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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보예 지젝

http://youtu.be/Fp0uv3fnYgI




슬라보예 지젝

슬로베니아 출신의 세계적인 사상가. 철학에는 헤겔, 정치학에는 마르크스, 정신분석학에는 자크 라캉 연관.

(chapter1상처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지금부터 본 주제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한국의 역사는 파란만장했다고 들었습니다. 고통이 극심했던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의 만행을 잊기 위해 한국 국민들이 많은 노력을 했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니체가 항상 말하는 표준화된 공식을 전도하는 방식의 생각을 한국 국민들이 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많이 듣는 말에 이런 예기가 있죠 "용사하되 잊지는 말자". 그런데 제가 듣기로는 한국 분들은 "잊자 그러나 절대 용서하자 말자"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그 태도가 옳다고 생각합니다. 생각해보면 "용사하자만 잊지는 말자"라는 말이 좀 위선적이지 않나요? 사실 그 문구 자체가 상당히 교묘하고 인간들은 조종하는 논리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당신의 만행을 용서하겠지만 얼마나 끔찍한 짓을 했는지 영원히 기억하겠다"라는 사고도 여기에 담겨져 있습니다. 한국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도 포스트모던[1]적인 태도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포스트모던적인 태도라는 것은 사어를 치유하기 위해서 더욱 노력하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사실상 한반도에서 겪었던 이 고통은 완전히 극복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신분석학에 따르면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것들은 어떻게든 결국 치유해야 하는 상처이자 트라우마라고 지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반대의 생각도 가지고 있습니다. 상처라는 것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기도 합니다. 대한민국은 국민들이 상처를 받는 것이 두려워서 항상 국민들을 보호만 하는 나라가 아닐 겁니다. 상처받지 않는다는 것은 완전히 고립됐다는 것 아닙니까?

(chapter2 두 얼굴의 한국 사회)

'프랑코 베라르디[2]'라는 이탈리아 철학자가 있습니다. 이본께서 한국에 대한 여러 편의 글을 썼습니다. 말씀하시길, 20세가 말이 됐을 때 수십 년 동안 지속되었던 전쟁, 굴욕, 굶주림, 끔찍한 전쟁의 흔적들로 인해 한국의 물리적, 인류적 환경은 그야말로 폐허의 추상으로 환원되었고, 그리하여 강력한 현대 허무주의에 순응해버린 도시가 되어버렸다고 하면서 "대한민국은 세계의 그라운드 제로다", "동시에 지구적 미래의 청사진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어쩌면 한국 국민들이 식민시대와 625 전쟁, 독재정권, 굶주림과 같은 많은 상처가 있었기 때문에 자연적 물리적 멍에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고, 그래서 어느 문화보다 자연스럽게 디지털시대로 전환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한국이 비워진 문화적 공간에 두 가지를 동시에 담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한 편에는 극단적인 개인화가 담겨 있고, 다른 한편에는 공동의 정신이 서로 연결되어진 사회, 즉 케이블링된 사회가 공존하는 특이한 사회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한국의 외로운 개인들은 저마다 작은 디바이스 스크린을 통해 사진과 트위터, 게임을 통해 서로 공유하면서 부드럽고 지속적으로 서로 연계되고, 완벽하게 분리되면서도 완벽하게 이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가 동시에 지적하고 있는 것은 대한민국이 청년층과 중년층의 자실률이 높은 국가 중 하나라는 것입니다. 한편으론 늘어난 수입, 영양상태, 자유, 해외여행 등 모든 것들이 개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국민들의 일상생활은 사막화 가속화되고 개개인들은 더욱 개인화되었으며 고용이 취약해짐에 따라 끝없는 경쟁에 시달리고 있고, 어쩔 수 없이 소외되고 고립될 수 밖에 없다는 거죠. 이것은 바로 환경의 사막화와 마찬가지로 감성의 사막화로 이어질 수 있고, 감성의 가상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고독과 소외에 휩싸여 있기 때문에 이러한 환경을 거부할 힘조차 없을지도 모르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읽어드린 내용은 베라르다라는 학자가 대한민국을 묘사한 내용이었습니다. 그가 말하고자 했던 한국의 모습은 "worldless(세계 없음)"이라고 해석이 가능한데요. 대한민국을 "세계 없음"을 대표하는 곳으로 묘사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나치 반유대주의 시대에도 "world"세상은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나치군이 행했던 악행이 끔찍하기는 하지만, 적어도 적이 누구인지 상정하고 유태인 음모론도 제기하는 등 목표와 이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면서 나름의 세상을 만들었습니다. 일종의 인지적 지도 그리기를 했다는 거죠.

(chapter3 글로벌 자본주의의 폐해)

 그런데 위험한 자본주의는 세계 전반에 "세계 없음"의 이데올로기를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자본주의에 참여하는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 의미 있는 인지적 지도 그리기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자본주의야말로 세계 최초로 의미라는 것에 전체적인 그림을 깨버리는 사회경제 질서가 아닌가 싶습니다. 솔직히 자본주의라는 것이 글로벌 할 수 있을까요? 하나의 글로벌한 자본주의적 세계관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을까요? 원래 자본주의에서는 무얼 가르치나요? 기독교, 힌두교, 불교인들도 모두 자본주의를 채택할 수 있고 동서양 또한 자본주의를 채택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유럽의 경우, 자본주의는 근대화 작업을 통해 수백 년 동안 진행되었습니다. 수백 년 동안의 준비기간이 있었죠. 문화활동도 하고, 신화도 만들면서 많은 것들을 사회적 담론을 통해서 담아냈습니다. 하지만 무슬림 사회는 어땠을까요? 굉장히 짧은 시간에 급격히 어떤 보호막도 없이 급격하게 자본주의가 적용됐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 동안 그들이 유지했던 상징적인 우주 자체가 침범당하고 잔인하고 짓밟혔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대체할 만한 또 다른 근간을 만들어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일부 아랍국가에서는 문화가 완전히 붕괴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근본주의[3]라는 보호막을 만들어 낼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정신병적으로 혼미한 종교의 제 주장이 이루어졌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superego", "초자아[4]"가 부상하면서 이것을 신격화하고, 이것이 신성한 현실로 무슬림 국가들에게 자리를 잡았던 것이죠. 사실상 "초자아"의 부상이라는 것은 포스트모던주의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지나친 관용성과 유사점이 매우 많습니다. 다시 말해 신근본주의와 포스트모던주의는 공유하는 점들이 있다는 거죠. 이 희생이라는 것이 어떤 신성한 근본주의일수도 있고 아니면 지나친 자유방임일수도 있습니다. 만약에 신이 없다면 그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무효해질 수 있다는 것이죠. 자크 라캉[5]이라는 정신분석학자가 있습니다. 이분은 이러한 전통적인 사고를 완전히 뒤집었습니다. 그의 주장은, 신이 없다면 모든 것들이 다 금지될 것이고 신이 있다면 모든 것이 허용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이 라캉의 혁신적인 사고라고 생각합니다. 종교 중에서 근본주의자들을 살펴보면 종교를 통해 많은 것들을 금지하려 합니다. 그런데 만약 근본주의자들이 신의 이름으로 무엇이든 하겠다고 나서기 시작하면 그들을 못할 것이 없습니다. 폭탄테러를 한다든지 대량학살을 한다든지 이렇게 신의 이름으로 이루어질 때 가장 무섭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탈무드[6]에 대해 잘 아시죠? 탈무드에서 두 명의 랍비가 어떤 토론을 합니다. 논쟁에서 뒤지고 있던 랍비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 물어보자, 누구 말이 맞는지 물어보자"라구요. 신이 왔을 때 그가 말하려 하자 논쟁에서 승리하고 있었던 다른 랍비가 신에게 소리쳤습니다. "신이시여, 당신은 이 끔찍한 세상을 창조하고, 이렇게 망쳐놨으니 멀리 떠나버리십시오". 그랬더니 신이 "오마이 갓! 네 말이 다 맞다. 나는 너희들로부터 멀리 떠나 있겠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단지 일화에 불과하지만,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록 콘서트라든지 팝 뮤직처럼 집단적으로 어떤 파티를 즐기고 쾌락을 누리고 하는 것이 거의 종교적인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chapter4 전체주의를 경계하라)

이런 집단적인 "트랜스 현상[7]"은 어찌보면 굉장히 종교적인 성격을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이 신성함이라는 것은 굳이 종교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집단적으로 행하는 모든 의식에 우리가 신성함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게 되고, 그렇게 된다면 집단적인 행동이 얼마나 무서울 수 있는지 말해줍니다. 2012년에 한국도 비슷한 경험을 했죠. 강남스타일이 대히트 했습니다. 유투부에서 강남스타일 비디오 영상이 저스틴 비버의 비디오보다도 더 많은 다운로드 숫자를 기록했습니다. 실제로 10억 다운로드를 초과한 것은 역사적으로 최고치를 갱신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왜 이렇게 인기가 높았을까요? 인기만 높았던 것이 아니라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여 집단적 트랜스 상태에 빠졌다는 것이 굉장히 놀라웠습니다. 비틀지 이후에 볼 수 없었던 인기라고 생각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자기 아이러니"로 인해 집단적 무아지경과 아이러니가 접목되면서 이것이 폭발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겁니다. 실제로 강남스타일의 가사도 강남을 풍자하는 사회비판적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은근하게 체제 전복적인 발언을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외국어로 된 가사를 무조건 따라 하는 "모방" 모방을 라틴어로 "미메시스[8]"라고 하는데요, 강남스타일 자체가 통했다는 것이 아이러니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왜 강남스타일이 인기가 있을까 살펴봤더니 많은 사람들이 강남스타일을 역겨울 정도로 매력적으로 생각한다는 겁니다. 혐오하는 것 자체를 즐기는 거죠. 반복으로 시청하면서 자기가 이 우스꽝스러운 비디오를 혐오하는 것 자체를 계속 즐기는 겁니다. 우리가 북한을 보면서도 많이 조롱하죠. 예를 들어 지도자가 어디에 나타나든 전 국민이 일렬종대로 서서 박수를 치고 울먹거리는 모습을 보면 이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조롱거리로 삼습니다. 어쩌면 이 두 가지 모습은 동일하다고 생각합니다. 강남스타일에 열광하는 사람들이나 김일성 또는 김정일을 보고 열광하는 사람들이나 어쩌면 그 근간에 깔려 있는 건 비슷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한국에서 전통적인 지혜가 아직 많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근대화의 근간이 되어 왔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오래된 전통적 이데올로기도 이미 많이 변형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모더니즘의 기능변화가 이루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아시다시피 불교에서 가르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균형이라든지 아니면 젠틀함, 총체적인 것, 생태적인 것, 이런 것들을 설교하죠. 불교에서 말하는 "불가원 불가근[9]"이라는 것을 경험하게 되면 고삐 풀린 이런 시장경제에 대해서도 우리가 무관심해질 수 잇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볼 때에는 서구화된 불교 자체를 무조건 비판할 수는 없겠죠. 경영학을 일본에서 공부하게 되면 "일본식 불교"라고 할 수 있는 "", 선을 가르친다고 합니다. (번역 생략) 이 선을 가르치면서 희생이나 근면 같은 것들을 강조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chapter5 급격한 근대화 경험으로 인한 변화)

아시다시피 너무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서구적 소비주의가 문제시되고 있죠. 다시 말해 세계는 급격한 근대화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의미 자체의 수평선이 달라지고 있다는 것이죠. 문화 또는 사회가 전체적으로 바뀌게 되면서 후역사적인 인간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근대자본주의자들이 항상 주장하는 것은 노동자들은 아직도 19세기 말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바뀌어야 한다고 말하는 겁니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볼때에는 오늘날 사실상 자신들이 보수주의적이라고 믿는 준보수주의자들도 대화를 나눠보면 그들도 혁신을 원한다는 겁니다혁명을 원한다기보다는 전통적인 기존의 기득권적인 제도를 계속 유지하기를 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불교와 같은 동양사상을 포용하지만 한편으로는 시장의 효율성증대를 원합니다. 진정한 보수주의자들과 이야기 이야기해보면 글로벌 자본주의를 반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진보 자체의 어두운 면만 계속 부각시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보수주의자들은 급격한 발전을 반기는 반면, 과거에 그들이 가지고 있는 기득권적인 제도를 놓치고 싶지 않은 기질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의 역설적인 결론은 오늘날 가장 급진적인 좌파야말로 진정한 보수주의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면 이런 좌파적인 보수주의자들은 무엇을 위해 투쟁하고 있는 걸까요? 제가 두 개의 노골적인 사례를 가지고 설명을 드리고자 합니다. 제가 이제까지 봤던 다큐멘터리 중에서 가장 잔인한 다큐멘터리가 있습니다. 'act of killing(살육행위)[10]'라는 제목인데요. 죠슈아 오펜하이머 감독으로 2012년에 제작된 영상입니다. 이 다큐멘터리는 인도네시아 지역에서 촬영되었는데, 스토리를 보면 추잡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과거 민족학살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과거에 군인이었지만 지금은 존경받는 정치인 "안와르 콩고"에 대한 내용입니다. 1966년도 안와르 콩고는 그들의 동료들과 함께 공산주의 동조자라고 낙인찍힌 250만명에 달하는 중국계 인도네시아인들을 학살했습니다. 그런데 이 살인자들은 이 모든 행위를 거의 게임처럼 접근했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숙련된 살인자들과 그들이 만든 사회에 대한 영화라고 보면 됩니다. 실제로 승리한 다음 결국 공산주의 혁명은 실패했죠.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마어마한 학살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학살 자체가 역사적으로 숨겨야 하는 치부로 격하된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대량학살에 대해 자랑스럽게 말했다는 겁니다. 저는 이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현재 존경받는다는 정치인들이 출연해서 한다는 말이 어떻게 목을 졸라 죽이고 어떻게 여성을 강간하는 것이 최고의 방법인지 사람의 목을 자르려면 어디부터 하면 되는지, 남성은 어디부터 고문하면 되는지, 그리고 성기부터 고문을 해야 가장 고통스럽다는 등 이런 이야기들을 너무나 당당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방법이 최고의 고문방법인지를 너무나도 자랑스럽게 말하더라는 거죠. 이런 내용들이 실제로 극장에서 그대로 상영되었습니다. 정말 외설의 극치 아니겠습니까. 마치 SF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최악의 지옥같은 내용이었습니다. 인도네시아의 국영 TV쇼에서 '안와르 콩고'라는 사람이 출연해 고문의 스킬에 대해 말하기까지 했습니다. 효율적이고 실용적인 고문 방식을 강의하는 내용이었는데요, 진행자가 "어떻게 이렇게 혁신적인 방법을 고안해 냈나요?'하고 물으면 그가 더욱 자랑스럽게 이야기 하더란 말입니다. (번역 빠짐) 사람이 진정으로 사악해지기란 쉽지 않습니다. "내가 지금 하는 행위가 현실이 아니라 픽션이다"라고 스스로 믿어야 정말 사악해질 수 있다고 합니다. 이 경우, 이런 영화가 나왔다는 것 자체를 보고 이걸 만들어 낸 미국인들을 비판할 수도 있고, 이걸 수용하는 인도네시아 사람들의 윤리적인 가치를 비난할 수도 있을 겁니다. (제가 미국 영화사를 비난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미국 영화에선 항상 영웅이 등장하죠. 험프리 보가트와 같은 영화배우가 항상 영웅의 역할을 했습니다. 이것 자체가 매우 흥미롭습니다. 어쩌면 "상상 속의 정당화"라고도 할 수가 있겠죠. 그러니까 직접적으로 사악해지기보다는 간접적으로 사악한 행위였다고 생각합니다. 정말로 제가 공포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바로 이 영화에서 느꼈던 공보가 제가 생각하는 가장 끔찍한 우리의 도덕적 공격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나치인들도 홀로코스트를 진행할 때 비밀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공개적으로 알리지 않았습니다. 반면 이 영화에 나온 사람들은 TV쇼에 나와서 공개적으로 자신들이 어떻게 고문을 했는지 이야기하고 아무도 그것을 끔찍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 무섭다는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 것일까요? 제가 명확하게 설명하겠습니다. 저는 헐리우드 탓을 하는 게 아닙니다. "헐리우드의 영향"이나 "인도네시아의 원시성"에 책임을 돌리는 것도 아닙니다. 저는 글로벌 자본주의의 영향이라고 생각합니다

(chapter6 글로벌 자본주의의 영향)

 발터 벤야민[11] '자본주의성'은 하나의 종교와 같다고 말합니다. 진정한 자본주의자들은 굉장히 무자비한 기업가입니다. 쾌락주의자가 아닙니다. 진정한 자본주의자는 밤낮으로 일을 해서 자신의 부를 늘리려고 노력합니다. 발터 벤야민이 바로 그런 얘기를 한 것입니다. 자본주의자는 자신의 쾌락을 우리보다 더 많이 희생합니다. 그래서 저도 생태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우리의 이기주의를 넘어서는 어떤 동질감, 보다 숭고한 가치를 위해서 자기희생을 해야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과는 조금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환경을 파괴한 자본주의자를 한번 생각해 보십쇼. 장기적으로는 그 사람 자신에게도 그 피해가 돌아갈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이기주의자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너무나 헌신적으로 자신의 목표만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즉, 자신의 부를 늘리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어서, 전 세계를 파괴하는 것도 잊고 있는 것입니다. 자본에만 집중하는 것이죠. 그래서 여기서도 자본주의를 어떤 쾌락주의로 공격할 것이 아니라 어떤 변태적인 헌신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이기적이고 공리주의적인 차원에서 공격하는 것이 아닙니다. 살의를 추구하는 쾌락주의는 우리 사회의 잔혹한 사실이 아니라 하나의 이데올로기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이미 헤겔이 "정신현상학[12]"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헤겔은 '영적 동물의 왕국'이라는 표현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소위 말하는 숨겨져 있는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 아시죠? 우리가 보다 더 자본주의화 되면, 즉 우리가 이기주의적 시장에 대해 보다 더 이기적일수록 사회가 그만큼 이익을 얻습니다. 즉 최고의 위기는 무언가 선한 것을 행하려 할 때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본주의에서는 우리가 이기주의를 추구하면 할수록 그만큼 공동선()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의 모순인 사람으로 인해 단순히 자본주의적 이기주의를 어떤 글로벌 공통체로 연결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을 이기주의로 만든 영적 전체주의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chapter7 공적 영역을 존중하라)

중국에 마이클 유엔이라는 친구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5년 전 즈음, 중국 난징에서 일어났던 일에 대해 저에게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어떤 노인이 버스에서 넘어졌습니다. (버스가 넘어졌을 때) 그러자 어떤 젊은 남성이 다가와서 그 노인을 도와주고 일으켜 세워줬습니다. 심지어 다친 노인에게 돈을 줘서 택시를 타고 병원에 갈 수 있도록 해줬습니다. 그리고 2주 후 에 법원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그 노인이 자신을 남성이 밀었다고 하며 남성에게 소송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왜 젊은 남자가 날 도와줬겠느냐? 정상인이라면 노인을 도와주지 않는다. 아마도 나를 도와준 이유는 죄책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가 나를 밀었기 때문에... 그 노인은 승소했습니다. 그래서 그 남성은 큰 돈을 지불해야만 했습니다. 법원에서 설명하길, 일반상식에 따르면 "팽요"라는 이 남성은 노인을 넘어뜨렸고 그 죄책감 때문에 도와줬다는 겁니다. 일반인이라면 그처럼 친절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 법원의 논리였습니다. 선한 일을 했음에도 그것이 정상으로 간주되지 않고 오히려 의외인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니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요? 단순히 사람이 이기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선한 일을 해도 사회적인 기준이 이기주의를 기준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친구가 제게 말했습니다. 이러한 사건들은 중국의 여론조사와 비교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말입니다. 중국의 230대 젊은 사람들에게 죽어가는 사람을 길가에서 보면 멈추겠느냐 라고 물었더니 87퍼센트는 멈추지 않고 그냥 지나치겠다고 답했습니다. 그 사람이 혼자서 죽어가고 있다라고 말했지만 그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고 해도 도와주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질문으로 다친 사람은 도와주겠느냐 라고 물었더니, cctv카메라가 있는지 확인하고 만약 있다면 도와주겠다 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저는 주장합니다. 이건 더 철학적이고 복잡한 거라구요. 이는 공적 영역에 대한 재정의가 필요함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사라지고 있는 것은 개인적인 영역이 아니라 공적 영역입니다. 우리가 점점 더 어떤 상황이 되어가고 있냐 하면 우리가 한때 공적 영역으로 여겼던 것들이 이제는 사적인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겁니다. 또 하나의 예로 하드코어 음란물의 이야기입니다. 제 친구에게 들었는데 최근 유럽에서는 새로운 경향으 생겼다고 합니다. 소위 말해 "공공섹스"입니다. 이는 헝가리와 폴란드에서 유행하고 있다고 합니다. 한 동영상을 봤더니 남녀 한 쌍이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있는데 주변에 사람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의자에 앉아 갑자기 섹스를 하는 겁니다. 연출된 상황이 아니라 실제 상황입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조금 이상하다고 쳐다보긴 했지만 이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일상으로 돌아갔습니다. 신문을 읽는다든지 말이죠. 이러한 공개장소에서 성행위를 하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그들의 사적인 공간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고 있는 프라이버시는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디지털미디어로 인해서 통제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있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공적 영역이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차이를 느낄 수 있는 또 다른 예가 있습니다. 비슷한 것 같지만 굉장히 큰 차이가 있습니다. 노출증 환자인 "버버리맨"이라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알고 있던 버버리맨과 개인이 자신의 나체사진을 웹사이트에 올리는 것은 다릅니다. 전통적인 버버리맨은 여전히 공적 영역에서 노출을 감행합니다. 그런데 수백만 명에게 연결된 웹 사이트에서 자신의 나체사진을 올리는 것은 여전히 사적인 것으로 간주됩니다. 수백만 명이 그걸 본다 하더라도 말이죠. 그것이 공적 영역으로 간주되지 않는다는 것이죠. 이러한 이유에서 저는 내부고발자[13]로 유명한 "애드워드 스노든[14]"과 같은 사람들은 무조건 보호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우리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보호하는 것은 공적 영역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스노든, 어샌지[15], 메닝[16]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단순히 그들의 행위가 미국의 비밀 정보부에게 수치심을 줘서가 아니라 그들이 밝힌 폭로가 미국뿐만 아니라 중국, 러시아, 독일, 이스라엘과 같은 영향력 있는 국가들이 하는 일을 폭로했기 때문입니다. 메닝이나 스노든이 폭로한 사실을 우리가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폭로를 통해 우리가 이제는 더이상 이것을 묵과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스노든의 폭로가 주는 교훈은 글로벌한 것입니다. 이제 디지털화로 인해서 공적인 공간이 사유화 되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 어떤 의미에서 사유하느냐, 단순히 민간기업들이 그 공간을 통제하고 있고 컨트롤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독일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17]"의 사상을 인용하자면, 칸트는 "계몽주의는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이성의 공적인 이용과 사적인 이용을 모순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칸트에 있어서 국가기관 국가 관료주의는 공적인 것이 아니라 사적인 것으로 간주됩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어떤 특정 이해를 대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철학, 과학만이 공적이라는 것입니다. , 공적이라는 것은 우리가 어떤 논쟁을 할 수 있고, 어떤 집단적인 사적 이해의 제한을 받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칸트에게 있어서 이성의 사적인 사용은 바로 국가기관들이 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chapter8 지식인과 전문가의 경계)

유럽에서는 고등교육에 대한 개혁이 진행되고 있는데, "우리는 철학자가 필요없다", "불필요한 일을 하는 철학자는 필요없다.", "실제로 어떤 유용한 지식을 가져다 줄 과학이 필요하다."라고 말합니다. 프랑스에서 저를 반대하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하더군요. 예를 들어 파리 교외에서 시위가 벌어진다면, 심리학자들은 어떻게 그 군중을 완화시켜야 될지를 알아내기 위해 존재하고 또 사회학자들은 어떻게 시위를 조금 더 쉽게 통제해야 하는지 연구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말입니다. 여기서 문제가 뭘까요? 이것은 전문가의 일이라는 겁니다. 이런 일은 지식인이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지식인은 다른 사람이 정해놓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 자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그것이 올바른 접근법인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바로 지식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chapter9> 디지털 미디어의 갈등

 제가 주장하는 것은 오늘날 디지털 미디어에서의 갈등입니다. 인터넷으로 인해 공적인 이성의 영역이 이제는 직접적으로 사적인 그런 이득만을 얻는 공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인터넷이 위험한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클라우드 컴퓨팅 잘 아시죠? 클라우드 컴퓨팅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통제당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지나치게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 위험요소는 인터넷이 바로 국가기밀과도 연계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스노든 사건만 보더라도 실제로 어떤 기밀이 있는 것은 아니죠. 그런데 기밀이라는 것 자체가 또 기밀인 게 문제인 경우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특정 테이터가 접근 금지인데 이게 접근 금지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겁니다. 금지된 것이 뭔지도 알려주지 않는 것, 그것이 문제라는 겁니다. 제가 몇 년 전에 중국 언론에서 이런 보도를 한 걸 읽었습니다. 한 개인이 기소를 당했는데, 특정 정보를 수집했다는 죄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정보가 기밀이라는 것을 모른 체 수집했다는 거죠. 나중에 들어보니까, 정부가 기밀이라고 규명한 정보였답니다. 어떤 것이 기밀인지 조차 기밀이라는 게 문제인 겁니다. 제가 볼 때에는 이러한 잠재적인 위험은 매우 보편적이라고 생각됩니다. 두 번째는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것입니다. 디지털 통제를 통해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모든 개인의 사생활을 모두 들여다보고 있다고 걱정합니다. 하지만 그건 아닙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정부 당국이 너무 많이 알아서 걱정이 아니라 너무 몰라서 문제라는 겁니다. 데이터가 어마어마하게 수집되고 있죠. 하지만 이런 정부기관들이 이미 수집한 데이터를 가지고도 무엇을 해서 어떻게 분석하는지 모른다는 겁니다. 그러면 더 위험해 지는 거죠. because 수집된 데이터 중 해석이 잘못되면 멀쩡한 시민이 테러리스트가 될 수도 있습니다. 1930년대 소설 '시민 케인'의 모델이었던 윌리엄 란도 허스트라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소유한 신문사가 있었는데, 그곳 편집장이 너무 열심히 일을 하길래 휴가 한번 갔다 오라고 말했더니 그 편집장이 두려워서 휴가를 갈 수 없다고 답했답니다. 왜냐고 묻자 편집장은 "내가 자리를 비우면 모든 일이 엉망이 될까봐 두렵습니다." 라구요. 그러자 사장이 "걱정 말게. 자네가 일을 잘해 주었기 때문에 휴가를 다녀와도 회사는 아무 문제없을 걸세"라고 하자, 편집장은 "제가 없을 때 회사가 더 잘 굴러갈까봐 그게 더 걱정입니다"라고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정부가 사적인 정보를 무분별하게 수집하고 있다고 해서 우리를 잘 알고 있다고 오해하면 안됩니다. 오히려 어중간하게 또는 잘 모를까봐 걱정을 해야 한다는 겁니다.

(chapter10) 공적 영역을 위한 노력

 제가 언급하고 싶은 것은 내부고발자들은 바로 칸트가 말했던 이러한 공적이성을 유지시키는 선동자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부고발자들은 부패한 민간기업이 얼마나 많은 사악한 행위를 하고 있는지 폭로해야 합니다. 그리고 많은 정치인들이 어떤 범법행위를 하고 있는지를 폭로해야 합니다. 아시다시피 일부 담배회사는 담배에 중독성을 가진 마약류 물질을 집어넣는다고 하죠? 이런 것들을 폭로해 줄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비단 이런 민간기업에만 내부고발자가 필요한 건 아니죠. 공공기관들에도 이런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여러 제도하에서 일어나고 있는 부정행위들을 폭로할 수 있는 메닝, 스노든, 어샌지와 같은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제가 반미주의를 지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직면한 문제는 보다 더 급진적인 것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내부고발자들이 중요합니다. "스노든은 반역자 아닌가? 러시아에 기밀을 팔아넘긴 사람 아닌가?" 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사람은 세계시민인 겁니다. 제가 볼 땐 우리가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형성해서 민간차원에서 내부고발자들을 보호하고 지켜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만 내부고발자들이 반대 국가에 도망가서 국가 대치상황을 유도하지 않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유토피아지만 사실 그런 유토피아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초월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6개월 전에 브라질 상파울로에 방문했었는데 관광차원에서 저를 그곳 사창가로 데려 가더군요. 저는 아무 짓도 안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일종의 카페 같은 곳이었는데 매춘부들이 접대하는 곳이었습니다. 이 매춘부들을 살펴봤더니 대학교육까지 받은 젊은 여성들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선택권은 매춘부들에게 있었습니다. 그녀들이 남성 손님들의 매력을 훑어봤는데요. 그녀들과의 대화는 꽤나 진지했는데, 어떤 매춘부와는 철학자 "자크 라캉"에 대한 대화도 나눴습니다. 대화가 좀 통한다고 생각하면 여성이 먼저 제안을 합니다. "얼마를 내면 2차를 갈 수 있다"는 식으로 말이죠. 저는 그 경험을 하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매춘을 반대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제가 느낀 것은 적어도 이 클럽에서 선택권을 가진 사람은 고객이 아니라 매춘부라는 것이 매우 신선했다는 겁니다. 그 자체가 폭력적인 혁명일까요 또 혁명이라는 것이 항상 거대해야 할까요? 그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회적 역동성을 살펴보면 아주 사소한 것들로부터 변화가 촉발되고 아주 거대한 산사태와 같은 변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겁니다. 끝가지 제 강의를 들어주신 여러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1] 이성중심주의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를 내포하고 있는 사상적 경향의 총칭이다. 탈중심적 다원적 사고, 탈이성적 사고가 포스트모더니즘의 가장 큰 특징이다.

[2] 자율주의 전통 속에서 활동하는 이탈리아 마르크스주의 이론가이자 활동가. 주로 탈산업 자본주의에서 미디어와 정보 테크놀로지가 차지하는 역할에 초점을 맞춰 연구하며 활동하고 있다.

[3] 이슬람 교리를 정치, 사회질서의 기본으로 삼아 이슬람교의 원점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는 운동. 철저한 율법준수, 반외세, 특히 반서양문명, 반미가 특징이다.

[4] 자아와 함께 정신을 구성하는 것으로 프로이트가 생각한 정신의 한 측면이며 양심의 기능을 담당한다.

[5] 전통적인 프랑스 정신의학에서 출발하여 <프로이트 사상>의 해석과 그 이론의 실천에 새로운 면을 개척한 철학자. 프로이트의 <무의식>에 대한 그의 견해는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는 테제(thesis)로 집약된다.

[6] 유대인 율법학자의 구전과 해설을 집대성한 책

[7] trance. 마치 최면에 걸린 듯한 몽환적인 상태. 물질문명에서 얻지 못하는 정신적 만족감을 통해 균형을 되찾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을 뜻한다.

[8] 현실의 모방이나 재현을 가리키는 말

[9] 사람과의 관계에서 너무 가깝지도 말고 너무 멀지도 않게 적당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살아가는데 도움이 된다는 뜻

[10] 반성하지 않는 학살자의 인간성/다큐멘터리. 1965~1966년 인도네시아 학살의 가해자 중 한명인 안와르 콩고가 다큐멘터리 제작자 조슈아 오펜하이머의 요청에 따라 친지들을 모아 자신이 저지른 학살을 연극적으로 재연한 다큐멘터리이다. 1965년 인도네시아 쿠데타로부터 1년 뒤, 100만명이 넘는 사람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살해했다. 실제로는 군에 적대적인 인물이 대부분으로, 화교, 지식인, 노동 조합원 등이 있었다.

[11] 독일의 지평가. 방대한 지식과 정밀하고 독창적인 사색 방법론을 추구했으며, 유럽 근대를 상징하는 도시 <파리연구>를 일생의 업으로 삼았다.

[12] 헤겔의 대표적 저작. <정신 현상학>이란 '의식의 경험의 힘'을 말하며, 이는 우리의 의식이 여러가지 경험을 통하여 진리를 파악하여 가는 과정을 서술한 것이다.

[13] 내부고발자 : 조직 내부에서 저질러지는 부정, 부패, 불법, 비리, 예산낭비 등을 알게 되어 이를 시정하고자 내부책임자 및 감사부서에 보고 또는 폭로하는 사람을 말한다.

[14] CIA 하위직원으로, CIA가 전 세계 일반인들의 통화기록과 인터넷 사용정보 등 개인정보를 프리즘(PRISM)이란 비밀정보수집프로그램을 통해 무차별적으로 수집, 사찰하고 있다고 폭로하였다.

[15] 그가 창립한 위키리스크는 익명의 정보제공자가 제공하거나 자체적으로 수집한 사적 정보 또는 비밀, 미공개 정보를 공개하는 국제적인 비영리기관 사이트이다.

[16] 브래들리 메닝 일병은 폭로전문 웹사이트 '위키리스크'에 이라크전에서 민간인을 학살한 미군동영상을 폭로했다.

[17] 독일철학자이며 서유럽 근대철학의 전통을 집대성하고, 전통적 형이상학을 비판하며 <비판철학>을 탄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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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모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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