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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 거짓말에서 나타난 폭력성의 문제 - 인간 본성과 관련함.

( 사진 출처는 네이버 영화정보)

 

 영화는 대한민국에서의 일종의 학교폭력인 왕따 현상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등장인물은 다음과 같다. 현숙(모), 만지(자), 천지(매), 미란(자), 미라(매), 김화연, 수경, 그리고 반 아이들이다. 이들을 피해자, 가해자, 방관자로 구성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현숙(모), 그리고 천지의 자(姉) 미란은 방관자이자 피해자이다. 딸 천지가 자살을 하기 전부터 어머니엑 넌지시 던져주었던 여러 가지 실마리와 단서, 암시를 놓쳤다. 또는 인지하지 못했기에 본인이 판단하기에는 일차적으로는 방관자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천지 어머님의 실책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갑자기 무엇을 계속하여 사달라고 한다거나,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다소 우울감이 느껴지는 식의 이질적 분위기 등이 그것이다. 또한 방관의 결과로 피해자가 되었다. 허나 천지 어머니가 방관을 하게 된 것의 이면에는 근본적 원인으로 사회구조적 모순이 있으니 비판만 할 수는 없을 것이며 뿐더러 실질적 원인은 가해자에게 있지 피해자에게 있는 것은 아니다. 가해자에는 화연, 수경, 미라가 해당된다. 피해자는 직접적 피해자로 천지가 있으며 간접적 피해자로는 현숙(모), 만지(자), 미란이 속한다. 방관자로는 반 아이들 전체가 해당되는데 만약 가해자의 범위를 가해 조력자, 방관자, 피해방어자로까지 확대한다면 가해자의 범위는 더욱 늘어나게 된다. 


 어떤 원인이 되었든 결과적으로 피해자인 천지는 약자화(化) 되었고 그렇기에 그는 제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게 된 것 같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피해학생 스스로가 나 자신을 능동적으로 보호할 능력이 있음을 깨우치도록 하는 조치가 교육적으로 그리고 사전 및 사후적으로 필요할 듯하다. 더불어 보호받을 수 있음 역시 깨우쳐야 한다. 궁극적으로는 보호법규와 처벌법규의 강화가 필요하다.
 관련하여 고대의 학자 플라톤은 올바름, 훌륭함의 완성을 위한 체육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체육은 몸을 건강하게 하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정신의 훌륭함(올바른 정신)과 건강한 육체는 항상 함께 따라가야만 한다. 관련하여 영화의 피해자인 천지의 모습을 보면, 천지는 착한 심성을 가졌으나 건강한 육체, 즉 외부로부터의 불의에 대항할 수 있는 전투적, 격정적 품성은 지니지 못한 측면이 있다. 다시 말해 주인공 천지의 경우는 심성이 참 부드럽고 선하게 잘 길러진 것으로 보이지만 외부로부터의 어떤 불의에 항거할 수 있는 건강한 육체, 즉 전투적, 격정적 기개는 다소 부족했다. 만약 정신 상태가 훌륭하지 못한 경우는 가해자와 같은 악한 심성을 지니게 되어 그에 따라 행동한다. 심지어 악한 심성에서는 반성의 능력도 떨어져 영화 속 인물 미라, 화연, 수경 등과 같이 제 스스로가 악한 행위를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지각하지 못하게 된다. 더욱이 그런 악한 심성에 주지하듯 체대를 준비하는 등의 학생들 대다수의 모습과 같이 전투적이고 격정적인 육체마저 추구한다면 일탈, 혹은 범죄, 폭력의 전형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학교폭력 및 왕따라는 세태 앞에서 해야할 일은 다음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사후적 조치일수도 있겠지만 아이들의 습성을 파악하여 못된 정신적 상태를 지닌 아이들로 하여금 올바른 정신적 상태를 지닐 수 있게끔 선택적 인성교육 강화를 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아이들에 한하여 전투적이고 기개적인 육체를 추구하지 못하도록 체육교육이나 운동에 있어서의 참여를 제한해야 할 것이다. 참고로 맹자는 호연지기를 기르라고 했다. 결론적으로 중요한 것은 학생의 심성을 바른 쪽으로 교양시키되 그 바른 심성이 침해받지 않도록 균형있는 체육교육이 함께 가야 한다는 것이다. 반대로 못된 심성을 지닌 아이들은 그런 불균형을 바로잡는 방향으로 교육을 제한 및 조정해야 할 것이다. 


 다른 맥락에서 왕따 현상과 그 원인, 대책을 말하자면 한 부모 가정(천지의 가정이 그 대표적 사례이다.) 등에 대한 정책적 지원이나 관심의 시스템 미비일 것인데 이는 결정적으로 국가차원의 잘못이 크다. 부조리, 불의의 원인, 책임은 국가로 이어진다. 천지의 어머니, 그 가정이 아이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이유는 다름 아니라 삶의 팍팍함에 있다. 당장 하루 벌어 자식과 살림을 꾸리기도 힘든 상황에 여유라는 것이 쉽게 나올 수 있었을까? 그렇지 않으리라. 그리고 왜 그런 가정이 국가 시스템 속에서 보호 및 관심을 받지 못하는 것인가? 왜 삶이 궁핍한 것인가? 그것은 바로 지금 그리고 여기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구조적 모순 때문일 것이다. 자본주의의 모순, 그리고 그러한 것을 방관한 주체, 바로잡기를 요구하는 우리들의 목소리를 무시한 주체가 바로 기성 권력자들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런 기성 권력자의 권력을 유지시켜 주는 힘은 결국 국민 총체이기에 그 원인은 다시 우리 국민 개개인에게로 돌아간다. 그 국가의 구속은 근본적으로는 인간 자체, 우리 모두의 잘못이다. 


 사실 권위주의적, 그런 환경에서 (경쟁, 적자생존) 그런 것들을 보고 자란 아이들, 집단주의적 문화. 개개인의 성향은 다소 덜 중시되는 경향. 집단과 화합. 국가주의, 민족주의 등이 이러한 것이다. 동양권, 특히 우리나라는 그것이 심하다. 여전히 집단주의적, 경쟁과 적자생존을 조장하는 천민자본주의적 패러다임이 만연하며 이는 전 근대적, 중세적, 원시적, 구태적 패러다임이다. 이런 사고로부터 벗어날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도 어떤 정명에 있어서 어긋나는 행동을 하도록 해서는 아니 될 것이니, 즉 이를테면 학생은 학생다워야 할 것이며, 교사는 교사다워야 할 것이며, 아이는 아이답고, 어른은 어른답고, 이처럼 이상적 본질과 일치되어야 한다. 즉 실제 사물에 붙여진 이름과 그 내실은 일치되어야 한다는 것이 정명이다. 각기 이름과 위치에 부합하는 책임과 의무, 그리고 그 관계 사이의 예를 벗어나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중세의 소위 ‘암울’하던 분위기를 벗어던지더니 결국 낭만주의니 무엇이니 하는 세기말 비엔나, 퇴폐문화 즉 데카당스가 횡횡하였다. 일종의 합리성에 대한 반발이자 인간 방종의 극치인 것이다. 그러한 방종은 결국 테러리즘을 촉발하여 인류의 큰 비극인 1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게 되었다. 따라서 현재 직면한 학교폭력 문제 등을 비롯한 다양한 사회적 문제 앞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권위주의 및 집단주의적인 경향으로 벗어나는 것과 정명사이의 균형의 추구일 것이다. 


 특히나 많은 사람을 만나고, 또 중등학교에서 시간강사를 하는 요즘, 영화를 보면서도 그랬지만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좋은 생각이면 괜찮겠는데 회의적인 생각이다. 바로 인문, 인간의 본성에 대한 깊은 불신이 그것이다. 참 복잡한 심정이다. 상호간 진심이 소통하지 못하는 세상, 덕으로 소통되지 못하는 그런 세상이다. 영화 제목이 왜 우아한 거짓말일까? 그럴듯하게 포장된 삶이지만 실상 거짓말이 하나의 생존법칙화 되어버린 것이다. 인간이란 그런 것 같다. 유학의 표현을 빌리자면 소수의 군자나 성인, 대인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은 소인에 머무른다. 그것이 타고남인지 후천적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보여지는 결과가 예부터 그러했다. 좀 더 높은 가치, 즉 편파성 혹은 당파성을 뛰어 넘는 인륜적이고 좀 더 높은 가치의 추구, 예를 들면 평화, 공평무사, 도덕추구, 정의, 이런 것들을 따르는 것이 과연 인간 본성적으로 가능할까? 행복은 그런 가치 위에서 구축될 수 있다. 특히 학교폭력이나 왕따 현상은 도덕성 추구, 정의의 문제, 그것과 결부된 인성, 심성의 문제와 관련이 깊다. 하지만 그런 대체(大體)를 따르는 인간은 언제나 소수였고 그 소수는 결국 피해자가 된다. 


 이런 현상과 관련하여 고대 중국에서 통일(좀 더 높은 가치 추구를 위한 기반 - 그 반대는 분열이 될 것이다) 혹은 부국강병을 위해서는 선진단계로의 이행이 필요했는데 그것이 바로 변법이다. 그 변법이라 함은 행정조직, 조세, 병역, 형사처벌, 경제관계 등에 관한 각종 법률의 마련을 뜻한다. 말하자면 고대 중국의 최초 통일자는 진시황, 즉 진나라였는데 이 진나라에서 시행한 변법은 상앙이라는 인물이었다. 그 인물은 결국 한비자의 법가정책을 따르는 인물이었고, (비극적이게도 통일 이후 곧 분열되었지만) 통일전쟁에서의 승리를 가져다 주었고 잠시나마 인민의 삶에 평화가 깃들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역사를 보다보면 느껴지는 바가 많다. 돌이켜보면 인문, 인간 가슴에 아로 새겨진 인간만의 아름다운 무늬, 그러한 것은 모두가 주지하듯 사실상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당위성이며 인위적인 가치이다. 인위적, 당위적이라 함은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는 뜻이니, 그러한 좋은 가치를 바로 세우기 위한 유일한 방도는 법과 체계, 강한 정책, 감시와 통제로서 사람들이 엇나가지 못하도록 바로잡는 것뿐이 없는 것이 아닐까?

 

 -20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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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모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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