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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틀렸을 가능성이 있음... 끄응,; 제대로 공부 안하고 대충 쓴거니 혹시 보는 사람은 지적좀 부탁바랍니다.




 19세기 말까지 미국과 서유럽의 몇 개 국을 제외하고는 산업혁명과 헌정을 함께 이룬 나라는 유라시아 대륙 맨 끝 일본이 유일했는데 바로 그 변화의 시작점이 메이지 유신(명치유신)이다. 이는  19세기 중반부터 후반에 걸쳐 일본열도에서 일어난 사회변혁이다. 이번 장에서는 바로 그 메이지유신의 흐름을 살펴보도록 할 것이다. 참고로 명치유신과 메이지유신은 같은 이름이다.


 명치유신에 대한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관련된 역사를 간단히 서술하는 것이 좋을듯 하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98년에 죽은 이후 1600년에 이르러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세키가하라 전투 승리 후 상징적이고 권력이 없던 왜왕으로부터 쇼군으로 임명받은 뒤 열도의 실세가 되는데, 흔히 막부라고 일컫는 자가 된 것이다. 이때까지 일본은, 즉 일본의 사무라이 세력은 봉건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12세기 말 실권을 장악한 일본 사무라이 세력 중의 우두머리인 쇼군이 설치한 막부가 중앙정부가 되고 그 아래 각 무사단의 우두머리가 영주(즉 다이묘)가 되어 세습적 통치를 했다. 그 후 약 100년 간의 일본식의 전국시대를 거쳐 방금 말한 도쿠가와 막부(1603~1868)가 수립된 것이다. 이 도쿠가와 막부는 1868년 메이지 유신때까지 존속했으므로 일본은 근 700년동안 사무라이 세력에 의학 봉건제, 즉 막부지배가 계속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도쿠가와 막부는 이전의 정권에 비교하면 중앙집권적인 성격을 강하게 갖고 있었다. 왜냐하면 도쿠가와 막부는 다른 봉건영주들을 압도할만큼 힘을 가지고 있었기 대문이다. 그 힘이라는 것은 군사적 힘과 경제적 힘이다. 군사적 힘은 차치하더라도 그리고 경제적으로 압도적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대략 당시 일본 전체 쌀 생산량의 1/4가량을 장악하고 있었다.[1] 당시 전체 생산량이 약 3000만석이었는데, 그 중 막부 직속 할당량만 420만석, 그 휘하 가신인 하타모토, 고케닌의 할당량만 약 260만석, 700만석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2] 왜왕(日王) 3만석, 유력한 귀족집안이 3천석, 왜왕 조정의 전체 석고를 다 합쳐도 15만석 이내라고 하였으니 그 규모는 짐작할만 하다. 그 외에 각종 생산, 무역 경제적 요충지를 독점하다시피 했다. 그 요충지중 주목할만한 지점은 쇄국 체제하에서 유일하게 서양, 즉 네덜란드와 무역을 하는 도시였던 나가사키이다. 이곳을 막부의 직할령으로 삼아 해외무역을 독점했던 것이다.


 막부사회의 엄격한 신분체계를 기반으로 한 사무라이 세력은 이처럼 17세기 초부터 적과 일왕에 대한 정치적 견제를 성공적으로 이루며, 막부 초 마련된 여러 제도적 장치를 활용해 19세기 초까지 독보적이고 안정적인 체제를 유지해나간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에도 막부시대의 사회적 안정덕분에 상업과 기술, 예술이 발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지도층인 무사들은 자신들의 조직이나 기능을 개선, 쇄신하는데 별 자극을 받지 못했다. 그들의 관료 조직은 고도로 발전해 나갔지만, 군사적 능력은 눈에 띌 정도로 퇴보하였다. 조상의 칼과 갑옷을 가진 이들은 17세기에 마지막으로 사용했던 전술과 무기 체계를 더 이상 발전시키지 못했고, 19세기에 이르러 서양에서 새로운 군사 기술과 전술 개념이 도입되니 그제서야 이를 봉건 사회의 특권과 전통에 대한 위협으로만 인식했을 뿐이다. 서양 문물에 대한 군사적 대응이라고는 시대에 뒤떨어진 검술 전문가들에 의해 주도된 전통 무예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양이 운동이 전부였다.[3]


 군사적으로는 별 진전이 없던 반면 도시민들의 활동은 그 범위와 중요성이 커졌는데, 사무라이나 영주들은 도시에 머물기 위해 자신의 영지에서 거든 가산을 도시 상인들에게 지속적으로 소비했다. 도시에서의 무사계급의 생활은 상인들의 협조와 도움 없이는 유지되기 어려울 정도였다. 도시에서의 생활은 무사계급들이 타락수준까지는 아니었지만 의례적 과시나 장식에 빠져들게 만들었고, 그 결과 그들 계급의 부채가 증가했다. 또한 실리보다는 명예를 중시하는 그들의 사고방식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제대로 대체하지 못하였다. 19세가 초반에 이르면 일본 지배계급은 정점에 도달한 사회의 높은 생산력을 그들의 소득이 따라잡을 수 없었다. 풀어서 이야기하자면 세금으로 얻을 수 있는 수익은 한정적일 수밖에 없었는데, 그 세금을 초과하는 상인, 도시민, 비 무사계급, 농촌지도자, 영주들의 잉여재산 축적이 증가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영주의 아래에서 영주의 세수로부터 한몫 받으며 생계를 유지할수밖에 없었던 개인 사무라이들 제대로된 대접을 받을 수 없었다. 신분이나 직위 상승으로 하위 무사들의 희생을 보상한다고는 하지만 대부분 성공하지 못한 무사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무사 계급 일부만이 신분 상승을 할 수 있는 수준으로 세수가 낮았다. 또 무사들의 수가 증가하며 이는 더 복잡해졌다. 따라서 한 집안의 아버지인 무사들이 자신의 녹봉만으로 생계를 꾸려나가기가 힘든 경우가 흔해진 것이다. 게다가 다이묘(영주)들이 자신의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사들에게 돌아갈 녹봉 일부를 '빌려가는' 지경에까지 이르러 대다수의 사무라이들은 영예롭지만 궁핍한 삶을 살게 되었다. 19세기 초중반에 접어들면서 농민 반란과 봉기는 눈에 띄게 증가했다. 지면으로 다 설명 못한 막부 정권의 경제적 위기와 사회적 부조리가 대체로 심화되고는 있었지만 19세기 중반까지 약 250년에 걸쳐 영속해오고 있었다. 막부 정권은 개혁시도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막부의 지출이 수입을 상쇄하는 등 실패가 지속되었다.


 도쿠가와 막부의 지배 형태는 세 가지 주요 관심사로 구분할 수 있는데,[4] 첫째는 유력한 거대 영주(다이묘)를 통제하는 것이다. 둘째는 자국 내에서 쇼군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세력을 차단하는 것이다. 셋째는 유력한 거대 영주(다이묘)가 외부 세계와 접촉하는 것을 차단하는 일이다. 그런데 앞서 말한 것처럼 막부 정권은 이를 효과적으로 실행할 재원적 및 기타 능력을 19세기 초중반에 상실한 상태였다. 상업과 도시의 급속한 발달때문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 미국 페리제독에 의해 미일 화친 조약체결이 19세기 중반인 1853년 강요됨으로써 이를 시발점으로 일본은 개화적으로 변화한다.


 그런데 앞서 말한 미국과의 개화는 막부의 독단적 처사였기에 개화를 두려워한 반 막부세력이 일어나 막부와 대립하는 격동을 겪었다. 그러다가 700여 년 내려오던 막부가 1866년 패배하였고, 1867년에는 왕정복고가 이루어졌다. [5] 이때의 정부를 메이지 정부라 한다. 메이지 정부는 군사, 정치 등에서 개혁을 추진하고, 부국강병의 기치하에 구미(歐美) 근대국가를 모델로, 국민의 실정을 고려하지 않는 관주도(官主導)의 일방적 자본주의 육성과 군사적 강화에 노력하여 새 시대를 열었다. 이 유신으로 일본의 근대적 통일국가가 형성되었다.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가 성립하였고, 정치적으로는 입헌정치가 개시되었으며, 사회 ·문화적으로는 근대화가 추진되었다. , 국제적으로는 제국주의 국가가 되어 일왕제적 절대주의를 국가구조의 전분야에 실현시키게 되었다. [6]



[1] 박훈 저, 「메이지 유신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p19, 민음사, 서울: 2014

[2] 마리우스 B. 잰슨 저, 「사카모토 료마와 메이지 유신」, p.93, 푸른길, 서울: 2014

[3] 메이지 유신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p.25

[4] 마리우스 B. 잰슨 저, 「사카모토 료마와 메이지 유신」, p.93, 푸른길, 서울: 2014

[5] 인터넷 두산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92723&cid=40942&categoryId=31787

[6] 인터넷 두산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92723&cid=40942&categoryId=317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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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모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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