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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서론

 사람들은 살면서 많은 의문을 갖는다. 하지만 그 중에는 인간으로서 답을 알아내기 힘든 것도 있다. 나 또한 그러한 문제에 대해 고민을 해왔다. 그것은 과학적인 문제일수도 있고 종교적인 문제일 수도 있다. 그중에 나는 여기서 '신이란 정말로 존재할까?', '신에 대한 믿음은 가치가 있는 것일까?', 의심하면서 신과 종교에 대한 생각을 해보고자 한다.[각주:1]


필자는 수년동안 교회를 다녔으며 세례까지 받은 사람이지만 그러한 행동이 진심된 신앙심에 의한 것은 아니었으며 어찌 보면 타의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항상 의문을 가졌다. 도대체 감각될 수 없는 존재를 어떻게 믿고 따르라는 말인가? 인간이 만든 언어로 써진, 성경이라는 종이짝을 무슨 근거로 진리라고 말하는 것일까? 인간은 꼭 절대적이고 맹목적인 종교적 믿음과, 신이라는 것을 통해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 것일까?[각주:2]


이제는 스스로 이러한 물음들에 대해 결론을 내렸다. 신이란 인간이 만들었으며,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개념일 뿐,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으며, 종교적인 믿음과 그와 관련된 행위들은 시간낭비에 지나지 않는 쓸모없음이라고 말이다.[각주:3]


 자, 그럼 이제부터 인간이 만들어낸 허상의 신에 대한 논의를 해보겠다. 이 논의들은 앞에서 나온 여러 물음의 답이 될 만한, 또는 참고가 될 만한 것들을 찾아보고 생각해보는 식으로 진행이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본론에서 1차적으로 신에 대한 생각을 쓸 것이며, 그 다음으로 종교적 믿음에 대해, 그 다음으로 종교의 본질에 대해 탐구하는 것으로 마칠 것이다. 여기서 나는, 부득이하게도 기독교를 바탕으로 이야기하게 될 것이며 나의 사상과 일치하는 수많은 글들을 참고문헌으로서 인용할 것임을 밝히는 바이다.

 

2.본론

2.1

 많은 현대인들은 신이 존재한다는 어떠한 증거도 찾아볼 수 없기에 신을 믿는 것은 적당치 못하다고 생각한다.[각주:4] 이러한 판단은 합리적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신이란 존재는 모든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감각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 누군가가 신을 인식할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은 보편적이지도 않으며, 많은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 예를 들면 신을 찬양하는데 쓰일 '시간', 그리고 의심이 없어야 하기에 이상하게만 느껴지는 '신앙심' 이 그것이다. 누구는 인간은 모든 피조물과 질적으로 다른 초월적인 절대자 하나님을 인식할 수 없다고 말을 하는데[각주:5], 눈과 귀가 먼 채, 맹목적으로 신을 추구하고 따르는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 아닌 이상 그다지 신빙성이 있게 들리지 않는다. 단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지 못한 나머지 종교인들이 둘러대는 허울 좋은 핑계거리로만 들릴 뿐이다.


 여기서 일단 신의 존재 유무에 대한 견해를 밝히자면, 아직까지는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편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사람은 그저 죽으면 그만인 존재일 뿐이다. 사람이 죽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으며 남는 것은 단지 산 사람들의 기억된 생각에 불과한 것이다. 죽은 사람의 것으로 남은 것은 없으며, 그래서 죽으면 완전한 로 돌아간다. 산 사람들의 기억에 남은 죽은 사람에 대한 기억은, 현실에서는 실체화 되어 나타날 수 없는 산 사람의 기억 그 자체이지 그것이 죽은 사람의 존재함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각주:6] 때문에 종교에서 말하는 천국, 지옥 또는 내세따위는 없는 것이며 결국 신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또 신의 존재 증명에 대한 물음으로써 신을 보았느냐는 질문을 하고 싶다. 세상에 존재한다고 말하려면 머릿속의 개념, '지성' 상으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실체가 있어야 하는데 신은 그렇지 않다. 이른바 "의미는 있지만 지시체는 없는 것"[각주:7]이다. 확실한 물리적 증거 없이 신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마치 옥스퍼드 영어사전을 꺼내 '' 이란 단어를 보여주며 '신은 존재한다' 말하는 것과 똑같은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각주:8]. 이러한 주장에 대해 누군가는 없는 신을 찬양하는 종교인들은 모두 비정상인이냐는 식으로 모순됨을 이야기하며 반문할지도 모른다[각주:9]. 하지만 이것은 물음의 본 의도를 파악치 못한 것이다[각주:10].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제를 통해, 존재하지 않는 신을 찬양한다고 해서 종교인들이 비정상인이라는 주장은 도출될 수 없다. 물론 존재하지 않는 신을 찬양한다고 해서 그들이 비정상인이 되는 것도 부당하다. 그러면 반대로, 무신론자들은 비정상인이 되고 유신론자들은 정상인이 되느냐는 반문도 가능하다.[각주:11] 혹은 공기, , 정신, 애국심, 전파 등은 볼 수 없는데도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경험적으로 증명 가능한 사실이지만 신의 경우에는 다르기 때문에 비교 자체가 부당한 것이다. 또 달리 생각해보자. 유신론자도 있고 무신론자도 있다. 유신론자에 의해 신이 있는것이 된다고 말할 수 도 있겠지만, 무신론자에 의해 신은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


 이와같이 결론짓기 힘든 논증을 떠나서 결론지어 이야기해보자. 만일 신이 존재한다면,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신은 전 인류에게 실재적으로 증명 가능한 방식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야 하지 않을까? 또는 '진리가 되는 그 신'을 믿는 모든 신자들에게는 항상 행복이 충만하고 유토피아가 찾아와야 하는것 아닐까? 하지만 지금의 신은 그런 능력을 보이지 않고 있으므로 '그보다 위대한 것은 생각될 수 없는[각주:12]' 그런 절대적인 신은 완전한 존재가 아니며, 그러므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 그러면 만약 구원을 받기 이전에, 신이 우선적으로 '의심없이의 신앙심'을 요구로 한다면 그것 역시 신의 불완전함을 말하는 것 같다. 완전하지 않은 신은 신이 아니며 그것은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근거가 되니까 말이다.


 만일 신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은 이 시대 사람들에겐 그저 머나먼 신, 침묵 중에 있는 신, 더 이상 행위하지 않는 신, 이전의 신이 아닌 사전상의 '(god)'일 따름이다[각주:13]. 이제 지금에 있어서의 신이라는 존재는 더 이상 이 세계의 절대자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저 있어도 없어도 되는 무관심한 존재일 뿐이다. 행여 신이 실제로 어떤 존재론적 실재라면, 그 신은 인간의 세계와는 동떨어져 있는 존재, 게으른 신인 것이다. 현실적으로 신 존재는 아주 멀리 떨어져 그의 하늘 세계에 머무르거나 그저 침묵중에 있다[각주:14]. 이런 신을 두고 헤겔은 1802년 이미 사신철학(死神)을 언급한 적이 있으며, 하이네와 니체도 그 뒤를 따라 움직였다고 한다[각주:15]. 결국 회개니 은총이니 구원이니 하는 것들은 실증적으로 규명되지 않은 허구적인 가르침에 불과한 것이다. 프로이트는 종교적 요인을 심장부전증과 신경질적 강박관념의 생산이라고도 고발하였다.[각주:16] 이와 같이 세계 내의 신의 현존 문제는 지나간 시대에 가졌던 것보다 훨씬 근원적이며 궁극적인 답변을 요청할 만큼 그렇게 우리에게 제시되고 있다는 것이다[각주:17]. 지금이 그러한 질문을 던져야 할 시대인 것이다.

 

2.2)믿음

믿음에 대한 이야기는 앞의 신에 대한 이야기에서도 종종 나왔지만 이 부분에서 조금 더 생각해보기로 했다. 믿음은 일단 참이라고 전제된다. 또 종교를 받아들이는 것은 시나 축구를 즐기는 것에 가깝다. 그것은 일련의 관습에 젖어드느냐 마느냐의 문제다. 관습은 감성적인 혹은 사회적인 특성만을 갖는다. 종교 의식은 심리적이고 사회적으로 요긴한 목적에 봉사할 뿐이다.[각주:18] 하지만 나는 그러한 믿음이 신에 대한 '진지한 믿음', '진지한 신앙심'으로 발전되어서는 안 되고 신에 대한 믿음은 무언가를 믿고자 하는 인간의 심리학적 관점에서만 설명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에 대한 '진지한 신앙심'은 아래의 결과만을 초래할 뿐이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각자가 직접 부딪히고 경험하는 것, 즉 정당, 집단, 교회, 계급등이 모여 이 세계를 구성한다. 이들은 자기가 속한 집단의 권위에 대한 믿음이 어찌나 단단한지, 다른 시대나 국가, 다른 집단이나 교외, 계급, 그리고 정당 등이 자기 집단과 정반대로 생각해왔고 심지어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더라도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 이들은 자신이 속한 집단이 그릇된 생각을 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바르게 이끌 책임을 져야한다고 생각한다. 귀속감을 느끼게 되는 집단이 하찮은 사건으로 인해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이를테면 런던에서 어떤 사람을 교회에 나가도록 하는 이유가 베이징에서는 불교나 유교 신자가 되게 하는 이유가 될 수도 있다) 에도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다. 과거가 현재에 의해 부정되듯이 현재는 미래에 의해 번복될 것이다. 그래서 현재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생각들 가운데 상당수가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는 폐기될 것이 거의 확실하다」[각주:19]

 

 이는 비단 종교적인 믿음에서의 문제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 정치, 문화적인 부분에까지 좋지 않은 영향을 초래하게 된다. 이를테면 자문화 중심주의가 만연한다든지, 광신도의 양성라든지, 또는 집단 이기주의라든지 말이다. 이러한 결과로 기독교에서는 배타주의적이 되어 자신이 믿는 하나님만이 절대 진리라 외치며, 유일신 사상을 무비판적으로 추종하게 되었고, 타 종교와 사상을 인정치 않는 일종의 선교와 전도, 복음을 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는 나름대로의 이해관계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고 본다.


 누군가 무신론은 바로 무신론자에 대한 신앙이라고 말하며 이러한 의미에서 무신론은 근본적으로 변화된 변신론이라고 말한다[각주:20]. 과연 신을 부정하면서도 근본적으로 신을 믿고 있다는 것이 타당한 것인가? 하지만 이는 옳지 못한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사전상의 신앙의 의미는 신이나 초자연적인 절대자를 믿고 받드는 일을 말한다. 하지만 무신론은 신이나 초자연적인 절대자 자체를 부정한다. 그것은 종교의 진리성을 철저히 부정하는 것이며, 종교적 가치 대상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각주:21]. 그리고 이러한 믿음은 신에 대한 믿음, 즉 신앙과는 구별되는 신념이다. 여기서 무신론에 대해 좀 더 알아보고자 한다. 무신론에는 실천적 무신론과 이론적 무신론이 있는데, 실천적 무신론은 그 자신 내에 신의 부정을 내포하고 있는 인간의 실천적 태도를 의미한다[각주:22]. 신에 대해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마치 신이 존재하지 않는 듯이 살아가는 사람을 말한다. 이론적 무신론은 신적인 것의 철저한 부정을 의미하며, 유일한 현실로서 우주, 정확히 말해서 자연만을 인정하는 것이다[각주:23]. 이런 의미에서 보면 필자는 이론적 무신론에 가깝다고 하겠다.


, 이제 신앙에 대한 결론을 짓고자 한다. 앞서 여러 번 말했지만 종교에 있어서는 신앙심을 요구하기 이전에 (언제 어디서 누가 왜 썼는지도 모를, 혹은 소설일지도 모르는 정체불명의 성경에서의 이솝우화가 아닌) 지금 현재, 현재의 생애속에서 절대적으로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근거 내지 구원의 모습을 보여야 하는것이 순서가 아닌가 싶다. 예를 들어 평범한 사람 'A'가 길을 지나가다가 전혀 모르는 사람 'B'가 제안을 해왔다고 가정해보자. 100만원을 자신에게 한달간 맡아두고 의심없는 믿음을 보여준다면 한달 뒤 1억을 만들어 주겠다고 말이다. 그러면 정말로 의심없이 맹목적으로 믿어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이러한 극단적인 예가 신을 믿고 따르는 신앙심의 상황과는 다소 거리감이 있겠지만, 종교에서는 우선적으로 그러한 맹목적인 믿음을 요구로 하는 것같다. 그러한 것이 신이라면 신은 결코 완전한 존재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제는 신에 대한 신앙과 존재의 믿음은, 신의 존재를 떠나서 일상의 다양한 행위들 중의 하나일 뿐이거나, 삶의 불확실함으로 인한 인간의 하찮은 현상일 뿐이라 말하고 싶다.

 

2.3종교의 본질

종교의 본질에 대하여의 저자 루트비히 포이어바흐는 아래와 같은 말을 했다.

 

신학은 인간학이다. 다시 말하면 신이라 불리는 종교의 대상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인간의 본질에 불과하다. 또는 인간의 신은 인간을 신격화시킨 본질에 불과하며 그러므로 종교의 역사 또는 신의 역사는 인간의 역사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종교가 다양한 만큼 신도 다양하고 종교가 다양한 만큼 인간도 다양하기 때문이다.[각주:24]

 

이 말은 종교의 본질을 설명하는 하나의 바탕이 될 수 있는 말이다. 신이라는 존재는 신의 존재, 신의 역사는 곧 인간의 존재, 인간의 역사에 불과하다는 말로서, 종교는 본질적으로 을 내포하고 있지 않다는 뜻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아래의 인용문을 보자.


인간은 이 세상에 존재하기 시작한 이래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자연에서 살아 남기 위해 늘 자신의 안전과 복지를 염려해왔다. 그래서 인간은 생존을 위해 그리고 더 나은 삶을 위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삶의 환경을 통제하고 예측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인간 생명의 한계성이나 우연성, 제한된 지적, 신체적 능력으로 인해 한계가 분명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한계적인 생존적 상황을 극복하거나 그것에 순응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게 되었으며 바로 그 방법이 오늘날 우리가 종교라고 부르는 것이다. 인간은 생명의 우연성과 생존수단이 되는 지식의 한계로 인해 만족할 만큼 미래를 예측하고 준비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깨달음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연결되며 이는 곧 삶에 긴장과 불안을 가져오는 요인이 된다. 따라서 인간은 불확실한 미래로 인해 발생하는 불안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인간 존재의 유한성과 우연성에서 오는 불안감과 그것에서 벗어나려는 인간 소유욕이 빚어내는 긴장 가운데서 인간은 종교에 의지하게 된다. 이때 인간이 추구하는 종교는 일차적으로 장수나 건강, , 명예, 권력 등과 같은 인간의 생물학적인 생존과 관련된 현세적 복락을 추구하는 현세 기복적인 성격을 갖는다.[각주:25]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다. 그래서 인간은 종교와 신을 창조해 낸 것이고 그것이 신의 역사-, 인간의 역사가 된 것이다. 그렇다. 조금 더 사실적으로 말해서, 이것이 종교의 본질이자 종교가 존재하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완벽한 존재라면 인간의 의식속에 있는 ''은 결코 필요로 하지 않았을 것이다. 완벽한 인간이 ''을 필요로 한다면 오히려 그것이 더 이상하지 않을까?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 신을 믿는것이 불합리한 것이라고 말되어질수 없으며, 나 또한 그런 존재하지 않는 신을 믿고, 종교를 만드는 것은 한계적인 인간으로서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말하고 싶다.

 

3.결론

지금까지의 과정에 의하면, 신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칼로 자르는듯한 증명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신이 존재한다는 논증도 많이 있었다. 필자의 수준으로는 저술하기에 역부족이 아니었나 싶다. 그렇지만 필자는 신의 무존재함이 아직까지는 옳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둘 다 증명되지 못한 상태에서는 어느쪽을 선택하는 것이 더 현명한 선택일까? 아직까지 신의 존재가 밝혀지지 않은 이상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일듯 하다. 신을 믿는 것은 신의 존재가 완전하게 증명 되었을 때 믿어도 늦지 않다는 말이다.

진리로 향하는 절대적 신에 대한 종교적 믿음에 대한 의의는 신과 종교 그 자체에서 찾아서는 안되며 역사와 정치, 사회 문화적인 맥락의 전반적인 측면에서, ‘인간의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진 종교, 그리고 신이라는 본질과 함께 탐구해야 할것이다. 어느 누구도 종교가 인간사회에 끼치는 '필요한 영향력'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의 존재에 대해서는 의심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하다는 것이다. 신의 존재를 믿는 유신론적 신념은 물리적 세계에 관한 신념과 달리 그것을 심각하게 의심할 이유가 있다. 유신론적인 신념은 모든 인류에게 공통된 보편적인 신념이라 볼 수 없기 때문이다.[각주:26]

  1. 이처럼 나는 신과 종교에 대한 성찰이라는 다소 애매하기도 한 주제를 가지고 시작하기로 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앞에서 말했듯이 이러한 문제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해왔으며 나 나름대로의 결론 또한 내린 상태이다. 결론적으로는 이러한 논의에 관심이 많다는 이야기다. [본문으로]
  2. 이러한 질문들은 기독교인들과는 진지하게 제기할 수 없었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철학자가 최종적이며 근본적인 물음을 제시하는 한, 그리스도인에게는 철학자로서 진지하게 일하기 위한 심리적 성향이 결핍되어 있다는데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신앙 때문에 그러한 물음들을 진지하게 제기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김현태, 『철학과 신의 존재』서울: 철학과 현실사, 2003, 50쪽을 참고했다.) [본문으로]
  3. 나는 여기서 모두가 아닌 소수의 경험으로 존재가 인정 되는 것이 아닌, 세상의 모든 사람이 경험할 수 있으며 보고 느낄 수 있어야만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고 전제함으로써 논의의 범위를 고정시키고자 한다. [본문으로]
  4. 이태하, 『종교적 믿음에 대한 몇 가지 철학적 반성』, 서울: 책세상, 2001. 참고 [본문으로]
  5. 한신대학교 신학부 편, 『그리스도교와 문화』, 2007, 4장 105쪽 [본문으로]
  6. 김상렬, 『신의 존재 증명』, 서울: 한누리미디어, 1996, 198쪽. [본문으로]
  7. 사이먼 블랙번, 『생각』, 고현범 옮김, 고양시: 이소출판사, 2003, 237쪽. [본문으로]
  8. 같은 책, 235쪽. [본문으로]
  9. 김상렬, 위의 책, 197쪽. [본문으로]
  10. 이 존재하지 않을 지언정, 종교인들은 신이 있다고 생각하고, 무신론자는 신이 없다고 생각하며 종교인, 유신론자, 그리고 조상숭배와 같은 것은 모두 자기 나름대로의 가치를 행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본문으로]
  11. 이 말은 결국, 신의 존재유무를 믿고 안 믿고가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것은 될 수 없다는 의미이다. [본문으로]
  12. 사이먼 블랙번, 앞의 책, 239쪽 [본문으로]
  13. 김현태, 앞의 책, 17쪽 [본문으로]
  14. 같은 책, 24쪽 [본문으로]
  15. 같은 책, 17쪽 [본문으로]
  16. 같은 책, 22쪽 [본문으로]
  17. 같은 책, 24쪽 [본문으로]
  18. 사이먼 블랙번, 앞의 책, 232쪽 [본문으로]
  19.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 서병훈 옮김, 서울: 책세상, 2005, 참고 [본문으로]
  20. 김현태, 앞의 책, 209쪽. 이것은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내벹는 "신"이라는 단어를 두고 말하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영어에서는 "Oh, my god!") 하지만 나는 이것을 일종의 '무의식적인 비아냥거림' 이라고 정의하겠다. [본문으로]
  21. J.헤센, 『종교 철학의 체계적 이해』, 허재윤 옮김, 서울: 서광사, 1995, 335쪽 [본문으로]
  22. 같은 책, 336쪽. [본문으로]
  23. 같은 책, 336쪽. [본문으로]
  24. 루트비히 포이어바흐, 『종교의 본질에 대하여』,강대석 옮김, 파주시: 한길사, 2006, 63쪽 [본문으로]
  25. 이태하, 앞의 책, 18쪽 [본문으로]
  26. 이태하, 앞의 책, 50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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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모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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