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정리/길게 쓴글(두번생각)'에 해당되는 글 22건

  1. 2013.11.22 밀, 공리주의
  2. 2013.11.22 이언적의 태극논쟁
  3. 2013.11.20 인권은 우선된다 하지만
  4. 2013.10.28 가치와 사용가치
  5. 2013.05.21 신 존재 비판
  6. 2013.05.21 인문학의 끝은 죽음뿐이다.
  7. 2013.05.01 귀납주의를 옹호한다.
  8. 2013.04.30 폭력의 국가, 그리고 법치주의와 책임정부
  9. 2013.04.29 오늘, 교육을 말하다
  10. 2013.04.29 그리스도교의 신앙고백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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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리주의

저자
존 스튜어트 밀 지음
출판사
책세상 | 2007-04-20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우리는 무엇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가. 프로타고라스와 ...
가격비교

윤리학-밀의 공리주의 2, 4장 참고하여 씀

 

 밀의 공리주의를 읽었을 때 솔직히 이게 무슨 말인가, 저자가 하고자 하는 요지는 무엇인가 하며 상당히 고생했다. 번역상의 문제인지 아니면 정말로 문장을 그렇게 쓴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문장이 억지스럽다고 느껴질만큼 긴 경우도 있고, 어렵게 나오기도 하며, 이 말이 여기서 왜 갑자기 나오는 것인가 생각하다 보면 단어 하나 하나만 보일 뿐 문장 자체나 글의 전체적인 흐름이 보이지 않았다. 우선 내 나름대로 요약을 해보도록 했다.  

 

  2장의 제목은 '공리주의란 무엇인가?'이다. 밀의 공리주의는 '쾌락' '행복'이라는 단어와 관련이 있다. 먼저 밀이 말하는 행복이란? 쾌락의 상태와 고통의 부재인 상태를 말하며, 불행이란? 쾌락이 상실된 상태와 고통이 존재하는 상태를 말한다. 그리고 밀에 따르면 옳음의 정도(level)는 행복을 증대시킴에 기여하는 정도에 비례하며, 옳지 못함의 정도(level)는 행복에 반대되는 것을 산출하는데 기여하는 정도에 비례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공리주의의 행복은 행위자 자신의 최대행복이 아니라 전체 행복의 최대량이 그 기준이라고 말한다. 이 최대행복의 원리에 따라 정리해보자면, 공리주의의 궁극적인 목적은 양과 질 모두를 고려했을 때 가능한 한 고통을 회피하고 쾌락을 충분히 향유하면서도 개인의 최대행복이 아닌 전체에 대한 최대행복을 추구하는 그런 쾌락이 그 목적이라 말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 행복을 정하는 쾌락에는 기준이 있다고 말한다. 만약에 기준이 있지 않다면 짐승이 느끼는 쾌락과 사람이 느끼는 쾌락이 같을 수 있고 그렇다면 인간에게 선이 될 수 있음직한 생활준칙은 짐승에게도 선이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인간은 짐승의 그런 욕정을 넘어 고도의 세련된 능력과 그것을 기준으로 한 쾌락 또는 생활준칙이 있다고 본다. 책에 따르면 에피쿠로스학파는 공리주의적 쾌락은 육체적 쾌락보다는 정신적 쾌락에 더 우월을 둔다고 한다.

 공리주의의 원리에서는 앞서 말한 것처럼 쾌락에는 그 기준이 있다고 하였는데, 이는 쾌락에도 여러 종류나 가치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밀의 공리주의에 따르면 공리주의는 어떤 쾌락은 다른 종류의 쾌락보다 훨씬 더 바람직하며 한층 더 가치가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고 말한다. 쾌락의 질적 차이를 말하는 것이다. 질적 차이를 정하는 기준은 어떤 사람에게 있는데, 그 사람은 두 개의 구분되는 또는 상반되는 쾌락 중에서 양쪽 모두를 경험한 사람이거나 아니면 거의 모두를 경험한 사람인 것이다. 그 사람이 어떤 도덕적 의무감이나 이해에 관계없이 그저 결연히 선택하는 쪽이 더 높은 가치의 쾌락이라는 것이다. 밀에 따르면, 양쪽 다 알고 있는 사람은 구태여 하등동물이나 바보천치가 되려 하지는 않을 것이기에 그렇다 설명하고 있다.

 만약에 인간이 높은 가치의 쾌락보다 낮은 쾌락을 선택하는 경우에는, 그런 경우가 종종 있기는 하지만, 그 경우에는 인간 자체가 모질지 못한 탓에 그것이 가치가 더 낮다는 것을 알면서도 보다 가까이 있기에 선택할수도 있고, 또는 어쩔 수 없게 된 경우(보다 높은 쾌락을 느낄 수 없게 되었을 경우 등)에 선택하는 수도 있다고 말한다.

 

 앞에서 말한 것을 다시 반복한다면, 두 개의 쾌락 중에서 어느 것이 가장 선호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또는 존재의 두 양식중에서 어느 쪽이 가장 쾌적한 느낌을 주는지의 문제에 관해, 그 도덕적 속성이나 결과는 별도로 치더라도, 양쪽 모두에 대해 식견을 지닌, 자격이 있는 사람들의 판단이 최종적인 것으로 인정되어야만 하며, 서로 다른 판단을 내릴 때는 다수의 판단이 최종적인 것으로 인정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4장은 '공리원리는 어떻게 증명되는가?'라는 제목으로 시작한다. 여기서 밀은 행복만이 목적으로서 바람직한 것이며, 행복만이 유일하게 바람직한 것이라고 말한다. 행복 이외에는 모두 행복으로 향하는 어떤 수단으로서 바람직할 뿐이라고 말한다. 동시에 그는 '그렇다면 무엇이 바람직한 것이냐?', '공리주의가 말이 되려면 가져야 할 그 근거는 무엇인가?' 라고 반문을 한다. 이 질문이 바로 "행복만이 목적으로서 바람직한 것이라고 말하는 그 '공리주의'에서 말하는 그 '행복'은 어떤 기준이며 어떻게 증명되는가?"에 대한 답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일반적인 행복이 왜 바람직한 것인가에 대한 근거가 자기 자신이 행복을 바란다는 사실 그 자체 외에는 없다고 말한다. 이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사실만으로는 부족한데, 밀이 말하길 행복이 행위의 유일한 판단 기준이고 행복 이외에 다른 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한다고 한다. 그런데 책에서는 갑자기 덕에 관련하여 계속 말을 하는데, 나는 이 덕에 대한 매우 길고 장황한 이야기들과 그 공리주의가 충족시켜야만 하는 그 필수조건(행복만을 바란다는 것을 증명하는것)간에 어떤 연결고리가 있는 것인지 정확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나는 그 '''행복'의 수단으로써 말한 것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결론을 말하면, 덕과 관련된 그 장황한 고찰결과 밀은 실제로 소망되는 것이 행복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결과가 나온다고 한다. 그 이외의 것은 수단일 뿐이다. 그 행복 이외의 소망되는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행복으로 향하는 것으로서 소망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행복이 수단이 되는 '금전'은 반짝이는 금속무더기 그 이상 바람직한 것이 아니며, 그 돈으로 살 수 있는 가치 이상의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본인은 사실 '공리주의'를 읽기 전에는 그저 막연하게 공리주의는 다른 도덕적 기준들에 비해 나름 괜찮은 'ㅇㅇ주의'다 라고만 받아들이고 있었다. 내가 알고 있던 공리주의에는 쾌락이라는 단어가 없었으며 단순히 "최대다수에게 '지속가능' '이익' '행복'을 줄 수 있는 행동이 ''이다"라고 말이다. 어떤 산술적인 도덕이었다. 예를 들자면, 제동기가 고장난 전차가 빠른 속도로 질주하고 있는데 멀리서 5명의 인부가 일을 하고 있으며 그 옆 비상철로로 방향을 돌릴 수 있는 상황이 있다고 하자[1]. 하지만 비상철로에는 인부 1명이 일을 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대로 질주를 하면 -5, 비상철로로 방향을 돌리면 -1, 그러니까 가치적으로 보자면 비상철로로 방향을 돌리는 것이 최대다수에게 지속가능한 이익과 행복을 준다고 본 것이다. 만약에 전 세계 인구가 100명이라고 가정하고, 그 열차사고로 95명이 남는 것과 99명이 남는 상황을 생각해본다면 당연히 99명이 살아있을 수 있는 세계를 택할 것 같다. 그것이 훨씬 그 사회에 전자보다 더 최대다수에게 지속가능한 이익과 행복을 줄 수 있다고 느껴졌다. 하지만 만약에 그 죽은 1명이 99명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50명이 죽을 일어날 전쟁'을 막을 수 있는 위인이었다고 하더라도(, 그들 5명보다 그 1명이 더 그 사회의 최대다수에게 지속가능한 이익과 행복을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고 하더라도) 그 행동에 대한 결과는 앞에서 배운 이중결과 원리에 따라 정당화될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나는 이것이 나는 공리주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공리주의는 그렇게 단순한 공리주의가 아니었으며 이번 계기를 통해 내가 찾고자 하는 도덕적 기준은 어떤 것인가 다시 한번 생각해본 계기가 되었다.



[1] 마이클샌델, 이창신 옮김, 정의란 무엇인가, 김영사, p.36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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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모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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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언적의 태극문변

 조선중기의 학자 정구가 이언적 주돈이 주희 등의 태극에 대한 학설을 모아 그 이론을 정리한 책.

 이 논변의 주요 부분은, 주돈이가 태극도설에서 말한 무극이태극을 육구소 육구연 형제가 유가의 정통이 아니고 노자의 학설에서 따온 것이라고 반박한데서 비롯된다. 육구소 육구연 형제는 이 글이 태극도설과는 부합되지 않음을 지적해 이것이 주돈이의 설이 아닌 타인의 설임을 강조하면서 주희가 주석한 내용을 포함시켜 공격하였다.

 조한보와 손숙돈이 육구소·육구연 형제와 견해가 비슷한 것에 대한 이언적의 해명이 돋보인다. 이 책의 간행으로 태극설의 체재가 주돈이주희이언적으로 이어져 이 학설이 정통임이 밝혀지고, 반면에 육구소·육구연 형제와 손숙돈·조한보의 학설은 이단으로 폄억(貶抑)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2. 이언적과 조한보와의 논쟁의 간략한 소개

 무극 태극 논쟁

 1517(중종 12) 영남지방의 선배학자인 손숙돈(孫叔暾[3])과 조한보(曺漢輔) 사이에서 성리학의 기본쟁점인 무극태극(無極太極)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다. 그는 약관의 나이에 이 논쟁에 뛰어들어 자신의 견해를 밝혔는데, 주희의 주리론적 견해를 바탕으로 두 학자의 견해를 모두 비판하여 자신의 학문적 견해를 밝혔다.

 이언적은 이 논쟁에서 이기론(理氣論)의 주리론적 견해로서 이가 기보다 우선적이라는 이선  기후설(理先氣後說)과 이기불상잡설(理氣不相雜說)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이기 논쟁에서의 이의 우위를 주장한 이우위설(理優位說)의 견해는 이황(李滉)에게로 계승되어 영남학파의 성리설에 선구가 된다. 이 일로 그는 일약 젊은 성리학자로서 명성을 쌓게 되었다. 이후 조광조 등이 그를 요직으로 천거하려 하였으나 사양하고 학문 연구와 독서에 치중하였다.

'무극태극논변無極太極論辯'에 관한 논쟁은 조선 성리학 철학사에 첫머리를 장식하는 논쟁이라 할 수 있다. 이 논쟁은 후일 이황과 기대승의 '사단칠정논쟁', 이이와 성혼의 '사단칠정논쟁', '인심도심논쟁'의 신호탄이 되었다.

 그는 호를 회재(晦齋)라 하여 주자의 뜻을 계승하고 그대로 따를 것을 결심한다. 그러나 주자의 입장을 그대로만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주자의 견해나 사서육경의 내용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하지는 않고 자신의 입장에서 독창적으로 해석을 가하기도 하였다.

 *시대적 배경 : 훈구와 사림의 대립 - 4대사화

               무너져내리는 국가제도 왕권약화

 

3. 인물들의 기본사상소개

-이언적과 조한보의 논쟁은 주륙논쟁의 연장선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논쟁을 통해 조선성리학의 터전을 굳게 다짐

이언적

조한보

주희견해 바탕

유학자였지만 노장철학이나 불교에 가까운 모습

태극은 초월적이기도 하지만 구체적 현실에 떠날 수 없음. 즉 도덕법칙(태극)은 보편적이기도 하지만 사람들의 행동 하나하나에 떠나서 있는것이 아님

만물의 본질 태극에는 일상을 넘는 초월적 무언가가 있음

 즉 도덕법칙인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에 사람의 구체적 행동 하나하나를 넘어서서 어딘가 초월적인 곳에 있음

진리를 꺠닫기 위해선느 내적 수련과 더불어 구체적 실천의 결과의 옳고 그름을 따져 바로잡아가는 외적 수양이 필요하다

자기 내면의 경건성에 바탕을 둔 수양을 통해서만 진리를 깨달을 수 있음.

 

4. 논쟁발생의 시대적 의의

 이언적은 조선조 유학, 곧 성리학의 정립에 선구적인 인물로서 유학의 방향과 성격을 밝히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그것은 주희(朱熹)의 주리론적 입장을 정통으로 확립하는 것이 그의 신념이기도 했다. 또한 사서육경과 그 중에서도 《대학》과 《중용》의 정신을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에 우선적으로 있다고 보았다.

 그는 조선시대 성리학의 정립에 선구적인 인물로서 성리학의 방향과 성격을 밝히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주희(朱熹)의 주리론적 입장을 정통으로 확립하여 이황(李滉)에게 전해주었다. 그에 의하면 이와 기는 서로 분리된 것으로 이가 기보다 우위에 있으며 이로써 기를 통제하고 다스려야 된다고 보았다. 당시는 정치적으로 기득권인 훈구파와 비교적 덜 부패했던 사림파가 있었으며 훈구파에 의해 사림파가 억압받는 입장에 서 있었다. 독창적인 이기론과 사회에 비판적이었던 것, 실천을 중요시한 점 등은 그대로 이황과 남인과 일부 북인 학파에게 전달되었다.

 

5. 태극논쟁의 그 구체적 내용

태극논쟁은 무극태극(無極太極)논쟁이라고도 한다. 구체적으로 성리학의 주요 개념 가운데 하나인 태극이 무엇이며 어떻게 체득할 것인가,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 실천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이언적과 조한보의 논쟁.

 

5-1. 태극논쟁의 근원인 주륙논쟁.

성리학은 중국의 주돈이, 장재, 소옹, 정호, 정이라는 사람을 거쳐 주희라는 사람에 의해 집대성되었는데, 주희는 이 과정에서 여러 사람과 논쟁을 벌였다고 한다. 그 가운데 육구연이라는 사람과의 논쟁이 있다. 이 주희와 육구연의 논쟁을 주륙논쟁이라고 한다. 여러 차례 논쟁이 있었는데 그 중 우리가 볼 것은 태극도설(太極圖說)’에 대한 이해를 중심으로 한 논쟁이다. 이 논쟁의 주제는 크게 네 가지다. 첫째, 태극도설이 주돈이가 지은것인지를 따지는 문제. 둘째, 무극이태극에서 무극이라는 표현의 필요성 여부 문제, 셋째, 극의 개념문제, 넷째, 태극도설의 연원문제 이다.

 

 

육구연

주희

1. 주돈이의 자작여부

의심 ㅇ

의심 X

2. 무극의 필요성

필요 X

필요 ㅇ

3. 극의 개념 문제

=

극 ≠ 중

4. 태극도설의 연원

노자의 학에서 비롯

노자의 학 반박

 

 

5-2. 이언적과 조한보

    1) 논쟁의 계기

    논쟁은 1517년부터 시작하여 그 다음 해까지 이어졌다. 당시 이언적 나이 27, 조한보는 50이 넘은 상태였다. 이언적의 글에 따르면 먼저 이언적의 외삼촌 손숙돈과 조한보 사이에 논쟁이 있었다. 이언적은 이 논쟁의 내용을(조한보가 손숙돈에게 보낸 망재의 무극태극에 대한 주자에 답한다라는 편지) 친구 사우당을 통해 읽게 되고, 이언적은 여기에 망재와 망기당의 무극과 태극에 대한 주장 뒤에 붙여 쓴다라는 비평을 남겼는데 그 글이 뜻하지 않게 조한보에게 전해지고 이비편에 대한 견해를 조한보가 먼저 편지를 통해 보내 오면서 논쟁이 시작됬다. 둘은 모두 4회에 걸쳐 편지를 주고받으며 논쟁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조한보의 문집이 불타 자료가 없다.

 

  2).조한보에 대한 이언적의 비평문

          조한보

     2-1. 태극은 바로 무극이다. 그러므로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의 무극은 무()이며 내적인 것이고 태극은 유()이며 외적인 것으로 나눌 수 없다.

     2-2 무극이태극은 큰 근본이자 통달한 도로서 나눌 수 없는 한 덩어리이기 때문에, 그 근본만 깨달으면 모든 사물의 이치를 다 갖추게 된다.

     2-3 무극태허(無極太虛)의 본체를 내 마음의 중심으로 삼으면 만물이 모두 내게 조아리게 되어 어떤 일이든 막힘이 없게 된다

     2-4 무극허태의 본체는 본래 적멸(寂滅)이다.

         이언적

   2-1 주돈이가 무극이태극이라고 한 것은 사물이 생겨나기 이전의 형체 없는 존재이면서 또한 실제모든 사물의 뿌리가 됨을 형용한 것

   2-2 이 이치는 비록 지극히 높고 묘한 것 같지만 그 참모습이 깃든 곳에서 찾는다면 지극히 가까운 실상속에 있다. 그 근본은 둘로 나눌 수 없지만 체용(體用), 동정(動靜), 선후(先後), 본말(本末)을 구별하지 않을 수 없다. 조한보처럼 구분없이 본다면 눈금 없는 저울이나 자와 같아질 뿐이다. 조한보의 견해가 이처럼 잘못된 까닭은 합쳐 보려고만 하고 나누어보기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2-3 그 견해는 바다를 건너려고 하면서 다리가 없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행각이며 하늘에 오르려고 하면서도 사다리가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견해이다.

   2-4 옜 선비들이 태극의 본체를 말할 때 적이감이라고 했다.

 

3). 이 같은 이언적의 비평을 본 조한보가 이언적에게 편지를 보내옴으로써 논쟁이 시작된다.(1)

             조한보

3-1. 무극이태극을 유무로 이해할 때 무라고 정의하더라도 없는 것이 아니어서 마음속에 신령스러운 근원으로 존재하는 것, 유라고 정의하더라도 정말 있는 것이 아니어서 마침내 점점 줄어들어 없어지게 된다

3-2. 모든 사물의 이치는 다 같다.

3-3. 감정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기 이전의 본 마음을 경으로 바로잡아 본체를 체득하고, 무극의 참세상에서 마음을 노닐게 하며 빈듯하면서도 신령스러운 본체를 내 마음의 주체로 삼는다. 따라서 존심양성을 통한 형이상학적 공부만이 필요할 뿐이다.

            이언적

3-1. 이 같은 견해는 노자가 무에서 나와 유로 들어간다고 한 것이나 부처가 말한 공과 같다. 기의 변화를 가지고 말한다면 그렇게 말할 수 있겟지만, 이 이치는 지극히 높고 지극히 묘하면서 우리 주변의 구체적인 것들 속에 원리로써 들어있다.

3-2 모든 사물의 이치가 같다는 견해는 아주 훌륭한 것같지만 옳지 못하다. 예를 들어 말 소 닭 개를 보면 그 각각의 본성이 다르기 때문에 맡은 일이 달라지는 것이다

3-3. 이러한 조한보의 견해는 무극태극을 마음 밖에 있는ㄴ 것으로 보고 그 사이에서 노닌 뒤에 주체로 삼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에 옳지 못하다. 하늘의 이치가 사람이 하는 일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 아니다. 해서 형이하학적인 것을 토대로 하여 형이상학적인 것으로 가는 하학이상달공부가 마땅하다.

 

4). 위의 것에 이어 이언적의 두번째 답장에 따른 논쟁 (2)

 두번째 답장에 따르면 조한보는 이언적의 견해를 받아들임으로써, “무극에서 마음을 노닐게 한다는 표현을 뺌. 더하여 본체는 적멸이라고 했던데서도 멸자를 뺀 답서를 보낸것으로 짐작. 그러나 조한보가 자신의 주장을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다.

               조한보

  4-1. 빈 듯하면서도 신령스러운 무극의 본체를 말한다면 허무가 바로 적멸이며 적멸이 바로 허무이다.

  4-2 경을 주로 삼아 마음을 보존하여 위로 천리에 이른다.

             이언적

  4-1 이것은 유가의 말을 빌려 이단의 학설을 말하는 것이다. 노장이나 불교의 허는 빈듯하면서 정말 아무것도 없는 것이지만 유가의 허는 빈듯하면서 있는 것이다. 노장이나 불교의 적은 고요하면서 마침내 없어지는 것이지만 유가의 적은 고요한듯 하면서 감음하는 것이다.

  4-2. 하학공부 없이 바로 상달천리한다는 주장은 불교의 깨달음에 관한 이론과 같다. (생략) 사람의 일이란 형이하학적인 것이지만 그 속에 들어있는 이치가 천리이기 때문에 그 일을 배워 그 속에 담긴 이치에 통하게 된다. 때문에 이치를 궁구한다는 것은 앎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몸으로 체득하여 실천하는 일이 중요하다.

 

5). 두번째 편지에 이은 세번째 논쟁 (3)

 두번째 편지에서 언급된 앎과 실천의 문제는 세 번째 논쟁을 통해 완전히 수양의 문제로 발전한다. 이언적의 세번째 편지에 나타난 조한보의 주장

        조한보

5-1. 경으로 내면을 곧게 하여 내 안에 들어있는 하늘의 밝은 명을 돌아보면 내 마음이 굳게 안정되어 움직이지 않게 된다.

5-2 내가 적멸이라고 한 까닭은 사람들이 헛된 환형을 참된 현실로 알고 있기 때문에 이런 잘못된 생각을 깨뜨리기 위해 쓴 것이다.

  5-3 하학을 통해 상달하는 일은 어린 아이들이나 하는것이요 호걸 같은 선비는 그렇지 아니하다

       이언적

  5-1. 그 말은 마음을 보존하고 본성을 기르는 공부를 말하는데, 이러한 공부는 아직 마음이 밖의 사물에 대해 움직이지 않았을 때의 공부로는 좋지만 그렇다고 하학공부를 소홀히 하면 직접 몸으로 체험하고 되돌아 살피는 실천이 부족하게 되어 일생생활이 인욕에 빠질 수 있다. (생략) 문을 나서지 않고 천리길을 가려는 것이며 발을 옮기지 않고 태산에 오르려 하는것과 같다.

  5-2 형체를 떠나 이치가 있는 것이 아니며 형기를 떠나 도가 있는 것이 아니다. 하람의 형체는 하늘이 준 것이며 그 속에 지극한 이치가 깃들어있다.

  5-3 공자도 노담에게 예를 물었으며 태묘에 들어갔을 때에는 모든 일을 물었다. 공자 같은 성인도 이렇게 하였는데 하물며 공자보다 못한 사람들엑 있어서랴!

 

 이 논쟁의 끝에 이언적은 조한보의 견해가 불교의 돈오와 같으므로 잘못을 깨닫고 유가의 설로 돌아오라고 한다.

 

6). 마지막 논쟁 (4)

 이언적의 편지에 따르면, 마지막 논쟁에서 조한보는 이언적의 견해를 받아들여 적멸이란 표현을 빼고 상달천리 아래 하학인사를 덧붙였다. 그러나 여전히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한다.

         조한보

 7-6-1 나와 모든 것은 같다.

 7-6-2 경을 주로 삼아 마음을 보존하는 공부를 해야한다

 7-6-3 공부 순서는 본체를 먼저 확립한 뒤에 하학인사해야한다.

       이언적

 7-6-1 이러한 논리는 그물의 윗줄만 보고 그 아래 펼쳐져 있는 그물의 눈들ㅇ르 따지지 않은 것이며, 피부를 빼놓고 뼈만 가리켜 사람이라고 하는것과 같다. 만물은 같은 이치에서 나오지만 이것과 저것, 취할 것과 버릴것, 좋은 것과 나쁜 것 옳은 것과 그른것의 구별이 없을 수 없다.

 7-6-2 경을 주로 삼아 내면을 한결같이 하고 이를 바탕으로 밖을 제어하는 것이며, 밖을 가지런히 해서 다시 내면을 기르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안팎에 모두 이루어지게 되니 어느 한 쪽의 공부도 그만둘 수 없다.

 7-6-3 하학인사경우에도 언제나 경으로 일관하는 것이다. 만일 조한보의 말대로 본체를 확립한 뒤에도 더 노력할 것이 있다면 이는 아직 본체를 확립한 경지에 이르지 못한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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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는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조한보는 만물의 본질인 태극이 자질구레한 일상생활을 넘어서서 초월적인 무언하에 들어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언적은 태극이 초월적인 것이기는 하되 우리가 살고 있는 구체적인 현실을 더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도덕법칙에 대한 것 : 조한보는 도덕법칙이란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에 사람의 구체적 행동 하나하나를 넘어서서 어딘가 초월적인 곳에 있다고 생각, 이언적은 비록 도덕법칙이 보편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사람들의 행동 하나하나를 떠나서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진리를 얻을 수 있는가: 조한보는 자기 내면의 경건성에 바탕을 둔 수양을 통해서만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 이언적은 경건성에 바탕을 둔 내적 수양과 더불어 구체적 실천의결과가 옳은지 그른지를 따져 잘못을 바로잡아 가는 외적 수양을 통해 깨닫는 것.

 

6.논쟁의 의의

6-1 철학적, 계승적 의의 : 이언적의 태극문변은 이황과 이이의 논쟁에 디딤대 역할을 하였다. 특히 리()를 강조한 이언적의 사상은 이황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이언적은 주희를 비롯한 중국 성리학자들의 사상을 이어받았지만 이에 그치지 않고 한국적으로 계승하였는데, 그것이 이 논쟁에서 잘 드러나 있다. 특히 주목할 만 한 점은, 조선 초기에 고려의 재배 이념이었던 불교와 노장의 사상을 성리학과 분리함으로서 성리학의 주자학적 기초를 단단히 하는 배경을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또한 자연에 대한 이해뿐 아니라 이를 인간에게 접목한 실천, 수양적 문제의 한국화를 이끌었다. 논쟁으로 알 수 있는 이언적의 사상은 만물에 앞서는 단순한 법칙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세계에서의 원리임을 강조하였는데 도덕적 실천이 자신 내부의 깨우침으로서 가능하기에 마땅히 이를 발현하여 바람직한 사회를 구현해야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인간의 구체적 행동 근거를 진리에 둠으로서 진리에 창조적 능동적 도덕성을 부여하였는데 이는 이후 중에 우선으로 하여 인간의 실천을 강조한 이황 사상에 기여하였다.)

 

6-2 사회적 의의 : 이언적의 활동 시기는 4대 사화 (무오, 갑자, 기묘, 을사사화)의 시기에 속하는데, 이 시기는 권력을 휘두르던 훈구파 기성 관료와 사림파 신진 관료 사이의 대립이 극에 달하던 시기였다. 각 사화 때마다 많은 양심적 도덕을 주장하던 사림파 학자들이 죽임을 당했는데 이언적 역시 을사사화 때 유배를 당하여 그곳에서 돌아오지 못하였다. 이런 시기에 이언적의 진리는 삶속에 있으며 이를 따르고 실현하기 위해 인간다움을 행하는 것이라는 주장은 훈구파를 향한 일침이었다. 또한 인간 본성이 바로 도덕 원리로서 본성의 발현을 통해 올바른 사회를 만들고자 했던 주장은 사림파의 정당성을 밝히는 것이자 최고 지위자인 임금의 품성을 바로잡아 국가의 도덕성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후에 도덕 실현의 수혜자인 백성을 근본으로 삼아야한다는 주장의 밑바탕이 된다.

 

7. 이언적 사상의 문제점

 

이언적의 사상과 도덕 국가를 위한 주장이 지닌 문제점은, 그 사상이 너무 관념적이어서 현실적인 적용이 어려웠다는 것이다. 당시에 점점 더 커지는 사회 문제를 바로 잡기에는 부적합했다. 예를 들어 한정된 토지를 다루는 토지제도를 개선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이언적의 사상 같은 관념적, 이상적 대안이 아니었다. 또 다른 문제로는 인간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단적으로 중시하는 이언적의 사상은 변화보다는 체득을 하여 개인이 변화하는 것을 강조하기 때문에 가치적 측면을 개인으로 돌릴 수 있는 것이다. 즉 사회의 문제가 사회의 요인이 아닌 부족한 인간의 요인으로만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관료의 부당한 녹봉은 사회적 문제의 결과가 아닌 그 관료의 수양 부족으로 인한 결과가 되어버릴 수도 있다. 또한 사회가 흔들리지 않도록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왕권을 강화하는 것이 결부될 수 있기 때문에 사회 변혁의 의의를 지닌 이언적의 사상은 오용되어 봉건 전제 국가에서 왕권을 지키는 사상이 될 수도 있다.

 

Cf)논의해 볼만한 점

 

1) 단군 신화와 최치원의 사상을 보자면 한국적 조화에 대한 주장이 들어있다. 그렇다면 이 태극문변과 사상적, 사회적 의의를 보자면 한국적인 조화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2) 태극도설의 이론적인 부분으로는 분리되어있지만 현실적으로는 하나인 에서 어느 한쪽에 대한 강조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결국 이 둘은 하나이기에, 정말 한국적인 실천 강조라면 이론적으로 구분하여 강조할 필요 또한 없지 않은가?

 

3) 이언적 사상의 문제점에서 나왔듯이(<이언적의 사상은 오용되어 봉건 전제 국가에서 왕권을 지키는 사상이 될 수도 있다.>), 이러한 성리학의 이기론은 결국 보수적인 구조로서 진보의 가능성을 과소 하는 것 아닌가. 조선 내의 성리학이 결국 극 보수적 성향을 띄는 것은 사상적 운명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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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은 우선된다. 국가보다 우선한다. 하지만 범죄자의 인권은 그렇지 않다.


남의 인권은 무시하면서(해하면서) 자기의 인권은 챙기려는 사람들 ≡ 범죄자. 


(혹은 자신의 인권따위는 생각없이 일단 저지르고 보는 범죄도 있다.)

그리고 그 범죄자를 포함한 채 "인권"을 보호하려는 인권단체도 있다. 


따라서 범죄자 ≒(대략) 인권단체. 


범죄자의 인권을 제해야 범죄자 ≠ 인권단체. 


그래서 지금 인권단체가 부분적으로 비판받고 있고. 

그 부분적인 것에서 인권단체는 손을 떼야 한다. 

--


인권은 범죄자라고 가리는게 아닌게 아니라 맞다. 분명 우리는 일반의 인권과 범죄자의 인권을 구분해야한다.


범죄자는 '범죄를 저지름'과 '인권'을 맞 교환했다고 여겨 마땅하다.  반대로 범죄로 이득을 얻고 또 동시에 인권조차 얻고자 한다면 필자 역시 범죄자가 되리라.

---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만약 빵을 훔쳤다면 기본적으로 훔친 빵 하나에 해당하는 가치만큼을 그로부터 빼앗고, 그 .죄에 대한 죄값을 추가로 받는식으로... 죄값 이상의 고통을 받게 해야 한다. 


예를들어.. 음.. 빵절도의 결과로 -10의 손실이 발생했다면 그 범죄자로부터 +10을 수거해야 마땅하다. 극단적으로 손목자르는 것으로 +10을 회수할 수 있다면 손목이라도 잘라야 하겠다. 


이 수거 자체는 범죄에 대한 처벌에 해당되는게 아니다. 처벌이 아니므로 이 수거행위와는 별도로 그 범죄행위 자체에 대한 처벌도 당연히 있어야 하겠다..


 범죄행위에 대한 결과로 마이너스요인이 생겼다면 비록 범죄자의 인권이 파괴될지언정 그것은 반드시 범죄자 자체로부터 회수되어야 마땅하다고 봅니다. 그것을 나는 수거라고 표현한 것이다. 


이를테면 살인을 함으로써 얻는 만족감 또는 해소감을 다시 회수해야 한다. 이것은 원래의 상태로의 회귀의 이미를 지니는 것이니 결코 처벌이 될 수 없겠다. 이를테면 살인의 대가로 살인자의 가족을 처형시킨다거나, 감당할 수 없는 노동형, 지속가능한 고통형벌등이 있겠다.


 그리고 이와는 별개로, 회수 다음의 절차로 처벌을 해야 한다. 장기적출, 강제노동형벌 등 회수와는 별개로 범죄자 당사자의 소모적 처벌이 따라야 한다.


--


사실 인권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만약 범죄에 대한 처벌의 대가로 그 인권이라는게 파괴된다고 해도 무엇이 문제가 될런지 전혀 감이 안잡힌다.


 정리하자면, 법을 집행하는 주체는 국가고, 범죄는 '국가'에 반하는것이고, 국가는 범죄를 처단하고 그 손실을 메꿀 의무가 있다. 

 법의 집행을 통해 인권이 침해된다고 하여도 국가가 범죄자인권보타는 우선한다. 그런데 위에 써있는 인권이 국가에 우선한다고 했을때, 그 인권이 법을 준수하는 국민들의 인권이라면 당연히 우선해야 한다.


 다시 말해, 인권이 뭔지는 모르지만 만약 법의 집행과정에서 뭔지 모를 그 인권이라는 것이 훼손된다고 해도 그 범죄자의 인권은 문제삼지 말자, 다만 범죄자가 아닌 자의 인권이 훼손되는 것만은 막자 이런 것이다. 인권을(뭔지 잘 모르지만) 우선하는것 자체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그 인권 때문에 법의 집행이 방해된다면 그것은 수단에 의해 善의 목적이 막혀버린 꼴이다. 


--

법이란 무엇인가?

법은.... 국가의 구성원들인 국민들이 만든 규칙, 도덕, 합의, 기준...같은 것이다. 

법이란 것은 '법을 지키고자하는 사람' 또는 '법을 지키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있는 것이다. (법을 지키는 수고로 그들을 보호해주기 위해-금전적이든 생명적이든 감정적이든) 인권은 그런 의미에서 '人'과 그 '人'들의 '權'이다. 범죄를 저지르는 순간 그사람은 '법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 또는 '법을 지키는 사람'이 아닌것이죠. 울타리 밖으로 벗어나 법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의 권리를 공격하고자 하는 적이 되버린다.


 그런 흐름에서 만약 법이 집행되는 과정에서 인권이 침해받는다면 그것은 그 법을 행사하는 국가의 구성원중, 그 집행자의 문제이지 법(처벌)자체 또는 집행 자체가 문제시 되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 중 집행에서 발생하는 인권침해, 그 중 범죄자의 인권침해는 문제시될 필요 없다.

 따라서 우리는 인권침해를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데 첫째가 정당하지 못한 인권침해이며, 둘쨰가 정당한 인권침해라고 조심스럽게 말해보겠다.


 보론으로, 필자는 세계인권선언이나 대한민국 헌법권리 의무조항 등은 잘 모른다. 하지만 실제 우리가 보편적으로 말하는 '인권'이라는것이 내가 말하는 그런게 아니더라도, 나는 그런게 인권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를들면 인권과 법집행의 관계에 관한 가장 최상의 바람직한 형상이라고 할까?

  그 울타리밖의 사람들(범죄자)의 인권조차 생각한다면 우리는 야훼나 다름없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비현실적이다. 현실은 그렇지 못하고 감정적으로도 인간이라는 생명체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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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의 이중성은 1.’사용가치가치로 구분한다. 사용가치는 소비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상품의 유용성을 의미한다. 상품의 물리적 성격이다. 또는 상품의 질적 정의이다. ‘가치는 교환가능성, 즉 시장에서 교환될 수 있는 상품의 능력을 의미한다. 상품의 사회적 성격이다. 또는 상품의 양적 정의라고 한다. 그런데 상품의 이중성은 노동의 이중성을 표현하는 것의 하나이다. 노동은 구체노동과 추상노동으로 구분하는데,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것은 노동의 구체적 측면이며 가치를 생산하는 것은 노동의 추상적 측면이다. 또 구체노동은 노동의 질을 의미하고 추상노동은 노동의 양을 의미한다. 여기서 추상적 노동은 구체적 노동이 가치관계를 통해서 추상화된 결과일 뿐이다. 구체적 노동만이 유일한 현실적 노동이다.

 다시 정리하자면 -사용가치-소비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상품의 유용성, 상품의 물리적 성격, 상품의 질적 정의. 이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것이 노동의 구체적 측면이다. 다시 말해 상품의 사용가치의 배후에는 노동의 구체성(노동의 질)이 있다.

그리고 가치-교환가능성, 시장에서 교환도리 수 있는 상품의 능력, 상품의 사회적 성격, 상품의 양적 정의이며, 이 가치를 생산하는 것 노동의 추상적 측면이다. 다시 말해 상품의 가치 배후에는 노동의 추상성(노동의 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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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서론

 사람들은 살면서 많은 의문을 갖는다. 하지만 그 중에는 인간으로서 답을 알아내기 힘든 것도 있다. 나 또한 그러한 문제에 대해 고민을 해왔다. 그것은 과학적인 문제일수도 있고 종교적인 문제일 수도 있다. 그중에 나는 여기서 '신이란 정말로 존재할까?', '신에 대한 믿음은 가치가 있는 것일까?', 의심하면서 신과 종교에 대한 생각을 해보고자 한다.[각주:1]


필자는 수년동안 교회를 다녔으며 세례까지 받은 사람이지만 그러한 행동이 진심된 신앙심에 의한 것은 아니었으며 어찌 보면 타의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항상 의문을 가졌다. 도대체 감각될 수 없는 존재를 어떻게 믿고 따르라는 말인가? 인간이 만든 언어로 써진, 성경이라는 종이짝을 무슨 근거로 진리라고 말하는 것일까? 인간은 꼭 절대적이고 맹목적인 종교적 믿음과, 신이라는 것을 통해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 것일까?[각주:2]


이제는 스스로 이러한 물음들에 대해 결론을 내렸다. 신이란 인간이 만들었으며,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개념일 뿐,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으며, 종교적인 믿음과 그와 관련된 행위들은 시간낭비에 지나지 않는 쓸모없음이라고 말이다.[각주:3]


 자, 그럼 이제부터 인간이 만들어낸 허상의 신에 대한 논의를 해보겠다. 이 논의들은 앞에서 나온 여러 물음의 답이 될 만한, 또는 참고가 될 만한 것들을 찾아보고 생각해보는 식으로 진행이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본론에서 1차적으로 신에 대한 생각을 쓸 것이며, 그 다음으로 종교적 믿음에 대해, 그 다음으로 종교의 본질에 대해 탐구하는 것으로 마칠 것이다. 여기서 나는, 부득이하게도 기독교를 바탕으로 이야기하게 될 것이며 나의 사상과 일치하는 수많은 글들을 참고문헌으로서 인용할 것임을 밝히는 바이다.

 

2.본론

2.1

 많은 현대인들은 신이 존재한다는 어떠한 증거도 찾아볼 수 없기에 신을 믿는 것은 적당치 못하다고 생각한다.[각주:4] 이러한 판단은 합리적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신이란 존재는 모든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감각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 누군가가 신을 인식할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은 보편적이지도 않으며, 많은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 예를 들면 신을 찬양하는데 쓰일 '시간', 그리고 의심이 없어야 하기에 이상하게만 느껴지는 '신앙심' 이 그것이다. 누구는 인간은 모든 피조물과 질적으로 다른 초월적인 절대자 하나님을 인식할 수 없다고 말을 하는데[각주:5], 눈과 귀가 먼 채, 맹목적으로 신을 추구하고 따르는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 아닌 이상 그다지 신빙성이 있게 들리지 않는다. 단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지 못한 나머지 종교인들이 둘러대는 허울 좋은 핑계거리로만 들릴 뿐이다.


 여기서 일단 신의 존재 유무에 대한 견해를 밝히자면, 아직까지는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편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사람은 그저 죽으면 그만인 존재일 뿐이다. 사람이 죽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으며 남는 것은 단지 산 사람들의 기억된 생각에 불과한 것이다. 죽은 사람의 것으로 남은 것은 없으며, 그래서 죽으면 완전한 로 돌아간다. 산 사람들의 기억에 남은 죽은 사람에 대한 기억은, 현실에서는 실체화 되어 나타날 수 없는 산 사람의 기억 그 자체이지 그것이 죽은 사람의 존재함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각주:6] 때문에 종교에서 말하는 천국, 지옥 또는 내세따위는 없는 것이며 결국 신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또 신의 존재 증명에 대한 물음으로써 신을 보았느냐는 질문을 하고 싶다. 세상에 존재한다고 말하려면 머릿속의 개념, '지성' 상으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실체가 있어야 하는데 신은 그렇지 않다. 이른바 "의미는 있지만 지시체는 없는 것"[각주:7]이다. 확실한 물리적 증거 없이 신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마치 옥스퍼드 영어사전을 꺼내 '' 이란 단어를 보여주며 '신은 존재한다' 말하는 것과 똑같은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각주:8]. 이러한 주장에 대해 누군가는 없는 신을 찬양하는 종교인들은 모두 비정상인이냐는 식으로 모순됨을 이야기하며 반문할지도 모른다[각주:9]. 하지만 이것은 물음의 본 의도를 파악치 못한 것이다[각주:10].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제를 통해, 존재하지 않는 신을 찬양한다고 해서 종교인들이 비정상인이라는 주장은 도출될 수 없다. 물론 존재하지 않는 신을 찬양한다고 해서 그들이 비정상인이 되는 것도 부당하다. 그러면 반대로, 무신론자들은 비정상인이 되고 유신론자들은 정상인이 되느냐는 반문도 가능하다.[각주:11] 혹은 공기, , 정신, 애국심, 전파 등은 볼 수 없는데도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경험적으로 증명 가능한 사실이지만 신의 경우에는 다르기 때문에 비교 자체가 부당한 것이다. 또 달리 생각해보자. 유신론자도 있고 무신론자도 있다. 유신론자에 의해 신이 있는것이 된다고 말할 수 도 있겠지만, 무신론자에 의해 신은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


 이와같이 결론짓기 힘든 논증을 떠나서 결론지어 이야기해보자. 만일 신이 존재한다면,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신은 전 인류에게 실재적으로 증명 가능한 방식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야 하지 않을까? 또는 '진리가 되는 그 신'을 믿는 모든 신자들에게는 항상 행복이 충만하고 유토피아가 찾아와야 하는것 아닐까? 하지만 지금의 신은 그런 능력을 보이지 않고 있으므로 '그보다 위대한 것은 생각될 수 없는[각주:12]' 그런 절대적인 신은 완전한 존재가 아니며, 그러므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 그러면 만약 구원을 받기 이전에, 신이 우선적으로 '의심없이의 신앙심'을 요구로 한다면 그것 역시 신의 불완전함을 말하는 것 같다. 완전하지 않은 신은 신이 아니며 그것은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근거가 되니까 말이다.


 만일 신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은 이 시대 사람들에겐 그저 머나먼 신, 침묵 중에 있는 신, 더 이상 행위하지 않는 신, 이전의 신이 아닌 사전상의 '(god)'일 따름이다[각주:13]. 이제 지금에 있어서의 신이라는 존재는 더 이상 이 세계의 절대자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저 있어도 없어도 되는 무관심한 존재일 뿐이다. 행여 신이 실제로 어떤 존재론적 실재라면, 그 신은 인간의 세계와는 동떨어져 있는 존재, 게으른 신인 것이다. 현실적으로 신 존재는 아주 멀리 떨어져 그의 하늘 세계에 머무르거나 그저 침묵중에 있다[각주:14]. 이런 신을 두고 헤겔은 1802년 이미 사신철학(死神)을 언급한 적이 있으며, 하이네와 니체도 그 뒤를 따라 움직였다고 한다[각주:15]. 결국 회개니 은총이니 구원이니 하는 것들은 실증적으로 규명되지 않은 허구적인 가르침에 불과한 것이다. 프로이트는 종교적 요인을 심장부전증과 신경질적 강박관념의 생산이라고도 고발하였다.[각주:16] 이와 같이 세계 내의 신의 현존 문제는 지나간 시대에 가졌던 것보다 훨씬 근원적이며 궁극적인 답변을 요청할 만큼 그렇게 우리에게 제시되고 있다는 것이다[각주:17]. 지금이 그러한 질문을 던져야 할 시대인 것이다.

 

2.2)믿음

믿음에 대한 이야기는 앞의 신에 대한 이야기에서도 종종 나왔지만 이 부분에서 조금 더 생각해보기로 했다. 믿음은 일단 참이라고 전제된다. 또 종교를 받아들이는 것은 시나 축구를 즐기는 것에 가깝다. 그것은 일련의 관습에 젖어드느냐 마느냐의 문제다. 관습은 감성적인 혹은 사회적인 특성만을 갖는다. 종교 의식은 심리적이고 사회적으로 요긴한 목적에 봉사할 뿐이다.[각주:18] 하지만 나는 그러한 믿음이 신에 대한 '진지한 믿음', '진지한 신앙심'으로 발전되어서는 안 되고 신에 대한 믿음은 무언가를 믿고자 하는 인간의 심리학적 관점에서만 설명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에 대한 '진지한 신앙심'은 아래의 결과만을 초래할 뿐이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각자가 직접 부딪히고 경험하는 것, 즉 정당, 집단, 교회, 계급등이 모여 이 세계를 구성한다. 이들은 자기가 속한 집단의 권위에 대한 믿음이 어찌나 단단한지, 다른 시대나 국가, 다른 집단이나 교외, 계급, 그리고 정당 등이 자기 집단과 정반대로 생각해왔고 심지어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더라도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 이들은 자신이 속한 집단이 그릇된 생각을 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바르게 이끌 책임을 져야한다고 생각한다. 귀속감을 느끼게 되는 집단이 하찮은 사건으로 인해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이를테면 런던에서 어떤 사람을 교회에 나가도록 하는 이유가 베이징에서는 불교나 유교 신자가 되게 하는 이유가 될 수도 있다) 에도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다. 과거가 현재에 의해 부정되듯이 현재는 미래에 의해 번복될 것이다. 그래서 현재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생각들 가운데 상당수가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는 폐기될 것이 거의 확실하다」[각주:19]

 

 이는 비단 종교적인 믿음에서의 문제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 정치, 문화적인 부분에까지 좋지 않은 영향을 초래하게 된다. 이를테면 자문화 중심주의가 만연한다든지, 광신도의 양성라든지, 또는 집단 이기주의라든지 말이다. 이러한 결과로 기독교에서는 배타주의적이 되어 자신이 믿는 하나님만이 절대 진리라 외치며, 유일신 사상을 무비판적으로 추종하게 되었고, 타 종교와 사상을 인정치 않는 일종의 선교와 전도, 복음을 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는 나름대로의 이해관계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고 본다.


 누군가 무신론은 바로 무신론자에 대한 신앙이라고 말하며 이러한 의미에서 무신론은 근본적으로 변화된 변신론이라고 말한다[각주:20]. 과연 신을 부정하면서도 근본적으로 신을 믿고 있다는 것이 타당한 것인가? 하지만 이는 옳지 못한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사전상의 신앙의 의미는 신이나 초자연적인 절대자를 믿고 받드는 일을 말한다. 하지만 무신론은 신이나 초자연적인 절대자 자체를 부정한다. 그것은 종교의 진리성을 철저히 부정하는 것이며, 종교적 가치 대상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각주:21]. 그리고 이러한 믿음은 신에 대한 믿음, 즉 신앙과는 구별되는 신념이다. 여기서 무신론에 대해 좀 더 알아보고자 한다. 무신론에는 실천적 무신론과 이론적 무신론이 있는데, 실천적 무신론은 그 자신 내에 신의 부정을 내포하고 있는 인간의 실천적 태도를 의미한다[각주:22]. 신에 대해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마치 신이 존재하지 않는 듯이 살아가는 사람을 말한다. 이론적 무신론은 신적인 것의 철저한 부정을 의미하며, 유일한 현실로서 우주, 정확히 말해서 자연만을 인정하는 것이다[각주:23]. 이런 의미에서 보면 필자는 이론적 무신론에 가깝다고 하겠다.


, 이제 신앙에 대한 결론을 짓고자 한다. 앞서 여러 번 말했지만 종교에 있어서는 신앙심을 요구하기 이전에 (언제 어디서 누가 왜 썼는지도 모를, 혹은 소설일지도 모르는 정체불명의 성경에서의 이솝우화가 아닌) 지금 현재, 현재의 생애속에서 절대적으로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근거 내지 구원의 모습을 보여야 하는것이 순서가 아닌가 싶다. 예를 들어 평범한 사람 'A'가 길을 지나가다가 전혀 모르는 사람 'B'가 제안을 해왔다고 가정해보자. 100만원을 자신에게 한달간 맡아두고 의심없는 믿음을 보여준다면 한달 뒤 1억을 만들어 주겠다고 말이다. 그러면 정말로 의심없이 맹목적으로 믿어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이러한 극단적인 예가 신을 믿고 따르는 신앙심의 상황과는 다소 거리감이 있겠지만, 종교에서는 우선적으로 그러한 맹목적인 믿음을 요구로 하는 것같다. 그러한 것이 신이라면 신은 결코 완전한 존재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제는 신에 대한 신앙과 존재의 믿음은, 신의 존재를 떠나서 일상의 다양한 행위들 중의 하나일 뿐이거나, 삶의 불확실함으로 인한 인간의 하찮은 현상일 뿐이라 말하고 싶다.

 

2.3종교의 본질

종교의 본질에 대하여의 저자 루트비히 포이어바흐는 아래와 같은 말을 했다.

 

신학은 인간학이다. 다시 말하면 신이라 불리는 종교의 대상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인간의 본질에 불과하다. 또는 인간의 신은 인간을 신격화시킨 본질에 불과하며 그러므로 종교의 역사 또는 신의 역사는 인간의 역사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종교가 다양한 만큼 신도 다양하고 종교가 다양한 만큼 인간도 다양하기 때문이다.[각주:24]

 

이 말은 종교의 본질을 설명하는 하나의 바탕이 될 수 있는 말이다. 신이라는 존재는 신의 존재, 신의 역사는 곧 인간의 존재, 인간의 역사에 불과하다는 말로서, 종교는 본질적으로 을 내포하고 있지 않다는 뜻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아래의 인용문을 보자.


인간은 이 세상에 존재하기 시작한 이래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자연에서 살아 남기 위해 늘 자신의 안전과 복지를 염려해왔다. 그래서 인간은 생존을 위해 그리고 더 나은 삶을 위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삶의 환경을 통제하고 예측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인간 생명의 한계성이나 우연성, 제한된 지적, 신체적 능력으로 인해 한계가 분명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한계적인 생존적 상황을 극복하거나 그것에 순응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게 되었으며 바로 그 방법이 오늘날 우리가 종교라고 부르는 것이다. 인간은 생명의 우연성과 생존수단이 되는 지식의 한계로 인해 만족할 만큼 미래를 예측하고 준비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깨달음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연결되며 이는 곧 삶에 긴장과 불안을 가져오는 요인이 된다. 따라서 인간은 불확실한 미래로 인해 발생하는 불안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인간 존재의 유한성과 우연성에서 오는 불안감과 그것에서 벗어나려는 인간 소유욕이 빚어내는 긴장 가운데서 인간은 종교에 의지하게 된다. 이때 인간이 추구하는 종교는 일차적으로 장수나 건강, , 명예, 권력 등과 같은 인간의 생물학적인 생존과 관련된 현세적 복락을 추구하는 현세 기복적인 성격을 갖는다.[각주:25]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다. 그래서 인간은 종교와 신을 창조해 낸 것이고 그것이 신의 역사-, 인간의 역사가 된 것이다. 그렇다. 조금 더 사실적으로 말해서, 이것이 종교의 본질이자 종교가 존재하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완벽한 존재라면 인간의 의식속에 있는 ''은 결코 필요로 하지 않았을 것이다. 완벽한 인간이 ''을 필요로 한다면 오히려 그것이 더 이상하지 않을까?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 신을 믿는것이 불합리한 것이라고 말되어질수 없으며, 나 또한 그런 존재하지 않는 신을 믿고, 종교를 만드는 것은 한계적인 인간으로서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말하고 싶다.

 

3.결론

지금까지의 과정에 의하면, 신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칼로 자르는듯한 증명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신이 존재한다는 논증도 많이 있었다. 필자의 수준으로는 저술하기에 역부족이 아니었나 싶다. 그렇지만 필자는 신의 무존재함이 아직까지는 옳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둘 다 증명되지 못한 상태에서는 어느쪽을 선택하는 것이 더 현명한 선택일까? 아직까지 신의 존재가 밝혀지지 않은 이상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일듯 하다. 신을 믿는 것은 신의 존재가 완전하게 증명 되었을 때 믿어도 늦지 않다는 말이다.

진리로 향하는 절대적 신에 대한 종교적 믿음에 대한 의의는 신과 종교 그 자체에서 찾아서는 안되며 역사와 정치, 사회 문화적인 맥락의 전반적인 측면에서, ‘인간의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진 종교, 그리고 신이라는 본질과 함께 탐구해야 할것이다. 어느 누구도 종교가 인간사회에 끼치는 '필요한 영향력'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의 존재에 대해서는 의심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하다는 것이다. 신의 존재를 믿는 유신론적 신념은 물리적 세계에 관한 신념과 달리 그것을 심각하게 의심할 이유가 있다. 유신론적인 신념은 모든 인류에게 공통된 보편적인 신념이라 볼 수 없기 때문이다.[각주:26]

  1. 이처럼 나는 신과 종교에 대한 성찰이라는 다소 애매하기도 한 주제를 가지고 시작하기로 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앞에서 말했듯이 이러한 문제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해왔으며 나 나름대로의 결론 또한 내린 상태이다. 결론적으로는 이러한 논의에 관심이 많다는 이야기다. [본문으로]
  2. 이러한 질문들은 기독교인들과는 진지하게 제기할 수 없었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철학자가 최종적이며 근본적인 물음을 제시하는 한, 그리스도인에게는 철학자로서 진지하게 일하기 위한 심리적 성향이 결핍되어 있다는데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신앙 때문에 그러한 물음들을 진지하게 제기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김현태, 『철학과 신의 존재』서울: 철학과 현실사, 2003, 50쪽을 참고했다.) [본문으로]
  3. 나는 여기서 모두가 아닌 소수의 경험으로 존재가 인정 되는 것이 아닌, 세상의 모든 사람이 경험할 수 있으며 보고 느낄 수 있어야만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고 전제함으로써 논의의 범위를 고정시키고자 한다. [본문으로]
  4. 이태하, 『종교적 믿음에 대한 몇 가지 철학적 반성』, 서울: 책세상, 2001. 참고 [본문으로]
  5. 한신대학교 신학부 편, 『그리스도교와 문화』, 2007, 4장 105쪽 [본문으로]
  6. 김상렬, 『신의 존재 증명』, 서울: 한누리미디어, 1996, 198쪽. [본문으로]
  7. 사이먼 블랙번, 『생각』, 고현범 옮김, 고양시: 이소출판사, 2003, 237쪽. [본문으로]
  8. 같은 책, 235쪽. [본문으로]
  9. 김상렬, 위의 책, 197쪽. [본문으로]
  10. 이 존재하지 않을 지언정, 종교인들은 신이 있다고 생각하고, 무신론자는 신이 없다고 생각하며 종교인, 유신론자, 그리고 조상숭배와 같은 것은 모두 자기 나름대로의 가치를 행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본문으로]
  11. 이 말은 결국, 신의 존재유무를 믿고 안 믿고가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것은 될 수 없다는 의미이다. [본문으로]
  12. 사이먼 블랙번, 앞의 책, 239쪽 [본문으로]
  13. 김현태, 앞의 책, 17쪽 [본문으로]
  14. 같은 책, 24쪽 [본문으로]
  15. 같은 책, 17쪽 [본문으로]
  16. 같은 책, 22쪽 [본문으로]
  17. 같은 책, 24쪽 [본문으로]
  18. 사이먼 블랙번, 앞의 책, 232쪽 [본문으로]
  19.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 서병훈 옮김, 서울: 책세상, 2005, 참고 [본문으로]
  20. 김현태, 앞의 책, 209쪽. 이것은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내벹는 "신"이라는 단어를 두고 말하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영어에서는 "Oh, my god!") 하지만 나는 이것을 일종의 '무의식적인 비아냥거림' 이라고 정의하겠다. [본문으로]
  21. J.헤센, 『종교 철학의 체계적 이해』, 허재윤 옮김, 서울: 서광사, 1995, 335쪽 [본문으로]
  22. 같은 책, 336쪽. [본문으로]
  23. 같은 책, 336쪽. [본문으로]
  24. 루트비히 포이어바흐, 『종교의 본질에 대하여』,강대석 옮김, 파주시: 한길사, 2006, 63쪽 [본문으로]
  25. 이태하, 앞의 책, 18쪽 [본문으로]
  26. 이태하, 앞의 책, 50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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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의 끝은 죽음뿐이다.>

 

 완성된 결말은 아니지만, 스스로 인문학공부를 하며 느낀 결말이며, 나의 교육관은 본 결말로부터 나왔다. 자녀교육관 역시 이에 따른다. 인문학은 죽었다. 더이상 어떤 생산도 해낼 수 없다. 따라서 미래는 자연과학, 기술에 달려있다. 중요한 점은 학문성장과 그 학문적 업적의 축적이다. 인문학이 아직 가치가 있다는 말은 마치 현대 자본주의의 무한 성장성을 인정하는 말과 다를 바 없다. 인문학의 발전과 가치에는 한계가 있다. x축에 시간을 두고, y축에 생산성향 두자면 그 그래프는 누운 C자형 그래프를 따른다. 생산성향은 곧 가치다. 초기 인문학은 많은 성과를 냈다. 하지만 현대에 와서는 그 성과는 무뎌지고 오히려 파괴적 형태, 무질서적 형태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과거의 업적의 반복과 또 반복, 비꼬기, 비판, 따라하기만 있을 뿐이다. 더이상의 생산물은 없다. 반면 자연과학과 과학기술은 우리 우주의 크기만큼이나 무궁하다. 생산물의 결과도 지속적이다. 자연과학의 생산물도 무한하지는 않다. 어느 정도의 한계점이 있다. 하지만 인문학과는 다르게 다시 추락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x축에 시간을 두고, y축에 생산성향, 즉 가치를 둔다면, 자연과학의 그래프는 J형 그래프가 된다. 자연과학 역시 시간이 지날수록 생산물은 떨어지지만 1생산물당 가치는 점점 커진다. 휴대전화를 생각하면 된다. 자연과학은 1생산량당 할당능력, 또는 집적도가 더 높아지기 때문이다.

 

 특정 시각에서 보자면 인문학은 의미를 찾는 학문이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나는 의미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인식'이 있어야 한다. 인식이란, 사전적 정의로 '사물을 분별하고 판단하여 앎', 또는 '인지' 이다. 하지만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었다. 사람은 인문학의 영역에서 이런 사전적 인식의 영역에서 벗어나 조금 더 높이 도약하고자 했다. 이 현상은 혼란과 질서파괴, 무질서의 인정을 가져왔다. 인문학의 결과 데카르트, 칸트와 같은 해괴한 희대의 망상꾼들이 나타나기도 했다. 인문학의 재료는 그저 사람들의 앞에 던져져 있는 것일 뿐, 그 재료를 칼로 자르든 현미경으로 관찰을 하든, 불로 태워보든, 그 재료에게 입힌 생각과 행위의 결과는, 사실 더이상 쪼개거나 확대하여 관찰할 수 없는, 또다른 행위와 행위결과만 남아있을 뿐이다. "1+1=2"라는 재료와, "내 눈 앞에서 비가 내리고 있다"는 현상으로 보이는 재료앞에서, '+'는 좌우항을 더한다는 약속의 표시, '='는 결과를 나타내는 약속의 표시, '2''1''1'이 더해져 나온 결과, 내 앞에 비가 내리는 것은 공기중의 수중기가 모여 구름이 되고 이것이 무거워지면 비가되어 떨어지는 '자연현상', 과 같이 분해하거나 확대하여도 남은것은 현상뿐이 없고 의미란 없는 것이다. 더이상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단 말인가. 뇌 속에 '의미'란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결론으로 돌아와, 나는 자녀를 교육함에 있어서, 먼저 수학, 과학, 기술공학이 미래라고 생각하며 인문학은 충분하며 이제 결론만 내면 되리라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본인은 유아기때부터 기술, 도구, 자연과학에 친숙한 환경을 조성하여 흥미를 유도할 것이다. 부모 스스로가 이에 익숙해지고 준 전문가가 되거나, 부모의 모습에 흥미를 가지도록 본보기로서 공부하고 학업할 것이다. 나 스스로도 답이 없는 학문, 인문학을 공부하기에 자녀에게 그 답답함을 경험하게 하고싶지가 않다. 지식과 진리는 오차없이 완전한 것이어야 한다. 최소한 그런 결론을 지향해야 한다. 국어, 사회, 문학, 음악, 예술 등의 것은 적당히만 하면 된다. 물론 그 적당히의 기준도 논의거리이기는 하지만 지금은 논외로 한다. 하여 철저히 기계적이고 수학적 연산과 논리적 사고를 할 수 있는 자연과학적 인간을 만드는것이 그 목적이다. 최종적인 이상향의 인간상은 공리주의성 인간이다. 하나 보론으로 첨부하자면 기존의 공리주의적 이론에 '지속가능한'이라는 말을 덧붙이고싶다. 수학이 자연과학에 있어서의 진리라면 공리주의는 인문학과 인간상에 있 어서의 진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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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납주의를 옹호한다. 2013년 4월 씀.

 

 

 과학은 관찰로부터 시작한다. 정상적|온전한 감각기관을 가진 관찰자는 아무 것에도 사로잡히지 않고 그가 듣거나 보거나 한 것을 기록해야 한다. 그것이 관찰언명(=..단칭언명)이다. 특정한 장소|시간 의 한 사건의 언급에 해당한다. 특정 관찰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리고 이런 단칭언명들이 모여서 보편언명이 된다. 보편언명은 모든 장소|시간 에서의 특정한 사건에 대한 언명이 된다. 이 보편언명이 과학적 지식이 되는 것이다.

 

 이 일반화의 기초가 되는 관찰언명은 1.수적으로 많아야하고 2. 다양한 조건 아래서도 반복가능해야 하고 3, 어떤 관찰도 도출된 보편언명(법칙)과 모순되면 안된다. 이러한 흐름들이 추론, 바로 귀납적 추론이라는 것이다.


 현대의 연역적 추론에서 전제가 있다면 그 전제들은 관찰에 의해서 증명(확증)될 수 있으며, 하여 귀납주의에 있어서 진리의 군원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귀납적 원리는 정당한가라는 문제제기가 있다. 그것을 나열하자면

 1. 귀납적 추론에는 논리적 결함이 있다는 점

 2. 확률로서의 귀납주의의 부당성이 있다는 점.

 3. 관찰의 문제점 을 지적한다. 1번의 귀납적 추론의 논리적 문제점을 세분화하자면 귀납추리의 전제가 참이라 하더라도 결론이 필욘적으로 참일 수는 없다는 순환논증의 오류다.

 

 그 구체적인 사례는

  1-1. 관찰량의 애매모호함, 다시말해 얼마나 많아야 충분한 관찰량이라 할 수 있겠는가하는 점,

  1-2. 다양한 상황의 무한함이 있다.  2번의 확률론의 문제점을 조금 더 구체화하자면 확률적으로도 분모는 무한대가 되기 때문에 확률적으로 0이 된다는 주장이다.

 

 3번 관찰의 문제점을 조금 더 세분화하자면,

   3-1 관찰의 진정 순수한가하는 문제, 즉 관찰자의 경험은 관찰자가 가진 경험, 배경지식, 기대등의 영향을 받는다는 점이다

   3-2는 관찰의 이론의존성이다.


 하지만 이러한 위의 비판들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귀납적 추론을 향한 비판에 대한 나의 비판은,

  첫째, 귀납적 추론은 논리적으로 타당한 논증이 아닌 것은 맞다. 하지만 어떤 ‘사실’이나 ‘지식’은 논리에 호소할 성질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둘째, 관찰량에 있어서 “충분히 많은’이라 함은 1) 납득가능한 정도 또는 2) 명확,확실한 정도라고 생각한다.  단 한번의 관찰로도 명백하고도 또 무한히 충분한 경우가 현실세계에는 맹명백백 분명히 있으며, 또한 수차례~ 수백 차례의 관찰끝에 확증되는 경우도 현실에 분명 존재한다. 어느 것은 단 한번에, 어느 것은 수백 번에 확증된다고 그 자체를 문제삼지는 말자. 바보같은 짓이니.

 셋째, 확률에서 분모를 무한대로 규정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본다. 나는 무한대가 아닌 유한대로 놓아야 한다고 본다. 예를 들어 9999/& 이 아닌 9999/9999인 것이다. 왜냐하면 분모는 논리적으로 관찰해야 할 총 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결론을 낼 당시에 최종적으로 관찰한 개수를 집어넣어야 하기 떄문이다. 확률은 본것/본것이라고 생각한다. 9999개를 관찰했기 때문이며,  만약 9998/9999가 된다면 그 이론은 파기될 가능성이 있거나 확률론으로 떨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넷째, 비판 자체의 관대함이다. 다시 말해 왜 그 비판의 사례들의 헛점에는 엄격한 잣대를 대지 않는가 하는 점이다. 예를 들어보자면 만약 귀납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처럼 따라해 비판해보자면 비록 어떤 관찰이 99.9% 관찰자의 배경지식에 영향을 받더라도 0.1%의 그렇지 않은 순수한 관찰이 있기에, 그 비판은 나에게 꼬투리잡혀 부당한 것이 된다. 결론적으로 99.9%의 0.1%, 또는 99%의 1%에 문제제기하기 위해서는 그 반대가 되는 사례는 100%여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귀납주의자 역시 귀납주의 비판자들과 같은 방식으로 그 반대근거의 0.1% 내지 1%의 사례를 문제삼으며 비판근거의 정당성을 무너뜨릴 수 있다. 이러한 점 때문에 비판자들은 ‘비판하고자 비판자들 스스로 한발 물러’나게 된다. 예를 들자면 관찰의 물리적 성격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 모든 관찰자가 동일한 대상을 본다는 표현이 전전 의미없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점 등이 그것이다.

 

 종합적으로 귀납주의에 대한 비판을 나는 오류를 바탕으로 한 비판이라고 평가하고싶다. 굳이 단어화한다면, ‘논리학의 논리적 음모론적 오류’ 또는 ‘논리학의 논리적 꼬투리잡기의 필연적 오류’ , 또는 ‘과학적 검증에 있어서 철학적|인식론적 방법을 적용한 오류’라고 말하고싶다. 어쨌든, 결론적으로 나는 귀납주의에 대한 완전한 반박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며, 이에 따라 나는 최선이 없으므로 차선으로서의 귀납주의를 수용, 옹호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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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란 무엇인가: 국가의 본질에 대한 역사적 고찰

저자
카야노 도시히토 지음
출판사
산눈 | 2010-06-25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국가는 어떻게 형성되고 변화해 왔는가? 우리에게 국가란 원래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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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질서의 기원

저자
프랜시스 후쿠야마 지음
출판사
웅진지식하우스. | 2012-08-20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우리 시대 최고 지성의 가장 주요한 성과물." - "뉴욕타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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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시히또의 말에 따르자면 국가의 정당성, 다시말해 국가 존립의 정당성을 유지시켜주는 근인은 폭력에 있다고 한다. 전적으로 동의하는것은 아니지만 어느정도 일리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후쿠야마는 강한 국가 또는 강한 사회로 나아가게 되는 근인을 법치주의, 책임정부, 그리고 그런 제도 이전의 종교나 관습등의 내구성(혹은 회복탄력성)과 연관하여 이해햐고자 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폭력의 국가, 그리고 법치주의와 책임정부라는 요소는 함께 동행가능하며, 더하여 폭력과 그 두 요소의 요구에 대한 시너지효과도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폭력위의 국가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아야 한다. 폭력이라 함은 혼자 또는 하나, 소수의 합의만으로는 국가라는 거대한 목적을 달성할 수 없는 것이다. 말하자면, 아무리 강한 폭력이라고 하더라도 하나의(only one) 폭력은 마치 큰 저수지로 작은 조약돌 하나 떨어져 잠시동안 파동치는것 이상의 의미나 결과를 낼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폭력은 폭력자의 반대자, 즉 피폭력자들의 합의가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혹은 폭력자들간의 합의가 있어야 한다. 사실 폭력을 조직하는 그 구성원들도 개개로 분리해보자면 그 폭력에 동찬한 사람들이거나 암묵적으로 동의한 사람들이다. 쉽게말해 그들이 국민이다.

 

 나는 이윤추구가 되거나, 혹은 외부의 어떠한 위협으로부터의 생존이 되거나, 기타 여러가지 폭력이 구성될 수밖에 없게끔 만든, 그러한 폭력의 정당성의 근인이 되는 그것들을 국가의 핵심 또는 코어라고 부르고싶다. 만약 그 핵심에 반ㄷ하거나 흠집내는 또 다른 폭력체가 나타난다면 그것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적'이 된다. 폭력의 조직 내에서는 그 폭력의 정당성은 절대 훼손되거나 수정되면 안될 것이다.

 

 다시 돌아와, 그런 합의 속에서 나는 법치주의나 책임정부라는 요소와 요구가 함꼐할 수 었다고 본다. 폭력조직이 거대해지고 넓은 공감대가 형성되면 비로소 폭력위에 국축된 국가라는것이 생겨나는데, 생겨남과 동시에 국가는 조직의 내구력을 위한 제도가 필요해지게 된다. 그 제도라 함은, 예를 들자면 국가의 목적실현과 그 공헌도나 이익에 따른 결과물의 분배, 분배하는 과정에서의 명확한 기준설정, 목적실현의 지연이나 실패에 따른 책임 분배, 그리고 그 책임분배의 기준설정 등이 그것이다. 국가급 조직이 됨에 따라 그런 제도는 이전의 조직과는 다른 방식으로 선택되어야 하는데, 그러한 선택방법의 하나가 민주주의다.

 

 그런데 보론으로, 만약 폭력조직원 개개의 성향이 분열적이거나 폭력의 정당성을 만들어주는 동인의 인과관계가 강력하지 못하다면 국가의 모습은, 약한국가-강한 사회가 되는 것이다. 그 이면에는 지리적 이유, 역사적 이유, 환경, 인구 등 다양한 요인이 있을 수 있다.

 

 다시 돌아와, 다른 측면에서 폭력의국가와 법치주의, 책임정부의 공존성을 생각해보자면, 폭력적 국가는 법치주의나 책임정부라는 이상적 국가로 나아가기 위해 가장 빠르고 강력하며 확실한 수단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비유하자면 '아주 현명한 제 3자'나 '쏠로몬왕'과 같은 역할이 있겠다. 폭력적 국가를 형성하기 이전의 조직이나 , 그런 폭력의 정당성이 난무한흔 상황속에서(상황을 비유하자면 중국의 전국시대), 한 조직내에서의 폭력의 실질적이고 물리적인 행동을 책임지고 행동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실질적으로 가지고 있든 제도적으로 가지고 있든) 사람이 그가 가지고 있는 폭력의 권한을 강력하고도 또 적절한 동기로 실행에 옮겨 확고하지 못하거나 약한 동기의 정당성이 난무하는 상황을 정리하고 우매한 개개인들을 강력한 자신의 폭력으로 자신의 조직안에 편입시킨다면, 비록 우매한 피폭력자들은 항상 불안해하거나 또는 불만족스러울 지언정, 폭력적 국가는 법치주의나 책임정부의 역할을 (폭력을 매개로 하여) 유의미하게 완수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과 부분적으로 합치될만한 예를 찾아보자면, 중국의 경우나 싱가폴의 사례정도가 있겠다.

 

 각기 사례들에 대한 자세한 분석은 추후에 하도록 하며 이만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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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교육을 말하다                                  

 서로주체성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김상봉 교수가 제시하는 인류문명과 현재 교육환경의 폐해에 대한 대안으로서의 새로운 개념이다. 그가 바라보는 기존의 패러다임은(자유주의) 지배계급이 자신들에게 유리하게끔 만든 제도, 무한경쟁의 시대, 내가 자유롭기 위해서는 너를 밟고 올라가야만 하는 시스템, 진정한 만남이 상실된 자기실현으로 표현된다. 여기서 이 사상의 핵심은 '참된 만남을 통한 자유'. 우리가 바라보는 모든 사회현상과 교육의 문제점들, 특히 교육에 있어서 그것이 '만남의 사건'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는데 있다고 그는 말한다.

 

 기존의 자유는 스스로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어디에도 예속되지 않는 자유이나, 그것에 너와 나와의 만남은 빠져있으며 '다른 사람은 필요 없다, 돈만 있으면 된다.' 또는 '그런 목적을 위한' 만남이 주류이다. 그런 자유를 바탕으로 한 자기실현은(''가 되어가는 과정) 그가 말하는 인간의 궁극적 욕망인 '참된 만남', '사랑'에 이를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인간 삶에서 ''가 되는 과정에는 ''가 맞물려 있고 또 생명, 자연 전체와의 만남과 뗄 수 없이 결합되어 있으며 기존의 것으로는 인간의 가장 궁극적인 욕망에 도달할 수 없다고 보았다.

 

 인간의 궁극적 목적인 참된 만남, 사랑에는 무엇이 필요할까? 그는 세가지 필요를 제시했는데 그 첫째는 타인의 고통을 인식하고, 공감하고 나눌 수 있는 태도이며, 두 번째는 보편적 가치를 위해 능동적으로 함께 하는 태도이며, 세 번째는 같이 먹는 것, 단순히 잘 먹는 게 아니라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너와 나누는 태도라고 말한다. 이 세가지 필요와, 참된 만남이라는 개념의 바탕에는 인간의 가장 큰 욕망은 사랑이며, 그러므로 인간은 이기적인 존재일수 없다고 전제한다.

 

 이제 그가 생각하는 기존의 교육과 대안을 정리해보도록 하겠다. 앞에서 말한 기존의 시스템으로 인해 작금의 교육은 타율성, 탐욕, 경쟁, 공포, 낙오, 차별, 진정한 목적의 빈곤, 고분고분 말 잘 듣는 '품행이 방정(方正)한 노예화'로 나타난다. 이러한 잘못된 과거로부터 세습되어온 이러한 기존의 '괴물'을 쓰러뜨리고 서로주체성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교육의 틀을 세우기 위해서 교사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교사 스스로의 성찰을 하면서(자기반성) 학생들과 함께 고통과 문제점을 인식하고, 공감하고, 나누며 능동적으로 함께 하는 과정(바로 참된 만남, 소통을 통한 연대)을 통해 극복해야 한다고 하고 있다. 그 극복은 '내부로부터의 망명', 의도적인 '낙오자되기'이기도 하다.

 

 결론적으로, 김상봉 교수는 기존의 틀은 지배계급의 속물성, 경제제일주의의 폐해적 이데올로기이며, 그 영향으로 교사의 본질이 흐트러져있음을(경제적으로 안정적인 가치기준으로의 교육자의 길을 선택하는 상황), 학교와 교육의 목적이 흐트러졌음을 지적하며(참된 만남, 사랑, 즉 인간의 참된 궁극적 목적을 향하지 않음), 교사는 그 가운데서 성찰(자기반성)을 통해 주체적으로 변화를 이끌어야 한다고 말한다. 더하여 그 방법으로 '서로주체성' 개념을 제시하고 있다. 종합하여 보건대 그의 생각 속에는 이 '교육'이라는 것은 다양한 사회현상의 폐해적 모습과 사회현상의 이상(異常) 가장 밑바닥에 원인으로써 존재하며 그러므로 교육과 교사를 중요한 해결의 주체로 본 것 같다. 본인 역시 우리 삶에서 겪는 사회, 정치, 경제 등에서 수반되는 대립, 갈등 등의 다양한 문제 들의 가장 깊은 바닥에는 교육이 있으며, 그러므로 그 해결책 역시 교육에 있다고 보는 것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2012 3, 을씨년스럽게 비내리는 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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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모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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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가 책 또는 영상물을 보고 감상문을 써서 제출하라고 하면 나는 항상 적잖이 당황을 한다. 도대체 내가 읽고 생각한것을 어떻게 글로 써 내려가야 한단 말인가? 어떤 느낌을 써야하는지, 아니면 그 감상한 것에대한 정보 내지 요약을 해야하는것일까? 많이 고민이 되는 부분이다. 이중에도 특히 힘든 부분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많은 생각을 필요로 한다는것인데, 그중에서도 내 관심사에 포함이 되지 않거나 흥미유발이 되지 않는 내용, 나의 생각과 반대되는 주장이나, 종교와 도덕, 그리고 역사같은 고리타분한 이야기를 접할때는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하고 생각하야 한다는것에 어이가 없고 회의감마저 들기도 한다. 자 그럼 지방방송은 그만하고 본론으로 들어가겠다. 이번 장은 저번에 읽은 3장에 이어 바로 이어지는 그리스도교 신앙고백에 대한 내용이다. 이 글의 전체적인 내용은 기독교에대해 절대적으로, 맹목적으로 찬양하는듯한 인상이 심어져있다. 철학과 학생인 나로서는 기독교뿐만이 아닌 여타 종교에서 요구하는 맹목적인 믿음을 통한 진리추구는 절대 부정을 하는 사람이다. 진리란 인간이 논리적이며 비판적으로, 오로지 끝없는 탐구를 통해 추구하며 얻어질수 있는 과정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이에 나는 이 그리스도교와 문화라는 책을 감상함에 있어서 비판적이고자 한다.


 물질과 과학이 인간의 삶과 의미를 규정하는 유일무이한 척도라면, 왜 종교와 정신적인 가치를 지닌 문화와 예술은 인류의 역사오 함께 존속해오고 있난가? 그것은 인간이 물질적인 요소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지만 동시에 그는 물질을 초월하고 시간을 넘어서는 종교적인 가치, 정신적인 진리르 떠나서 생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인간은 꼭 절대적이고 맹목적인 종교와 신을 통해 진리를 추구해야만 하는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신을 끌어들여 종교적으로 진리를 추구하는것 보다는 철학적인 반성과 비판을 통한 진리 추구야말로 진정 인간이  가져야할 진리 탐구적 자세라 생각하고 이것이 더욱더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인간의 삶의 의미와 목적, 선과 악, 사후 세계에 대한 논의는 종교가 아닌 철학에서 다루는것이 더 현명하고 어울린다 할 수 있겠다. 그리스도교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하나님과이 인격적인 생명의 관계와 신앙의 빛에서 주려고 시도한다. 그리스도교는 유신론적인 신앙을 지닌 다른 종교와도 뚜렷이 구별되는것이 삼위일체 교의라는데 이것은 또한 내가 가장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부분중의 하나이다. 또한 이것이 내가 성실한 기독교인에서 기독교를 비판하며 기독교를 등진 이유이기도 하다.


  책 105쪽의 그리스도교적인 신앙의 성격을 보자. 그리스도교의 신앙은 그 자신을 계시하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살아 있는 관계를 펴현하는 총체적 개념이라고 한다. 즉 절대적인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또한 비판적으로 생각해볼 거리가 있다. 과연 절대적인 믿음이 말이 되냐는것이다. 절대적인 믿음을 요구하기 이전에, (언제 어디서 누가 왜 썼는지도 모를, 혹은 소설일지도 모르는 정체불명의 성경에서의 이솝우화가 아닌) 지금 현재 현생에서의 절대적으로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근거 내지 구원의 모습을 보여야 하는게 순서가 아닌가 싶다. 쉽게 예를 들어보겠다.


    어느 평범한날 A가 길을 가고있는데 생전 처음보는 한 남자가 자신에게 백만원을 하루동안 맏겨두면 열흘뒤에 천만원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한다.


 과연 그 자리에서 흥쾌히 승낙할 사람은 얼마나 될것 같은가? 즉, 하나님의 정체를 만 천하 만 인류에 밝히고 모든 대중매체와 인간과 대통령과 거렁뱅이들이 볼수 있고, 과학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존재와 힘을 증명하고 확신시키는게 우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한 창조자시라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자연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결국 하나님이라는 존재도 (만약 있다면) 무가 아닌 유라는 것에서부터 탄생한 것이라 말하는게 옳은것이다.


  인간은 모든 피조물과 질적으로 다른 초월적인 절대자 하나님을 인식할 수 없다고 한다. 하지만 인간이 왜 하나님을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인가? 눈과 귀가 먼채, 맹목적으로 신을 추구하고 따르는 신앙심 깊은 사람이 아닌이상, 그것은 단지 하나님의 존재를 확신하지 못한 나머지 둘러대는 허울 좋은 핑계거리로만 보일 뿐이다. 책에서 그 이유는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언어와 경험, 의식의 세계를 초월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이 인간의 모든 것을 초월하였다고 말할수 있는가? 그 근거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리고 왜 인간의모든 것을 초월하였다고 해서 인간이 인식할 수 없다는 말인가? 이 역시 하나님의 존재를 확신 내지 증명 내지 밝혀내지 못한 나머지 신학자들이 일반인들에게 둘러대는 술수에 불과한것이라고 밖에 판단할 수 없다. 이 외에도 이 장을 읽고난 나의 감정과 비판적 생각, 그리고 공감가는 부분에 대해 더 말하고 싶으나 (앵무새가 똑같은 말을 되씹는것과) 같이 위에서 내가 말했던것과 같은 내용이 계속 되풀이될듯하여, 또는 마치 비난적인 감상문이 되버릴것 같아 여기서 이만 줄이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다소 비판적이면서도 또 불교와 같은 다른 종교에서 추구하는 이상적 진리도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로서는 이 4장에서 말하는 그리스도교와 그리스도교의 신앙적 성격 또한 의문과 허점 투성이로 보인다. 아무리 신앙이고 종교이고 신적인 문제라고 해도, (형이상학적 문제) 주장이 있으면 실존적으로 증명 가능하고 논리적으로 타당한 근거를 제시해야 하는 법이다. 하지만 여기서 그 근거로서 성경을 들면 그것 역시 절대적인 오류를 범하는 셈이다. 성경이라는 책 또한 인간의 손에 의해서 씌여졌기 때문이다. 결코 성경이 진리이고 종교적인 근거가 돼서는 안될 것이며 성경의 말씀을 벗어난 탐구적인 근거가 필요할 때라고 생각한다. 막상 교회를 다니는 기독교인으로써 이 책을 읽고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감상평을 쓰고나니 다소 걱정이 되기도 한다. 혹 이러한 내 사상으로 인해 낮은 평가를 받는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말이다. 하지만 나는 후회는 없다. 감상문에 대해 0점을 맞더라도 내 소신껏 내 생각을 천명했으면 그것뿐인것이다. 비록 내 생각이 틀렸을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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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모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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