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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4.27 『노부인의 방문』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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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인의 방문

저자
뒤렌마트 지음
출판사
예니 | 1999-07-26 출간
카테고리
예술/대중문화
책소개
1921년 스위스에서 출생한 작가의 희곡집. 미국으로 간 한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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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성인입니다. 무단 스크립 / 인용/ 참조 금지.

소소하지만 저의 글이오니

 

『노부인의 방문』

무단 스크립 / 인용/ 참조 금지
 
1.「노부인의 방문」 줄거리
 젊었을 적 임신을 한 채 애인(알프레드 일)에게 버림을 받은 여자 차하나시안, 수십년이 흘러서 다 늙어버린 그녀는 엄청난 부자가 되어 고향으로 되돌아오면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고향은 전쟁의 여파로 인해 과거의 명성은 모두 잊혀 졌으며, 가난해졌다. 그런 고향을 그녀는 자신을 배신하고 버린, 자신이 창녀가 되게끔 원인제공을 했던, 그 알프레드 일을 죽이고자 온 것이다. 차하나시안은 시장과 마을주민들에게 한사람의 목숨을 대가로 자신의 고향에 대한 막대한 경제적 부흥을 약속한다. 정의라는 이름을 외치면서 말이다. 이에 시장과 마을주민들은 정의와 인도주의의 이름하에, 단호하게 그 제안을 거절한다. 하지만 곧 돈이 생길 것이라는 기대에 마을주민들은 돈을 흥청망청 쓰고 빚도 지게 된다. 일의 가게에도 많은 빚을 지게 된다. 그러면서 차츰 시민들은 알프레드 일을 표적으로 삼기 시작한다. 그들이 엄청난 액수의 돈 앞에 변한 것이다. 그들은 알프레드 일을 속이기 위해 마지막까지 다가올 일의 죽음에 대해 부인한다. 심지어 신부, 경찰, 서장까지 변한다. 결국에 가서 알프레드 일은 여태까지 믿어왔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하게 된다. 그것은 자신의 가족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 민주주의와 정의라는 미명아래 어이없는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참 아이러니하지 않을 수 없다. 정의로서 일의 죽음을 외치는 차하나시안과, 처음엔 정의로서 이를 거절한 시민들, 그리고 나중에 가서는 정의로서 일을 죽이는 시민들... 무엇이 진정한 정의인가를 생각해보게 하는 작품이다.


2. 원작과 연극의 비교
 원작은 대본과 같은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예를 들면, 일의 대사가 나오고 뒤이어 차하나시안의 대사가 나오는 식이다. 그리고 원작에서는 특정한 대사를 반복적으로 쓰는, 다소 해괴한 방식을 쓴다. 내용상에 있어서의 원작과 연극에서는 크게 다른 점은 볼 수 없었다. 다만 원작의 내용을 묘사함에 있어서 차이점이 있었으며, 원작에서 상상되었던 분위기와 등장인물의 캐릭터 역시 연극에서는 다소 다르게 나왔다. 극에서는, 원작에서 상상되었던 배경과는 너무 달랐다. 솔직히 말해서는 초라하고 어설펐다. 건물이나 일의 가계, 또 숲과 광장은 관객의 입장에서 그저 의미만 지각할 수 있을 정도로 장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연기자들의 연기도 또한 깊지 못했는데, 중간 중간 끊어지는 대사와 행동, 딱딱한 형식의 말투, 그리고 원작을 그대로 배낀 대사며, 대체적으로 연기다운 연기를 해주었다. 말 그대로 우리가 연극을 보고 있구나 함을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고 해야겠다. 내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연극이나 드라마, 영화에서는 관객이 이것은 연극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닌 사실을 보고 있는 것처럼 관객을 속이도록 노력하는데 비해, 이 연극은 처음부터 끝까지 연극임을 절실하게 지각했던 것이다. 글쎄 이것이 연극을 기획한 감독과 연기자들의 능력부족일지, 그들의 의도된 연출일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예술적으로 별로 좋지 않은 의도였음은 확실한 것 같다. 극을 보면서 지루함을 많이 느꼈는데, 그것이 내용상의 큰 기복이 없어서라기보다는 이와 같은 극 자체의 연출방식이 어설펐고 지루한 방식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 아무래도 영화를 생각하고 있다가, 일반의 영역을 벗어난 극을 보니 이러한 상상의 차이가 발생한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사악한 이미지의 차하나시안, 고향에 돌아온 차하나시안을 보면서 내심 불안해하면서 반기는 모습을 보이는 알프레드 일, 그리고 이중적인 태도의 시민등 극에서의 캐릭터 연출은 대체로 원작과 일치하는 모습을 보였다. 시종일관 어둡고 칙칙했던 연극의 분위기도 캐릭터들의 이미지를 한층 더 살려주는 듯 했다. 또 비극적 결말에 대한 암시와, 부정의한 현실에 대한 반감을 담은 듯 했다. 그러나 그러한 연출에 보는 나로서는 답답함을 많이 느껴 불편했다.


3. 차하나시안은 정의를 원하고, 시민들도 정의를 원한다?
 과거에 알프레드 일은 법정에서 편법을 통해 차하나시안이 임신한 자식이 일의 자식이 아니라고 속였다. 그로인해 그녀는 다른 사람들의 비웃음을 뒤로한 채 고향을 떠나게 되었으며 창녀로 전락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녀는 일의 죽음만이 정의를 위한 것이라 말한다. 분명 일은 잘못을 했다. 하지만 법적으로도 소급되지 않을 만큼 오랜 기간이 흘렀으며 잘못을 인정했다. 죽음이 모든 것의 해결책은 아니다. 결론적으로, 정의를 원한다고 말하는 차하나시안은 역설적이게도 부정의했다. 그녀가 원하고자 했던 것은 정의가 아니고 복수였을 것이다. 
 시민들은 너무나 이중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들의 태도에 나는 화가 나면서도 소름끼치기조차 했다. 이는 너무나 현실적이면서도 속물적여서 비판받아 마땅했기 때문일 것이다. 또 돈에 대한 인간의 무력함을 절실히 보여주기도 한다. 아니 혹 될 수 있다. 어이없게 죽음을 택한 알프레드 일에게도 너무 화가이는 인간의 무력함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단지 비정상적이게도 타락한 인간일 뿐일지도 모른다. 나는 이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정의와 부정의가 복잡하게 얽히고 얽혀 정의를 만들기도 하고 부정의를 만들기도 하고, 이러한 복합적인 과정을 통해 모든 것은 ‘자기합리화’가  난다. 또 부정의를 정의로 둔갑시킨 군중들이며, 민주주의를 통한 부정의의 행사, 진정한 정의를 회복하고자 하는 사람의 부재, 그리고 너무나도 현실적이게도, 부정의에 패배해버리는 정의에 화가 났다. 원작과 연극을 통틀어 이 작품은 비극 그 자체다.
 
작품에 대한 평가 : 10점만점에 9.5점 (매우 적극 추천)
연국에 대한 평가 : 10점만점에 6점 (비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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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모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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