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 그리고/책 영화 리뷰'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7.07.23 9년만에 다시 본 <매트릭스>
  2. 2016.01.05 우아한 거짓말과 폭력성의 문제
  3. 2015.07.06 니체, 도덕의 계보 번역 비교 2
반응형

  근 9년 만에 영화 <매트릭스>를 다시보며, 짧은 에세이를 남긴다. 아마 9년 전의 글이 있다면 그 전과 후의 관점, 영화를 보는 관점, 맥락이 많이 달라져있지 않을까 싶다. 
영화 <매트릭스>의 교육철학적 해석 - 극복하는 인간!

  모두가 주지하듯, 매트릭스의 큰 주제는 빨간 약 대 파란 약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이 영화의 모든 주제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없고 그 외 다양한 많은 것들이 담겨 있음은 자명한 사실이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위 “진부”하다고 할 수 있는 이 케케묵은 주제를 선택한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다. 바로, 이 주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중요한 화두를 우리에게 던져주기 때문이다. 차근차근 살펴보겠다.

  빨간 약은 진리를 상징하며 파란 약은 거짓을 상징한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행복을 목적적으로 추구하는 존재자(최고선으로서의 행복,eudaimonia)라고 가정하고 또 이것이 참이라고 가해보자면 이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질문은 다음과 같다. ‘행복(치)은 진리(치)와 비례하는가?’ 여기서 만약 행복치와 진리치가 비례한다고 한다면 다시 두 가지 경우가 나타난다. 이는 행복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의 차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 만약 진실된 행복만이 나에게 참된 행복을 준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라면 빨간 약을 선택할 것이다. 진실된 행복만이 나에게 참된 행복을 준다고 생각하는 입장일 것이다(a). 반면 그것이 참이든 거짓이든 상관없이 나에게 행복을 주는 것이기만 하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하다는 입장일 경우파란 약을 선택할 것이다(b). 아마 극중 인물에서 사이퍼가 이에 속할 것이리라.

  다음으로, 진리치와 행복치는 일치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지닌 측이 있을 것이다. 이 역시 마지막의 최종적 결과는 두 가지로 나타난다. 만약 진리치가 행복치와 무관하게 추구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빨간 약을 선택하게 될 것이다(c). 반면 진리치와 행복치는 전혀 상관관계가 없다고 규정한 상태에서, 만약 진리치를 선택할 경우 나의 삶에 고통이 야기될 것이 자명한 것으로 결론지은 상태인 자의 경우는 당연히 파란 약을 선택할 것이다(d). d의 경우는 계산되는 행복(쾌락)의 양에 따라 파란 약을 선택할수도, 빨간 약을 선택할 수도 있겠다. 지금까지 ‘진리치는 행복치와 비례하는가’하는 질문과 ‘빨간 약 대 파란 약’이라는 선택지를 통해 총 네 가지의 경우를 도출하였다. 나는 여기서 우리가 교육철학적으로 주목해야할 바는 바로 (a)와 (c)의 인물상에 있다고 판단한다. 그리고 경계해야 할 바는 (b)와 (d)의 인간상에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밝힌 바와 같이, (a)인물상은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이다(대전제). 그리고 행복은 참된 실상 속에서 얻어진다고 파악하는 인물이다. 즉 행복이라고 다 같은 행복이 아니라는 바를 함축한다. 전형적인 학자적 인간상이라 할 수 있다. 공리주의 사상가 존 스튜어트 밀의 말을 잠시 빌리자면 (a)형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이야말로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자의, 진정한 쾌락’, ‘고급 쾌락’, ‘지속 가능한 쾌락’이며 (b)형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은 ‘속박된 저급한 쾌락’, ‘육체적 쾌락’, ‘감각적 쾌락’이 되겠다. 매트릭스 속에 들어간 인간들이 느끼는 쾌락은 사실상 저급한 쾌락에 지나지 않는다. 전형적인 돼지 같은 인간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맹목적으로 행복(쾌락)만을 추구하는 인간인 셈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교육적으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인간상의 방향은 다름아닌 a인 것이다.

  다음으로, c인간상을 살펴보겠다. 밝힌 바와 같이, c인간상은 역시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이다(대전제). 그런데, 그가 생각하기에 진리치와 행복치는 반드시 비례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때로는 진리치와 행복이 일치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인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극중 네오를 보더라도 그러하다. 참된 실상은 성분을 채 알 수 없는 죽을 먹으며 살고 있으나, 가상 세계인 매트릭스에서는 나름대로 인간답다고 할 수 있는 식사를 먹을 수 있다. 이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리를 선택한 것은, 곧 진리는 쾌락, 행복 등의 그것과 무관하게 추구할만한 가치가 있다는 판단이 선행되어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이는 혁명가적 인간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 반면 d의 경우는 기회주의자적 인간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교육적으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인간상의 방향은 다름아닌 c인 것이다.

  이를 우리의 현실 역사와 비교해보면 흥미로워진다. 우리내의 역사 속에서 a,b,c,d의 인간형을 모두 살펴볼 수 있다. 특히 주목해야할 시점은 해방전후사라고 할 수 있겠다. 해방 전후로 여운형, 김구와 같은 a(학자)형 인간이 있었으며, 전통 대지주 혹은 친일 지주, 해방 후 재벌그룹 등을 대표로 할 수 있는 b(돼지)형 인간상이 있었으며, 이봉창, 윤봉길, 그 외 항일운동과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던 c(혁명가)형 인간이 있었으며, 이승만을 비롯한 친일제파와 친미제파, 親-자본주의파로 대표될 수 있는 d(기회주의자)형 인간이 있었다. 이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a와 c의 인간상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 긍정적이라는 사실이다. 또, b와 d의 인간상이 득세하였을 경우 벌어진 다양한 역사적 사태들을 반성할 수 있다. 이를테면, 을사늑약과 한일합병, 해방 후에는 신탁통치와 미군정기, 미소 분할 점령의 사태, 전쟁 후에는 군 독재정권의 난립이 그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할 것이 있는데, a인간상과 c인간상을 비교하여 더 훌륭하다고 말할 수 있는 인간상은 바로 c인간상이라고 것이다. 만약 행복이 진리치와 비례하며, 참된 진리속에서 얻어지는 행복만이 우리에게 참된 행복만을 준다고 생각하는 입장에서 보자면 빨간 약을 먹고 고군분투하는 것이 연역적으로 지극히 타당한 것이 된다. 반면, c의 경우는, 말 그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위한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나에게 해가 될 것임이 자명함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만행으로부터 투쟁을 해왔고, 나에게 해가 될 것임이 자명함에도 불구하고 미제로부터 투쟁을 해왔고, 나에게 해가 될 것임이 자명함에도 불구하고 독재자로부터 투쟁하여 민주주의를 이룩하였다. 나에게 해가 될 것임이 자명함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사회의 부조리로부터 투쟁하며 더 나은 사회를 추구하였다. 나에게 해가 될 것임이 자명함에도 불구하고 친일 친미 기회주의자와 독재의 잔재로부터 투쟁하여 민주주의를 한층 더 성숙시켰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 수 있는 결론 또한 도출되지 않는가? c인간상이야말로 고귀한 격정의 사나움을 쾌락과 고통에 대한 통제(절제)와 인내(용기)로 승화시킨, 즉 c야말로 올바로 양육된 thymos를 지닌 인간이며, c야말로 자기 자신을 극복하고 인간 자신과 세계를 긍정하여 나의 삶에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의미를 완성시키는 주인의 역할을 하는 존재, 그러니까 현실의 고통, 쾌락(행복)과 진리치의 불일치성에 고통스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결단을 통해 그 고통 앞에서 환하게 웃는 자로 변화된 사람, 즉 반대의 가능성을 향해 능동적으로 기투하는 자! 바로 위버멘쉬(Übermensch, overman)적 인간상에 다름이 아닐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교육을 통해 우리가 육성해야 할 최종적 인간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반응형
Posted by 모순성
,
반응형

우아한 거짓말에서 나타난 폭력성의 문제 - 인간 본성과 관련함.

( 사진 출처는 네이버 영화정보)

 

 영화는 대한민국에서의 일종의 학교폭력인 왕따 현상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등장인물은 다음과 같다. 현숙(모), 만지(자), 천지(매), 미란(자), 미라(매), 김화연, 수경, 그리고 반 아이들이다. 이들을 피해자, 가해자, 방관자로 구성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현숙(모), 그리고 천지의 자(姉) 미란은 방관자이자 피해자이다. 딸 천지가 자살을 하기 전부터 어머니엑 넌지시 던져주었던 여러 가지 실마리와 단서, 암시를 놓쳤다. 또는 인지하지 못했기에 본인이 판단하기에는 일차적으로는 방관자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천지 어머님의 실책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갑자기 무엇을 계속하여 사달라고 한다거나,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다소 우울감이 느껴지는 식의 이질적 분위기 등이 그것이다. 또한 방관의 결과로 피해자가 되었다. 허나 천지 어머니가 방관을 하게 된 것의 이면에는 근본적 원인으로 사회구조적 모순이 있으니 비판만 할 수는 없을 것이며 뿐더러 실질적 원인은 가해자에게 있지 피해자에게 있는 것은 아니다. 가해자에는 화연, 수경, 미라가 해당된다. 피해자는 직접적 피해자로 천지가 있으며 간접적 피해자로는 현숙(모), 만지(자), 미란이 속한다. 방관자로는 반 아이들 전체가 해당되는데 만약 가해자의 범위를 가해 조력자, 방관자, 피해방어자로까지 확대한다면 가해자의 범위는 더욱 늘어나게 된다. 


 어떤 원인이 되었든 결과적으로 피해자인 천지는 약자화(化) 되었고 그렇기에 그는 제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게 된 것 같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피해학생 스스로가 나 자신을 능동적으로 보호할 능력이 있음을 깨우치도록 하는 조치가 교육적으로 그리고 사전 및 사후적으로 필요할 듯하다. 더불어 보호받을 수 있음 역시 깨우쳐야 한다. 궁극적으로는 보호법규와 처벌법규의 강화가 필요하다.
 관련하여 고대의 학자 플라톤은 올바름, 훌륭함의 완성을 위한 체육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체육은 몸을 건강하게 하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정신의 훌륭함(올바른 정신)과 건강한 육체는 항상 함께 따라가야만 한다. 관련하여 영화의 피해자인 천지의 모습을 보면, 천지는 착한 심성을 가졌으나 건강한 육체, 즉 외부로부터의 불의에 대항할 수 있는 전투적, 격정적 품성은 지니지 못한 측면이 있다. 다시 말해 주인공 천지의 경우는 심성이 참 부드럽고 선하게 잘 길러진 것으로 보이지만 외부로부터의 어떤 불의에 항거할 수 있는 건강한 육체, 즉 전투적, 격정적 기개는 다소 부족했다. 만약 정신 상태가 훌륭하지 못한 경우는 가해자와 같은 악한 심성을 지니게 되어 그에 따라 행동한다. 심지어 악한 심성에서는 반성의 능력도 떨어져 영화 속 인물 미라, 화연, 수경 등과 같이 제 스스로가 악한 행위를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지각하지 못하게 된다. 더욱이 그런 악한 심성에 주지하듯 체대를 준비하는 등의 학생들 대다수의 모습과 같이 전투적이고 격정적인 육체마저 추구한다면 일탈, 혹은 범죄, 폭력의 전형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학교폭력 및 왕따라는 세태 앞에서 해야할 일은 다음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사후적 조치일수도 있겠지만 아이들의 습성을 파악하여 못된 정신적 상태를 지닌 아이들로 하여금 올바른 정신적 상태를 지닐 수 있게끔 선택적 인성교육 강화를 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아이들에 한하여 전투적이고 기개적인 육체를 추구하지 못하도록 체육교육이나 운동에 있어서의 참여를 제한해야 할 것이다. 참고로 맹자는 호연지기를 기르라고 했다. 결론적으로 중요한 것은 학생의 심성을 바른 쪽으로 교양시키되 그 바른 심성이 침해받지 않도록 균형있는 체육교육이 함께 가야 한다는 것이다. 반대로 못된 심성을 지닌 아이들은 그런 불균형을 바로잡는 방향으로 교육을 제한 및 조정해야 할 것이다. 


 다른 맥락에서 왕따 현상과 그 원인, 대책을 말하자면 한 부모 가정(천지의 가정이 그 대표적 사례이다.) 등에 대한 정책적 지원이나 관심의 시스템 미비일 것인데 이는 결정적으로 국가차원의 잘못이 크다. 부조리, 불의의 원인, 책임은 국가로 이어진다. 천지의 어머니, 그 가정이 아이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이유는 다름 아니라 삶의 팍팍함에 있다. 당장 하루 벌어 자식과 살림을 꾸리기도 힘든 상황에 여유라는 것이 쉽게 나올 수 있었을까? 그렇지 않으리라. 그리고 왜 그런 가정이 국가 시스템 속에서 보호 및 관심을 받지 못하는 것인가? 왜 삶이 궁핍한 것인가? 그것은 바로 지금 그리고 여기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구조적 모순 때문일 것이다. 자본주의의 모순, 그리고 그러한 것을 방관한 주체, 바로잡기를 요구하는 우리들의 목소리를 무시한 주체가 바로 기성 권력자들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런 기성 권력자의 권력을 유지시켜 주는 힘은 결국 국민 총체이기에 그 원인은 다시 우리 국민 개개인에게로 돌아간다. 그 국가의 구속은 근본적으로는 인간 자체, 우리 모두의 잘못이다. 


 사실 권위주의적, 그런 환경에서 (경쟁, 적자생존) 그런 것들을 보고 자란 아이들, 집단주의적 문화. 개개인의 성향은 다소 덜 중시되는 경향. 집단과 화합. 국가주의, 민족주의 등이 이러한 것이다. 동양권, 특히 우리나라는 그것이 심하다. 여전히 집단주의적, 경쟁과 적자생존을 조장하는 천민자본주의적 패러다임이 만연하며 이는 전 근대적, 중세적, 원시적, 구태적 패러다임이다. 이런 사고로부터 벗어날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도 어떤 정명에 있어서 어긋나는 행동을 하도록 해서는 아니 될 것이니, 즉 이를테면 학생은 학생다워야 할 것이며, 교사는 교사다워야 할 것이며, 아이는 아이답고, 어른은 어른답고, 이처럼 이상적 본질과 일치되어야 한다. 즉 실제 사물에 붙여진 이름과 그 내실은 일치되어야 한다는 것이 정명이다. 각기 이름과 위치에 부합하는 책임과 의무, 그리고 그 관계 사이의 예를 벗어나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중세의 소위 ‘암울’하던 분위기를 벗어던지더니 결국 낭만주의니 무엇이니 하는 세기말 비엔나, 퇴폐문화 즉 데카당스가 횡횡하였다. 일종의 합리성에 대한 반발이자 인간 방종의 극치인 것이다. 그러한 방종은 결국 테러리즘을 촉발하여 인류의 큰 비극인 1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게 되었다. 따라서 현재 직면한 학교폭력 문제 등을 비롯한 다양한 사회적 문제 앞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권위주의 및 집단주의적인 경향으로 벗어나는 것과 정명사이의 균형의 추구일 것이다. 


 특히나 많은 사람을 만나고, 또 중등학교에서 시간강사를 하는 요즘, 영화를 보면서도 그랬지만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좋은 생각이면 괜찮겠는데 회의적인 생각이다. 바로 인문, 인간의 본성에 대한 깊은 불신이 그것이다. 참 복잡한 심정이다. 상호간 진심이 소통하지 못하는 세상, 덕으로 소통되지 못하는 그런 세상이다. 영화 제목이 왜 우아한 거짓말일까? 그럴듯하게 포장된 삶이지만 실상 거짓말이 하나의 생존법칙화 되어버린 것이다. 인간이란 그런 것 같다. 유학의 표현을 빌리자면 소수의 군자나 성인, 대인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은 소인에 머무른다. 그것이 타고남인지 후천적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보여지는 결과가 예부터 그러했다. 좀 더 높은 가치, 즉 편파성 혹은 당파성을 뛰어 넘는 인륜적이고 좀 더 높은 가치의 추구, 예를 들면 평화, 공평무사, 도덕추구, 정의, 이런 것들을 따르는 것이 과연 인간 본성적으로 가능할까? 행복은 그런 가치 위에서 구축될 수 있다. 특히 학교폭력이나 왕따 현상은 도덕성 추구, 정의의 문제, 그것과 결부된 인성, 심성의 문제와 관련이 깊다. 하지만 그런 대체(大體)를 따르는 인간은 언제나 소수였고 그 소수는 결국 피해자가 된다. 


 이런 현상과 관련하여 고대 중국에서 통일(좀 더 높은 가치 추구를 위한 기반 - 그 반대는 분열이 될 것이다) 혹은 부국강병을 위해서는 선진단계로의 이행이 필요했는데 그것이 바로 변법이다. 그 변법이라 함은 행정조직, 조세, 병역, 형사처벌, 경제관계 등에 관한 각종 법률의 마련을 뜻한다. 말하자면 고대 중국의 최초 통일자는 진시황, 즉 진나라였는데 이 진나라에서 시행한 변법은 상앙이라는 인물이었다. 그 인물은 결국 한비자의 법가정책을 따르는 인물이었고, (비극적이게도 통일 이후 곧 분열되었지만) 통일전쟁에서의 승리를 가져다 주었고 잠시나마 인민의 삶에 평화가 깃들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역사를 보다보면 느껴지는 바가 많다. 돌이켜보면 인문, 인간 가슴에 아로 새겨진 인간만의 아름다운 무늬, 그러한 것은 모두가 주지하듯 사실상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당위성이며 인위적인 가치이다. 인위적, 당위적이라 함은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는 뜻이니, 그러한 좋은 가치를 바로 세우기 위한 유일한 방도는 법과 체계, 강한 정책, 감시와 통제로서 사람들이 엇나가지 못하도록 바로잡는 것뿐이 없는 것이 아닐까?

 

 -2015.11-

반응형

'실천 그리고 > 책 영화 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9년만에 다시 본 <매트릭스>  (0) 2017.07.23
니체, 도덕의 계보 번역 비교  (2) 2015.07.06
Posted by 모순성
,
반응형



도덕의 계보학

저자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출판사
연암서가 | 2011-08-30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위험한 도덕 혁명가 니체 만년의 대표작 위험한 도덕 혁명가 니체...
가격비교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니체전집 14)

저자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 지음
출판사
책세상 | 2002-02-10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니체 사거 100주년을 맞아 책세상 출판사에서 내고 있는 니체전...
가격비교



프리드리히, <도덕의 계보> 번역 비교

비교: 홍성광 번역, <도덕의 계보학>, 연암서가

      김정현 번역,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 책세상 - <도덕의 계보> 편


- 총평: 내용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는 홍성광 선생님의 번역이 깔끔하다. 김정현 선생님의 번역은 원전의 느낌을 살리는데 중점적이다.


 이를테면 홍성광 선생님의 번역에서는 문단의 구분이 깔끔하게 되어 있으나 실제로 독일어 원전에서는 그러하지 않다. 아예 몇 페이지가 한 문단, 혹은 한 문장으로 구성된다(몇 페이지에 이르는 긴 문장-독일어 고전의 특징). 이를 그 내용에 따라 홍선생님이 구분해 놓은 것이다. 김정현 선생님의 번역은 내용을 매끄럽게 전달하기 보다는 원전의 느낌을 보존하는데 중점적으로 작업이 된 듯하다. 즉 김선생님의 번역은 원전의 것을 되도록이면 그대로 따르고 있다. 앞서서 홍선생님이 해놓은 문단 구분이 없이 원전 내용을 그대로 살려, 읽어보면 몇 페이

지에 걸쳐 문단 구분이 없게 된다.


 전체적으로 홍성광 선생님의 번역은 일반의 독자가 읽기 쉽도록 의역과 문단 구분을 자주 사용했다. 이는 사실 단어나 문장의 의미를 전달시키고 이해하는데 있어 논란이 있을 수 있겠지만 독자를 이해시키는데 있어서는 한결 수월한 편이다. 김선생님의 번역은 아무래도 이해에 중점을 두었다기 보다는 원전 판본 대용으로 쓰이기 위함인 듯하다. 따라서 이러한 점을 감안할 때 학술적 참고로 쓸 목적이라면 김정현 선생님의 번역본을, <도덕의 계보>의 수월한 이해, 독해를 위함이라면 홍성광 선생님의 번역본을 선택하는 것이 현명할 듯하다. 


문장 번역 비교 - (1) (동일 문장)

연암서가, p.12

"이 논박서에서 문제되고 있는 우리의 도덕적 편견에 대한 나의 생각은 <인간적인 것, 너무나 인간적인 것-자유로운 정신을 위한 책>이라는 제목의 잠언집에서 최초로 불충분하게나마 임시로 표현되어 있다."

책세상, p.338

"―우리 도덕적 편견의 기원에 관한 나의 사상은바로 이것이야말로 이 논박서에서 문제가 되는 것인데― <인간적인 , 너무나 인간적인. 자유정신을 위한 책 Menschliches, Allzumenshliches. Ein Buch Fur freie Geister>이라는 제목의 저 잠언집에서 최초로 불충분하게 잠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문장 번역 비교 - (2)

연암서가, p.14

"굳이 털어놓고 싶지 않지만 나는 유독 의심이 많은 사람이라 도덕을, 말하자면 지금까지 지상에서 도덕으로 칭송받은 모든 것을 미심쩍게 생각한다."

책세상, p.340

"내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나 자신의 특유한 의심 때문에―이것은 다시 말해 도덕에, 지금까지 지상에서 도덕으로 찬양되어온 모든 것에 관계한다―, …"



반응형
Posted by 모순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