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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팔레스타인-이스라엘간의 전쟁으로 중동지역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뜨거운 감자다. 이러한 참사가 발생하기 이전 나는 팔레스타인 분쟁에 대해 종교적 분쟁으로서 바라볼수는 없을까 하여 레포트를 작성한 적이 있다. 이를 나는 지역분쟁과 종교라는 강의에 레포트로 제출했다. 이를 이곳에 감히 공개해본다. 팔레스타인 분쟁에 대한 요약이다. 비록 2000년 이후 사건들에 대해서는 상세하지 못해 '최신자료'축에는 들지 못하지만, 나는 이를 통해 잘 모르던 여러 사람들이 팔레스타인 분쟁에 대해 좀 더 사실적 이해를 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현재 이스라엘은 미국을 등에 업고, 돈을 등에 메고, 승승장구하고 있다. 그들 유대인은 반성해야 한다. 세계의 경찰국가 행세를 하는 미국역시 반성해야 한다. 모든 세계의 역사를 바라볼 때 진정한 악의 축은 바로 미국이다. 핵확산 금지조약, 전쟁, 자본 등을 통한 국권침탈.
 
팔레스타인분쟁- 유대교와 이슬람교의 갈등. 


 나는 팔레스타인 분쟁을  1)분쟁의 당사자들이 둘 혹은 그 이상의 뚜렷하게 구분되는 종교적 성향 혹은 정체성을 지닌 집단들로 구성되고, 2)대립하는 각 진영에 가담한 인구의 종교적 구성이 상대적으로 동질적이거나, 갈등의 과정에서 점점 동질화 되어가며, 3) 당면한 대립과 갈등이 종교적으로 해석 또는 정당화가 되고, 4)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 신자들, 조직, 리더십, 신학 등 종교적 자원들이 적극적으로 동원되는 5)폭력적이고 지속적이며 조직적인 갈등이 발생함의 종교분쟁의 5대 성립요건1)에 따라 중동지역, 그중 팔레스타인분쟁을 선정해 보았다. 


 중동의 갈등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유대적 공동체, 곧 이스라엘 국가와 팔레스타인간의 대립이며,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과 이슬람 국가 간의 대립이다. 나는 이 두 갈등을 하나의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정리해보고자 한다.

 

1. 유대교와 이슬람교
 1) 이슬람교를 부정한 유대교
   유대교도 이슬람교도 모두 일신교의 계율 종교이며, 그 원전으로 삼는 것이 바로 율법(모세5서,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약성경)이다. 그리고 이슬람교도 역시 아브라함의 종교라고 내세우고 있다. 그렇게 되면 같은 신을 신앙하는 종교 동지가 되겠지만 본가인 유대교로서는 그렇게 보지 않으며, 이슬람교 역시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몹시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그 이유로는 크게 두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첫째는, 교조 마호메트가 자신을 그리스도처럼 신의 아들이라고 내세우지는 않지만 스스로를 ‘마지막 예언자’로 칭하고 있다는 것이다. 언젠가 예언자가 또는 구세주가 등장하여 유대민족을 신의 이상국가로 반드시 인도해줄 것이라고 믿고 있는 유대교로서는, 이것은 도저히 인정하고 싶지 않는 망발이며 마호메트도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사기꾼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는 그 마호메트가 신을 아라비아어로 알라라고 부르고, 그 알라가 새로 자신에게 강림해서 말씀을 전하여 코란이 성립되었다고 공언한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이슬람교도에게 이 코란의 계율이야말로 신의 계율이기 때문에, 마치 신이 두 곳에 존재 하는듯한 환상을 준다는 것도 못마땅할 수밖에 없다. 이모두가 유대교에게는 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오만스러운 행위로 보이는 것이다.

 

2.팔레스타인 지역-예루살렘
 1) 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교는 모두 중동에서 탄생했다. 또한 천지를 창조한 유일신을 숭배함으로써 진정한 행복을 얻는다는 공통된 구조를 갖고 있다. 세계의 시작과 끝이 있으며 최후에 신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종말관도 같다. 그러므로 이 세 종교는 한 뿌리에서 나온 유일신교로서 서로 형제 관계라고도 할 수 있다.   

 유대교도에게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팔레스타인은 신이 내려준 ‘약속의 땅’이다. 이스라엘의 건국은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던 유대 민족이 조상의 땅인 팔레스타인에 자신들의 국가를 건설하고자 한 시오니즘 운동에서 비롯되었다. 시온은 예루살렘에 있는 언덕의 명칭이다. 예루살렘에는 유대교 신전의 터인 ‘신전의 언덕’이 있으며, 그 일부인 ‘통곡의 벽’은 유대교도에게 가장 중요한 성소다. 


 한편 이슬람교도에게 예루살렘은 메카와 메디나에 이은 제 3의 성지다. 이슬람교 경전인 『코란』에 따르면, 예언자 모하메트가 메카로 돌아갈 때 알아크사 사원 앞의 바위에서 가브리엘 천사의 날개를 타고 승천했다고 한다. 


 또한 기독교도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고 처형된 골고다언덕이 있으며, 그 위에 각 종파가 공동으로 운영하는 성묘교회가 있다.
 이렇듯 세 종교의 성지가 성벽을 둘러싸인 가로세로 약 1킬로미터 규보의 좁은 시가지에 밀집해 있다는 사실에서 예루살렘의 특이성을 볼 수 있다. 이스라엘 정부는 1976년의 제 3차 중동전쟁으로 점령한 동예루살렘을 병합했는데, 그 결과 반경 수 킬로미터 이내에 이들 3대 종교의 교회, 모스크, 성지 등이 26개소(국제연합 조사)나 밀집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비탄의 벽, 성분묘교회, 알 아크사 이슬람 사원, 바위의 돔, 에티오피아 교회, 콥트교회 등 소수종파의 것까지 합하면 ‘성지의 박물관’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2) 구약성서 창세기 15장 18절에 따르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집트강에서 유프라테스강에 이르는 가나안 땅을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준다고 약속했다. 약속의 땅 가나안이 오늘의 팔레스타인이다. 


 히브리족은 4000년 전 팔레스타인 지역에 들어와 B.C. 18세기부터 16세기의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의 족장시대부터 이 지역에서 살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히브리민족이 이후 이스라엘을 건국한 유대인이다. 그 후 이들이 기나긴 이산의 고통을 겪게 된 것은 A.D. 72년경 로마에 의해 극심한 박해를 받고 완전히 패망하여 고향에서 쫓겨나 세계를 방랑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19세기말까지 이 지역은 팔레스타인들의 독차지가 되었다.
 유태인에게 예루살렘은 ‘3000년 전부터의 수도’였다. 어쨌든 다윗왕이 이곳을 수도로 정한 것은 기원전 1000년경. 그 후 다른 종교의 교도들에게 몇 번이나 파괴되었는데, 그 첫 번째는 기원전 586년 바빌로니아의 네브카드네자르 2세의 정복이다. 이때 유태인은 바빌로니아로 끌려갔다. 소위 ‘바빌론 포수’이다. 그리고 ‘네브카드네자르의 재림’을 자칭하는 후세인 대통령으로부터도 공격을 받은 적도 있다.

 

 3) 과거 기독교 로마 교회에 의한 십자군 원정은 사실상 이슬람교의 승리로 막을 내린다. 그동안 유대교와 이슬람교는 같은 피해자라는 관계에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연대하여 공동으로 투쟁한 것은 아니다. 사실 당시의 유대교는, 굳이 이슬람교가 유대교를 상대할 만큼 큰 교단이 아니었다. 때문에 1차 세계대전 전까지는 평화롭게 공존했다. 

 역사적으로 예루살렘은 유혈의 연속이었다. 유태, 기독교를 극복하는 종교로서 등장한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이슬람 군단은 638년에 예루살렘을 점령했다. 그리고 뒤이어 1099년에는 십자군에 의해 점령되어 다수의 주민들이 학살당하였다. 그로부터 약 100년 후인 1187년, 아랍의 영웅 살라딘이 이곳을 다시 탈환하여 예루살렘을 기독교도와 유태교도에게도 개방된 도시로 만들어 간신히 이 거리도 안정을 되찾는 듯했다. 그러나 19세기 이래의 제국구의 열강의 팔레스타인을 둘러싼 암투와 시오니즘의 대두에 의해 예루살렘은 한층 복잡한 문제를 안게 되었다. 1948년의 이스라엘 건설, 네 차례에 걸친 중동전쟁, 팔레스타인인에 의한 독립국가 건설의 움직임이 그것이다. 이스라엘은 1980년의 ‘예루살렘 영구 수도법’으로 ‘예루살렘은 다시는 분할되지 않는 이스라엘의 항구적인 수도’라고 규정하고, ‘동예루살렘을 수도로 하는 팔레스타인 독립국가’를 주장하는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와 정면으로 맞섰다. 예루살렘에 수도를 둔 것은 역사상 유태인뿐이고, 예루살렘은 유태인에게는 유일무이한 성지라는것, 이슬람교도에게도 성지이지만, 그들에게는 메카, 메디나에 뒤이은 세 번째 성지에 불과하다는 것이 그 근거였다. 우익연합인 리쿠드는 물론 여당인 노동당까지 이 전적으로 같은 입장이다.

 

3. 본격적인 갈등의 서막-시오니즘
 유대교와 이슬람교 종교 대립의 무대가 팔레스타인이 된 것은 앞에서 말했듯이, 유대교가 현실적인 영토로 삼고 있는 곳이 이 지역 외에는 없고, 또 이 땅에 3대 일신교의 공통 성지인 예루살렘이 있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 분쟁의 원인을 캐보면 영토문제에서 시작되었으며 처음에는 종교분쟁이 아니었다고 한다. 선주 팔레스타인인의 절반 이상이 유대인에게 강제로 빼앗긴 영토를, 또는 국제연합에서 선주민 정착구역으로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이 점령한 구역을 돌려받으려는 데서 발생한 영토분쟁이었다. 
 

 선주 팔레스타인인의 종교는 대부분이 이슬람교지만 그중에는 기독교 신자가 섞여있고,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PFLP)을 이끄는 하바슈등은 그리스 정교도이다. 그 영토분쟁이 서서히 유대민족 대 아랍민족이라는 민족분쟁 또는 종교분쟁의 색체를 띠게 된 배경은 유대민족국가인 이스라엘의 독선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팔레스타인 지역은 16세기 이후 오스만 튀르크 제국의 통치를 받았으며, 1918년 이후에는 영국의 위임통치를 받았다. 1881~82년, 이 시기를 전후로 해서 러시아와 동유럽에서의 유대인 배격이 심해져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러시아 내의 유대인에 대한 집단적 반유대운동을 계기로 헝가리 출신의 오스트리아 거주 유대인이자 언론인인 헬센이 세계의 유대인에게 호소하여 1897년에 스위스의 바젤에서 제 1회 시온이스트회의를 소집, 유대인들의 조국복귀운동(Sionism, '시온으로 돌아가자')이 하나의 사회운동으로 발족하였다. (그들이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를 건설하려 한 까닭은 역사적으로 볼 때 기원전 1000년경부터 서기 1세기 무렵에 걸쳐 이 땅에 유대교도들의 왕국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1920년부터 1945~1946년까지 ‘유대국민기금’과 ‘팔레스타인,유대식민협회’의 기금모금으로 토지를 구입하기도 하였다. 세계 각지에 흩어졌던 유대인들은 제 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의 히틀러에 의한 유대인 탄압을 겪고 나서 유럽에서 백인들에게 박해받던 유대인들이 전쟁이 끝나자마자 자신들이 2000년 전 쫓겨났던 팔레스타인 땅으로 모여들어 이곳에 조국을 건설하겠다며 시온이즘을 내세우고 유대인들의 결집에 나섰다. 유대인들이 20세기 중반에 ‘귀환’을 실행한 것이다. 자연히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비롯한 아랍인들과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4. 팔레스타인 분쟁의 배경-영국
 현재의 팔레스타인을 둘러싼 아랍과 이스라엘과의 대립, 즉 팔레스타인 문제의 직접적인 원인은 제 1차 세계대전 중 영국의 이중적인 정책에 그 원인이 있다. 영국은 아랍과 협정을 맺는 한편, 몰래 프랑스와도 협정을 맺어서 ‘삼중사기’라고 비난을 받는다. 유대인들이 현재의 이스라엘 땅에서 살았던 것은 사실이나, 하지만 로마가 폭력적으로 이들을 탄압하고 추방한 이후 이 땅에는 주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살았다. 


 영국은 제 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은 인도에 대한 통제력을 확실히 유지하기 위하여 수에즈 운하 및 그 수로 좌측에 위치한 팔레스타인 확보가 매우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더구나 제 1차 세계대전 개시와 더불어 터키가 독일, 이탈리아 측에 참전하게 됨에 따라 영국은 오랜 기간 오스만의 지배하에 놓여 있었던 아랍세력을 독려하여 오스만에 대항하도록 하여 터키를 내부어세부터 붕괴시키려고 했다. 이는 친영 세력으로 하여금 영국의 식민전략상 요충지를 점령시키고 그들에게 전쟁 후 독립을 약속한 정책이었다. 이러한 정책은 후세인-맥마흔 서한을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 서신은 카이로에서 근무하던 이집트총독 맥마흔이 1915년 7월부터 1916년 3월 사이에 당시 하심가문의 좌장이자 아라비아 반도 히자즈 지방의 통치자였던 후세인 국왕에게 10여회에 걸쳐 보낸 편지로서 터키에 대항하여 참전할 경우 영국은 전폭적으로 지지할 것이며, 전후 아라비아의 독립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이 서신은 사실상 제 1차 세계대전시 아랍의 희망을 담보하는 중요한 서신이었다. 그러나 이 문서들은 모호하여 그 후 계속 분쟁의 불씨가 되었다. 그 이유는 영국으로서는 반 터키 전선형성이 시급한 상황에서 구체적인 협상으로 시간을 보낼 수 없어서 황급히 추진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국은 아랍권에는 별다른 언질도 주지 않고 후세인-맥마흔 서한을 총체적으로 부정하는 정책을 추진해 나갔다. 영국은 프랑스 대사에게 후세인-맥마흔 교섭을 알리고 영국과 프랑스 간의 의견조정을 제의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사이크스-피코 폅정이다. 이 아시아-터키의 분할에 관한 밀약에서 오랫동안 분쟁의 불씨가 된 팔레스타인의 대부분의 지역은 영, 프, 러 3국이 공동으로 신탁통치할 것을 비밀리에 약속되었다. 이는 후세인-맥마흔 서한에 약속되었던 아랍인에 의한 아랍국가 수립 약속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외교적 배신행위였다. 이 협정은 분명 전리품 분배협정으로서 영국과 프랑스양국은 이 협정에 근거하여 터키 소속의 아랍지역을 분할하였다. 이 비밀협정은 세인들에게 알려지지 않다가 10월혁명 이후 1917년 출범한 소비에트 정부가 이를 발표하여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였으며, 특히 아랍인들의 강렬한 의분을 자아냈다. 


 그 후 영국은 유대인들의 전쟁장금 지원을 얻고 미국 내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 미국을 제 1차 세계대전에 끌어들이고 전쟁협력을 얻기 위하여 1917년 11월 당시 외상 발포어가 시온주의자들에게 아랍세계의 심장부인 팔레스타인에 유대민족국가를 건설해 주겠다는 발포어 선언을 발표하였다. 이처럼 후세인-맥마흔 서한, 사이크스-피코협장, 그리고 발포어 선언등은 각각 상치되는 내용을 담고 있어서 영국의 교활한 국익추구 자세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이중적이고 표리부동한 행위로 인해 아랍세력은 영국 등 서구 열강에 대한 배신감과 증오심을 갖게 되었고, 중동지역에서 반서구 제국주의 운동이 싹튼 주요 원인이 되었으며, 팔레스타인 분쟁의 원인이 되었다. 


 결국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20년의 대 터키 강화조약에서는 맥마흔 서한은 완전히 무시되고 발포어 선언만이 존중되었다. 문제의 팔레스타인은 터키령에서 분리되었고, 1920년 국제연맹은 동 지역을 결국은 영국의 뜻대로 영국의 위임통치령으로 결정하였다. 그 뒤 영국의 위임통치규약에서도 유대인의 민족국가 건설의 근거를 승인하였다. 당시 영국은 팔레스타인에 아랍인 64명, 유대인 5만6000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대인은 나치의 유대인 박해와 더불어 독일에서의 학살을 피하여 독립국가를 세워야 한다는 처절한 결심으로 팔레스타인에 몰려들면서 늘어났다. 제 2차 세계대전 후 영국은 팔레스타인 문제를 유엔에 넘기고, 유엔은 1947년 11월 ‘결의안 181호’를 채택해 팔레스타인 땅을 아랍인 국가와 유대인 국가로 분할하고 예루살렘이나 베들레헴을 ‘국제관리지구’로 한다는 분할안을 채택하였다. 당시의 유대인은 60만, 아랍인은 129만명으로 인구상으로는 아랍인이 2배 이상 많았으나, 동 분할안은 아랍국 대 유대국의 영토를 44%대 56%의 비율로 유대인 국가에 오히려 많이 배정하여 유대인에게 유리하고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에게는 매우 불리하고 불공평한 것이었다. 이에 이스라엘인들은 이 안을 받아들였으나 아랍인들은 이를 당연히 거부하였다. 그 후 아랍인들과 유대인들간의 충돌과 테러가 격화된 가운데 영국군은 위임통치의 종결을 선언하고 군대를 철수해 버렸다. 유대인의 지도자 벤구리온이 다음해인 1948년 5월 14일 국경선도 부분명한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이스라엘 공화국을 선포하자, 자신의 땅을 빼앗긴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크게 반발한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5. 4차례의 중동전쟁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난민에서 탄생한 팔레스타인 게릴라와 그 대표인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를 섬멸하기 위해 국외인 요르단과 시리아, 레바논까지 공격하고, 한편 국내에서는 예루살렘의 완전 독점을 노리고 이슬람교의 성역을 모욕하는 등 아랍지역의 전 이슬람교도를 적으로 돌리고 말았다. 팔레스타인인 측에 이슬람교의 전투 집단이라고 주장하는 ‘이슬람 원리주의 집단’이 가세하고 있다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고 한다.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해 아랍제국은 어디까지나 아랍인의 토지에 유대인이 침입한 것으로 간주하고, 이스라엘의 주권뿐만 아니라 유대인의 생존권도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아랍 국가들은 이스라엘 독립 직후부터 불과 20년이 못되는 기간에 이스라엘과 4차례의 전쟁을 하게 된다.

1차 중동전쟁은 1948년의 팔레스타인전쟁(독립전쟁)인데, 이스라엘의 독립선언 다음날 이집트를 위시한 아랍 5개국 군의 이스라엘 침공으로 시작되었으나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났다. 그 과정에서 팔레스타인인 약 100만명이 난민이 되고 16만명이 이스라엘 영역 안에 남게 되었다.   

 2차 중동전쟁은 1956년 소위 ‘수에즈전쟁’(시나이전쟁)이다. 이스라엘은 독립 후 재외 유대인들의 경제원조와 미국의 지원으로 국가건설에 노력하여 아랍 국가들과 의 격차를 더욱 확대했다. 그러던 중 1656년 이집트가 수에즈운하의 국유화를 선언하자 영국과 프랑스가 출병하였는데, 이스라엘도 이에 참전하여 8일전쟁의 결과 이스라엘측이 승리하였다.


3차 중동전쟁은 소위 ‘6일 전쟁’으로 1967년 미국의 일방적인 지원 아래 첨단 무기를 앞세운 이스라엘의 선제공격으로, 전쟁 첫날(1967년 6월 5일) 새벽 이스라엘 공군은 공격 3시간 만에 아랍제국의 비행기 400여대를 폭파하였다. 이집트는 아랍 국가들의 맹주국 이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기습공격의 주 대상이 되었고, 폭격당한 전투기 중 286대가 이집트의 비행기였으니 이집트는 초기에 이미 완전히 기선을 제압당했던 것이다. 이 때 이스라엘의 비행기 손실은 19대밖에 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은 전쟁발발과 동시에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이스라엘군은 이집트령 사나이반도와 시리아령 골란고원을 지나 수에즈운하까지 진주하였고, 요르단령 예루살렘 구시가지(동예루살렘)를 포함한 요르단강의 서안지구를 점령하고 그 지역에 군대를 배치하여 정착촌을 건설하였다. 최근 중동평화협상의 최대 난제로 떠오른 동예루살렘마저 요르단에게서 빼앗았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은 독립 당시보다 통치지역이 4배로 증가하였다. 즉시반환과 팔레스타인국 건설을 의결한 유엔 결의안이 1967년과 1973년, 2차례나 나왔지만 안보리에서 미국은 줄기차게 거부권을 행사하였다.


4차 중동전쟁은 1973년의 중동전쟁으로, 아랍 국가들을 중심으로 한 OPEC의 석유무기화가 이루어지고 서구제국들이 이에 굴복하여 서방측의 이스라엘 지원이 어려운 가운데 종결되었다. 따라서 네 번의 전쟁 중 세 번이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났고 한번은 비겼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네 차례의 전쟁으로도 팔레스타인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는 못하고 오늘에 이르렀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1960년대 중반 핵개발을 끝낸 이스라엘은 1867년 6일 전쟁 때 2개의 핵폭탄 사용을 준비했고, 1973년 제 4차 중동전쟁에서 패배의 기미를 느끼자 20킬로톤 규모의 핵탄 13개를 조립하도록 명령을 내린 바 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강경정책의 배후에는 물론 미국이 자리잡고 있다. 이스라엘에 대한 미국의 안전보장 공약은 미국 외교, 안보 정책의 의무 중 최고의 신성불가침 조항이다. 미국은 중동전쟁 당시 핵무기를 사용할 준비까지 했으며, 중동국가들의 석유수출 금지 조치에도 이스라엘에 대한 지지를 재고하지 않았다. 


 6. 중동전쟁 후 팔레스타인
 •1978년 미국의 중재로 이스라엘과 이집트가 평화협의서를 체결하면서 협상에 의한 해결의 싹을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1987년 12월 이스라엘의 점령정책에 대항해 팔레스타인인들의 민중항쟁인 1차 인티파다가 일어났고, 이에 대해 이스라엘은 폭력적으로 대응하여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다. 1990년대 초부터 이스라엘 노동당 정부가 본격적으로 추진한 오슬로 평화협상은 그런 배경에서 추진되었다. 1993년 9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팔레스타인 자치를 핵심으로 한 팔레스타인 과도정부로의 통치권 이양과 이전 영토의 대강을 합의한 오슬로협정(팔레스타인 잠정자치에 관한 원칙선언)에 도달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양쪽이 서로의 생존을 인정하고 만성적인 분쟁지역인 중동 땅에 이른바 ‘두개의 국가 해법’을 공식 선언한 것이다. ‘땅과 평화의 교환’이라는 오슬로협정의 원칙은 제 3차 중동전에서 이스라엘 점령지의 일정 부분을 기정사실화하는 대신에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수천년 살아온 땅 위에 독립국을 세울 수 있도록 보장하면서 평화구조를 구축하는 것이다. 즉,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테러공격으로부터 벗어나는 평화를 얻고, 팔라스타인은 이스라엘군의 무단통치로부터 벗어나 땅을 되돌려 받는다는 약속이었다. 이 협정에 따라 이후 5년간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팔레스타인 임시자치정부‘가 구성됐다. 이에 따라 오랫동안 망명지를 떠돌던 야세르아라파트는 1994년 열렬한 박수와 환영 속에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왔고, 1996년 실시된 팔레스타인 최초의 선거에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으로 당선되었다. 오슬로협정에 따라 처음에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선포일은 1999년 5월로 정해졌다.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는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과 함께 노벨평화상을 공동 수상했다.
 그러나, 협정체결 2년 뒤 라빈총리는 이스라엘 극우파 청년이 쏜 총에 숨을 거두었다. 라빈의 죽음은 한 정치인의 개인적 비극일 뿐 아니라, 중동의 비극이었다. 이스라엘의 한 온건파 정치인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그날의 극우테러 총성은 숱한 팔레스타인사람들에게 고난의 길을 걸어가라는 죽음의 메시지였다. 


 라빈 암살사건 뒤 실시된 1996년 이스라엘 총리 선거에서 그동안 오슬로평화회담을 맹렬히 비판해왔던 리쿠드당의 벤야민 네탄야후가 당선된 뒤부터 중동평화는 침몰 위기를 맞았다. 네탄야후의 반 평화노선과 이스라엘 총선 등의 이유로 독립국가 선포일은 2000년 9월 13일로 늦춰졌다. 그러나 협상은 타결을 보지 못했고, 독립국가 선포 시한을 다시 2개월 연기했다. 이 협상에서 노동당정부는 많은 지나친 요구를 내세운 반면, 팔레스타인인들의 권리는 완전히 부정했다. 이것이 2000년 9월 28일 팔레스타인인들의 2차 인티파다가 발발하게 된 원인이다. 그 여파로 아라파트는 2001년 12월부터는 신체적 자유도 박탈당했다. 이스라엘 정부는 아라파트 수반과는 더 이상 협상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그를 요르단강 서안 라말라시의 자치정부청사 내에 연금해 버렸다. 그리하여 자치정부 수립 이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의 협상은 더 이상 진전되지 않았다. 이처럼 중동평화의 중요한 이정표였던 오슬로협정을 먼저 손상 시킨것은 이스라엘 강경파였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해결의 기미는 보이지 않은 채 분쟁의 불씨만을 키우고 있는 상태이다.

 7. 정리
 지역분쟁과 종교전쟁을 생각할 때 조정자, 중재자로 나서야 하는 곳은 분명 유엔이다. 그러나 미국이 유엔의 상임이사국인 이상 유엔의 결의에 미국의 강한 입김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걸프전쟁이나 이라크전쟁이 그것이다. 안보리에서는 무력을 사용하고 조취를 취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데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중국, 이렇게 5개의 상임이사국 중 한 국가라도 반대를 하면 결의안이 통과되지 않는다. 유엔의 안전보장이사회는 그런 면에서 볼 때 지금껏 유엔은 국제분쟁 문제에서 이렇다 할 큰 공헌을 못한 것 같다. 팔레스타인의 분쟁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참고문헌
빌프리트 뢰리히 저,『종교 근본주의와 종교분쟁』 서울 바이북스 2007
후쿠오카 마사유키 저,『21세기 세계의 종교분쟁』 서울 국일미디어 2001
강인철 저,『전쟁과 종교』 한신대학교 출판부
이사가와 준이치 저, 『종교분쟁지도』 자작나무
세계정세를 읽는 모임 저, 『지도로 보는 세계분쟁』 이다미디어
조순구 저, 『국제문제의 이해』 법문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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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모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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