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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생애와 저술 

2   사상적 배경지식-데카르트 답습 

3   생각과 감각의 관계

     3.1   감각론

     3.2   상상론

 

4   말브랑슈의 신 

     - 유일한 참된 원인으로서의 신 cf) 기회원인론

5   말브랑슈와 인간의 자유

6   신 안에서의 영원한 진리의 파악

7   말브랑슈, 스피노자, 데카르트, 버클리(말브랑슈의 업적) 

 

 

1   생애와 저술

  1638년 파리 생. 라 마르셰(La marche)대학에서 철학을 공부, 그곳에서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대해 비호감, 이후 소로본에서 신학을 공부.

  1664년 목사로 임명되는 해에 데카르트의 유고 <인간론>을 접한다. 데카르트 철학에 큰 감명을 받고 데카르트 저술에 관한 공부를 시작. 

  말브랑슈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에, 보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플라톤주의, 아우구스티누스주의적인 전통 강하게 이끌리게 된다. 데카르트주의와 아우구스티누스주의로부터 받은 영감을 결합한 것이 그의 철학의 특징이다. 데카르트의 철학이 도달한 대부분의 견해가 모두 참이며 이 철학이 경험과 실재를 해석하는 도구로서 아리스토텔레스주의보다 훨씬 우위에 있다고 주장한 점에서 데카르트주의자이기도 하다. 말브랑슈는 철저한 기독교 사상가이다. 

  그는 데카르트주의의 철학을 새로운 종합을 구성하기 위한 도구로 간주하면서도, 아우구스티누스주의적인 전통[1]에 따른 철학자라는 인상을 준다. 그래서 단지 데카르트주의자, 단지 아우구스티누스주의자라고 분류하기에는 어패가 있다. 말브랑슈는 이 두 부류에 모두 속한다. 말브랑스 스스로는 자신의 철학은 아우구스티누스와 데카르트 그리고 스콜라철학의 반대가 종합된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사상에서 중세 스콜라 철학의 영향을 받았음 부인하기 어려워 보인다.

 

A.   생애

        i.        말브랑슈는 1638년 파리 생.

        ii.        라 마르셰(La Marche) 대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철학 공부-흥미를 가지지 못함.

        iii.        소르본에서 신학 공부.

        iv.        1660년 오라토리오 수도회 가입.

        v.        1664년 목사로 임명. 바로 그 해 데카르트의 유고작 [인간론]을 접한다.

        vi.        이어서 데카르트 철학에 큰 감명- 본격적인 공부 시작.

 

B.   저술

        i.        [진리의 탐구] (1674-75)

                 착각과 오류의 원인들을 탐구하면서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올바른 방법에 관하여 논의하다.

        ii.        [진리의 탐구에 관한 설명] (1678)

                  진리의 탐구에 이어 등장한 저술

        iii.        [자연 및 은총론] (1680)

                  기회원인론의 주장을 초자연적인 질서에 적용하는 것과 인간의 자유를 신의 은총의 효력과 조화시키는                      것 등의 주제가 다루어지다. 1689년 말에 가톨릭의 금서목록에 오르게 된다.

        iv.        [기독교적 성찰] (1683)

        v.        [도덕론] (1684)

                  오직 하나의 참된 도덕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기독교의 도덕이며, 스토아 학파와 같은 다른 도덕적 체계들                    은 참된 도덕성의 기준을 만족시키지 못한다는 주장을 펴다.

        vi.        [형이상학에 관한 담화] (1688)

                   말브랑슈 자신의 체계를 요약하여 설명하다

        vii.       [운동의 전달에 관하여] (1692)

                  순전히 과학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다.

        viii.      [신의 사랑에 관하여] (1697)

                   보쉬에(Bossuet)가 대단히 칭찬하였던 페늘롱(Fenulon) 신의 순수한 사랑에 관한 이론을 논의하다.

        ix.        [기독교 철학자와 중국 철학자의 대화] (1708)

                   신의 현존 및 본성과 관련된 주제를 다루었다.

        x.        [물리적 전() 운동에 관한 고찰] (1715)

                  말브랑슈 최후의 저술이며 얀센주의를 대변하는 부르지에(Boursier)의 말브랑슈에 대한 반박서인 [창조에                    관한 신의 활동 또는 물리적 전 운동에 관하여] (1713)에 답하기 위하여 쓰다.


[1] 아우구스티누스는 교부학 혹은 교부론의 대표자다.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중세의 사고 형성에 큰 역할. 플라톤의 위계질서의 원리(감각, 그림자, 이데아..)를 따름. 이를테면 가장 낮은 것은 물체, 그 다음 인간의 영혼, 그 다음 신. 이런 식. 그리고 신만이 가장 탁월한, 완전한 존재, 피조물은 불완전한 존재. 지식이라 함은 이처럼 불완전하고 변화하는 것으로부터 얻을 수 없다. 불완전하기 때문에. 

 

2   사상적 배경지식-데카르트 답습 
  말브랑슈는 두 종류의 실제가 있다고 말한 데카르트의 구별- 즉 정신적이고 비연장적인 실체와, 여러 가지 다른 형태로 변형될 수 있으며 운동 가능한 물질적인 실체 또는 연장성 사이의 구별을 받아들인다. 

  물질적인(비정신적인) 실체와 연장성[2]을 동일시함으로써 그는 물체의 성질에 관한 한 데카르트와 동일한 결론을 이끌어낸다. 그러나 이 사실이 감각적 지각들을 검토하면서 말브랑슈가 단지 데카르트의 주장을 그대로 따랐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물체에 관하여 상당히 자세히 검토함으로써 물체의 특징들을 나름대로 지적하고 있다. 

  또 말브랑슈는 진리를 탐구함에 있어 지켜야만 하는 몇 가지 규칙들을 제시한다. 이중 가장 중요한 일반 규칙은 우리가 확실한 관념을 지닐수 있는 대상들에 대해서만 추론을 해야 하며, 가장 단순하고 쉬운 것으로부터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데카르트를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는 감각은 서로 다른 네 가지 요소로 구별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네 가지란 1. 대상의 작용(예를 들면 개체의 운동과 같은), 2. 감각기관 및 신경-두뇌의 변화, 3. 정신 내에서 일어나는 감각 또는 지각, 4. 정신이 내리는 판단. 이 그것이다. 이에 대한 부가설명은 없다. [3]


[2] 외부 공간에 대한 느낌. 물질적인 것. 

[3] 이런 요소들은 함께 별현되고 또 순간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이들을 혼동하여 감각이 순전히 나의 정신 내에서 일어나는 정신적 사건이며, 나의 육체 또는 다른 어떤 곳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는 점을 잊어버리곤 한다- 오류. 그리고 이는 어떤 위계적 모습이라 볼수 있지 않을까 싶다.

 

3.   말브랑슈의 오류론-오류의 원인으로서 감각

말브랑슈에 따르면: 오류는 인간의 비참함의 원인.

즉(다시 말해) 이 세계에 악을 만들어 내는 것의 원인은 잘못된 원리-즉 오류에 있다.

  But) 이 말은 인간이 필연적으로 오류에 빠진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말브랑슈는 사람은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존재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 능력을 지닌 존재). 그 가능성에 대한 일반규칙이라 할수 있는 것은 데카르트의 그것과 유사하다. 이를테면 이런 것 : 우리는 자명하게 파악한 것을 제외하고는 다른 어떤 것에도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독실한 기독교도가 되기 위해서는 무조건 믿는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철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명하게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말브랑슈는 오류의 원인에 대해 검토하면서 먼저 인간의 지각능력을 살펴본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지각능력은 세가지 것이 있는데 : 상상력(상상력은 뒤에서 다른다), 순수오성[4], 감각이 그것이다. 이 요소들은 함께 발현되고 순간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혼동, 즉 오류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말브랑슈에 따르면 인간을 속이는 것은 감각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선입견이 우리를 속인다고 한다. 풀이하자면 사물과 우리 사이의 관계에서 물자체로서의 사물의 본성은 실제로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이 아닌데 우리의 선입견이 그것을 실제로 확실히 나타난다고 판단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말브랑슈의 말을 빌려 예를들자면, 온기를 느낄 때 우리는 온기를 느낀다고 믿는 사실 자체에 의해서 속임을 당할수 있다. 그 온기가 그것을 느끼는 정신의 외부에 있는 것이라고 판단한다면 우리는 속임을 당한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그는 감각은 서로 다른 네 가지 요소로 구별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는 반드시 감각을 동반하는 자연적 판단 또는 자동적 판단, 그리고 비록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가능한 한 억제하여야만 하는 임의적 판단을 구별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즉 이것이 우리 자신의 선입견이라고 할수 있다. 

  결론적으로 감각에 대한 말브랑슈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 우리의 감각능력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물체들과 우리의 육체 사이의 관계를 알려주는데에는 충실하지만, 감각은 물자체로서의 물체들이 어떠한가를 우리에게 알려줄수는 없다. 감각능력은 오로지 건강과 생명을 보존하는데에만 사용해야 한다. 우리의 감각능력은 오로지 우리의 육체의 보존을 위하여 주어진 것일 뿐이다.

 

 Cf) 추가사항 : 말브랑슈는 생리적인 과정도 감각에 포함된다고 말한다. 신경조직: 동물정기가 통과하는 미세한 관 또는 통로. 외부의 대상이 우리의 감각기관에 영향을 미치면 신경조직의 말초적 표면이 운동을 시작하며 동물정기가 이를 두뇌에 전달한다. 그리고 그런 생리적 과정에서 이 동물정기는 두뇌에 어떤 흔적들을 남긴다. 두뇌의 섬유조직에 찍혀있는 흔적들- 그리고 인간은 이런 흔적들에 영향을 받아서 일종의 정신적 심상을 낳게 되는 것이다. 이때의 심상은 비자발적 심상이다. 기계론적 설명과 같다. 그리고 그 흔적들은 상호 영향을 끼친다. 이러한 흔적의 결합은 생명의 보존을 위해 필요한 것이다. 이를테면 위험에 대한 태도. 이를테면 63빌딩에서 아래를 내려다봄으로써 아래로 떨어질 위험이 있다는 흔적, 거대한 바위가 어떤 물체 위로 떨어지며 부서지는 모습의 흔적, 이런 흔적들은 상호작용하여 죽음이라는 개념으로 확장되게 된다. 

 

4.    말브랑슈에게 상상력이란?

  상상력은 물체에 대한 심상을, 그 물체가 현존하지 않을 경우에도, 즉 우리가 지금 그 물체를 실제로 지각하고 있지 않을 경우에도 산출하고 재산출하는 능력이다. 이 상상력은 오류의 다른 근거 또는 원인이다. 상상력의 산물은 일반적으로 감각보다 약하지만 때로는 그 상상력의 산물이 매우 뚜렷하여 생리적인 관점에서 볼 때 감각과 똑 같은 호소력을 지니는 경우도 있다. 이럴 경우 우리는 오류에 빠지게 된다. 이 상상력에 관한 논의는 [진리의 탐구] 3장에 있다. 말브랑슈에 따르면 몇몇 사람들의 두뇌는 전혀 중요하지 않거나 비교적 별로 중요하지 않은 대상으로부터 매우 깊은 흔적을 받아들인다고 한다. 이 자체는 잘못이라고 할수 없으나 만일 상상력이 이러한 흔적들에 의해서 지배된다면 이는 오류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감각과 상상력의 오류는 육체의 본성과 성향으로부터 생겨나며 정신이 육체와는 무관하다는 점을 인지함으로써만 알 수 있다고 본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만일 물체에 대한 심상이 그 물체와 우리와의 관계가 아니라 물자체로서의 물체를 나타낸다고 판단한다면 우리의 판단은 오류에 빠지게 된다.

 

 

5.    말브랑슈의 신- cf)기회원인론[5]

-유일한 참된 원인으로서의 신 

앞에서 외부의 대상이 우리의 감각기관을 자극하며 동물 정기가 두뇌의 섬유조직에 흔적들을 만들고 그 만들어진 어,,, 심상이나 관념들은-상상 등- 이러한 생리적 과정에 기인한 것이거나 그 결과인 것인데,

 다시 말해 정신이 동물 정기의 움직임을 일으킬 수 있으며 그 결과로 경우에 따라서는 상상력이 자극되거나 아니면 육체를 이루는 각 부분들이 움직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신과 물체 중 어느 하나도 결코 다른 하나에 직접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말한다. 육체로부터 정신이 독립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또 이상하게도 그들 둘 사이는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음을 말한다. 말브랑슈는 이를 둘 사이의 상호작용이 아닌 대응관계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정신은 사고하지만 육체를 움직이지는 않는다. 육체는 신에 의해서 정신에 적합하도록 만들어진 일종의 기계일 뿐이다. 정신이 육체에 힘을 불어넣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 물리적 사건과 정신적 사건 사이의 대응관계- 말브랑슈는 양자 사이의 어떤 필연적인 연결, 인과성을 찾을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우리 자신이 팔의 움직임의 자연적인 원인임은 분명한 것이나 결코 참된 원인은 아니라는 것이다. 적절한 비유일지는 모르겠지만 이를테면 시계가 움직일 때 시계의 시침과 분침과 시침에 대한 자연적인 원인은 침 아래 있는 나사와 부품, 테옆들이지만 그것이 결코 근본적인 동자(動者)는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팔을 움직인다고 해도 그것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동물 정기를 통해서 자신의 손가락을 움직이려면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팔을 움직일 수 있겠는가? (즉 어떻게 움직이는지는 모르고 움직이니까 움직인다 또는 감각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 이를테면 내가 그렇게 감각하니까) 이런 사실들은 나에겐느 매우 명백한 것으로 보이며 단지 모든 것을 감각적으로 받아들이려는 사람들은 이를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깊이 있게 생각하여 받아들이려는 사람은 이를 명백하게 깨닫으리라 나는 생각한다  즉 진정한 인과적 행위자는 자신이 행위하고 있다는 사실(우리는 사실만 알 뿐이다)과 , 어떻게 행위하고 있는가를 모두 인식할수 있어야만 한다는 가정을 하고 있다. 이렇게 말한다.  참된 원인이란 우리의 정신이 그 원인과 결과 사이에서 어떤 필연적인 연결점을 지각할 수 있는 그러한 원인이다. 우리는 생각하며 움직일수 있으되 왜, 어떤 이유로 생각하며 움직일 수 있는지는 모르는 것이다. 말브랑슈의 결론은 : 참된 원인이 된다는 것은 창조하는 행위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어떤 인간도 그러한 창조하는 행위자가 될 수 없다. 신이 그런 능력을 인간에게 전해줄수도 없다.[6] 그러므로 신이 팔을 움직여야겠다는 나의 의지 작용을 기회로 삼아 나의 팔을 움직인다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다. 신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일어나는 모든 것을 의욕한다 (창조주로서의 신은 모든 의욕을 행함에 있어서 자신 이외에는 다른 어떤 궁극적 원인도 지니지 않는다.)

 

  예를 들어 a 뒤에는 항상 b가 뒤따른다고 생각해보자. 이 질서는 항상 보존된다. 이 질서가 왜 보존되는지 우리는 모른다. 겉으로 볼때는 a 뒤에는 항상 b가 따르기 때문에 a가 b의 원인처럼 보인다.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 왜 그런 질서가 보존되는지는 모른다. 그 질서가 보존되는 힘이야말로 진짜 b의 원인이다. 그 보존은 신만이 할 수 있다. a는 그저 신의 활동기회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a와 b 사이의 결합과 관련하여 반복적인 연속성의 관계 이상의 것을 발견할수 없다. 그리고 이것은 정신과 육체의 관계에서도 적용된다. 

 

6.    말브랑슈와 자유

  말브랑슈에 따르면 오직 육체들의 창조자만이 육체들을 움직이는 자가 될 수 있다. 말브랑슈에 따르면 우리 스스로는 장소를 바꾸거나 팔을 움직이거나 단 한마디의 말조차 할수 없다. 우리 스스로는 아 우주 안에서 가장 미미한 변화도 만들 수 없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육체를 움직이는 것, 팔 움직이는 것과 같은, 이 가능하다고 생각했을까?

그의 말처럼 신이 유일한 참된 원인이고 우리의 모든 의지 작용의 원인이라면 우리 인간의 자유는 부정되어야 한다. 그런데 말브랑슈는 인간의 자유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 자유를 부정하지 않기 위해 말브랑슈는 인간의 자유와 참된 유일원인으로서의 신을 조화시키고자 한다. 그 논증에 대한 이해는- 본인은 감각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으로서 누군가에게 이해시켜 줄만큼 납득하거나 이해할수 없었다. 그렇기에 생략한다.

 

  먼저 그는 가정한다: 신은 정신적인 피조물의 내부에 자신을 향한 성향을 심어놓았다고. 이 심어진 성향이 어떤 성향인가 하면 선 일반을 향한 성향이라. 본성과도 같은 것이다. 그런데 우리 세계는 유한한 세계이다. 그렇기에 지금 상태의 우리는 유한한 선이나 유한한 선들의 집합만을 추구할 수 있는데, 유한한것은 유한하기 때문에 우리는 결코 만족할수 없게 되는 것이다. (참고로 여기서 말하는 우리가 선 일반을 향한 성향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는 본성적으로 행복을 획득하려는 성향을 지니고 있다는 말과 같은 의미이다. ) 그런에 아까 말했든이 유한하기 때문에 어떤 유한한 선도 선 일반, 즉 궁극인, 즉 최고 성향의 완전한- 무한한 선에 이를수 없다. 이는 유한한 세계 안에서의 인간의 타락의 발생을 초래한다. 그리고 그렇게 타락은 무지, 무질서, 오류를 낳고, 또 우리의 상태를 바로 의식하지 못하게-즉 오류라는 큰 패러다임 틀 속에 있게끔 만든다.

 

 말브랑슈에 따르면 이 최고의 무한한 선인 완전한 선, 즉 완전한 행복, 궁극적 행복은 오로지 신 자신에 의해서만 충족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돌아와 말브랑슈는 지금까지 이렇게 말해온 일련의 본성이나 성향, 선-행복을 추구하고자 하는, 신에의해 심어진 그 기질을 자연적 성향, 자연적 운동들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고 이 패러다임 안에서의 자유라는 것은 말한 것처럼 그러한 경향을 통해 특정한 끝맺음-신의 선- 에 이를수 있게 만드는 능력인 한에서의 자유가 있는 것이다. 이 경향은 저항할 수 없는 것이다. 심어진 자연적 본성이자 성향이니까. 따라서 특정한 유한한 선과 관련해서 볼떄, 즉 유한한 의 체계-그 패러다임 내에서 한해, 유한한 것을 통해 끊임없이 무한함을 찾으려는 움직임 몸부림- 그 틀 속에서의 몸부림, 비록 불가능하지만 갈구하는, 불가능하기에 다양한 방식으로 찾아가는 틀 속의 다양한 몸부림의 방식에 한해, 우리는 자유롭다는 것이다. 

 

  참고로 말브랑슈는 만약 우리의 본성이 아담과 이브의 범죄에 의해서 타락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정신의 기본적 경향성들을 직접 인식할수 있었을 것이라 말한다. 즉 타락 이전의 인간은 심신병행론적인 법칙들의 작용을 유보시킬 수 있는 초자연적 능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타락 이후에는 인간 두뇌의 주된 부분에 흔적들을 남기는 물리적 사건들의 연쇄가 필연적으로 두뇌에서의 생리적 현상들보다 앞서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물체들이 인간의 두뇌에 흔적을 남길 때마다 정신의 운동이 그 결과로써 뒤따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7.   말브랑슈의 정신과 관념 관계

 말브랑슈에 따르자면 어떠한 작용에 의해 정신이 얻게 되는 사물에 대한 여러 관념들은 그 관념에 대응하는 물체로부터 생겨난 것도 아니며(철저히 단절되어 있기 때문에) 그리고 인간의 정신 자체로부터 생겨난 것도 아니다. 인간 자신으로부터 생겨난다고 한다면 이는 신의 창조적 능력의 지님을 전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정신 내부에 태초부어 있었던 완벽한 본유관념이 있었다고 볼만한 근거도 없다고 생각한다. 말브랑슈는 우리가 지니는 관념들을 타당하게 설명하기 위해서 성 아우구스티누스[7]의 권위를 빌어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우리는 신 안에서 모든 것을 파악한다

 말브랑슈는 우리가 신의 안에 있는 우리의 관념들을 파악할 수 있다고 전제나 공리로서 가정하는 것 같다. 그 관념 안에서 우리는 영원한 진리- 정확하게는 진리의 관념들을 파악할 수 있다. 

 

8.   말브랑슈 사상의 의의와 영향

A.   말브랑슈 사상의 의의

 말브랑슈의 사상은 완전한 원인으로서의 신을 도입한다는 점에서 중세 신학자들과 별반 다른 것 같지는 없다. 하지만 혹자는 그를 데카르트와 스피노자 사이를 연결하는 인물로서 간주하는, 나름 후한 역할자로서의 가치를 부여하기도 한다.

 그리고 데카르트를 따르고 있으면서도 데카르트와는 다소 다른, 즉 일말의 독창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 그 일말의 독창성이라 함은 명백히 신 중심적이고 신 존재에 대한 전제적 패러다임을 지니고 있다는 것과, 물체-감각(육체)-정신 사이의 인식관계를 신이 보증해 준다고 하였던, 그래서 정신과 육체 사이의 상호작용이 가능하고 그것을 신이 보증해준다고 말했던 데카르트와는 달리 물체와 정신 사이의 완전한 단절을 주장했다는 점이다. 

 즉, 정리하자면, 말브랑슈의 사상이 유용하든 무용하든 의미나 가치가 있든 없든, 독창적이거나 독자적인 생각을 했다는 바로 그 점에 한해 의미를 둘수도 있을 것 같다는 것이 나의 입장이다. 즉 인간의 생각 지평의 다양한 확장 가능성을 증명해주었다는 점.

 

B.   말브랑슈의 영향

  말브랑슈의 사상은 종교계에서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그 예로 오라토리오 수도회의 토마신이라는 신학자, 베네딕트 수도회의 인물인 프랑수아 라미, 제수이트 교도인 이브 마리 앙드레, 수학자이며 물리학자인 한 르네 페데, 학자 존 노리스 등에게 지지받고 이용되었다는 점이 있다. 그리고 말브랑슈의 사상은 경험론에 반대하는 많은 학자, 저술가에게 이용되었다.


[4] 두뇌 안에 외부의 대상에 대한 구체적인 심상을 형성하지 않고도 그 대상을 인식하는 능력.

[5] 말브랑슈의 기회원인론은 마음 혹은 정신과 육체의 관계에서 육체를 정신의 원인으로 보거나 아니면 마음이나 정신을 육체의 원인으로 보는 입장 또는 상호 연결되어 있다는 두 이원론적 입장을 넘어서서 신이 정신과 육체의 모든 활동의 근본적 원인임을 주장하는 철학이다. 이 입장은 철저하게 신 중심적이어서 마음 혹은 정신의 가장 중요한 관계는 육체와 맺어지는 관계가 아니라 신과 맺는 의존관계에서 그 모든 원인을 찾으려고 하였다.

[6] 아마도 신에 대한 전지전능성에 기인하는 것일듯.

[7] 그는 모든 것을 의심하는 '나'의 존재의 확실성에서 출발하여 회의론을 반박하였는데, 이 확실성은 후에 데카르트가 '나'의 확실성에서 자기 학설을 세웠던 발상과는 달리, 영원한 진리, 즉 이데아로서 영혼의 내면에 스며든 신의 빛(라틴어 illuminatio)에 의한 자기 존재의 확증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는 세계가 신의 이데아에 따라 그 의지에 의해 창조된 것이고, 원죄를 짊어진 인간은 악을 행하는 자유를 가질 뿐이며, 구원은 오로지 신의 은총에 의해 가능하고, 이 구원의 대상이 누가 되는가는 신의 영원한 예정에 의한 것이며(예정설) 교회가 이 은총을 매개한다고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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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평등은 인간이 사회를 이루며 살기 시작한 이래로 등장한 불가피한 현상 중 하나이다. 이를 두고 기능론의 입장에서는 불평등르 재능과 노력에 의해 더 많이 성취한 자에게 그만큼 더 많이 보상을 지급하는 것으로 간주하며, 이러한 사회 구조적 불평등을 정당한 것으로 본다. 반면 갈등론의 입장에서는 사회의 빈부격차, 즉 불평등의 원인을 개인 능력차가 아닌 가진자들의 못 가진 자들을 향한 횡포와 억압으로 본다. 그러면서 불평등에 대한 비판작업과 함께 평등화 작업을 강조한다. 다음에서는 사회와 교육에 대한 기능론적 접근, 갈등론적 접근, 해석적 접근법을 각각 살펴보겠다.

 

  1. 기능론적 접근

  기능론은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여러 하위 분야들이 각자의 맡은 바 역할과 기능을 잘 수행하고 있을 때 비로소 사회의 안정적 유지 및 발전이 가능하다고 보는 입장이다, 대표적인 학자로는 뒤르켐, 드리븐, 파슨스가 있고, 이론을 정립한 인물로는 슐츠의 인간자본론이 있다. 이들 기능론자들은 사회를 일종의 '생물학적 유기체'에 비유하며 사회의 안정적 상태를 '균형'의 상태라고 보았다. 반면 그 반대의 상태를 '불균형'의 상태로 보았다. 불균형의 상태란 사회의 각 부분이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을 뜻하며, 우리가 흔히들 말하는 사회의 제문제는 곧 이 불균형의 상태에서 기인한다고 파악한다. 이처럼 기능론적 입장에서는 사회를 유기체에 비유하며 사회가 지니고 있는 여러 특징들을 세분화한다.

  첫째, 사회는 구조와 기능을 지녔다.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사회는 생물학적 유기체에 비유된다. 말하자면 사회를 몸통에 비유할 수 있고, 사회의 각 부분이나 기관들은 팔, 다리, 각종 장기 기관에 비유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 각 기관들은 생물적 유기체와 마찬가지로 각자의 고유한 기능을 지님과 동시에 상호 의존적 관계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심장이 망가지만 이후 뇌가 손상되는 것과 같이, 사회도 그러하다는 뜻이다.

  둘째, 사회는 통합을 지향한다.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사회의 각 부분들은 각자의 고유한 기능을 지니고 있으면서 동시에 각각이 상호의존적이다. 따라서 한 부분의 변화나 기능 불능은 다른 부분 혹은 기관에도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사회는 통합을 지향하게 된다. 다시 말해 부분 간 조화, 통합은 사회 전체의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라고 할 수 있겠다. 

  셋째, 사회는 안정성을 추구한다. 우선 이때의 안정성은 곧 균형의 상태를 의미한다. 유기체적 생명체는 본성적으로 안정을 지향한다. 이는 사회도 마찬가지이다. 일단 통합이 된 상태라면 그 상태를 지속적으로 즉 안정적으로 유지하고자 한다. 사회 역시 혼란이나 갈등 보다는 안정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으며 이를 바람직한 것으로 간주한다.

  마지막으로, 사회는 합의를 지향한다. 기본적으로 부분 간 균형은 합의, 조화, 협동, 질서 등의 관계로 이루어지는데, 이렇게 이루어진 균형의 상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구성원 간의 합의가 필수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회를 위와 같이 바라본 기능론에서는 교육, 특히 학교 교육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기능론적 관점에서는 교육의 기능을 크게 두 가지로 보고 있다. 첫째, 사회화 기능이다. 기능론에 의하면 교육은 생물학적 인간을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길러내는 기능을 담당한다. 뒤르켐의 경우, 사회화 과정을 보편사회화와 특수사회화로 이분하고 있다. 보편 사회화는 사회의 보편적 가치 및 규범을 습득하는 것이며. 특수사회하는 각자의 특수한 소질, 재능, 속한 직업집단에 따라 이루어지는 사회화 과정을 의미한다.

  둘째, 교육은 사회적 선발 및 배치의 기능을 한다. 이는 개인의 능력, 소직 및 적성에 따라 사람을 선별하고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것을 뜻한다. 이 기능은 학교교육이 수행하는 가장 현실적인 기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인문계 고등학교나 실업계 고등학교의 구분이 그것이며., 혹은 2년제의 전문대나 4년제의 종합대학의 구분이 그것일 것이다.

 

 

2. 갈등론적 접근

  갈등론은 기존의 기능론적 접근법을 비판하며 등장한 이론이다. 주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현실사회와 학교 교육을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이를테면, 사회를, 생산수단을 소유한 지배계급과 그렇지 못한 피지배계급 간의 끊임없는 긴장과 갈등의 장(장)으로 파악한다. 그리고 이러한 갈등과 투쟁이 곧 인간 역사발전의 원동력이 된다고 보았다. 이와 관련한 갈등론자의 대표 인물로는 마르크스, 알튀세르, 부르디외(문화재상산론), 콜린스 등이 있고, 대표적인 이론으로는 이데올로기론, 문화재생산론등이 있다.

  이들 이론의 중심 개념은 갈등, 변화,. 강압에 있다. 이 세 가지 키워드 모두 사회의 본질적 모습이 된다. 갈등론에 따르면 사회는 본질적으로 갈등이 내재되어 있으며, 이러한 갈등을 통한 변화 가능성 또한 항상 지니고 있으며, 사회의 규칙과 질서는 자율이 아닌 강제적으로 부과된다. 사회의 한 부분으로서의 교육에 대한 입장 역시 기능론과는 달리 비판적이다. 기본적으로 학교 교육을 불평등한 계급구조를 고착화하는 기제로 보고 있다. 교육을 토한 계층의 이동 역시 어려운 것이다. 구체적으로 사회화 기능 비판, 선발 및 배치 기능 비판, 학교 교육 비판이라는 세 측면에서 살펴보겠다.

  첫째, 사회화 기능을 비판한다. 사회휴ㅘ를 지배집단의 이데올로기와 문화를 일방적으로 주입시키는 과정의 일환으로 보았다. 지배집단을 이를 통해 그들의 지배를 공고히 한다. 둘째, 선발 및 배치 기능을 비판한다. 학교교육의 선발 기능은 지배집단의 그들의 지배에 적극적으로 순종할 집단을 선발하는 한 과정일 뿐이라고 보았다. 이럴테면 학교에서의 보범생은 창의적이고 자유로운 성격의 인간이기보다는 제도 교육에 철저히 순응한느 학생일 뿐이다. 셋째, 학교교육에 대한 총평적 비판이다. 하굑교육은 사회적 불평등을 공고화하고 재생산하는데 정당화한다. 상류층에서 태어난 학생이 더 좋고, 노 높은은 수준의 교육기관에 진학할 확률이 높고,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있어 학업에 전념하기가 더 유리하다. 결론적으로 교육은 사회적 불평등을 방조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3. 해석적 접근(신교육사회학)

  초기의 사회학의 주된 경향은 기능론적 접근법을 주로 따랐다. 그러나 그 이후 마르크스 중심의 갈등론적 접근법이 기능론적 접근법을 비판하며 등장함에 따라 두 이론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들 두 이론은 '사회'나 '경제구조;라는 거시적 틀로 사회를 인식하였다는 것에서 그 공통점이 있다. 이는 곧 이들 모두 인간을 고저나 거싲거 틀의 종속변인으로 보았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런 특징은 인간의 구체적 삶의 모습ㅇ르 반영하지 못하는 오류를 낳았고, 이런 결함을 바로집기 위한 새로운 접근법으로 해석적 이론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해석적 접근에서는 거시적 틀이 아닌 미시적 관점의 중요성을 강조하며사회구조가 아닌 행위자를 중심에 둔다. 즉 행위자의 의지나 행동양식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해석적 접근법의 대표적 인물과 이론으로는 번스타인의 언어사회화와 계급, 미드의 상징적 상호작용론 등이 있다. 이들에 의하면, 사회는 인간이 만든 것이므로 사화와 개인간에는 상호작용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사회적 인간행위는 장녀법칙차롬 설명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다만 행위자를 고려한 입장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해석적 접근은 행위자의 중요성을 강조한 나머지 사회구조의 영향력을 다소 경시한 경향이 있다는 점에서 그 한계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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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는 옛 동프러시아의 수도 콰니히스베르크에서 태어났다. 그의 대표 저서로는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 <윤리형이상학 정초>, <윤리 형이상학> 등이 있다. 그는 당시의 합리주의적 철학사조와 경험주의적 철학사조의 통합을 시도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는 합리주의와 경험주의 모두 세계 인식을 ㅜ이해 필요한 것이라는 그의 판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작업은 그의 책 <순수이성 비판>에서 다루어진다. 허나 본 서(서)에서는 그이 도덕철학을 중심으로 살펴볼 것이다. 그의 도덕철학은 소위 "의무론"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그이 저서 <윤리 형이상학 정초>를 중심으로 그의 도덕철학적 주요 개념인 '자유', '의무', 선의지', '정언명령' 등의 의미를 살펴보고, 마지막으로는 그가 지닌 한계를 살펴보겠다. 

 

  우선 칸트는 학문을 이분법적으로 분류한다. '이성의 인식 방법에 따른 학문'과 '경험적 요소의 유무에 따른 학문'이 그것이다. 전자의 '이성의 인식 방법에 따른 학문'은 다시 '내용적인 것'과 '형식적인 것'으로 이분된다. 그리고 '내용적인 것'은 다시 '자연학'과 '윤리학'으로 이분된다. 이때 자연학은 자연의 법칙 하(하)에 있는 학문을 뜻하며, 윤리학은 자유의 법칙 하(하)에 있는 학문을 뜻한다. 자연의 법칙은 필연성의 세계, 혹은 인과 법칙의 세계라 할 수 있고, 자유의 법칙은 말 그대로 '현실 세계의 제약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세계'를 의미한다. 그에 의하면 자유는 윤리학의 학(학)적 성립의 근거가 된다. 칸트는 자유를 윤리학의 기본 전제로 삼는 것이다.

 

  다음으로, 칸트가 말한 '선의지'에 대해 살펴보겠다. 우선 의무론으로 대표되는 그의 도덕규칙은 소위 '정언명법'이라고도 불리는데, 정언명법은 일종의 절대명령을 의미한다. 그리고 절대명령인 정언명령을 정당화하는 것이 바로 선의지이다. 그는 절대적으로 선하고 무조건적으로 선한 것은 오로지 선의지뿐이 없음을 주장한다. 이를테면, 지식, 용기, 많은 돈 등 으루가 통상적으로 '선하다(좋다)'라고 하는 많은 것들은 사실 그것을 지니고 행위하는 자가 어떤 의지 혹은 동기를 지니고 있느냐에 따라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는 가치들이다. 다시 말해 그런 가치들이 만약 사악한 의지에 복종한다면 악이 된다. 즉 조건적으로 선함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무엇을 선하다고 말할 때, 그것을 선하게끔 하는 것은 오직 선의지뿐이 없음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의무는 이 선의지를 전제로 한다.

 

  다음으로, 정언명법에 대하여 살펴보겠다. 우선 칸트는 명법을 두 가지로 구분한다. 가언명법과 정언명법이 바로 그것이다. 가언명법은 '만약 p 라면 q를 행하라' 라는 식의 조건적 명령을 뜻한다. 다시 말해 '수단과 목적'의 형태를 지닌다고 할 수 있겠다. 반면 정언명법은 'p를 행하라' 라는 식의 명령으로, 무조건적인 명령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러한 명령은 이성적 존재자라면 당연히 알 수 있는 직관적/직접적/절대적 명령이다. 이때 칸트는 모든 인간은 이성적 존재자이며 단지 이성능력을 계발하기만 하면 되는 것으로 판단한다. 말하자면, 칸트는 정언명법을 이성의 산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는 정언명법을 "그것이 보편적 법칙이 되기를 의욕할 수 있는 그러한 준칙에 따라서만 행위하라"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정언명법의 단계를 세봔화하여 제시한다.

 

  정언명법의 첫 번째 단계는 준칙(maxime)의 단계이다. 두 번째 단계는 준칙의 보편화 단계이다. 마지막 단계는 보편화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준칙만을 정언명법으로서 받아들이는 단계이다. 이렇게 세 단계를 제시하면서 그는 정언명법의 원리를 또한 세 가지 제시하고 있다. 이 세 가지를 전제로 한다. 자연 법칙의 원리, 목적의 원리, 자율성의 원리가 그것이다. 이 세 원리들은 정언명법이 되기 위한 조건이기 도 하다. 혹은 이 세 가지를 전제로 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들을 순서대로 가각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자연법칙의 원리는 행위의 준칙이 의지에 의해 보편적 자연 법칙이 될 것처럼 하라는 것이다. 둘째, 목적의 원리는 인간을 대하는데 있어서 언제나 목적으로 대우하라는 것이다. 결코 단순한 수단으로 대우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셋째, 자율성의 원리는 보편적 도덕법칙을 만드는데 있어 신, 문화(관습) 등 어떤 외부의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 오로지(오직) 자기 자신이 스스로 입법자가 되어 자유로이 하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렇게 성립된 정언명법은 곧 의무게 되겠다. 또한 이러한 의무는 '의무에 대한 존경심'을 필요로 한다.

 

  지금까지 칸트의 도덕철학을 대략적으로 개요하였다. 마지막으로는 그의 도덕철학에 대한 한계적믕ㄹ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예외 없는 규칙의 문제가 있다. 둘째, 형식논리의 오류(인간을 이성적 존재자로 상정한 문제와 관련하여)가 바로 그것이다. 순서대로 살펴보자면, 첫째, 칸트의 도덕철학은 예외없는 규칙의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정언명법의 절차에 따라 정립된 의무에게 예외란 있을 수 없게 된다. 이는 곧 의무와 의무가 충돌하는 현실적 문제에 있어 뚜렷한 대안을 내놓지 못하는 상황을 만든다. 달리 말하자면 이는 형식은 있되 내용은 없는 도덕규칙이 되어버린다고 말할 수 있겠다. 둘째, 형식 논리의 오류가 있겠다. 그는 인간을 이성적 존재자로 평가하고 있다. 그리고 단지 이성을 계발하기만 하면 되는 것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우리는 '인간인 이성적 존재인가?'라는 의문을 표하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만약 칸트의 이러한 대전제를 우리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칸트의 의무 개념은 성립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칸트의 자유, 선의지, 정언명법과 정언명법의 절차 및 원리 개념, 그리고 칸트 도덕철학이 지니고 있는 한계를 살펴보았다. 칸트의 도덕철학은 형식의 엄격한 준수를 통해 도덕의 보편성과 확실성을 확보하고자 하였고, 이를 통해 윤리 상대주의 혹은 회의주의를 극볼할 수 있는 길을 터주었다. 그러한 점에 있어 큰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러한 형식주의는 결국 현실적으로는 최소주의적인 모습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으며, 또한 현실문제에 대한 구체적 내용을 제시하지 않느다는 점, 그리고 논리적으로 대원칙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칸트 개념 자체의 성립이 불가능하다는 한계를 지닌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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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의 덕 이론과 윤리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384~322)는 마케도니아 남부 출신의 고대 그리스 철학자로, 당대를 대표하는 철학자라고 할 수 있다. 그는 17세이 아테네의 아카데미에서 플라톤의 제자로서 약 20년 간 수학했으며, 이후 노년에 이러러 리케이온이라는 학원을 설립하여 그의 스승의 철학적 전통을 잇고자 하였다. 이런 그의 도덕철학의 사상적 핵심은 행복(eudaimonia)’에 있다고 할 수 있겠는데, 본 서()에서는 그의 목적론, (arete),의 개념과 종류(의미), 행복의 의미 등 주요 도덕철학적 개념을 살펴보고 마지막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덕 이론의 입장에서 그와 대별(대별)되는 입장이라 할 수 있는 행위 중심주의 도덕이론에 대한 비판을 살펴보겠다.


<형상과 질료>

 주지하듯, 아리스토텔레스는 목적론적 사상을 함축하고 있는 인물로 평가된다. 그러한 그의 목적론은 몇 가지 형이상학적 개념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형상과 질료, 실체 개념이 바로 그것이다. 우선, 그에 의하면 세상의 모든 실체는 형상과 질료의 결합으로 구성되어 있다. 형상은 각 개별물로 하여금 바로 그러한 개별물이 되게끔 하는 것으로, 이는 곧 개별물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질료는 개별물이 만들어지게 된 재료, 즉 개별물의 소재를 의미한다. 예를들어, ‘가위의 형상은 자르는 것이 되고 질료는 금속이 된다. 이런 식으로, 그에 의하면 세상의 모든 개별물들이 형상과 질료를 지니고 있으며 이 둘의 관계는 불가분의 결합관계에 있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목적론>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질료 개념은 곧 목적론적 사고로 이어지게 된다. 앞서 비유에서와 마찬가지로, 가위의 형상은 자르는 것이다. , 생각해보면 가위의 기능은 역시 자르는 것이며 이것이 곧 가위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겠다. 따라서 생각해보면 좋은 가위는 잘 잘리는 가위가 될 것이다. 즉 형상은 본질이며, 본질은 기능이며, 기능이 곧 목적이 되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각 개별물의 본질 혹은 기능이 잘 드러나는 상태를 두고 이 상태를 (arete) 있는 상태(혹은 유덕한 상태)’라 일렀다. 이때의 덕은 arete를 뜻하며, arete를 영어로는 virtue 혹은 excellence로 이해된다. 다시 돌아와 이런 식의 논리는 인간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인간 또한 하나의 실체로, 육신 일체라는 질료를 지녔고, 정신작용이라고 할 수 있는 형상을 지닌 존재이다. 이때, 정신작용 혹은 정신능력은 곧 덕에 따르는 삶이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본질을 덕에 따르는 삶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탁월함, 곧 인간으로서의 고유한 기능을 잘 발휘하는 상태가 곧 덕에 따르는 삶을 살 수 있음인 것이다.

 

<행복, 목적의 계열>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인간의 탁월함, 혹은 덕에 따르는 활동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에 의하면 덕에 따르는 삶은 곧 행복(eudaimonia)한 삶을 사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인간이 모종의 행위를 할 때, 가장 궁극의 목적에는 최고선으로서의 행복이 자리 잡고 있다. 이 역시 목적론의 논리에 따른 것이다. 목적의 위계를 두며 최고 목적에 행복을 둔 것이다. 이를테면, 한 인간이 경제적 행위를 통해 부를 축적한다고 할 때, 1차적 목적은 의식주의 해결일 것이다. 그리고 의식주의 해결은 한 개인의 사적 자아창조의 밑바탕이 될 것이다. 자아창조를 위한 일련의 행위들 일체는 곧 나의 행복을 목적으로 한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더 이상의 상위 목적은 존재할 수 없게 된다. 또한 그는 궁극목적이 되기 위한 조건 세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자기목적성, 완전성, 자기충족성이 바로 그것이다. 그에 의하면 이 세 조건을 충족시키는 유일한 것 역시 행복뿐이었다. 즉 행복이야말로 인간에게 가장 궁극적 본질적인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하위의 것들은 서로 계열적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도구적 가치를 지니게 된다)


 다시 돌아와,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인간의 덕에 대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인간의 본질은 덕에 따르는 삶이며, 그러한 삶은 곧 행복한 삶을 의미한다. 그런 그는 인간의 덕을 다시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한다. 첫째, 신체적 덕이다. 둘째, 정신적 덕이다. 그리고 정신적 덕은 다시 지적인 덕과 성격적 덕으로 나뉘어진다. 이때 도덕성과 관련하여 결정적으로 작용하는 것이 있는데 이는 성격적 덕(탁월성)이 된다. 참고하여 항간에서는 성격적 탁월성을 다시 중용의 덕과 공동체적 덕으로 구분하기도 하는데, 여기에서는 우선 중용의 덕과 관련한 성격적 탁월성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성격적 탁월성은 품성상태(hexis)를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다. 이때의 품성상태는 도덕적 선을 습관적으로 행할 수 있는 습관화된 행동성향을 의미한다. 그리고 습관화된 행동은 적절한 품성상태, 즉 감정, 동기, 성향을 모두 고려한 결과이다. 또 이러한 품성상태는 내용적으로는 중용의 덕에 따르는 삶을 의미하며, 방법적으로는 습관에 의해 형성된다고 할 수 있다. , 이때의 중용은 산술적 중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유의해야 한다. 관련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네 가지 덕을 예로 들고 있다. 용기, 절제, 관용, 긍지가 그것이다. 용기는 자만과 두려움에 대한 적절한 태도이며, 절제는 쾌락과 고통에 대한 적절한 태도를 의미한다. 즉 중용은 공자의 시중(時中)의 상태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덕 이론의 입장에서 진행되는 행위 중심 윤리학 비판의 내용을 살펴보겠다. 우선 역사적으로 덕 이론은 오랜 세월 도덕철학에서 지배적 위치를 점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18세기 공리주의와 칸트가 등장하면서 그 지위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공리주의에서는 행위의 결과가 고통을 주는지 쾌락을 주는지의 여부로 도덕적 평가를 하고자 하였고, 칸트는 정언명법을 통해 이성적으로 도출된 도덕규칙을 의무로 삼아 이를 절대적으로 따를 것을 주장했다. 그들의 입장에서 덕은 도덕적 평가를 하는데 있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으로 여겨졌으며 이에 따라 경시되는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덕 이론가들은 이들의 입장을 비판하였다. 즉 단순히 도덕규칙에 따라 기계적으로, 그리고 무미건조하게 행위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성격적 특징을 또한 지녀야 한다는 것이었다.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덕 이론가들은 크게 5가지 입장으로 행위 중심 윤리학을 비판한다. (루이스 포이만, 윤리학 참고)


 첫째, 행위 중심 윤리학은 동기의 요소를 결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만약 규칙을 실천으로 나아가게 하는 성품의 내재적 준비가 없다면 그러한 규칙이 과연 유효한가에 대한 의문인 것이다. 만약 어떤 외적 기제에 의해 따르게 되더라도 그러한 기제(김시 등)가 없어지는 순간 다시금 무용지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행위 중심 윤리학에서는 상과 같은 보상기제를 통해 동기화가 가능하다고 반박할 수 있다.

 둘째, 행위 중심 윤리학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신학적 및 자연법적 모델에 기초해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행위 중심 윤리학에서 사용되는 전통적 도덕 언어는 신과 같이 명확한 권위나 전통적 자연법natural law)에 근거해 있으며 이들은 오늘날의 현실에 맞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행위중심 윤리학자들은 합리적 의사결정 과정은 그러한 유효하지 않은 과정들로부터의 구분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며 이를 비판한다.

셋째, 행위중심 윤리학은 윤리학의 자발적 측면을 경시한다는 주장이다. 만약 규칙에 따라서만 산다고 한다면 그것은 곧 단지 차갑고 계산적인 도덕적 기계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행위 중심 윤리학자들은 도덕성을 완전히 덕이나 성품으로 한정시키지 않으면서도 덕이나 성품의 가치는 존중받을 수 있다는 식으로 반박한다.

 넷째, 행위 중심 윤리학은 최소주의적이라는 주장이다. 전통적 행위중심 윤리학은 주로 ‘~을 하지 말 것을 요구한다. 이러한 식의 최소주의는 보편화가 상대적으로 수월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도덕은 최소 도덕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행위 중심 윤리학은 최소주의는 최소한의 공통된 상식에 호소하는 것이기 때문에 보편타당성을 얻기 용이하다는 장점을 내세운다.

 마지막으로, 행위 중심 윤리학은 자유를 지나치게 강조하고 공동체를 경시한다는 비판이 있다. 사실 많은 도덕적 규율들은 전통이나 삶의 양식 속에서, 즉 관습에서 근거하고 그것이 곧 공동를 유지 및 발전시키는데 기여를 한다. 그런데 행위중심 윤리학은 이러한 속성들을 경시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행위 중심 윤리학에서는 공동체 윤리는 윤리적 상대주의를 함축할 가능성이 있으며, 이는 곧 도덕의 객관적 지위에 흠집을 낼 수 있음을 비판한다.

 

<마무리>

지금까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질료 개념과 목적론, 행복론, 덕의 개념, 성격적 탁월성과 중용의 덕을 살펴보았으며, 마지막으로는 덕 이론의 입장에서 전개되는 행위중심 윤리학에 대한 비판의 내용을 살펴보았다. 결론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를 필두로 하는 덕 이론, 혹은 덕 중심 윤리학은 도덕적 실천에 있어서 구체적 내용과 방향을 제시해줄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행복의 개념이 과연 보편타당성을 지닐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과, 덕이라는 개념이 자칫 윤리적 상대주의를 함축하게 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그 한계 역시 분명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교정: 그러나 행위 중심 윤리학에서는 규칙에 따라 행위할 것을 강조한다. 이를테면 공리주의에서는 최대다수 최대행복(이익)’이라는 결과를 산출하는 행위를 할 것을 강조하고, 의무론에서는 정언명법에 따라 이성적으로 도출된 규칙을 의무로 삼아 따를 것을 강조한다.


2017.12.28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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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학교폭력 예방을 위한 학급규칙 제정에 있어 고려사항

 학교폭력 예방을 위한 학급규칙을 정하는데 있어서 크게 두 가지 접근법을 고려해야 한다. 첫째는 내적 기제이며 둘째는 외적 기제이다. 내적 기제는 학생의 변화 가능성, 교육적 성장 가능성에 초점을 둔 규칙으로, 대표적으로는 바른 말 쓰기가 있다. 학생 상호 간 "상스러움", "천박함", "경박함" 등으로 정의될 수 있는 여러 어휘들, 이를테면 은어, 비어, 속어, 줄임말, 기타 소위 말해 "급식체"라고 불리는 말들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통제하며, 사용시 가해질 처벌 및 생활 제재 수준을 학급회의를 통해 정해야 할 것이다. 이는 인성적 및 정신적 측면에서의 교육 및 정화(혹은 훈육, 교화, 계몽)의 과정이며 이를 통해 학교폭력 예방을 의도할 수 있다.


 외적 기제는 위의 인성적 차원에서의 모종의 교육, 교화 및 예방 시도에서 걸러내지 못했을지 모를 비행이 부정의, 혹은 일탈을 사전적 차원에서 예방하는 외과적 처치라 할 수 있다. 이는 다음과 같다. 고대 로마에서 귀족 내지 원로원의 착취나 억압으로부터 다수이자 약자였던 평민의 생명과 재산, 여타의 정당한 권리를 지켜내기 위해 만들어졌던 '호민관 제도'를 활용하는 것이다. 고대 로마의 호민관 제도로부터 그 긍정적 이념을 차용한 시스템으로, '꼬마 파수꾼', '학급 지킴이', '학생 파수꾼' 등 다양한 명칭을 활용하면 될 것이다. 이때, 소위 학급 "호민관"을 선정해야 하는데, 이는 상담내역 및 학생기록부를 통한 교사의 판단과 학생들의 투표를 통해 해당 학급에 신뢰할 수 있고 도덕적 품성을 지닌 몇몇의 후보군 학생을 "호민관" 학생으로 선발하면 된다. 이렇게 선발된 학생은 보상, 익명의 활동을 보장하며, 해당 학급에 불미스러운 일이나 앞서 바른 말 쓰기와 같이 학급 내 제정된 규칙을 어기는 학생들을 교사에게 보고하는 등 학생 간 상호 제지를 통해 일탈의 통제 및 조기 감지를 이룰 수 있다. 학급 내 일거수 일투족을 학급 담임교사에게 보고 및 고발토록 하여 통제 및 감시의 사각지대를 원천 하단하며 학교폭력을 사전에 예방하는 방법이다.

2. 어울림 프로그램과의 비교

 최근에는 맟춤형 프로그램, 혹은 어울림 프로그램 등을 기획하여 학교폭력을 근원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시도가 있다. 이는 학교폭력의 근원적 해결을 목적으로 표방하고 있는 정부 주도의 현장 맞춤형 대책 활동의 일환으로, 일선의 일부 학교에서 시행되는 정책이다. 특히, 어울림 프로그램은 단순히 홍보에 그치는 것이 아닌, 실제로 방대한 양과 자료, 대상을 지니고 운영되는 학교폭력 예방 프로그램이다. 학생뿐만 아니라 학부모, 교사까지 고려하며 각 학교급별 및 학년별로, 그리고 학생의 상황에 따라 일반과정과 심화과정으로 구분하는 등 입체적이고 총체적인 프로그램을 의도한 것이다. 이는 이전에 일회성에 그쳤거나 형식적이고 피동적인, 또는 파편적으로 운영되었던 프로그램에서 이를 보완하고 좀 더 나은 체계로 통합하려는 긍정적 시도라고 평가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부 주도의 예방 프로그램도 여전히 결정적 한계가 남이 있다. 바로 학교폭력의 근본원인에 대한 처방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선 학교 폭력의 근본 원인은 무엇일까? 이는 보통의 상식 수준으로도 주지할 수 있는 것처럼, 일반적 요인으로는 학교폭력의 원인을 개인적 요인, 가정적 요인, 학교 요인, 지역 요인, 사회 문화적 요인 등으로 범주화하여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앞서 '어울림 프로그램' 또한 이와 같은 방식으로 원인을 파악하여 가정적 요인에서 학부모 프로그램을, 개인적 요인에서 학생 대상 프로그램을, 학교 요인에서 교사 대상 프로그램을 두는 등 다각적 해결책을 모색하고 있다. 그러나 앞서 범주화된 여러 원인들은 제 2차적 원인일 뿐 긍국적 원인이 아니므로 이를 인식적 기반으로 삼은 프로그램 역시 문제의 본질에 다가가지 못한다는 비판을 반게 된다. 그렇다면 학교폭력의 본질적 원인은 무엇인가? 


 위와 같은 개인적 요인, 가정적 요인, 학교 요인 등 여러 범주화된 요인을 만든 본질적 원인은 바로 지금 여기 우리 시대의 여러 이데올로기, 이념, 정치체에 있다., 현재 대한민국의 이념과 체제는 근대 자유주의의 정치이념의 지배주의적 이념, 즉 제국주의, 청산되지 못한 채 사방에서 부유하고 있는 식민사관의 잔재, 산업 자본주의에서 천민 자본주의로의 후진적 이행, 그로부터 나오는 노동자 그리고 노동 가치의 하락, 노동 착취, 경제적 불평등, 노동에서의 인간 소외, 무조건적인 성장 혹은 발전지향주의적 생활양식, 그리고 서양으로부터 유입된 이원론적 사고 등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기반 위에 성립된 우리의 법과 체계, 교육제도, 문화, 정치는 인간을 물화시겼으며 삶의 직접적 현실과는 괴리된 지식 중심의 교육, 경쟁적 입시 풍토, 왜곡된 그리고 천박하기 짝이 없는 출세 지향주의, 공교육에 있어서의 교사의 무력화, 빈곤 가정의 증가, 가정의 붕괴, 부모 교육의 상실, 적재 생존 등을 야기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현실이 당연하다고 느끼는 상식 일반과 그런 일반 상식을 지닌 시민과 기성세대를 양산하였따. 과연 그런 천박하고 척박한 토대 위에서 가정에서의 아이들을 맡고 있는 부모들은 행복하고 바람직한 상태일 수 있을까? 아이들은 바람직한 인성과 교양을 갖추며 성장할 수 있는가? 결코 아니다.


 노동을 통한 자유로운 자아의 창조장이 아닌, 생존을 위한 고된 노동의 장이 되어버린 척박한 우리의 현실에서는 비록 그것이 지극정성한 수로고움이 가미된 체계적이고 입체적으로 구성된 양질의 교육 프로그램이라 할지라도 역시나 단지 현상만을 감소시키는 교육프로글매으로서나 기능할 뿐 지속가능하고 인간 개개인들의 사적 자아창조를 위한, 그리고 학교폭력의 근본적 원인에 대한 해결을 위한 도구로서는 기 역할에 한계가 있게 된다. 궁극적 원인을 성찰하지 못햔 채 더럽혀지고 척박해진 이 땅 위에는 세대와 학년이 지나고 나면 언제고 그 잔인한 학교폭력의 씨앗이 다시금 고개를 들 가능성은 언제고 내재해 있다. 


 따라서, 결론적으로 학교폭력의 예방을 진정으로 위한다면 우리는 정치부더 바꿔야 한다. 총체적 우리 삶의 양식을 단순히 경제성, 이익과 손해, 경제적 성장과 발전주의, 돈, 자본의 잣대, 적과 나의 이분법으로 볼 것이 아니라, 조금은 더 공동체를 위하며, 획일적인 것이 아닌 다원적이며, 탈 인강중심주의의 생태 지향적이며, 타자와 유기적이고 긍정적 관계 속에서 자유로운 사적 자아창조를 할 수 있는 그런 사회, 도덕과 정의와 평등과 인륜성이 살아 숨쉬는 교육의 장, 삶의 장으로 탈바꿈할 것이 필요하다. 이는 학교폭력의 본질적 문제 역시 자연스레 해소딜 것이며 학생들의 비폭력적인, 그리고 자유롭고 창조적인 본연지성을 회복할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단지 학교 안에서의 폭력문제를 넘어 사회 및 국가로까지 그 이념이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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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의주의의 의미.  emotivism. 情意主義. 이모티비즘

 -정의주의란? emotive 감정을 자극하는> emotivism 정서주의, 정의주의 감정주의 등 다양하게 불림.

 情 뜻 정 意 뜻 의 主義 주의(어떤 방침이나 표준)

 -1923년 리첫즈와 오그든의 「의미의 의미」에서 시작

  에이어, 스티븐슨, 카르납 등 철학자들이 지지.

  어떤 판단에 대한 단어의 의미를 명확히 하는것을 분석하고자 하는 메타윤리학의 한 범주로써 본다. 1) 이런 메타윤리학적 특징에 따라 어떤 윤리적 도덕적 선택은 단지 감정이 표출되어 단어로 나타난 것 뿐이라는 주장이다. 아래 몇 가지 해설을 발췌하였다.

 

 윤리,도적적 판단들은 참도 아니고 거짓도 아니며 단지 그것을 언명하는 사람들의 감정을 표현한 것뿐이며 그것을 듣는 사람들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판단. 과학적 판단으로 환원될 수 없는 것.2)

 

 도덕적 판단은 과학적 절차에 의해서 참이라고 확증되거나 거짓이라고 입증될 수 없다. 감정에 관한 것이다. 단순히 사람의 '느낌'을 표출한 것 뿐이다.

  ex) 밥을 먹은 후 즐겁다고 끅 트림하는것과 같이 만족스러움을 표현하는 하나의 느낌. 감정을 표현한 도덕적 판단을 참이나 거짓으로 말할 수 없다. (이 트림을 참 거짓으로 말할 수 없다)3)

      '도둑질은 나쁘다'='도둑질, 으악!'4)

네가 사람을 죽인 것은 잘못이다= 너는 사람을 죽였다

 

 가치 판단의 객관적 정당화는 불가능하며 모든 가치판단은 결국 '나는 좋아한다', '나는 싫어한다'라는 자의적인 발언에 불과한 것이다. 윤리나 도덕적 충돌을 해결하는 것은 결국 우리의 감정이며 의욕이지 이성은 아니다. 나의 선호를 나타내는 것에 불과하므로 '네 말이 맞다', '네 기호가 틀렸다'라고 말할 수 없다.4)

 

더 나아가 스티븐슨은 이것이 옳다/나쁘다 라는 진술은 나는 이것에 동의한다/반대한다 그러므로 당신도 그렇게 하라/하지마라 라는 어떤 태도의 변경을 요구한다고 보았다.( ) C.L스티븐슨의 이모티비즘에 관한 연구 p. 15)

 

-정의주의의 비판?

1. 도덕적 가치판단의 부인, 논증을 거부하는 극단적인 경향, 그리고 감정의 의의에 관한 과장된 주장.5)

2. 이모티비즘에 따르다보면 도덕적 무정부상태가 된다. 나는 그때그때의 느낌이나 욕망, 기호 등에 따라 사람을 살해하거나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약자를 도울까? 정의냐 부정의이냐에 대한 선택의 고민이 과연 짜장면이냐 짬뽕이냐같은 기호의 선택과 동등할까? 히틀러의 유태인 학살은? 등 윤리적 고민 부재 & 기분이 좋으냐 나쁘냐의 차원이 아닌 옳으냐 그르냐의 문제는 전혀 다른 고민이다.좋아하는 것은 호 불호의 정의적 가치임에 비해, 옳은 것은 의무에서 생기는 합리적, 인지적, 집단적, 사회적 가치이다. 6)

3. 정의주의는 하나의 주장이나 가설에 불과한 듯 보인다. 검증이나 증거제시가 어렵다.

 

2. 문화인류학. anthropology.

문화인류학이란?

여기서의 문화인류학은 기()술적 윤리학의 한 범주로써 설명.

 

 윤리학은 이론윤리학과 기술윤리학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이중 기술윤리학은 여러 문화권에서 지켜지고 있는 규범들을 발견하고 소개하는 것을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기술윤리학은 엄밀하게 이야기한다면 윤리학이라고 하기보다는 문화인류학으로 분류하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반면에 이론윤리학은 기술윤리학과 달리 특정한 지역이나 시대에 국한되지 않는 일반적인 행위 규범에 대해 연구하고 그러한 행위 규범을 조직적으로 체계화하는것을 임무로 삼는다.

 

 보통 자연인류학과 대치되는 용어로서 넓은 뜻으로는 선사적 고고학(先史的考古學), 인류학적 언어학, 민족학(民族學) ·민속학 ·민족지(民族誌) 등 여러 분야가 포함되지만, 좁은 뜻으로는 사회인류학과 민족학의 두 분야를 가리킨다. 인류가 걸어온 역사와 현존의 인류에 의한 각종 소산(所産)을 대상으로 문화를 관찰 ·분석하고 그것을 종합하여 문화의 법칙성 또는 규칙성과 변이(變異)를 탐구하는 과학이다. 문화인류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미국의 경우이며, 영국에서는 그와 같은 내용을 사회인류학, 독일 ·오스트리아 그 밖의 유럽 여러 나라에서는 민족학이라고 부른다.

 방법론으로는 문화진화론 ·문화전파론 ·문화사론(文化史論) ·문화영역론 ·문학통합형태론 ·문화기능론 ·문화와 인격론 ·문화구조론 등이 있다. 문화인류학의 학문적 맹아(萌芽)는 이미 18세기 후반의 프랑스 계몽사상 중에 나타나며, 19세기에는 그 이론의 기초가 세워졌다. 연구대상은 주로 미개한 문화와 그것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들이지만, 최근에는 근대사회의 복잡 ·고도한 문화를 담당하는 사람들도 다루고 있으며, 역사적인 문화와 현재의 모든 문화가 그 대상이 되고 있다. 연구방법으로는 미개한 문화에는 문자가 없었기 때문에 문헌 기록에 의거하지 않고 비교적 장기간에 걸친 현지조사, 즉 유적과 유물들의 발굴 등이 불가결하며, 필연적으로 갖가지 이질적(異質的) 문화를 취급해야 하므로 비교연구가 매우 중요시된다. 7)

 

이것을 재 해석하여, 윤리에 있어서 문화인류학은 '어떤 행위에 대해 이곳에서는 이런식으로 받아들이고 저곳에서는 저런식으로 받아들이며 또 다른 행위에 대해서도 역시 서로서로 다르거나 같게 받아들인다' 와 같은 문장처럼 어떠한 가치판단이나 도덕적 가늠 없이 문화적인 측면에서 비교하여 기()술 하는것을 그 목적으로 한다.

 

3. 다원주의( pluralism 多元主義 )와 윤리적 다원주의( ethical pluralism)

-다원주의의 의미?

다양한 원인을 인정한다는 의미로 해석. 발생한 문제나 현상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인정할 수 있다.

다원주의는 단일단 기준에 따라 실제적인 차이를(그것이 문화든 사회현상이든 정치현상이든) 무시하거나 억업하거나 지배하는것에 반발하여 이러한 차이들이 최소한 이상으로 고려될 수는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사회, 문화적으로 우리와 다른, 또는 옳지 못하다 여겨지던 행동양식이 그들 문화나 민족에서는 인정되는 경우-> 그들에게 있는 그것을 인정한다. 그리고 가치의 정도를 정할 수 없다. 때문에 그것들은 경쟁이나 갈등의 대상이 아니다.(옷 입는 법, 관습에 의한 법률, 예술 등)

 일반적으로 인정하는 삶의 목적이나 이상적인 것, 평등, 행복등등의 개념은 한 개가 아니라는 것.

 

아래 다원주의 의미를 발췌하였다.

 개인이나 집단이 저마다 갖고 있는 가치관·이념, 또는 추구하는 목표 등이 서로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입장, 또는 그것을 전제로 하여 사회현상을 파악하고 설명하는 입장. 다원주의라는 개념을 한 마디로 정의하기 어렵다. 철학적으로는 '둘 이상의 근본적인 실재(實在) 또는 원리를 세워 그로부터 세계를 설명하려는 입장'이라 정의할 수 있고, 정치학적으로는 '국민은 누구나 국가 존립을 위태롭게 하지 않는 한 사상·언론·집회·결사 등의 자유를 허용하는 체제'를 다원주의라 말할 수 있다. 또 사회학적으로는 개인 또는 집단들이 갖는 가치관·이념, 추구하는 목표 등이 서로 다를 수 있다는 전제하에 사회현상을 설명하려는 입장이라 말할 수 있다. 다원주의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개인주의를 바탕으로 하며, 개인의 안전·이익·행복에 최고의 가치를 둔다는 점이다. 바꾸어 말해서 다원주의는 국가권력의 절대성을 부정하는데 그 특징이 있다. 8)

 

 현대사회에 들어서는 다원주의라는 것은 무조건 반대할수는 없는 개념이 되었음.

종교적 다양성 인정,

 

-윤리적 다원주의?

 다원주의는 여러 사회, 문화, 정치, 경제 등에서 언급할 수 있는데, 여기서는 윤리, 도덕의 문제에 있어서 다원주의를 이해하고자 함.

 도덕이론이나 윤리적인 선택 앞에서 어떤 선택이 더 가치가 있는가 하는 것은 선택의 당사자의 이해관계나 상황에 따른다.

 궁극적인 삶의 목적, 인간에 대한 이상적인 행동양식이나 모습 등을 단 한가지로 규정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가치판단이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일원론적 윤리관과는 차이.

 

 다원주의 윤리학은 근본적으로 동의 또는 상호주관성을 바탕으로 서로 이질적인 인생관이나 가치관을 갖는 이들 모두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보편적 규범의 확립을 목표하고 있다.9)

 

  ->, 다름을 인정하면서도 공통되는 가치를(모두에게 좋은 것) 찾고자 하는 것이며 이런 보편적 규범의 확립에는 '공평하고 중립적인 지점에서 이루어진 판단이나 합의'10)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상대주의와 차이점이라 본다)

 

-문제점

 만약에 윤리적 다원주의의 궁극적 목표인 보편적 규범의 확립의 경우, '공평하고 중립적인 지점에서의 판단이나 합의'가 불가능 한 경우가 발생할 경우 어떻게 해야 할까? 현실적으로 공평하고 중립적인 지점에서의 판단이나 합의가 되는 경우가 없다.

 가치들이 충돌할 경우 그 해결을 개인적인 사고의 위치에서 벗어나 더 보편적이고 몰개인적인 관점으로 나가 발견되는 상위원칙을 통해 모색한다.

이 경우 여러 경우를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하는 '다원주의'라는 카테고리를 벗어나 어떤 규범적 기준에서 볼 수밖에 없을 듯 하다 (이러한 개인적인 사고의 위치에서 벗어난 더 보편적이고 몰개인적인 관점이 어떤 것인가를 분석하고자 하는 것-> 분석철학(meta,그 넘어의 것)-> 그것에서 이모티비즘이 나온다)

 

또는

 그것은 정의와는 무관한 것으로써 각자의 가치관의 기초 위에서 행위 할 자유를 각자에게 남겨둔다. 11) (신앙, 임신중절 등)

 하지만 이것이 다른 가치와 부딪히게 되어 어떤 정의와 관련될 경우 판단을 해야 한다.

 

 그리고 모든 사회,문화에 있어서 다양성을 모두 인정할 수는 없는 것이 사실. ->다원주의의 한계

 (종교, 정치적으로 우리의 눈으로 바라본 저들의 인권문제) 그리고 이러한 한계를 극복할 수 없다면 윤리문제에 있어서 다원주의는 제국주의적 현상의 근거가 될 수 있다.12)



1) C.L스티븐슨의 이모티비즘에 관한 연구 p.3 안동대 교육대학원 박천국

2) 윤리란 무엇인가:주제와 역사, p.229, 철학과 현실사

3) 같은 책, p.231

4) CL스티븐슨의 이모티비즘에 관한 연구,p5

4) 윤리상대주의 p.145, 정인화, 관동대 인문과학연구소. 2011.1.31

5) CL스티븐슨의 이모티비즘에 관한 연구, p.57

6) 윤리상대주의, p.145

7) 문화인류학 [文化人類學, cultural anthropology ] | 네이버 백과사전

8) 다원주의ㅣ네이버 지식사전, 사회과학 > 행정

9) 다원주의, 축복인가 재앙인가, p.49, 한국철학회, 철학과 현실사

10) 같은 책, p.50

11) 같은 책, p50

12) 다원주의, 축복인가 재앙인가, 국회도서관 전자자료 p.15, 2002 한국철학회 세미나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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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능주의, 갈등론, 해석학에 대한 나의 견해

2. 평준화와 비평준화에 대한 나의 견해

3. 상대평가, 절대평가, 그에 대한 입장, 그리고 학업성취도의 연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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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기능주의, 갈등론, 해석학.

 나는 기능론과 갈등론과 해석학의 입장을 모두 부분적으로 수용하는 중간적 입장이다. 그래서 학교교육에 있어서는, 해석학적인 유연성과 갈등론적인 비판의식을 동시에 겸비하도록 교육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교육의 최종적인 목표는 완성된 사회다. 100년이 걸리든 1000년이 걸리든 어느 하나 흠잡을 데 없는 논리컴퓨터와 같은 견고한, 유토피아적 사회와 그런 인간을 만드는 것이 목표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사회속에서 인간은 기능론적으로 살아갈 것이다. 때문에 결과적으로 교육의 목표는 기능론이다. 자식교육에 있어서도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게 교육할 것이다.

 

 2. 평준화와 비평준화

 나는 평준화를 지지한다.

 

 3. 상대평가, 절대평가에 대한 입장. 그리고 학업성취도.

 모두를 지지한다. 즉 둘 다 시행해야 한다. 상대평가를 실시하면 우열을 가려 조금 더 경쟁적인 인재를 양성할 수 있다. 하지만 폐해가 있다. 이 폐해를 보충하기 위해 절대평가의 결과 또한 함께 공개해야 한다. 상대평가와 절대평가 사이에는 중간이 없다. 때문에 함께 공존해야 한다. 자녀교육에 있어서도 상대적으로만 평가하거나 결정하려 하지 않고 절대적으로만 평가하거나 결정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상대성에서 부족할때는 절대성에서 치켜세우면 된다. 추가하여 균형점을 찾는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방식으로 학업성취도 역시 향상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4. 교육과 계층간의 관계

 갈등론적이나 결국에는 바람직한 갈등론의 과정속에 기능론적, 해석학적 완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앞에서 말한 기능주의, 갈등론, 해석학적 입장에 대한 설명과 비슷하다. 인간은 기능론적이다. 하지만 기능론속에서 폐해가 발생한다. 그 기능론적 폐해와 병해를 깨달음을 얻은것이 갈등론이다. 갈등론과 해석학은 방법이나 수단적으로 공존할 수 있을것 같다. 해석학적 수단으로 무장한 갈등론은 결과적으로 폐해, 병해가 제거된 깨끗한 기능론적 사회로 향하고자 한다.

 다른 시각에서 보자면, 교육은 계층상승에 비례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단순히 "가방 끈 늘이기"식 교육증가는 아닌것 같다. 교육이 양적으로 부족하더라도 높은 질의 교육

 

 5. 미래직업세계와 관련한 교육관- 인문학과 자연과학

 인문학보다는 자연과학이 주가 될 것이다. 인문학의 끝은 아사(餓死)뿐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이 생각이 완성된 결말은 아니지만, 스스로 인문학공부를 하며 느낀 것이다. 인문학의 생산물은 관념속에 있을 뿐 그것을 외재적으로 끄집어내기 위해서는 인문학 외적인 자연과학과 기술이 필요하다. 학교교육이나 자녀교육 역시 이에 따라야한다.

 본인은 자녀교육에 있어서 유아기때부터 기술, 도구, 자연과학에 친숙한 환경을 조성하여 흥미를 유도할 것이다. 부모 스스로가 이에 익숙해지고 준 전문가가 되거나, 부모의 모습에 흥미를 가지도록 본보기로서 공부하고 학업할 것이다. 나 스스로도 답이 없는 학문, 인문학을 공부하기에 자녀에게 그 답답함을 경험하게 하고 싶지가 않다. 지식과 진리는 오차없이 완전한 것이어야 한다. 최소한 그런 결론을 지향해야 한다. 국어, 사회, 문학, 음악, 예술 등의 것은 적당히만 하면 된다. 물론 그 적당히의 기준도 논의거리이기는 하지만 지금은 논외로 한다. 하여 철저히 기계적이고 수학적 연산과 논리적 사고를 할 수 있는 자연과학적 인간을 만드는것이 교육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 최종적인 이상향적 인간상은 공리주의성격 인간이다. 하나 보론으로 첨부하자면 기존의 공리주의적 이론에 '지속가능한'이라는 말을 덧붙이고싶다. 수학이 자연과학에 있어서의 진리라면 공리주의는 인문학적 인간상에 있어서의 진리이다.

 다른 시각에서 보자면 인문학은 의미를 찾는 학문이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나는 의미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인식'이 있어야 한다. 인식이란, 사전적 정의로 '사물을 분별하고 판단하여 앎', 또는 '인지' 이다. 하지만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었다. 사람은 인문학의 영역에서 이런 사전적 인식의 영역에서 벗어나 조금 더 높이 도약하고자 했다. 이 현상은 혼란과 질서파괴, 무질서의 인정을 가져왔다. 인문학의 결과 데카르트, 칸트와 같은 해괴한 희대의 망상꾼들이 나타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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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모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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