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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생애와 저술 

2   사상적 배경지식-데카르트 답습 

3   생각과 감각의 관계

     3.1   감각론

     3.2   상상론

 

4   말브랑슈의 신 

     - 유일한 참된 원인으로서의 신 cf) 기회원인론

5   말브랑슈와 인간의 자유

6   신 안에서의 영원한 진리의 파악

7   말브랑슈, 스피노자, 데카르트, 버클리(말브랑슈의 업적) 

 

 

1   생애와 저술

  1638년 파리 생. 라 마르셰(La marche)대학에서 철학을 공부, 그곳에서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대해 비호감, 이후 소로본에서 신학을 공부.

  1664년 목사로 임명되는 해에 데카르트의 유고 <인간론>을 접한다. 데카르트 철학에 큰 감명을 받고 데카르트 저술에 관한 공부를 시작. 

  말브랑슈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에, 보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플라톤주의, 아우구스티누스주의적인 전통 강하게 이끌리게 된다. 데카르트주의와 아우구스티누스주의로부터 받은 영감을 결합한 것이 그의 철학의 특징이다. 데카르트의 철학이 도달한 대부분의 견해가 모두 참이며 이 철학이 경험과 실재를 해석하는 도구로서 아리스토텔레스주의보다 훨씬 우위에 있다고 주장한 점에서 데카르트주의자이기도 하다. 말브랑슈는 철저한 기독교 사상가이다. 

  그는 데카르트주의의 철학을 새로운 종합을 구성하기 위한 도구로 간주하면서도, 아우구스티누스주의적인 전통[1]에 따른 철학자라는 인상을 준다. 그래서 단지 데카르트주의자, 단지 아우구스티누스주의자라고 분류하기에는 어패가 있다. 말브랑슈는 이 두 부류에 모두 속한다. 말브랑스 스스로는 자신의 철학은 아우구스티누스와 데카르트 그리고 스콜라철학의 반대가 종합된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사상에서 중세 스콜라 철학의 영향을 받았음 부인하기 어려워 보인다.

 

A.   생애

        i.        말브랑슈는 1638년 파리 생.

        ii.        라 마르셰(La Marche) 대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철학 공부-흥미를 가지지 못함.

        iii.        소르본에서 신학 공부.

        iv.        1660년 오라토리오 수도회 가입.

        v.        1664년 목사로 임명. 바로 그 해 데카르트의 유고작 [인간론]을 접한다.

        vi.        이어서 데카르트 철학에 큰 감명- 본격적인 공부 시작.

 

B.   저술

        i.        [진리의 탐구] (1674-75)

                 착각과 오류의 원인들을 탐구하면서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올바른 방법에 관하여 논의하다.

        ii.        [진리의 탐구에 관한 설명] (1678)

                  진리의 탐구에 이어 등장한 저술

        iii.        [자연 및 은총론] (1680)

                  기회원인론의 주장을 초자연적인 질서에 적용하는 것과 인간의 자유를 신의 은총의 효력과 조화시키는                      것 등의 주제가 다루어지다. 1689년 말에 가톨릭의 금서목록에 오르게 된다.

        iv.        [기독교적 성찰] (1683)

        v.        [도덕론] (1684)

                  오직 하나의 참된 도덕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기독교의 도덕이며, 스토아 학파와 같은 다른 도덕적 체계들                    은 참된 도덕성의 기준을 만족시키지 못한다는 주장을 펴다.

        vi.        [형이상학에 관한 담화] (1688)

                   말브랑슈 자신의 체계를 요약하여 설명하다

        vii.       [운동의 전달에 관하여] (1692)

                  순전히 과학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다.

        viii.      [신의 사랑에 관하여] (1697)

                   보쉬에(Bossuet)가 대단히 칭찬하였던 페늘롱(Fenulon) 신의 순수한 사랑에 관한 이론을 논의하다.

        ix.        [기독교 철학자와 중국 철학자의 대화] (1708)

                   신의 현존 및 본성과 관련된 주제를 다루었다.

        x.        [물리적 전() 운동에 관한 고찰] (1715)

                  말브랑슈 최후의 저술이며 얀센주의를 대변하는 부르지에(Boursier)의 말브랑슈에 대한 반박서인 [창조에                    관한 신의 활동 또는 물리적 전 운동에 관하여] (1713)에 답하기 위하여 쓰다.


[1] 아우구스티누스는 교부학 혹은 교부론의 대표자다.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중세의 사고 형성에 큰 역할. 플라톤의 위계질서의 원리(감각, 그림자, 이데아..)를 따름. 이를테면 가장 낮은 것은 물체, 그 다음 인간의 영혼, 그 다음 신. 이런 식. 그리고 신만이 가장 탁월한, 완전한 존재, 피조물은 불완전한 존재. 지식이라 함은 이처럼 불완전하고 변화하는 것으로부터 얻을 수 없다. 불완전하기 때문에. 

 

2   사상적 배경지식-데카르트 답습 
  말브랑슈는 두 종류의 실제가 있다고 말한 데카르트의 구별- 즉 정신적이고 비연장적인 실체와, 여러 가지 다른 형태로 변형될 수 있으며 운동 가능한 물질적인 실체 또는 연장성 사이의 구별을 받아들인다. 

  물질적인(비정신적인) 실체와 연장성[2]을 동일시함으로써 그는 물체의 성질에 관한 한 데카르트와 동일한 결론을 이끌어낸다. 그러나 이 사실이 감각적 지각들을 검토하면서 말브랑슈가 단지 데카르트의 주장을 그대로 따랐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물체에 관하여 상당히 자세히 검토함으로써 물체의 특징들을 나름대로 지적하고 있다. 

  또 말브랑슈는 진리를 탐구함에 있어 지켜야만 하는 몇 가지 규칙들을 제시한다. 이중 가장 중요한 일반 규칙은 우리가 확실한 관념을 지닐수 있는 대상들에 대해서만 추론을 해야 하며, 가장 단순하고 쉬운 것으로부터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데카르트를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는 감각은 서로 다른 네 가지 요소로 구별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네 가지란 1. 대상의 작용(예를 들면 개체의 운동과 같은), 2. 감각기관 및 신경-두뇌의 변화, 3. 정신 내에서 일어나는 감각 또는 지각, 4. 정신이 내리는 판단. 이 그것이다. 이에 대한 부가설명은 없다. [3]


[2] 외부 공간에 대한 느낌. 물질적인 것. 

[3] 이런 요소들은 함께 별현되고 또 순간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이들을 혼동하여 감각이 순전히 나의 정신 내에서 일어나는 정신적 사건이며, 나의 육체 또는 다른 어떤 곳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는 점을 잊어버리곤 한다- 오류. 그리고 이는 어떤 위계적 모습이라 볼수 있지 않을까 싶다.

 

3.   말브랑슈의 오류론-오류의 원인으로서 감각

말브랑슈에 따르면: 오류는 인간의 비참함의 원인.

즉(다시 말해) 이 세계에 악을 만들어 내는 것의 원인은 잘못된 원리-즉 오류에 있다.

  But) 이 말은 인간이 필연적으로 오류에 빠진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말브랑슈는 사람은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존재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 능력을 지닌 존재). 그 가능성에 대한 일반규칙이라 할수 있는 것은 데카르트의 그것과 유사하다. 이를테면 이런 것 : 우리는 자명하게 파악한 것을 제외하고는 다른 어떤 것에도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독실한 기독교도가 되기 위해서는 무조건 믿는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철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명하게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말브랑슈는 오류의 원인에 대해 검토하면서 먼저 인간의 지각능력을 살펴본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지각능력은 세가지 것이 있는데 : 상상력(상상력은 뒤에서 다른다), 순수오성[4], 감각이 그것이다. 이 요소들은 함께 발현되고 순간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혼동, 즉 오류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말브랑슈에 따르면 인간을 속이는 것은 감각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선입견이 우리를 속인다고 한다. 풀이하자면 사물과 우리 사이의 관계에서 물자체로서의 사물의 본성은 실제로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이 아닌데 우리의 선입견이 그것을 실제로 확실히 나타난다고 판단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말브랑슈의 말을 빌려 예를들자면, 온기를 느낄 때 우리는 온기를 느낀다고 믿는 사실 자체에 의해서 속임을 당할수 있다. 그 온기가 그것을 느끼는 정신의 외부에 있는 것이라고 판단한다면 우리는 속임을 당한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그는 감각은 서로 다른 네 가지 요소로 구별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는 반드시 감각을 동반하는 자연적 판단 또는 자동적 판단, 그리고 비록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가능한 한 억제하여야만 하는 임의적 판단을 구별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즉 이것이 우리 자신의 선입견이라고 할수 있다. 

  결론적으로 감각에 대한 말브랑슈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 우리의 감각능력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물체들과 우리의 육체 사이의 관계를 알려주는데에는 충실하지만, 감각은 물자체로서의 물체들이 어떠한가를 우리에게 알려줄수는 없다. 감각능력은 오로지 건강과 생명을 보존하는데에만 사용해야 한다. 우리의 감각능력은 오로지 우리의 육체의 보존을 위하여 주어진 것일 뿐이다.

 

 Cf) 추가사항 : 말브랑슈는 생리적인 과정도 감각에 포함된다고 말한다. 신경조직: 동물정기가 통과하는 미세한 관 또는 통로. 외부의 대상이 우리의 감각기관에 영향을 미치면 신경조직의 말초적 표면이 운동을 시작하며 동물정기가 이를 두뇌에 전달한다. 그리고 그런 생리적 과정에서 이 동물정기는 두뇌에 어떤 흔적들을 남긴다. 두뇌의 섬유조직에 찍혀있는 흔적들- 그리고 인간은 이런 흔적들에 영향을 받아서 일종의 정신적 심상을 낳게 되는 것이다. 이때의 심상은 비자발적 심상이다. 기계론적 설명과 같다. 그리고 그 흔적들은 상호 영향을 끼친다. 이러한 흔적의 결합은 생명의 보존을 위해 필요한 것이다. 이를테면 위험에 대한 태도. 이를테면 63빌딩에서 아래를 내려다봄으로써 아래로 떨어질 위험이 있다는 흔적, 거대한 바위가 어떤 물체 위로 떨어지며 부서지는 모습의 흔적, 이런 흔적들은 상호작용하여 죽음이라는 개념으로 확장되게 된다. 

 

4.    말브랑슈에게 상상력이란?

  상상력은 물체에 대한 심상을, 그 물체가 현존하지 않을 경우에도, 즉 우리가 지금 그 물체를 실제로 지각하고 있지 않을 경우에도 산출하고 재산출하는 능력이다. 이 상상력은 오류의 다른 근거 또는 원인이다. 상상력의 산물은 일반적으로 감각보다 약하지만 때로는 그 상상력의 산물이 매우 뚜렷하여 생리적인 관점에서 볼 때 감각과 똑 같은 호소력을 지니는 경우도 있다. 이럴 경우 우리는 오류에 빠지게 된다. 이 상상력에 관한 논의는 [진리의 탐구] 3장에 있다. 말브랑슈에 따르면 몇몇 사람들의 두뇌는 전혀 중요하지 않거나 비교적 별로 중요하지 않은 대상으로부터 매우 깊은 흔적을 받아들인다고 한다. 이 자체는 잘못이라고 할수 없으나 만일 상상력이 이러한 흔적들에 의해서 지배된다면 이는 오류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감각과 상상력의 오류는 육체의 본성과 성향으로부터 생겨나며 정신이 육체와는 무관하다는 점을 인지함으로써만 알 수 있다고 본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만일 물체에 대한 심상이 그 물체와 우리와의 관계가 아니라 물자체로서의 물체를 나타낸다고 판단한다면 우리의 판단은 오류에 빠지게 된다.

 

 

5.    말브랑슈의 신- cf)기회원인론[5]

-유일한 참된 원인으로서의 신 

앞에서 외부의 대상이 우리의 감각기관을 자극하며 동물 정기가 두뇌의 섬유조직에 흔적들을 만들고 그 만들어진 어,,, 심상이나 관념들은-상상 등- 이러한 생리적 과정에 기인한 것이거나 그 결과인 것인데,

 다시 말해 정신이 동물 정기의 움직임을 일으킬 수 있으며 그 결과로 경우에 따라서는 상상력이 자극되거나 아니면 육체를 이루는 각 부분들이 움직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신과 물체 중 어느 하나도 결코 다른 하나에 직접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말한다. 육체로부터 정신이 독립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또 이상하게도 그들 둘 사이는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음을 말한다. 말브랑슈는 이를 둘 사이의 상호작용이 아닌 대응관계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정신은 사고하지만 육체를 움직이지는 않는다. 육체는 신에 의해서 정신에 적합하도록 만들어진 일종의 기계일 뿐이다. 정신이 육체에 힘을 불어넣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 물리적 사건과 정신적 사건 사이의 대응관계- 말브랑슈는 양자 사이의 어떤 필연적인 연결, 인과성을 찾을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우리 자신이 팔의 움직임의 자연적인 원인임은 분명한 것이나 결코 참된 원인은 아니라는 것이다. 적절한 비유일지는 모르겠지만 이를테면 시계가 움직일 때 시계의 시침과 분침과 시침에 대한 자연적인 원인은 침 아래 있는 나사와 부품, 테옆들이지만 그것이 결코 근본적인 동자(動者)는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팔을 움직인다고 해도 그것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동물 정기를 통해서 자신의 손가락을 움직이려면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팔을 움직일 수 있겠는가? (즉 어떻게 움직이는지는 모르고 움직이니까 움직인다 또는 감각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 이를테면 내가 그렇게 감각하니까) 이런 사실들은 나에겐느 매우 명백한 것으로 보이며 단지 모든 것을 감각적으로 받아들이려는 사람들은 이를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깊이 있게 생각하여 받아들이려는 사람은 이를 명백하게 깨닫으리라 나는 생각한다  즉 진정한 인과적 행위자는 자신이 행위하고 있다는 사실(우리는 사실만 알 뿐이다)과 , 어떻게 행위하고 있는가를 모두 인식할수 있어야만 한다는 가정을 하고 있다. 이렇게 말한다.  참된 원인이란 우리의 정신이 그 원인과 결과 사이에서 어떤 필연적인 연결점을 지각할 수 있는 그러한 원인이다. 우리는 생각하며 움직일수 있으되 왜, 어떤 이유로 생각하며 움직일 수 있는지는 모르는 것이다. 말브랑슈의 결론은 : 참된 원인이 된다는 것은 창조하는 행위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어떤 인간도 그러한 창조하는 행위자가 될 수 없다. 신이 그런 능력을 인간에게 전해줄수도 없다.[6] 그러므로 신이 팔을 움직여야겠다는 나의 의지 작용을 기회로 삼아 나의 팔을 움직인다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다. 신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일어나는 모든 것을 의욕한다 (창조주로서의 신은 모든 의욕을 행함에 있어서 자신 이외에는 다른 어떤 궁극적 원인도 지니지 않는다.)

 

  예를 들어 a 뒤에는 항상 b가 뒤따른다고 생각해보자. 이 질서는 항상 보존된다. 이 질서가 왜 보존되는지 우리는 모른다. 겉으로 볼때는 a 뒤에는 항상 b가 따르기 때문에 a가 b의 원인처럼 보인다.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 왜 그런 질서가 보존되는지는 모른다. 그 질서가 보존되는 힘이야말로 진짜 b의 원인이다. 그 보존은 신만이 할 수 있다. a는 그저 신의 활동기회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a와 b 사이의 결합과 관련하여 반복적인 연속성의 관계 이상의 것을 발견할수 없다. 그리고 이것은 정신과 육체의 관계에서도 적용된다. 

 

6.    말브랑슈와 자유

  말브랑슈에 따르면 오직 육체들의 창조자만이 육체들을 움직이는 자가 될 수 있다. 말브랑슈에 따르면 우리 스스로는 장소를 바꾸거나 팔을 움직이거나 단 한마디의 말조차 할수 없다. 우리 스스로는 아 우주 안에서 가장 미미한 변화도 만들 수 없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육체를 움직이는 것, 팔 움직이는 것과 같은, 이 가능하다고 생각했을까?

그의 말처럼 신이 유일한 참된 원인이고 우리의 모든 의지 작용의 원인이라면 우리 인간의 자유는 부정되어야 한다. 그런데 말브랑슈는 인간의 자유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 자유를 부정하지 않기 위해 말브랑슈는 인간의 자유와 참된 유일원인으로서의 신을 조화시키고자 한다. 그 논증에 대한 이해는- 본인은 감각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으로서 누군가에게 이해시켜 줄만큼 납득하거나 이해할수 없었다. 그렇기에 생략한다.

 

  먼저 그는 가정한다: 신은 정신적인 피조물의 내부에 자신을 향한 성향을 심어놓았다고. 이 심어진 성향이 어떤 성향인가 하면 선 일반을 향한 성향이라. 본성과도 같은 것이다. 그런데 우리 세계는 유한한 세계이다. 그렇기에 지금 상태의 우리는 유한한 선이나 유한한 선들의 집합만을 추구할 수 있는데, 유한한것은 유한하기 때문에 우리는 결코 만족할수 없게 되는 것이다. (참고로 여기서 말하는 우리가 선 일반을 향한 성향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는 본성적으로 행복을 획득하려는 성향을 지니고 있다는 말과 같은 의미이다. ) 그런에 아까 말했든이 유한하기 때문에 어떤 유한한 선도 선 일반, 즉 궁극인, 즉 최고 성향의 완전한- 무한한 선에 이를수 없다. 이는 유한한 세계 안에서의 인간의 타락의 발생을 초래한다. 그리고 그렇게 타락은 무지, 무질서, 오류를 낳고, 또 우리의 상태를 바로 의식하지 못하게-즉 오류라는 큰 패러다임 틀 속에 있게끔 만든다.

 

 말브랑슈에 따르면 이 최고의 무한한 선인 완전한 선, 즉 완전한 행복, 궁극적 행복은 오로지 신 자신에 의해서만 충족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돌아와 말브랑슈는 지금까지 이렇게 말해온 일련의 본성이나 성향, 선-행복을 추구하고자 하는, 신에의해 심어진 그 기질을 자연적 성향, 자연적 운동들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고 이 패러다임 안에서의 자유라는 것은 말한 것처럼 그러한 경향을 통해 특정한 끝맺음-신의 선- 에 이를수 있게 만드는 능력인 한에서의 자유가 있는 것이다. 이 경향은 저항할 수 없는 것이다. 심어진 자연적 본성이자 성향이니까. 따라서 특정한 유한한 선과 관련해서 볼떄, 즉 유한한 의 체계-그 패러다임 내에서 한해, 유한한 것을 통해 끊임없이 무한함을 찾으려는 움직임 몸부림- 그 틀 속에서의 몸부림, 비록 불가능하지만 갈구하는, 불가능하기에 다양한 방식으로 찾아가는 틀 속의 다양한 몸부림의 방식에 한해, 우리는 자유롭다는 것이다. 

 

  참고로 말브랑슈는 만약 우리의 본성이 아담과 이브의 범죄에 의해서 타락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정신의 기본적 경향성들을 직접 인식할수 있었을 것이라 말한다. 즉 타락 이전의 인간은 심신병행론적인 법칙들의 작용을 유보시킬 수 있는 초자연적 능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타락 이후에는 인간 두뇌의 주된 부분에 흔적들을 남기는 물리적 사건들의 연쇄가 필연적으로 두뇌에서의 생리적 현상들보다 앞서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물체들이 인간의 두뇌에 흔적을 남길 때마다 정신의 운동이 그 결과로써 뒤따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7.   말브랑슈의 정신과 관념 관계

 말브랑슈에 따르자면 어떠한 작용에 의해 정신이 얻게 되는 사물에 대한 여러 관념들은 그 관념에 대응하는 물체로부터 생겨난 것도 아니며(철저히 단절되어 있기 때문에) 그리고 인간의 정신 자체로부터 생겨난 것도 아니다. 인간 자신으로부터 생겨난다고 한다면 이는 신의 창조적 능력의 지님을 전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정신 내부에 태초부어 있었던 완벽한 본유관념이 있었다고 볼만한 근거도 없다고 생각한다. 말브랑슈는 우리가 지니는 관념들을 타당하게 설명하기 위해서 성 아우구스티누스[7]의 권위를 빌어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우리는 신 안에서 모든 것을 파악한다

 말브랑슈는 우리가 신의 안에 있는 우리의 관념들을 파악할 수 있다고 전제나 공리로서 가정하는 것 같다. 그 관념 안에서 우리는 영원한 진리- 정확하게는 진리의 관념들을 파악할 수 있다. 

 

8.   말브랑슈 사상의 의의와 영향

A.   말브랑슈 사상의 의의

 말브랑슈의 사상은 완전한 원인으로서의 신을 도입한다는 점에서 중세 신학자들과 별반 다른 것 같지는 없다. 하지만 혹자는 그를 데카르트와 스피노자 사이를 연결하는 인물로서 간주하는, 나름 후한 역할자로서의 가치를 부여하기도 한다.

 그리고 데카르트를 따르고 있으면서도 데카르트와는 다소 다른, 즉 일말의 독창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 그 일말의 독창성이라 함은 명백히 신 중심적이고 신 존재에 대한 전제적 패러다임을 지니고 있다는 것과, 물체-감각(육체)-정신 사이의 인식관계를 신이 보증해 준다고 하였던, 그래서 정신과 육체 사이의 상호작용이 가능하고 그것을 신이 보증해준다고 말했던 데카르트와는 달리 물체와 정신 사이의 완전한 단절을 주장했다는 점이다. 

 즉, 정리하자면, 말브랑슈의 사상이 유용하든 무용하든 의미나 가치가 있든 없든, 독창적이거나 독자적인 생각을 했다는 바로 그 점에 한해 의미를 둘수도 있을 것 같다는 것이 나의 입장이다. 즉 인간의 생각 지평의 다양한 확장 가능성을 증명해주었다는 점.

 

B.   말브랑슈의 영향

  말브랑슈의 사상은 종교계에서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그 예로 오라토리오 수도회의 토마신이라는 신학자, 베네딕트 수도회의 인물인 프랑수아 라미, 제수이트 교도인 이브 마리 앙드레, 수학자이며 물리학자인 한 르네 페데, 학자 존 노리스 등에게 지지받고 이용되었다는 점이 있다. 그리고 말브랑슈의 사상은 경험론에 반대하는 많은 학자, 저술가에게 이용되었다.


[4] 두뇌 안에 외부의 대상에 대한 구체적인 심상을 형성하지 않고도 그 대상을 인식하는 능력.

[5] 말브랑슈의 기회원인론은 마음 혹은 정신과 육체의 관계에서 육체를 정신의 원인으로 보거나 아니면 마음이나 정신을 육체의 원인으로 보는 입장 또는 상호 연결되어 있다는 두 이원론적 입장을 넘어서서 신이 정신과 육체의 모든 활동의 근본적 원인임을 주장하는 철학이다. 이 입장은 철저하게 신 중심적이어서 마음 혹은 정신의 가장 중요한 관계는 육체와 맺어지는 관계가 아니라 신과 맺는 의존관계에서 그 모든 원인을 찾으려고 하였다.

[6] 아마도 신에 대한 전지전능성에 기인하는 것일듯.

[7] 그는 모든 것을 의심하는 '나'의 존재의 확실성에서 출발하여 회의론을 반박하였는데, 이 확실성은 후에 데카르트가 '나'의 확실성에서 자기 학설을 세웠던 발상과는 달리, 영원한 진리, 즉 이데아로서 영혼의 내면에 스며든 신의 빛(라틴어 illuminatio)에 의한 자기 존재의 확증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는 세계가 신의 이데아에 따라 그 의지에 의해 창조된 것이고, 원죄를 짊어진 인간은 악을 행하는 자유를 가질 뿐이며, 구원은 오로지 신의 은총에 의해 가능하고, 이 구원의 대상이 누가 되는가는 신의 영원한 예정에 의한 것이며(예정설) 교회가 이 은총을 매개한다고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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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모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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