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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리바르, 『정치체에 대한 권리- 정치체에 대한 권리인가 아파르트헤이트인가?

 

 발리바르가 제기하는 이주민 또는 외국인을 대하는 우리의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하나, 이주민을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한다는 것이다. 둘, 좌파나 우파의 권력이 바뀐다고 하여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 즉 지금의 정책은 핵심을 건드리고 있지 못하다는 것, 그리고 셋째로 우리 스스로가 이주민 또는 외국인에 대한 지위의 제도화를 위협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다. 또 그는 그 문제점의 기저에는 국민적 공화주의, 재 식민화된 이민 등의 관념이 자리잡고 있다고 분석한다. 책에 대한 이야기는 이 정도로 짧게 서술하고 본 장에서는 이야기되었던 민족주의의 개념과 가치, 우리에 대한 개념 등의 주제들을 중심으로 써 볼 예정이다.

 

 우선적으로 민족주의에 대한 본인의 입장을 먼저 분명히 하자면 민족주의의 해체는 곧 국민의 해체고 국민의 해체는 곧 국가의 해체라고 보는, 즉 민족주의 옹호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는 민족주의는 상식적 민족의 영역에서의 민족民族이 아니라 '우리'의 의미의 민족이다. 따라서 내 취지에서의 민족주의는 우리주의로 해석해야 좋겠다. 과거의 민족주의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생물학적 민족주의였을 것,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런 고전적 분류가 무의미해졌으며 따라서 민족에 대한 개념의 재 정의가 필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분명 분리되는 것, 고유한 것, 정체성, 구분해주는 것으로서의 '민족'은 있으며 없어질 수 없다. 그러면 지금에 와서의 그런 의미의 '민족'이란 무엇일까? 국민? 국적? 아니다. 나는 '우리'라고 생각한다. 민족주의에서 우리주의로의 전환의 패러다임으로 봐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그 민족, 즉 우리는 공동체에 대한 책임, 울타리 내 우리들에 대한 상호 이타성을 보장하는 틀과 같은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런 현상이 벌어질 수 있다. 막상 우리로써의(민족 또는 국민) 이타성이 요구로 될 때 이주자들은, 외국인들은 "내 우리는 저기 있으니까", "사실은 내 우리는 여기 우리가 아니고 저기 우리였어" 와 같은 현상 말이다. 다양한 예를 들어 민족주의와, 배타성 등의 필요성을 써본다면, 

 

 업자와 고객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업자가 제공하는 서비스를 소비하는 대가로 고객은 금전적 지불을 한다. 금전적 지불의 방식에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현금결제, 다른 하나는 카드결제이다. 원칙적으로는 현금결제를 하든 카드결제를 하든, 업자는 소득의 일부를 소득세로 부담해야 한다. 하지만 현금결제의 경우 업자의 그러한 세금부담을 회피할 가능성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현금결제를 통해 업자가 세금을 회피하는데 고객이 동의를 할 수는 있겠지만, 아무런 대가가 없다면 동의할 가능성은 줄어들 것이다. 상호이익이 아닌 일방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호이익을 위해 업자는 회피한 세금의 일부를 고객과 나누는 방식으로, 즉 고객에게 현금할인을 해줄 수 있다. 여기서 업자와 고객 모두가 현금결제를 하기로 합의한다면, 상호 이익을 얻는다. 하지만 그런 합의는 깨질 여지가 다분한데, 그 여지는 고객이 가지고 있다. 만약 고객이 현금결제를 통해 서비스요금 할인을 받기로 업자와 합의하여 현금할인을 받은 이후, 국세청에 신고를 한다면 업자는 극대화된 손실을 볼 것이며(과태료), 고객 측은 극대화된 이익을(현금할인과 더불어 포상금) 볼 것이다. 그런 위험이 있기 때문에 업자는 현금할인을 통해 상호이익을 누릴 수 있는 고객을 선별 또는 선택하게 된다. 이를테면 단골에게만 혜택을 제공하거나, 계약을 통해 제공하는 방법 등을 사용하게 된다. 그런 선별은 우리와 저들의 구분, 민족과 다른 민족의 구분, "귀화자[1]"와 이민자의 구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선별은 우리와 저들간의 상호이익을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다.

 

 한국인인 어느 농구선수가 있다고 해보자. 그리고 그 한국인이 소속된 구단 역시 한국인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리고 흑인종인 농구선수가 있다고 역시 가정해보고, 농구를 하는 흑인은 육체적인 면에서 동양인인 한국인에 비해 절대적 우월성을 지니고 있다고 가정해본다. (그리고 이는 실제로도 대체적으로는 그렇다고 여겨지는 것 같다.) 만약 그 상태에서 외국선수의 선별적 영입, 제한적 영입이 아닌 무제한적 영입을 제도적으로 허하게 된다면 한국 구단의 선수들은 경기력에서 절대적인 우월성을 지닌 외국선수로 모두 대체될 것이다. 구단이 존재하는 이유는 승리하기 위함이며, 그러한 선택은 한국인으로 구성된 선수단에 비해서 구단에 승리를 가져다 줄 확률이 더 높아지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이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자유시장, 경쟁의 원리이기도 하다. 그런 원리 속에 발리바르가 그토록 추구하던 인간성이란 결코 존재할 수 없다. 구단은 승리를 통해 원하는 이익을 얻을 것이고, 외국인 선수 역시 다양한 형태의 큰 이익을 얻을 것이다. 즉 소수인 구단주와, 이주자에 해당하는 외국인 선수의 이익만이 극대화된다. 반면 한국인 선수의 경우는 이익도, 상호이익도, 극대화된 이익도 아닌 극대화된 손해를 보게 될 것이다. 결과적으로 절대 상호이익이 이루어질 수 없게 된다. 또 다른 예로 스크린쿼터제를 들 수 있는데 이 역시 마찬가지다. 만약 스크린쿼터제를 없앤다면, 이것은 상호이익이 아닌 한 측의 극대화된 이익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예들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설령 지금 당장이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이런 가능성은 충분히 있으며 또 그에 대한 불안감은 분명하게 우리들 마음속에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 흐름에서 민족주의의 폐기는 결과적으로 한쪽의 극단적 파괴를 불러올 수 있고,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자유시장, 경쟁 등으로부터 나오는 비인간적 폐해를 더욱 효율적으로 야기시킬 것이다. 발리바르가 하고자 했던 진정한 인간성의 발發함?이 역으로 파괴되는 셈이다. 또 다른 이야기인 독도문제를 생각해보자. 만약 한국과 일본이 우리와 저들, 또는 저들과 우리라는 그런 이분법적이고 배타적인 입장에서 벗어나 너와 나는 우리라는 너무나도 이상적인 바로 그 이념에 입각하여 독도를 공동사용하기로 합의하였다고 가정해보자. 불안하기 짝이 없지 않은가? 더하여 만약 일본이 우리를 무력적으로 누를 수 있을 만큼의 군사력을 가지고 있는 상태라면? 양자 모두가 진정으로 순수하고 투명하며 동등한 인간(국민)의식수준을 지니고 있지 않은 이상 공생이 아니라 어느 한쪽이 극대의 이익 또는 극대의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 그만큼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고 자본주의적 태세에 물들고 노출되어 있다. 더군다나 국가적인 정치 외교 등의 핵심을 이루는 권력층은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민족주의, 민족성, 우리와 저들의 구분, 나와 너의 구분, 국민과 이민자의 구분, 그리고 소극적이든 극단적이든 이런 측면에서의 배타성은 인간으로서는 결코 넘어설 수 없을 것이다. 생각의 지평을 크게 양보해 너와 나를 너머 우리를 상정해보고, 또 우리와 저들을 너머 더 커다란 우리에 이르렀다고 생각해보자. 그리하여 결국에 이르러 국가와 국가, 민족과 민족, 대륙과 대륙을 통합해 하나의 공동체, 하나의 우리가 되었다고까지 아주 크게 양보하여 생각해보자. 그렇다면 결국 이전의 가장 원시적인 형태의 너와 나를 넘어서 하나의 우리가 된 것과 마찬가지다. 즉 지구적 차원의 '우리'가 된 것이다. 모든 형태의 "아파르트헤이트"는 붕괴되고 모두가 우리의 정치체에 참여할 권리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모든 형태의 "아파르트헤이트"를 너머선 유토피아의 세상에 이르렀다고 단정지을 수 있는가? 당연하게도 그렇지가 않다. 현실에 입각해 지구 내부적으로 봤을 때도 그러한 대(大) 통합은 현실성 없는 묘연한 이야기이며(마치 칸트가 『영구평화론』을 썼듯이), 지구 외부적으로 바라봤을 때도 그러한 통합은 필연적으로 갈라지게 된다. 이를테면 화성을 생각해보자. 만약 그 화성에 개나 돼지를 닮은, 우리와 비슷한 문명의 지적 생명체가 발견된다고 그렇게 사고실험(thought experiment) 을 해보자. 그렇다면 우리 대 통합적 지구문명은 어떻게 될까? 우리의 사고 속에서는 또 다시 이전과 같은 이분법적 사고가 피어 오를 것이다. 바로 지구인으로써의 우리와 지구인이 아닌 것으로써의 저들인 것이다. 만약 프랑스의 이주민 노동자들이 프랑스 정치체에 대한 평등한 권리를 요구하는 것처럼, 그 화성인들도 지구에 이주해와 지구인과 동등한 정치체의 참여와 그에 대한 권리 행사를 요구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단언컨대 그렇지 못하리라. 우리는 자동 인지적으로[2] 저들과 우리가 '다름'을 알 수밖에 없다. 화성으로 이주간 지구인에 대해서도 화성인 역시 그러한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으리라. 이는 앞서 말한 것과 같은 이치다. 저들이 과연 진정으로 '우리'에 속하는지, 아니면 양자 중 한 측만 우리로 가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반복하여 말하지만 배타성, 또는 배제성의 허뭄은 나와 너가 현실적으로 동등하다고 여겨지는 상태와 또 그것을 짐작할 수 있을 만큼의 투명성과 진실성이 있을 때에만 가능할 것이리라. 발리바르의 이주민의 정치체 참여에 대한 주장 역시 현실불가능하다.

 

 한국사회를 생각해보자. 현재 한국사회에는 외국인 범죄에 대한 우려가 높은데, 우리는 그런 그들에게 시민권을 주고 먼저 개방하고 존중해 주어야 할까? 그것이 인간적이고 공생적이고 휴머니즘적인가? 발리바르라면 그래야 한다고 할 것 같다. 그러나 내 생각은 완전히 다르다고 할 수도 없지만 같다고 볼 수도 없는데 즉 그들을 노예나 재식민화처럼 다루는 것은 당연하게도 온당치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 대해서 엄격한 관리통제 하에서의 선별적이고, 또 모든 수준이 아닌 적정 수준의 권한만을 행사하도록 제한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며 가장 바람직하다고 여겨진다. 즉 차별과 차이를 구분하고 차별은 하지 말되 차이는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복지정책에 비유한다면 보편적 복지가 아닌 선별적 복지와 같다. 프랑스의 이주민 노동자에 대한 정책 역시 거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관련하여 우리는 외국인 또는 이주자에 대한 권한이 우리와 동등하게 확대되었을 때 벌어질 사태로 역차별을 생각해볼 수도 있는데 이를 다른 사회적 문제와 비유해보자면 여성 전용 화장실, 여성 전용 주차장, 장애인 전용 시설 등의 남여 역차별적 태세, 그리고 보편적 복지에 의한 조세저항[3]이 있을 수 있다. (이주민 문제와 관련한 구체적 예시는 부득불이 생략한다.)

 

 만약 우리 땅에서 우리로서 인정받지 못한 채 희생되어진다면, 그리고 그런 불평등과 희생이 싫다면 그들은 다시 "그들"의 땅으로, "그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 그들 스스로가 원하는 바에 따라 그들의 정치체 하에서 그들 정치체에 대한 정당하고 평등한 권리를 누리면 그만이다. 각자 자신들의 권리를 그들은 그들로서 누리고 우리는 우리로써 누리는 아주 자연스럽고 바람직한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다. 애초에 "우리"가 아니었던 곳으로 이주를 간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배제적이고 차별적이고 희생적인, 어느 정도의 그런 고통은 감수하겠다는 암묵적인 동의가 사전적으로 내포된 것과 같다.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과연 그들이 우리의 집단에 완전하게 귀속될 수 있을까? 그러니까 "다른 곳에서" 왔으면서(즉 타자이면서) "여기 출신인" 것처럼 (我 아 집단)이 되는 것이 가능할까? 생각해보건대 이론적으로는 가능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다. 앞서 1번 각주에서도 말하였던 것처럼 저들이 우리가 되려면(시민으로서 국민으로서 모든 정치적 사회적 권리 행사가 가능한 '우리'가 되려면) 생물학적인 정체성을 제외한 기존의 모든 정체성(역사, 문화, 법, 관습, 정치체 등)은 영구 증발(permanent vaporization)적이게 사라져야 한다. 그리고 그 빈 토대 위에 우리 정체성의 토대가 되는 것들이 우리내의 역사적 경향성이 따라 함꼐 축적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이상적이 아닌 현실적으로 대처해야만 한다. 성문법적으로, 제도적으로, 절차적으로, 형식적 틀로서 그들이 우리가 되었는지를 과학적이고 명시적으로 측정, 평가, 시험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주자로써 '우리'가 되었다 함은 최소한 그들이 우리 울타리 안으로 들어와서 기생이 아닌 공생을, 한 측의 극대화된 이익이나 손해가 아닌 상호 이익적인 존재가 될 것임을, 적이 아닌 존재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보론으로, 계속하여 우리, 민족 등등의 것들을 이야기 하였는데, 그렇다면 우리란 무엇일까? 본인이 생각하기에 이렇게 한마디로 무엇이 무엇이냐고 정의 내리라고 한다면 그만큼 가장 어렵고 힘든 일이 또 없는 것 같다. 경우에 따라 불가능하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내가 생각하는 우리에 대한 정의를 내려보기를 시도해보자면, 먼저 우리를 알기 위해서는 다양한 우리의 형태들을 살펴봐야 할 것 같은데, 우리라 함은 집단적 정체성을 말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정체성의 나열은 다음과 같다. 한신대 학생으로써의 우리, 권씨 가문으로써의 우리, 가족으로써의 우리, 한국인으로써의 우리, 아시아인으로써의 우리, 지구인으로써의 우리, 해군출신으로써의 우리, 동문으로써의 우리 등등이 그것이다. 이렇게 나열해 보자면 우리는 중복되기도 하면서 종속되기도 하는 것 같다. 또 종속되면서 독립적으로 있어 보이기도 하고, 그 자체로 독립해 있는 우리정체성도 있는 것 같다. 이를테면 한국인으로서의 우리는 아시아인으로서의 우리 안에 포섭되며, 아시아인으로서의 우리는 지구인으로서의 우리에 포섭된다. 그리고 대한민국해군 출신으로서의 우리나 동문으로서의 우리는 독립적으로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엄밀히 보자면 이 역시 종속되어 있지만 성질의 연속성의 측면에서 보자면 단절되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독립적으로 있는 집단의 경우는 그 속성을 선 후천적으로 가지지 않고서는 절대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없어 보인다. 반면 서로 절대 포섭될 수 없는 계층의 우리집단이 있는데, 이를테면 동양인으로써의 우리가 서양인으로써의 우리의 경우가 있겠다. 이 경우는 선 후천적으로도 절대 상호 융합될 수 없는 속성의 '우리'이다. 동양인이라는 생물학적 속성, 그리고 서양인이라는 생물학적 속성은 본디 그러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우리라는 것은 일방적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즉 나 스스로만 너와 같다고 해서 형성되는 그러한 것이 아니고 '너' 역시 '나'를 우리로써 받아들일 때, 즉 일방향이 아닌 양방향일 때, 그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우리'가 탄생하게 된다. 그리고 너와 나, 나와 너가 서로를 인정, 수용하여 우리가 형성되는 데에는 인간의 영역에서 만든 법이나 제도를 넘어서는 초월적 인지영역, 감각영역, 즉 관념에 의한 영역이 있는 듯 하다. 만약 세상 속, 인간이 인지할 수 있는 모든 부류의 지각대상들을 귀납적 경험에 의한 것과, 경험 없이 본능적인 것(즉 인간을 구성하는 개개의 경험들을 초월하여 그 위에 존재하는 속성의 것)으로 나누어 본다면 너와 나를 구분하거나 너와 나를 합쳐 우리로 규정하는 원리는 경험이 필요 없이 본능적인 것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 분명하겠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이 사고를 하던 사고를 하지 않던 상관없이 존재하는 관념으로서의 관념적인 것, 또는 인간을 초월한 자연의 이치나 원리 같은 것에 속한다. 대표적인 예로 남녀간의 성별이 있다. 성별의 경우는 인간이라는 보편적 계층의 층 위에서 보자면 우리라고 할 수 있겠지만, 각각의 독립된 것으로 보았을 때 결코 어느 한쪽으로 종속되거나 포섭되거나 양립하기란 결코 불가능한 일이다.[4] 마찬가지다. 인종의 문제, 이방인들의 문제, 이주민들의 문제에 있어서도 정확히 "다른 곳"으로부터 왔으면서도 또한 완전히 "여기 출신"이기란 아주 불가능('entirely' impossible)한 사실이다. 제 아무리 법적으로 그것을 허용하고, 정치, 교육 및 인간 제반에 걸쳐 동등하다는 의식을 심어준다고 한들, 또한 가정하건대 그것이 보편적 인식으로 받아들여지고 그렇게 된다고 한들, 그것은 결코 진보니 발전이니 하는 것이 되지 못할 뿐더러 그저 인간으로서 본질을 인위적으로 가리우는 형국일 뿐이다. 마치 배고픔을 먹을 것에 대한 자기의 욕심에 기인하여 스스로를 비판하고 자기 개조해 나가는 자기학대, 자기세뇌 및 자기정당화로 볼수도 있겠다.

 최종적으로 정리해보자면, 우리란 무엇일까를 한마디로 정의내리기가 여전히 못마땅하지만 그 우리가 되기 위해서는 일방이 아닌 양방의 합의가 있어야 한다는 점, 그리고 선후천적으로 어찌할 수 있는 것과 어찌할 수 없는 속성의 것이 있으며, 발리바르에게서 주제로서 회자되는 이주민문제의 경우는 어찌할 수 없는 속성의 것이므로 결코 우리가 될 수 없다는 점을 재차 확인할 수 있었다.

 

 글의 결론부로서 서술해보자면 역으로 생각하여 이주자와 같은 외국인들은 (특히 1세대의 경우) 과연 우리를 진정 우리로써 여기고 있을까? 혹시 그들이야말로 우리를 내심 자신과는 다른 사람, 즉 다른 민족이나 '저들'로써 보고 있는 중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는 우리가 우선하여, 또는 우리만 저 이주자들을 우리로써 받아들이기로 임의로 정하고 우리의 "아파르트헤이트"를 허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그저 '저들'의 이권 요구에 따른 저들의 능동적 행위이며 우리의 피동적 반응일 뿐이다. 저들이 우리 체제 속에 들어가서 우리가 되기 위해서는 저들도 저들 내에서 저들만의 "아파르트헤이트"를 마음으로 열어야 한다. 그리고 양자 모두가 플라토닉한 개방성의 마음을 지닐 때에만 비로소 모든 종류의 차별과 장벽, 배타성, 배제성이 사라지고 발리바르의 그런 수용적 주장이 힘을 얻을 수 있으리라.

 

 

*각주

 

[1] 여기서 귀화자란 이민자와는 다소 다른 의미로 쓰였다. 그리고 이런 귀화자는 엄밀한 의미에서는 우리의 영역에 들어갈 수 없다. 엄밀하게 바라봤을 때 우리가 아닌 저들에 속하는 자가 우리에 편입되기 위해서는 '저들'무리에서 지녔던 생물학적 정체성을 제외한 모든 정체성을 항구적으로 포기해야만 한다. 그 상태에서 '우리'를 받아들여야만 엄밀한 의미에서의 우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실재적으로 그렇기란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엄밀한 의미에서는 귀화자 역시 '우리'가 아니지만 현실적 입장에서는 귀화자를 우리로 받아들여야 한다.

 

[2] 어떻게 표현해야 마땅할지 잘 모르겠다. 선험적이라고 해야 할지, 관념적이라고 표현해야 할지 , 인상적(impression)이라고 해야 할지는 불확실하다.

 

[3] 보편적 복지에 의한 조세저항: 세금을 낸 사람과 복지혜택을 받는 사람간의 괴리가 발생. 그에 대한 반감에서의 조세저항이 발생. 더하여 공리주의적 측면에서의 타당성 상실, 전도 발생.

 

[4] 성별에 있어서 양자의 엄격한 틀을 넘어서는 인위적이고 비정상적인 도치, 속칭 레즈비언이나 게이 따위의 동성애를 비판한다. 동성애를 옹호하는 이들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했다"고 착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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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모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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