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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3&oid=028&aid=0002365711


니체에 의하면 예술은 현실의 한계로부터 오는 일종의 불안을 대안적으로, 그러니까 임시적 위안감을 안겨 주는 매개물이자 수단이다. 다시 말해, 인간으로서 지닌 현실의 불완전함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고, 비록 현실에서는 그렇지 못할 지라도 예술을 매개로 하여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준다. 이를테면, 니체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최악의 상황에 빠진 인간이 능숙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싶다는 소망은, 현실에서는 충족될 수 없는 욕구이다. 현실에서는 너무 당황스러워서, 그래서 아름다운 말 따위는 도저히 입에 담을 수 없을 듯한 그런 생사의 벼랑 끝에서, 비극의 주인공은 이런저런 말과 논거와 웅변적 몸짓, 그리고 전체적으로 맑은 정신을 보여 주어 우리를 기쁘게 한다. 이런 자연으로부터의 일탈은…” 


 여기서 최악의 상황에 빠진 인간은 바로 현실 속의 우리 보통의 인간들을 말한다. '능숙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싶다는 소망'은 현실적으로는 결코 그럴 수 없는 존재인 나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우리의 헛된 희망을 뜻한다. 즉 현실에서는 결코 충족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최소한 보통의 사람들은 그렇다. 물론 어떤 신화나, 스토리, 위인전에 등재된 극소수의 인물들은 제외하고 말하는 것이다. 대다수 보통의 존재인 우리는 매 하루 하루를 "생사의 벼랑 끝"에서 살고 있다. 항상 어떤 것이 내게 다가올 것인지, 어떤 위험이 혹은 어떤 긍정 또는 부정적인 것이 내게 다가올 것인지 쉽게 예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드라마를 찾고, 극장을 찾아가고, 헐리우드 액션극을 찾아보는 것이다. 이것들은 현실을 잊고 잠시나마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주는 예술물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니체는 넒은 의미의 예술로 음악, 리듬에 대하여 말을 한다. 음악과 시는, 사실은 비합리적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비합리적 행위속으로 스스로를 던지는 것은 다름 아닌 그것으로부터 "이익"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가진자들의 이익이란.


“인간은, 자신이 음악을 들을 때 경험하는 근원적 압도감에서 이익을 얻고자 했다. 리듬은 말하자면 하나의 강제력이다. 리듬은 그것에 굴복하고, 또 영합하도록 하는 누르기 어려운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이는 니체가 우리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던져주는 촌철살인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그런 것이다. 우리의 소비사회, 천민적 자본주의 세상을 날카롭게 비판할 수 있는 무기를 제공해준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광고의 대홍수 속에서 살아간다. 마트나 백화점, 기타 소매점, tv에서의 광고, 라디오에서의 광고를 생각해보자. 그곳에는 항상 리듬과 음악이 있다. 그런 리듬은 우리로 하여금 억누르기 어려운 욕망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이러한 식의 예술들은 비유하자면 “마약”, “아편”과도 같은 것들로, 우리의 이성능력, 지성을 통해 제거하고 없애나아가야 할 속성의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류의 예술, 그러니까 우리로 하여금 억누르기 어려운 욕망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예술들은 우리를 도취시키며 우리를 강하고 고양된 느낌의 순간으로까지 강제로 끌어올리려고 노력한다. 즉 기득권자, 가진 자들의 잔악한 횡포인 것이다. 그것은 마르크스의 말을 빌리자면 “인민의 아편”이다. 인간에게 환상의 행복인 가짜 리듬과 가짜 예술을 제거하는 것은 인간의 진정한 행복을 위한 필요조건인 것이다. 


 다른 측면에서 예술은 우리를 압도하고 휘어잡으려 한다. 현실의 삶에 피곤하고 그런 삶에 소위 말해 “찌들어”있는 우리 존재들에게 그러한 도취 수단은 우리로 하여금 술에 취한 듯, 우리의 영혼을 그렇게 만들어버리고자 한다. 열광하게 하고, 감격하게 만든다. 그러면서 우리로 하여금 ‘그것은 나쁘지 않다’, ‘그것은 즐거움이다’, ‘그것은 교양이다’ 라고 말하게끔 조장한다. 이와 관련하여 대표적으로 무수히 많은 예능 프로그램들이 있다. 현대 예능 프로그램이 대표적인 것들이다. 이를테면, '무한도전', '런닝맨', '라디오스타', '해피투게더', '1박2일' 등이 있다. 이들은 속물적이며, 우리를 도취하게 만든다. 사실 우리는 그것을 보며 구토감을 느껴 마땅한 것들이다. 거기에 자기 삶은 빠져 있으며, 그저 공허한 것, 도취인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스스로도 충분히 행복과 아름다움, 기쁨, 즐거움, 유머를 체험하고 경험하고 있는 사람에게 과연 그러한 예능 프로그램들이 필요할까? 단연코 아니다. 자신의 삶이, 그러니까 내가 생각하는 이상과 현실의 갭이 크지 않은 사람들에게, 과연 그 갭을, 그 갭으로부터 오는 불안이나 불완전함의 느낌을 잊게 해줄 어떤 카타르시스감이 필요한가를 생각해보자. 결코 그렇지 않다. 그런 사람에게 그것은 필요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충분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미 내 안에 웃음을 가지고 있다. 즐거움을 이미 가지고 있다. 우리는 그런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비유를 하자면, “아이언맨에게 극장의 아이언맨이 무슨 소용인가?” 이미 충분히 즐거운 자에게 그런 식의 일회성이고 소모적이고, 소비적이고, 허무적이고, 인위적이고, 조약하기 짝이 없는,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것들은 천박하기 이를 데 없다. 천박하기 이를데 없는 그런 즐거움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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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모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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