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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5.14 어느 해군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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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을 바친 해군 생활
권수선
1. 나의 신병생활 이모저모
1948년 1월 20일, 나는 해안 경비대 제9기생으로 진해 해군신병훈련소에서 3개월간의 모진 훈련을 받고 해군 이등병 계급장을 가슴에 달았다. 
그 당시는 모든 보급품을 육군 국방경비대에서 받아와서 그런지는 몰라도 말할 수 없으리만큼 보급품이 부족해서 밀가루 수재비로 식사를 대신 할 때가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참으로 웃지 못 할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날도 식사당번으로 나와 친하게 지내는 동기생 이재욱군이 식사당번으로 나갔는데 그날따라 점식 식사가 수제비였다. 알루미늄 식통이 셋인지 넷인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꽤 큰 식통이라고 생각된다. 취사장에서 취사병들이 수제비를 퍼 담아줄 때 국물과 건더기를 골고루 퍼 담아 주면 좋으련만 국물만 담은 통과 건더기만 담은 통이 있었다. 배식할 때 식사 당번들이 알아서 나누어 주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취사장에서 연병장까지는 거리가 약 500미터가 넘는데 그 거리를 식사 당번들이 그 무거운 식통을 메고 오는데 수제비통이 출렁출렁 흔들이니까 수제비 덩어리가 국물 위에 떴다 잠겼다 하는데 이것이 굵기가 주먹만 했다. 이것을 본 이재욱 군이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그만 그 수제비 덩어리를 냉큼 입에 넣어 버렸다. 그런데 너무 뜨거워서 씹지도 못하고 엉겁결에 삼켜버렸다. 바로 그 순간 기도가 막혀서 의식을 잃고 수제비통을 맨채 땅바닥에 나가 떨어졌다. 그러나 다행이도 그곳은 바로 현재 해군병원-그 당시는 미 해군 통제부 병원- 후문이었고 미 해군 보초가 서 있는 바로 초소 앞이었다. 미 해군 보초가 이것을 보고 당시 미 해군 병원 의무실에 연락을 해서 미 해군 군의관들이 들것을 가지고 달려와서 싣고 병원으로 뛰어가서 바로 목을 째는 대수술을 해서 천만다행으로 목숨을 건졌다. 
또, 이런 일화도 있었다. 신병 훈련소에 입소하면 훈련복과 군화를 주는데 훈련복(군복)은 일본 해군이 입다가 버리고 간 “산시후꾸”였고 군화는 재생품인데 밑창에다 썩은 고무창을 되놔서 3일만 신으면 구두 뒤꿈치에서 못이 올라와서 구보라도 하는 날에는 발뒤꿈치에서 피가 나서 신발 바닥에 피가 흥건하였다. 그렇다고 열외로 나갈 수도 없었다. 만약 그렇게 되면 낙오자가 되어 귀대 후에는 숱한 기합을 다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를 악물고 참아야만 했던 것이다. 그리고 혹 일요일에는 단체로 외출을 가는데 그 외출은 외출이 아니고 기합 받으러 가는 것과 진배없었다. 왜냐하면 자유시간은 하나도 없고 계속해서 시내를 행진하면서 계속 하나둘, 하나둘 구령을 따라 외쳐야 하고 조금만 발아 안 맞아도 지휘봉으로 머리통을 얻어맞고, 교반장은 아무대로 뛰다가 걷다가 하고 여자들이 많이 있는 곳에서는 호루라기를 훽훽 불면서 그 자리에 앉어 일어나를 반복하고 해서 귀대하면 모두가 녹초가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핑계를 대고 이출에서 빠지려고 하는 사람이 많았다. 
일요일이면 신병들도 영내에서 자유롭게 다닐 수 있었다. 그래서 부둣가에 나가서 배에서 버린 로프 토막을 주어서 “미투리 집신”을 삼아서 끈으로 발허리를 꼭 묶어서 신고 훈련을 받기도 했는데 군화보다 훨씬 편했던 기억이 난다. 요즈음 신병들은 감히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리고 밤에는 취침시켜 놓고 나서 10분도 안되어 총원기상 연병장 집합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교반장님의 날카로운 불호령이 떨어진다. 그러나 그냥 나가는 것은 아니고 깔고 자는 매트-그 당시는 침대가 아니고 긴 마루바닥에다 속에는 짚을 넣고 겉에는 광목으로 싼 짚 매트를 깔고 잤다.-를 메고 연병장에 집합을 하는데 꼬반장님이 빳다 방망이를 들고 연병장에 먼저 가가서서 나오는 순서대로 세어서 10번까지만 세고 나머지는 동작이 느리다고 연병장을 한 바퀴 돌아와야 하는데 그 뛰는 모습은 짚매트를 매고 뛰는 것이 아니라 자기 키보다 더 큰 매트에 사람이 붙어서 가는 형국이었다. 황토 연병장이라서 많은 사람이 뛰게 되면 흙먼지가 자욱하였다. 그런데 그렇게 한 바꿔만 도는 것은 선착순 몇 명까지 뿐이고 나머지는 다시 한 바꿔 더 돌아야 한다. 이렇게 집합 행사가 끝나면 연병장에서 각종 훈련을 다 받고 숱한 기합을 다 받고 나서야 내부 반에 돌아 올 수 있었다. 그런데 이것이 끝은 아니다. 내부 반에 돌아오면 선입 하사관 일등변조-그 당시 별명은 저승사자-님이 빳다 방망이를 들고 기다리고 있다가 들어오는 놈마다 엉덩이를 한두 대씩 때려서 침구 속으로 들여보내는데 그것도 매고 온 매트를 깔고 담요 한 장을 뒤집어쓰고 순식간에 들어가야지 조금만 꾸물거리는 사람은 기합이 빠졌다고 또 빳다 한 대 더 얻어맞았다. 이렇게 해서 잠자리에 드는 것은 보통 자정이 훨씬 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일상적인 것이었고, 1주일에 두세 번 정도는 새벽 2시경에 비상소집이 있었다. 이때는 완전무장하고 매트는 신병들에게 필수품이니까 그것도 메고 나가야 한다. 이 경우에는 연병장이 아니라 영내를 벗어나서 시내를 한바퀴 돌고 마지막에는 진해 통제부 입구인 동문 밖 로터리까지-지금은 충무공 동상이 서 있는 곳-를 돌아서 신병 훈련소에 돌아오게 되면 날이 훤히 밝아온다. 요즈음 신병들에게 제대로 먹이지도 않고 신발도 제대로 신기지고 않고 이런 모진 훈련을 시킨다면 아마 훈련은 고사하고 신문에 나고 야단이 났을 것이다.
이 밖에도 신병 생활에 관한 에피소드는 수없이 많이 있지만 그것을 모두 기록하려면 책 한 권으로도 부족하여 이 정도로 줄이겠다.
2. 해군 최고의 포함 승조원이 되다
1948년 8월 15일 광복절에 나도 해안 경비대원에서 대한민국 해군이 되었고, 그동안 위병 분대를 거쳐 포항 해군 기지로 전속 가서 310함을 타게 되었고, 거기서 나는 갑판부에 배속되었다. 그 후 310함은 목포 제3정대로 배속이 되었고, 그 후 6개월 동안 제주도 공비 토벌 작전에 참전을 하고, 마지막에는 한라산 전체를 불태우고 목포항에 귀항하니까 부두에는 연예인과 가수들도 오고 무슨 개선장군이 돌아온 것처럼 큰 환영 행사가 벌어졌다. 
이어서 나는 310함에서 3등 병조, 즉 하사관이 되었다. 그 후 나는 기계를 배우고 싶어서 기관 학교를 지망하여 진해 해군 기관학교 제4기생으로 입교해서 6개월간의 교육을 받고 갑판부에서 기관부 내연사로 복무하게 되었다. 아는 기관학교를 졸업과 동시에 309함 기관부 발령을 받고 부임해서 기관부 교반장직을 맡아서 근무하던 2중 701함-일명 포함이라고도 하고 사병함이라고도 하였다. 왜냐하면 사병들의 월급에서 얼마씩 -아마 1원이었을 것임. - 일념인가 2년인가 모아서 사온 배였기 때문임 - 으로 전속 발령을 받았다. 
이 701함은 대한민국 해군 사상 최초로 대마해전을 승리로 이끈 대단한 군함이다. 그 당시 인민군은 대형 상선에다1개 여단 병력을 딛고 울산 장생포에 상륙할 목적으로 남하하는 중이라는 첩보를 입수하고 해군 본부의 작전 명령에 따라 701함은 외박 나간 대원들을 태우지도 못한 체 방중에 긴급히 출동해서 동해의 공해 상에서 적선을 발견하고 국적을 물어도 대답이 없으므로 적선임을 확ㅎ신하고 일반 화력의 자정거리-약 1500-2000미터-를 꾹 벗어나 - 701함 주포의 사정거리는 12000미터로 기억됨 -공격을 시작했다. 75미리 주포 45발만에 적함을 완전 침몰 시켰으나 본함에서도 사망자 3명 부상자 1명이 발생했다. 그 때 만약 그 적선이 침몰되지 않고 예정대로 장생포에 살육했다면 부산 일대는 큰 문제가 되었을 것이라는 전략적인 분석이 있었는데 이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아슬아슬한 위기를 극복하게 된 것이 바로 이 701함이었던 것이다.
이 701함에는 수병은 취사병 한 명 뿐이고, 갑판 기관포 작전 통신 등 모든 부서에는 전부 3등 병조 이상이었고 일반 함정에서는 수병이 해야 할 일을 701함에서는 하가관이 했다. 701함 승조원은 아무나 가고 싶다고 가는 곳이 아니었고 아주 우후한 사람만 골라서 각 함 함장의 추천을 받아야 했으며 추천 받은 사람 중에서 또 인사과에서 사상 검증을 받아 이상이 없어야 비로소 승함 발령을 내 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본함을 인수하고 보니 사실은 대동아 전쟁 때 사용했던 낡은 배였다. 그래서 우리는 배를 인수하자 말자 정비 작업에 들어가서 3개월 동안 수리와 정비를 하고 나니 6월이 되었다. 수리 후 1주일 동안 시운전을 하고 난 후 나는 기관장님 -소령- 에게 부탁해서 다행히 나는 “운 좋게”도 701함에서 진해 통제부 항무과로 전속 발령을 받았다. 왜 “운 좋게”냐 하면 701함에서는 하사관이 아니라 수병들이 하는 일을 하니까 수병 대접1밖에는 못 받는 것이지만 타 부서에 가면 당연히 3등병조니까 하사관의 직책에 맞는 일을 하게 되고 부하들도 거느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701함을 탄지 불과 3개월 남짓 밖에 되지 않았는데 아직 단 한 명도 전출입자가 없었는데 내가 처음으로 전출될 수 있었던 것은 그 당시에 701함 부기관장님 권대위님께서 동성동본 동향이라고 많이 봐 준 덕택이라고 생각한다. 701함에서 수리와 정비하느라 무척 고생도 많이 했는데 발령을 고 보니 무척 반가웠다. 다른 친구들은 날 보고 “야, 저 무슨 빽을 썼느냐고 하며 무척 부러워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도 그 배를 타고 싶어서 탄 사람은 3등병조 하사관 중에는 단 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발령 나는 날까지는 아무도 701함 승조원이 된다는 것을 몰랐으니까 말이다. 
3. 나의 육상 전투기
701함대에서 항무과로 전속을 가니 포함타고 정비하느라 수고했다고 10일간의 휴가를 얻어 고향에 다녀오던 날 저녁이 바로 1950년 6월 24일이었다. 진해 통제부 정문인 동문 안에 막 들어선 시간이 밤 9시경이라고 생각된다. 하늘 어디선가 비행기 소리가 나는데 저 비행기 소리가 왜 저래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늘 듣던 비행기 소리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 비행기는 인민군 비행기였고 진해 해군 기지를 정찰하고 갔다는 것이다. 내가 휴가를 다녀온 바로 그 다음날이 6월 25일,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원원히 잊지 못할 바로 그 625였던 것이다. 그날 나는 휴가를 다녀왔으니까 당직 하사관 근무는 내가 할 테니 전부 외출 가라고 하고 당지완장을 받아 끼고 장직사관 중위(성명미상)님과 단 두 사람이 장직 근무를 하고 있었는데, 외출 보낸 지 약 두 시간 남 되었을까 외출 나갔던 사람들이 외출 잘 다녀 왔습니다하고 전부 돌아온 것이었다.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물어보니 전쟁이 났다는 것이었다. 무슨 이런 일이 있나! 내가 당직 하사관인데 나도 모르게 전쟁이 나다니! 비록 나는 몰랐다고 해도 당직 사관에게는 연락이 있었어야 할 일이 아닌가 말이다. 전쟁 난 줄도 모르고 완장만 차고 있는 내 자신이 밉기도 했지만 단위 부서에 연락도 전쟁발생을 연락도 취하지 않은 통제부 사령부 당직 사령관은 도대체 무었을 하고 있었는데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 당시에는 외출을 나갈 때 외출 나갈 대원들을 부 통제부 사령부 앞 광장에 모아놓고 통제부 당직 총 사령관-영관급-의 주의사항과 지시 사항을 받을 뿐만 아니라 당직 부사령관-위관급-의 외출 점검을 받는데, 정복은 잘 빨아서 입었나, 바지는 주름이 잘 잡혔나, 수염은 잘 깎았나, 손과 얼굴에는 화장을 했나, 구두는 잘 닦아 신었나를 검사하는데 이 중 하 가지만 불합격해도 상륙-해군에서는 외출을 상륙이라고 함-금지가 된다. 그래서 당직사관이 부랴부랴 함대 사령부에다 전화를 해보지 전쟁이 났다는 것이었다. 625 사변이 난 것이었다. 625 사변이 나자 나는 학무과에서 방비대 -해병대 전신, 그 당시 육상 근무자는 전원 방비대로 편입되었음 -라는 부대원으로 보급선단의 신호장으로 근무하면서 부산에서 진해로 몇 번 군수 물자를 수공한 일이 있었다. 그러던 9월 어느 날 다시 육상부대로 편입되면서 나는 제3연대 제3대대 제3소대 제3분대장으로 임명되어 마산 진동 작전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 때 소대장은 라종대 해군병조장이었는데 나이가 나와 동갑이었고 무척 내 말을 잘 들어 주는 편이었다. 밤에는 잠복근무를 하고 낮에는 훈련을 했는데 전쟁터에서 훈련은 무슨 훈련이냐고 내가 극구 우겨서 주간에는 대원들을 풀 자게하고 밤 근무만 철저히 하도록 했다. 그래서 다른 소대원들은 훈련에 시달려서 잠복 근무 중 호-몸을 숨길 수 있도록 파놓은 구덩이 - 속에서 졸다가 대대 순찰에 들켜서 소대장이 기합을 받는데 우리 소재장님은 모범 소대로 전정되어 표창장을 받기도 있다. 그래서 우리 소대장님은 내 말을 더 잘 들어주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새로 신병들로 소대원 교체가 있었는데 해군 16기행들이었다. 해군 16기생들은 전쟁 중이라 훈련받을 시간이 없어서 일주일간만 집총훈련과 사격 훈련만 받고 일선에 배치되어 온 것이라고 했다. 그만큼 전황이 다급한 상황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신병들의 전호를 마치고 숙소-천막-에 들어왔는데 발을 보니 전부 헤어진 양말을 신고 있었다. 이것을 보니 갑자기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625가 발생했을 때 나는 학무과에서 수송선단 - 이배들은 각처에서 징발해 온 연락선과 크고 작은 상선들로 수송선단을 만들었음. - 신호장으로 있었다. 여기서 군수물자를 실어 나르는데 한 번은 까만 양말만 한 배 싣고 진해 해군 기관학교 앞 -현 해군 종합학교 - 에 조그마한 부두가 있었는데 거기에 입항했다. 그 부두 앞에는 조그마한 장점도 몇 개 있었는데 나는 내가 탄 배의 기관장을 보고 정 양발 한 가마니를 저기 저 상점에 맡겨 두라고 한 것이 생각이 난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양말을 새로 편입되어 온 대원들에게 신겨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그 다음 날 소대장님에게 그 의향을 말하고 진해로 가는 허락을 받았다. 아침을 먹고 바로 출발해서 지나가는 군용트럭도 타고 찝차도 잡아타고, 닥치는 대로 방향만 같으면 가는 데까지 얻어 타면서 무사히 진해에 도착해 보니 여기는 태평성대였다. 시가지에 들어서니 진해 경찰서 순경들은 경찰서 옆 주위의 잡초를 한가로이 뽑고 있었다. 나는 격세지감을 느끼면서 해군 기관학교 앞 부두가의 내점으로 가보니 그 때 기관장이 맡겨 둔 양말 한 가마니를 달라니까 상점 주인이 반갑게 내어 주었다. 나는 가지고 관 빽에다 가등 담고 나머지는 주인에게 주고 거기서 점심을 얻어먹고 떠나려고 하는데 주인이 얼마인가 돈을 내어 미는 것이 아닌가. 무엇이냐고 하니까 나머지 양말 값이란다. “이 양반아, 전쟁터로 나가는 사람이 돈은 어디에다 쓰느냐?” 하면서 거절하나 억지로 주려고 하여, “정 그렇다면 전쟁이 끝나고 행여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돌아오거든 술이나 한잔 사소.” 했더니 주인이 놀라면서 왜, 그런 소리를 하느냐면서 술은 틀림없이 꼭 살 것이니 반드시 돌아와서 꼭 한잔 하자고 하였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후전이 된 후에 진해로 와서 찾아가 보니 해군 지관학교는 종합 학교가 되었고, 그 앞 부두도 없고, 상점도 다 철거되어 버리고 그 사람은 어디로 갔는지 지금까지 소식도 모른다. 만날 수만 있다면 술이야 누가 사던 회포를 나누어 보련만 세상살이가 다 이런 것인가 보다.
양말이 가득 담긴 배낭을 등에 지고 진해 시가지를 지나 마진 터널을 향해 반쯤 산길을 올라가는데 한 할머니가 머리에 보따리를 이고 허리는 반이나 굽히고 지팡이를 짚고 올라가는 것을 보고 내가 그 봇짐을 냉큼 집어서 내가 짊어진 배낭 위에 올려놓으니 그 할머니가 하는 말이 군인 양반도 짐을 졌구먼. 하면서 무척 고마워하던 것이 눈에 선하다. 그러다가 얼마 안가서 군용 트럭이 한 대 오는 것을 보고 나는 무조건 차를 세우고 할머니도 태우고 나도 타고 보암까지 와서 할머니를 내려 드리고 본대까지 도착해 보니 저녁때가 다 되었다. 나는 곧바로 123분대 3소대 전원을 다 모아 놓고 양말 배급을 했는데 각 사람에게 두 켤레인지 세 켤레인지 돌아가는 대로 나누어 주었더니 대원들이 날 보고 보급관이라고 놀려 대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서 1년 이상 해상 근무 경력자는 신고하라고 해서 신고했더니 며칠 후에 보따리 싸서 진해 해군 함대 사령부로 가라고 하였다. 그래서 나는 배낭 한 개를 둘러메고 함대 사령부로 와보니 바로 해군 제일함대 소속 LCI 105함으로 승함 발령이 났다. 여기에서는 전투다운 전두는 한번도 못해보고 방어선만 구축하다가 3분대장의 직책을 부분대장에게 인계하고 아쉬움만 남긴 체 3대대 3소대를 떠나게 되었다. 
그 후 인수요원이 되어 미국에 다녀 와보니 내가 3소대를 떠나던 그 다음 날 새로 임명된 3분대장이 분대원을 이끌고 전방 정찰을 나갔다가 인민군에게 포위되어 전멸 당하고 단 한 사람만 살아났다고 했다. 그 살아남은 사람이 내가 맡고 있던 3분대 대원이었고 내가 귀국하던 날 학무과 부도에서 환영 행사가 열렸는데 3분대 대원이었던 그 대원(이름이 기억나지 않음)이 나를 찾아와서 나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다 죽었소.” 하면서 대성통곡을 하는 것을 보고 무엇이 다 죽었단 말이냐고 물어보니까 3분대 대원 전원이 전멸하고 자기는 전우의 시체를 뒤집어쓰고 살아났다고 했다. 이렇게 되면 그 해로 임명된 3분장에 대해서 몇 자 적지 않을 수 없다. 그 3분대장은 해군 11기생으로 성격이 대단히 거친 편이고 괴팍한 성격이라고 할까. 내가 3분대장으로 있을 때 그는 부분대장이었다. 하루는 부분대장과 전령을 대동하고 부분대장과 전령(성함미상)이 순찰을 나갔는데 마을(다 피난가고 빈 마을) 외곽에서 순경 하나가 총을 거꾸로 메고 술이 얼큰하게 취해서 노래를 부르면서 저만치 앞에서 가고 있는 것을 보고 내가 부분대장에게 “저 사람 총 바로 메고 가라고 해.” 했더니 부분대장이 막 뛰어가서 자기가 메고 있던 M1 소종 개머리판으로 그 순경의 등줄기를 힘껏 내리니까 그 순경은 그만 “만세” 하면서 기절하고 말았다. 내가 가서 흔들어 깨워서 일으키니까 정신을 차리기에 내가 그 순경보고 “무슨 만세 불렀나? 인민군 만세 불렀나?” 하고 물으니까, “아닙니다. 대한민국 만세 불렀습니다.” 하였다. 내가 들어 보니까 만세 소리밖엔 안 들리던데 그 순경은 “인민군인 줄 알고 죽는 줄만 알았습니다.” 하면서 저도 무슨 만세를 불렀는지 통 기억이 없다고 했다. 나는 그 순경에게 이르기를, “전쟁터에 와서 술을 마시면 그것으로 적에게 날 죽여주세요. 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앞으로 전쟁터에서는 절대로 술을 마시지 말라.” 하니, “이번에 혼이 났으니 절대로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하였다. 나는 그 순경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나 같아도 아야 소리가 먼저 나올 것 같은데 만세를 불렀으니 대단한 애국자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앞으로 절대로 술을 마시지 말라고 당부하여 돌려보내고 부분대장에게는 “총만 바로 메고 가게 하라고 했지 누가 때리라고 했나?”면서 야단을 친 일이 있었다. 이 사건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는 성격이 매우 거칠고, 무슨 일을 하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천방지축으로 하는 사람이었다. 분대장은 전쟁터에서 분대원의 안전을 가장 우선시해야 하는데 이런 성경의 소유자는 상황 판단을 정확히 하기 보다는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 추측컨대 이번에 일어난 참사도 분대장의 이러한 성격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되어 지도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3. 금성화랑무공훈장을 받다
625가 발발한 뒤 수개월이 지난 1950년 9월 중순 경이라고 기억하는데, 나는 LCI 105함의 승함 발령을 받고 남해에 출동 중인 본함을 향하여 환자 수송함을 타고 밤에 출항해서 남해 바다로 갔다. 
전시에는 수송선을 싣고 다니면서 출동 중인 배를 찾아다니면서 부임시켰다. 이렇게 수송선을 타고 가는데 무슨 역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알고 보니 그 냄새는 죽은 사람들을 뗏목 같이 엮어서 바다에 버린 것이 썩어서 나오는 냄새였다. 그 냄새가 얼마나 역한지 직접 접해 보지 못한 사람은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냄새만 날 뿐이지 밤이라 어두워서 천지분간을 못한 체 105함을 만나 승함하였다. 
그날은 선기장 등 책임 장교들만 만나서 신고하고 기관실을 한 바퀴 둘러보는 것으로 부임 인사를 마치고 다음날 아침에 함내 발령을 받아 보니 내가 기관 선임하사관에 임명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당시는 전시라서 승조원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 원칙으로 말하면 기관 선임 하사관은 일등 병조라야 하는데, 일등병조가 기관사를 하고 있었고, 2등 병조인 내가 기관 선임 하사관직을 맡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해가 막 바다에서 나오려는 이른 아침, 욕지도 앞 두미도 앞 바다를 해군 제1함대 소속 105함은 완전무장 전투준비를 완료하고 남해를 경비 중이었다. 당시는 계엄령 하이기 때문에 전 해상에는 군함과 수송선 이외에는 어떠한 선박도 운항이 금지된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날 두미도 앞 바다에는 통통통 하면서 어선 한 척이 남해읍 쪽을 향해서 가고 있었다. 그래서 본함 함교에서는 귀 선박은 즉시 정지하라는 국제 신호를 발신하였다. 그래도 그 배는 정지하지 않고 그대로 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즉시 정지하지 않으면 발포하겠다는 신호인 붉은 깃발을 올렸더니 그 배는 고기잡이 어선에서 쾌속정으로 돌변하여 무서운 속도로 도망을 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본 함에서는 함포사격을 가하기 시작하였고, 각종 기관포, 기관총 등으로 무차별 공격을 했다. 얼마 후 괴선박의 부리지-조타실이 있는 곳- 가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그래도 그 배는 정지하지 않고 도망을 쳐서 남해 읍의 바로 옆 긴 산 끝자락에 있는 조그마한 모래사장에 가던 속력으로 그대로 도킹시켜 버리고 인민군 3명이 산으로 도망갔다. 
나는 기관실에서 주기관의 조종간을 잡고 주기를 운전하고 있었기 때문에 직접 보지는 못했고 후에 들은 것이다. 그래서 본 함은 백사장 가까운 곳에 닻을 내리고 함장-해군 소령 최부영-님께서는 갑판 선임 하사관 해군 2등 병조 최세칠과 기관 선임 하사관 해군 2등 병조인 나 두 사람에게 즉시 가서 그 배를 가져오라고 했다. 최세칠 갑판 선임하사관은 나의 선배인 해군 신병 7기생으로 기억한다. 명령을 받은 우리 두 사람은 마침 여름철이라서 위에는 러닝샤쓰 한 장만 입고 반바지 차림에 권총 한 자루만 허리 띠 위에 겹쳐 차고 손으로는 젖은 구명정 - 본 함에는 구명보트가 없었는데 부산 조선공사에서 본 함 수리 차 갔을 때 도크 옆에 버려져 있는 것을 내가 주어다가 대강 수리해서 실어둔 것 - 을 타고 적선이 도킹된 장소에 가보니 괴선박은 모래사장 위에 덜렁 올라와 있었다. 
그래서 그 상황을 본함 함교에다 수기 신호를 해서 보고했더니, 회신이 오기를, 지금 썰물이니 앞으로 두 시간만 있으면 만조가 되는데 그 때 끌고 오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너희들은 거기서 죽어라.”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자기들은 바다 한 가운데에서 편안하게 있으면서 우리는 적지에서 권총 한 자루만 차고 두 시간을 기다리라고 하니 말이다. 
정상적으로 판단한다면 일단 귀함했다가 2시간 뒤 만조가 되었을 때 다시 가서 가져오라고 했어야 마땅한 일이 아니겠는가? 적군이 3명이나 그 산에 올라갔고 어디에 숨어 있는지도, 언제 와서 습격을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 아닌가 말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명령을 어기고 귀함하면 명령 불복종에 해당하고 전시이기 때문에 총살형에 처해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두 사람은 그러한 그 당시에는 그러한 생각은 하지도 못했고, 그런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다. 오직 저 배를 빨리 끌어내어 가져가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물이 들어오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배가 밀고 올라간 자국을 따라 모래를 파내고 돌멩이를 뽑아내면서 물길을 만들어 가면서 배 후미에는 더 깊이 파내고 배 후미를 어깨로 밀고 당기고 흔들고 해서 천신만고 끝에 물이 다 들어오기 전에 배를 바다에다 띠울 수 있었다. 이 배는 80톤이 넘는 배로서 작은 배가 아니었다. 그러나 함장이 우리 두 사람을 보낼 때에는 나도 기관을 운전하고 갑판선임 하사관은 배를 몰고 오라고 해서 보냈는데 막상 배를 바다에 띠워 놓고 기관실에 들어가 보니 놈들이 도망을 가면서 시동을 걸지 못하게 공기탱크의 공기 밸브를 다 열어 버리고 가버린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는 수 없이 최세칠 하사관은 보트에다 줄을 메고 보트 옆에 붙어 있는 가이 -가이는 일본말인데 우리말로 노라고도 하기 어려운 아주 작은 것 -를 저어서 배를 끌고 나는 배 후미에서 수영을 해서 배를 밀고 그야말로 목불인경이고 악전고투였다. 그 고생을 어찌 글로 다 표현할 수 있으리오. 하지만 천신만고 끝에 1시간 30분 만에 배를 끌어다 모함에 계류시킬 수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 80평생을 살면서 월남전에도 MST 미극동함대 수송선을 타고 6년 8개월 동안 숱한 위험한 고비도 넘어 보았고, 포탄이 빗발치는 탄우 속에도 배를 타고 돌아 다녀 보았지만 그 때와 같은 긴박하고 절망에 가까운 상황에 처해 보지 못했다. 그 때 모래를 파다가 오른 손 가운데 손가락의 손톱이 빠진 것도 모르고 있다가 배를 다 대 놓고 기관실에 가서 손을 씻으려고 하다고 손가락이 아프기에 손톱이 뒤로 넘어진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만 보아도 그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긴박했던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쟁 중이라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결국에는 손톱 하나가 병신이 돼서 그 병신된 손톱을 평행 가지고 살지만 이것이 화랑금성무공 훈장을 받은 대가라고 생각하니 감개가 무량할 따름이다. 
그래서 잡아온 배를 본함 옆에다 차고 닻을 올리고 주기관을 전진 미속으로 막 속력을 올렸을 때 바로 조금 전에 배가 도킹되어 있던 그 자리에서 따발총 소리가 마치 자갈 더미가 무너져 내리는 것과 같이 뽁아 댔는데, 본 함의 후 갑판은 해머로 두들겨 놓은 것처럼 페인트가 다 벗겨지고, 본 함 부함장 턱 밑 목젖 있는 곳에 총알이 지나가면서 찰과상을 내기도 했다. 그렇지만 다행이도 큰 부상자는 없었다. 그런데 그토록 쏘아대던 따발총 소리도 본함에서 함포 한 발을 발사해 버리니까 마치 덤불 속에 있는 참새 때에게 돌멩이 하나를 던지면 모두 없어지는 것과 같이 뚝 끊어졌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그 당시 인민군 부대는 1개 대대 병력이라고 했으며 거기서 인민군 부대본부는 약 10리 밖에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 놈들이 뛰어가서 지원군을 대리고 10리를 오는데 2시간이 걸린 모양이었다. 이렇게 보면 그 때 만약 우리가 만조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면 우리는 살아남지 못했을 것은 분명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날 105함은 오후 늦게야 욕지도 - 욕지도가 목포 이남의 중심 기항지였음 - 에 귀항해서 나포선- 그 배 이름은 인민군 내무서 경비선 - 을 용지항 제일 안 쪽 부두에다 접안시켜 놓고 순경을 불러다 보초를 세워 두었는데, 새벽 두 시경에 비상소집 사이렌이 울리고 난리가 났다. 
나가 보니 나포해온 배에서 불이 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배에서 이동용 소화펌프를 가지고 가서 화재를 진화하고 나서 순경에게 자초지종을 물어보니 담뱃불이 없어서 길 위에 있는 주막에 가서 담뱃불을 붙이고 돌아서 보니 나포선 기관실에서 불길이 치솟았다고 했다. 그래서 그 당시 욕지도에 있는 군인 헌병 순경 심지어는 민방위 대원까지 총동원해서 섬 전체를 이 잡듯이 철통같이 싸놓고 수색을 했으나 범인을 잡지 못했다. 
그런데 전날 부산에서 올라왔다는 수상한 놈이 있다기에 잡아다가 본함 선수 갑판창고에 다 가두어 두고 사흘간을 취재했으나 단서가 될 만 한 것이 없었는데, 3일 되는 날 아침에 아침 식사를 가지고 갔던 갑판 수병이 가져온 것은 와이셔츠 앞섶을 찢어서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서 슨 혈서였다. 글 혈서에는 “나는 국회의원 정 아무개의 동생”이라고 했다. 그래서 즉시 해군 본부에 연락해서 알아보니 국회의원 정00의 사촌 동생임이 밝혀졌다. 나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선수 창고로 한 달음에 달려가서 그 놈의 뺨을 연거푸 세 번이나 후려쳤다. 왜냐하면 그놈이 와서 바로 그런 사유를 이야기해 주었더라면 다른 용이자를 잡았을 터인데 그놈 때문에 진짜 범인을 놓쳤기 때문이다. 
그 후 불탄 인민군 내무서 경비선을 진해 해군 공창에 끌고 가서 깨끗하게 수리를 해서 해군 후생선으로 쓰다가 선명을 창우환이라 명명하고 현재까지 진해 해군 공창에서 태그보트로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 배에는 세미디젤 야끼다마 엔진이 4대가 들어 있었는데 마력 수는 250마력으로 알고 있다. 그 때 그 전투가 바로 해군 사상 두 번째 해전이라고 해군사에 기록된 남해 해전으로 해군 625 전쟁사에 기록되어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그 후 105함에 타고 있던 전 승조원에게는 굼성화랑무공훈장이 수여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생각하면 할수록 최세칠 선배님과 나는 화랑금성무공훈장 만으로는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영광스러운 화랑무공훈장을 받은 것은 군인으로서 크나큰 명예가 아닐 수 없다.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도 최부영 함장님과 갑판 선임하사관 최세칠 선배님은 내 기억 속에 뚜렷이 남아 있지만 지금은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가 없다. 살아생전 이 두 분을 만난다면 얼마나 감회가 깊을까 생각해 본다. 행여 이 글이 실리게 되고 그 분들이 이 글을 보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기대를 가져 본다. 
4. 은성무공 훈장을 받다
1952년 어느 날 남해 경비를 하다가 수리차 진해 해군 기지로 돌아왔다. 하루는 함정 인수 단원 수십 명이 105함에 견학을 왔다. 인수할 배의 주기관이 본함 메인엔진(주기관)과 동일한 기종이라고 했다. 나는 인수 요원들에게 엔진을 설명하면서 오전 교육을 마친 후 식당에 가서 점심 식사를 하고 있는데 메인엔진이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그러나 시동을 잘못해서 엔진이 오버스피드를 일으킨 것이었다. 그래도 나는 기관실에는 기관장교도 몇 명 있었고 선임하사관(일등병조)들도 있었기 때문에 누가 정지 시키겠지 생각하고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엔진이 정지하지 않고 기관실이 떠나 갈듯이 요란한 소리가 계속 나는 것이었다. 그제야 나는 놀라서 박 먹던 숟가락을 내동댕이치고 기관실로 뛰어가 보니 인솔자(해군대위로 추정됨)와 모든 인수 요원들은 기관실 양 옆으로 대피한 상태였고 엔진은 제멋대로 부서져라 돌아가고 있었다. 만약 그대로 두면 엔진은 폭발하게 되고, 엔진이 폭발한다는 것은 대형 인명 피해를 가져 올 수 있는 정말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때 그 엔진을 시동시킨 사람이 해군8기생인데, “이” 하사관이라고만 기억하는데 그는 혼자서 엔진으로 들어가는 연료 파이프를 해머로 때려 부수고 있었다. 그런데 연료 밸브를 잠가도 필터 안에 이미 들어있는 기름만 해도 엔진이 폭발할 수 있기 때문에 필터에서 여과된 기름이 엔진으로 들어가는 파이프를 부수어 버리려는 것이었다. 나는 화가 나서 뭣 하는 짓들이냐고 고함을 지르면서 조종간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 힘껏 밀어서 컬러치를 넣으니까 엔진이 껑 하는 수리와 함께 멈추고 그렇게 요란하던 기관실이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내가 오전 교육에서 인수요원들에게 메인 엔진을 시동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는데도 내말을 듣지 않았다가 큰 사고를 낼 뻔 한 것이었다. 
이렇게 일을 수습하고 난 후 기관부 꼬반장에게 수리와 정리를 부탁하고 식당에 가서 하던 식사를 다시 하는데 옆의 배에서 사관실 당번이 와서 인솔단장이 나를 오란다고 했다. 영문을 모른 체 갔더니 나의 관직 성명과 군번을 묻고 나서 그냥 가보라고 했다. 나는 기이히 생각했지만 물을 수도 없고 그냥 돌아왔더니 한 일주일 정도 지났을까 했는데 나에게 인수요원으로 발령이 났다. 그래서 나는 생각지도 않은 인수요원이 되어 인수단에 합류해서 각종 교육을 받고 그해 12월에 일등병조로 진급이 됐으나 발령도 못 받고 미국으로 가서 LSSL 형이라는 상륙보조함인 108함을 북미 아스토리아주 탱카포인트에서 인수받아서 켈리포니아주 센디에고에서 3개월간의 훈련을 받게 되었다. 훈련을 필한 후 귀국 도중 기관실 수리를 위해서 하와이에서 1주일간 머물게 되었는데, 그 덕분에 하와이 섬을 잘 구경하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 와이키키 해수용장에서 해수욕도 하고 저녁마다 교포들의 파티에도 참석하여 환영도 받고 정말 평생 잊지 못할 신나는 한 때를 즐길 수 있었다. 
수리가 끝나고 다시 출항하여 진해 모항에 돌아와 선박 명명식을 하고 군수물자와 각종 포탄 등을 만재하고 곧바로 서해로 출동했다. 그 당시에는 초도까지는 38이남이었고 석도는 이북이라고 기억한다. 바로 건너다보이는 곳이 몽금포라고 했으며 미 연합군 폭격기가 매일 폭격을 하는 것이 몽금포 쪽 높은 산 중턱이었는데, 그 산 중턱에 인민군이 굴을 파놓고 바다를 향해서 연합군 해군 함정들을 육상포로 공격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미공군기들이 두 대 혹은 세대씩 날아와서 교대로 하루 종일 공격을 하였다. 굴 입구가 완전히 무너져서 형편이 없음에도 굴속에서는 여전히 대포를 쏘아 대는 것을 보면 인민군의 저항도 대단했던 것 같다. 그런데 결국 호주 비행기 한 대가 그 대포에 맞아 떨어졌는데 다행히 조종사 두 명은 낙하산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들은 구축함에서 내린 구명정에 구조되어 우리 배를 지나가면서 우리를 보고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 주는 여유까지 보이는 것이었다. 그런 위험한 상황에서도 웃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우리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 배도 석도 안쪽까지 가서 몽금포 쪽으로 박격포와 주포를 쏘며 몇 시간씩 집중 공격을 할 때도 많았다. 108함은 주포와 박격포 외에도 각종 기관포 등 화력이 어마어마한 상륙 보조함이다. 하루는 몽금포 앞바다라고 생각되는데 나는 당시 일등병조로서 기관부 선임 하사관의 직책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날이 12월 크리스마스 전후라고 생각되는데, 그날도 나는 새벽 4시까지 근무하고 교대 후 침대에서 깊이 잠이 막 들어 있는 새벽 6시경 갑자기 와자자자작 꽝! 하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듯한 소리가 나를 침대 외에다 발딱 일으켜 앉혀 놓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배가 왼편으로 40도 가까이 기우려진 것 같았다. 108함은 출입문이 전부 왼편으로 나 있고 오른 쪽은 완전히 철벽(방탄벽)으로 되 있어서 만약 배가 왼편으로 넘어지면 배 안에 있는 사람은 완전히 통조림 신세가 되고 만다. 나는 침대에 들어갈 때는 아무리 추워도 항상 팬티 한 장과 러닝셔츠 한 장만 입고 자는 것이 버릇이어서 침대 매트는 항상 두 장을 포개서 깔고 자기 때문에 침대에 누우면 몸 전체가 매트 속으로 푹 빠져 들어간다. 그렇게 푹 빠져 있던 몸이 용수철 튀듯 발딱 일어나 앉히게 되었는데 정신은 말똥말똥했으나 옷을 입을 생각은 고사하고 출입문이 막히면 죽는다는 생각에 팬티에 맨발로 밖으로 뛰어 나오니 사관실 앞에서 함장(해군소령 최도갑)님이 서서 무엇이라고 소리를 지르는데 그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으니까 손으로 자기 엉덩이를 치면서 닭이 홰를 칠 때 하는 것처럼 목을 찔룩찔룩 그리면서 고함을 치고 있으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가까이 가서 귀를 기우려 들어보니 “퇴함! 퇴함!”하는 것이었다. 12월이면 몽금포 정도의 북쪽이면 영하 20-30도이고 바닷물이 갑판에 튀어 오르면 금방 얼어붙는 혹독한 추위인데 퇴함이란 죽음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하지만 함장님의 책임상 퇴함 명력을 내리지 않고 있다가 배가 침몰이라도 하면 모두 수장될 것이니 불가피한 결정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두 손으로 나팔처럼 해서 입에다 대고 퇴함이라고 큰 소리로 연이어 세 번이나 소리치고 나서 기관실 쪽으로 가려고 하니 배 갑판 전체가 빙판이 되어서 그냥 걸어가지는 못하고 방현대 손잡이를 붙잡고 간신히 후갑판까지 나가 보니 대원들이 퇴함 소리를 듣고 퇴함 준비를 하느라 단정(보트)을 묶은 끈을 풀고 있었다. 배는 반쯤 기우려진 채로 움직이지 않으니 배의 오른 쪽에 가 봐야 그것에 무엇이 있는지 알겠는데 빙판이라 가 볼 수도 없으니 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팬티만 입은 체 배를 빙판위에다 착 부착 시키고 뱃전에다 발가락을 걸고 개구리가 점프하듯이 다리를 바싹 오그렸다 쫙 펴면서 포대의 출입구 방탄벽의 한 끝을 간신이 붙잡고 두 손으로 당겨서 포대까지 가서 거기서 또 같은 방법으로 배밀이로 올라가서 오른 쪽 현람을 붙잡고 두 손으로 쑥 당겨서 배 밖을 넘어다보니 집채만 한 바위가 배 옆에 쑥 올라와 있었다. 그제야 나는 “아, 암초였구나!”하고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그 암초는 해도에도 없는 것인데 간조가 되면 물 위로 올라오는 것이었다. 그 때 108함은 간첩선이 남하하는 것을 잡기 위해 야간 잠복근무를 하고 아침 6시에 출항해서 전속력으로 기항지인 초도로 귀항 중이었다. 그 때 나는 정신을 차리고 기관실의 기계 소리를 들어 보니 주기관이 아주 저속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기관실로 엉금엉금 기면서 내려가 보니 대리 후라후-조타실에서 기관실로 엔진 속도를 지시하는 장치-는 후진 반속을 가리키고 있으나 엔진의 회전 속도가 너무 느리다는 판단을 하고, 죽을힘을 다해서 조종간을 당겨서 최대 속력으로 높였더니 배가 덜커덩 하면 내 몸이 날아서 주기관 덮게 위에 나가 떨어졌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배가 똑바로 선 것이었다. 나는 급히 조종간을 원위치에다 바로 놓고 갑판 위로 뛰어 올라가 보니, 보트를 내리던 사병들의 얼굴이 조금 전에는 하얀 백지장처럼 창백했는데 그 모든 사병들의 얼굴에 지금은 화색이 도는 것을 보았다. 아마 그들도 삶과 죽음의 갈림길까지 갔다 왔으리라.
그런데 옷을 입으려고 침실로 가는데 갑판에 큰물이 홍수처럼 뱃머리 쪽에서 밀려오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 물을 철퍽철퍽 밟으면서 뱃머리 쪽으로 막 뛰어 가보니 선수에 있던 갑판 창고가 날아가 버리고 그곳으로 바닷물이 치솟아 올라와서 갑판 전체를 물바다로 만든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물 가운데 서서 함교(브리지)를 향해 전진 반속-어해드 투-으로 낮추라고 고함을 쳤다. 속력이 낮아지니까 금방 갑판에 물이 잦아들었다. 그래서 다시 함교를 향해 “이대로 가시오.”하고 소리쳤다. 내가 무슨 함장이나 된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만약 배 밑이 다 터졌다면 기름 탱크가 전부 배 밑에 있는데 이것이 펑크가 나서 기름이 물에 섞이면 주기관이고 발전기고 올스톱이 된다. 그렇게 되면 이 추운 날씨에 배는 암흑세계가 되는 것은 물론이고 난방이 되지 않아 전부 얼어 죽을 판이다. 어느 탱크가 터졌는지 속히 알아내지 않으면 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것은 선임하사인 나의 책임이기도 했다. 그래서 옷을 입으려 갈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사운딩 튜브가 있는 곳마다 뛰어 다니며 점검을 해 보니 사병 식당 밑에 있는 탱크 한 개만 성하고 나머지 탱크는 전부 다 터져 버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식당 밑에 있는 탱크의 밸브만 열어두고 나머지 탱크는 전부 폐쇄해 버리고 나서야 옷을 입으러 침실로 갔다. 그 때는 발에 동상이 걸린 줄도 몰랐는데 그날 밤부터 아프기 시작해서 상당 기간 그것으로 고생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배를 구한 나의 기지와 노력을 평가해서 나에게는 화랑은성무공훈장이 수여되었다. 해도에도 없는 암초였기에 그날 당직 근무자들은 그로 인한 처벌은 없었고 훈장은 나 혼자만 받았다. 그 후 본함은 대청도에 가서 모래사장에 피칭(먼 바다에 닻을 내려놓고 배를 전속력으로 모래 사장에다 올려놓는 것)시켜 놓고 영국 구축함에서 철판과 용접공들이 와서 약 10일간 부서진 선수와 많이 터진 탱크를 임시로 수리를 하고 진해 군항으로 귀항해서 진해 해군 공창에서 대대적인 수리를 하여 625 사변이 끝날 때까지 서해 바다에서 전투를 하다가 휴전이 되면서 본함도 초도에서 철수했다. 
이렇게 108함은 내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에피소드를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내가 기억하는 이름은 최도갑 함장님 한 분 뿐이니 아쉽기도 하고 그분들에게 미안하기도 하다. 아울러 인생무상이 다시금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그 후 나는 해군 병조장으로 4년간 근무하고 전시 포함해서 17년 11개월의 군 복무를 마치게 되었다. 제대 후 나는 MST 미극동함대 수송선을 타고 월남 전쟁에 6년 8개월간 참전으로 하고 다시 해양계에 투신하여 총 36년간의 긴 해상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제는 이것도 먼 옛날이야기이고 노년을 보내면서 나에게는 가장 소중한 기억으로만 남게 되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에게 있어서 나의 해군 생활은 나의 인생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비록 괴롭고 아픈 기억으로 남을지라도 그것은 나의 일부이기에 그 아픈 기억들이 오히려 자랑스럽다.

 


그 사람을 가졌는가/ 함석헌

만리 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不義)의 사형장에서
'다 죽여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두거라' 일러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하며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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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모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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