점이다. 

 즉, 정리하자면, 말브랑슈의 사상이 유용하든 무용하든 의미나 가치가 있든 없든, 독창적이거나 독자적인 생각을 했다는 바로 그 점에 한해 의미를 둘수도 있을 것 같다는 것이 나의 입장이다. 즉 인간의 생각 지평의 다양한 확장 가능성을 증명해주었다는 점.

 

B.   말브랑슈의 영향

  말브랑슈의 사상은 종교계에서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그 예로 오라토리오 수도회의 토마신이라는 신학자, 베네딕트 수도회의 인물인 프랑수아 라미, 제수이트 교도인 이브 마리 앙드레, 수학자이며 물리학자인 한 르네 페데, 학자 존 노리스 등에게 지지받고 이용되었다는 점이 있다. 그리고 말브랑슈의 사상은 경험론에 반대하는 많은 학자, 저술가에게 이용되었다.


[4] 두뇌 안에 외부의 대상에 대한 구체적인 심상을 형성하지 않고도 그 대상을 인식하는 능력.

[5] 말브랑슈의 기회원인론은 마음 혹은 정신과 육체의 관계에서 육체를 정신의 원인으로 보거나 아니면 마음이나 정신을 육체의 원인으로 보는 입장 또는 상호 연결되어 있다는 두 이원론적 입장을 넘어서서 신이 정신과 육체의 모든 활동의 근본적 원인임을 주장하는 철학이다. 이 입장은 철저하게 신 중심적이어서 마음 혹은 정신의 가장 중요한 관계는 육체와 맺어지는 관계가 아니라 신과 맺는 의존관계에서 그 모든 원인을 찾으려고 하였다.

[6] 아마도 신에 대한 전지전능성에 기인하는 것일듯.

[7] 그는 모든 것을 의심하는 '나'의 존재의 확실성에서 출발하여 회의론을 반박하였는데, 이 확실성은 후에 데카르트가 '나'의 확실성에서 자기 학설을 세웠던 발상과는 달리, 영원한 진리, 즉 이데아로서 영혼의 내면에 스며든 신의 빛(라틴어 illuminatio)에 의한 자기 존재의 확증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는 세계가 신의 이데아에 따라 그 의지에 의해 창조된 것이고, 원죄를 짊어진 인간은 악을 행하는 자유를 가질 뿐이며, 구원은 오로지 신의 은총에 의해 가능하고, 이 구원의 대상이 누가 되는가는 신의 영원한 예정에 의한 것이며(예정설) 교회가 이 은총을 매개한다고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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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모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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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가 문제이다.

한때 무슨 트렌드인 마냥 소위 진보를 표방하는 정당이라 하면 죄다 하나 같이 퀴어나 성 소수자 문제를 당 정책적으로 큰 중점을 두던 때가 있었다.

노동당, 정의당, 녹색당 등 이들 당들도 모두 사실상 퀴어나 소수자 문제만 빼고 보면 전부 나름 괜찮은 정당들ㅇ이다.

보통의 사소한 문제도 아니고, 누군가에게는 민감하고, 불쾌감을 심하게 줄 수 있고, 어찌 보면 역린을 건드릴 수 있는 일인데, 그런 일탈적 행동을 지지한 다는 것 자체가 문제이다.

사소하고, 중요하지 않은 일이다. 그런 일에 크게 신경을 쓰며 일을 크게 만들고자 했었다.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자본의 독점, 종속 강화, 비정규직 철폐, 탈 성장, 탈 발전주의, 자본주의의 모순 해소, 친중, 친독재 과거사 청산 등 훨씬 더 시급하고 현실적인 주제들이 많다.

이것들은 산적한 중요한 문제들이다. 큰 구조적 문제들을 일단 해결하면 나머지 부수적 문제들 – 앞서 등장한 사소한 문제들 – 이를테면 소수자 문제나 퀴어 문제 – 는 자연스럽게 해결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하지도 않은 사소한 부분을 가지고 걸고 넘어지고, 정책적으로 이슈화 하고, 거기에 많은 시간과 기회비용을 할애하였으니 어리석기 짝이 없다. 지지할 수 없었다. 한때 심각하게 회의감이 들었다.

정말이지 우리나라에는 쓸데없는 퀴어축제, 성 문제 따위에 신경 쓰지 않는 “진보” 정당은 없는 것일까? 하고 말이다.

*정당이라는게 진보 정당이라고 다 똑같은 진보 정당이 아니다. 당 별로 본질적인 당색이 있는데, 이 성 문제, 구체적으로는 여성주의 문제, 그리고 소수자 문제에서는 트렌드인 마냥, 혹은 그것이 진리인 마냥 너도나도 하나같이 같은 색으로 달려 드니까 문제이다.

*자유를 억압하자는 것도 아니다. ‘자유’도, ‘다양성’도 모두 테두리나 한계안에서의 자유와 다양성을 수용해야 한다. 아무리 이념적으로 자유와 다양성을 추구한다고 해도, 뭐 아무거나 허용하고 다 수용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문화 유산의 정수나 인류의 근본 규범과 같은 한계선은 지켜야 하는 것이다.

*동성애를 일종의 가치 다양성, 다시 말해 가치 상대성을 존중하는 관점으로 생각해보자. 정체성의 상대성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동성애를 지지하지 않는 가치관이나 정체성을 지닌 사람의 가치관, 정체성도 존중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상대성의 관점에서 가치 다양성을 주장하면서 반대의 가치를 지지하는 사람의 입장은 존중하지 않겠다는 것은 내적 모순이다.
*타인의 무분별한 자유가, 그러니ᄁᆞ 방종이, 그런 행위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큰 불쾌감이나 피해를 느께가 한다묜? 이를테면 퀴어축제가 그것이다.

*인간 종 자체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그 인종에 대하여 가지는 한 개인의 이념은 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따.

*남자라는 이유로, 혹은 여자라는 이유로 누군가가 누군가를 싫어할 수 있다. 혐오할 수 있다. 그러나 혐오한다는 이유 만으로 누군가를 혐오하고 있는 그 사람을 도덕적 비판할 수 없다. 그런 혐오감만으로는 누군가를 비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무언가에 대하여 단지 혐오감을 느끼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혐오를 당하는 사람은 다만 그런 사람과 부딪히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억지로 나서서 그런 사소한 걸로 소리치고 거리 행진하는 것은 참 이상한 모습이다. 누군가가 이유 없이 나를 싫어한다고 해서, 그걸 가지고 바깥에 나가서 시위를 한다면, 전국의 모든 직장인들은 매 주 광화문 앞에서 시위를 해야 한다.

우리는 제국주의 놈들과 천민적인 자본주의 개들, 그리고 저 야만스러운 국제 정치적 관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더 꾸준히 목소리를 내야 한다. 작고 사소한 것에 집착하지 말고, 크고 중요한 문제에 모든 역량을 총 동원해야 한다. 작금의 시대에는 더 중요하고 더 큰 이러한 구조적인 문제에 대한 강력한 투쟁은 싹 사라졌다. 모두들 개인적이고 개별적인, 원자적인 가치관 과 정체성 형성에만 함몰되어 있으며, 진실로 큰 눈을 뜨고 크게 말하지 않고 있따.

과거 친일파들과 독재의 잔재를 청산하는 일들은? 미제의 주구 노릇을 하며 민중의 피를 빨아 먹던 개들은? 왜 그런 것에는 이제 더 이상 관심을 가지지 않는가? 더하여, 요즘에 더욱 시급한 문제로서 친중을 하는 반민족주의자들은? 당장 우리 한반도를 중국화하려는 간첩들이 도처에 침입해있따.

우리가 원하는 살기 좋은 나라, 더 행복한 나라, 행복한 삶이 요원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큰 것을 놓치고 사소한 것에 집착하고 있는 행동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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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평등은 인간이 사회를 이루며 살기 시작한 이래로 등장한 불가피한 현상 중 하나이다. 이를 두고 기능론의 입장에서는 불평등르 재능과 노력에 의해 더 많이 성취한 자에게 그만큼 더 많이 보상을 지급하는 것으로 간주하며, 이러한 사회 구조적 불평등을 정당한 것으로 본다. 반면 갈등론의 입장에서는 사회의 빈부격차, 즉 불평등의 원인을 개인 능력차가 아닌 가진자들의 못 가진 자들을 향한 횡포와 억압으로 본다. 그러면서 불평등에 대한 비판작업과 함께 평등화 작업을 강조한다. 다음에서는 사회와 교육에 대한 기능론적 접근, 갈등론적 접근, 해석적 접근법을 각각 살펴보겠다.

 

  1. 기능론적 접근

  기능론은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여러 하위 분야들이 각자의 맡은 바 역할과 기능을 잘 수행하고 있을 때 비로소 사회의 안정적 유지 및 발전이 가능하다고 보는 입장이다, 대표적인 학자로는 뒤르켐, 드리븐, 파슨스가 있고, 이론을 정립한 인물로는 슐츠의 인간자본론이 있다. 이들 기능론자들은 사회를 일종의 '생물학적 유기체'에 비유하며 사회의 안정적 상태를 '균형'의 상태라고 보았다. 반면 그 반대의 상태를 '불균형'의 상태로 보았다. 불균형의 상태란 사회의 각 부분이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을 뜻하며, 우리가 흔히들 말하는 사회의 제문제는 곧 이 불균형의 상태에서 기인한다고 파악한다. 이처럼 기능론적 입장에서는 사회를 유기체에 비유하며 사회가 지니고 있는 여러 특징들을 세분화한다.

  첫째, 사회는 구조와 기능을 지녔다.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사회는 생물학적 유기체에 비유된다. 말하자면 사회를 몸통에 비유할 수 있고, 사회의 각 부분이나 기관들은 팔, 다리, 각종 장기 기관에 비유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 각 기관들은 생물적 유기체와 마찬가지로 각자의 고유한 기능을 지님과 동시에 상호 의존적 관계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심장이 망가지만 이후 뇌가 손상되는 것과 같이, 사회도 그러하다는 뜻이다.

  둘째, 사회는 통합을 지향한다.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사회의 각 부분들은 각자의 고유한 기능을 지니고 있으면서 동시에 각각이 상호의존적이다. 따라서 한 부분의 변화나 기능 불능은 다른 부분 혹은 기관에도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사회는 통합을 지향하게 된다. 다시 말해 부분 간 조화, 통합은 사회 전체의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라고 할 수 있겠다. 

  셋째, 사회는 안정성을 추구한다. 우선 이때의 안정성은 곧 균형의 상태를 의미한다. 유기체적 생명체는 본성적으로 안정을 지향한다. 이는 사회도 마찬가지이다. 일단 통합이 된 상태라면 그 상태를 지속적으로 즉 안정적으로 유지하고자 한다. 사회 역시 혼란이나 갈등 보다는 안정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으며 이를 바람직한 것으로 간주한다.

  마지막으로, 사회는 합의를 지향한다. 기본적으로 부분 간 균형은 합의, 조화, 협동, 질서 등의 관계로 이루어지는데, 이렇게 이루어진 균형의 상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구성원 간의 합의가 필수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회를 위와 같이 바라본 기능론에서는 교육, 특히 학교 교육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기능론적 관점에서는 교육의 기능을 크게 두 가지로 보고 있다. 첫째, 사회화 기능이다. 기능론에 의하면 교육은 생물학적 인간을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길러내는 기능을 담당한다. 뒤르켐의 경우, 사회화 과정을 보편사회화와 특수사회화로 이분하고 있다. 보편 사회화는 사회의 보편적 가치 및 규범을 습득하는 것이며. 특수사회하는 각자의 특수한 소질, 재능, 속한 직업집단에 따라 이루어지는 사회화 과정을 의미한다.

  둘째, 교육은 사회적 선발 및 배치의 기능을 한다. 이는 개인의 능력, 소직 및 적성에 따라 사람을 선별하고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것을 뜻한다. 이 기능은 학교교육이 수행하는 가장 현실적인 기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인문계 고등학교나 실업계 고등학교의 구분이 그것이며., 혹은 2년제의 전문대나 4년제의 종합대학의 구분이 그것일 것이다.

 

 

2. 갈등론적 접근

  갈등론은 기존의 기능론적 접근법을 비판하며 등장한 이론이다. 주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현실사회와 학교 교육을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이를테면, 사회를, 생산수단을 소유한 지배계급과 그렇지 못한 피지배계급 간의 끊임없는 긴장과 갈등의 장(장)으로 파악한다. 그리고 이러한 갈등과 투쟁이 곧 인간 역사발전의 원동력이 된다고 보았다. 이와 관련한 갈등론자의 대표 인물로는 마르크스, 알튀세르, 부르디외(문화재상산론), 콜린스 등이 있고, 대표적인 이론으로는 이데올로기론, 문화재생산론등이 있다.

  이들 이론의 중심 개념은 갈등, 변화,. 강압에 있다. 이 세 가지 키워드 모두 사회의 본질적 모습이 된다. 갈등론에 따르면 사회는 본질적으로 갈등이 내재되어 있으며, 이러한 갈등을 통한 변화 가능성 또한 항상 지니고 있으며, 사회의 규칙과 질서는 자율이 아닌 강제적으로 부과된다. 사회의 한 부분으로서의 교육에 대한 입장 역시 기능론과는 달리 비판적이다. 기본적으로 학교 교육을 불평등한 계급구조를 고착화하는 기제로 보고 있다. 교육을 토한 계층의 이동 역시 어려운 것이다. 구체적으로 사회화 기능 비판, 선발 및 배치 기능 비판, 학교 교육 비판이라는 세 측면에서 살펴보겠다.

  첫째, 사회화 기능을 비판한다. 사회휴ㅘ를 지배집단의 이데올로기와 문화를 일방적으로 주입시키는 과정의 일환으로 보았다. 지배집단을 이를 통해 그들의 지배를 공고히 한다. 둘째, 선발 및 배치 기능을 비판한다. 학교교육의 선발 기능은 지배집단의 그들의 지배에 적극적으로 순종할 집단을 선발하는 한 과정일 뿐이라고 보았다. 이럴테면 학교에서의 보범생은 창의적이고 자유로운 성격의 인간이기보다는 제도 교육에 철저히 순응한느 학생일 뿐이다. 셋째, 학교교육에 대한 총평적 비판이다. 하굑교육은 사회적 불평등을 공고화하고 재생산하는데 정당화한다. 상류층에서 태어난 학생이 더 좋고, 노 높은은 수준의 교육기관에 진학할 확률이 높고,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있어 학업에 전념하기가 더 유리하다. 결론적으로 교육은 사회적 불평등을 방조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3. 해석적 접근(신교육사회학)

  초기의 사회학의 주된 경향은 기능론적 접근법을 주로 따랐다. 그러나 그 이후 마르크스 중심의 갈등론적 접근법이 기능론적 접근법을 비판하며 등장함에 따라 두 이론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들 두 이론은 '사회'나 '경제구조;라는 거시적 틀로 사회를 인식하였다는 것에서 그 공통점이 있다. 이는 곧 이들 모두 인간을 고저나 거싲거 틀의 종속변인으로 보았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런 특징은 인간의 구체적 삶의 모습ㅇ르 반영하지 못하는 오류를 낳았고, 이런 결함을 바로집기 위한 새로운 접근법으로 해석적 이론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해석적 접근에서는 거시적 틀이 아닌 미시적 관점의 중요성을 강조하며사회구조가 아닌 행위자를 중심에 둔다. 즉 행위자의 의지나 행동양식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해석적 접근법의 대표적 인물과 이론으로는 번스타인의 언어사회화와 계급, 미드의 상징적 상호작용론 등이 있다. 이들에 의하면, 사회는 인간이 만든 것이므로 사화와 개인간에는 상호작용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사회적 인간행위는 장녀법칙차롬 설명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다만 행위자를 고려한 입장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해석적 접근은 행위자의 중요성을 강조한 나머지 사회구조의 영향력을 다소 경시한 경향이 있다는 점에서 그 한계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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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는 옛 동프러시아의 수도 콰니히스베르크에서 태어났다. 그의 대표 저서로는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 <윤리형이상학 정초>, <윤리 형이상학> 등이 있다. 그는 당시의 합리주의적 철학사조와 경험주의적 철학사조의 통합을 시도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는 합리주의와 경험주의 모두 세계 인식을 ㅜ이해 필요한 것이라는 그의 판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작업은 그의 책 <순수이성 비판>에서 다루어진다. 허나 본 서(서)에서는 그이 도덕철학을 중심으로 살펴볼 것이다. 그의 도덕철학은 소위 "의무론"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그이 저서 <윤리 형이상학 정초>를 중심으로 그의 도덕철학적 주요 개념인 '자유', '의무', 선의지', '정언명령' 등의 의미를 살펴보고, 마지막으로는 그가 지닌 한계를 살펴보겠다. 

 

  우선 칸트는 학문을 이분법적으로 분류한다. '이성의 인식 방법에 따른 학문'과 '경험적 요소의 유무에 따른 학문'이 그것이다. 전자의 '이성의 인식 방법에 따른 학문'은 다시 '내용적인 것'과 '형식적인 것'으로 이분된다. 그리고 '내용적인 것'은 다시 '자연학'과 '윤리학'으로 이분된다. 이때 자연학은 자연의 법칙 하(하)에 있는 학문을 뜻하며, 윤리학은 자유의 법칙 하(하)에 있는 학문을 뜻한다. 자연의 법칙은 필연성의 세계, 혹은 인과 법칙의 세계라 할 수 있고, 자유의 법칙은 말 그대로 '현실 세계의 제약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세계'를 의미한다. 그에 의하면 자유는 윤리학의 학(학)적 성립의 근거가 된다. 칸트는 자유를 윤리학의 기본 전제로 삼는 것이다.

 

  다음으로, 칸트가 말한 '선의지'에 대해 살펴보겠다. 우선 의무론으로 대표되는 그의 도덕규칙은 소위 '정언명법'이라고도 불리는데, 정언명법은 일종의 절대명령을 의미한다. 그리고 절대명령인 정언명령을 정당화하는 것이 바로 선의지이다. 그는 절대적으로 선하고 무조건적으로 선한 것은 오로지 선의지뿐이 없음을 주장한다. 이를테면, 지식, 용기, 많은 돈 등 으루가 통상적으로 '선하다(좋다)'라고 하는 많은 것들은 사실 그것을 지니고 행위하는 자가 어떤 의지 혹은 동기를 지니고 있느냐에 따라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는 가치들이다. 다시 말해 그런 가치들이 만약 사악한 의지에 복종한다면 악이 된다. 즉 조건적으로 선함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무엇을 선하다고 말할 때, 그것을 선하게끔 하는 것은 오직 선의지뿐이 없음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의무는 이 선의지를 전제로 한다.

 

  다음으로, 정언명법에 대하여 살펴보겠다. 우선 칸트는 명법을 두 가지로 구분한다. 가언명법과 정언명법이 바로 그것이다. 가언명법은 '만약 p 라면 q를 행하라' 라는 식의 조건적 명령을 뜻한다. 다시 말해 '수단과 목적'의 형태를 지닌다고 할 수 있겠다. 반면 정언명법은 'p를 행하라' 라는 식의 명령으로, 무조건적인 명령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러한 명령은 이성적 존재자라면 당연히 알 수 있는 직관적/직접적/절대적 명령이다. 이때 칸트는 모든 인간은 이성적 존재자이며 단지 이성능력을 계발하기만 하면 되는 것으로 판단한다. 말하자면, 칸트는 정언명법을 이성의 산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는 정언명법을 "그것이 보편적 법칙이 되기를 의욕할 수 있는 그러한 준칙에 따라서만 행위하라"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정언명법의 단계를 세봔화하여 제시한다.

 

  정언명법의 첫 번째 단계는 준칙(maxime)의 단계이다. 두 번째 단계는 준칙의 보편화 단계이다. 마지막 단계는 보편화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준칙만을 정언명법으로서 받아들이는 단계이다. 이렇게 세 단계를 제시하면서 그는 정언명법의 원리를 또한 세 가지 제시하고 있다. 이 세 가지를 전제로 한다. 자연 법칙의 원리, 목적의 원리, 자율성의 원리가 그것이다. 이 세 원리들은 정언명법이 되기 위한 조건이기 도 하다. 혹은 이 세 가지를 전제로 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들을 순서대로 가각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자연법칙의 원리는 행위의 준칙이 의지에 의해 보편적 자연 법칙이 될 것처럼 하라는 것이다. 둘째, 목적의 원리는 인간을 대하는데 있어서 언제나 목적으로 대우하라는 것이다. 결코 단순한 수단으로 대우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셋째, 자율성의 원리는 보편적 도덕법칙을 만드는데 있어 신, 문화(관습) 등 어떤 외부의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 오로지(오직) 자기 자신이 스스로 입법자가 되어 자유로이 하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렇게 성립된 정언명법은 곧 의무게 되겠다. 또한 이러한 의무는 '의무에 대한 존경심'을 필요로 한다.

 

  지금까지 칸트의 도덕철학을 대략적으로 개요하였다. 마지막으로는 그의 도덕철학에 대한 한계적믕ㄹ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예외 없는 규칙의 문제가 있다. 둘째, 형식논리의 오류(인간을 이성적 존재자로 상정한 문제와 관련하여)가 바로 그것이다. 순서대로 살펴보자면, 첫째, 칸트의 도덕철학은 예외없는 규칙의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정언명법의 절차에 따라 정립된 의무에게 예외란 있을 수 없게 된다. 이는 곧 의무와 의무가 충돌하는 현실적 문제에 있어 뚜렷한 대안을 내놓지 못하는 상황을 만든다. 달리 말하자면 이는 형식은 있되 내용은 없는 도덕규칙이 되어버린다고 말할 수 있겠다. 둘째, 형식 논리의 오류가 있겠다. 그는 인간을 이성적 존재자로 평가하고 있다. 그리고 단지 이성을 계발하기만 하면 되는 것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우리는 '인간인 이성적 존재인가?'라는 의문을 표하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만약 칸트의 이러한 대전제를 우리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칸트의 의무 개념은 성립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칸트의 자유, 선의지, 정언명법과 정언명법의 절차 및 원리 개념, 그리고 칸트 도덕철학이 지니고 있는 한계를 살펴보았다. 칸트의 도덕철학은 형식의 엄격한 준수를 통해 도덕의 보편성과 확실성을 확보하고자 하였고, 이를 통해 윤리 상대주의 혹은 회의주의를 극볼할 수 있는 길을 터주었다. 그러한 점에 있어 큰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러한 형식주의는 결국 현실적으로는 최소주의적인 모습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으며, 또한 현실문제에 대한 구체적 내용을 제시하지 않느다는 점, 그리고 논리적으로 대원칙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칸트 개념 자체의 성립이 불가능하다는 한계를 지닌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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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형벌 강화: 제한적 사형 시행(사형수들을 공공의 이익에 맞게 재활용: 강제 노역 및 장기 이식에의 활용 등), 인성교육대(구 삼청교육대) 운영, 태형 시행(싱가폴의 제도 도입), 음주, 성폭력, 난폭운전 등 단속 및 처벌 강화, 강력 범죄에 대한 감형 금지원칙, 특별 사면제도 폐지, 민원 어플 활용한 카파라치 등 공익제보 보상정책 전국적 실시.
  2. DMZ 및 민통선 이북지역 평화생태공원 조성: 민간인 거주 금지(기 거주자 이전 보상) 및 제한적 출입을 통해 생태지역 조성, 동아시아의 생태허브 조성, 강원도를 동아시아의 생태관광지구로 육성, 도민교육 실시. 생태 관광지구 조성을 통한 관광수익 창출. 전쟁테마공원. 체험학습장. (강원도 및 전라남도 지역에 어두운 밤하늘 지구 조성을 통해 관련 산업 육성)
  3. 페미니즘을 넘어 이퀄리즘으로: 편협하고 극단적인 페미니즘을 벗어나 더욱 높은 가치를 지향하는 평등주의로의 이행 약속, 남성의 권리와 여성의 권리의 균형: 여성 병역세(소득의 3~10%로 원천징수) 실시. 사병 월급 현실화 및 예비군 훈련비 현실화: 이전에 혜택받지 못한 예비군에게도 혜택이 가도록 세금감면 등 혜택 제공.
  4. 자주국방: 통일 이후 잠재적 적국을 견제하기 위한 동서남북에 사드에 준하는 고성능 레이다 개발 및 배치, 장거리 탄도미사일 개발, 크루즈 미사일 성능 개량, 핵무장에 준하는 핵개발, 군대 내 수사권 및 기소권을 지닌 인권 감찰부 설치, 군 내부 비리 원 아웃제. 독도 요새화 사업 실시. 울릉도 군 기지 확충, 공직자 병역의무 강제이행제도 실시(공직자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병역의무를 이행해야 함)
  5. 에너지: 원자력 발전은 현 상태를 지속적으로 유지함. 러시아 가스 도입 및 동해 하이브리드 에너지 개발 투자. 북한 지하자원 투자개발, 에너지 수입국 다각화. 국내 에너지 사용에 있어서의 낭비의 제거 및 이를 위한 국민교육 실시. 전기세, 수도세, 가스요금 소폭 인상(OECD 평균 유지), 산업에서의 전기세, 수도세, 가스요금 대폭 인상. 효율적 효과적 자원 재활용을 위한 국민교육 및 설비투자 및 이와 관련한 효율적 정책 이행을 위한 연구용역 실시. 고 에너지 효율 제품에 대한 연구비 지원.
  6. 정치: 정치인 특권 폐지: 국회의원 특활비 폐지, 모든 예산에 대한 사용내역 투명화, 국회의원 최저임금제 적용, 정치인의 비리 및 범법에 대한 원아웃제 도입. 반민특위법 재개정을 통해 적폐(독재, 친일, 매국) 청산 및 재산 몰수.
  7. 노동: 주 50시간 제한. 시급 1만원 현실화를 위한 노력. 최저임금 개정.
  8. 4대강 보 자연하천으로 복구 실시
  9. 의용소방대원 수당 정상화(현 4만원-> 제한 해제), 소방 공무원 처우 개선(에산 증액, 소방헬기 2배 확보, 장비보급, 위험수당 증액, 소방 공무원 국가직으로 전환.
  10. 예산 확보: 법인세 증가, 상속세 대폭 증가, 불로소득(예: 부동산, 원룸 및 상가 임대업)세 부과(건물 임대소득 의무 양성화 및 세울 인상), 각종 법규 및 규정 위반에 대한 벌금 도입과 기존 벌금 대폭 인상과 단속 강화를 통한 세수 확보, 담뱃값 5000원으로 인상. 핵무기 개발 및 배치를 통해 재래식 무기 감축 및 유지비 절감(국방비 절감), 재벌 및 대기업 개혁을 통한 경제 정상화와 이를 통한 내수 활성화 및 강소기업 육성. 장인정신 강조. 카파라치 부활, 관광자원 육성. 정치, 경제, 국방, 행정 등 전반에 만연해있는 비리 및 부조리, 그리고 낭비의 제거를 통한 예산 확보.
  11. 교육: 사학법 개정, 각 지역별 특수학교 설립 추진, 사립 및 국공립 대학 통폐합. 철학, 윤리 및 인성교육 강화를 위한 교육연구 실시 및 예산 배정. 항존주의 및 본질주의 교육철학을 기반으로 한 기초학문 육성 및 확대(수학, 과학)
  12. 청년: 공공임대주택 확대, 대학 기숙사 건립 지원 및 확대, 청년 임대주택 사업 대폭 확대.
  13. 대 중국 정책: 불법 조업 어선 단속 강화 및 실탄발포 권한 확대. 고성능 레이다 배치. 무사증 폐지, 외국인 지문날인제 의무시행(특히 제주도에 대한 단속 관리 강화), 중국 및 동남아의 불법 이민자와 불법체류자 대대적인 단속. 조선족 관리 강화.
  14. 일본 정책: 독도 문제 및 위안부 문제에 대한 협상 불가 및 기존 협상 무효화 선언. 독도 요새화 및 울릉도 군사기지(해군, 공군) 확충
  15. 북한 정책: 현행 체제 유지, 평화 및 경제 공존 번영 기조 유지. 지하자원 개발 투자. 관광자원 육성 등
  16. 기타: 탈성장 패러다임 연구 및 농업 육성, 내수경제 활성화 및 자생적 경제질서 확립을 위한 방안에 대한 연구용역 실시(예산 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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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의 덕 이론과 윤리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384~322)는 마케도니아 남부 출신의 고대 그리스 철학자로, 당대를 대표하는 철학자라고 할 수 있다. 그는 17세이 아테네의 아카데미에서 플라톤의 제자로서 약 20년 간 수학했으며, 이후 노년에 이러러 리케이온이라는 학원을 설립하여 그의 스승의 철학적 전통을 잇고자 하였다. 이런 그의 도덕철학의 사상적 핵심은 행복(eudaimonia)’에 있다고 할 수 있겠는데, 본 서()에서는 그의 목적론, (arete),의 개념과 종류(의미), 행복의 의미 등 주요 도덕철학적 개념을 살펴보고 마지막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덕 이론의 입장에서 그와 대별(대별)되는 입장이라 할 수 있는 행위 중심주의 도덕이론에 대한 비판을 살펴보겠다.


<형상과 질료>

 주지하듯, 아리스토텔레스는 목적론적 사상을 함축하고 있는 인물로 평가된다. 그러한 그의 목적론은 몇 가지 형이상학적 개념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형상과 질료, 실체 개념이 바로 그것이다. 우선, 그에 의하면 세상의 모든 실체는 형상과 질료의 결합으로 구성되어 있다. 형상은 각 개별물로 하여금 바로 그러한 개별물이 되게끔 하는 것으로, 이는 곧 개별물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질료는 개별물이 만들어지게 된 재료, 즉 개별물의 소재를 의미한다. 예를들어, ‘가위의 형상은 자르는 것이 되고 질료는 금속이 된다. 이런 식으로, 그에 의하면 세상의 모든 개별물들이 형상과 질료를 지니고 있으며 이 둘의 관계는 불가분의 결합관계에 있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목적론>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질료 개념은 곧 목적론적 사고로 이어지게 된다. 앞서 비유에서와 마찬가지로, 가위의 형상은 자르는 것이다. , 생각해보면 가위의 기능은 역시 자르는 것이며 이것이 곧 가위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겠다. 따라서 생각해보면 좋은 가위는 잘 잘리는 가위가 될 것이다. 즉 형상은 본질이며, 본질은 기능이며, 기능이 곧 목적이 되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각 개별물의 본질 혹은 기능이 잘 드러나는 상태를 두고 이 상태를 (arete) 있는 상태(혹은 유덕한 상태)’라 일렀다. 이때의 덕은 arete를 뜻하며, arete를 영어로는 virtue 혹은 excellence로 이해된다. 다시 돌아와 이런 식의 논리는 인간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인간 또한 하나의 실체로, 육신 일체라는 질료를 지녔고, 정신작용이라고 할 수 있는 형상을 지닌 존재이다. 이때, 정신작용 혹은 정신능력은 곧 덕에 따르는 삶이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본질을 덕에 따르는 삶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탁월함, 곧 인간으로서의 고유한 기능을 잘 발휘하는 상태가 곧 덕에 따르는 삶을 살 수 있음인 것이다.

 

<행복, 목적의 계열>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인간의 탁월함, 혹은 덕에 따르는 활동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에 의하면 덕에 따르는 삶은 곧 행복(eudaimonia)한 삶을 사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인간이 모종의 행위를 할 때, 가장 궁극의 목적에는 최고선으로서의 행복이 자리 잡고 있다. 이 역시 목적론의 논리에 따른 것이다. 목적의 위계를 두며 최고 목적에 행복을 둔 것이다. 이를테면, 한 인간이 경제적 행위를 통해 부를 축적한다고 할 때, 1차적 목적은 의식주의 해결일 것이다. 그리고 의식주의 해결은 한 개인의 사적 자아창조의 밑바탕이 될 것이다. 자아창조를 위한 일련의 행위들 일체는 곧 나의 행복을 목적으로 한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더 이상의 상위 목적은 존재할 수 없게 된다. 또한 그는 궁극목적이 되기 위한 조건 세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자기목적성, 완전성, 자기충족성이 바로 그것이다. 그에 의하면 이 세 조건을 충족시키는 유일한 것 역시 행복뿐이었다. 즉 행복이야말로 인간에게 가장 궁극적 본질적인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하위의 것들은 서로 계열적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도구적 가치를 지니게 된다)


 다시 돌아와,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인간의 덕에 대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인간의 본질은 덕에 따르는 삶이며, 그러한 삶은 곧 행복한 삶을 의미한다. 그런 그는 인간의 덕을 다시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한다. 첫째, 신체적 덕이다. 둘째, 정신적 덕이다. 그리고 정신적 덕은 다시 지적인 덕과 성격적 덕으로 나뉘어진다. 이때 도덕성과 관련하여 결정적으로 작용하는 것이 있는데 이는 성격적 덕(탁월성)이 된다. 참고하여 항간에서는 성격적 탁월성을 다시 중용의 덕과 공동체적 덕으로 구분하기도 하는데, 여기에서는 우선 중용의 덕과 관련한 성격적 탁월성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성격적 탁월성은 품성상태(hexis)를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다. 이때의 품성상태는 도덕적 선을 습관적으로 행할 수 있는 습관화된 행동성향을 의미한다. 그리고 습관화된 행동은 적절한 품성상태, 즉 감정, 동기, 성향을 모두 고려한 결과이다. 또 이러한 품성상태는 내용적으로는 중용의 덕에 따르는 삶을 의미하며, 방법적으로는 습관에 의해 형성된다고 할 수 있다. , 이때의 중용은 산술적 중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유의해야 한다. 관련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네 가지 덕을 예로 들고 있다. 용기, 절제, 관용, 긍지가 그것이다. 용기는 자만과 두려움에 대한 적절한 태도이며, 절제는 쾌락과 고통에 대한 적절한 태도를 의미한다. 즉 중용은 공자의 시중(時中)의 상태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덕 이론의 입장에서 진행되는 행위 중심 윤리학 비판의 내용을 살펴보겠다. 우선 역사적으로 덕 이론은 오랜 세월 도덕철학에서 지배적 위치를 점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18세기 공리주의와 칸트가 등장하면서 그 지위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공리주의에서는 행위의 결과가 고통을 주는지 쾌락을 주는지의 여부로 도덕적 평가를 하고자 하였고, 칸트는 정언명법을 통해 이성적으로 도출된 도덕규칙을 의무로 삼아 이를 절대적으로 따를 것을 주장했다. 그들의 입장에서 덕은 도덕적 평가를 하는데 있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으로 여겨졌으며 이에 따라 경시되는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덕 이론가들은 이들의 입장을 비판하였다. 즉 단순히 도덕규칙에 따라 기계적으로, 그리고 무미건조하게 행위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성격적 특징을 또한 지녀야 한다는 것이었다.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덕 이론가들은 크게 5가지 입장으로 행위 중심 윤리학을 비판한다. (루이스 포이만, 윤리학 참고)


 첫째, 행위 중심 윤리학은 동기의 요소를 결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만약 규칙을 실천으로 나아가게 하는 성품의 내재적 준비가 없다면 그러한 규칙이 과연 유효한가에 대한 의문인 것이다. 만약 어떤 외적 기제에 의해 따르게 되더라도 그러한 기제(김시 등)가 없어지는 순간 다시금 무용지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행위 중심 윤리학에서는 상과 같은 보상기제를 통해 동기화가 가능하다고 반박할 수 있다.

 둘째, 행위 중심 윤리학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신학적 및 자연법적 모델에 기초해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행위 중심 윤리학에서 사용되는 전통적 도덕 언어는 신과 같이 명확한 권위나 전통적 자연법natural law)에 근거해 있으며 이들은 오늘날의 현실에 맞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행위중심 윤리학자들은 합리적 의사결정 과정은 그러한 유효하지 않은 과정들로부터의 구분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며 이를 비판한다.

셋째, 행위중심 윤리학은 윤리학의 자발적 측면을 경시한다는 주장이다. 만약 규칙에 따라서만 산다고 한다면 그것은 곧 단지 차갑고 계산적인 도덕적 기계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행위 중심 윤리학자들은 도덕성을 완전히 덕이나 성품으로 한정시키지 않으면서도 덕이나 성품의 가치는 존중받을 수 있다는 식으로 반박한다.

 넷째, 행위 중심 윤리학은 최소주의적이라는 주장이다. 전통적 행위중심 윤리학은 주로 ‘~을 하지 말 것을 요구한다. 이러한 식의 최소주의는 보편화가 상대적으로 수월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도덕은 최소 도덕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행위 중심 윤리학은 최소주의는 최소한의 공통된 상식에 호소하는 것이기 때문에 보편타당성을 얻기 용이하다는 장점을 내세운다.

 마지막으로, 행위 중심 윤리학은 자유를 지나치게 강조하고 공동체를 경시한다는 비판이 있다. 사실 많은 도덕적 규율들은 전통이나 삶의 양식 속에서, 즉 관습에서 근거하고 그것이 곧 공동를 유지 및 발전시키는데 기여를 한다. 그런데 행위중심 윤리학은 이러한 속성들을 경시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행위 중심 윤리학에서는 공동체 윤리는 윤리적 상대주의를 함축할 가능성이 있으며, 이는 곧 도덕의 객관적 지위에 흠집을 낼 수 있음을 비판한다.

 

<마무리>

지금까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질료 개념과 목적론, 행복론, 덕의 개념, 성격적 탁월성과 중용의 덕을 살펴보았으며, 마지막으로는 덕 이론의 입장에서 전개되는 행위중심 윤리학에 대한 비판의 내용을 살펴보았다. 결론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를 필두로 하는 덕 이론, 혹은 덕 중심 윤리학은 도덕적 실천에 있어서 구체적 내용과 방향을 제시해줄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행복의 개념이 과연 보편타당성을 지닐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과, 덕이라는 개념이 자칫 윤리적 상대주의를 함축하게 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그 한계 역시 분명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교정: 그러나 행위 중심 윤리학에서는 규칙에 따라 행위할 것을 강조한다. 이를테면 공리주의에서는 최대다수 최대행복(이익)’이라는 결과를 산출하는 행위를 할 것을 강조하고, 의무론에서는 정언명법에 따라 이성적으로 도출된 규칙을 의무로 삼아 따를 것을 강조한다.


2017.12.28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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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학교폭력 예방을 위한 학급규칙 제정에 있어 고려사항

 학교폭력 예방을 위한 학급규칙을 정하는데 있어서 크게 두 가지 접근법을 고려해야 한다. 첫째는 내적 기제이며 둘째는 외적 기제이다. 내적 기제는 학생의 변화 가능성, 교육적 성장 가능성에 초점을 둔 규칙으로, 대표적으로는 바른 말 쓰기가 있다. 학생 상호 간 "상스러움", "천박함", "경박함" 등으로 정의될 수 있는 여러 어휘들, 이를테면 은어, 비어, 속어, 줄임말, 기타 소위 말해 "급식체"라고 불리는 말들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통제하며, 사용시 가해질 처벌 및 생활 제재 수준을 학급회의를 통해 정해야 할 것이다. 이는 인성적 및 정신적 측면에서의 교육 및 정화(혹은 훈육, 교화, 계몽)의 과정이며 이를 통해 학교폭력 예방을 의도할 수 있다.


 외적 기제는 위의 인성적 차원에서의 모종의 교육, 교화 및 예방 시도에서 걸러내지 못했을지 모를 비행이 부정의, 혹은 일탈을 사전적 차원에서 예방하는 외과적 처치라 할 수 있다. 이는 다음과 같다. 고대 로마에서 귀족 내지 원로원의 착취나 억압으로부터 다수이자 약자였던 평민의 생명과 재산, 여타의 정당한 권리를 지켜내기 위해 만들어졌던 '호민관 제도'를 활용하는 것이다. 고대 로마의 호민관 제도로부터 그 긍정적 이념을 차용한 시스템으로, '꼬마 파수꾼', '학급 지킴이', '학생 파수꾼' 등 다양한 명칭을 활용하면 될 것이다. 이때, 소위 학급 "호민관"을 선정해야 하는데, 이는 상담내역 및 학생기록부를 통한 교사의 판단과 학생들의 투표를 통해 해당 학급에 신뢰할 수 있고 도덕적 품성을 지닌 몇몇의 후보군 학생을 "호민관" 학생으로 선발하면 된다. 이렇게 선발된 학생은 보상, 익명의 활동을 보장하며, 해당 학급에 불미스러운 일이나 앞서 바른 말 쓰기와 같이 학급 내 제정된 규칙을 어기는 학생들을 교사에게 보고하는 등 학생 간 상호 제지를 통해 일탈의 통제 및 조기 감지를 이룰 수 있다. 학급 내 일거수 일투족을 학급 담임교사에게 보고 및 고발토록 하여 통제 및 감시의 사각지대를 원천 하단하며 학교폭력을 사전에 예방하는 방법이다.

2. 어울림 프로그램과의 비교

 최근에는 맟춤형 프로그램, 혹은 어울림 프로그램 등을 기획하여 학교폭력을 근원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시도가 있다. 이는 학교폭력의 근원적 해결을 목적으로 표방하고 있는 정부 주도의 현장 맞춤형 대책 활동의 일환으로, 일선의 일부 학교에서 시행되는 정책이다. 특히, 어울림 프로그램은 단순히 홍보에 그치는 것이 아닌, 실제로 방대한 양과 자료, 대상을 지니고 운영되는 학교폭력 예방 프로그램이다. 학생뿐만 아니라 학부모, 교사까지 고려하며 각 학교급별 및 학년별로, 그리고 학생의 상황에 따라 일반과정과 심화과정으로 구분하는 등 입체적이고 총체적인 프로그램을 의도한 것이다. 이는 이전에 일회성에 그쳤거나 형식적이고 피동적인, 또는 파편적으로 운영되었던 프로그램에서 이를 보완하고 좀 더 나은 체계로 통합하려는 긍정적 시도라고 평가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부 주도의 예방 프로그램도 여전히 결정적 한계가 남이 있다. 바로 학교폭력의 근본원인에 대한 처방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선 학교 폭력의 근본 원인은 무엇일까? 이는 보통의 상식 수준으로도 주지할 수 있는 것처럼, 일반적 요인으로는 학교폭력의 원인을 개인적 요인, 가정적 요인, 학교 요인, 지역 요인, 사회 문화적 요인 등으로 범주화하여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앞서 '어울림 프로그램' 또한 이와 같은 방식으로 원인을 파악하여 가정적 요인에서 학부모 프로그램을, 개인적 요인에서 학생 대상 프로그램을, 학교 요인에서 교사 대상 프로그램을 두는 등 다각적 해결책을 모색하고 있다. 그러나 앞서 범주화된 여러 원인들은 제 2차적 원인일 뿐 긍국적 원인이 아니므로 이를 인식적 기반으로 삼은 프로그램 역시 문제의 본질에 다가가지 못한다는 비판을 반게 된다. 그렇다면 학교폭력의 본질적 원인은 무엇인가? 


 위와 같은 개인적 요인, 가정적 요인, 학교 요인 등 여러 범주화된 요인을 만든 본질적 원인은 바로 지금 여기 우리 시대의 여러 이데올로기, 이념, 정치체에 있다., 현재 대한민국의 이념과 체제는 근대 자유주의의 정치이념의 지배주의적 이념, 즉 제국주의, 청산되지 못한 채 사방에서 부유하고 있는 식민사관의 잔재, 산업 자본주의에서 천민 자본주의로의 후진적 이행, 그로부터 나오는 노동자 그리고 노동 가치의 하락, 노동 착취, 경제적 불평등, 노동에서의 인간 소외, 무조건적인 성장 혹은 발전지향주의적 생활양식, 그리고 서양으로부터 유입된 이원론적 사고 등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기반 위에 성립된 우리의 법과 체계, 교육제도, 문화, 정치는 인간을 물화시겼으며 삶의 직접적 현실과는 괴리된 지식 중심의 교육, 경쟁적 입시 풍토, 왜곡된 그리고 천박하기 짝이 없는 출세 지향주의, 공교육에 있어서의 교사의 무력화, 빈곤 가정의 증가, 가정의 붕괴, 부모 교육의 상실, 적재 생존 등을 야기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현실이 당연하다고 느끼는 상식 일반과 그런 일반 상식을 지닌 시민과 기성세대를 양산하였따. 과연 그런 천박하고 척박한 토대 위에서 가정에서의 아이들을 맡고 있는 부모들은 행복하고 바람직한 상태일 수 있을까? 아이들은 바람직한 인성과 교양을 갖추며 성장할 수 있는가? 결코 아니다.


 노동을 통한 자유로운 자아의 창조장이 아닌, 생존을 위한 고된 노동의 장이 되어버린 척박한 우리의 현실에서는 비록 그것이 지극정성한 수로고움이 가미된 체계적이고 입체적으로 구성된 양질의 교육 프로그램이라 할지라도 역시나 단지 현상만을 감소시키는 교육프로글매으로서나 기능할 뿐 지속가능하고 인간 개개인들의 사적 자아창조를 위한, 그리고 학교폭력의 근본적 원인에 대한 해결을 위한 도구로서는 기 역할에 한계가 있게 된다. 궁극적 원인을 성찰하지 못햔 채 더럽혀지고 척박해진 이 땅 위에는 세대와 학년이 지나고 나면 언제고 그 잔인한 학교폭력의 씨앗이 다시금 고개를 들 가능성은 언제고 내재해 있다. 


 따라서, 결론적으로 학교폭력의 예방을 진정으로 위한다면 우리는 정치부더 바꿔야 한다. 총체적 우리 삶의 양식을 단순히 경제성, 이익과 손해, 경제적 성장과 발전주의, 돈, 자본의 잣대, 적과 나의 이분법으로 볼 것이 아니라, 조금은 더 공동체를 위하며, 획일적인 것이 아닌 다원적이며, 탈 인강중심주의의 생태 지향적이며, 타자와 유기적이고 긍정적 관계 속에서 자유로운 사적 자아창조를 할 수 있는 그런 사회, 도덕과 정의와 평등과 인륜성이 살아 숨쉬는 교육의 장, 삶의 장으로 탈바꿈할 것이 필요하다. 이는 학교폭력의 본질적 문제 역시 자연스레 해소딜 것이며 학생들의 비폭력적인, 그리고 자유롭고 창조적인 본연지성을 회복할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단지 학교 안에서의 폭력문제를 넘어 사회 및 국가로까지 그 이념이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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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지하듯 192명의 무고한 시민이 희생되었던 대구 지하철 참사는 2003년 2월 18일에 일어났다. 오래전 일이지만 나는 여전히 그날을 생생히 기억한다. 그때 나는 중학교 2학년이었으며 참사의 슬픔으로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여하간, 뉴스를 보면서 문득 떠올랐다. 당시 대통령은 김대중 대통령이었고(2월 24일까지 재임), 노무현 대통령의 재임은 그 다음날인 25일부터이다. 원칙적으로 보면 김대중 대통령의 재임 당시에 벌어진 참사이다.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은 공공부문 민영화를 추진했던 인물이다. 항간에서는 그 사태의 원인을 공공부문 민영화 등을 비롯한 당시의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의 한 일환으로 이어졌던 1인 승무, 인력감축, 교육원 폐지 등으로 보기도 한다.

이러한 객관적 사실를 앞에 두고 나는 지난 2003년의 사태와 지난 2014년의 사태를 비교해보고 싶어졌다. 2003년의 사태에 우리는 어떻게 대응했던가? 김대중 정부 역시 국민 생명 보호의 의무를 저버렸고, 박근혜 정부 역시 국민 생명 보호의 의무를 저버렸다. 그런데 그 당시에 대통령과 정부에게 책임질것을 지금과 같은 수준으로 엄중히 요구했었나? 무능한 정부를 비판하는 목소리보다는 슬픔에 젖어 사회 전반이 우울감에 빠져있었던것 같다. 그리고 그 슬픔은 분노로 바뀌지 않고 슬픔으로 끝났다. 즉, [2003: 1단계 사태->2단계 슬픔->3단계 슬픔]의 구조를 가진다. 오늘날은 참사의 슬픔이 분노로 바뀌었다. 즉, [2014:1단계 사태->2단계 슬픔->3단계 분노 -> (이후 각종 탄핵사유가 드러나며) -> 4단계 폭발]로 이루어졌다.

그때와 지금은 무슨 차이가 있길래 슬픔이 분노로 이어지지 못했을까? 왜 그때는 정부의 무능을 비판하는 항의의 집회가 아닌 추모집회만 있었을까? (뉴우스의 댓글은 나의 댓글이 아님)

http://news.naver.com/main/read.nhn…


2017.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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