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 그리고/글 4. 소논문'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6.01.05 플라톤의 교육론 고찰 (서문) 1
  2. 2015.03.19 로티의 신실용주의 진리론 비판- 요약문과 서론
  3. 2014.10.30 안티고네- 크레온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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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교육론 고찰>

 

I. 서론: 교육의 본질과 한국사회의 교육
 문명사가 기록된 이래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루어지는 활동이 바로 교육이다. 허나 이를 마치 소크라테스가 요구했던 것과 같이 명료하게 개념화하여 정의내리기란, 즉 짧고 명료한 말로써 그 말의 풍부한 뜻을 모두 함축하기란 사실상 완수하기가 참으로 난해한 듯하다. 의미를 추상(抽象)한다는 것은 그 말뜻을 좁히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추상된 개념은 대상이 된 그 말과 뜻의 풍부한 의미를 다 담아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본인이 생각하기에 소크라테스는 추상의 과정 속에서 사상(死狀)된 여러 생각들을 가지고 혹자가 의미 규정한 내용을 가지고 비판을 한 것 같다. 하지만 추상은 필연적으로 말이나 단어의 뜻의 살을 깎아버리니 이런 식의 엄밀한 개념 찾기는 자가당착이 아닐런지 조심스럽게 말해본다. 허나 이는 그 말이나 단어가 자타의 행동기준, 도덕원리, 관습 등을 내포하고 있는 가치지향적인 것인가 아닌가에 따라 그 정도의 차이는 있을 것이라 첨언하고자 한다. 


 따라서 '교육'이라는 것 역시 이런 식으로 해서는 동서고금과 그에 따른 상이한 용도 등 '교육'의 모든 사례를 다 포괄할 수 있는 확실한 의미규정을 당장에 찾기는 힘들 듯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의 소통가능성마저 없다고 할 수는 없으니 일반적으로 말하는 교육의 정의를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국내의 사전에서는 교육을 '인간이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모든 행위를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이며 수단'이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R.S. Peter는 교육을 무언가 가치 있는 것을 가르치는 활동 혹은 교도(敎導, 가르쳐서 이끎)의 활동, ‘한 사회의 언어, 개념, 신념, 규칙 등에 담겨 있는 공적 전통에 개인이 입문하는 것’이라고 짧게 요약하고 있다. 본인이 생각하기에 여기서 방점은 '가치 있는'에 두어야 할 것 같다. 즉 가치 있는 것을 가르치는 일련의 활동이 교육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플라톤에게 있어서 가치있는 것은 곧 ‘훌륭함’일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 우리 사회에서 교육의 모습은 그 본질에 가까울까 아니면 본질이 아닌 지엽적 측면에 더욱 치중되어 있을까? 단적으로 이야기해보면 우리의 교육 현실은 본질에서 점점 더 멀어져 가고 있는 듯 보인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다. 입시 위주의 공교육, 즉 입시와 출세에 부역하는 노예로서의 교육, 여기에서 나오는 줄 세우기와 경쟁의 조장, 이는 곧 현실 교육의 암담함으로 나타난다. 더욱이 이는 교육의 문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반에 얽혀 들어가는 문제이기에 더욱 심각한 일이다. 본질의 왜곡으로 말미암아 다원주의이니 상대주의니 하는 식의 가치의 범람과 온갖 말의 범람이 나타났다. 이는 소위 데카당스에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다양한 올바른 가치의 융성이라기보다는 퇴폐에 가까운 미풍양속, 대중 미디어의 획일적 전횡, 자유로운 교양 시민이 아닌 노예시민의 일반화, 정상의 비정상화, 약육강식의 세계화, 사회 문화적으로는 동성애와 성전환 등 성적 가치의 혼란, 그리고 소위 ‘일베’, ‘메갈’ 이라는 표어로 대표되는 사회 전반에 걸친 온갖 혐오의 만연함, 경제적으로는 신자유주의 또는 자본주의에서 비롯된 노동에서의 인간소외, 자본의 노동착취, 빈부격차, 그리고 천민 자본주의의 파렴치한 폭력 등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가히 ‘헬조선’이라 말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이다. 이처럼 무절제와 타락이 만연한 사회 속에서 교육 역시 그 본질적 기능과 목적이 잘 수행되고 있다고 말하기는 힘들 것이다. 이런 혼란의 원인은 무엇일까? 생각해보면 역사, 국민 일반의 인식, 인간의 본질적 탐욕 등 많은 것이 있겠지만 결정적으로는 우리의 ‘교육’이 이에 큰 몫을 했으리라 짐작한다. 결론적으로 교육의 본질을 잃어버려 바로잡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공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제는 정명(正名), 즉 이름을 바로 세우는 것으로, ‘실제에 붙여진 이름과 그 내실 즉 본질이 일치’되도록 모두가 물심양면으로 힘써야 할 때이다.  


 위와 같은 현실을 바라볼 때 고전으로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은 우리에게 다시금 교육의 본질을 자각시켜주는 효과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전이 무엇인가? 국내의 사전에 따르자면 우리말에서의 고전은 ‘읽을 만한 가치를 지닌 옛 책’을 의미한다. 또는 ‘사회 운영의 기본이 되는 이전 시대의 원칙과 제도’, ‘근거가 될 만한 이전 시대의 모범적 사례’라고 표현되기도 한다. 그 우리에게 고전의 탐구가 필요한 이유도 이와 관련한다 생각하며, 이 같은 맥락에서 본인은 고전이라고 불리는 고대 학자 플라톤의 저서인 <국가>, <법률>을 통해 그들의 교육론을 정리 및 비판적으로 고찰해봄으로써 교육의 이름을 바로 세울 수 있는 실마리를 얻어 보고자 한다.

 

--

(이하 생략)

 

II. 본론: <국가>와 <법률>에서 나타난 플라톤의 교육론

  i) 교육의 개념

  ii) 교육의 종류와 목적

  iii) 교육론의 특징과 기초(전제)

III. <국가>편의 이데아론에 입각한 교육론

IV. 결론: 플라톤 교육론의 한계와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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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로티의 신실용주의 진리론 비판”

 

요 약 문

제출자 : 

 

 현대적 맥락, 특히 실용적 맥락에서 보자면 철학은 현실의 삶에서의 의미성이 많이 떨어진다는 인식이 지배적인 듯하다. 특히나 전통철학의 경우가 그러하다. 이렇게 현실과는 거리감이 있는 철학의 가운데서 과연 어떻게 해야 철학이 현실에 유의미하며 실천적일 수 있을지, 또 가치 있고 의미 있으려면 어떤 태도를 지녀야하는지에 대한 의문에서 본 논문은 시작한다. 따라서 철학에 관한 철학이기도하다. 논문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서론에서는 철학에 대한 일반의 인식에 편승해 전통철학 일반에 대한 비판이 있을 것이며, 신실용주의적 사고를 미래 철학의 대안으로써 희망적이게 제시할 것이다. 본문에서는 실용주의 사조가 의미하는 바, 그리고 리처드로티의 신실용주의가 이전의 고전적 실용주의와는 어떤 특징점이 있는지를 서술하게 된다. 그리고 그 특징을 기반으로 한 로티식 신실용주의만의 진리론을 개괄하고 그 진리론의 지지기반이 되는 몇몇의 근거들을 파악해 비판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전통철학과 신실용주의 양자 모두 일면적임을 주장하며 전통철학의 이념인 표상주의와 정초주의, 신실용주의의 이념인 반표상주의와 반정초주의의 통합을 결론으로 내세우게 된다. 
 

 우선 표상주의라 함은 인간이 보편적으로 지니고 있는 인식체계, 예를 들면 마음, 정신, 감각과 같은 것들이 우리 외부의 대상을 사실 그대로 표상가능하다는 식의 이념을 지닌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표상능력을 바탕으로 지식과 진리를 정초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정초주의적 입장이다. 로티는 이러한 표상주의, 정초주의적 이념이 장구한 역사를 지닌 전통 철학적 사조에 깔려있다고 보고 있다. 그런데 로티는 몇 가지 이유를 들어 앞서의 것들을 거부하며 반표상주의, 반정초주의를 주창한다. 그 주장의 기초에는 언어에 관한 그만의 독특한 관념이 자리 잡고 있다. 가장 특징적인 근거는 언어의 우연성과, 표상주의 또는 정초주의의 실천적 비효율성,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의 공약불가능성이다. 이들 근거에는 대체로 인간 공통된 인간 본성에 대한 부정이라는 반표상주의적 관념이 관통하고 있다. 필자는 이들 근거를 비판하며 역으로 전통철학의 이념의 유용성을 다시 끌어오고자 노력할 것이다.


 그런데 앞서 말한 것처럼 철학이 실천적이고 현대적 맥락에서 일반에 의미가 있기 위해서는 전통철학적 사조만으로는 당연히 부족할뿐더러 신실용주의적 사조만으로도 부족함이 있다. 즉 전통철학은 생각에 매몰되어 지극히 사변적이고 현학적 논제만에 머무르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실천과 현실에의 이행 가능성이 지극히 낮으며, 신실용주의 철학은 지극히 개방적인 반면 정초주의적인 사고의 강력한 실천력을 간과했기 때문에 비현실적이게 된다. 이념, 이론, 학문이 의미가 있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현실 속에 쓸모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이념이 현실적이 되기 위해서는 실천력을 지녀야 한다. 실천력을 지니기 위해서는 철학도 그러하고 여타 학문도 그러하듯 정치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어야한다. 정치란 당파성과도 같다. 당파성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특정 사조, 패러다임, 공유하는 토대를 가지고 있어야한다. 그 공유의 토대는 바로 정초적 경향을 통해 도출된다는 점이다. 필자는 이런 흐름에서 두 이념통합에 대한 필연성의 근거로 이분법적 사고의 필연성, 지식의 두 층위, 그리고 직관의 정당화를 제시해보고자 한다.


※ 주요어 : 실용주의, 신실용주의, 프래그머티즘, 리처드 로티, 정초주의, 반정초주의

 

1. 서론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일반적 사람들이 지니는 철학에 대한 통상적 생각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개인의 삶, 국가, 공동체, 세계에 관련된 진리를 파악하거나, 또는 개인이나 단체가 특정한 문제에 봉착했을때 그것을 해결해줄 실마리를 제공해주는 구원자의 역할 등이 그것이다. 최소한 철학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것을 탐구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며 그 중 일부는 철학을 구원자나 영도체(領導體)로서의 기대감을 가지고 있기도 한 듯 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철학이나 철학자에게 그러한 기대감이나 의존을 나타내지 않는다. 즉 현대 공동체가 지닌 중요한 문제나 개개인이 직면한 심각한 문제를 해결해주거나 최소한 그 실마리를 제공해줄 능력을 철학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으로 여긴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현대의 우리들을 대개 사실, 기술, 과학적 사고로부터 나온 지식이나, 그런 지식에서 도출된 상식을 판단기준으로 지닌 채 살고 있으며 그런 판단기준의 유용성, 합리성 역시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부터 존재해온 체계의 철학, 예를 들어 플라톤의 천상계, 이데아,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능태, 현실태, 형이상학,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神), 칸트의 내면성, 선(善)의지와 같은 것들과 또 현재 철학 내에서 생산되는 몇몇의 논의들에 대해 현실에의 삶과의 큰 괴리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면 철학은 그저 현학적인 논의들을 만드는데 그치는 것처럼 일반인들에게 보이는 것이다. 


 이에 대한 본인의 입장을 설명하자면 철학이 절대적인 영도체인 듯 추종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철학이 아예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는 의미에서 앞서 말한 일반인들 중 중도적 입장 정도일 것이다. 다만 평소 은근히 느끼고 있던 행복과 좋음의 기준, 올바름의 문제, 정의와 부정의의 문제, 갈등이나 사랑 등 삶의 처세술에 문제 등에 대해 최소한 한 실마리 정도는 줄만한 것으로 기대했으며 말미에 이르러서는 이에 대해 선고(宣告)받거나 완벽히 정초(定礎)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런 기대감과 확신은 철학이라는 학문이 답이나 해결의 실마리를 제시해주지 않는다는 현실을 알게 된 순간 무너지기 시작했다. 현실의 삶에 있어서 너무나 무기력하다는 회의감을 느꼈고 그로부터 철학이라는 학문에 대한 회의감, 원망, 그리고 추상적이긴 하지만 반(反)철학적 감정이 나왔다.


 이처럼 혹자는 본인과 같이 철학에 입문한 후 철학에 대해 회의감이나 무가치함, 그저 사변적이고 현학적, 관념적이라는 느낌을 받으며 고생하는 경우가 더러 있을 것이다. 그런데 철학에 대한 이러한 문제는 철학자체의 타고난 문제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철학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런데 사실 철학은 현학적이거나 사변적일 수밖에 없다. 철학적 논의의 속성이 원래 그러하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흘러온 철학의 주류를 차지한 특정 경향은 아마 플라톤이나 그 전후를 이래로 지금까지 계속 유지되어온 듯한데, 그래서 철학이 무가치하다거나 현실과는 전혀 동떨어진 채 관념적, 현학적 논의만 한다는 말도 일면 맞는 말이다. 그러나 철학이라는 학문에서 하는 논의가 우리의 삶과 전혀 상관없다고 결론짓기에는 인류 수천 년의 역사와 함께해온 학문에게 상당히 무례한 표현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철학의 어느 지점에서 삶과 현실에의 유용성을 찾을 수 있을까?


 본인은 근현대에 들어서서야 드디어 철학이라는 학문이 사변이나 관념, 현학의 영역을 뛰어넘어 유용성의 측면에까지 발전 및 발디딤했다고 생각하는데 바로 그 돋음의 시작점이 바로 실용주의(pragmatism)인 것이다. 즉 이제는 단순히 현학적인 논제들을 양산하는 죽은 과거의 모습에서 벗어나 철학에 대한 회의감을 극복하고 실제 삶과 관련한 진리나 지식을 구축하는 방법론이나 학문적 태도로서, 더 나아가 개인과 공동체가 직면한 사적·공적 문제에 대한 해결책과 실마리를 제공해주는 인문학적 도구이자 철학적 방법론으로서의 철학적 실용주의야말로 철학이라는 학문의 새로운 진보적 변곡점, 삶이나 현실과 만나는 지점인 것이다.


 그러나 철학이 진실로 진보적, 실천적이고 실용철학적이기 위해서는 실용주의가 그 전부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분명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점이 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회의감의 원흉이기도 했던 주류철학의 사변적, 형이상학적 논의를 구성하는 아주 기저의 이데올로기 내지 원리가 그것이다. 이것을 리처드 로티를 비롯한 실용주의철학자들은 '표상주의', 또는 '정초주의'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이 표상주의, 정초주의적 원리는 제거되어야 하는 최대의 적이다. 하지만 지식, 학문적으로 정초하고자 하는 태도가 없이는 진보나 실천적이기는커녕 혼란만이 있을 것이다. 실용주의자들의 말마따나 고정불변하며 시간과 공간을 관통하는 지식체계나 이론, 즉 진리가 없다고 한다면 세상에 그것만큼 불안하고 살떨리는 일이 또 있을까 싶다. 그러한 상태는 진실로 견딜 수 없는 상태이며 본인은 없다는 생각만으로도 불안해 차마 견딜 수 없음을 느낀다. 마치 재난이나 재앙, 대 혼돈 속에 들어서 있는 것과 같은 기분을 느낀다. 그러나 어제 동녘하늘에서 해가 떠 서쪽으로 졌고 오늘도 그러한 것처럼 그러한 불안을 뒤로한 채 세상은 여전히 잘 움직이고 있다. 여전히 볼펜은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며 버스는 연료의 연소와 힘과 가속도의 법칙에 따라 잘 굴러가고 있다. 즉 진리의 존재를 비판하는 실용주의적 태도도 현실의 반영에는 일면적이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본인이 이 논문을 통해서 주장하고자 하는 바는 철학이 진실로 실용적이고 더 나은 방향으로 진보하기 위해서는 실용주의의 반정초주의적인 태도와 주류철학체계의 정초주의적 이념이 함께 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본 논문에서는 우선 가장 최신의 실용주의 철학자이자 서구철학사를 대대적으로 비판하며 새로운 형태의 실용주의인 신실용주의를 만들었으며, 또 그에 기반하여 진리론, 정치철학 등을 전개한 현대 영미철학자 리처드 로티(Richard Rorty, 1931~2007)의 이론을 중심으로 논문을 전개할 것이다. 본론에서는 로티의 진리론의 개요를 자세히 탐구한 후 로티의 진리론이라 할 수 있는 반정초주의가 정당화되는 주요한 세 가지의 근거를 서술할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실용주의의 반대격이라 할 수 있는 주류철학체계의 정초주의적 이념, 그리고 로티 철학의 주요한 세가지 근거를 함께 비판하면서 정초주의와 반정초주의를 통합하는 과정을 시도할 것이다. 통합의 근거로 본인은 이분법적 사고의 필연성, 지식에 두 층위가 있음을 주장하게 될 것이다. 먼저 본론의 긴 작업에 들어가기에 앞서 실용주의란 무엇인지에 대해 본문의 서두에서 간단히 밝혀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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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고네

저자
소포클레스 지음
출판사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1-03-23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는 그리스 비극의 전형적인 구조를 택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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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고네」의 크레온 비판


1  서언- 근거들이 충분히 제시되지 않고 단언되고 있음에 대한 변론

2 안티고네 내용

3 안티고네에서의 주요 쟁점

  3-1 국가의 속성

  3-2 올바름이란 무엇인가?

       -다수와 소수의 문제

       -악법도 법인가

     4 결론- '크레온' 비판

1. 어떤 논의(또는 철학적은 어떤 행위)를 함에 있어서 우리는 하나의 것을 앞에 두고 모두가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는 한다. 특히 '철학적'이란 인식적 토대 위에서 무언가를 논하자면 어떠한 형태의 보편타당적이고 또 온전한 전제나 기초토대도 그 자체로 토대가 될 수 없어 보인다. 반면 수학과 같은 학문들에서는 숫자, 더하기 빼기 나누기와 같은 수식어, 함수, 적분 등과 같은 보편타당한(또는 보편타당한 방법) 전제들을, 상호 존중하고 또 그 토대 위에서 논의가 이루어진다. 왜 우리가 더하기라는 수식어를 따라야 하는지, 과연 1+1 2가 맞는지 따지는 것은 아무 짝에도 쓸데 없는 짓이다. (여기서 왜 그것이 쓸데 없는 짓이냐 질의하는 쓸데 없는 반문을 할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어쨌든 쓸데 없는 질문이기에 답할 가치조차 없다. ) 하지만 '철학'과 철학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토대 위의 논의가 난잡하고 또 서로 다른 것은 당연하다 치더라도 철학은 또는 그것을 추구하는 행태들은 그 토대( 또는 방법)조차 논란의 여지, 즉 전쟁터로 만들어버린다. 수천 년의 역사를 그래왔다.


 하여 나는 의문, 물음으로부터 시작하는, 즉 위와 같은 어떤 '철학적' 사고방식을 하나의 "질병"으로 볼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철학'이 본성적으로 요구로 하고 있는 엄밀함과 논리성 때문이다. 비록 내가 '철학'이 무엇인지, '철학적'인 것은 또 어떤 것인지조차 모르지만, 그래서 나의 이 선언이 "불명예스럽게도" 또 하나의 '철학'이라고 보여질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앞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절대 철학이라고 불려서는 안되며 또 안 되기를 바란다. 결론적으로 나는 철학을 병으로 규정하고 철학적이지 않음이라는 치료의, 즉 일반화의 과정 속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러니까 '철학'으로는 절대 진리에 이를 수 없다고, 즉 그것으로는 심판(판단)할 수 없다고 답 내리겠다.


 그렇다면 올바른 것, 다시 말하면 옳고 그름은, 즉 맞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고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가? 먼저 "진리는, 절대 앎은 분명하게도 존재한다. 그것은 직감적이고도 통찰적이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히 '있는 것'으로 존재하고 내가 당장 알 수 있는 것에 존재한다. 존재하고 원리도 역시 그 속에 있다. 당장 알 수 있는 것이란 머릿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진리란, 그리고 있는 것, 존재하는 것은 내 머리 바깥에 있다." 여기서부터 우리는 시작하면 되는 것이다. 이것에 대한 의문이나 딴지는 있기가 힘들다. 없다고 말할 수 도 없지만, 없다고 말되어지는 순간은 오로지 이 토대 그 자체가 올바르지 못한 것임이 "완전하게", "절대적으로" 확증된 순간 뿐, 즉 그것이 올바르지 못하다는 심판적 언명에 대한 일절의 반박의 여지가 절대 있을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 일 뿐이다. 그런데 철학은, 또는 그런 철학적으로 보임을 요구로 하는 어떤 '논함'은 이런 여지를 반동적으로 보고 있는 것 같다. 다시 돌아와, 이어서 나는 안티고네를 통해 크레온을 비판하고자 할 것인데, 분명 특정 영역에서 논증이 빈약할 것이다. 하지만 이는 빈약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무엇을 판단하는데 있어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특정 패러다임, 또는 토대를 전제하고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1] (그렇지 않다면 앞에서 내가 수없이 말한 '철학'이라는 고질적 병에 빠져버리기 쉽상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만약 a라면 b일 것이다' 하고 가정을 한 뒤, 현상을 관찰하여, 그 관찰의 결과가 b가 나온다면 a라는 토대는 올바른 것이 되는 것이다. 어떤 전제나 가정하에 출발하여, 그 전제나 가정에서의 세상이 올바르게 작동한다고 보여진다면 더 이상 문제 삼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 지식은 근원에서부터 출발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영역이 아니다. 우리는 특정 전제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만약 a일 때 b가 나타나지 않는 그 순간까지는 영원히 a라는 원리는 보편타당 또는 올바른 것으로 남아 있다.  1000개를 보고 무엇을 판단했을 때 그 판단결과는 1000/x가 되어 무한대가 되는 것이 아니라 1000/1000인 것이다. 다른 이야기지만 그런 의미에서 본인은 귀납적 방법론을 절대 신뢰한다. 귀납적 방법의 정당성과 신뢰성에 관하여는 다른 글에서 논한 적이 있지만 본 텍스트의 목적과는 부합하므로 생략한다.)


 내가 이렇게 길게도 서언을 쓰는 이유는 이전의 소()페이퍼에서 논의의 근거가 부족한 채 단언되고 있다는 지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먼저 이렇게 길고도 긴 서언으로 전제하고 글을 진행하고자 한다.


2. 안티고네의 큰 흐름

 고대 그리스의 유명한 시인 소포클레스의 비극, 「안티고네」에서는 안티고네[2]와 크레온[3] 양자간의 갈등을 그 내용의 주 축으로 하고 있다. 갈등의 내용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비극의 무대가 되는 '테베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야 한다. 무대가 되는 국가 '테베이'에서는 그 국가의 선왕인 '오이디푸스'가 죽자 그의 아들인 '에테오클레스''폴뤼네이케스'가 왕권을 양분하기로 합의한다. 하지만 '에테오클레스'가 약속을 어기고 왕권을 양분하지 않고 왕권을 독점하기 시작했으며 이로 인해 두 형제간의 전쟁이 벌어진다. '폴뤼네이케스'가 군대를 일으켜 '테베이'를 공격한 것이다. 전쟁의 결과 두 형제는 죽음에 이르고, 이후 왕위계승의 권리를 가진, 안티고네의 외삼촌 '크레온'이 왕위를 계승하게 된다. 통치자가 된 크레온은 먼저 군대를 일으켜 테베이를 공격한 폴뤼네이케스를 반역자로 간주하고 그의 장례의식을 치르지 못하도록 법으로 선포한다. 여기서부터 안티고네와 크레온의 갈등이 시작된다. 안티고네는 자신의 혈육, 즉 오빠인 폴뤼네이케스의 장례를 금지한 법을 비난하며, 결국 법을 어기며 폴뤼네이케스의 장례를 치르고 만다.


3. 안티고네에서의 주요 쟁점

 심판을 하기에 앞서 전제로서, 그리고 근거로서 「안티고네」에서 본인이 생각해 본 주요 쟁점은 1. 국가란 무엇인가, 2 올바름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2. 올바름이란 무엇인가'와 관련하여 1. 다수와 소수의 문제, 2. 악법도 법인가 하는 쟁점도 생각해볼 것이다. 이 외에도 미시적으로 볼 때, 국가와 개인간의 문제, 성차별문제 등도 다룰 수 있겠으나 생략하거나 가능하다면 부수적으로 다루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여하튼, 이러한 과정을 거침으로써 결론에 이르러서는 안티고네가 옳은지 크레온이 옳은지를 '안티고네'의 독자로써 현대적 관점에서 심판해볼 것이다.


3-1. 국가란 무엇인가?

 기본적으로 본인은 국가란 무엇인가를 생각할 때, 홉스-로크-루소에서 시작되는 사회계약설을 기 기저의 이론으로 받아들이는 편이다. 비록 현대국가의 내면을 파헤쳐 보기 시작하면, 국가의 그 목적이나 근본이 사회계약설에 따라왔음이 반증될 가능성이 큰 것 같지만, 그렇다고 하여도 국가의 본질은, 본성은, 최고의 형상은 사회계약설이라고 생각한다. '국가'와 같은 집단은 그 속 개개인의 자유와 이익의 보호에서 시작되었으며 자연스럽게 암묵적인 동의가 형성됨으로써 나타난다. 그리고 '국가'틀을 지탱토록 하는 계약, 즉 제도의 형성(또는 왕, 대통령 등)도 그 속 모든 개개인들의 상호간의 이익을 목표로 한다. 그 속에서 개개인들은 필연적으로 일정의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 그것이 '전쟁'보다는 더 장기적으로 안전하며 이득이 되기 때문이다. 이 흐름은 필연적으로 공리주의로 흐르게 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국가가 되는 일련의 과정만이 나는 '옳음'이라고, '국가'라고 선언하겠다. (이것 역시 특정 전제나 토대로서, 일말의 여지조차 없을 만큼 틀렸다고 밝혀지지 않는 이상 일절의 의문도 불허한다. 전제 속에서 맞는지 틀리는지 논해야 할 뿐이다.) 비록 현대에서의 '국가'라는 속성이 꼭 저렇게 보이지만은 않지만 '국가'라는 것의 본질 내지 최상의 형상은 바로 저것이다.


3-2 올바름이란 무엇인가?

 올바름이란 너무나 다양한 사례와 사건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추상적으로 사상하고 추상하여 꾸려낼 수 밖에 없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가장 올바르다고 여겨지는 목적을 벗어나지 않는 행위가 올바른 것이다. (어떤 토대나 패러다임으로써의 가정) 올바르다고 여겨지는 목적이나 행위가 무엇이더냐 말하자면 그것은 평등[4], 그리고 행복이다. 더 구체적으로 예를 들자면, 의사의 경우는 환자를 치료하는 것-자기 있는 힘껏 최선을 다해 치료하여 이롭게 하는 것이 목적이며, 선생의 경우는 교육을 통해 바람직한 인간상을 만들어가는 것이 목적이며, 장사치이나 기업가의 경우는 최저의 가격으로 최고 품질의 것을 널리 퍼뜨리는 것이며, 변호사의 경우는 억울하고 또 법적인 구명이 필요한 사람을 최대한으로 도와 법적 사회적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 그 목적이다. 대통령이나 정치인은 자기희생을 바탕으로 오로지 인민과 국민의 전체적 행복 증진을 위해 헌신 하는 것이 그 목적이다. 영리를 추구하거나 물질적 대가를 얻는 것이 목적(최종적으로)인 직업(또는 행위)은 없다. 아니, 개인에 따라 그런 것에 목적을 두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이상적으로 생각해볼 때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여겨지며, 현실적으로도 나는 없기를 소망한다.


 
결론적으로 그런 목적을 벗어나 어떤 행위 또는 직업을 그 행위 또는 직업 자체의 최고의 바람직한 목적이 아닌 것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써 행하는 행위 자체는 결코 올바른 것이 아니다. 따라서 제도적으로 엄벌에 처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올바름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돈[5]을 벌기 위해 의술을 하는 사람을 색출해 제거하고, 평생직장이라는 비루한 목적을 위해 선생 등의 공무원을 하고자 하는 사람을 색출해 제거하고, 최고의 가격으로 최저의 것을 퍼뜨려 최대의 이익을 남기고자 하는 장사치와 기업가들을 색출해 제거하며, 처벌받아야 마땅한 사람을 변호하고 있는 변호사를 제거하고, 인민과 국민의 전체적 안위와 행복을 위해 헌신하지 않고 다른 목적과 다른 책동을 위해 일하는 위정자들을 제거해야 한다. 그러한 철저한 외과적 수술을 통해 완전무결하게 건강한, 즉 올바른 것을
이룩할 수 있다. 보론으로 외과적 수술(은유적이지만) 이라는 방법만이 가장 궁극적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외과적 시술이라는 뼈저린 고통의 경험이 역사에 뇌리에 깊히 뿌리 박힌다면 그 충격 또는 공포에 대한 반동으로써 더 탁월한 통제, 즉 덕 또는 아름다움, 또는 올바름 또는 정의를 향한(강제하는) 탁월한 통제가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마치 우리가 독재니 유신이니 하는 것을 자연적으로 거부하듯이, 욕심과 이기심, 부정의, 즉 올바르지 못함에 대해서도 자연적으로 치를 떨며 알레르기를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는 올바름에 대한 원론적 이야기였으며, 다시 돌아와 다수와 소수의 문제, 그리고 악법도 법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한번 논해 보겠다. 안티고네에서 보자면, 다수는 안티고네이며, 소수는 크레온이다.[6] 왜냐하면 앞서 말했듯이, 공리적 입장과, "최대 다수의 최소편차적 최대 행복"이라는 전제에(토대, 또는 가정)에 따라 다수의 행복이 올바른 것이며(그 행복의 편차가 큰지 작은지는 차후에 논의해야 하겠지만) 안티고네의 텍스트만을 보고 판단하건대 안티고네와 그들을 따르는 것이 인민 전체의 행복의 편차가 가장 적은 상태에서의 최대의 행복이라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결국에는 그것이 올바른 것이라 여겨진다. 이런 흐름에서도 보여지듯이 대체로 다수의 행복을 위해 (하향평등적 행복이 되더라도) 소수의 행복(즉 크레온의 행복)은 희생되어 마땅하다고 여겨진다. 전제에 따르면 그것이 올바른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악법도 법인가 하는 문제도 쉽게 판단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악법은 법이 아니다. 악법 아닌 법만이 지켜야 할 법이다. 법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본다면 쉽게 납득할 수 있다. 법이라 함은 사실 어떤 계약에 지나지 않는다. 만인의 적에서 만인의 아군으로 바꾸기 위한 것이다. 즉 최대 다수의 최소편차적 최대행복을 목적으로 한 것이지, 소수나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위한 것은 아니다. 최소한 법의 본질은 그렇다고 나는 생각하고 또 그것이 옳다고 가정하고 논의한다. 이때 상향 불평등 행복적인 법은 결코 법이 아니다. 그 악법을 제정함으로써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크레온 그 자신뿐이기 때문이다. 이는 정확히 크레온이 행하는 것 자체와 일치한다. 악법을 행하고 있는 것이다. 법이란 것은 '법의 본질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 또는 '법의 본질을 따르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있는 것이다.[7] 그리고 그 본질 밖으로 나서는 순간 그는 인민의 적이며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는 처지가 되어 버리고 또 그래 마땅하다. 그런 흐름에서 안티고네의 행동은 법을 지키지 않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법을 지켰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범법자 크레온에 대해 상당히 적절하게 반동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사실 이는 인민으로서의 의무이지 필연이다. 만약 인민이, 그리고 안티고네가 저런 범법에 반대하지 않았더라면 이는 엄청난 의무불이행으로 여겨진다. 또 그런 흐름에서 안티고네와 그녀와 동일선상에 있는 무리들이 순응했다면 안티고네 역시 그 부분에 한해 비판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8]


 4 크레온 국가의 정당성(국가의 본질에 맞는가? 그리고 올바른가?)

 비극 '안티고네' 속으로 들어가 생각해보자. '크레온의 국가'가 정당성을 얻으려면 '옳음의 편'인지 아닌지를 가늠해야 한다. 만약 '크레온의 국가' '옳음'의 속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면 안티고네와 크레온간의 대결에서 안티고네의 정당성이 한층 강화되는 셈이다. 이제 비극 속 그 국가의 속성이 어떠한지부터 알아봐야 하는데, 비극 속의 국가 티베이는 일단 군주제 국가이며, 나는 그 속성을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다음과 같은 증언문구들을 찾아내었다.

 

 안티고네 : "이 사람들도[9] 그렇게 보고 있지만, 당신이 무서워 입을 눌러 닫고 있는 거에요."

                                                                   (교재 p.149 / 508~510)

 하이몬 : "도시가 이 소녀[10]에 대해 얼마나 애통해하는지를요, 모든 여인 가운데 가장 고귀한 그녀가 가장 명예로운 행위때문에 가장 비참하게 죽는다고요."              (교재 p.161 / 692~695)

 하이몬 : "한 사람에게 속한 것은 국가라 할 수 없습니다"……"아무도 없는 땅이라면 혼자서도 잘 다스리겠지요"                                                      (교재 p.163 / 735~740)

 

 위 증언에 따르자면 크레온의 국가는 국민의 국가, 최고형상의 국가가 아닌 듯 보인다. 크레온의 국가는 개개인의 자유와 이익을 보호하는 형상을 보여주고 있지도 못하며, 크레온( '크레온국가'의 제도는)은 국가 속 개개인들의 자발적 동의, 암묵적 동의에 의해 형성된 것이 아닌 것이다. 국민들은 오로지 왕 또는 소수 주권자의 이익을 위해 '손실'할 뿐, 그 속에 속한 모든 개개인의 평향적(平向的) 이득을 위해 손실하고 있지 않는 상황이다. 오로지 왕 개인의 감정과 이익만을 대변하고 있는, 최고 악덕중의 악의 속성을 지닌 국가다. 국가와 개인간의 너무나도 크나큰 괴리, 붕괴가 존재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국가의 속성면에서 심판해보자면 크레온이 왕으로 있는 테바이 국민들은 국가를 재 형성해도 괜찮은, ( '마땅함'과 같은) , 정당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근거하여 국민의 한 사람인 안티고네의 범법 역시 정당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구체적으로, 국가가 정당성을 얻으려면 국가의 주인은 왕이나 특정 소수의 것이 아니라 인민 모두의 것이어야 한다. 먼저 그 점에서 크레온의 국가는 실점했다. 그리고 국가의 속성을 제하더라도[11] 크레온의 행태 자체는 정당하지도 않고 또 법도 아니며, 다소나마 배려하더라도 그저 악법일 뿐이다. 어쨌든 앞서 말했듯이 악법은 법이 아니기 때문에 같은 말이다. 또한 옳은 것이 무엇이냐 했던 앞의 합의에 (가정 또는 전제) 따르더라도 크레온은 명명백백히 올바르지 못한 행동을 하고 있다. 크레온은 현대적 관점에서 보자면 대통령 또는 정치인과도 같다. 앞서 말했듯이 대통령이나 정치인은 자기희생을 바탕으로 오로지 인민과 국민의 전체적 행복 증진을 위해 헌신 하는 것이 그 목적이다. 국가 자체의 이데올로기를 최고형상의 선으로 두어야 하는 것도 크레온의 몫이며, 악법 아닌 법을 만드는 것도 크레온의 의무이며, 전 인민의 "평등"적 행복을 위해 힘써야 하는 것도 크레온이다. 반면 크레온은 자기감정의 이득을 위해 동의 없이 악법을 만들었을 뿐이다. 그의 어떤 감정과는 별개로 당시의 문화에서 장례는 치르도록 해주어야 마땅했다. 이런 흐름에서 나는 크레온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자 한다.



[1] 또한 그 패러다임이나 가정, 전제들은 숨은 전제로써 부득불이 숨어있을지도 모른다.

[2] 오이디푸스의 딸

[3] 안티고네의 외삼촌이자 테바이의 통치자

[4] 여기서의 평등을 조금 더 엄밀하게 정의내릴 필요가 있다. 만약 행복을 1~10의 지수로 나타낼 수 있다고 가정해본 상태에서 10명의 사람이 있는 사회를 또 가정해 보자면, 10명 모두가 10의 행복지수를 나타내는 사회가 가장 이상적인 사회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현실에서 그렇기란 역사적으로 볼 때 비현실적이다. 반면 1명의 행복도가 10이고, 나머지 9명의 행복도가 1인 사회는 매우 불평등한 사회이다. 이런 가정속에서 10명 모두의 행복지수가 1인 사회와 10명 중 1명만 10의 행복을 나타내고 나머지 9명은 1의 행복을 나타내는 사회 중 어느 사회가 더 바람직할까, 생각해보면, 본인이 말하는 평등이라는 관점에서 이야기하자면 행복편차가 가장 적은, 즉 모두가 평등하게 불행한 후자의 사회가 단연코 더 좋은 사회이다.

[5] 그저 돈을 예로 들었을 뿐이지, 그것은 돈이 아닐 수 있다. 그 어떤 행위나 직업이 속성적으로 가진 최고의 목적이 아닌 다른 행위 모든 것들은 돈과 같다고 설명하면 좋을 것 같다.

[6] 물론 뒤에 이어서 이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겠다.

[7] 그런 한에서 악법이란 있을 수 없다.

[8] 마치 안티고네의 여동생과 같이.

[9] 이전 행에 나오는 카드메이아 사람들을 이르는 말이다. '카드메이아'는 테베의 별칭이다. ('테베'라 불리우기 이전의 이름 )

[10] 안티고네

[11] 국가의 속성, 즉 주인이 누구인지를 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크레온이 최고의 형상을 목적으로 하여 인민에 대해 외과적 시술을 단행하는 사람이라면, 그 국가체제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비록 그 과정 속에 평등하향적인 최소편차의 행복(=불행한)의 국가가 되더라도 이는 정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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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모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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