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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납주의를 옹호한다. 2013년 4월 씀.

 

 

 과학은 관찰로부터 시작한다. 정상적|온전한 감각기관을 가진 관찰자는 아무 것에도 사로잡히지 않고 그가 듣거나 보거나 한 것을 기록해야 한다. 그것이 관찰언명(=..단칭언명)이다. 특정한 장소|시간 의 한 사건의 언급에 해당한다. 특정 관찰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리고 이런 단칭언명들이 모여서 보편언명이 된다. 보편언명은 모든 장소|시간 에서의 특정한 사건에 대한 언명이 된다. 이 보편언명이 과학적 지식이 되는 것이다.

 

 이 일반화의 기초가 되는 관찰언명은 1.수적으로 많아야하고 2. 다양한 조건 아래서도 반복가능해야 하고 3, 어떤 관찰도 도출된 보편언명(법칙)과 모순되면 안된다. 이러한 흐름들이 추론, 바로 귀납적 추론이라는 것이다.


 현대의 연역적 추론에서 전제가 있다면 그 전제들은 관찰에 의해서 증명(확증)될 수 있으며, 하여 귀납주의에 있어서 진리의 군원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귀납적 원리는 정당한가라는 문제제기가 있다. 그것을 나열하자면

 1. 귀납적 추론에는 논리적 결함이 있다는 점

 2. 확률로서의 귀납주의의 부당성이 있다는 점.

 3. 관찰의 문제점 을 지적한다. 1번의 귀납적 추론의 논리적 문제점을 세분화하자면 귀납추리의 전제가 참이라 하더라도 결론이 필욘적으로 참일 수는 없다는 순환논증의 오류다.

 

 그 구체적인 사례는

  1-1. 관찰량의 애매모호함, 다시말해 얼마나 많아야 충분한 관찰량이라 할 수 있겠는가하는 점,

  1-2. 다양한 상황의 무한함이 있다.  2번의 확률론의 문제점을 조금 더 구체화하자면 확률적으로도 분모는 무한대가 되기 때문에 확률적으로 0이 된다는 주장이다.

 

 3번 관찰의 문제점을 조금 더 세분화하자면,

   3-1 관찰의 진정 순수한가하는 문제, 즉 관찰자의 경험은 관찰자가 가진 경험, 배경지식, 기대등의 영향을 받는다는 점이다

   3-2는 관찰의 이론의존성이다.


 하지만 이러한 위의 비판들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귀납적 추론을 향한 비판에 대한 나의 비판은,

  첫째, 귀납적 추론은 논리적으로 타당한 논증이 아닌 것은 맞다. 하지만 어떤 ‘사실’이나 ‘지식’은 논리에 호소할 성질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둘째, 관찰량에 있어서 “충분히 많은’이라 함은 1) 납득가능한 정도 또는 2) 명확,확실한 정도라고 생각한다.  단 한번의 관찰로도 명백하고도 또 무한히 충분한 경우가 현실세계에는 맹명백백 분명히 있으며, 또한 수차례~ 수백 차례의 관찰끝에 확증되는 경우도 현실에 분명 존재한다. 어느 것은 단 한번에, 어느 것은 수백 번에 확증된다고 그 자체를 문제삼지는 말자. 바보같은 짓이니.

 셋째, 확률에서 분모를 무한대로 규정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본다. 나는 무한대가 아닌 유한대로 놓아야 한다고 본다. 예를 들어 9999/& 이 아닌 9999/9999인 것이다. 왜냐하면 분모는 논리적으로 관찰해야 할 총 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결론을 낼 당시에 최종적으로 관찰한 개수를 집어넣어야 하기 떄문이다. 확률은 본것/본것이라고 생각한다. 9999개를 관찰했기 때문이며,  만약 9998/9999가 된다면 그 이론은 파기될 가능성이 있거나 확률론으로 떨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넷째, 비판 자체의 관대함이다. 다시 말해 왜 그 비판의 사례들의 헛점에는 엄격한 잣대를 대지 않는가 하는 점이다. 예를 들어보자면 만약 귀납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처럼 따라해 비판해보자면 비록 어떤 관찰이 99.9% 관찰자의 배경지식에 영향을 받더라도 0.1%의 그렇지 않은 순수한 관찰이 있기에, 그 비판은 나에게 꼬투리잡혀 부당한 것이 된다. 결론적으로 99.9%의 0.1%, 또는 99%의 1%에 문제제기하기 위해서는 그 반대가 되는 사례는 100%여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귀납주의자 역시 귀납주의 비판자들과 같은 방식으로 그 반대근거의 0.1% 내지 1%의 사례를 문제삼으며 비판근거의 정당성을 무너뜨릴 수 있다. 이러한 점 때문에 비판자들은 ‘비판하고자 비판자들 스스로 한발 물러’나게 된다. 예를 들자면 관찰의 물리적 성격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 모든 관찰자가 동일한 대상을 본다는 표현이 전전 의미없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점 등이 그것이다.

 

 종합적으로 귀납주의에 대한 비판을 나는 오류를 바탕으로 한 비판이라고 평가하고싶다. 굳이 단어화한다면, ‘논리학의 논리적 음모론적 오류’ 또는 ‘논리학의 논리적 꼬투리잡기의 필연적 오류’ , 또는 ‘과학적 검증에 있어서 철학적|인식론적 방법을 적용한 오류’라고 말하고싶다. 어쨌든, 결론적으로 나는 귀납주의에 대한 완전한 반박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며, 이에 따라 나는 최선이 없으므로 차선으로서의 귀납주의를 수용, 옹호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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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모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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