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 그리다 /병영일기'에 해당되는 글 36건

  1. 2013.11.24 비밀 관리
  2. 2013.11.24 해군 군가 1
  3. 2013.08.10 외전-잡다메모장
  4. 2013.08.04 09년 5,6월의 이야기 3
  5. 2013.08.02 09년 5월의 일기 2차
  6. 2013.08.02 09년 5월의 일지(by 수양록)
  7. 2013.08.02 09년 4월의 일기(in 수양록)
  8. 2013.08.01 09년 3월의 일기(수양록중에)
  9. 2013.05.14 어느 해군의 일기
  10. 2013.05.01 나의 군생활 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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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종류는 2급 3급 대외비가 있다. 비밀의 관리는 함(정)장, 통신장만이 할 수 있으며 2급 비밀취급 인가가 없는 사람은 비밀의 열람 관리 취급이 불가하다. 함정의 경우 2급 비밀취급 인가가 있는 사람은 함(정)장, 통신장, 전탐장이 있다. 하지만 비밀 취급 인가가 없는 사람이라도 대외비의 경우에는 열람이 가능하다(같은 소속에 한해). 모든 비밀은 비밀보관함에 있어야 하며 비밀보관함 키는 함(정)장, 통신장이 관리한다. 비밀을 운반시 수발가방에 넣어 이동하며 자물쇠로 잠그고 다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1. 비밀 접수용 관리 기록부

비밀 접수용 관리기록부는 2급 , 3급 대외비 비밀이 부대로 들어올 시 즉각 등제를 하고 제일 먼저 기록하는 책자이다. 접수용 관리기록부는 비밀보관함에 항상 비치되며 기록순서는 관리번호, 발행처, 비밀등급, 일제, 제목, 보존기간, 보호기간, 사본번호 순이다.


2. 관리번호

접수시 맨 앞에 관리번호를 써야 한다. 관리번호는 그 해 접수된 순서대로 2급, 3급, 대외비 마다 따로 관리 번호가 정해진다. 그래서 책자와 문서 구분 없이 번호는 순서대로 따 내려간다. 중간에 비밀이 파기가 되어도 순번은 계속 유지된다. 


3. 파기

비밀의 파기는 우리가 생산한 비밀의 경우 절대로 소각 및 쇄절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파기날짜가 되면 갈색 봉투에 넣어 이관대기 하지 말고 기다렸다가 1년 후에 이관대기 한다. 봉투 앞에는 비밀의 젬고 파기날자를 기입해주고 봉투의 위아래는 비밀의 등급을 표시하는 도장을 직고 봉투를 봉한 부분에는 도장을 찍어주어야 한다. 받은 비밀의 경우 파기날자가 되면 비밀 관릭록부에 관리번호부터 제목, 보존 기간까지 빨건 줄로 긋고 비고란에 소각이면 소각, 예고문도래에 의해 파기면 파기로 표기한다.


아직도 기억난다. 얼마나 호되게 외웠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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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 10대 애창 군가에는 

1 해군가

2 브라보 해군

3 바다의 용사

4 해양가

5 바다로 가자

6 내 청춘은 파도다

7 바다는 부른다

8 바다에 산다

9 군함행진곡

10 앵카송

이 있으며, 기초군사 교육장의 군가로는

11 교육사령부가

가 있다.



1. 해군가

(1절)

우리는 해군이다 바다의 방패

죽어도 또 죽어도 겨레와 나라

바다를 지켜야만 강토가 있고

강토가 있는곳에 조국이 있다

우리는 해군이다 바다가 고향

가슴속 끓는 피를 고이 바치자

(2절)

우리는 해군이다 바다의 용사

살아도 또 살아도 정의와 자유

오대양 지켜야만 평화가 있고

평화가 있는곳에 자유가 있다

우리는 해군이다 바다가 고향

가슴속 끓는 피를 고이 바치자


2.브라보 해군

(1절)

내얼굴이 검다고 깔보지마라

이래뵈도 바다에선 멋진 사나이

커다란 군함타고 한달 삼십일

넘실대는 파도에 청춘을 바쳤다

야야야 야야야 야야야 야야야

갈매기가 잘안다 두둑한 배짱

사나이 태어나 두번 죽느냐

(2절)

미끈하게 뽑았다고 붙잡지마라

네눈에는 근사하게 보이겠지만

상륙하는 하룻밤에 빈털털이

돌아갈땐 빚생이가 그래도 좋다오

야야야 야야야 야야야 야야야

갈매기가 잘안다 두둑한 배짱

사나이 태어나 두번 죽느냐


3. 바다의 용사

(1절)

한번싸워 적군의 수롤르 끊고

두번싸워 적함을 산산이 부신

상승장군 충무공 혼을 이어서

노도를 헤치면서 우리는 간다

인생의 보람을 바다에 걸고

오늘도 싸운다 바다의 용사

오늘도 싸운다 바다의 용사

(2절)

청춘의 꿈이어린 영원의 바다

정열에 펄펄뛰는 낭만의 바다

자유대한 수호의 사명을 띄고

멸적의 기백으로 우리는 간다

인생의 보람을 바다에 걸고

오늘도 싸운다 바다의 용사

오늘도 싸운다 바다의 용사

(3절)

갈매기 울어대는 망망한 바다

해오라기 춤추는 환희의 바다

사나이 벅찬기개 가슴에 안고

꿈을 헤치면서 우리는 간다

인생의 보람을 바다에 걸고

오늘도 싸운다 바다의 용사

오늘도 싸운다 바다의 용사


4. 해양가

검푸른 파도 삼킬 듯 사나워도

우리는 언제나 바다의 사나이

흙냄새 그리울땐 항구찾아 달래이고

사랑이 그리울 땐 파도속에 뛰어든다

사나이 한 평생 세월로선 못재이고

꿋꿋하게 살다가 사내답게 죽으리라

아아 바다는 나의 고향

나의 집은 배란다


5. 바다로 가자

(1절)

우리들은 이 바다위에

이 몸과 맘을 다받쳤나니

바다의 용사들아 돛달고 나가자

오대양 저 끝까지

나가자 푸른 바다로

우리의 사명은 여길세

지키자 이 바다 생명을 다하여

(2절)

우리들은 나라 위하여

충성을 다하는 대한의 해군

험한 저 파도 몰려 천지진동해도

지키자 우리바다

나가자 푸른 바다로

우리의 사명은 여길세

지키자 이 바다 생명을 다하여

(3절)

석양의 아름다운 저 바다

신비론 지상의 나구언일세

사나이 한평생 바쳐 후회없는

영원한 맘의 고향

나가자 푸른 바다로

우리의 사명은 여길세

지키자 이 바다 생명을 다하여


6. 내 청춘은 파도다

(1절)

내청춘은 파도여 파도와 산다

출렁대는 파도는 사나이 가는 길

갈갈 갈매기 벗을 삼아

파파 파도를 헤쳐간다

내내 내 청춘 불사르면

멋멋 멋쟁이 아가씨가

우리들을 기다린다

예예예 파도는 푸르다 나도 푸르다

푸른 파도 이겨야 내일이 있다

(2절)

내 청춘은 파도여 파도와 산다

높고 낮은 파도는 인생 사는 길

파파 파도가 부서지는 

바바 바다를 헤쳐간다

내내 내 청춘 불사르면

늘늘 늘씬한 아가씨가 

우리들을 기다린다

예예예 파도는 푸르다 나도 푸르다

푸른 파도 이겨야 내일이 있다


7. 바다는 부른다

(1절)

바다는 부른다 너를 부픈다

사나이 대장부 너를 부른다

고동소리 울려라 닻을 올려라

갈매기 흥겨워 춤을 춘단다

태평양 저바다 사나이 마음

한평생 다바쳐도 후회는 없다

(2절)

바다는 부른다 너를 부른다

사나이 대장부 너를 부른다

기적소리 울려라 돛을 올려라

바람도 흥겨워 노래 부른다

끝없는 수평선 사나이 마음

이한몸 다받쳐도 후회는 없다


8. 바다에 산다

(1절)

아침햇살 반짝이는 수평선 위에

불끈쥔 두주먹 힘이 솟는다

바다에 목숨걸자 맹세한 우리

갈매기 벗하며 바다에 산다

바다에 산다

(2절)

저녁노을 불게타는 수평선 위에

사나이 가슴속 히이 솟는다

통일에 목숨걸자 맹세한 우리

파도서리 벗하며 바다에 산다

바다에 산다


9. 군함행진곡

(1절)

우리는 대한남아 바다의 사나이

바다에 목숨걸고 젊음 태운다

겨레의 생명선을 지키는 우리

군함이 가는길에 조국이 있다

오늘도 출동이다 닻을 올려라

사나이 끓는 투지 용솟음 친다

(2절)

우리는 대한남아 바다의 사나이

바다에 한몸바쳐 젊음 태운다

겨레의 번영선을 지키는 우리

군함이 가는 길에 조국이 있다

오늘도 출동이다 닻을 올려라

사나이 끓는 투지 용솟음 친다


10. 앵카송

동이트는 아침바다 갈매기때 춤추고

달이뜨는 저녁하늘 앵카송이 퍼진다

푸른바다 오대양을 주름잡는 사나이 깡깡

너와나는 충무처럼 길이길이 빛난다

에이 에이 에이 에이

동이트는 아침바다 갈매기때 춤추고

달이뜨는 저녁하늘 앵카송이 퍼진다


11. 교육사령부가

(1절)

우리는 대한해군 교육의 기수

충무공의 빛난 얼이 용손음친다

강하고 멋진장병 우리가 길러

필승하군 건설에 앞장서 나가자

(2절)

여기는 대한해군 교육의 요람

충무공의 혼을 잇는 보람에 산다

높은 뜻 젊은 기상 하나로 뭉쳐

대양해군 건설을 선도해 나가자

(후렴)

교육이 있어야 미래가 있다

자랑스런 해군 교육사

해군 교육사 브라보



군대를 전역한지가 먼 한참 일인데, 적으면서 불러보니 교육사령부가를 빼고는 아직도 모두 그대로 부를 수 있었다. 두들겨 맞으면서 외운게 참 평생 가는구나... 참 새록새록하기도 하지만 국가폭력의 힘을 생각해보면 또 두렵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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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발탄 처치절치

 

1.불발탄 발생시 DS9에 점등된다.

2.포신이 고온이라면 IP7 냉각버튼을 이용한다.

3.포고각 0도, 방위는 안전방위로 위치한다.

4.서브 스위치 OFF, S2 스위치 OFF, 유압 OFF, 잔여유압 제거

5.포대에게서 재 칵킹 시도.

6. 폐쇄기 수동크랭크 시계방향으로 1/4바퀴만 돌린 후 원위치 한다.

7.재발사 시도. 재발사 3회 반복.

8.3회 반복까지 실패시, 완전불발탄으로 처리한다.

9. 포대, 방위각, 고각, 안전 확인.

10. 서브 OFF, 유압 OFF, 잔여유압 제거.

11. 직접 포대 가서 폐쇄기 완전 내림 실시.-특수 유압잭 사용하라.

12. 반동멈춤장치 수동손잡이 당겨 고정시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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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5/28

1.포대 패인트 벗겨지다

포배열 마지막날, 기타훈련 병행후(mt, ti) 함정청소 실시도중 패인트 벗겨짐. 가장 비극적인 사건.

2. 내일 고 노무현 대통령의 영결식이 있는 날이다. 그의 죽음을 애도한다.

3. 훈련시간 병기 행정실

4. 불명예스럽게 쫏겨나지 않을까 걱정

5. 북한의 읨직임에 대한 소식을 접함. 잘 모르겠다. 우리에게 위협적일까? 아직 충돌도 실전도 진정하게 겨ㅕㄲ어보지 못한 나로서는, 해군 최전방에 있지만 전혀 실감나지 않는다. 민간인이었을때처럼.

6. 군을 제대하고 나면 얼마나 내 자신이 변화해 있을까?

 

09/5/29

시간이 빨리 흐른다고 느껴지는지, 느리게 흐른다고 느껴지는지조차 상상할 수 없다. 시간을 채워나가고 비워내고의 사정.

 

09/6/1

내 스스로가 점점 비참한 인간으로 변해가는것 같다.바깥 사회였다면 내 기준에 맞추거나, 즉 변화시키거나 또는 아예 거부를 했으면 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가 않다. 비합리적이라고 바꿀수도 없으며 거부할수도, 내 의지를 가질수도 없다. 그러므로 나는 점점 더 비참해져만 갈 뿐이다.

 

 자유, 평등, 그것은 피의 혁명만이 쟁취해날 수 있다.

 

 * 화재교육사항

행동요령 단계

1. 구령전파

2. 인화성물질제거

3. co2방출

4. 전원 및 통 ㅜㅇ차단

5. 격실폐쇄

6. 현장지휘자/당직사관 보고

 

am04시: 첫 항해당직-포당직을 하다. 당직이 다행이다. 북한군 05도 5마일 앞. 0503시. 함장 직접 함대 방송. 적함의 계속적인 군사훈련이 진행되고 있다. 상황은 긴박하다고 한다. 윗선의 분위기도 그러하다고 하나 실감이 되지는 않는다.

 2주 또는 3주 출동 출항 전 집에 전화했으나 연결이 안된다. 아버지와는 이전에 연결되었다.

    

      배가 출렁인다. 바깥에 나가 바람을 쐬고싶다.

 

09/6/3

내일 있을 장기 출항을 위해 px에 갔다. 13000원의 알람기능 전자 손목시계를 구입하다. 한달에 7만원 남짓하는 월급에 시계를 구입하기란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09/6/4

출동나간 뒤 사통장비의 고장으로 인해 5시즈음 다시 재입항했다. 심히 김빠지는 사건이 아늘 수 없었다. 9시 8분 혅는 수리를 마치고 곧장 출발하여 서해 어딘가에 있는것으로 생각된다.

 

 현 시점의 정세 : 데프콘, 브라보, 델타, 알파.. 북한함 2척이 NLL을 넘어왔다는 이야기가 있다. 내 함은 24구역에 가서 부천함과 전방경비임무를 교대하게 될것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현재 북한함을 향해 경고사격중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2함대 지원을 위해 왕건함이 왔다. 하늘위에는 전투기와 공격헬기가 종종 지나간다. 군 차량이 많고, 부두는 텅 비어있음, 긴박한 상황이 느껴짐. 하지만 6월이면 늘 이렇다고 한다.

 

 09/6/4

나는 언제부터 이런 유형의 인간이 되었을까. 이런 유형은 비주류에 해당된다. 또는 평균이 아닌, 보통이 아닌, 평범이 아닌이라고도 표현되어질수 있을것같다. 하지만 이 유형은 '그것'의 이하적 가치에 해당된다.

 

소수< ------------------------- 다수----------------------- >소수

(비정상, 부정적 소수)          (평균치,평범함,정상적)          (긍정적 소수, 이상적)

 

이런 유형의 사람이 된 시발점이 된 것은 중학교때가 시발점인것 같다. 그떄의 나를 굳이 쓸 필요는 없을것같다. 그것은 고등학교때 잠짐해지지는 않았으나.. 잘 모르겠다. 그대로, 아니 더 심해진, 복잡해진것같다. 아니, 그때부터 늘 그랬다. 왜 난 알면서도 변화에 낮설어하는가? 변화후의 예상되는 '이런 유형' 이전의 내가 떠오르기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외롭기때문일지도, 다른 방법(외로움을 극복할- 외집단이 아닌 내집단으로 향하고자하는, 하지만 그것은 근본적인 해결방안은 절대 될수없다.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한 상태. 오히려 더욱더 부정적이 되버린다. 부정적 소수이기때문에. 영원한이 아닌, 짧은 유통기한에 비유해본다. )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르곘따. 그렇다? 마지막 변화적 큰 보루가 있다. 최후의 보류다. 그것은 강제적 변화. 받아들임이다. 변화를 위해 단순히 평균축에라도 들기 위한 노력, 경제적 노력에 동참하는 것.

 21살이 되어 뒤늦게 , 지금껏 아무것도 해온게 없음ㅇ르 느낀다. 이 느낌은 나 스스로를 싫게 만든다. 또 내 과거에 대한 한심함의 끝없는 후회를 만든다. 그 후회또한 한심하다. 열등감과, 이미 늦었음을 상기시켜준다. 이러한 현상은 군대를 인생의 전환점으로서의 마지막 기회로서 받아들이게끔 한다.

 

09/6/6

쓸모엇음 또는 가치없음은 쓸모없음 또는 가치없음이기때문에 가치있는 것이다.

-

PM1022

가치의 다함이란 무엇을까? 예를들어 내가 500원짜리 음료수를 구입하였다고 가정해보자. 캔음료수는 내 소유이니 내 의지대로 처리할 권리가 부분적으로 있다. 그렇게 500원의 대가를 지출하엿으면 그로써 그 캔 음료수의 가치는 다한 것인가? 또는 내가 그 음료수를 반쯤 마시거나 먹지 않고 버렸다고 하여도 그 캔음료수의 가격 500원은 지불되었기때문에 가치가 다 한 것인가? 난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캔의 음료수는 최종적으로 한 방을 남김없이 소유자(또는 구매자)의 소화기관에 들어가야, 또한 음료수로서의 기능을 체내에서 완수하고, 소화되고, 배출되어 다시 자연세계로 돌아가야 1단계 음료수로써의 가치를 다한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음료수가 담겨져있던 알루미늄 캔은 분리수거되어 재활용공장으로 들어가 새로운 캔이되고 더 나아가 그 과정을 수십번은 반복하여 그 캔의 정체성(-처음의 캔,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그 캔의 조각조각)이 영원히 사라지게 되어야만 그 가치를 다한 것이다. 결국 인간의 임의대로, 필요대로 정한 그 모든 가치있는 것들의 가치는 실제로 그것이 지니고 있는 가치가 충분히 반영되지 못하였으며, 그것들 모두는 내재된 가치에 따라 충분히 쓰임받지 못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위와같은 사고를 통해 가치란 무엇인지, 가치으 ㅣ다함이란 무엇인지, 비정의적이나마 막연하게나마 알 수 있을것 같다.

 

 오늘 있었던 힘들었던 이야기를 써본다. 아니 그려본다. 내 최종적인 느낌을..

1. 급식을 먹다 남긴다. 잔반통에 버린다.

2. 음료수를 마시다 남긴다(조금 이라도) 그리고 다 안마시고 그냥 버린다.

 

 1과 2는 그것의 가치를 다하지 못하고 버려졌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가치를 다, 또는 최선적으로 소비할 수 있음에도 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마치 범죄와 같다고 가정한다. 그렇다면 1,2 모두 범죄를 저지른것이다. 다만 인간의 필요, 임의에 따라 정한 '존재하는 것'의 가치의 크기에 따라 그 범죄에 대한 형량이 달라진다. 여기서 나는 큰 난관에 부딪힌다. 과연 '존재하는 것'들 사이에 가치의 크기란 존재한느 것인가? 일단 이것은 나중으로 미뤄두고 보자. 이 문제는 뒤에가서 체계적으로, 수학적으로 고민해보자.

 

 *나쁜 짓=범죄.

  인간의 기준이 아닌, 존재하는 것의 순수한 무게(가치)

 

 * 1. 급식을 다먹는다 : 가정된 점수 +1

    2. 급식을 남긴다 : 가정된 점수 -1

    3. 캔음료수를 다 마신다 : 가정된 점수 +1

    4. 캔음료수를 남긴다 :-1

    = 1+3=2 명예

       1+4=0 보통

       2+3=0 보통

       2+4=-2 처벌

 결론 : 급식을 남기고 캔음료수를 다 마시는것은 최소한 급식을 남기고 캔음료수를 버리는것보다는 유용한 일이다/ 그리고 급식을 남기고 캔음료수를 남기는것에 비해서는 월등히 유용한 것. 그리고 급식을 남기고 캔음료수를 다 마시는 것은 급식을 다먹고 캔음료수를 버리는것과 동일한 유용성을 지닌다.

 

09/6/8

북 반잠수정 대동B급

유도탄고속정

PM1030

 

09/6/12 : 백령도의 앞바다.

 백령도의 앞바다는 별이 진짜로 잘보인다. 일년에 한두번 볼 수 있을까 말까한 하늘. PM1010분경 잠시 관망하다. 그날의 안좋던 느낌이 싹 다 잊혀진다.

 

09/6/13/AM0517

지사제 복용 후 설사는 안하고 있따. 하지만 뱃속이 여전히 불편하다. 나오는 변의 상태도 불량이다. 당직중인 지금은 설사가 다시 나올 듯.

-

한달 후 가 될지 두달 후가 될지 세달 후가 도리지 모르곘지만 언젠가 하얀 정복에 빵모를 쓰고 휴가를 한 4박5일 내지 6박7일 , 9박10일 받아 평택역에서부터 서울행 열차를 타고 올라갈 그 날을 상상하면서... 열심히 직무 공부하고, 기죽지 않고 적응, 대우받는 사람이 되어보자.

 중간에 병점역에 들려 내 학교 스쿨버스를 타고 학교까지 간다음 한동안 보지 못했던 그리운 친구들도 만날 것이며, 그때 그 후배들과, 그리고 편하게 잘 대해주던 선배들도 보고 그들 모두와 함께 지난 일들을 떠올릴 것이다. 식사도 하고, 술도 미사고, 노래도 부르고, PC방에 가서 필요한 자료도 모으고.

 집에 도착해서는 가장 먼저 어머니를 뵐 것이다. 군대와서 늘 생각났던 사람은 바로 부모님, 어머님이다. 그중에서도 나와 가장 가까이서 함께해준 어머니다. 아버지의 무뚝뚝하면서도 나에 대한 걱정과 근심, 애정이 담긴 모습이 그립다. 홈플러스같은 대형 할인매장에서 과일을 한봉지 잔뜩 사갈 것이다. 건빵도 가져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 여기서 택배도 보낼 수 있으니 문제되겠다싶은것은 택배로도 보낼 수 있으리라. 부모님을 뵙고 고등학교 친구들도 만날 것이다. 그들과 함께했던 고3시절 담임샘님을 찾아봡고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리라. 그리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만났던 기사, 형에게도 연락해보자.

 

 * 표준 전화예절법(6하원칙에 의거 메모하며 통화한다)

1. 전화가 왔을 떄 : 전화벨 3회이상 울리기 전에 받는다.

2. 수화기를 들 떄 : 필승! 통신보안 (근무부서)(직책)(계끕)(이름) 입니다. 무슨일입니까.

3. 상대방이 인적사항 미 밝힐 경우 : 실례합니다만, 누구십니까(공손히)

4. 찾는 사람이 부재시 : 전화를 하도록 전해드릴까요? 아니면 전제쯤 다시 전화를 주시겠습니까?

5. 잘못온전화 : 죄송합니다만 잘못거신 것 같습니다. 확인 후 다시 걸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6. 즉시대답 곤란시 (대기시간 장기화 경우): 죄송합니다.  (무슨 일) 때문에 시간이 걸리겠습니다. 연락을 드릴테니 연락처를 주시게씁니까? 아니면 X분 후에 다시 전화주시겠습니까?

7. 대화 끝시 : 예 감사합니다.

 

09/6/13/PM935

배고픔. 비참함. 이마는 욱씬거림. 라면이나 먹고싶다. 그렇다고 혼자서 먹으러 식당에 갈수도 없는 노릇. 앉아서 TV도 보고싶고, 특히 라면좀 묵고싶다. 체스터에 묶힌 채 그렇게도 먹고싶던 도시락은 한개뿐이 못먹고, 다른 높으신? 분들께 자진? 납부하였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어패류(조개제외) 중 특히 더욱 맛도없는 어징어라면만 남아있다.

-

언제쯤 정복을 입을 수 있을까? 내일은 ㅅ워나 하고 옷 갈아 입을 것이다. 그리고 일요일에는 수건이나 빨아야지.

오늘 한 일 : 별로 그저그럼. 늘 하던대로. 청소. 내가 하는 일이야, 뭐 또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해봤자, 쓸고. 닦고. 칠하고. 치우고. 정리하고. 이것뿐이다.

 

09/6/15 실전 전투배치시 주요 임무

포대-유압온

리콜잭-최대-후크-탄피승인지레 해제-유압오프

포대-유압온

리콜잭-최대-복좌-유압오프-발사안전밀대

 

09/6/18

1. 3박 4일간 휴가를 떠난다는게 신기하고 놀랍다. 비록 수리기간에 나갔다는 9박10일의 휴가는 아니었더라도. 휴가나가서 일단은 명부암기부터 다시 하자. 그러려면 챙겨나락서이 하나 더 늘었다. 명부장 1장. 휴가나가서 확정된 할일은 첫째는 선생님과 친구들을 만나는 것. 둘째는 먼저 전화해보고, 학교에서 밥이라도 좀 먹자.

2. 샤워가 무엇이길래. 당직과 하루일과, 식사당번 등... 1분이라도 더 빨리 체력을 회복하기 위해 그랬다. 왜이렇지?

3. 오늘부터 함부로 입을 떼는 인간이 되지 않겠다. 묻는 말에만 대답하겠다. 우직하게. 오늘부터 상명하복도 절대적으로 실천하겠다. 아닙니다라는 말 안하도록. 질문도 하지 않겠다. 무조건 예라고만 하자. 웃지도 않곘다. 보기싫게.. 기운빠져보이게 걷지도 않겠다. 등 쭉 피고 목소리엔느 자신감을 불어넣어~

4. 왜?WHY? DMLANS. 잠깐이지만 철학공부를 하면서 내게 남은것은 오직 의문뿐이다. 그 의문, 질문, 의심이라는 것은 철학에 있어 기본이 된다. 또한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쓸모있고 가치있는 말이기도 하다. 그렇게 때문에 나와 군대적 사고방식이 부딪히는 것 같다. 위에서 시키면 의문이 있든 없든, 합리적이든 비합리적이든, 해야하는것이 당연하고, 그것이 군생활 잘 하는것이라고 여겨지는듯 하다. 이건 바뀌어야 할 사고라고 난 말하고싶다. 선진해군, 선진인간, 선진사상, 그리고 선진문화국가가 되고싶다면, 그렇기 위해 혁명과 변화 또는 체계적인, 개혁적 움직임이 필요하다. 집단적 행동과 함께. 이러한 움직임을 실행할 용기가 있는자야말로 진정 군생활을 잘 보냈다 할 수 있겠다.

 

*  소화방수 훈련시, 함교(25번)에 전화하여 의묻 화학대 전화완료하였음을 전파할것.

 3직 근무자(04~08시,16~20시)는 아침에 행정실, 당직실 보고할것. 정박등은 OFF는 해뜨기 20분전, ON은 해지고 15분 후.

 

09/6/날짜미상

 몸무게 5키로 빠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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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모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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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수첩에 적는다.

 

수첩을 요약, 정리하자면, 아래와 같다.

5월 2일 토요일에 고열에 시달린다.

5월 4일에 평택에 도착한다.

5월 9일에는 부모님 면회를 하게 된다.

5월 10일에는 친구가 면회를 와준것으로 기억한다.

5월 11일에는 천안함으로 배치받는다.

5월 18일은 성년의 날이었다. 군대에서 알게모르게 지나간 나의 성년의 날... 학교에서 성년이라고 장미꽃 선물을 받고 있을 친구들이 생각난다. 그들은 웃으며 학교에, 난 울며 군대에.

5월 26일부터 28일간 포배열 작업을 했다.

6월 4일부터 출항을 한다.

6월 7일부터 12일간 배멀미로 설사와 구토를 했다. 11일과 12일에 지사제를 먹고 안정이 된다.

6월 13일에는 바다 한가운데서 재급유를 했다.

6월 14일에는 레이다에 미확인물체가 포착되어 그곳으로 이동했다.

6월 16일은 입대한지 3달째가 되는 날이다.

6월 17일은 옆 구역에서 순찰중이던 대천함이 소나탐지기에 이상물체가 탐지되어 소형폭뢰 2발을 투하했다. 왕건함이 출동한다.

6월 19일은 입항예정일.[각주:1]

6월 22일주는 포요원 능력평가가 있는 주.[각주:2]

6월 24일은 IS-1 대함 종합사격 평가.

6월 25일은 IA-2 대공 기본사격 평가.

6월 26일은 종합 정비검열 MI 이 있는 날.

6월 29일은 출동예정(21구역)

 

09/5/10

5월 10일 새벽 4시에서 6시. 잠시간 당식근무를 했다. 오늘은 면회 당일이다. 당직근무하면서 소크라테스의 변명이라는 책을 보았다.[각주:3] 다른 내무반에서 내 학교 과 동기의 동창을 알게 되었다. 이름이.. 이규현이고, 의무대에서 근무한다고 한다. 과 여동기 문지원의 친구라고 한다.

 

09/5/13

 이곳 천안함에 도착해서의 첫 기록이다. 11일, 월요일에 왔으니 오늘로써 3일째 밤을 맞이하는 것이다. 첮주는 견습기간이다. 기쵸교 및 후반기 교육장에서와는 너무나도 다른 생활...

 규칙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다. 정신적으로 괴롭다. 사람들의 이름, 얼굴, 계급, 그에따른 예우... 들을 암기해야 한다. 그것들이 특히 어렵다. 차라리 작은 배로 갔으면 좋았으련만.

 - 구명조끼의 이름과[각주:4] 대걸레[각주:5], 재활용 손걸레[각주:6]의 해군명칭을 알아둘 것.

 - 선임자 계급과 이름

   안ㅇㅇ 선임수병(이병)

   이ㅇㅇ 상병

   이ㅇㅇ 병기사

   김덕ㅇ 병기사

   김ㅇㅇ 하사

 

09/5/18 첫 출항[각주:7]

 출항전 항해시운전을 했다. 엔진을 켜고 약 4시간 정도 나갔다. 생각보다 흔들림이 심하지 않았음. 힘들다. 지금 들리는 나의 모습이 진정 나의 모습이었단 말인가. 소극에서 적극으로, 어색에서 익숙으로... 너무 추상적인 대안인것 같다.

 이도저도 아닌 그것이, 이것이면 안될텐데 하는 것이 나를 우울하게 만든다. 이것은 아니다 그렇데 이것은 아니다가 아니다 그럼 이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과거이며 이것이 아니다는 현재인가?

 잘하고 싶지만 좀처럼 우물주물 뒤에서 주춤거리는게 내 모습. 난 이러한 내 모습이 이러할줄도 몰랐으며 남들로부터 진지하게 인식되어지는줄도 몰랐다. 어쩌면... 이것은 마치, 내게 있어서 63빌딩에서 떨어지는 큰 사건이 될지도 모르겠다.[각주:8]

 만약 내가 적응하고 변화한다면 그것은 전자와 같은 일일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즉 나 스스로가 나 스스로를 파악하고 분석, 해석, 대응하고 정비치 못한다면, 지금 말하게 될 후자가 될 것이다. 평범 그 이하.

 이러한 사고가 바로 열등감같다. 열등감은 나 자체다. 내 정체성의 일부처럼 느껴진다. 후자가 되지 않을 것임을 노력하겠지만, 내 스스로일지도 모르는 그 후자를 파괴해버린다면, 내 존재는 계속 있게 될까.

 

09/5/19 함교 올라가다.

함교 올라가다. 저녁에 또 사격훈련(시험)이 있었다. 저번 항햇운전보다 출렁임이 더 심했다. 그러나 멀미는 없었음.

 과자로 굶주린 배를 채우다.

 

 *어뢰발사관, 하푼, 라이트그래인

해찌, 데끼(진회색)

 

09/5/20

데끼칠.[각주:9]

아직도 이 배의 승조원 이름과 얼굴이 다 기억나지 않는다. 포갑부, 항해부, 침실사람들은 그래도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다음주부터는 현문당직근무를 나가야 하는데 걱정이다. [각주:10]

 부모님께 전화드리다.

 

 미개 이야기를 삭제하고 육상 및 참수리 이야기를 할것.

 

 잘하면 잘한대로, 못하면 못한대로 피곤하다. 기상시간이 점점 빨라진다.[각주:11] 기상시간을 신경쓰느라 그런지 중간중간 항상 잠에서 깬다. 내일은 15분... 마치 영창과 같다. 다르긴 하지만. 취침빼고는 잠이나 눕거나 앉아있지를 못한다.

 

09/5/21~22

 시험은 외박이나 외출, 휴가를 위한 것이 아니다.

 *포대용 기름은 PL-SP라고 하니 기억할것.

 옆 부두에 mhc 고창함과 yub가 정박해있다. 건너편 부두에는 신세기함이 정박해있다.

 

 * 바우쵸크

   - 레스큐

   - 하우징

   - 푸싱[각주:12]

 

09/5/23 오후 11시 45분 명부암기테스트 하다.

 내게 해군에 입대하고자 하는 친구가 있따면 딱 네가지 충고를 할 것이다. 첫째, 면접관에게 막말을 해라. 둘째, 합격하면 어떻게 해서든 참수리 이하의 배, 기타의 작은 함정을 타도록 해라. 셋째, 빽을 써서라도 헌병에 들어가라.[각주:13] 넷쩨, 막약 신이 있다고 가정하고, 그 존재를 믿는다면 그 존재에게 빌어라.

 

 군대에서 서글픔의 첫째는 신체적인 병이오, 둘째는 아무도 인정하거나 알지 않는 '노력함'이다. 이곳에서 새로이 느낀점은 두번째이다. 확실히 군대는(또는 이곳은) 결과만을 중시한다. 그들은 그 결과를 토대로 결과에 이르기까지의 과정까지 도출해내버린다.결과가 안좋으면 그 과정역시 사라지게 된다. 그리고 ('도출됨'은 전지적 관찰자에 의해 '진실'이 편명될 수 있다고, '상상함'을 도입해본다면...) 옳거나 또는 틀리든, 그 해석자의 기준에서 타당성 여부가 판명되어진다.  사람이 사는, 또는 직무를 수행하는 집단 내에 있어서 결과를 통해 과정을 도출해내는 이러한 현실은 과연 옳은 것일까 타당한 것일까 궁금해진다.

 나는 생각한다. 겨로가는 분명 중요하다고. 하지만 결과를 토대로 과정의 가치또한 평가한다는 것은 그 과정의 가치에 대한 정확한 판결을 내릴 수 없다고 생각한다. 최소한 결과에 대한 과정의 평가를 내릴 때는 과정을 우선 살피고, 후에 과정의 정당성여부를 평가함이 마땅하다고 본다.

                       과정-결과

                       ㅣ

                      정당성

                       ㅣ

                       판결

  1. 정확히 그날 입항했는지는 불분명. 입항이 연기되는 사례가 매우 잦음. [본문으로]
  2. 상당히 고생한다. [본문으로]
  3. 읽었다는 것이 아니고 우연하게 그저 표지만 본 것임. [본문으로]
  4. 카포크 [본문으로]
  5. 스나프 [본문으로]
  6. 웨이스 [본문으로]
  7. 보통의 출항과는 다르다. 항해시운전차 하루 반나절 나갔다 오는 것이다. [본문으로]
  8. 63빌딩에 갈수조차 없는 여건.에서 저런 생각을 했다는것은, 자살을 의미하는것은 아니었던것 같다. 그런 수준의 충격을 의미하는듯 하다. [본문으로]
  9. 헤(해)찌.(26270) -연회색 데끼(26081)-진회색 [본문으로]
  10. 당시에는 승조원이 120명이었는데, 그들의 얼굴과 이름, 계급, 기수까지를 모두 매치하여 암기하여야 했다. 그래야만 당직근무를 원할하게 할 수 있었다. [본문으로]
  11. 기상시간은 해뜨기 15분전인가 30분 전인가에 있다. 하절기와 동절기로 나뉘어져있다. [본문으로]
  12. 갑판에 있는 3줄짜리 펜스?같은것의 각 명칭을 의미한다 [본문으로]
  13. 육상근무를 하라는 말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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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내용은 해군 입대 후 훈련소 생활 당시 5월 약 한달간의 생활을 기록한 수기이다.

<수양록>

 

 

"병사를 위한 최고의 복지는 강한 훈련이다. 강한 훈련만이 전장에서 피를 덜 흘리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09/5/1 am 08시 기록시작

 

 입대한지 두달이 되기 15일 전. (5월 16일이 되면 두달에 해당). 오늘은 기술행정교 병기병과 수료식이 있는 날이다. 수료식 준비는 매우 골치아팠다. 하얀 하정복을.. 이렇게 햇빛이 쨍쨍 내리짼ㄴ 날, 연병장으로 가서 쓸떼없는 허레허식의 등교필승을 외치다.(점심) 일종의 등교의식과 같은 것인데, 그것은 기술행정교에서 가장 사라져야할 악습중의 하나이다.

 

 태평성대와 군대

어느 날 세계의 모든 지도자들의 이상향으로의 도달을 목적으로 군대를 파기한다. 폐지한다. 그런데 불량집단- 그들을 돌연변이라고 하자. 그들이 집단으로 일으켜 국가를 만든다. 그들이 침략한다. 대안- 인류 공통적 이상향을 추구하는 무장독재집단 한개만 있으면 된다.

 

09/5/2/20시

고열때문에 응급진료를 받으러 갔다. 열이 39도나 된다. 소대장과 하사들이 다소나마 챙겨주어 고마웠다. 아프기 시작한것은 수료식 바로 전날부터였던 것 같다. 그때는 그저 으슬으슬 오한만 느껴졌다. 그리고 수료식날에는 갑자기 목이 부어오르기 시작하면서 열과 기침, 몸살기운이 이르기 시작했따. 지금은 해열제를 먹고나서 많이 좋아졌음을 느끼고 있다. 현재의 증상은: 목부음, 구토, 콧물코막힘, 두통, 몸 전체적인 통증, 가래와 고열.

 다음주 월요일이면 수료식이다.[각주:1] 오늘같이 아쉬운 날 같은 방 동기들과 함꼐하지 못하고 혼자 침상에 누워있다니 안타까울 뿐이다. 나는 몸이 아프나 드러나는 것은 건강해보인다. 그래서 아프면 다들 의심을 한다. 지금도 물론 그럴것이다.

 

*다빈치 코드 중, 8년마다 황도를 가로르는 금성, 즉 비너스의 자취가 완벽하게 별모양을 그린다는 것. 비너스의 8년 주기.
적외선이나 자외선같은 비가시광선 펜 또는 워터마크 첨필로 알려진 특수 펠트펜은... 부식되지 않는 알콜바탕의 형광잉크로 쓰인 첨필은 오로지 비가시광선에 의해서만 보인다.

 

09/5/4

기술행정교를 출발해서 평택대기대대로 도착한 날. 마산에서 무궁화호를 타고 평택에 도착하자마자 운도없게시리 식사당번을 하게 되었다. 똥물을 푸고(고장으로 인한), 청소를 하고 등등등 더러운 일들을 했다.

 간단한 교육을 받았다. 커다란 배들을 봤다.

 처음 평택시에 들어왔을 때 새로은 신세상(평택역)에 눈이 휘둥그레지다. 역앞에서 멋지게 오와열 및추고 버스까지 가고싶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처음보는 번화가...

 

09/5/5

 별 일 없다. 하루종일 식사당번을 했다. 몇몇의 이곳 대기병들은 면회를 했다. 부럽다. 오늘은 어린이날로 평택 부대내 항에서 행사를 한다. 멀리서 들려오는 방송소리와 사람(민간인)소리가 들린다. 하루종일 똥물만 푸던 날이다. 민간인이 그립다..[각주:2]

 

09/5/6

 3일째. 식사당번만 하루종일 하다.

 신체검사를 받으러 가면서 큰 배들을 구경했다. 내일이나 이틀 뒤면 배를 탈지도 모르겠다.

 교육을 받았다. 명함을 받았다. 저녁에도 교육명함을 받았다. 배에서 구타, 가혹행위가 있으며, 배를 타게 되면 정신, 및 신체적으로 매우 힘들고 괴로운 것이 엄연한 사실인드하다. 승선 전 관련 교육을 계속 받는다.

 

09/5/7/19시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사람들은 긍정성을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부정성을 생각한다. 긍정은 사람을 망각하는 존재로 만든다. 현실의 사태(자태)를 지각하지 못하게 된다. 지금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평가하지 못하고 인간은 긍정의 힘에 의해 세뇌당하게 된다. 그것이 현실의 불평, 불만, 폐해를 잊게 해주고 비판과 비난을 할 수 없게 만든다. 그렇게 만드는게 긍정의 힘이다. 마약과도 같은 것이다. 그에 비해 부정성은 현실을 조금 더 개고간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지금 나의 상황과 내가 처한 상황을, 처지를 지각할 수 있게 해준다. 이러한 좋지못함 속에 있음을 알게 된 나는, 그곳에서부터 하나라도 좀 더 나은 처지가 되기 위해, 즉 이상향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즉, 개선활동을 하는 것이다. 그러한 부정의 불평불만, 비관 , 비평, 비난등의 과정을 통해 나는 한단계 더 진보, 발전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부정적인 앞날에 대한 더 철저한 대비와 지각을(예측)을 할 수 있게 된다.

 

 웃음을 잃을 때, 일이 힘들고 고될 때, 특히 그 일중에 낙이란 것이 있지 않다면, 노동자는 웃음을 잃게 된다.

 

 인간의 부정성을 완성시키려면 긍정성과 마찬가지로, 또는 비슷하게나마 행동이 요구된다. 그래야만 완성된다. 그렇지 않다면 그 부정성은 그저 낙천성?> , 즉 회의주의의 구렁텅이에 빠져버릴 (위험) 수도 있게 된다.

 

*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은.. 10대에게는 유토피아요, 20대에게는 이데아이며, 30대에게는 로고스이자, 40대에게는 회한이 되는 노래이다.

 

09/5/10

약 일주일간의 지겹고도 힘든 식사당번의 과업을 수행하면서 가장 절실히 느껴진 감정은 바로 죄책감이었다. 수많은 음식물은 손도 한번 대보지 않은 채 음식물쓰레기 수거함으로 들어갔다. 요리되어진 양질의 음식물은 물론 조리하고 남은 식재료까지 모조리 버려진다. 그곳에서의 음식물의 유통기한으 몇 시간이 채 되지 않는 것이다.(강제로) 아침식사 뒤 버려지고, 점심식사, 저녁식사 뒤 버려진다. 이렇게 버려지는 아까운 식재료와 양식들은 하루에 쓰레기통 두 드럼 분량에 육박한다 문제는 무엇일까? 내 생각에는 부대내의 수요를 충분히 예측하여 대비하고 잇지 않기때문일 것이다. 대체로 보면 약 100인분의 식재료가 매 식사시간마다 이용되지만 실 이용자는 50~70명 선 수준으로 눈짐작된다. 그렇기에 조리된 식사는 항상 남게되 버려지는 것이다. 또다른 이유를 생각하보자면 조리할 때 발생되는 상당한 양의 식재료 낭비도 원인으로 보인다. 고추장을 뜰 때나 야채를 썰 떄, 다듬을 때, 생각보다 많은 양이 그냥 버려진다. 이것은 아마도 군부대로 보급되는 일정량의 식량은 이곳에서 소비되어져야 하며, 그렇기때문에 또한 조리자는 남은 식재료를 아껴야할  의무감도 없을 뿐더러, 그러한 보관과 재활용 과정에서 많은 심신적 소비가 따르기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현재 계속 보급돠는 식량과 보급되어진 식량, 남아있는 재고, 사용된 수량을 파악하는데도 때때로 골마리를 앓는데, 어느 누가 스스로 자처해서 사용하고 남은 식재료 및 식사후 남은, 사용가능한 양직의 식재료들을 관리하려 하겠는가. 따라서 이에 대한 체계화된 관리시스템이 마련되지 않는 한 낭비는 계속 될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군대라는 조직사회의 본질적인 문제점도 낭비의 원인인 것이다. 그렇다면 필요악인 군대의 본질시스템을 유지하면서(즉, 군대를 유지하면서, 즉, 군대라는 것을 유지하기 위한 비효율적이면서 본질적이라고 할 수 있는...) 낭비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나는 이러한 것들이 구체적으로 실천되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며 푸드뱅크, 혹 사랑의 밥차라든지. 이정도의 구체적 대안은 나올 수 있으며 실천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또다른 대안으로는 군대라는 조직에서 현 급식실태를 정확히 파악하고 수요와 공급에 있어서의 낭비를 시스템적으로 줄이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굳이 급식조리관들에게 식재료를 아끼고, 사용가능한 남은 재료들을 따로 파악해서 관리하고, 조리된 음식물을 관리하게끔 닥달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근본적인 해결책인데, 이것이 완벽히 이루어질 수(관리될 수/성사될 수) 있다면, 첫번째의 푸드뱅크와 같이 실행하기 위해 조금의 예산이라도 필요로 하게 되는 업무를 수행할 필요도 없으면서 동시에 식재료 절감이라는 효과도 더불어 만끽할 수 있어 일석이조의 득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관리자(책임자/조리자/당사자)가 직접적으로 '낭비'의 해악성을 인식, 공감하고, 그에대한 인류애적, 죄의식, 죄책감을 느낄 수 잇어야만 하겠다.

 

09/5/10 면회[각주:3]

 대학교 동기 조ㅇㅇ과 현ㅇㅇ과 면회를 하다.

시간이 촉박했따. 16시 즈음에 도착하여 간단한 식사를 함께하고 몇몇 대화를 했다. 조ㅇㅇ은 학교에서 플라톤의 대화편을, 학회를 통해 공부하며 지낸다고 했따. 그리고 서양고중세철학사를 수강하고 있다고 한다. 책을 읽싶지만, 책도 읽을 수 없는 나로써는 매우 부러웠다. 현ㅇㅇ은 아르바이트를 한다.(휴학을 하고) 발굴현장에서 삽질을 했다고 한다. 8월에 입대하게 되는 해군에 지원했다고 한다. 합격하여 언젠가는 같은 군복을 입고 만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요즘따라 대학교 진로, 미래에 대한 고민이 크다. 어찌 해야 할지... 군대에서는 역시나 모든 정보체계가 막혀있다. 그저 답답할 뿐이다.

 

 

 

 

※이후로 : 내 기억으로는 이후에 부모님과의 면회를 한번 더 했으며, 그 다음주에 바로 자대배치를 받게 된다. 천안함으로... 그리고 이날 5.10일을 끝으로 수양록 작성을 마치게 된다. 자대배치를 받으면서 여러모로 상황이 변하게 되기 때문이다.

  1. 전날 일기와 상이한 내용이다. 잘 모르겠다. [본문으로]
  2. 정확히는 '여자'겠지 아마..?ㅋ [본문으로]
  3. 날짜 표기오류인지, 당번을 마치고 면회한 것인지, 당번 중간에 나간것인지 미상.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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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내용은 해군 입대 후 훈련소 생활 당시 4월 약 한달간의 생활을 기록한 수기이다.

<수양록>

 

 

"병사를 위한 최고의 복지는 강한 훈련이다. 강한 훈련만이 전장에서 피를 덜 흘리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09/4/2

 

 20시 38분 현재, 야전교육대에 완전히 안착하다. 멀리 차량탑승하여 이동 후 하차하여 약 3km거리를 20kg의 군장하여 올라갔다.(야교대는 산중턱에 있다) m16 소총도 소지하였다. 처음 기초군사교육단을 떠날 때는 오랜만에 세상을 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그것이 기대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버스를 타고 내 예상은 아쉽게 실패했다. 버스 통로측에 앉았기 때문이다. 지금 현재는 삭사당번작업을 마치고 간단히 샤워 후 수양록을 작성하고 있다. 이곳의 밤하늘은 정말 맘에 든다. 사방이 탁 트인데다 분지형태의 산골, 도심과는 어느정도 떨어진 군부대라는 점... 천체관측에 있어서 좋은 여건을 지니고 있다. 목금토일월화 5박 6일만 남았다.

 

 합리적인 군인되기.

배우는게 무엇이냐. 개념화됨, 실존함(존재함). 또는 더 나아가 단어화된 것들에 대한 목적 의미 이유 그리고 인과관계를 체계적인 기준(논리적 논증구조를 통해) 증명하고 연구하는 것이다.

 

 오늘 밤 잠들기 전 나는 신에 대해 생각해본다.

신의 존재와 비존재에 대한 논의.

임하기 전에 첫번째로 글에서 나타날 각종 단어들에 대한 개념정리를 해보자. 신- 전지하고 전능한 것.

그렇다면 전지는? 모든것을 알 수 있다는 것. 전능은? 모든 일을 할 수 있다는 것. 그렇다면 신은 신 스스로가 할 수 없는 일도 만들어낼 수 있다는 모순을 지닌다.

 

 이런 예를 기억한다.

1. 신은 신조차 들 수 없는 돌을 만들 수 있을까? 전지와 전능의 모순적 개념을 공격한다.

2. 신은 자신도 들 수 없을 정도로 무거운 돌을 만들 수 있다.

3. 신은 그 돌을 만들엇다. 그렇다면 신은 스스로 들 수 없는 돌을 만든 것이므로 그 돌을 들 수 없게 된다.

 

09/4/3

 야교대 이틀째. 두번째 맞이하는 밤.

개고생만 했던 날. 오늘의 주 훈련으로 사격훈련이 있었다. 나는 49발만 격발하였다. 성적은 모르겠다. 아무튼, 오늘 훈련중 누군가 탄피 한발을 가져갔다. 뒤늦게 잡히긴 했지만 밤 12시가 다 되가는 지금까지 개고생만 했다. 완전 알몸검사까지 실시했다. 야전대 사격장을 이잡듯 뒤졌다. 그리고 몇시간 동안의 육체적 고문과 알몸검사... 그것도 이 추운 날 운동장 한가운데서. 모래바람과 강추위속에 벌벌떨고 기침을 하며. 우습게도 그 범인은 훈련중 작업자열외로 식당에서 당번일을 하고 있었다. 어떠한 처벌도 없었다.

 

09/4/10

기술행정학교에 있다. 다른것들 모두 수료하고 도착했다. 지금은 4월 11일 16시 26분. 어제는 간단한 문서작성과 세변등을 실시하면서 밤 12시가 넘는 시간에 취침을 했다. 이곳 기술행정학교의 첫 인상은 매우 암울했다. 칙칙한, 검붉은 벽돌건물들... 그것은 마치 유태인들의 강제수용소를 연상시킨다. 낡고 지저분한 건물들은 군대라는 집단의 억잡적 현실을 보여주는 듯 했다. 아무튼, 이곳의 모든 것들은, 군대답게.. 무겁고 우중충했다. 그런 분위기가 나의 어깨와 가슴을 짓누른다. 과연 이곳에서 내가 잘 버틸 수 있게 해줄 원동력 내지 동기는 있는 것일까?

 

 11일인 오늘은 전화통화를 할 수 있게 해줬다. 그리고 인성검사를 실시했다. 아직까지는 편하고 다소나마 군기잡히지 않은 생활을 하고 있다. 다음주 월요일 입대식을 치루고 난 뒤에는 과연 어떻게 변할 것인가?

 

 

09/4/24/금/20시 30분.

 비가 내린다. 현재... 아침부터 구름이 몰려오다 오후 6시 즈음부터는 몇 방울씩 덜어지기 시작했다. 왜 이곳에서 실무행활을 하는 '병'들은 늘 얼굴표정이 쓰레기같은, 똥씹은 표정들인지. 왜 그런 표정들을 항상 지니고 있을까? 

 실무배치에 대한 불안감이 있다. 실전에서도 저런 쓰레기같은 표정으로 우리들을 대할 그들을 생각한다면...

 병기병은 그 자체로 희소성과 배에서의 필요성이 있는 직무이다. 부담스러워진다. 그저 중간만 하고싶다. 

 나는 행동에 대한 책임에 익숙하지가 않다. 그 행동이란 무엇이냐? 단순히 행동에 대한 책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목숨, 나의 목숨, 자타의 재산, 자타의 심신적 컨디션에 충격적인 영향을 줄지도 모를 줄수도 있는 행동이며, 그 행동결과에 대한 책임을 말하는 것이다. 다른 직책들도 이러할까? 내 추측에는 병기보다는 덜하리라.

 이곳의 하사들은 이곳의 실무병들과는 너무 다르다. 왜? 이 왜라는 단어는 내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필요한, 가장 갈구하는 단어이다. [각주:1]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도 항시 존재해야 하는 단어이다.

 실무현장에 가서도 웃고싶다. 오늘내일은 냉정해지도록 노력해보자.

 

09/4/25

 20시 45분 전화통화.

 

09/4/날짜미상

 이상은 이상일 뿐. 현실에 있어서는 이루어지거나 존재할 수 없는 상상의 사고일 뿐이라고 가정해본다. 그러므로 현실을 개선하고 이상향으로 나아가고자 저한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라고 가정해본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어떠한 결과가 주어지게 될까?

 사람들은 이상향을 이상한다. 그런데 이상향은 없다. 그러므로 이상향을 이상하는 것은 얼라들의 짓이며 무의미한 일일 뿐이다.

 나는 이상향이 없다는 것에 대한 근거가 필요하다.

 다수의 사람들은 이상향을 이상하지만 항상 그 이상향에 도달하지 못하고 실패, 좌절 상실하고 만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항상 실패,좌절, 상실하는 것은 존재한다고 말하기 애매한 것이다. 따라서 이상향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이상향을 꿈꾸며 이상향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그 노력은 깨진다. 진정한 실패, 좌절 상실.. 그 노력은 항상 깨진다. 항상 깨지는 것은 없는 것이다. 이상향은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깨지는 것이 아니라면 존재하는 것이갔지만. 존재한다는 것은 무의미하지 않다는 것과 같다. 얼라가 아니라는 것이다.

 

09/4/날짜 미상.

 전역하고 2년 안에 완수하고 싶은 것.

토익800 완성하기

편입영어 -in서울 편입하기

일본어 공부하기

컴퓨터자격증 취득

운전면허증 취득하기

철학공부

천체사진 공모전 입상

천문지도사자격증 취득

메시에목록 110개 사진에 담기자전거여행

열대어기르기탁구연습

아마추어무선공부 및 전신급 취득

기타배우기

.

.

.[각주:2]

 

09/4/29/수

 

 이상향을 보고 현실을 거부하면 얼라들이라? 그러므로 이상향을 이상하고 현실을 거부하는 나 또한 아직 어린 것이며 얼라인 것인가? 그렇다면 일제시대 민족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 죽은 선조들과 그 외의 독립운동가들, 그리고 독재정권시절 현실을 거부하며 저항했던 혁명군들의 투쟁과 항쟁, 운동 또한 얼라들의 짓인가? 더 나아가 인간존재에 대해, 세상에 대해, 옳고 그름, 타당하고 부당함, 진리와 진리가 아닌 것에 고뇌했던 수많은 사람들 학자들...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데카르트, 칸트, 비트겐슈타인, 아퀴나스 등... 은 또한 얼라들이며, 누군가의 말처럼 진정한 실패와 좌절, 상실을 맛보지 못하였기에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인가?

 이상은 이상일뿐 현존함에 있어서 이루어질 수 없는 상상의 산물일 뿐인가? 누구는 그렇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 그렇다면 존재함은, 실존하는 것은 존재할 필요? 이유가 사라지게 될 것이다. 목적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자 이제 인간은 존재목적, 아니 존재의 근거가 사라졋다. 근거없는, 기둥없는 지붕은 무너지기 시작한다. 엇, 하지만 그들은 무를 향해 달려가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있어서 이상은 존재하는 것인가?[각주:3]

 

  1.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다. 왜?라는 질문은 정말 쓸모없고 무의미한 것들이 대다수다 [본문으로]
  2. 13년인 지금와 와서 보건대... 현재 저것들 중 완수한것은 4개뿐이 없다... 그만큼 무리였을 뿐더러... 목표는 항상 제자리 있는것이 아니라 변한다 [본문으로]
  3. 군대있을 때 참 쓸떼없는 생각 많이 했던것같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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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모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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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내용은 해군 입대 후 훈련소 생활 당시 3월 약 한달간의 생활을 기록한 수기이다.

<수양록>

 

 

"병사를 위한 최고의 복지는 강한 훈련이다. 강한 훈련만이 전장에서 피를 덜 흘리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각주:1]

#.09년 3월 16일 입대.  

 

 

09/2/20/금

  나의 대학교 친구 ㅇㅇ이는 내가 해군에 지원했따는 이야기를 듣고 절대로 불합격 할것이라고 말 했었지. 하지만 난 당당히 합격했고, 지금에 와서는 이 고통스런 훈련이 5일째에 접어들고 있다. 나는 해군의 푸른 군복을 당당히 입고 학교에 입성하는 그날을 생각하며 오늘도 버텨본다. 이것은 나의 의무이자 자존심이다.

 

 

09/3/21/

  이야기 하나: 군가를 배우다. 해군가, 브라보해군, 내 청춘은 파도다, 바다로 가자, 군함행진곡 등.

 

 가사 : 우리는 해군이다 바다의 방패

         죽어도 또 죽어도 겨레와 나라

         바다를 지켜야만 강토가 있고

         강토가 있는곳에 조국이 있다

 

내청춘은 파도여 파도와 산다

출렁대는 파도는 사나이 가는 길

갈 갈 갈메기 벗을 삼아

파 파 파도를 헤쳐간다

내 내 내 청춘 불사르면

멋 멋 멋쟁이 아가씨가 우리를 기다린다

 

우리들은 이 바다 위에 이 몸과 맘을 다 바쳤나니

바다의 용사들이 돚달고 나가자

우리는 대한남아 바다의 사나이

바다에 목숨걸고 젊음 태운다.

 

 이야기 둘: 해군의 다짐을 암기하다. 

 해군의 다짐

우리는 영예로운 충무공의 후예이다

1. 명령에 죽고사는 해군이 되자

2. 책임을 완수하는 해군이 되자

3. 전기를 갈고 닦는 해군이 되자

4. 전우애로 뭉쳐진 해군이 되자

5. 싸우면 이기는 해군이 되자.

 

 이야기 셋:. 오늘 교회 가다. 2시간. 입대사진에 어머니 모습을 보다. 나는 못보다. 물품지급 받다. 당가리. 크다. 흑모자. 사이즈가 56이 필요한데 사이즈가 없단다. 억울하다. 대원들이 분명하게 스스로 표기한대로만 가져갔으면 선량한 나같은 피해자가 없었을 것이다.

 

 

 

09/3/25

이야기 하나.

 오늘은 오늘을 살고, 내일은 내일을 살지. 기 순간순간을 살아가는 우리, 그 순간순간을 완성시키자...(김창완 밴드)

 3월 25일인 오늘, 정말 오랜만에 라면을 먹었다. 밤 열시, 겨우 컵라면 한개를 먹기위해 점호대형, 옷차림검사, 집합을 반복했다. 군대의 비효율적인 단면을 보여주는 예이다.

 아래 내 생각을 써본다,

전제1. 인간이라는 정체성은 그 어떠한 정체성보다 가장우선한다.

전제2. 인간은 부당한 명령이나 행동지침을 받으면 거부해야만 한다.

사실1. 군인은 인간이다.

사실2. 전제2에 따라 인간은 부당한 지침을 받으면 거부해야만 한다.

결론1. 군인은 부당한 명령을 받으면 거부해야만 한다.

 

 내가 생각하는 군 훈련소의 문제점을 몇 가지 적어본다.

 1. 취침과 기상시간의 무배려성

 2. 휴식시간의 부재

 3. 자원낭비

 4. 비효율적 조직운영

 

이야기 둘.

 금일 배운 내용.

1.함교견시

-임무(갑판, 병기 담당) : 다른 선박, 항공기, 육지, 암초, 잠망경, 변색한 바다, 부표, 신호소, 등대, 부유믈 냄새, 소리 등 관심이 되는 모든 것을 당직사관에게 신속히 보고한다.

-근무요령                   : 항상 주위를 경계하고 주의한다. 당직사관이 확인할때까지 계속 보고한다. 명확하고 큰 소리로 보고한다. 사소한 사항이라도 필히 보고한다.

 

2.현문당직(=정박당직)

-임무 및 책임 : 상급 당직자가 지시한 임무 수행.

-근무요령      : 현문일지 작성한다. 현문주위는 항상 청결을 유지한다. 야간당직자 교대 15분전에 기상한다. 근무중 필요시 전령임무를 수행한다.

 

3. 해군의 정의

 해군이란? 해양, 하천, 호수 등의 수상, 수중 및 그 상공을 활동무대로 하여 국가방위를 담당하는 군대이다. 해군은 왜 생겨났는가? 선박의 발명과 함께 바다를 통한 상업무역활동이 시작되면서 그들간의 이해관계가 생겼다.

 

 4. 해군의 임무 : 대한민국 영역 및 국가이익에 영향을 미치는 해역에 대하여 전쟁을 억제하고 해상통제권을 장악하며, 해상 및 상륙작전을 수행하고 국위를 선양한다.

 

5. 해군의 특성

 1. 기술을 토대로한 군이다.

 2. 예절을 중시하는 군이다.

 

09/3/26

역사교육 실시했다.(=정신교육) 신라 화랑, 백제 계백 고구려 뭐시기 등하며 그들의 모습을 배우다. 우리의 전쟁역사도 배우다. 고려의 북진전쟁, 거란 소손녕의 침입과 강감찬, 여진과 윤관의 동북9성 건설, 그리고 몽고와의 항쟁의 1차 침입 이후 40년간 항쟁, 그리고 삼별초와 팔만대장경의 이야기.

 조선시대의 의병정신, 임진왜란의 이순신제독, 병자호란의 청나라, 임진왜란의 교훈을 실천하지 못함. 그리고 국권상실과 독립운동.

 해군의 역사. 1945년 8월 21일 해사대 결정-해방병안 창설(1945.11.11)-조선해안경비대 개장(1946.6.15)-대한민국 해군 출범(?)

 해군 창군의 역사적 의의 : 광복군 정통을 잇는다.

 대한해협해전은 최초의 해전승리+전쟁발발후 최초 승리전이다.

 

 밤 23시 05분, 취침도중 깨워 밖으로 나갔다. 16분후 다시 들어왔다. 뜀가뜀이 생각난다. 도수식 제식훈련시, 그 중 발바꿔시 사용하는 은어.

 

09/3/29/목

 감기가 점점 심해진다. 코감기에 이젠 목감기마저 걸렸다. 목감기는 심각하다. 몸살까지 겹친다. 목감기는 기침하면 목이 터질듯 갈라질듯 아파온다. 더하여 오늘 과실점자 보복훈련이 있었다. 30분 넘게 실시하였다. 지친다.. 몸살감기에 전신의 근육통, 게다가 추운 날씨까지... 모든게 힘들다 그렇다고 해야 할 일을 안할수도 없는 노릇이다...

 

 밤 11시경.. 탈영병 4명이 발생했다. 그들은 밖으로 전화하기 위해 훈련소를 무단으로 이탈하였다. 그로인해 취침시간 및 기상시간이 각각 단축되었다. 그로 인하여 단체로 저녁 얼차쳐 새벽5 얼차려 무지하게 굴러다녔다.

 

09/3/30

 3월달의 마지막 날. 20~25분간의 전투구보를 하였다. 역시나 왼쪽 다리에 통증이 있다. 무릎과 종아리 부근, 무릎 바로 위 근육이 모여있는 곳이 그곳이다. 어떻게 군의무대에 가야할 것인지 말 것인지 고민이다. 간다하여도 지금까지의 감기환자에 대한 대우를 보면 또 고생하거나 다시 펑크맞던지, 교관과 소대장의 따가운 눈총과 그에 따른 보복이 이어질 것이다. 이번주 금요일은 야전교육대로 간다. 어찌해야하리오. 감기도 심하나 죽을 정도는 아니라며 다시 돌아왔다.

 오늘 교육내용 중 총들고 제식훈련을 했다. 아무래도 머리가 좋지 않은가보다. 스스로 인지하고 있는 사실...

 오후 10시 22분. 또 과실점을 받았다. 이번에는 -10점짜리.

 

 오늘 배운 내용

 금기사항 5가지와 제한사항 1가지.

 금기사항 : 직무유기 및 근무지 이탈 금지

                 집단행위의 금지

                 직권남용의 금지

                 사적 제재의 금지

                 영리행위 및 겸직 금지

제한사항 : 정치적 행위 제한

 

양손에 물건이 다 있을 경우에는 묵례가 가능하다.

오른손에 물건이 있을 경우에는 왼손으로 옮기고 경례한다.

여럿이서 작업중 상급자를 만났을 경우 최초인지자만 총원 차렷 경례한다.

단체대열이동중 상급자를 만났을 경우 인솔자 한명만 경례를 실시한다.

구보중에도 인솔자 1명만 경례를 실시한다.

장성급을 만났을 경우에는 대열을 정지시킨 뒤, 인솔자가 총원차렷 경례한다.

개인적으로 움직이는 중 상급자를 만났을 대에는 바른걸음으로 가면서 경례한다.

화장실 목욕탕에서는 묵례 또는 경례를 생략한다.

열중쉬에자세에서는 말하지 않는다. 열중쉬에 자세에서 말이 필요할 시에는 차렷하고 말한다.

주머니에 손을 넣는 행위 금지, 실내 착모 금지한다.

먼거리에서 상급자를 인지했을 경우(30보 이상) 경례 실시한다.

관용차(군작전/지휘관용 차량)를 마주쳤을 경우 장성, 상급자와 같게 경례실시한다.

상관을 앞질러갈 경우에는 '실례합니다' 하고 지나간다.

좁은 실내에서는 '길비켜'와 '길차렸'을 실시한다.

상관이 질문시에는 눈을 쳐다보며 크고 간결하게 답한다.

지시받았을 경우 복명복창(호명하기)한다.

 

09/3/날짜미상[각주:2]

힘들다. 그저 잠만 자고싶다. 가끔씩 교관들을 때려 죽이고 싶을때도 있다. 그러면서 때로는 절도있는 그들의 모습이 탐스럽기도? 하다. 4일차에... 언제 2년을 다 채울까. 짜증이 솟구친다. 1주차 뒤에는 더 힘들다는데.

 계단을 내려설때면 부대내 저 멀리 바다가 보인다. 날씨는 늘. 대체로 흐린 편이다. 4일째인 오늘은 비가 내렸다. 그전까지는, 입대일을 빼고는 늘 우중충허니 구름이 낀 날씨였다. 맑고 희망이 보이는, 미래가 보이는 그런 밝고도 낭만스런 하늘과 햇빛,일광을 보고싶다. 내일이 두렵다. 미래가 두렵다.

 오늘, 물품을 지급받다. 의류대, 양말, 속옥, 세면도구 등 기타 것들. 나는 의복의 사이즈를 잘 모른다. 그래서 대부분 크거나 작은것 같다. 특히 신발은(군용으로,)크게 나온다고 한다. 군모 사이즈를 잘못 기입했다.

 

 이어서 내일, 그 뭐 거시기를 한다. 대대장을 앞에 불러놓고 행사를 하는 것이다. 내일이 가입조 마지막에 해당된다고 한다. 그래서 반나절 내내 연습과 고생을 했다. 내 목소리는 이미 입대 3일차에 완저히 쉬어버렸다.

 

 이제 곧 실기 및 필기 훈련평가가 남아있는듯 하다. 1일차에는 인원파악에 하루를 다 보냈으며, 2일차에는 웃었다. 그래서 반나절동안 혼자 교관에게 얻어맞으며 기합을 받았다.

 

 *최 강병육성 피땀흘린 강한훈련 필승해군 이룩한다

 나가자 싸우자 이기자 필승해군

 교육은 미래다. 우리가 미래다 우리는 하나다.

 

 

  1. 하지만 그보다 더 진정한 복지는 병사들에게 주어진 혹독한 훈련 이후라고 생각한다. [본문으로]
  2. 입대초기인듯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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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모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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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을 바친 해군 생활
권수선
1. 나의 신병생활 이모저모
1948년 1월 20일, 나는 해안 경비대 제9기생으로 진해 해군신병훈련소에서 3개월간의 모진 훈련을 받고 해군 이등병 계급장을 가슴에 달았다. 
그 당시는 모든 보급품을 육군 국방경비대에서 받아와서 그런지는 몰라도 말할 수 없으리만큼 보급품이 부족해서 밀가루 수재비로 식사를 대신 할 때가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참으로 웃지 못 할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날도 식사당번으로 나와 친하게 지내는 동기생 이재욱군이 식사당번으로 나갔는데 그날따라 점식 식사가 수제비였다. 알루미늄 식통이 셋인지 넷인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꽤 큰 식통이라고 생각된다. 취사장에서 취사병들이 수제비를 퍼 담아줄 때 국물과 건더기를 골고루 퍼 담아 주면 좋으련만 국물만 담은 통과 건더기만 담은 통이 있었다. 배식할 때 식사 당번들이 알아서 나누어 주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취사장에서 연병장까지는 거리가 약 500미터가 넘는데 그 거리를 식사 당번들이 그 무거운 식통을 메고 오는데 수제비통이 출렁출렁 흔들이니까 수제비 덩어리가 국물 위에 떴다 잠겼다 하는데 이것이 굵기가 주먹만 했다. 이것을 본 이재욱 군이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그만 그 수제비 덩어리를 냉큼 입에 넣어 버렸다. 그런데 너무 뜨거워서 씹지도 못하고 엉겁결에 삼켜버렸다. 바로 그 순간 기도가 막혀서 의식을 잃고 수제비통을 맨채 땅바닥에 나가 떨어졌다. 그러나 다행이도 그곳은 바로 현재 해군병원-그 당시는 미 해군 통제부 병원- 후문이었고 미 해군 보초가 서 있는 바로 초소 앞이었다. 미 해군 보초가 이것을 보고 당시 미 해군 병원 의무실에 연락을 해서 미 해군 군의관들이 들것을 가지고 달려와서 싣고 병원으로 뛰어가서 바로 목을 째는 대수술을 해서 천만다행으로 목숨을 건졌다. 
또, 이런 일화도 있었다. 신병 훈련소에 입소하면 훈련복과 군화를 주는데 훈련복(군복)은 일본 해군이 입다가 버리고 간 “산시후꾸”였고 군화는 재생품인데 밑창에다 썩은 고무창을 되놔서 3일만 신으면 구두 뒤꿈치에서 못이 올라와서 구보라도 하는 날에는 발뒤꿈치에서 피가 나서 신발 바닥에 피가 흥건하였다. 그렇다고 열외로 나갈 수도 없었다. 만약 그렇게 되면 낙오자가 되어 귀대 후에는 숱한 기합을 다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를 악물고 참아야만 했던 것이다. 그리고 혹 일요일에는 단체로 외출을 가는데 그 외출은 외출이 아니고 기합 받으러 가는 것과 진배없었다. 왜냐하면 자유시간은 하나도 없고 계속해서 시내를 행진하면서 계속 하나둘, 하나둘 구령을 따라 외쳐야 하고 조금만 발아 안 맞아도 지휘봉으로 머리통을 얻어맞고, 교반장은 아무대로 뛰다가 걷다가 하고 여자들이 많이 있는 곳에서는 호루라기를 훽훽 불면서 그 자리에 앉어 일어나를 반복하고 해서 귀대하면 모두가 녹초가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핑계를 대고 이출에서 빠지려고 하는 사람이 많았다. 
일요일이면 신병들도 영내에서 자유롭게 다닐 수 있었다. 그래서 부둣가에 나가서 배에서 버린 로프 토막을 주어서 “미투리 집신”을 삼아서 끈으로 발허리를 꼭 묶어서 신고 훈련을 받기도 했는데 군화보다 훨씬 편했던 기억이 난다. 요즈음 신병들은 감히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리고 밤에는 취침시켜 놓고 나서 10분도 안되어 총원기상 연병장 집합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교반장님의 날카로운 불호령이 떨어진다. 그러나 그냥 나가는 것은 아니고 깔고 자는 매트-그 당시는 침대가 아니고 긴 마루바닥에다 속에는 짚을 넣고 겉에는 광목으로 싼 짚 매트를 깔고 잤다.-를 메고 연병장에 집합을 하는데 꼬반장님이 빳다 방망이를 들고 연병장에 먼저 가가서서 나오는 순서대로 세어서 10번까지만 세고 나머지는 동작이 느리다고 연병장을 한 바퀴 돌아와야 하는데 그 뛰는 모습은 짚매트를 매고 뛰는 것이 아니라 자기 키보다 더 큰 매트에 사람이 붙어서 가는 형국이었다. 황토 연병장이라서 많은 사람이 뛰게 되면 흙먼지가 자욱하였다. 그런데 그렇게 한 바꿔만 도는 것은 선착순 몇 명까지 뿐이고 나머지는 다시 한 바꿔 더 돌아야 한다. 이렇게 집합 행사가 끝나면 연병장에서 각종 훈련을 다 받고 숱한 기합을 다 받고 나서야 내부 반에 돌아 올 수 있었다. 그런데 이것이 끝은 아니다. 내부 반에 돌아오면 선입 하사관 일등변조-그 당시 별명은 저승사자-님이 빳다 방망이를 들고 기다리고 있다가 들어오는 놈마다 엉덩이를 한두 대씩 때려서 침구 속으로 들여보내는데 그것도 매고 온 매트를 깔고 담요 한 장을 뒤집어쓰고 순식간에 들어가야지 조금만 꾸물거리는 사람은 기합이 빠졌다고 또 빳다 한 대 더 얻어맞았다. 이렇게 해서 잠자리에 드는 것은 보통 자정이 훨씬 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일상적인 것이었고, 1주일에 두세 번 정도는 새벽 2시경에 비상소집이 있었다. 이때는 완전무장하고 매트는 신병들에게 필수품이니까 그것도 메고 나가야 한다. 이 경우에는 연병장이 아니라 영내를 벗어나서 시내를 한바퀴 돌고 마지막에는 진해 통제부 입구인 동문 밖 로터리까지-지금은 충무공 동상이 서 있는 곳-를 돌아서 신병 훈련소에 돌아오게 되면 날이 훤히 밝아온다. 요즈음 신병들에게 제대로 먹이지도 않고 신발도 제대로 신기지고 않고 이런 모진 훈련을 시킨다면 아마 훈련은 고사하고 신문에 나고 야단이 났을 것이다.
이 밖에도 신병 생활에 관한 에피소드는 수없이 많이 있지만 그것을 모두 기록하려면 책 한 권으로도 부족하여 이 정도로 줄이겠다.
2. 해군 최고의 포함 승조원이 되다
1948년 8월 15일 광복절에 나도 해안 경비대원에서 대한민국 해군이 되었고, 그동안 위병 분대를 거쳐 포항 해군 기지로 전속 가서 310함을 타게 되었고, 거기서 나는 갑판부에 배속되었다. 그 후 310함은 목포 제3정대로 배속이 되었고, 그 후 6개월 동안 제주도 공비 토벌 작전에 참전을 하고, 마지막에는 한라산 전체를 불태우고 목포항에 귀항하니까 부두에는 연예인과 가수들도 오고 무슨 개선장군이 돌아온 것처럼 큰 환영 행사가 벌어졌다. 
이어서 나는 310함에서 3등 병조, 즉 하사관이 되었다. 그 후 나는 기계를 배우고 싶어서 기관 학교를 지망하여 진해 해군 기관학교 제4기생으로 입교해서 6개월간의 교육을 받고 갑판부에서 기관부 내연사로 복무하게 되었다. 아는 기관학교를 졸업과 동시에 309함 기관부 발령을 받고 부임해서 기관부 교반장직을 맡아서 근무하던 2중 701함-일명 포함이라고도 하고 사병함이라고도 하였다. 왜냐하면 사병들의 월급에서 얼마씩 -아마 1원이었을 것임. - 일념인가 2년인가 모아서 사온 배였기 때문임 - 으로 전속 발령을 받았다. 
이 701함은 대한민국 해군 사상 최초로 대마해전을 승리로 이끈 대단한 군함이다. 그 당시 인민군은 대형 상선에다1개 여단 병력을 딛고 울산 장생포에 상륙할 목적으로 남하하는 중이라는 첩보를 입수하고 해군 본부의 작전 명령에 따라 701함은 외박 나간 대원들을 태우지도 못한 체 방중에 긴급히 출동해서 동해의 공해 상에서 적선을 발견하고 국적을 물어도 대답이 없으므로 적선임을 확ㅎ신하고 일반 화력의 자정거리-약 1500-2000미터-를 꾹 벗어나 - 701함 주포의 사정거리는 12000미터로 기억됨 -공격을 시작했다. 75미리 주포 45발만에 적함을 완전 침몰 시켰으나 본함에서도 사망자 3명 부상자 1명이 발생했다. 그 때 만약 그 적선이 침몰되지 않고 예정대로 장생포에 살육했다면 부산 일대는 큰 문제가 되었을 것이라는 전략적인 분석이 있었는데 이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아슬아슬한 위기를 극복하게 된 것이 바로 이 701함이었던 것이다.
이 701함에는 수병은 취사병 한 명 뿐이고, 갑판 기관포 작전 통신 등 모든 부서에는 전부 3등 병조 이상이었고 일반 함정에서는 수병이 해야 할 일을 701함에서는 하가관이 했다. 701함 승조원은 아무나 가고 싶다고 가는 곳이 아니었고 아주 우후한 사람만 골라서 각 함 함장의 추천을 받아야 했으며 추천 받은 사람 중에서 또 인사과에서 사상 검증을 받아 이상이 없어야 비로소 승함 발령을 내 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본함을 인수하고 보니 사실은 대동아 전쟁 때 사용했던 낡은 배였다. 그래서 우리는 배를 인수하자 말자 정비 작업에 들어가서 3개월 동안 수리와 정비를 하고 나니 6월이 되었다. 수리 후 1주일 동안 시운전을 하고 난 후 나는 기관장님 -소령- 에게 부탁해서 다행히 나는 “운 좋게”도 701함에서 진해 통제부 항무과로 전속 발령을 받았다. 왜 “운 좋게”냐 하면 701함에서는 하사관이 아니라 수병들이 하는 일을 하니까 수병 대접1밖에는 못 받는 것이지만 타 부서에 가면 당연히 3등병조니까 하사관의 직책에 맞는 일을 하게 되고 부하들도 거느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701함을 탄지 불과 3개월 남짓 밖에 되지 않았는데 아직 단 한 명도 전출입자가 없었는데 내가 처음으로 전출될 수 있었던 것은 그 당시에 701함 부기관장님 권대위님께서 동성동본 동향이라고 많이 봐 준 덕택이라고 생각한다. 701함에서 수리와 정비하느라 무척 고생도 많이 했는데 발령을 고 보니 무척 반가웠다. 다른 친구들은 날 보고 “야, 저 무슨 빽을 썼느냐고 하며 무척 부러워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도 그 배를 타고 싶어서 탄 사람은 3등병조 하사관 중에는 단 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발령 나는 날까지는 아무도 701함 승조원이 된다는 것을 몰랐으니까 말이다. 
3. 나의 육상 전투기
701함대에서 항무과로 전속을 가니 포함타고 정비하느라 수고했다고 10일간의 휴가를 얻어 고향에 다녀오던 날 저녁이 바로 1950년 6월 24일이었다. 진해 통제부 정문인 동문 안에 막 들어선 시간이 밤 9시경이라고 생각된다. 하늘 어디선가 비행기 소리가 나는데 저 비행기 소리가 왜 저래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늘 듣던 비행기 소리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 비행기는 인민군 비행기였고 진해 해군 기지를 정찰하고 갔다는 것이다. 내가 휴가를 다녀온 바로 그 다음날이 6월 25일,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원원히 잊지 못할 바로 그 625였던 것이다. 그날 나는 휴가를 다녀왔으니까 당직 하사관 근무는 내가 할 테니 전부 외출 가라고 하고 당지완장을 받아 끼고 장직사관 중위(성명미상)님과 단 두 사람이 장직 근무를 하고 있었는데, 외출 보낸 지 약 두 시간 남 되었을까 외출 나갔던 사람들이 외출 잘 다녀 왔습니다하고 전부 돌아온 것이었다.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물어보니 전쟁이 났다는 것이었다. 무슨 이런 일이 있나! 내가 당직 하사관인데 나도 모르게 전쟁이 나다니! 비록 나는 몰랐다고 해도 당직 사관에게는 연락이 있었어야 할 일이 아닌가 말이다. 전쟁 난 줄도 모르고 완장만 차고 있는 내 자신이 밉기도 했지만 단위 부서에 연락도 전쟁발생을 연락도 취하지 않은 통제부 사령부 당직 사령관은 도대체 무었을 하고 있었는데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 당시에는 외출을 나갈 때 외출 나갈 대원들을 부 통제부 사령부 앞 광장에 모아놓고 통제부 당직 총 사령관-영관급-의 주의사항과 지시 사항을 받을 뿐만 아니라 당직 부사령관-위관급-의 외출 점검을 받는데, 정복은 잘 빨아서 입었나, 바지는 주름이 잘 잡혔나, 수염은 잘 깎았나, 손과 얼굴에는 화장을 했나, 구두는 잘 닦아 신었나를 검사하는데 이 중 하 가지만 불합격해도 상륙-해군에서는 외출을 상륙이라고 함-금지가 된다. 그래서 당직사관이 부랴부랴 함대 사령부에다 전화를 해보지 전쟁이 났다는 것이었다. 625 사변이 난 것이었다. 625 사변이 나자 나는 학무과에서 방비대 -해병대 전신, 그 당시 육상 근무자는 전원 방비대로 편입되었음 -라는 부대원으로 보급선단의 신호장으로 근무하면서 부산에서 진해로 몇 번 군수 물자를 수공한 일이 있었다. 그러던 9월 어느 날 다시 육상부대로 편입되면서 나는 제3연대 제3대대 제3소대 제3분대장으로 임명되어 마산 진동 작전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 때 소대장은 라종대 해군병조장이었는데 나이가 나와 동갑이었고 무척 내 말을 잘 들어 주는 편이었다. 밤에는 잠복근무를 하고 낮에는 훈련을 했는데 전쟁터에서 훈련은 무슨 훈련이냐고 내가 극구 우겨서 주간에는 대원들을 풀 자게하고 밤 근무만 철저히 하도록 했다. 그래서 다른 소대원들은 훈련에 시달려서 잠복 근무 중 호-몸을 숨길 수 있도록 파놓은 구덩이 - 속에서 졸다가 대대 순찰에 들켜서 소대장이 기합을 받는데 우리 소재장님은 모범 소대로 전정되어 표창장을 받기도 있다. 그래서 우리 소대장님은 내 말을 더 잘 들어주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새로 신병들로 소대원 교체가 있었는데 해군 16기행들이었다. 해군 16기생들은 전쟁 중이라 훈련받을 시간이 없어서 일주일간만 집총훈련과 사격 훈련만 받고 일선에 배치되어 온 것이라고 했다. 그만큼 전황이 다급한 상황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신병들의 전호를 마치고 숙소-천막-에 들어왔는데 발을 보니 전부 헤어진 양말을 신고 있었다. 이것을 보니 갑자기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625가 발생했을 때 나는 학무과에서 수송선단 - 이배들은 각처에서 징발해 온 연락선과 크고 작은 상선들로 수송선단을 만들었음. - 신호장으로 있었다. 여기서 군수물자를 실어 나르는데 한 번은 까만 양말만 한 배 싣고 진해 해군 기관학교 앞 -현 해군 종합학교 - 에 조그마한 부두가 있었는데 거기에 입항했다. 그 부두 앞에는 조그마한 장점도 몇 개 있었는데 나는 내가 탄 배의 기관장을 보고 정 양발 한 가마니를 저기 저 상점에 맡겨 두라고 한 것이 생각이 난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양말을 새로 편입되어 온 대원들에게 신겨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그 다음 날 소대장님에게 그 의향을 말하고 진해로 가는 허락을 받았다. 아침을 먹고 바로 출발해서 지나가는 군용트럭도 타고 찝차도 잡아타고, 닥치는 대로 방향만 같으면 가는 데까지 얻어 타면서 무사히 진해에 도착해 보니 여기는 태평성대였다. 시가지에 들어서니 진해 경찰서 순경들은 경찰서 옆 주위의 잡초를 한가로이 뽑고 있었다. 나는 격세지감을 느끼면서 해군 기관학교 앞 부두가의 내점으로 가보니 그 때 기관장이 맡겨 둔 양말 한 가마니를 달라니까 상점 주인이 반갑게 내어 주었다. 나는 가지고 관 빽에다 가등 담고 나머지는 주인에게 주고 거기서 점심을 얻어먹고 떠나려고 하는데 주인이 얼마인가 돈을 내어 미는 것이 아닌가. 무엇이냐고 하니까 나머지 양말 값이란다. “이 양반아, 전쟁터로 나가는 사람이 돈은 어디에다 쓰느냐?” 하면서 거절하나 억지로 주려고 하여, “정 그렇다면 전쟁이 끝나고 행여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돌아오거든 술이나 한잔 사소.” 했더니 주인이 놀라면서 왜, 그런 소리를 하느냐면서 술은 틀림없이 꼭 살 것이니 반드시 돌아와서 꼭 한잔 하자고 하였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후전이 된 후에 진해로 와서 찾아가 보니 해군 지관학교는 종합 학교가 되었고, 그 앞 부두도 없고, 상점도 다 철거되어 버리고 그 사람은 어디로 갔는지 지금까지 소식도 모른다. 만날 수만 있다면 술이야 누가 사던 회포를 나누어 보련만 세상살이가 다 이런 것인가 보다.
양말이 가득 담긴 배낭을 등에 지고 진해 시가지를 지나 마진 터널을 향해 반쯤 산길을 올라가는데 한 할머니가 머리에 보따리를 이고 허리는 반이나 굽히고 지팡이를 짚고 올라가는 것을 보고 내가 그 봇짐을 냉큼 집어서 내가 짊어진 배낭 위에 올려놓으니 그 할머니가 하는 말이 군인 양반도 짐을 졌구먼. 하면서 무척 고마워하던 것이 눈에 선하다. 그러다가 얼마 안가서 군용 트럭이 한 대 오는 것을 보고 나는 무조건 차를 세우고 할머니도 태우고 나도 타고 보암까지 와서 할머니를 내려 드리고 본대까지 도착해 보니 저녁때가 다 되었다. 나는 곧바로 123분대 3소대 전원을 다 모아 놓고 양말 배급을 했는데 각 사람에게 두 켤레인지 세 켤레인지 돌아가는 대로 나누어 주었더니 대원들이 날 보고 보급관이라고 놀려 대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서 1년 이상 해상 근무 경력자는 신고하라고 해서 신고했더니 며칠 후에 보따리 싸서 진해 해군 함대 사령부로 가라고 하였다. 그래서 나는 배낭 한 개를 둘러메고 함대 사령부로 와보니 바로 해군 제일함대 소속 LCI 105함으로 승함 발령이 났다. 여기에서는 전투다운 전두는 한번도 못해보고 방어선만 구축하다가 3분대장의 직책을 부분대장에게 인계하고 아쉬움만 남긴 체 3대대 3소대를 떠나게 되었다. 
그 후 인수요원이 되어 미국에 다녀 와보니 내가 3소대를 떠나던 그 다음 날 새로 임명된 3분대장이 분대원을 이끌고 전방 정찰을 나갔다가 인민군에게 포위되어 전멸 당하고 단 한 사람만 살아났다고 했다. 그 살아남은 사람이 내가 맡고 있던 3분대 대원이었고 내가 귀국하던 날 학무과 부도에서 환영 행사가 열렸는데 3분대 대원이었던 그 대원(이름이 기억나지 않음)이 나를 찾아와서 나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다 죽었소.” 하면서 대성통곡을 하는 것을 보고 무엇이 다 죽었단 말이냐고 물어보니까 3분대 대원 전원이 전멸하고 자기는 전우의 시체를 뒤집어쓰고 살아났다고 했다. 이렇게 되면 그 해로 임명된 3분장에 대해서 몇 자 적지 않을 수 없다. 그 3분대장은 해군 11기생으로 성격이 대단히 거친 편이고 괴팍한 성격이라고 할까. 내가 3분대장으로 있을 때 그는 부분대장이었다. 하루는 부분대장과 전령을 대동하고 부분대장과 전령(성함미상)이 순찰을 나갔는데 마을(다 피난가고 빈 마을) 외곽에서 순경 하나가 총을 거꾸로 메고 술이 얼큰하게 취해서 노래를 부르면서 저만치 앞에서 가고 있는 것을 보고 내가 부분대장에게 “저 사람 총 바로 메고 가라고 해.” 했더니 부분대장이 막 뛰어가서 자기가 메고 있던 M1 소종 개머리판으로 그 순경의 등줄기를 힘껏 내리니까 그 순경은 그만 “만세” 하면서 기절하고 말았다. 내가 가서 흔들어 깨워서 일으키니까 정신을 차리기에 내가 그 순경보고 “무슨 만세 불렀나? 인민군 만세 불렀나?” 하고 물으니까, “아닙니다. 대한민국 만세 불렀습니다.” 하였다. 내가 들어 보니까 만세 소리밖엔 안 들리던데 그 순경은 “인민군인 줄 알고 죽는 줄만 알았습니다.” 하면서 저도 무슨 만세를 불렀는지 통 기억이 없다고 했다. 나는 그 순경에게 이르기를, “전쟁터에 와서 술을 마시면 그것으로 적에게 날 죽여주세요. 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앞으로 전쟁터에서는 절대로 술을 마시지 말라.” 하니, “이번에 혼이 났으니 절대로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하였다. 나는 그 순경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나 같아도 아야 소리가 먼저 나올 것 같은데 만세를 불렀으니 대단한 애국자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앞으로 절대로 술을 마시지 말라고 당부하여 돌려보내고 부분대장에게는 “총만 바로 메고 가게 하라고 했지 누가 때리라고 했나?”면서 야단을 친 일이 있었다. 이 사건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는 성격이 매우 거칠고, 무슨 일을 하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천방지축으로 하는 사람이었다. 분대장은 전쟁터에서 분대원의 안전을 가장 우선시해야 하는데 이런 성경의 소유자는 상황 판단을 정확히 하기 보다는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 추측컨대 이번에 일어난 참사도 분대장의 이러한 성격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되어 지도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3. 금성화랑무공훈장을 받다
625가 발발한 뒤 수개월이 지난 1950년 9월 중순 경이라고 기억하는데, 나는 LCI 105함의 승함 발령을 받고 남해에 출동 중인 본함을 향하여 환자 수송함을 타고 밤에 출항해서 남해 바다로 갔다. 
전시에는 수송선을 싣고 다니면서 출동 중인 배를 찾아다니면서 부임시켰다. 이렇게 수송선을 타고 가는데 무슨 역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알고 보니 그 냄새는 죽은 사람들을 뗏목 같이 엮어서 바다에 버린 것이 썩어서 나오는 냄새였다. 그 냄새가 얼마나 역한지 직접 접해 보지 못한 사람은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냄새만 날 뿐이지 밤이라 어두워서 천지분간을 못한 체 105함을 만나 승함하였다. 
그날은 선기장 등 책임 장교들만 만나서 신고하고 기관실을 한 바퀴 둘러보는 것으로 부임 인사를 마치고 다음날 아침에 함내 발령을 받아 보니 내가 기관 선임하사관에 임명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당시는 전시라서 승조원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 원칙으로 말하면 기관 선임 하사관은 일등 병조라야 하는데, 일등병조가 기관사를 하고 있었고, 2등 병조인 내가 기관 선임 하사관직을 맡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해가 막 바다에서 나오려는 이른 아침, 욕지도 앞 두미도 앞 바다를 해군 제1함대 소속 105함은 완전무장 전투준비를 완료하고 남해를 경비 중이었다. 당시는 계엄령 하이기 때문에 전 해상에는 군함과 수송선 이외에는 어떠한 선박도 운항이 금지된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날 두미도 앞 바다에는 통통통 하면서 어선 한 척이 남해읍 쪽을 향해서 가고 있었다. 그래서 본함 함교에서는 귀 선박은 즉시 정지하라는 국제 신호를 발신하였다. 그래도 그 배는 정지하지 않고 그대로 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즉시 정지하지 않으면 발포하겠다는 신호인 붉은 깃발을 올렸더니 그 배는 고기잡이 어선에서 쾌속정으로 돌변하여 무서운 속도로 도망을 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본 함에서는 함포사격을 가하기 시작하였고, 각종 기관포, 기관총 등으로 무차별 공격을 했다. 얼마 후 괴선박의 부리지-조타실이 있는 곳- 가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그래도 그 배는 정지하지 않고 도망을 쳐서 남해 읍의 바로 옆 긴 산 끝자락에 있는 조그마한 모래사장에 가던 속력으로 그대로 도킹시켜 버리고 인민군 3명이 산으로 도망갔다. 
나는 기관실에서 주기관의 조종간을 잡고 주기를 운전하고 있었기 때문에 직접 보지는 못했고 후에 들은 것이다. 그래서 본 함은 백사장 가까운 곳에 닻을 내리고 함장-해군 소령 최부영-님께서는 갑판 선임 하사관 해군 2등 병조 최세칠과 기관 선임 하사관 해군 2등 병조인 나 두 사람에게 즉시 가서 그 배를 가져오라고 했다. 최세칠 갑판 선임하사관은 나의 선배인 해군 신병 7기생으로 기억한다. 명령을 받은 우리 두 사람은 마침 여름철이라서 위에는 러닝샤쓰 한 장만 입고 반바지 차림에 권총 한 자루만 허리 띠 위에 겹쳐 차고 손으로는 젖은 구명정 - 본 함에는 구명보트가 없었는데 부산 조선공사에서 본 함 수리 차 갔을 때 도크 옆에 버려져 있는 것을 내가 주어다가 대강 수리해서 실어둔 것 - 을 타고 적선이 도킹된 장소에 가보니 괴선박은 모래사장 위에 덜렁 올라와 있었다. 
그래서 그 상황을 본함 함교에다 수기 신호를 해서 보고했더니, 회신이 오기를, 지금 썰물이니 앞으로 두 시간만 있으면 만조가 되는데 그 때 끌고 오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너희들은 거기서 죽어라.”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자기들은 바다 한 가운데에서 편안하게 있으면서 우리는 적지에서 권총 한 자루만 차고 두 시간을 기다리라고 하니 말이다. 
정상적으로 판단한다면 일단 귀함했다가 2시간 뒤 만조가 되었을 때 다시 가서 가져오라고 했어야 마땅한 일이 아니겠는가? 적군이 3명이나 그 산에 올라갔고 어디에 숨어 있는지도, 언제 와서 습격을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 아닌가 말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명령을 어기고 귀함하면 명령 불복종에 해당하고 전시이기 때문에 총살형에 처해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두 사람은 그러한 그 당시에는 그러한 생각은 하지도 못했고, 그런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다. 오직 저 배를 빨리 끌어내어 가져가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물이 들어오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배가 밀고 올라간 자국을 따라 모래를 파내고 돌멩이를 뽑아내면서 물길을 만들어 가면서 배 후미에는 더 깊이 파내고 배 후미를 어깨로 밀고 당기고 흔들고 해서 천신만고 끝에 물이 다 들어오기 전에 배를 바다에다 띠울 수 있었다. 이 배는 80톤이 넘는 배로서 작은 배가 아니었다. 그러나 함장이 우리 두 사람을 보낼 때에는 나도 기관을 운전하고 갑판선임 하사관은 배를 몰고 오라고 해서 보냈는데 막상 배를 바다에 띠워 놓고 기관실에 들어가 보니 놈들이 도망을 가면서 시동을 걸지 못하게 공기탱크의 공기 밸브를 다 열어 버리고 가버린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는 수 없이 최세칠 하사관은 보트에다 줄을 메고 보트 옆에 붙어 있는 가이 -가이는 일본말인데 우리말로 노라고도 하기 어려운 아주 작은 것 -를 저어서 배를 끌고 나는 배 후미에서 수영을 해서 배를 밀고 그야말로 목불인경이고 악전고투였다. 그 고생을 어찌 글로 다 표현할 수 있으리오. 하지만 천신만고 끝에 1시간 30분 만에 배를 끌어다 모함에 계류시킬 수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 80평생을 살면서 월남전에도 MST 미극동함대 수송선을 타고 6년 8개월 동안 숱한 위험한 고비도 넘어 보았고, 포탄이 빗발치는 탄우 속에도 배를 타고 돌아 다녀 보았지만 그 때와 같은 긴박하고 절망에 가까운 상황에 처해 보지 못했다. 그 때 모래를 파다가 오른 손 가운데 손가락의 손톱이 빠진 것도 모르고 있다가 배를 다 대 놓고 기관실에 가서 손을 씻으려고 하다고 손가락이 아프기에 손톱이 뒤로 넘어진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만 보아도 그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긴박했던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쟁 중이라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결국에는 손톱 하나가 병신이 돼서 그 병신된 손톱을 평행 가지고 살지만 이것이 화랑금성무공 훈장을 받은 대가라고 생각하니 감개가 무량할 따름이다. 
그래서 잡아온 배를 본함 옆에다 차고 닻을 올리고 주기관을 전진 미속으로 막 속력을 올렸을 때 바로 조금 전에 배가 도킹되어 있던 그 자리에서 따발총 소리가 마치 자갈 더미가 무너져 내리는 것과 같이 뽁아 댔는데, 본 함의 후 갑판은 해머로 두들겨 놓은 것처럼 페인트가 다 벗겨지고, 본 함 부함장 턱 밑 목젖 있는 곳에 총알이 지나가면서 찰과상을 내기도 했다. 그렇지만 다행이도 큰 부상자는 없었다. 그런데 그토록 쏘아대던 따발총 소리도 본함에서 함포 한 발을 발사해 버리니까 마치 덤불 속에 있는 참새 때에게 돌멩이 하나를 던지면 모두 없어지는 것과 같이 뚝 끊어졌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그 당시 인민군 부대는 1개 대대 병력이라고 했으며 거기서 인민군 부대본부는 약 10리 밖에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 놈들이 뛰어가서 지원군을 대리고 10리를 오는데 2시간이 걸린 모양이었다. 이렇게 보면 그 때 만약 우리가 만조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면 우리는 살아남지 못했을 것은 분명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날 105함은 오후 늦게야 욕지도 - 욕지도가 목포 이남의 중심 기항지였음 - 에 귀항해서 나포선- 그 배 이름은 인민군 내무서 경비선 - 을 용지항 제일 안 쪽 부두에다 접안시켜 놓고 순경을 불러다 보초를 세워 두었는데, 새벽 두 시경에 비상소집 사이렌이 울리고 난리가 났다. 
나가 보니 나포해온 배에서 불이 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배에서 이동용 소화펌프를 가지고 가서 화재를 진화하고 나서 순경에게 자초지종을 물어보니 담뱃불이 없어서 길 위에 있는 주막에 가서 담뱃불을 붙이고 돌아서 보니 나포선 기관실에서 불길이 치솟았다고 했다. 그래서 그 당시 욕지도에 있는 군인 헌병 순경 심지어는 민방위 대원까지 총동원해서 섬 전체를 이 잡듯이 철통같이 싸놓고 수색을 했으나 범인을 잡지 못했다. 
그런데 전날 부산에서 올라왔다는 수상한 놈이 있다기에 잡아다가 본함 선수 갑판창고에 다 가두어 두고 사흘간을 취재했으나 단서가 될 만 한 것이 없었는데, 3일 되는 날 아침에 아침 식사를 가지고 갔던 갑판 수병이 가져온 것은 와이셔츠 앞섶을 찢어서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서 슨 혈서였다. 글 혈서에는 “나는 국회의원 정 아무개의 동생”이라고 했다. 그래서 즉시 해군 본부에 연락해서 알아보니 국회의원 정00의 사촌 동생임이 밝혀졌다. 나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선수 창고로 한 달음에 달려가서 그 놈의 뺨을 연거푸 세 번이나 후려쳤다. 왜냐하면 그놈이 와서 바로 그런 사유를 이야기해 주었더라면 다른 용이자를 잡았을 터인데 그놈 때문에 진짜 범인을 놓쳤기 때문이다. 
그 후 불탄 인민군 내무서 경비선을 진해 해군 공창에 끌고 가서 깨끗하게 수리를 해서 해군 후생선으로 쓰다가 선명을 창우환이라 명명하고 현재까지 진해 해군 공창에서 태그보트로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 배에는 세미디젤 야끼다마 엔진이 4대가 들어 있었는데 마력 수는 250마력으로 알고 있다. 그 때 그 전투가 바로 해군 사상 두 번째 해전이라고 해군사에 기록된 남해 해전으로 해군 625 전쟁사에 기록되어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그 후 105함에 타고 있던 전 승조원에게는 굼성화랑무공훈장이 수여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생각하면 할수록 최세칠 선배님과 나는 화랑금성무공훈장 만으로는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영광스러운 화랑무공훈장을 받은 것은 군인으로서 크나큰 명예가 아닐 수 없다.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도 최부영 함장님과 갑판 선임하사관 최세칠 선배님은 내 기억 속에 뚜렷이 남아 있지만 지금은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가 없다. 살아생전 이 두 분을 만난다면 얼마나 감회가 깊을까 생각해 본다. 행여 이 글이 실리게 되고 그 분들이 이 글을 보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기대를 가져 본다. 
4. 은성무공 훈장을 받다
1952년 어느 날 남해 경비를 하다가 수리차 진해 해군 기지로 돌아왔다. 하루는 함정 인수 단원 수십 명이 105함에 견학을 왔다. 인수할 배의 주기관이 본함 메인엔진(주기관)과 동일한 기종이라고 했다. 나는 인수 요원들에게 엔진을 설명하면서 오전 교육을 마친 후 식당에 가서 점심 식사를 하고 있는데 메인엔진이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그러나 시동을 잘못해서 엔진이 오버스피드를 일으킨 것이었다. 그래도 나는 기관실에는 기관장교도 몇 명 있었고 선임하사관(일등병조)들도 있었기 때문에 누가 정지 시키겠지 생각하고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엔진이 정지하지 않고 기관실이 떠나 갈듯이 요란한 소리가 계속 나는 것이었다. 그제야 나는 놀라서 박 먹던 숟가락을 내동댕이치고 기관실로 뛰어가 보니 인솔자(해군대위로 추정됨)와 모든 인수 요원들은 기관실 양 옆으로 대피한 상태였고 엔진은 제멋대로 부서져라 돌아가고 있었다. 만약 그대로 두면 엔진은 폭발하게 되고, 엔진이 폭발한다는 것은 대형 인명 피해를 가져 올 수 있는 정말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때 그 엔진을 시동시킨 사람이 해군8기생인데, “이” 하사관이라고만 기억하는데 그는 혼자서 엔진으로 들어가는 연료 파이프를 해머로 때려 부수고 있었다. 그런데 연료 밸브를 잠가도 필터 안에 이미 들어있는 기름만 해도 엔진이 폭발할 수 있기 때문에 필터에서 여과된 기름이 엔진으로 들어가는 파이프를 부수어 버리려는 것이었다. 나는 화가 나서 뭣 하는 짓들이냐고 고함을 지르면서 조종간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 힘껏 밀어서 컬러치를 넣으니까 엔진이 껑 하는 수리와 함께 멈추고 그렇게 요란하던 기관실이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내가 오전 교육에서 인수요원들에게 메인 엔진을 시동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는데도 내말을 듣지 않았다가 큰 사고를 낼 뻔 한 것이었다. 
이렇게 일을 수습하고 난 후 기관부 꼬반장에게 수리와 정리를 부탁하고 식당에 가서 하던 식사를 다시 하는데 옆의 배에서 사관실 당번이 와서 인솔단장이 나를 오란다고 했다. 영문을 모른 체 갔더니 나의 관직 성명과 군번을 묻고 나서 그냥 가보라고 했다. 나는 기이히 생각했지만 물을 수도 없고 그냥 돌아왔더니 한 일주일 정도 지났을까 했는데 나에게 인수요원으로 발령이 났다. 그래서 나는 생각지도 않은 인수요원이 되어 인수단에 합류해서 각종 교육을 받고 그해 12월에 일등병조로 진급이 됐으나 발령도 못 받고 미국으로 가서 LSSL 형이라는 상륙보조함인 108함을 북미 아스토리아주 탱카포인트에서 인수받아서 켈리포니아주 센디에고에서 3개월간의 훈련을 받게 되었다. 훈련을 필한 후 귀국 도중 기관실 수리를 위해서 하와이에서 1주일간 머물게 되었는데, 그 덕분에 하와이 섬을 잘 구경하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 와이키키 해수용장에서 해수욕도 하고 저녁마다 교포들의 파티에도 참석하여 환영도 받고 정말 평생 잊지 못할 신나는 한 때를 즐길 수 있었다. 
수리가 끝나고 다시 출항하여 진해 모항에 돌아와 선박 명명식을 하고 군수물자와 각종 포탄 등을 만재하고 곧바로 서해로 출동했다. 그 당시에는 초도까지는 38이남이었고 석도는 이북이라고 기억한다. 바로 건너다보이는 곳이 몽금포라고 했으며 미 연합군 폭격기가 매일 폭격을 하는 것이 몽금포 쪽 높은 산 중턱이었는데, 그 산 중턱에 인민군이 굴을 파놓고 바다를 향해서 연합군 해군 함정들을 육상포로 공격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미공군기들이 두 대 혹은 세대씩 날아와서 교대로 하루 종일 공격을 하였다. 굴 입구가 완전히 무너져서 형편이 없음에도 굴속에서는 여전히 대포를 쏘아 대는 것을 보면 인민군의 저항도 대단했던 것 같다. 그런데 결국 호주 비행기 한 대가 그 대포에 맞아 떨어졌는데 다행히 조종사 두 명은 낙하산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들은 구축함에서 내린 구명정에 구조되어 우리 배를 지나가면서 우리를 보고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 주는 여유까지 보이는 것이었다. 그런 위험한 상황에서도 웃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우리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 배도 석도 안쪽까지 가서 몽금포 쪽으로 박격포와 주포를 쏘며 몇 시간씩 집중 공격을 할 때도 많았다. 108함은 주포와 박격포 외에도 각종 기관포 등 화력이 어마어마한 상륙 보조함이다. 하루는 몽금포 앞바다라고 생각되는데 나는 당시 일등병조로서 기관부 선임 하사관의 직책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날이 12월 크리스마스 전후라고 생각되는데, 그날도 나는 새벽 4시까지 근무하고 교대 후 침대에서 깊이 잠이 막 들어 있는 새벽 6시경 갑자기 와자자자작 꽝! 하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듯한 소리가 나를 침대 외에다 발딱 일으켜 앉혀 놓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배가 왼편으로 40도 가까이 기우려진 것 같았다. 108함은 출입문이 전부 왼편으로 나 있고 오른 쪽은 완전히 철벽(방탄벽)으로 되 있어서 만약 배가 왼편으로 넘어지면 배 안에 있는 사람은 완전히 통조림 신세가 되고 만다. 나는 침대에 들어갈 때는 아무리 추워도 항상 팬티 한 장과 러닝셔츠 한 장만 입고 자는 것이 버릇이어서 침대 매트는 항상 두 장을 포개서 깔고 자기 때문에 침대에 누우면 몸 전체가 매트 속으로 푹 빠져 들어간다. 그렇게 푹 빠져 있던 몸이 용수철 튀듯 발딱 일어나 앉히게 되었는데 정신은 말똥말똥했으나 옷을 입을 생각은 고사하고 출입문이 막히면 죽는다는 생각에 팬티에 맨발로 밖으로 뛰어 나오니 사관실 앞에서 함장(해군소령 최도갑)님이 서서 무엇이라고 소리를 지르는데 그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으니까 손으로 자기 엉덩이를 치면서 닭이 홰를 칠 때 하는 것처럼 목을 찔룩찔룩 그리면서 고함을 치고 있으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가까이 가서 귀를 기우려 들어보니 “퇴함! 퇴함!”하는 것이었다. 12월이면 몽금포 정도의 북쪽이면 영하 20-30도이고 바닷물이 갑판에 튀어 오르면 금방 얼어붙는 혹독한 추위인데 퇴함이란 죽음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하지만 함장님의 책임상 퇴함 명력을 내리지 않고 있다가 배가 침몰이라도 하면 모두 수장될 것이니 불가피한 결정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두 손으로 나팔처럼 해서 입에다 대고 퇴함이라고 큰 소리로 연이어 세 번이나 소리치고 나서 기관실 쪽으로 가려고 하니 배 갑판 전체가 빙판이 되어서 그냥 걸어가지는 못하고 방현대 손잡이를 붙잡고 간신히 후갑판까지 나가 보니 대원들이 퇴함 소리를 듣고 퇴함 준비를 하느라 단정(보트)을 묶은 끈을 풀고 있었다. 배는 반쯤 기우려진 채로 움직이지 않으니 배의 오른 쪽에 가 봐야 그것에 무엇이 있는지 알겠는데 빙판이라 가 볼 수도 없으니 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팬티만 입은 체 배를 빙판위에다 착 부착 시키고 뱃전에다 발가락을 걸고 개구리가 점프하듯이 다리를 바싹 오그렸다 쫙 펴면서 포대의 출입구 방탄벽의 한 끝을 간신이 붙잡고 두 손으로 당겨서 포대까지 가서 거기서 또 같은 방법으로 배밀이로 올라가서 오른 쪽 현람을 붙잡고 두 손으로 쑥 당겨서 배 밖을 넘어다보니 집채만 한 바위가 배 옆에 쑥 올라와 있었다. 그제야 나는 “아, 암초였구나!”하고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그 암초는 해도에도 없는 것인데 간조가 되면 물 위로 올라오는 것이었다. 그 때 108함은 간첩선이 남하하는 것을 잡기 위해 야간 잠복근무를 하고 아침 6시에 출항해서 전속력으로 기항지인 초도로 귀항 중이었다. 그 때 나는 정신을 차리고 기관실의 기계 소리를 들어 보니 주기관이 아주 저속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기관실로 엉금엉금 기면서 내려가 보니 대리 후라후-조타실에서 기관실로 엔진 속도를 지시하는 장치-는 후진 반속을 가리키고 있으나 엔진의 회전 속도가 너무 느리다는 판단을 하고, 죽을힘을 다해서 조종간을 당겨서 최대 속력으로 높였더니 배가 덜커덩 하면 내 몸이 날아서 주기관 덮게 위에 나가 떨어졌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배가 똑바로 선 것이었다. 나는 급히 조종간을 원위치에다 바로 놓고 갑판 위로 뛰어 올라가 보니, 보트를 내리던 사병들의 얼굴이 조금 전에는 하얀 백지장처럼 창백했는데 그 모든 사병들의 얼굴에 지금은 화색이 도는 것을 보았다. 아마 그들도 삶과 죽음의 갈림길까지 갔다 왔으리라.
그런데 옷을 입으려고 침실로 가는데 갑판에 큰물이 홍수처럼 뱃머리 쪽에서 밀려오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 물을 철퍽철퍽 밟으면서 뱃머리 쪽으로 막 뛰어 가보니 선수에 있던 갑판 창고가 날아가 버리고 그곳으로 바닷물이 치솟아 올라와서 갑판 전체를 물바다로 만든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물 가운데 서서 함교(브리지)를 향해 전진 반속-어해드 투-으로 낮추라고 고함을 쳤다. 속력이 낮아지니까 금방 갑판에 물이 잦아들었다. 그래서 다시 함교를 향해 “이대로 가시오.”하고 소리쳤다. 내가 무슨 함장이나 된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만약 배 밑이 다 터졌다면 기름 탱크가 전부 배 밑에 있는데 이것이 펑크가 나서 기름이 물에 섞이면 주기관이고 발전기고 올스톱이 된다. 그렇게 되면 이 추운 날씨에 배는 암흑세계가 되는 것은 물론이고 난방이 되지 않아 전부 얼어 죽을 판이다. 어느 탱크가 터졌는지 속히 알아내지 않으면 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것은 선임하사인 나의 책임이기도 했다. 그래서 옷을 입으려 갈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사운딩 튜브가 있는 곳마다 뛰어 다니며 점검을 해 보니 사병 식당 밑에 있는 탱크 한 개만 성하고 나머지 탱크는 전부 다 터져 버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식당 밑에 있는 탱크의 밸브만 열어두고 나머지 탱크는 전부 폐쇄해 버리고 나서야 옷을 입으러 침실로 갔다. 그 때는 발에 동상이 걸린 줄도 몰랐는데 그날 밤부터 아프기 시작해서 상당 기간 그것으로 고생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배를 구한 나의 기지와 노력을 평가해서 나에게는 화랑은성무공훈장이 수여되었다. 해도에도 없는 암초였기에 그날 당직 근무자들은 그로 인한 처벌은 없었고 훈장은 나 혼자만 받았다. 그 후 본함은 대청도에 가서 모래사장에 피칭(먼 바다에 닻을 내려놓고 배를 전속력으로 모래 사장에다 올려놓는 것)시켜 놓고 영국 구축함에서 철판과 용접공들이 와서 약 10일간 부서진 선수와 많이 터진 탱크를 임시로 수리를 하고 진해 군항으로 귀항해서 진해 해군 공창에서 대대적인 수리를 하여 625 사변이 끝날 때까지 서해 바다에서 전투를 하다가 휴전이 되면서 본함도 초도에서 철수했다. 
이렇게 108함은 내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에피소드를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내가 기억하는 이름은 최도갑 함장님 한 분 뿐이니 아쉽기도 하고 그분들에게 미안하기도 하다. 아울러 인생무상이 다시금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그 후 나는 해군 병조장으로 4년간 근무하고 전시 포함해서 17년 11개월의 군 복무를 마치게 되었다. 제대 후 나는 MST 미극동함대 수송선을 타고 월남 전쟁에 6년 8개월간 참전으로 하고 다시 해양계에 투신하여 총 36년간의 긴 해상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제는 이것도 먼 옛날이야기이고 노년을 보내면서 나에게는 가장 소중한 기억으로만 남게 되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에게 있어서 나의 해군 생활은 나의 인생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비록 괴롭고 아픈 기억으로 남을지라도 그것은 나의 일부이기에 그 아픈 기억들이 오히려 자랑스럽다.

 


그 사람을 가졌는가/ 함석헌

만리 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不義)의 사형장에서
'다 죽여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두거라' 일러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하며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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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왼쪽부터, 故 이상준 하사, 故 이상민 병장, 본인, 안재근 이병.

(이 사진이 어디서 나온거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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