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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의 끝은 죽음뿐이다.>

 

 완성된 결말은 아니지만, 스스로 인문학공부를 하며 느낀 결말이며, 나의 교육관은 본 결말로부터 나왔다. 자녀교육관 역시 이에 따른다. 인문학은 죽었다. 더이상 어떤 생산도 해낼 수 없다. 따라서 미래는 자연과학, 기술에 달려있다. 중요한 점은 학문성장과 그 학문적 업적의 축적이다. 인문학이 아직 가치가 있다는 말은 마치 현대 자본주의의 무한 성장성을 인정하는 말과 다를 바 없다. 인문학의 발전과 가치에는 한계가 있다. x축에 시간을 두고, y축에 생산성향 두자면 그 그래프는 누운 C자형 그래프를 따른다. 생산성향은 곧 가치다. 초기 인문학은 많은 성과를 냈다. 하지만 현대에 와서는 그 성과는 무뎌지고 오히려 파괴적 형태, 무질서적 형태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과거의 업적의 반복과 또 반복, 비꼬기, 비판, 따라하기만 있을 뿐이다. 더이상의 생산물은 없다. 반면 자연과학과 과학기술은 우리 우주의 크기만큼이나 무궁하다. 생산물의 결과도 지속적이다. 자연과학의 생산물도 무한하지는 않다. 어느 정도의 한계점이 있다. 하지만 인문학과는 다르게 다시 추락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x축에 시간을 두고, y축에 생산성향, 즉 가치를 둔다면, 자연과학의 그래프는 J형 그래프가 된다. 자연과학 역시 시간이 지날수록 생산물은 떨어지지만 1생산물당 가치는 점점 커진다. 휴대전화를 생각하면 된다. 자연과학은 1생산량당 할당능력, 또는 집적도가 더 높아지기 때문이다.

 

 특정 시각에서 보자면 인문학은 의미를 찾는 학문이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나는 의미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인식'이 있어야 한다. 인식이란, 사전적 정의로 '사물을 분별하고 판단하여 앎', 또는 '인지' 이다. 하지만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었다. 사람은 인문학의 영역에서 이런 사전적 인식의 영역에서 벗어나 조금 더 높이 도약하고자 했다. 이 현상은 혼란과 질서파괴, 무질서의 인정을 가져왔다. 인문학의 결과 데카르트, 칸트와 같은 해괴한 희대의 망상꾼들이 나타나기도 했다. 인문학의 재료는 그저 사람들의 앞에 던져져 있는 것일 뿐, 그 재료를 칼로 자르든 현미경으로 관찰을 하든, 불로 태워보든, 그 재료에게 입힌 생각과 행위의 결과는, 사실 더이상 쪼개거나 확대하여 관찰할 수 없는, 또다른 행위와 행위결과만 남아있을 뿐이다. "1+1=2"라는 재료와, "내 눈 앞에서 비가 내리고 있다"는 현상으로 보이는 재료앞에서, '+'는 좌우항을 더한다는 약속의 표시, '='는 결과를 나타내는 약속의 표시, '2''1''1'이 더해져 나온 결과, 내 앞에 비가 내리는 것은 공기중의 수중기가 모여 구름이 되고 이것이 무거워지면 비가되어 떨어지는 '자연현상', 과 같이 분해하거나 확대하여도 남은것은 현상뿐이 없고 의미란 없는 것이다. 더이상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단 말인가. 뇌 속에 '의미'란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결론으로 돌아와, 나는 자녀를 교육함에 있어서, 먼저 수학, 과학, 기술공학이 미래라고 생각하며 인문학은 충분하며 이제 결론만 내면 되리라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본인은 유아기때부터 기술, 도구, 자연과학에 친숙한 환경을 조성하여 흥미를 유도할 것이다. 부모 스스로가 이에 익숙해지고 준 전문가가 되거나, 부모의 모습에 흥미를 가지도록 본보기로서 공부하고 학업할 것이다. 나 스스로도 답이 없는 학문, 인문학을 공부하기에 자녀에게 그 답답함을 경험하게 하고싶지가 않다. 지식과 진리는 오차없이 완전한 것이어야 한다. 최소한 그런 결론을 지향해야 한다. 국어, 사회, 문학, 음악, 예술 등의 것은 적당히만 하면 된다. 물론 그 적당히의 기준도 논의거리이기는 하지만 지금은 논외로 한다. 하여 철저히 기계적이고 수학적 연산과 논리적 사고를 할 수 있는 자연과학적 인간을 만드는것이 그 목적이다. 최종적인 이상향의 인간상은 공리주의성 인간이다. 하나 보론으로 첨부하자면 기존의 공리주의적 이론에 '지속가능한'이라는 말을 덧붙이고싶다. 수학이 자연과학에 있어서의 진리라면 공리주의는 인문학과 인간상에 있 어서의 진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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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모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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