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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맥. 1: 제1부 한의 모닥불

저자
조정래 지음
출판사
해냄출판사 | 2013-03-05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제1부 한의 모닥불 [1권~3권] 여순반란사건이 종결된 직후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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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맥 10권 세트를 6만 3천원에 구입하였다.

 저렴하게 구입한 편이라 생각한다. 1권당 6천300원이니. 지금보니 할인행사가 끝나 가격이 6만6천원이 되어있네. 그래도 많이 저렴한 편이다. 구입한 태백산맥 세트는 집으로 보냈고 나는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이곳 연구방에서 읽는 중이다. 유명한 대하소설 태백산맥을 이제서야 읽는다는것에 인문학도로서 부끄럽기도 하다.(뭐 문학이나 역사가 내 전공은 아니다만) 계속 탐독하여 철저히 미시적으로 느껴보기로 한다.

 

 

제 1권 목차

 

1. 일출 없는 새벽

2. 가슴으로 이어진 물줄기

3. 민족의 발견

4. 소화, 하얀 꽃이라는 이름의 무당

5. 조계산 숯막

6. 나라가 공산당 맹글고 지주가 빨갱이 맹근당께요

7. 그리고 청년당

8. 이념 이전의 인간

9. 문딩이 가시내, 팔자도 참 험허게 변했다.

10.암약(暗躍)

 

내용

1. 일출 없는 새벽

1부. 등장인물 : 정하섭, 위원장, 무당모녀( 그 중 무당의 딸 소화)
                (언급 : 정하섭의 아버지 정사장)

배경 : 벌교

정하섭은 당원. (맥락에 따르면 공산당)

어떤 명령수행의 목적에 의해 정하섭은 소화를 수단으로 이용하기 위해 찾아간다.

 

*당시의 무당에 대한 이미지는 부정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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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파버

저자
막스 프리쉬 지음
출판사
생각의나무 | 2003-02-27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기계문명의 노예로 전락한 현대인의 절망과 파멸을 그린 막스 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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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설 「호모 파버」와 줄거리


 이 작품은 두 파트로 나뉘어져있다. 첫 번째 정거장과 두 번째 정거장이 그것이다. 작품의 형식적인 특징으로는 첫째, 단조롭고 단단한, 명료한 문체를 사용하여 독자로 하여금 읽기 쉽게 했다는 것이다. 부담을 덜어주는 효과를 주는 것 같다. 달리 보면 이는 딱딱하고 지루한 형식의 글이 될 수도 있겠는데, 작가는 이러한 문체를 사용함으로써 주인공의 성격을 더욱 부각시키고자 했던 것 같다. 둘째, 작품은 때로는 결말을 먼저 말하고 나중에 뒷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이는 읽는 나로 하여금 많은 불편과 혼란을 주었다. 이로 인해 작품은 과거와 지금을 넘나들기도 한다. 과거와 현재에 대한 정확한 구분의 표시가 없기 때문에 이것 역시 작품을 읽어나가는데 불편함을 제공했다. 그리고 시점은 1인칭, 주인공의 시점이다.


 소설의 주인공은 발터 파버다. 그의 별명은 호모 파버다. 이 별명은 그의 옛 여자친구가 지어준 이름인데 그 이름에는 주인공이 어떤 유형인(人)인지 내포하고 있다. 그는 유네스코 에서 근무하는 기술자다. 그는 기계문명에 대해 철저히 신뢰한다. 주인공은 업무를 보기위해 비행기를 탄다. 그의 옆에 앉은 헤르베르트라는 사람은 계속해서 주인공을 귀찮게 한다. 비행기가 잠시 정차하는 틈을 타 주인공은 비행기를 안타고자 일부러 자신을 찾는 방송을 듣고도 비행기에 탑승하지 않는다. 그는 한참 뒤, 비행기가 출발했겠지 생각하며 나타나지만 주인공을 기다리며 찾아다니던 승무원에 의해 결국 비행기에 타게 된다. 비행기는 나중에 엔진의 고장으로 사막 한가운데 불시착하게 되고 그곳에서 헤르베르트라는 사람이 자신의 친구 요하임의 동생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요하임은 자신의 옛 여인인 한나와 결혼했음을 알게 된다. 그들은 80여시간만에 구조된다. 주인공은 요하임을 보기 위해 헤르베르트와 함께 머나먼 담배농장으로 가게 된다. 그러나 그들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요하임은 자살을 한 뒤였다. 상심한 헤르베르트는 그곳에 남기로 한다.


 미국으로 돌아온 주인공을 맞이하는 사람은 주인공이 헤어지고자 선언한 여자인 아이비다. 여기서 주인공의 태도는 참으로 이상하다. 아이비를 싫어하고자 하면서도 단칼에 거리를 두려고 하진 않는듯했다. 파버의 행동은 아이비에게 때로는 희망을 주면서, 때로는 슬픔을 준다. 얼마 뒤 주인공은 아이비를 떠나기 위해 파리행 유람선을 탄다. 여기서 주인공은 자베트라는 젊은 여자를 만난다. 사실 그녀는 옛 애인인 한나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신의 딸이다. 그 사실을 주인공은 자신의 딸이 죽음을 앞둔 후에야 완전히 알게 된다. 배에서 주인공은 마지막의 아이비를 대했을 때와 비슷한 행동을 한다. 주인공은 말로는 독자에게 자베트에 대한 관심을 극구 부정하지만, 자베트를 바라보고, 그녀를 상대로 행동하는 주인공의 모습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 독자가 보기에는 상당한 호감의 표현을, 주인공은 굳이 부인하면서 단순한 예의로서 치부해버린다. 배가 목적지에 도착해갈 즈음, 결국에 가서는 주인공은 어린 그녀를 좋아한다는, 본심을 드러낸다. 그리고 주인공은 그녀에게 청혼을 한다. 그리고는 헤어지지만 파버는 자베트를 잊지 못한다. 말로는 계속해서 그것을 부정한다. 하지만 몸은 그녀를 찾아다닌다. 결국 다시 만난 그들은 그리스로의 여행을 떠난다. 그리스여행 막바지에 주인공은 이 자베트가 자신의 딸일지도 모른다는 직감을 하게 되고, 그녀는 뱀에게 물리면서 쓰러져 발생한 뇌진탕으로 죽는다. 주인공은 자베트가 죽고 난 후에야 사인이 뱀이 아닌 뇌진탕임을 알게 된다. 주인공은 자베트와의 사랑과 죽음 등 지금까지의 모든 사건은 운명도 필연도 아닌, 그저 우연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사건은 파버의 말처럼, 우연일수도 있다. 운명일수도 있다. 그의 인간성에 따른, 결정된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계속해서 모든 사건들을 자기합리화를 한다. 모든 결과는 자신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저 변명으로만 들릴 뿐이었다.


 그리고 이어서 제 2막인, 두 번째 정거장이 시작된다. 두 번째 정거장은 주인공 파버의 인간적 성격면에서 첫 번째 정거장과는 다른 변화가 나타난다. 주인공 파버는 낭만적이고, 자기 성찰적으로 변한다. 과거를 회상하면서 말이다. 일종의 사상변화 같다. 마지막에 주인공 파버는 위암수술을 받게 되면서 작품은 끝난다. 뒤에서 나오겠지만 영화는 원작의 두 번째 파트의 분위기를 채용한 것 같다. 결론적으로 말해 이 작품은 기술문명에 의해 기계성을 띄게 된 현대인의 초상과, 그것의 결말을 그려내고자 했던 것 같다.


2. 영화 「사랑과 슬픔의 여로(Voyager)」


 한글제목은 사랑과 슬픔의 여로이다. 영어로는 Voyager, 즉 항해자, 모험적 항해자, 여행자라는 뜻이다. 이는 마치 정처 없이 떠돌아다닐 수밖에 없던 주인공을 말하는 것 같았다. 영화는 원작과는 다르게 두 번째 정거장이 없고 첫 번째 정거장을 끝으로 한다. 영화의 형식적인 면에서는 주인공 남자의 독백이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주인공의 독백이 이렇게 많이 들어간 영화는 드문 것 같다. 이외에는 대체로 원작의 내용과 영화의 내용과 같다. 다만 몇 가지의 눈에 띄었던 내용상 다른 점과 생략된 내용이 있었다.


 영화는 파머가 비행기를 안타고자 하는 장면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비행기 안에서 옆자리에 앉았던 동행인은 동생을 보러 간다고 한다. 비행기 불시착사고에서는 두 명이 사망한다. 그리고 구출과정에 대한 내용은 전혀 없었다. 그리고 주인공이 친구(소설에서는 요하임)을 만나러 가는 과정에서 차량을 구하고, 찾아가는 과정도 생략되었다. 소설에서는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
 주인공의 인간적인 면에서 영화는 소설과는 다른 큰 차이가 나타난다. 그것은 바로 주인공 남자의 성격이 매우 순화되었다는 것이다. 소설에서 보였던 주인공의 여자에 대한 편견, 또는 남자와 여자의 이분법적 사고가 영화에서는 거의 없었다. 소설에서는 예술, 종교에 대해 매우 냉소적이지만, 영화의 주인공은 감상적이기도 했다. 이러한 차이점은 소설과 영화의 분위기를 너무나도 다르게 변화시켰다. 영화는 낭만적이며 동정이 우러나오는 슬픈 영화가 되었다. 소설에서 조금씩 보이는 현실비판적인 그런 모습이 아니었다. 분위기로만 보자면 소설의 두 번째 정거장에서의 주인공 모습과도 흡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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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

저자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출판사
열린책들 | 2009-11-30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냄새에 관한 천재적인 능력을 타고난 주인공 그르누이가 향기로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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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 -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2007)

Perfume: The Story of a Murderer 
7.9
감독
톰 티크베어
출연
벤 위쇼, 더스틴 호프먼, 알란 릭맨, 레이첼 허드-우드, 비르기트 미니히마이르
정보
스릴러, 드라마 | 독일, 스페인, 프랑스 | 146 분 | 2007-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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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단 스크립 / 인용/ 참조 금지 
 
1.원작의 전반부 줄거리
 소설의 주인공은 그루누이다. 그는 파리의 더럽고 악취나는 생선가게에서 태어난다. 그루누이의 어머니는 생선가게에서 일하는데, 아무런 죄책감 없이 자신의 자식을 생선내장, 쓰레기더미에 버려버리지만 그루누이는 기적적으로 살아난다. 그리고 어머니는 참수형에 처해진다. 사람들은 그루누이를 싫어한다. 그루누이에게는 사람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것과, 엄청난 식욕 때문이다. 나는 사람들이, 냄새가 안 난다고 외면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과연 내 냄새의 기준은 무엇인지부터 해결해야 할 것 같다. 내 냄새란 과연 무엇일까? 단지 내 몸에서 나오는 냄새라면, 너무 불분명하지 않을까? 분명 땀 냄새, 기름 냄새, 기타 분비물 등의 냄새로 그것이 인간의 향이라고는 정의내리기 힘들 것 같다. 그루누이는 땀 냄새, 입 냄새, 여러 가지 이유로 나는 분비물냄새나 기타 이유로 나는 냄새가 없다는 말인가? 아니면 이 모든 외적 요건을 제외한 순수하게 사람의 살의 냄새를 말하는 것일까? 만약 그것이 사람 살 그 자체의 냄새라면 나는 그 냄새의 존재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입장이다. 그리고 그러한 냄새가 그렇게 중요한 것도 아니며, 오히려 냄새가 안 나는 것이 더 좋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루누이에게는 냄새가 없는 반면, 코가 매우 발달했다. 보통 인간이 맡지 못하는 어떠한 냄새도 다 맡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것이 불행인지 행복인지는 모르겠다.


 그루누이는 진드기같이 질긴 생명력으로 살아남는다. 그는 조금 더 젊어진 해에 무두공장에서 일하게 된다. 예전에 길러주던 유모가 팔아버린 것이다. 무두공장에서 일하면 얼마 못가 죽는데, 역시나 주인공 그루누이는 끈질기게 살아남아 주인에게 인정을 받는다. 어느 날 그루누이는 루브르 궁전의 행사를 보러 가는데, 그곳에서 어떤 향기를 맡게 된다. 그 향기는 어느 여인의 향기였는데 그곳에서 그는 첫 번째 살인을 저지른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향기가 언급된다. 레몬, 유자, 몰약, 계피 나뭇잎, 박하향, 자작나무, 장뇌, 솔이파리, 감귤, 실측백나무, 사향, 재스민, 수선화, 모과나무, 붓꽃, 호두기름, 수련 꽃다발, 살구꽃 향기 등등 책을 읽는 나로서도 이러한 냄새들을 맡고 싶은 유혹에 빠졌다. 아무튼, 그루누이는 그 여자의 향기에 엄청난 황홀함도 느끼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행복이란 것을 알게 된다. 그는 그리고 결심한다. 프랑스 향수제조가인 발디니의 조수로 일하면서 가장 위대한 향수 제조인이 되기로 한 것이다.


 2. 영화에서의 「향수」
 영화에서 시점은 전지적 작가시점이다. 물론 소설도 전지적 작가시점이다. 영화는 중간 중간에 해설자가 나와 이야기를 서술해 주는데 이것이 영화 「향수」에서 눈에 띄는 형식적 특징이다. 아마도 소설의 전지적 작가시점을 해설자로 대체한 것 같다. 그리고 소설의 내용을 그대로 따라간다. 하지만 내용적으로 다른 부분도 있고 그루누이에 대한 전반적인 느낌이 다르다. 영화의 그루누이가 광장에서 재판을 받게 되는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은 처음 살인을 저지른 여자를 생각한다. 그리고 눈물을 흘린다. 이 눈물은 어떤 의미였을까? 본질적으로는 가질 수 없는 그 여인과 향기에 대한 그리움, 사랑 받고 싶음에 대한 슬픔일까? 그렇지만 그의 눈물은 후회로는 보여지지 않았다. 이러한 모습은 흉악하고 인간에 대해 냉소적였던 소설의 주인공과는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잠시나마 인간적인 모습이었다. 영화에서는 소설과는 다르게 주인공을 다소 미화시키는 것 같았다. 주인공의 생애에 대한 동정심을 끌어내고자 했던 것 같기도 했다. 소설에서 주인공을 바라보는 시선은 ‘중립’을 지키고자 했던 것 같았다.
 그리고 소설에서는 그루누이가 그라스로 가는 도중 들린 동굴에 대한 이야기가 많 부분을 차지한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짧게 나오고 생략되는 부분도 있다. 소설에서는 첫 번째 희생된 여자가 오이를 팔았으나, 영화에서는 자두를 팔았다. 마지막 광장에서 소설의 주인공은 광장에 모인 사람들에 대한 혐오감 또는 증오가 강한 것 같았다. 그는 그런 사람들의 모습을 싫어했고 도망치고 싶어했다. 영화에서는 소설에서의 ‘분노’와는 반대되는 그루누이의 모습이 보였다.


 소설이나 영화나 향수에 대한 표현은 매우 뛰어난 것 같았다. 영화보다는 원작이 향기를 표현하는 면에서는 더 생생하게 느껴졌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언급된 향을 맡아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영화는 사랑과 영혼이라는 향수를 만든 가게로 화면이 이동하는 순간 매우 화려해진다. 그 전에는 다소 어둡고 칙칙하면서, 습한 영상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아마도 주인공 그루누이의 심리적 변화를 나타낸 것이 아닐까 한다. 바로 그루누이의 삶의 목적을 찾았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마지막에 가서 그루누이는 스스로 그 목적에서 무의미함을 도출해 낸 듯하다. 또 영상이 갑자기 화려해졌다고 했는데, 영화의 분위기 자체가 밝게 변한 시점은 아마도 그라스로 향하는 순간부터였던 것 같다.


3. 그루누이와 인생의 실존주의/회의주의에 대한 경고?
 영화에서, 광장에 선 주인공은 어찌 보면 실망한 듯도 했다. 아니 만족을 못한 것 같았다. 분명 최고의 향수를 만든다는 목적을 달성했음에도... 광장에 있던 사람들은 주인공에게 열렬한 환호와 사랑을 보낸다. 하지만 그루누이가 향수를 묻힌 손수건을 날려 보내는 순간 사람들의 환호와 사랑은 그 손수건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루누이가 아닌 다른 사람들과 서로 행복을 나눈다. 사람들의 관심은 본질적으로 그루누이가 아닌 향수의 ‘향’이었던 것이다. 그것을 본 그루누이는 지금까지 한 일이 무의미하다고 느꼈던 것일까? 내가 볼 때 영화에서 광장의 그루누이는 마치 군중들 속의 외톨이 같았다. 다른 사람들은 최고의 향수에 도취되나 그루누이는 그렇지 못했다. 딴은 그 향수로 인해 살인자인 자신에게 사랑과 바보 같은 존경을 보내는 사람들에게 증오를 느꼈기 때문이라고도 말한다. 결국 그는 더러운 악취가 풍기는 자신의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서 오랜 시간 공들여 만든 향수를 온몸에 바르고 거지들 틈에서 산화한다. 이렇게 자살함으로써 끝내는 것은, 나는 그가 향수의 의미를 잃었기 때문인 것 같다. 인생의 허무함이랄까? 작품을 보고 읽은 뒤 내게 가장 크게 남는 것은 과연 그루누이는 여태껏 어떤 목적을 위해 살인을 하면서 최고의 향수를 만든 것일까?에 대한 것이다. 목적에 대한 목적 내지 의미를 말하는 것이다. 아마 주인공은 이러한 실존적 위기가 너무나 심각하여, ‘의미 없음에 대한 반응’으로서, 편안한 자살을 택한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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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도의 예수

저자
정찬 지음
출판사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4-07-20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상급. 010-8893-8819. www.obestbook.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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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찬의 『빌라도의 예수』 감상문
1 책 내용 요약.
소설은 10개의 파트로 나뉘어 구성되어져 있다. 나는 편의상 소설의 줄거리를 각 파트별로 분류, 연결하여 설명하겠다.

제 1장인 필라투스산은 작가가 소설 빌라도의 예수를 쓰게 된 배경을 말한다. 여행사를 경영하는 친구의 제의로 유럽 관광을 가게 된 것이다. 소설의 ‘이야깃 거리’를 찾기 위해서다. 그러나 작가 정찬은 이번 관광에 대해 이내 실망했다고 말한다. 빡빡하게 정해져 있는 스케줄로 인해 시간에 쫓겨 다녔기 때문이다. 여행 일정중에 취리히의 알프스 영봉 필라투스 산 등정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작가는 소설을 쓸 아이디어거리를 생각해 낸다. 바로 빌라도다. 빌라도가 그 산에 은거했다는 전설 때문이다.

제 2장,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 여기서부터 빌라도의 예수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당시 예루살렘은 로마의 식민지로, 유대지역 식민지 총독은 그라투스라는 사람이다. 로마의 황제는 티베리우스다. 로마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사람은 세야누스라는 사람이다. 세야누스는 빌라도를 불러들인다. 후임 유대 총독으로 임명하기 위해서다. 세야누스는 여러 인종들중 유대인이 가장 특이하다고 한다. 복속된 상태로 살면서도 그들만의 독자적인 형태를 유지한 채 산다는 것이다. 즉 로마로의 완전한 흡수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 즈음 유대 북부지방 갈릴리에서는 청년 예수가 살고 있었다. 예수는 목수고 예수의 아버지도 목수다. 어머니는 마리아다. 빌라도는 전직 유대 총독 안니우스 푸루스에게 조언을 듣고자 만난다. 거기서 그들은 비존재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그 외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헤어진다. 그 즈음, 예수와 마리아는 유월절날을 위해 예수살렘으로 간다. 그들은 갈릴리인으로 예루살렘 사람들이 멸시를 한다. 그래도 그들은 갔다. 그들은 제물로 바칠 양을 사야하는데 사지 못한다. 왜냐면 장사꾼들이 그들을 갈릴리인이라 하며 무시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노인의 조언을 듣고 성전 안에서 재물을 사기로 한다. 그러나 성전 안은 생각과는 달리 장사꾼들이 난립하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파는 재물은 바깥에서 파는 것보다 수배에서 수십배나 비싸게 거래되었다.

제 3장, 봉인된 진실편에서 빌라도는 드디어 유대로 향한다. 한 8월 즈음였다고 한다. 여기서 빌라도는 자신의 아내 프로쿨라에 대한 소개를 한다. 빌라도는 배를 타고 가는 도중에 파로스에 가서 또 신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무슨 이시스라는 신에 대한 이야기다. 그곳에서 이집트의 총독 갈렐리우스가 빌라도를 직접 맞이한다. 그 후 빌라도는 아내랑 같이 이집트 관광을 한다. 거기서 그는 무세이온이라는 곳을 방문한다. 그곳은 일종의 학술연구소다. 거기서 중요한 인물을 만나는데 그 인물은 도서관 사서이자 지리학자인 멜레스다. 빌라도는 그와 달이며, 고대인들이 생각한 지구의 형상, 소크라테스, 플라톤의 이론, 에라토스테네스의 지구둘레 측정, 의학, 신 등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그 뒤 빌라도는 오시리스 신전을 간다. 거기서 그는 사제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다. 대표적으로 무슨 죽음과 부활에 대한 이야기다. 이집트를 떠나기 전 그는 유대인 거주지역의 유명한 철학자 필론을 만나러 간다. 빌라도는 계속해서 형이상학적 물음들을 제기한다. 또 그런 이야기를 즐겨 찾았다. 필론과 빌라도는 로고스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로고스는 일종의 신과의 만남의 통로라고 한다. 나는 이를 모든 종교행위는 그 이름과 방식만 다를 뿐 결국에는 한 신을, 즉 하나의 점, 즉 진리를 만나게 된다는, 뭐 그런 뜻으로 이해했다. 그의 말은 필론을 만나기 전에 이야기했던 오시리스 예배자 입문 과정과 흡사했다. 필론에 따르면 오시리스도 로고스다. 즉 신을 만나는 방법인 것이다. 여기서 그는 또 중요한 인물을 만난다. 바로 사울이다. 사울은 뒤에 나오는 예수의 사상을 따르게 된다.

제 4장, 카이사리아편에서 빌라도는 유대의 행정수도이자 지중해 항구도시인 카이사리아에 도착한다. 카이사리아는 예루살렘 북서 103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해있다. 빌라도가 거처하는 곳은 헤로데 궁이다. 그곳에서 그라투스는 자신의 퇴임을 기뻐하며 빌라도를 극진히 맞이한다. 그라투스는 유대에서 가장 위협적인 것이 유대인들이 가진 ‘꿈’이라고 한다. 이제 완전히 유대총독으로 정착한 빌라도는 총독 보좌관으로 이루어진 총독 자문단을 만나는데 거기서 메테리우스라는 사람을 주목하게 된다. 아마 이 사람도 소설전개상의 중요한 인물이 되는 것으로 기억한다. 여기서 유대에 있는 여러 수많은 파가 거론된다. 그리고 가야파를 비롯한 유대 지도자들을 만난다.

제 5장, 예루살렘. 여기서는 빌라도가 총독이 된 이후 처음으로 맞는 큰 위기가 닥친다. 하지만 다행히 빌라도는 물리적 충돌 없이 이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 문제는 예루살렘 성전에 있는 안토니오 요새였다. 그곳에 로마군대가 군기를 메달아 놓았는데, 그것이 유대인들에게는 일종의 우상숭배로서 받아들여져, 신성모독이 되었던 것이다. 유대 유력자들은 항의단을 이끌고 카이사리아로 몰려간다. 그들은 몇일간 계속해서 시위를 벌인다. 빌라도는 적당히 있으면 해산할 것으로 생각하나 그렇지 않았다. 결국에 빌라도는 군병력을 동원해 그들을 해산하고자 한다. 빌라도는 해산명령에 불응하고 남은 사람들에 대한 처형을 집행하려고 하나 도중에 변심하여 빌라도는 그들에게 항복한다. 그리고는 예루살렘에 있던 병력을 교체하기로 언약한다. 그 일이 있은 날 저녁, 빌라도는 메테리우스를 찾아간다. 그 둘은 종교와 성경, 신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내용이 나오는데 그것은 성서의 형성과정에 대한 이야기이다. 성서가 권력과 정치의 이해관계에 따라 꾸며지고, 조작, 편집되었다는 것이다. 즉, 창작품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메테리우스와 사울이 만나게 된 이야기도 한다.

제 6장, 유혈사태. 카이사리아에서 일이 있은 후, 비라도는 예루살렘을 방문한다. 가장 중요한 방문 이유는 예루살렘의 물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특히 다가오는 유월절에는 전 세계에서 몰려드는 인파로 인해 그 문제가 더 심각했다. 그래서 빌라도는 예루살렘 성전에 쌓여있는 어마어마한 돈을 이용해 예루살렘 멀리에 있는 물을 끌어들일 수 있는 수로를 건설한다. 물론 성전에 있는 돈을 썼다는 사실은, 여러 유대당원들을 포함하여, 되도록 숨기려고 했다. 그러나 수로가 완성되는 날 누군가에 의해 그 사실이 유출된다. 그 유출은 헤로데측이 정치적 목적 때문에 그러한 것이었다, 그리하야 유대에 폭동이 일어난다. 그리고 마리아와 요셉, 그리고 예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아무튼, 그 시위는 무력진압된다. 그리고 또다른 사건에 의해 수로사건은 묻혀버린다.

제 7장, 광야 편과 8장, 사람의 아들편에서 드디어 예수가 나타난다. 예수는, 새로은 신앙적 이론을 바탕으로 활동하고 있는 요한의 밑에서 활동을 한다. 기존에 부패한 신앙적 근거를 버리고 개혁을 하려는 것이다. 예루살렘 중심의 이데올로기를 타파하려는 것이다. 또한 이들에 대한 백성들의 반응도 좋았다. 그래서 빌라도와 그 주변인들, 특히 안티파스라는 인물은 긴장을 한다. 안티파스는 기회를 보다가 요한을 체포한다. 그러자 2인자였던 예수가 득세한다. 안티파스일당과 빌라도일당은 예수를 더 경계한다. 예수는 엄청난 속도로 떠돌아다닌다. 그래서 체포하기도 쉽지가 않고, 그를 지지하는 민중들도 엄청나게 많아진다. 그래서 함부로 처리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빌라도의 지원자였던 세야누스가 더욱더 득세하게 된다. 로마로부터 지원을 받아낼 수 있게 된다. 어쨌든, 제 9장, 나무십자가편에서 예수는 유월절 전날에 체포되어 죽는 것으로 장이 끝난다. 제 10장, 세월편에서는 빌라도를 한 노인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 즈음은 예수가 죽고난 후 신흥 종파의 활동이 두드러지는 시기다. 예수가 신격화된 것이다. 그 배후에는 앞에서 언급된 사울이라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빌라도의 아내마저 그 신흥종파에 전염되어 있었다. 빌라도는 어느 날 벌어진 유혈사태에 대해, 학살죄라는 명목으로 로마로부터 귀환명령을 받는다. 당시는 이미 빌라도의 후원자였던 세야누스가 로마황제의 계략에 의해 없어지고 난 후였다. 이는 빌라도가 가장 걱정했던 일이다. 그렇게 로마로 항해하고, 필라투스 산으로 은신함으로써 소설은 끝난다.

나는 믿음 또는 신앙 또는 1:1의 속성(기도)을 통해 다가오는 신과 종교에 대해서 그것의 사회적 유용성은 인정하되 그들이 본질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사람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모든 것’들은 논리와 이성을 통한 지식과 탐구를 통해 알아가야 한다. 하지만 신과 종교라는 것은 그러한 속성을 잃어버린, 또는 거부한 부류에 해당된다. 따라서 이와 관련된 어떠한 활동도 나는, 다른 활동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가치(低價値)한 일이라고 본다.

책은 잘 읽었다. 단지 걸리는 것이 있다면, 나는 이 책의 내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것이다. 단순히, 작가가 알고 있는 지식적 배경과, 작가의 욕망이 만들어낸 상상력이 서로 혼합되어 만들어진 소설 그 자체로 보아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소설이라는 매체를 빌렸을 뿐, 역사적 기록을 바탕으로 합리적인 추론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책인지를 말이다. 때문에 나는 잘 읽었지만, 그저 잘 읽었을 뿐이지 여기서 나는 종교와 역사와 성경과, 그리고 그것들의 사실과 이 소설과는 그 무엇을 연관시킬 수 없었다. 그럴 뿐더러 저 멀리 이국땅에서 벌어진 일들, 로마와 이스라엘 지역의 역사와 사건에 관해서 나는 전혀 알고자 하지 않으며 알지도 못하며 알 필요성도 못 느낀다. 내게 다가오는 이러한 의미속성은 하나님과 예수를 중심사상으로 한 그 종교와, 그것의 사상이 숨겨져 있는 성경도 같은 의미로서 다가온다.

이 책 빌라도의 예수를 읽고 난 뒤 내가 느꼈던 것은 이 책은 종교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예루살렘지역의 정치적 복잡성을 설명하는데 더 많은 잉크를 소비했다. 작가는 아마도 나름대로 중립과 보편타당성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애를 쓴 것 같다. 유럽의 여러, 많은 신화들을 채용하면서, 또 기존에 막연하게나마 알고 있던 성경제작에서의 성격과 예수와 이스라엘에 대한 이미지를 변화시켜 주었다. 그중 나에게 가장 새롭게 받아들여졌던 것은 성경에 대한 이미지다. 그것은 여태까지 신성한, 고귀한 이미지만을 가진 채 배일에 가려져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만약 애초에 성경의, 감히 의문을 품을 수 없어야 하는, 그러한 신비주의적 이미지가 버려졌더라면, 지금의 ‘십자가사상’은 이처럼 크게 사회적 패권을 움켜쥐고 있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이 책에서 본 성경의 이미지는 정치적 상황과 힘(力)에 따라, 그리고 서로의 이익에 따라 조작된 것이었다. 그것이 정말 진실인지 아니면 소설적 요소인지를 떠나서 말이다. 그것들 중에 단 1할이라도 사실인 점이 있든, 아니면 모두가 밝혀지지 않은 추측이든지간에, 성경이라는 소설은 윤리서, 철학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그리고 무신론자의 눈으로 볼 때 조작여부를 떠나 그것은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내가 본 것은 ‘인간예수’다. 한번 죽으면 무無로서 비존재하게 되는 한 ‘생명체’인 것이다. 예수는 부활도 없었다. 그저 죽었을 뿐이다. 죽은 후 여러 사람들의 입을 통해(소문) 신화화된 것이다. 예수의 삶과 죽음은, 누구도 예외없는, 누구 말대로의 ‘무(無)로의 기투(企投)’인 것이다. 나는 성경에서 나오는 예수라는 인물은 사실 한명의 사상가, 철학자로서 본다. 당시 자본에, 권력에, 부패한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하기 위한 예수의 모습은 마치 위대한 혁명가와도 같았다. 마치 공자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로서. 하지만 예수라는 인물은 운 좋게도, 엄청난 세월이 흐르면서 여러 사람들의 필요에 따라 깊고 깊게, 아름답게 포장되어 권력화 되었다. 가장 마지막에 내게 인상 깊었던 내용은 바로 로고스다. 길은 달라도 목적은 하나로써 보는 그런 로고스. 이로써 나는 소설 「빌라도의 예수」에 대한 감상문을 마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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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콥의 거짓말 (2000)

Jakob the Liar 
8.1
감독
피터 카소비츠
출연
로빈 윌리엄스, 한나 테일러 고든, 밥 발라반, 마이클 제터, 알란 아킨
정보
전쟁, 코미디 | 프랑스, 헝가리, 미국 | 114 분 | 2000-09-23




거짓말쟁이 야콥

저자
유레크 베커 지음
출판사
| 1990-06-01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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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가져가면 찾아서 죽여버립니다.

 

영화에 대한 평가 : 10점만점에 8점(적극추천)
원작에 대한 평가 : 10점만점에 7점(별로)
 
이 영화는 특별히 감상평이라고 쓸만한'거리'가 없다. 하지만 애써서 끄집어내어 보았다. 먼저 원작을 읽어보고 그 다음 영화를 시청했다. 굳이 줄거리를 쓰진 않겠다. 재미없어지니까. 읽어보면 알게될것이다.
 
원작과 영화의 차이점.
- 영화는 감독의 시각에 따라서 시점, 인물의 성격, 내용등이 달라질 수 있다.
 영화에서의 처음 시작과 끝이 원작과는 다르게 나타난다. 그 예로 영화에서는 처음부터 리나의 이야기를 하면서 리나를 등장하게 하는데, 원작에서는 그렇지가 않다. 원작에서는 먼저 글을 읽는데 있어서 알아야할 기본적인 뒷배경이 될만한 이야기를 한다. 그런다음 중간중간에 시점이 과거로 바뀌어 등장인물이나 여태껏 읽혀지면서 알려지지 않았던 이야기를 드러낸다. 또 야콥이 통금령을 어기게 되어 붙잡히게 되는 과정도 다소 다르다. 영화에서는 소식을 듣기위해, 바람에 날아가는 신문지를 따라가다가 붙잡히게 되는데 그러한 과정을 재미있게 표현한다. 원작에서는 이러한 이유로 붙잡히지 않았다. 또한 이러한 가벼운 웃음거리나 해학적인 표현은 없었다. 붙잡힌 이후에도 영화와 소설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에서, 통금령을 어겼다는 이유로 붙잡힌 야콥은 원작에서와는 달리 상당히 말도 잘하고 자신의 생각과, 처한 상황을 조리있게, 논리적으로 말한다. 관객의 입장에서 보면, 독일군에게는 다소 가소롭게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원작에서의 야콥의 성격은 다소 어리숙하다고 느껴졌다. 또 원작에서 야콥의 라디오에 대해 다소 부정적이던 교수도 영화에서는 야콥의 활동에 대해 이해를 해준다. 그리고 영화에서는 등장인물들의 행동과 성격을 익살스럽게 묘사한 부분도 많았는데, 야콥 뿐만 아니라 야콥 주변의 등장인물도 역시 그러했다. 대표적으로 미샤의 행동을 들 수 있다.: 야콥이 미샤에게 사실 자신에게는 라디오가 없었다, 너를 위험한 행동으로부터 구해주기 위해 꾸민 일이다, 라고 사실을 말했을때 미샤는 오히려 그 말을 거짓말로 믿으며, 야콥의 라디오 보유설을 게토내에 퍼뜨리게 된다. 상당히 어리숙한 미샤이다.


 내용면에서 볼때 비교되는 점은, 영화라는 매체와 소설이라는 매체의 특성상 원작의 많은 내용이 생략이 된다는 것이다. 또 원작에서는 없었던 이야기가 감독에 의해서 새롭게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 예로 영화 후반부에 가서는 갑자기 저항조직이 결성되는 장면이 있다. 그리고 교수의 죽음도, 방식은 같으나 다르게 표현되며, 같은 장면에서 나온, 게토를 관할하는 독일장군 역시 원작에서는 심장병으로 죽게된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심장병으로 죽는 모습은 보이지 않으며, 그 장군이 직접 야콥을 총살하게 된다. 야콥이 총살을 당하는 장면은 원작을 보고난 후 영화를 봤을 때 느껴진 가장 큰 반전이다. 영화의 결말에 가서는 야콥의 꾸며낸 이야기가 현실이 되어, 러시아군에게 구출되며 끝나게된다. 이 장면은 아마 예측가능하면서도 일말의 희망을 남겨놓고 끝났던 원작의 내용을 좀 더 구체화해서 희망적인 메시지를 더욱 부각시킨듯 했다. 이러한 내용적인 면에서의 변화는 아마도 영화감독이 원작을 감상하고 난 후의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토대로 해서 재해석했기 때문에 이렇게 큰 차이가 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영화라는 매체와 소설이라는 매체의 차이점으로 인한 내용의 변화
 위에서 나타난 것처럼 원작과 영화간의 차이점이 많이 나타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감독 나름대로의 재해석도 있을 수 있겠다. 결말부같은 경우는 확실히 영화감독의 해석이 들어간 부분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바로 전달매체의 차이점이라고 생각한다. 먼저 소설같은 경우는 분량에 있어서 대체적으로 자유롭다. 능동적이다. 그러나 영화같은 경우는 상영시간이라는 제한이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에서는, 원작에 대해 변형을 가해야 할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제작방식이나 비용면등과 같은 부분에서도 차이가 난다.


 전달매체의 차이로 인해 원작과 영화간의 변화로 시점을 말할수도 있다. 처음 영화를 봤을 때 가장 처음으로 느낄 수 있었던 변화는 바로 시점의 변화였다. 원작과 영화 모두 주인공은 분명 야콥이다. 하지만 그 야콥을 바라보는 방식에 있어서는 다르다. 원작에서는, 밝혀지진 않았지만, 같은 게토 내에 있는 어떤 한 인물이 야콥을 지켜보면서 야콥의 이야기를 독자에게 들려주는 형태로 구성된다. 영화에서는  영화 그 자체가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야콥과 게토 내의 생활을 보여주는 형태를 취한다. 글쎄, 이러한  보여주기방식의 차이가 이 전달매체의 차이점으로 인해 발생한 것인지는 확실히 증명할수는 없지만, 아무래도 영화에 있어서는 어느 특정한 인물의 눈으로 특정한 주인공과 특정한 장소를 보여주기에는 아무래도 관측시야가 좁아지게 되기 때문에 그런것이 아닐까 추측한다. 그러한 점에 있어서는 소설이 훨씬 자유로울 것이다. 원작에서는 과거로의 이동도 자유로웠으며, 야콥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야콥 주변의 다른 등장인물의 이야기도 풍부하게 드러내주었다.


-원작 또는 영화가 전하는 메세지
 소설을 읽으나 영화를 보나 알겠지만, 게토에서 유태인이 라디오를 갖고있는 것은 중죄에 해당된다. 처음에 야콥은 자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실토했으나, 야콥이 사람들에게 전해준 소식은 그들에게는 너무 희망적였나보다. 영화에서 야콥은 미샤에게 사실을 말하나 믿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도 야콥이 전하는 소식을 듣고싶어한다. 또한 게토내의 자살률도 현격히 줄어들기 시작한다. 이에 야콥은 죄책감을 느끼는 한편, 위험을 감수하면서,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해주고자 다짐하게 된다. 그러나 영화에서, 야콥의 주변인들이 야콥의 희망적 소식에 의해 죽게되고, 마지막에 가서는, 절친했던 친구마저 라디오에 대한 진실을 알게되면서 결국 자살을 택하게 된다. 불행속에 야콥은 죽게되고, 게토내의 유태인들은 어디론가 끌려간다. 하지만 마지막에 야콥의 희망은 현실이 되버린다. 정말로 야콥의 라디오가 희망인지 아무것도 아닌지 알려주지 않으며 끝맺게 되는 원작의 내용과는 다른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때나 전달매체를 볼때나, 영화와 같은 영상메체가 작가의 주제및 메시지를 더 쉽게 전달해줄 수 있는것 같다. 이 영화는 과연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일까? 굳이 뽑자면...나는 아마도 희망과 극복의 메세지가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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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인의 방문

저자
뒤렌마트 지음
출판사
예니 | 1999-07-26 출간
카테고리
예술/대중문화
책소개
1921년 스위스에서 출생한 작가의 희곡집. 미국으로 간 한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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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성인입니다. 무단 스크립 / 인용/ 참조 금지.

소소하지만 저의 글이오니

 

『노부인의 방문』

무단 스크립 / 인용/ 참조 금지
 
1.「노부인의 방문」 줄거리
 젊었을 적 임신을 한 채 애인(알프레드 일)에게 버림을 받은 여자 차하나시안, 수십년이 흘러서 다 늙어버린 그녀는 엄청난 부자가 되어 고향으로 되돌아오면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고향은 전쟁의 여파로 인해 과거의 명성은 모두 잊혀 졌으며, 가난해졌다. 그런 고향을 그녀는 자신을 배신하고 버린, 자신이 창녀가 되게끔 원인제공을 했던, 그 알프레드 일을 죽이고자 온 것이다. 차하나시안은 시장과 마을주민들에게 한사람의 목숨을 대가로 자신의 고향에 대한 막대한 경제적 부흥을 약속한다. 정의라는 이름을 외치면서 말이다. 이에 시장과 마을주민들은 정의와 인도주의의 이름하에, 단호하게 그 제안을 거절한다. 하지만 곧 돈이 생길 것이라는 기대에 마을주민들은 돈을 흥청망청 쓰고 빚도 지게 된다. 일의 가게에도 많은 빚을 지게 된다. 그러면서 차츰 시민들은 알프레드 일을 표적으로 삼기 시작한다. 그들이 엄청난 액수의 돈 앞에 변한 것이다. 그들은 알프레드 일을 속이기 위해 마지막까지 다가올 일의 죽음에 대해 부인한다. 심지어 신부, 경찰, 서장까지 변한다. 결국에 가서 알프레드 일은 여태까지 믿어왔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하게 된다. 그것은 자신의 가족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 민주주의와 정의라는 미명아래 어이없는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참 아이러니하지 않을 수 없다. 정의로서 일의 죽음을 외치는 차하나시안과, 처음엔 정의로서 이를 거절한 시민들, 그리고 나중에 가서는 정의로서 일을 죽이는 시민들... 무엇이 진정한 정의인가를 생각해보게 하는 작품이다.


2. 원작과 연극의 비교
 원작은 대본과 같은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예를 들면, 일의 대사가 나오고 뒤이어 차하나시안의 대사가 나오는 식이다. 그리고 원작에서는 특정한 대사를 반복적으로 쓰는, 다소 해괴한 방식을 쓴다. 내용상에 있어서의 원작과 연극에서는 크게 다른 점은 볼 수 없었다. 다만 원작의 내용을 묘사함에 있어서 차이점이 있었으며, 원작에서 상상되었던 분위기와 등장인물의 캐릭터 역시 연극에서는 다소 다르게 나왔다. 극에서는, 원작에서 상상되었던 배경과는 너무 달랐다. 솔직히 말해서는 초라하고 어설펐다. 건물이나 일의 가계, 또 숲과 광장은 관객의 입장에서 그저 의미만 지각할 수 있을 정도로 장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연기자들의 연기도 또한 깊지 못했는데, 중간 중간 끊어지는 대사와 행동, 딱딱한 형식의 말투, 그리고 원작을 그대로 배낀 대사며, 대체적으로 연기다운 연기를 해주었다. 말 그대로 우리가 연극을 보고 있구나 함을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고 해야겠다. 내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연극이나 드라마, 영화에서는 관객이 이것은 연극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닌 사실을 보고 있는 것처럼 관객을 속이도록 노력하는데 비해, 이 연극은 처음부터 끝까지 연극임을 절실하게 지각했던 것이다. 글쎄 이것이 연극을 기획한 감독과 연기자들의 능력부족일지, 그들의 의도된 연출일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예술적으로 별로 좋지 않은 의도였음은 확실한 것 같다. 극을 보면서 지루함을 많이 느꼈는데, 그것이 내용상의 큰 기복이 없어서라기보다는 이와 같은 극 자체의 연출방식이 어설펐고 지루한 방식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 아무래도 영화를 생각하고 있다가, 일반의 영역을 벗어난 극을 보니 이러한 상상의 차이가 발생한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사악한 이미지의 차하나시안, 고향에 돌아온 차하나시안을 보면서 내심 불안해하면서 반기는 모습을 보이는 알프레드 일, 그리고 이중적인 태도의 시민등 극에서의 캐릭터 연출은 대체로 원작과 일치하는 모습을 보였다. 시종일관 어둡고 칙칙했던 연극의 분위기도 캐릭터들의 이미지를 한층 더 살려주는 듯 했다. 또 비극적 결말에 대한 암시와, 부정의한 현실에 대한 반감을 담은 듯 했다. 그러나 그러한 연출에 보는 나로서는 답답함을 많이 느껴 불편했다.


3. 차하나시안은 정의를 원하고, 시민들도 정의를 원한다?
 과거에 알프레드 일은 법정에서 편법을 통해 차하나시안이 임신한 자식이 일의 자식이 아니라고 속였다. 그로인해 그녀는 다른 사람들의 비웃음을 뒤로한 채 고향을 떠나게 되었으며 창녀로 전락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녀는 일의 죽음만이 정의를 위한 것이라 말한다. 분명 일은 잘못을 했다. 하지만 법적으로도 소급되지 않을 만큼 오랜 기간이 흘렀으며 잘못을 인정했다. 죽음이 모든 것의 해결책은 아니다. 결론적으로, 정의를 원한다고 말하는 차하나시안은 역설적이게도 부정의했다. 그녀가 원하고자 했던 것은 정의가 아니고 복수였을 것이다. 
 시민들은 너무나 이중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들의 태도에 나는 화가 나면서도 소름끼치기조차 했다. 이는 너무나 현실적이면서도 속물적여서 비판받아 마땅했기 때문일 것이다. 또 돈에 대한 인간의 무력함을 절실히 보여주기도 한다. 아니 혹 될 수 있다. 어이없게 죽음을 택한 알프레드 일에게도 너무 화가이는 인간의 무력함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단지 비정상적이게도 타락한 인간일 뿐일지도 모른다. 나는 이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정의와 부정의가 복잡하게 얽히고 얽혀 정의를 만들기도 하고 부정의를 만들기도 하고, 이러한 복합적인 과정을 통해 모든 것은 ‘자기합리화’가  난다. 또 부정의를 정의로 둔갑시킨 군중들이며, 민주주의를 통한 부정의의 행사, 진정한 정의를 회복하고자 하는 사람의 부재, 그리고 너무나도 현실적이게도, 부정의에 패배해버리는 정의에 화가 났다. 원작과 연극을 통틀어 이 작품은 비극 그 자체다.
 
작품에 대한 평가 : 10점만점에 9.5점 (매우 적극 추천)
연국에 대한 평가 : 10점만점에 6점 (비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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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

저자
황석영 지음
출판사
창비 | 2001-06-30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방북과 해외체류, 5년간의 복역생활을 마치고 지난해『오래된 정원...
가격비교


황석영,『손님』

#목차
-소설 요약
-생각
 
 소설 「손님」은 작가 황석영이 출옥한 뒤 두 번째로 펴낸 책이라고 전해진다. 해방 후 그리고 전쟁 중 황해도 신천에서 발생한 양민학살이 그 주제이다.


1.작품의 전체적인 요약
 주인공은 류요섭과 그의 형 류요한이라고 해야 대체로 옳을 것 같다. 두 사람 다 기독교집안이다. 류요한과 류요섭은 미국에서 살고 있는 한국인이다. 고향은 황해도 신천샘골인데, 한국전쟁 이후 그곳으로 이민을 간 것이다. 미국에서 류요한은 장로가 되었고, 류요섭은 목사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류요섭은 북한방문기회를 갖게 된다. 그래서 이를 알리기 위해 형인 류요한을 찾아간다. 찾아가서 소식을 알리곤 기도를 한 뒤 헤어진다. 류요한은 평양을 방문하기 사흘 전 갑작스럽게 죽게 된다. 류요섭은 형의 유품으로 남은 수첩에서 박명선이라는 늙은 아줌마를 만난다. 그리고 요한은 화장된다. 화장되는 도중에 류요섭은 요한의 뼛조각 하나를 가져간다. 그래서 결론은 류요섭만이 북한방문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형 류요한이 죽은 이후로부터 류요섭에게는 이상한 일이 계속해서 일어난다. 바로 헛것이 보이는 것이다. 그것은 그림자이기도 하고 일명 귀신이기도 하다. 형 류요한의 형상을 한 귀신은 북한방문을 위해 가는 중국행 비행기 안에서 처음 만나게 된다. 그 외에 많은 귀신이 나타나는데, 그들은 모두 자신이 고향에서 살적에 함께 살았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다 함께 고향땅을 가고자 한다. 정말 하늘로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정리해야할 일이 있다는 듯이... 그들은 아마도 과거 이데올로기적 대립으로 인한 동족간의 학살에 대해 다시금 되돌아보며 성찰한 뒤, 정말로 사라져버리려는 것이었을 것이다. 이제 그들은 같이 북한방문을 하게 된다. 중국에 도착한 류요섭은 북한에 갈 때까지 계속해서 같은 처지의 교수와 동행하며 지내게 된다. 북한에 도착한 일행은 고려호텔에 묵게 된다. 류요섭은 그 교수와 함께 있는 것을 내심 불편해 하면서도 계속해서 같이한다. 류요섭은 그곳에서도 역시 귀신을 보게 된다. 그 중 중역을 하는 인물로 순남이라는 귀신이 등장한다. 순남이라는 귀신은 북한에 도착한 첫날밤, 북한당국의 파티장에서 처음 보게 된다. 거기서 류요섭은 순남이 귀신을 따라 밖으로 나간다. 나가서 서로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그러다가 류요섭을 찾아나선 북한 관리자에 의해 다시 숙소로 돌아오게 된다. 류요섭은 돌연 사라진 자신을 찾기위해 한참을 헤메고 다닌 관리자들에게 진심으로 미안함을 느낀다.


 북한에서 류요섭은 북한 당국의 후한 대접으로 고향땅의 이곳저곳을 방문한다. 돌아다니는 종종 귀신이 나타나 류요섭과 함께 이야기를 한다. 그는 북한에서 조카도 만나고, 삼촌도 만나고, 형수도 만나는 등 유례가 없는 후한 대접을 받게 된다. 그리고 역시나 귀신들도 늘 류요섭과 함께한다. 그들은 계속 나타나고 계속 이야기하며 계속해서 과거의 부끄러운 역사를 끄집어낸다. 다음날에는, 류요섭은 같이 동행하던 교수가 가족을 만나러 가는 것을 함께한다. 그 교수의 간곡히 부탁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류요섭도 혈족을 만날 기회를 가진다. 바로 앞에서 말했던 조카이다. 그 조카는 북한에서 협동농장지도원을 하고 있었다. 조카는 아버지를 미워하고 있었다. 과거 아버지의 행위 때문에 자신의 가족들은 힘들게 살아야했기 때문이다. 그 조카는 자신의 형 류요한의 아들로 이름은 류단열이다. 처음에 그들은 많이 어색함을 느끼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한 가족으로서 한 민족으로서 친척으로서의 동질감, 그리고 형 류요한의 죽음이라는 매체와, 분단의 상황, 민족상잔의 비극이라는 공통된 주제를 통해 차츰 마음의 문을 열게 된다. 그리고 같이 과거의 사실과 지금의 현실을 생각하며 슬퍼한다. 그날 요섭은 신천으로 간다. 가장 먼저 방문한 곳은 신천의 미제학살기념박물관이었다. 그는 해설원을 따라 관람을 하게 된다. 해설원과 기념관측은 주인공의 고향, 신천에서 일어난 비극적 사건들이 모두 미국이라는 나라에 의해 일어난 것이라고 설명하지만 사실 그것은 자기들끼리, 즉 한 마을사람들끼리 죽고죽이는 비극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엄청난 비극의 원인이 바로 형 류요한을 비롯한 자신들이 아닌 미국이라는 외세로 둔갑이 된 채 역사의 한 왜곡된 부분으로 남아있는 것이겠다. 파괴, 살인, 약탈.... 이 모두가 함께 저지른 만행인 것이다. 그날 밤 초대소에서 류요섭은 또 귀신을 만난다. 그 귀신의 정체는 류요한 형과 순남이 아저씨였다. 그들은 거기서 공평하게 이야기를 하고자한다. 그 뒤 류요섭은 형수의 집을 방문한다. 그러니까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자 하는 것이다. 이 소설의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정말로 중요한 요소를 차지한다. 그러니까 핵심이 되는 사실이 하나 둘씩 밝혀지는 시기다. 이러한 진실은 귀신의 입을 통해서 밝혀지는데, 작가는 왜 하필이면 귀신의 입을 동원했을까? 살아있는 증거를 감춘 채. 자신들의 만행이 외세의 만행으로 둔갑된 이치와 같은 것일까? 그들이 나눈 대화까지 줄거리로 담기는 힘들듯 하다. 간단한건 해방 후 노비였던 박일랑이라는 사람을 포함한 많은 동네 사람들이 공산당의 힘을 입어 득세를 하게 되고, 같은 마을 사람들을 모르는 사람이었던 것처럼 악하게 대한다는 것이다. 인민의 적이라는 이유로 체포하고 폭력을 행사하기까지 한다. 그리고 교회와 인민당과의 갈등. 그리고 친일파와 지주에 대한 복잡한 관계적 이야기도 한다. 이외에 여러 가지 사실이 알려진다.


 다음날 류요섭은 형수의 집으로 간다. 형수는 눈물을 흘리며 반갑게 맞이한다. 형수의 집에서 류요섭은 형의 제사를 지낸다. 그리고 형수는 류단열이 태어날 때 류단열을 감쌌던 류요한의 옷을 류요섭에게 주며 형을 묻을 때 함께 태워달라고 한다. 이는 류요섭이 가져왔던 형의 뼛조각을 의식한 말이다. 형수의 집을 떠나 류요섭은 이번에는 외삼촌의 집을 방문한다. 여기서부터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삼촌은 특이하게 당원이면서 공식적인 교인이다. 삼촌은 류요섭과 마찬가지로 얼마 전부터 귀신이 보인다고 말한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류요섭과 삼촌은 잠자리에 든다. 여기서 이야기는 다시 과거의 시점으로 돌아간다. 그리곤 다시 류요섭은 잠에서 깨어난다. 깨어났을 때는 모든 관련된 귀신들이 한자리에 모인다. 물론 잠자던 삼촌도 같이 불려나온다. 그날 밤 그들은 한자리에 모여 회포를 풀게 된다. 그들은 기독교집단에 의해 자행된 학살만행에 대해 자신들이 알고 있는 사실들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한다. 물론 그 대화속에는 류요섭과 삼촌이 포함된다. 등장한 귀신은 정확하진 않지만, 형 류요한과 순남이 아저씨와 다른 마을사람들의 헛것들... 그리고 정체를 모르는 귀신, 박일랑(이치로) 등이다. 여기서 또 시점은 과거로 돌아간다. 잠에서 깨어나 못다 본 이야기를 더해나가는 듯이.. 그렇게 긴 이야기는 시작되고 끝남과 동시에 그들은 사라진다.

 그 일이 있은 후 류요섭은 평양의 호텔으로 돌아가는 도중, 찬샘골에 잠깐 들른다. 그곳에서 류요섭은 어느 한적한 즈음에서 불을 피우고 형님의 옷을 불태운다. 그리고 땅을 파내 형의 뼛조각을 묻고 흙을 덮는다. 이제야 고향이 돌아온 것이다. 그렇게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2.책을 읽고 난 후 남는 생각.


 1. 먼저 형식적면을 생각해보았다. 형식적으로는 독자가 읽기에는 상당히 짜증났다. 아니 좋게 말해서는 어렵다 해야겠다. 그 근거로는 시점이 현재와 과거를 넘나든다는 것이다. 시점이 교차한다. 혹 이를 액자식 구성이라고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시점의 넘나들음 그 자체가 어려움이 된 것은 아니다. 귀신과의 대화, 귀신끼리의 대화를 하는 장면에서는 누가 말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구분이 때로는 헷갈렸음을 느꼈다. 이는 앞장의 내용을 잘 숙지한 후 읽어야 이해가 될 수 있는 형식으로 책을 읽어 내려가는데 불편했다. 작가는 소설의 형식적 틀을 황해도 '진지노귀굿' 열두 마당을 기본 얼개로 하여 썼다고 하는데 이에 대해 나는 눈에 띌만한 연관성을 찾을 수가 없었다. 단지 차례가 12개로 나뉘어져 있다는 것. 그리고 각 차례의 제목과 그 내용과의 연관성도 볼 수 없었다. 이는 아마 내가 ‘진지노귀굿’이라는 것에 대해 아는 것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2. 소설의 내용은 황해도 신천에서 벌어진 양민학살을 중심요소로 한다. 소설에서, 북한은 민족끼리 서로 죽이고 죽였던 역사를 숨긴 채, 그것을 미국군대의 소행으로 둔갑시킨다. 소설에서의 전반적인 대립구도는 아마 교회세력과 공산당세력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교회세력은 우익이고 공산당세력은 좌익이 되는 셈이다. 소설에서는 같은 마을사람들끼리 저지른 참극이 미국 군대의 일로 둔갑된다. 그저 소설적 픽션일 뿐이겠지만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우리'들이 저지른 일을 변형시켜 반미감정을 일으키는 모습을 보면서 쓸쓸함을 느꼈다. 아니, 이 부분에 대해서 나는 잘 모르겠다. 과연 이것이 픽션인지, 아니면 진짜 북한에서 그렇게 행해지고 있는 것인지. 주인공 류요섭은 왜 그곳에서 진실을 폭로하지 않았을까? 또 분명 류요섭도 그 역사의 산증인인데, 북한당국은 그 앞에서 왜 그런 연극을 보란듯이 했을까? 북한당국 사람들은 그런 사실을 모르고 그랬던 것일까? 그리고 변질된 기독교의 모습도 볼 수 있다. 소설에서의 기독교집단은 극단적으로 변질된 상태였다. 과연 무엇이 그들을 그토록 잔인한 사람으로 만들었던 것일까? 분명 무언가에 눈이 멀었을 것이다. 그 무언가를 찾아야 한다.

 나는 소설 속에서 이런 교인들의 변질됨을 보면서 헤겔이 언급한 사신(死神)철학이 떠올랐다. 어째서 신은 이러한 그들을 그저 방관하기만 했을까? 만약 모든 인류에게 해당하는 신이 존재했다면, 분명 이러한 비극을 수수방관하고 있지는 않았을 게다. 류요한에게 있어서도 신이란 존재는 그저 있어도 없어도 돼는 무관심한 존재였던것 같다. 최소한 미국으로 가기 전까지는 말이다. 비유하자면 인간과 동떨어져 사는 신이랄까? 아니면 게으른 신? 또는 그저 영원히 침묵하는 신? 이는 비단 소설 속에서만의 일은 분명 아닌 것 같다.


 3. 책 제목, 손님에 대한 의미 해석을 해보도록 했다.
 옛날에 손님이란 말은 옛날 사람들이 천연두를 두려워하며 천연두라는 말을 대신해서 불렀다고 한다. 작가는 이 소설에서 천연두 외의 여러 가지 손님을 데려온다. 그중 하나는 바로 기독교일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서양 이데올로기, 즉 외세인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외국인으로서 고향을 방문하게 되는 류요섭을 말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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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모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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