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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노동당, 정의당, 녹색당 등 본인의 정치적 성향과 맞는 정당을 찾기 위해 오랜 기간동안 소위 말해, "정치정당적 기러기" 생활을 해왔다. 각 정당마다 특색이 있지만 본인은 일단 NL의 정치적 경향에는 반대의 입장이다. 또한 자본주의와 자유시장 체제에 역시 반대의 입장이다. 기본적으로 PD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 다양한, 소위 자칭 "진보"라고 일삼는 그룹의 정당을 다녔던 것인데, 결론적으로 본인의 정치적 입장과 100% 합치하는 정당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나마, 초창기 안철수 당시 국민의당에 기대를 걸었으나, 이 역시 실망으로 끝나고 말았다. 오랜 방황 끝에 본인의 결국 지금의 녹색당으로 되돌아왔다. 그렇다고 정치적 성향이 아주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근사치에 가장 가깝기 때문에 차선을 선택한 것이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정당을 향해 꾸준한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아래의 비평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진행되었음을 밝힌다.
(*사진출처: 녹색당 홈페이지)
녹색당의 12.8일자 논평 1은 세 가지 방향에서 그 논지를 전개하고 있다. 첫 번째는 민법 안의 정당성이다. 다시 말해 민법 안에서 동성 결혼을 불법시하는 조항이 없다는 것이며 따라서 동성애 결혼을 금지한 법의 판결은 옳지 못하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사법기관의 책무이다. 만약 법이 미비하여 국민 권리가 침해받는다면 법적 해석을 통해서라도 그것을 보완하는 것이 사법기관의 책무임에도, 사법기관은 ‘일반 국민들의 인식’과 ‘입법적 결단 없이 법률해석만으로 동성결혼을 인정할 수 없다’고 하며 그러한 책무를 방치하였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인권의 측면이다. 법의 미비로 인해 성소수자들이 인간다운 삶을 누리지 못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따라 모 정당에서는 이러한 불합리를 개선하기 위한 끊임없는 투쟁을 계속할 것임을 천명하고 있다.
그러나, 본인은 위의 세 전제 모두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고자 한다. 첫 번째 전제는 손쉬운 지적이 될 수 있는데, 첫 번째 전제는 두 번째 전제와 갈등한다. 만약 첫 번째처럼 법 혹은 사법기관에 소극적일 것을 호소하여(즉, ~을 금지하지 않음, 즉 법에서 동성결혼을 금지하고 있지 않음) 무엇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한다면 두 번째 역시 그러한 입장을 일관되게 유지해야 한다. 만약 일관되지 않다면 정합적이지 못하다. 그런데 두 번째 전제에서는 법 혹은 사법기관에 적극적일 것(~할 것, 즉 동성 결혼을 합법화 할 것)을 주장한다. 이는 일관된 입장이 아니다.
다음으로, 두 번째 전제인데 이와 관련하여 우선적으로 비평해야 할 것이 있다. 논평자는 먼저 동성애(혹은 성소수자)에 비판적인 견해를 지닌 자들을 혐오세력, 음해세력이라는 식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러면서 법 혹은 사법기관의 책무는 이들로부터 국민권익을 보호하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 우선 그들의 반대 입장에 서 있는 자들이 과연 그렇게 단순히 혐오세력, 음해세력으로 매도하는 것이 정당한 것인가? 이렇게 단순히 매도하는 행태들은 소위 말해 ‘자기 확신의 과잉’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운명적으로 유한한 존재이다. 따라서 자신의 생각이 ‘절대 옳다’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 바로 인간이다. 내 생각이 잘못되었을 가능성이 있음을 인정해야 하며 따라서 다른 사람의 생각에 대한 열린 마음을 가져야만 하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다. 하지만 나와는 다른 생각을 가졌다고 하여 그들을 혐오세력이니 음해세력이니 취급하는 것은 가히 교만한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밀, <자유론> 참고)
다시 돌아와 두 번째 전제인 사법기관의 책무에 관한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법의 정신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법은, 정확히 입법과 법률적 해석은, 일반 국민들의 인식, 그리고 그 인식을 바탕으로 한 그들의 입법적 결단 없이는, 즉 그것들을 뛰어 넘을 수 없는 속성을 지닌다. 그런데 그들은 일반 국민들의 인식을 뛰어 넘을 것을 주장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식의 접근은 독단(獨斷)이라 할 수 있다. 법이란 무엇인가? 우선 법은 객관성과 보편성을 확보해야만 한다. 만약 어느 소수의 의견만을 대표하거나 또는 지나치게 앞서간다면 그것은 올바른 근대적 의미의 법이라고 할 수 없다. 그리고, 일반의지가 녹아들기 전의 어떤 모종의 규정은 아직 보편적 입법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개인의 준칙이다. 준칙은 곧 주관이라는 말과 같다. 따라서 일반 국민들의 인식, 그리고 그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한 입법적 결단 과정을 거치지 않은 사법적 판단 일체는 결코 허용될 수 없다.
마지막으로, 이 사회의 폭력성, 또는 인권에 관한 논제가 있었는데, 본인은 이에 앞서 동성 결혼이 과연 그 자체로 올바른가? 또는 정상적인가? 또는 그것이 정언 명령적인가( 그 준칙이 보편적 법칙이 될 것을, 그 준칙을 통해 네가 동시에 의욕할 수 있는, 오직 그런 준칙에 따라서만 행위하라, 마치 너의 행위의 준칙이 너의 의지에 의해 보편적 자연법칙이 되어야 하는 것처럼, 그렇게 행위하라)에 대한 판단이 선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근본적으로는 동성애가 과연 올바른가에 대한 판단을 요구로 한다. 물론, 동성애가 옳은가, 혹은 정상적인가 아닌가에 대한 이론(異論)의 여지는 여전하다. 이를테면 고대 그리스에서는 동성애가 보편적이었으며, 인류 역사에 계속 수반되어 왔다. 하지만 우리가 굳이 어떤 이론이나 학적 권위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동성애라는 것은 우리의 감정과 인식에 직각적(直覺的)으로 느껴지는 모종의 것이 있지 않는가? 또 이를 단순히 개인의 취향으로 문제 삼을 일도 결코 아닌 듯하다. 몇몇 사람들은 개인의 기호, 취향을 이야기한다. 물론 이것들을 단순히 취향의 층위에서 논의를 끝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이성적 존재자로서의 책무를 방기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여러 논의들을 도덕적 혹은 진리의 층위에서 논할 경우 이는 결코 단순하지 않다. 세상의 모든 사태는 항상 도덕적인 것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떻게 걸음을 걷고, 어떤 옷을 입고, 어떤 음악을 듣는지조차, 즉 사실은 주관, 기호, 취미의 영역이라 생각했던 것들조차, 실은 도덕적 가부(可否)를 판단할 수 있는 영역이다. 이에 대한 논증은 지면의 관계상 유보하도록 한다. 또, 공리적으로 보더라도 동성애가 사회 전반의 효용(또는 공리)에 해를 끼친다면 이는 사회적 법적 교육적으로 지양((止揚) 더 높은 단계로 오르기 위하여 어떠한 것을 하지 아니함.)될 필요가 있다.
다시 세 번째 전제의 본론으로 돌아오자. 사회적 폭력성과 관련하여 첨언을 하자면, 동성애에 관한 한, 그들은 이성과 공통된 형평의 규칙이 아닌 다른 규칙에 따라 살겠다고 이미 선언한 셈이라고 누군가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러한 상태에서 그들의 행동이 인류나 다수 인민에게 불쾌감 내지 손해를 끼치는 존재가 된다면, “다수 인민은 해로운 자들을 제지시키며 필요하다면 파괴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고 말할 수 없다. 인간이 사회적 존재라는 사실은, 최소한 동물적이지 않은, 그러니까 인간다운 삶을 살며 사적 자아창조를 위한 삶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결코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며, 사회적 감정 역시 따라서 인간의 존재를 규정하는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적 관계를 맺지 않고 살아나갈 수 없다. 사회를 통해 배우고 듣고 느끼게 된다. 따라서 사회를 떠나서는 어느 누구도 동물이 아닌, 사람의 구실을 할 수 없다. 이러한 인간의 사회성은 본성과 당위성을 함께 포괄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적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기로, 다시 말해 모종의 사회적 규약, 약속, (그것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그러니까 사회적 계약을 준수할 것을 선언한 자들만이 어떤 식으로든 인권을 지닌 인격적 존재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사회적 시선으로 볼 때 동성애, 혹은 동성 결혼을 행하는 자들은 “이성, 곧 로고스에 의한 공통 규칙과 척도를 포기한” 존재로 비쳐질 수 있다. 일단 그것의 가부(可否)를 떠나, 사회적으로 그러한 인식이 있는 바탕에, 무턱대고 허용한다면 사회적 혼란과 갈등이 증가될 것이며 이는 순선한 사회성을 해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로크에 의하면, 이러한 자들에 대해 인류는, “전 인류에게 전쟁을 선포한 셈이기 때문에 마치 사자나 호랑이 같은 짐승과도 같이 처리도어 마땅하다. 인간은 짐승들과 더불어 한 사회를 이룰 수도 없고 또한 안전을 보장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은 이성이라는 공통의 법에 구속되지 않기 때문에 ... 해로운 동물로서 취급되어 마땅하다”라고 말하고 있다. 로크, <통치론> 참고
결론적으로 본인은 다음의 말을 인용하며 비평을 마치고자 한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깃들 무렵에야 비로소 날기 시작한다(die Eule der Minerva beginnt erst mit der einbrechenden Dämmerung ihren Flug).”
이는 독일의 철학자 헤겔이 그의 저서 <법철학>에서 남긴 글귀이다. 신화에 따르면, 미네르바는 지혜의 여신이며, 그의 부엉이 글라우쿠스(Glaucus)는 밤에도 깨어서 볼 수 있는 부엉이의 특성에서 지혜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그러므로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황혼이 저물어야 날개를 편다는 의미는 철학은 앞날을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현상이 일어난 뒤에야 비로소 역사적인 조건을 고찰하여 사태의 가부(可否)가 분명해질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헤겔, <법철학> 해제와 <WIKIPIDIA> 사전 참고) 이것이야말로 지성인, 그러니까 참다운 이성적 존재자가 갖추어야할 기본 정신이 아니고서야 무엇이겠는가?
앞에서 잠깐 말하였듯,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다. 그런데, 현대 사회는 자기 확신이 과잉되어 그러한 유한성을 망각한 채 소위 지식인이라 말하는 사람들과, 그리고 정치인들, 사회적 운동가들이 아집, 주관, 독단론을 사이를 맴돌고 있는 형국이다. "자유와 정치참여 확장의 부정적 측면이 사회의 밝은 곳을 가리는 형국"이라 할 수 있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자기와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매도”되어야 하는 것은 마치 침묵을 강요하는 일만큼이나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이러한 사태는 올바른 성찰과 균형감각 대신 당파성, 일종의 르쌍띠망(ressentiment)으로 점철(點綴)된 사람들이 일반 사회를 위협하고 있는 형국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다시금 이러한 "극단으로부터 자기성찰의 과정을 거쳐 중심잡기"를 할 필요가 있다. 중심잡기의 첫 시작은 앞선 논평과 같은 식의 극단과 정념에, 그리고 선언적 어조에 경도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시대의 요청은 조금은 더 관조적으로 역사의 사태와 추이를 지켜보며 성급하고 극단적 판단을 지양하는 태도이다. 우리 시대의 이러저러한 병폐에 대한 요청은 또 다른 혐오, 또 다른 극단이 아닌 비판적 거리두기와 진정한 성찰을 통한 성숙한 담론의 형성일 것이다.(<극단의 시대에 중심잡기> 참고)
- http://www.kgreens.org/commentary/%eb%85%bc%ed%8f%89-%eb%8f%99%ec%84%b1%ea%b2%b0%ed%98%bc-%eb%b6%88%ec%9d%b8%ec%a0%95-%ed%8c%90%ea%b2%b0-%ea%b3%a0%ec%8a%a4%eb%9e%80%ed%9e%88-%ec%82%ac%eb%b2%95%eb%b6%80%ec%9d%98-%ec%88%98%ec%b9%98/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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