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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을 지성과 욕망 중 하나의 범주에 넣으라 한다면 사랑은 지성이 아닌 욕망에 속할 것이다. 그래서 ('사랑을 이루다'나 '사랑하다'가 아니라) '사랑의 완성도'를 높이고자 한다면 그 욕망을 드러내는 것만이 유일한 해법일테다. 그리고 사랑의 상태는 두가지로 나눌 수 있겠는데 일방적 상태와 소통의 상태가 그것이다. 일방적 상태에서는 욕망의 현현(顯現)이 빠져 있다. 소통의 상태는 즉 사랑을 향한 욕구, 욕망이 현현되어 객체에 이르렀으며 상대 역시 이를 인지하여 주체를 향해 욕망을 현현시킨, 즉 합일의 상태일 것이다. 일방적 상태의 사랑은 반쪽짜리 사랑이다. 그런데 나머지 반쪽을 얻기 위한 '욕망의 솔직한 드러냄'이라는 행동은 누군가에게는 참으로 쉬운 일이지만 또다른 누군가에게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욕망이라는 의식의 표출을 지성이라는 것이 쓸떼없이 끼어들어 막고 있기 때문이다. 글쎄, 그 표출을 막고있는 것이 지성인지는 분명치 않다. 지성으로 포장된 비겁함일수도 있고, 자기확신 부족일수도 있다. 아니면 이성(理性)일수도 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아무짝에 쓸모없는 반쪽짜리 사랑에 나머지 반쪽을 추가함으로써 사랑을 가능태(可能態)에서 현실태(現實態)로, 즉 공상에서 '현실로의 가능성 상태'로 바꾸기 위해서는 사랑의 대상을 향한 지극히 자연적이고 거친 욕망의 발로(發露)를 방해하고있는 그 기제(機制)를 이겨내야만 한다. 문명이 아닌 야만이 되어야 한다. 그것 참 어려운 일이다. 평생 그 기제를 이겨내지 못할것이 운명이라면 차라리 천장에 목메달아 죽는 것이 나으리라. 왜냐하면 사랑이 없더라도 생존에는 지장이 없을지언정 그 삶을 사랑있는 삶보다 가치있게 만들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삶은 가능하지만 의미있는 삶은 아닌 것이다. 그래서 고민이다. 지금까지의 삶을 귀납적으로 추려내자면 방해기제를 이겨내고 욕망을 현현시킬 가능성이 제로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으로의 작업은 철학적이나 논리적으로 비판받고 있는 귀납적 추론과 그로부터 나온 결론 사이의 "비약"을 비약 아닌 것으로, 즉 정당한 것으로 옹호하는 작업을 철학적 실용주의neo pragmatism와 함께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나의 실존적 문제이며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로 귀결되기도 한다. 어차피 탐구의 목표를 설정해놓았으니 빤히 보이는 그 결말 앞에서 선택지는 두가지 같은 한가지로 좁혀질 수밖에 없다. 바보같이 엔딩 크레딧을(ending credit) 끝까지 보고 문밖을 나서느냐 아니면 현명하게 판단하여 미리 문밖을 나서느냐. 사랑은 참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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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모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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