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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 9년 만에 영화 <매트릭스>를 다시보며, 짧은 에세이를 남긴다. 아마 9년 전의 글이 있다면 그 전과 후의 관점, 영화를 보는 관점, 맥락이 많이 달라져있지 않을까 싶다. 
영화 <매트릭스>의 교육철학적 해석 - 극복하는 인간!

  모두가 주지하듯, 매트릭스의 큰 주제는 빨간 약 대 파란 약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이 영화의 모든 주제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없고 그 외 다양한 많은 것들이 담겨 있음은 자명한 사실이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위 “진부”하다고 할 수 있는 이 케케묵은 주제를 선택한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다. 바로, 이 주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중요한 화두를 우리에게 던져주기 때문이다. 차근차근 살펴보겠다.

  빨간 약은 진리를 상징하며 파란 약은 거짓을 상징한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행복을 목적적으로 추구하는 존재자(최고선으로서의 행복,eudaimonia)라고 가정하고 또 이것이 참이라고 가해보자면 이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질문은 다음과 같다. ‘행복(치)은 진리(치)와 비례하는가?’ 여기서 만약 행복치와 진리치가 비례한다고 한다면 다시 두 가지 경우가 나타난다. 이는 행복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의 차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 만약 진실된 행복만이 나에게 참된 행복을 준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라면 빨간 약을 선택할 것이다. 진실된 행복만이 나에게 참된 행복을 준다고 생각하는 입장일 것이다(a). 반면 그것이 참이든 거짓이든 상관없이 나에게 행복을 주는 것이기만 하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하다는 입장일 경우파란 약을 선택할 것이다(b). 아마 극중 인물에서 사이퍼가 이에 속할 것이리라.

  다음으로, 진리치와 행복치는 일치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지닌 측이 있을 것이다. 이 역시 마지막의 최종적 결과는 두 가지로 나타난다. 만약 진리치가 행복치와 무관하게 추구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빨간 약을 선택하게 될 것이다(c). 반면 진리치와 행복치는 전혀 상관관계가 없다고 규정한 상태에서, 만약 진리치를 선택할 경우 나의 삶에 고통이 야기될 것이 자명한 것으로 결론지은 상태인 자의 경우는 당연히 파란 약을 선택할 것이다(d). d의 경우는 계산되는 행복(쾌락)의 양에 따라 파란 약을 선택할수도, 빨간 약을 선택할 수도 있겠다. 지금까지 ‘진리치는 행복치와 비례하는가’하는 질문과 ‘빨간 약 대 파란 약’이라는 선택지를 통해 총 네 가지의 경우를 도출하였다. 나는 여기서 우리가 교육철학적으로 주목해야할 바는 바로 (a)와 (c)의 인물상에 있다고 판단한다. 그리고 경계해야 할 바는 (b)와 (d)의 인간상에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밝힌 바와 같이, (a)인물상은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이다(대전제). 그리고 행복은 참된 실상 속에서 얻어진다고 파악하는 인물이다. 즉 행복이라고 다 같은 행복이 아니라는 바를 함축한다. 전형적인 학자적 인간상이라 할 수 있다. 공리주의 사상가 존 스튜어트 밀의 말을 잠시 빌리자면 (a)형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이야말로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자의, 진정한 쾌락’, ‘고급 쾌락’, ‘지속 가능한 쾌락’이며 (b)형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은 ‘속박된 저급한 쾌락’, ‘육체적 쾌락’, ‘감각적 쾌락’이 되겠다. 매트릭스 속에 들어간 인간들이 느끼는 쾌락은 사실상 저급한 쾌락에 지나지 않는다. 전형적인 돼지 같은 인간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맹목적으로 행복(쾌락)만을 추구하는 인간인 셈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교육적으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인간상의 방향은 다름아닌 a인 것이다.

  다음으로, c인간상을 살펴보겠다. 밝힌 바와 같이, c인간상은 역시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이다(대전제). 그런데, 그가 생각하기에 진리치와 행복치는 반드시 비례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때로는 진리치와 행복이 일치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인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극중 네오를 보더라도 그러하다. 참된 실상은 성분을 채 알 수 없는 죽을 먹으며 살고 있으나, 가상 세계인 매트릭스에서는 나름대로 인간답다고 할 수 있는 식사를 먹을 수 있다. 이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리를 선택한 것은, 곧 진리는 쾌락, 행복 등의 그것과 무관하게 추구할만한 가치가 있다는 판단이 선행되어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이는 혁명가적 인간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 반면 d의 경우는 기회주의자적 인간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교육적으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인간상의 방향은 다름아닌 c인 것이다.

  이를 우리의 현실 역사와 비교해보면 흥미로워진다. 우리내의 역사 속에서 a,b,c,d의 인간형을 모두 살펴볼 수 있다. 특히 주목해야할 시점은 해방전후사라고 할 수 있겠다. 해방 전후로 여운형, 김구와 같은 a(학자)형 인간이 있었으며, 전통 대지주 혹은 친일 지주, 해방 후 재벌그룹 등을 대표로 할 수 있는 b(돼지)형 인간상이 있었으며, 이봉창, 윤봉길, 그 외 항일운동과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던 c(혁명가)형 인간이 있었으며, 이승만을 비롯한 친일제파와 친미제파, 親-자본주의파로 대표될 수 있는 d(기회주의자)형 인간이 있었다. 이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a와 c의 인간상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 긍정적이라는 사실이다. 또, b와 d의 인간상이 득세하였을 경우 벌어진 다양한 역사적 사태들을 반성할 수 있다. 이를테면, 을사늑약과 한일합병, 해방 후에는 신탁통치와 미군정기, 미소 분할 점령의 사태, 전쟁 후에는 군 독재정권의 난립이 그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할 것이 있는데, a인간상과 c인간상을 비교하여 더 훌륭하다고 말할 수 있는 인간상은 바로 c인간상이라고 것이다. 만약 행복이 진리치와 비례하며, 참된 진리속에서 얻어지는 행복만이 우리에게 참된 행복만을 준다고 생각하는 입장에서 보자면 빨간 약을 먹고 고군분투하는 것이 연역적으로 지극히 타당한 것이 된다. 반면, c의 경우는, 말 그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위한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나에게 해가 될 것임이 자명함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만행으로부터 투쟁을 해왔고, 나에게 해가 될 것임이 자명함에도 불구하고 미제로부터 투쟁을 해왔고, 나에게 해가 될 것임이 자명함에도 불구하고 독재자로부터 투쟁하여 민주주의를 이룩하였다. 나에게 해가 될 것임이 자명함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사회의 부조리로부터 투쟁하며 더 나은 사회를 추구하였다. 나에게 해가 될 것임이 자명함에도 불구하고 친일 친미 기회주의자와 독재의 잔재로부터 투쟁하여 민주주의를 한층 더 성숙시켰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 수 있는 결론 또한 도출되지 않는가? c인간상이야말로 고귀한 격정의 사나움을 쾌락과 고통에 대한 통제(절제)와 인내(용기)로 승화시킨, 즉 c야말로 올바로 양육된 thymos를 지닌 인간이며, c야말로 자기 자신을 극복하고 인간 자신과 세계를 긍정하여 나의 삶에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의미를 완성시키는 주인의 역할을 하는 존재, 그러니까 현실의 고통, 쾌락(행복)과 진리치의 불일치성에 고통스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결단을 통해 그 고통 앞에서 환하게 웃는 자로 변화된 사람, 즉 반대의 가능성을 향해 능동적으로 기투하는 자! 바로 위버멘쉬(Übermensch, overman)적 인간상에 다름이 아닐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교육을 통해 우리가 육성해야 할 최종적 인간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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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모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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