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람 장소: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관람 일시 : 2014-04-11 금요일 14시부터 18시까지.
4월 7일, 교육실습기간이었으나 주말 시간과 11일 하루가 학교일정으로 휴무를 하였기에 11일에 시간을 내 미술관에 방문했다. 예술철학에 손을 댄 이유이기도 하지만 본인은 예술, 미술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 관심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스스로 자비를 들여 미술관을 간다는 것도 거의 처음 있는 일이었다. 처음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기억에 나지 않을 만큼 거의 흔치 않은 일이다. 그래서 이번에 좋아하든 싫어하든 그 실체, 좋아한다면 좋아하는 이유를, 싫어한다면 싫어하는 이유를 명확히 짚고 넘어가는 기회로 삼고 싶었다. 미술관을 가기에 앞서 미술관이란 곳에 대한 최근의 기억을 더듬어 생각해보니 자극적 광고에 이끌려 방문하게 된 대림미술관의 라이언 맥긴리 사진전이 있었다.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 가보니 그리 큰 감흥이나 기억거리를 남겨주지는 못했다. 오히려 해당 작가에 대한 반감이 생겼던 경험이 있다. 과연 이번 전시회는 어떠할까 기대와 불신을 함께 가지고 갔으니 그날의 기억을 천천히 회상하며 정리해본다.
그날 본 관람회에서 본 전시회는 총 6개이다. 자이트 가이스트 시대정신, 한진해운 박스 프로젝트, <쉬린 네샤트>전, 알레프 프로젝트,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건립 기록전, 현장제작 설치 프로젝트(최우람)가 그것이다. 총 관람시간은 오후 2시부터 오후 6시까지, 총 4시간이 소요되었으나 모든 전시회를 관람하기에 4시간이라는 시간은 약간 짧은 감이 있었다. 가장 처음 본 전시는 자이트 가이스트 시대정신이다. 1층과 지하 1층에 이어 크게 전시되어 있었다. 이어서 <쉬린 네샤트>전(가장 오랜 시간 소요), 한진해운 박스 프로젝트, 현장제작 설치 프로젝트(최우람), 알레프 프로젝트, 국립현대미술관 건립 기록전 순으로 이어졌다. 첫 번째, 자이트 가이스트 시대정신에서는 다양한 작가의 다양한 모습을 지닌 그림과, 조각, 설치품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여기서 나는 대체적으로 작품이 보여지는 모습과 주제간의 불일치의 문제를 겪었다. 다시 말해 작품을 바라봄으로써 주제, 특정 테제 등 “내용”을 끌어내지는 못했다. 다만 감정적으로 끌리는 것들은 더러 있었다. 정확히 끌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이 ‘끌림의 느낌’은 분석도 안되고, 정의 내리기에도 마땅하지 않은, 서술이 불가능한 성질의 것인 것 같다. 그렇게 끌림을 느낀 작품들은 대체로 거대한 유화 그림작품이었다. 캔버스지가 하나로는 부족해 세 개, 네 개를 이어 만든 작품들도 있었다. 예를 들자면 장화진 작가의 ‘지배자’, 오병욱 작가의 ‘내 마음의 바다’, 문범 작가의 ‘천천히 같이’등과 같은 것이 있다. 이 외에 감정적 느낌은 없지만 한번쯤 나의 시야가 머물던 몇몇 설치품도 있었고 그저 스쳐 지나간, 즉 무가치하게 인식되어 나로부터 버려진 ‘물건’도 많았다.
지하 1층에서도 자이트 가이스트 시대정신이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작품이 걸려 있었다. 행위예술을 표현한 알 수 없는 설치품도 있었고(노동의 방, 인유의 방, 태도의 방), 앞서 말한 것처럼 서술 불가능한 어떤 ‘감정’에 이끌려 오래 쳐다본 것이 아니라 그저 이상하기에 기괴하기에 오랫동안 내 시야에 머물렀던 작품도 있었다. 예를 들자면 오경환 작가의 천공(우주구멍)이라는 작품이 있겠다. 생각해보건대 이처럼 이상하고 기괴하다거나 희한하다거나 하는 식으로 내게 다가왔던 유화 작품들은 어떻게 하면 가지고 있는 이 물감을 가장 무가치한 방식으로 소비하는가를 경쟁하는듯한 식의 인상만을 나에게 주었다.
내가 감정적 끌림을 느꼈던 유화작들, 그리고 신기함과 그 신기함을 넘어 ‘아름답다’라고 까지 느꼈던 <필립 비슬리>의 착생식물은 예술이었다. 반면 이상함이나 기괴함으로 다가온 유화, 의도를 알 수 없는 설치품, 시대적 저항의식을 상징화한 <쉬린 네사트>전, 한진해운 박스프로젝트 등은 최소한 내게 있어서는 예술이 아니었다. 이상함과 기괴함이라는 감정적 이끌림을 위해 예술을 한다고 하기에는 그 가치가 적을 뿐더러 낭비가 심하다고 느꼈고, 나는 그런 기괴한 감정을 너머 ‘아름답다’라는 느낌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즉 ‘창조적’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진 특이함, 특별함, 이상한 어떤 것들은, 그리고 그 완성을 통한 만족은 그저 그 사람 하나에 머물 뿐이다(예술로 포장된 객기, 가짜 예술). 예술이라 함은 서술 불가능한 감정적 ‘끌림’에 관해서 어느 정도의 보편성을 지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쉬린 네샤트>의 전시는 정치나 사회의 영역이지 예술의 영역은 아닌 것 같다. 예술은 그런 사회적 문제나 정치적 문제를 모티브로 하여 예술의 영역인 그 “느낌”을 이끌어내는데 도구적으로 쓰일 수는 있지만 주객이 전도되어 그 예술의 목적이 사회, 정치적인 것이 되어버린다면 그 작품은 예술로서의 순수성이 오염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예술이 아닌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표현물일 뿐, 예술로서의 위치를 스스로 버린 셈이다.
한진해운 박스프로젝트(집 속의 집 속의 집 속의 집 속의 집)는 아무리 의도하고 억지로 살펴보아도 내게 아무런 감정적인 것을 주지 못했고 아름다움도 느끼지 못했다. 그저 구체적인 동시에 추상적인 표현물이었다. 보편적으로 아름다움을 전해주지도 않으며 앞서 말했던 서술 불가능한 ‘느낌’도 주지 못했다. 그런 추상적 구체적 표현물이 예술이 아님에 대해서 당장은 딱히 서술할 방법을 못 찾았지만 굳이 쓰자면 예술이라기에는 “쫌 아닌” 그런 것이었기 때문이다. 마무리하자면, 이번 관람을 통해 ‘예술은 무엇이고 어떤 것이 예술이고 어떤 것은 예술이 아닌가?’ ‘예술이라 불리는 것은 어떤 가치를 지니나’, ‘내게 있어서 어떤 것을 주는가?’에 관해 생각하는 시간도 함께 가졌지만 역시나 이 부분에 대해서는 서술로써 표현이 불가능한 영역인 것 같다. 그래도 일차적인 판단을 해보자면 감정적 발화를 준거 삼아 판단해야 마땅할 것 같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또 개개인마다 예술의 정의, 예술의 가치가 달라지기에 마음에 들지 않았다. 회의와 예술적 방종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즉 절대보편적 진리가 분명히 있다고 생각하는 나의 입장에서는 감정적 발화를 준거 삼아야 한다는 나의 일차적 결론은 당장은 쓸 수밖에 없지만, 그렇게 한다면 또 예술이 상대적인 것이 되기에 나 스스로 받아들이기 힘들어지는 딜레마에 빠진다. 당장 감정적으로는 나의 감정적 발화만의 진리요 모든 것의 기준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것은 독단과 아집이기에. 아름다운 것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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