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의 덕 이론과 윤리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384~322)는 마케도니아 남부 출신의 고대 그리스 철학자로, 당대를 대표하는 철학자라고 할 수 있다. 그는 17세이 아테네의 ‘아카데미’에서 플라톤의 제자로서 약 20년 간 수학했으며, 이후 노년에 이러러 ‘리케이온’이라는 학원을 설립하여 그의 스승의 철학적 전통을 잇고자 하였다. 이런 그의 도덕철학의 사상적 핵심은 ‘행복(eudaimonia)’에 있다고 할 수 있겠는데, 본 서(書)에서는 그의 목적론, 덕(arete),의 개념과 종류(의미), 행복의 의미 등 주요 도덕철학적 개념을 살펴보고 마지막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덕 이론의 입장에서 그와 대별(대별)되는 입장이라 할 수 있는 행위 중심주의 도덕이론에 대한 비판을 살펴보겠다.
<형상과 질료>
주지하듯, 아리스토텔레스는 목적론적 사상을 함축하고 있는 인물로 평가된다. 그러한 그의 목적론은 몇 가지 형이상학적 개념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형상과 질료, 실체 개념이 바로 그것이다. 우선, 그에 의하면 세상의 모든 실체는 형상과 질료의 결합으로 구성되어 있다. 형상은 각 개별물로 하여금 바로 그러한 개별물이 되게끔 하는 것으로, 이는 곧 개별물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질료는 개별물이 만들어지게 된 재료, 즉 개별물의 소재를 의미한다. 예를들어, ‘가위’의 형상은 ‘자르는 것’이 되고 질료는 ‘금속’이 된다. 이런 식으로, 그에 의하면 세상의 모든 개별물들이 형상과 질료를 지니고 있으며 이 둘의 관계는 불가분의 결합관계에 있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목적론>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질료 개념은 곧 목적론적 사고로 이어지게 된다. 앞서 비유에서와 마찬가지로, 가위의 형상은 자르는 것이다. 즉, 생각해보면 가위의 기능은 역시 자르는 것이며 이것이 곧 가위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겠다. 따라서 생각해보면 좋은 가위는 잘 잘리는 가위가 될 것이다. 즉 형상은 본질이며, 본질은 기능이며, 기능이 곧 목적이 되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각 개별물의 본질 혹은 기능이 잘 드러나는 상태를 두고 이 상태를 ‘덕(arete) 있는 상태(혹은 유덕한 상태)’라 일렀다. 이때의 덕은 arete를 뜻하며, arete를 영어로는 virtue 혹은 excellence로 이해된다. 다시 돌아와 이런 식의 논리는 인간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인간 또한 하나의 실체로, 육신 일체라는 질료를 지녔고, 정신작용이라고 할 수 있는 형상을 지닌 존재이다. 이때, 정신작용 혹은 정신능력은 곧 덕에 따르는 삶이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본질을 덕에 따르는 삶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탁월함, 곧 인간으로서의 고유한 기능을 잘 발휘하는 상태가 곧 ‘덕에 따르는 삶’을 살 수 있음인 것이다.
<행복, 목적의 계열>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인간의 탁월함, 혹은 덕에 따르는 활동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에 의하면 덕에 따르는 삶은 곧 행복(eudaimonia)한 삶을 사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인간이 모종의 행위를 할 때, 가장 궁극의 목적에는 최고선으로서의 행복이 자리 잡고 있다. 이 역시 목적론의 논리에 따른 것이다. 목적의 위계를 두며 최고 목적에 행복을 둔 것이다. 이를테면, 한 인간이 경제적 행위를 통해 부를 축적한다고 할 때, 그 1차적 목적은 의식주의 해결일 것이다. 그리고 의식주의 해결은 한 개인의 사적 자아창조의 밑바탕이 될 것이다. 자아창조를 위한 일련의 행위들 일체는 곧 나의 행복을 목적으로 한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더 이상의 상위 목적은 존재할 수 없게 된다. 또한 그는 궁극목적이 되기 위한 조건 세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자기목적성, 완전성, 자기충족성이 바로 그것이다. 그에 의하면 이 세 조건을 충족시키는 유일한 것 역시 행복뿐이었다. 즉 행복이야말로 인간에게 가장 궁극적 본질적인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하위의 것들은 서로 계열적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도구적 가치를 지니게 된다)
다시 돌아와,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인간의 덕에 대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인간의 본질은 덕에 따르는 삶이며, 그러한 삶은 곧 행복한 삶을 의미한다. 그런 그는 인간의 덕을 다시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한다. 첫째, 신체적 덕이다. 둘째, 정신적 덕이다. 그리고 정신적 덕은 다시 지적인 덕과 성격적 덕으로 나뉘어진다. 이때 도덕성과 관련하여 결정적으로 작용하는 것이 있는데 이는 성격적 덕(탁월성)이 된다. 참고하여 항간에서는 성격적 탁월성을 다시 중용의 덕과 공동체적 덕으로 구분하기도 하는데, 여기에서는 우선 중용의 덕과 관련한 성격적 탁월성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성격적 탁월성은 품성상태(hexis)를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다. 이때의 품성상태는 도덕적 선을 습관적으로 행할 수 있는 ‘습관화된 행동성향’을 의미한다. 그리고 습관화된 행동은 적절한 품성상태, 즉 감정, 동기, 성향을 모두 고려한 결과이다. 또 이러한 품성상태는 내용적으로는 중용의 덕에 따르는 삶을 의미하며, 방법적으로는 습관에 의해 형성된다고 할 수 있다. 단, 이때의 중용은 산술적 중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유의해야 한다. 관련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네 가지 덕을 예로 들고 있다. 용기, 절제, 관용, 긍지가 그것이다. 용기는 자만과 두려움에 대한 적절한 태도이며, 절제는 쾌락과 고통에 대한 적절한 태도를 의미한다. 즉 중용은 공자의 시중(時中)의 상태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덕 이론의 입장에서 진행되는 행위 중심 윤리학 비판의 내용을 살펴보겠다. 우선 역사적으로 덕 이론은 오랜 세월 도덕철학에서 지배적 위치를 점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18세기 공리주의와 칸트가 등장하면서 그 지위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공리주의에서는 행위의 결과가 고통을 주는지 쾌락을 주는지의 여부로 도덕적 평가를 하고자 하였고, 칸트는 정언명법을 통해 이성적으로 도출된 도덕규칙을 의무로 삼아 이를 절대적으로 따를 것을 주장했다. 그들의 입장에서 덕은 도덕적 평가를 하는데 있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으로 여겨졌으며 이에 따라 경시되는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덕 이론가들은 이들의 입장을 비판하였다. 즉 단순히 도덕규칙에 따라 기계적으로, 그리고 무미건조하게 행위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성격적 특징을 또한 지녀야 한다는 것이었다.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덕 이론가들은 크게 5가지 입장으로 행위 중심 윤리학을 비판한다. (루이스 포이만, 윤리학 참고)
첫째, 행위 중심 윤리학은 동기의 요소를 결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만약 규칙을 실천으로 나아가게 하는 성품의 내재적 준비가 없다면 그러한 규칙이 과연 유효한가에 대한 의문인 것이다. 만약 어떤 외적 기제에 의해 따르게 되더라도 그러한 기제(김시 등)가 없어지는 순간 다시금 무용지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행위 중심 윤리학에서는 상과 같은 보상기제를 통해 동기화가 가능하다고 반박할 수 있다.
둘째, 행위 중심 윤리학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신학적 및 자연법적 모델에 기초해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행위 중심 윤리학에서 사용되는 전통적 도덕 언어는 신과 같이 명확한 권위나 전통적 자연법natural law)에 근거해 있으며 이들은 오늘날의 현실에 맞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행위중심 윤리학자들은 합리적 의사결정 과정은 그러한 유효하지 않은 과정들로부터의 구분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며 이를 비판한다.
셋째, 행위중심 윤리학은 윤리학의 자발적 측면을 경시한다는 주장이다. 만약 규칙에 따라서만 산다고 한다면 그것은 곧 단지 차갑고 계산적인 도덕적 기계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행위 중심 윤리학자들은 도덕성을 완전히 덕이나 성품으로 한정시키지 않으면서도 덕이나 성품의 가치는 존중받을 수 있다는 식으로 반박한다.
넷째, 행위 중심 윤리학은 최소주의적이라는 주장이다. 전통적 행위중심 윤리학은 주로 ‘~을 하지 말 것’을 요구한다. 이러한 식의 최소주의는 보편화가 상대적으로 수월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도덕은 최소 도덕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행위 중심 윤리학은 최소주의는 최소한의 공통된 상식에 호소하는 것이기 때문에 보편타당성을 얻기 용이하다는 장점을 내세운다.
마지막으로, 행위 중심 윤리학은 자유를 지나치게 강조하고 공동체를 경시한다는 비판이 있다. 사실 많은 도덕적 규율들은 전통이나 삶의 양식 속에서, 즉 관습에서 근거하고 그것이 곧 공동를 유지 및 발전시키는데 기여를 한다. 그런데 행위중심 윤리학은 이러한 속성들을 경시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행위 중심 윤리학에서는 공동체 윤리는 윤리적 상대주의를 함축할 가능성이 있으며, 이는 곧 도덕의 객관적 지위에 흠집을 낼 수 있음을 비판한다.
<마무리>
지금까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질료 개념과 목적론, 행복론, 덕의 개념, 성격적 탁월성과 중용의 덕을 살펴보았으며, 마지막으로는 덕 이론의 입장에서 전개되는 행위중심 윤리학에 대한 비판의 내용을 살펴보았다. 결론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를 필두로 하는 덕 이론, 혹은 덕 중심 윤리학은 도덕적 실천에 있어서 구체적 내용과 방향을 제시해줄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행복의 개념이 과연 보편타당성을 지닐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과, 덕이라는 개념이 자칫 윤리적 상대주의를 함축하게 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그 한계 역시 분명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교정: 그러나 행위 중심 윤리학에서는 규칙에 따라 행위할 것을 강조한다. 이를테면 공리주의에서는 ‘최대다수 최대행복(이익)’이라는 결과를 산출하는 행위를 할 것을 강조하고, 의무론에서는 정언명법에 따라 이성적으로 도출된 규칙을 의무로 삼아 따를 것을 강조한다.
2017.12.28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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