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언적의 태극문변
조선중기의 학자 정구가 이언적 주돈이 주희 등의 태극에 대한 학설을 모아 그 이론을 정리한 책.
이 논변의 주요 부분은, 주돈이가 태극도설에서 말한 무극이태극을 육구소 육구연 형제가 유가의 정통이 아니고 노자의 학설에서 따온 것이라고 반박한데서 비롯된다. 육구소 육구연 형제는 이 글이 태극도설과는 부합되지 않음을 지적해 이것이 주돈이의 설이 아닌 타인의 설임을 강조하면서 주희가 주석한 내용을 포함시켜 공격하였다.
조한보와 손숙돈이 육구소·육구연 형제와 견해가 비슷한 것에 대한 이언적의 해명이 돋보인다. 이 책의 간행으로 태극설의 체재가 주돈이―주희―이언적으로 이어져 이 학설이 정통임이 밝혀지고, 반면에 육구소·육구연 형제와 손숙돈·조한보의 학설은 이단으로 폄억(貶抑)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2. 이언적과 조한보와의 논쟁의 간략한 소개
무극 태극 논쟁
1517년(중종 12년) 영남지방의 선배학자인 손숙돈(孫叔暾[3])과 조한보(曺漢輔) 사이에서 성리학의 기본쟁점인 무극태극(無極太極)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다. 그는 약관의 나이에 이 논쟁에 뛰어들어 자신의 견해를 밝혔는데, 주희의 주리론적 견해를 바탕으로 두 학자의 견해를 모두 비판하여 자신의 학문적 견해를 밝혔다.
이언적은 이 논쟁에서 이기론(理氣論)의 주리론적 견해로서 이가 기보다 우선적이라는 이선 기후설(理先氣後說)과 이기불상잡설(理氣不相雜說)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이기 논쟁에서의 이의 우위를 주장한 이우위설(理優位說)의 견해는 이황(李滉)에게로 계승되어 영남학파의 성리설에 선구가 된다. 이 일로 그는 일약 젊은 성리학자로서 명성을 쌓게 되었다. 이후 조광조 등이 그를 요직으로 천거하려 하였으나 사양하고 학문 연구와 독서에 치중하였다.
'무극태극논변無極太極論辯'에 관한 논쟁은 조선 성리학 철학사에 첫머리를 장식하는 논쟁이라 할 수 있다. 이 논쟁은 후일 이황과 기대승의 '사단칠정논쟁', 이이와 성혼의 '사단칠정논쟁', '인심도심논쟁'의 신호탄이 되었다.
그는 호를 회재(晦齋)라 하여 주자의 뜻을 계승하고 그대로 따를 것을 결심한다. 그러나 주자의 입장을 그대로만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주자의 견해나 사서육경의 내용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하지는 않고 자신의 입장에서 독창적으로 해석을 가하기도 하였다.
*시대적 배경 : 훈구와 사림의 대립 - 4대사화
무너져내리는 국가제도 – 왕권약화
3. 인물들의 기본사상소개
-이언적과 조한보의 논쟁은 주륙논쟁의 연장선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논쟁을 통해 조선성리학의 터전을 굳게 다짐
이언적 |
조한보 |
주희견해 바탕 |
유학자였지만 노장철학이나 불교에 가까운 모습 |
태극은 초월적이기도 하지만 구체적 현실에 떠날 수 없음. 즉 도덕법칙(태극)은 보편적이기도 하지만 사람들의 행동 하나하나에 떠나서 있는것이 아님 |
만물의 본질 태극에는 일상을 넘는 초월적 무언가가 있음 즉 도덕법칙인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에 사람의 구체적 행동 하나하나를 넘어서서 어딘가 초월적인 곳에 있음 |
진리를 꺠닫기 위해선느 내적 수련과 더불어 구체적 실천의 결과의 옳고 그름을 따져 바로잡아가는 외적 수양이 필요하다 |
자기 내면의 경건성에 바탕을 둔 수양을 통해서만 진리를 깨달을 수 있음. |
4. 논쟁발생의 시대적 의의
이언적은 조선조 유학, 곧 성리학의 정립에 선구적인 인물로서 유학의 방향과 성격을 밝히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그것은 주희(朱熹)의 주리론적 입장을 정통으로 확립하는 것이 그의 신념이기도 했다. 또한 사서육경과 그 중에서도 《대학》과 《중용》의 정신을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에 우선적으로 있다고 보았다.
그는 조선시대 성리학의 정립에 선구적인 인물로서 성리학의 방향과 성격을 밝히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주희(朱熹)의 주리론적 입장을 정통으로 확립하여 이황(李滉)에게 전해주었다. 그에 의하면 이와 기는 서로 분리된 것으로 이가 기보다 우위에 있으며 이로써 기를 통제하고 다스려야 된다고 보았다. 당시는 정치적으로 기득권인 훈구파와 비교적 덜 부패했던 사림파가 있었으며 훈구파에 의해 사림파가 억압받는 입장에 서 있었다. 독창적인 이기론과 사회에 비판적이었던 것, 실천을 중요시한 점 등은 그대로 이황과 남인과 일부 북인 학파에게 전달되었다.
5. 태극논쟁의 그 구체적 내용
태극논쟁은 무극태극(無極太極)논쟁이라고도 한다. 구체적으로 성리학의 주요 개념 가운데 하나인 태극이 무엇이며 어떻게 체득할 것인가,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 실천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이언적과 조한보의 논쟁.
5-1. 태극논쟁의 근원인 주륙논쟁.
성리학은 중국의 주돈이, 장재, 소옹, 정호, 정이라는 사람을 거쳐 주희라는 사람에 의해 집대성되었는데, 주희는 이 과정에서 여러 사람과 논쟁을 벌였다고 한다. 그 가운데 육구연이라는 사람과의 논쟁이 있다. 이 주희와 육구연의 논쟁을 주륙논쟁이라고 한다. 여러 차례 논쟁이 있었는데 그 중 우리가 볼 것은 ‘태극도설(太極圖說)’에 대한 이해를 중심으로 한 논쟁이다. 이 논쟁의 주제는 크게 네 가지다. 첫째, 태극도설이 주돈이가 지은것인지를 따지는 문제. 둘째, 무극이태극에서 무극이라는 표현의 필요성 여부 문제, 셋째, 극의 개념문제, 넷째, 태극도설의 연원문제 이다.
|
육구연 |
주희 |
1. 주돈이의 자작여부 |
의심 ㅇ |
의심 X |
2. 무극의 필요성 |
필요 X |
필요 ㅇ |
3. 극의 개념 문제 |
극 = 중 |
극 ≠ 중 |
4. 태극도설의 연원 |
노자의 학에서 비롯 |
노자의 학 반박 |
5-2. 이언적과 조한보
1) 논쟁의 계기
논쟁은 1517년부터 시작하여 그 다음 해까지 이어졌다. 당시 이언적 나이 27세, 조한보는 50이 넘은 상태였다. 이언적의 글에 따르면 먼저 이언적의 외삼촌 손숙돈과 조한보 사이에 논쟁이 있었다. 이언적은 이 논쟁의 내용을(조한보가 손숙돈에게 보낸 ‘망재의 무극태극에 대한 주자에 답한다’라는 편지) 친구 사우당을 통해 읽게 되고, 이언적은 여기에 ‘망재와 망기당의 무극과 태극에 대한 주장 뒤에 붙여 쓴다’라는 비평을 남겼는데 그 글이 뜻하지 않게 조한보에게 전해지고 이비편에 대한 견해를 조한보가 먼저 편지를 통해 보내 오면서 논쟁이 시작됬다. 둘은 모두 4회에 걸쳐 편지를 주고받으며 논쟁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조한보의 문집이 불타 자료가 없다.
2).조한보에 대한 이언적의 비평문
조한보
2-1. 태극은 바로 무극이다. 그러므로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의 무극은 무(無)이며 내적인 것이고 태극은 유(有)이며 외적인 것으로 나눌 수 없다.
2-2 무극이태극은 큰 근본이자 통달한 도로서 나눌 수 없는 한 덩어리이기 때문에, 그 근본만 깨달으면 모든 사물의 이치를 다 갖추게 된다.
2-3 무극태허(無極太虛)의 본체를 내 마음의 중심으로 삼으면 만물이 모두 내게 조아리게 되어 어떤 일이든 막힘이 없게 된다
2-4 무극허태의 본체는 본래 적멸(寂滅)이다.
이언적
2-1 주돈이가 무극이태극이라고 한 것은 사물이 생겨나기 이전의 형체 없는 존재이면서 또한 실제모든 사물의 뿌리가 됨을 형용한 것
2-2 이 이치는 비록 지극히 높고 묘한 것 같지만 그 참모습이 깃든 곳에서 찾는다면 지극히 가까운 실상속에 있다. 그 근본은 둘로 나눌 수 없지만 체용(體用), 동정(動靜), 선후(先後), 본말(本末)을 구별하지 않을 수 없다. 조한보처럼 구분없이 본다면 눈금 없는 저울이나 자와 같아질 뿐이다. 조한보의 견해가 이처럼 잘못된 까닭은 합쳐 보려고만 하고 나누어보기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2-3 그 견해는 바다를 건너려고 하면서 다리가 없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행각이며 하늘에 오르려고 하면서도 사다리가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견해이다.
2-4 옜 선비들이 태극의 본체를 말할 때 적이감이라고 했다.
3). 이 같은 이언적의 비평을 본 조한보가 이언적에게 편지를 보내옴으로써 논쟁이 시작된다.(1)
조한보
3-1. 무극이태극을 유무로 이해할 때 무라고 정의하더라도 없는 것이 아니어서 마음속에 신령스러운 근원으로 존재하는 것, 유라고 정의하더라도 정말 있는 것이 아니어서 마침내 점점 줄어들어 없어지게 된다
3-2. 모든 사물의 이치는 다 같다.
3-3. 감정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기 이전의 본 마음을 경으로 바로잡아 본체를 체득하고, 무극의 참세상에서 마음을 노닐게 하며 빈듯하면서도 신령스러운 본체를 내 마음의 주체로 삼는다. 따라서 존심양성을 통한 형이상학적 공부만이 필요할 뿐이다.
이언적
3-1. 이 같은 견해는 노자가 무에서 나와 유로 들어간다고 한 것이나 부처가 말한 공과 같다. 기의 변화를 가지고 말한다면 그렇게 말할 수 있겟지만, 이 이치는 지극히 높고 지극히 묘하면서 우리 주변의 구체적인 것들 속에 원리로써 들어있다.
3-2 모든 사물의 이치가 같다는 견해는 아주 훌륭한 것같지만 옳지 못하다. 예를 들어 말 소 닭 개를 보면 그 각각의 본성이 다르기 때문에 맡은 일이 달라지는 것이다
3-3. 이러한 조한보의 견해는 무극태극을 마음 밖에 있는ㄴ 것으로 보고 그 사이에서 노닌 뒤에 주체로 삼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에 옳지 못하다. 하늘의 이치가 사람이 하는 일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 아니다. 해서 형이하학적인 것을 토대로 하여 형이상학적인 것으로 가는 하학이상달공부가 마땅하다.
4). 위의 것에 이어 이언적의 두번째 답장에 따른 논쟁 (2)
두번째 답장에 따르면 조한보는 이언적의 견해를 받아들임으로써, “무극에서 마음을 노닐게 한다”는 표현을 뺌. 더하여 본체는 적멸이라고 했던데서도 멸자를 뺀 답서를 보낸것으로 짐작. 그러나 조한보가 자신의 주장을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다.
조한보
4-1. 빈 듯하면서도 신령스러운 무극의 본체를 말한다면 허무가 바로 적멸이며 적멸이 바로 허무이다.
4-2 경을 주로 삼아 마음을 보존하여 위로 천리에 이른다.
이언적
4-1 이것은 유가의 말을 빌려 이단의 학설을 말하는 것이다. 노장이나 불교의 허는 빈듯하면서 정말 아무것도 없는 것이지만 유가의 허는 빈듯하면서 있는 것이다. 노장이나 불교의 적은 고요하면서 마침내 없어지는 것이지만 유가의 적은 고요한듯 하면서 감음하는 것이다.
4-2. 하학공부 없이 바로 상달천리한다는 주장은 불교의 깨달음에 관한 이론과 같다. (생략) 사람의 일이란 형이하학적인 것이지만 그 속에 들어있는 이치가 천리이기 때문에 그 일을 배워 그 속에 담긴 이치에 통하게 된다. 때문에 이치를 궁구한다는 것은 앎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몸으로 체득하여 실천하는 일이 중요하다.
5). 두번째 편지에 이은 세번째 논쟁 (3)
두번째 편지에서 언급된 앎과 실천의 문제는 세 번째 논쟁을 통해 완전히 수양의 문제로 발전한다. 이언적의 세번째 편지에 나타난 조한보의 주장
조한보
5-1. 경으로 내면을 곧게 하여 내 안에 들어있는 하늘의 밝은 명을 돌아보면 내 마음이 굳게 안정되어 움직이지 않게 된다.
5-2 내가 적멸이라고 한 까닭은 사람들이 헛된 환형을 참된 현실로 알고 있기 때문에 이런 잘못된 생각을 깨뜨리기 위해 쓴 것이다.
5-3 하학을 통해 상달하는 일은 어린 아이들이나 하는것이요 호걸 같은 선비는 그렇지 아니하다
이언적
5-1. 그 말은 마음을 보존하고 본성을 기르는 공부를 말하는데, 이러한 공부는 아직 마음이 밖의 사물에 대해 움직이지 않았을 때의 공부로는 좋지만 그렇다고 하학공부를 소홀히 하면 직접 몸으로 체험하고 되돌아 살피는 실천이 부족하게 되어 일생생활이 인욕에 빠질 수 있다. (생략) 문을 나서지 않고 천리길을 가려는 것이며 발을 옮기지 않고 태산에 오르려 하는것과 같다.
5-2 형체를 떠나 이치가 있는 것이 아니며 형기를 떠나 도가 있는 것이 아니다. 하람의 형체는 하늘이 준 것이며 그 속에 지극한 이치가 깃들어있다.
5-3 공자도 노담에게 예를 물었으며 태묘에 들어갔을 때에는 모든 일을 물었다. 공자 같은 성인도 이렇게 하였는데 하물며 공자보다 못한 사람들엑 있어서랴!
이 논쟁의 끝에 이언적은 조한보의 견해가 불교의 돈오와 같으므로 잘못을 깨닫고 유가의 설로 돌아오라고 한다.
6). 마지막 논쟁 (4)
이언적의 편지에 따르면, 마지막 논쟁에서 조한보는 이언적의 견해를 받아들여 적멸이란 표현을 빼고 상달천리 아래 하학인사를 덧붙였다. 그러나 여전히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한다.
조한보
7-6-1 나와 모든 것은 같다.
7-6-2 경을 주로 삼아 마음을 보존하는 공부를 해야한다
7-6-3 공부 순서는 본체를 먼저 확립한 뒤에 하학인사해야한다.
이언적
7-6-1 이러한 논리는 그물의 윗줄만 보고 그 아래 펼쳐져 있는 그물의 눈들ㅇ르 따지지 않은 것이며, 피부를 빼놓고 뼈만 가리켜 사람이라고 하는것과 같다. 만물은 같은 이치에서 나오지만 이것과 저것, 취할 것과 버릴것, 좋은 것과 나쁜 것 옳은 것과 그른것의 구별이 없을 수 없다.
7-6-2 경을 주로 삼아 내면을 한결같이 하고 이를 바탕으로 밖을 제어하는 것이며, 밖을 가지런히 해서 다시 내면을 기르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안팎에 모두 이루어지게 되니 어느 한 쪽의 공부도 그만둘 수 없다.
7-6-3 하학인사경우에도 언제나 경으로 일관하는 것이다. 만일 조한보의 말대로 본체를 확립한 뒤에도 더 노력할 것이 있다면 이는 아직 본체를 확립한 경지에 이르지 못한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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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는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조한보는 만물의 본질인 태극이 자질구레한 일상생활을 넘어서서 초월적인 무언하에 들어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언적은 태극이 초월적인 것이기는 하되 우리가 살고 있는 구체적인 현실을 더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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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법칙에 대한 것 : 조한보는 도덕법칙이란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에 사람의 구체적 행동 하나하나를 넘어서서 어딘가 초월적인 곳에 있다고 생각, 이언적은 비록 도덕법칙이 보편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사람들의 행동 하나하나를 떠나서 있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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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진리를 얻을 수 있는가: 조한보는 자기 내면의 경건성에 바탕을 둔 수양을 통해서만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 이언적은 경건성에 바탕을 둔 내적 수양과 더불어 구체적 실천의결과가 옳은지 그른지를 따져 잘못을 바로잡아 가는 외적 수양을 통해 깨닫는 것.
6.논쟁의 의의
6-1 철학적, 계승적 의의 : 이언적의 태극문변은 이황과 이이의 논쟁에 디딤대 역할을 하였다. 특히 리(理)를 강조한 이언적의 사상은 이황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이언적은 주희를 비롯한 중국 성리학자들의 사상을 이어받았지만 이에 그치지 않고 한국적으로 계승하였는데, 그것이 이 논쟁에서 잘 드러나 있다. 특히 주목할 만 한 점은, 조선 초기에 고려의 재배 이념이었던 불교와 노장의 사상을 성리학과 분리함으로서 성리학의 주자학적 기초를 단단히 하는 배경을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또한 자연에 대한 이해뿐 아니라 이를 인간에게 접목한 실천, 수양적 문제의 한국화를 이끌었다. 논쟁으로 알 수 있는 이언적의 사상은 만물에 앞서는 理는 단순한 법칙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세계에서의 원리임을 강조하였는데 도덕적 실천이 자신 내부의 理를 깨우침으로서 가능하기에 마땅히 이를 발현하여 바람직한 사회를 구현해야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인간의 구체적 행동 근거를 진리에 둠으로서 진리에 창조적 능동적 도덕성을 부여하였는데 이는 이후 理와 氣중에 理를 우선으로 하여 인간의 실천을 강조한 이황 사상에 기여하였다.)
6-2 사회적 의의 : 이언적의 활동 시기는 4대 사화 (무오, 갑자, 기묘, 을사사화)의 시기에 속하는데, 이 시기는 권력을 휘두르던 훈구파 기성 관료와 사림파 신진 관료 사이의 대립이 극에 달하던 시기였다. 각 사화 때마다 많은 양심적 도덕을 주장하던 사림파 학자들이 죽임을 당했는데 이언적 역시 을사사화 때 유배를 당하여 그곳에서 돌아오지 못하였다. 이런 시기에 이언적의 진리는 삶속에 있으며 이를 따르고 실현하기 위해 인간다움을 행하는 것이라는 주장은 훈구파를 향한 일침이었다. 또한 인간 본성이 바로 도덕 원리로서 본성의 발현을 통해 올바른 사회를 만들고자 했던 주장은 사림파의 정당성을 밝히는 것이자 최고 지위자인 임금의 품성을 바로잡아 국가의 도덕성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후에 도덕 실현의 수혜자인 백성을 근본으로 삼아야한다는 주장의 밑바탕이 된다.
7. 이언적 사상의 문제점
이언적의 사상과 도덕 국가를 위한 주장이 지닌 문제점은, 그 사상이 너무 관념적이어서 현실적인 적용이 어려웠다는 것이다. 당시에 점점 더 커지는 사회 문제를 바로 잡기에는 부적합했다. 예를 들어 한정된 토지를 다루는 토지제도를 개선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이언적의 사상 같은 관념적, 이상적 대안이 아니었다. 또 다른 문제로는 인간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단적으로 理를 중시하는 이언적의 사상은 변화보다는 체득을 하여 개인이 변화하는 것을 강조하기 때문에 가치적 측면을 개인으로 돌릴 수 있는 것이다. 즉 사회의 문제가 사회의 요인이 아닌 부족한 인간의 요인으로만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관료의 부당한 녹봉은 사회적 문제의 결과가 아닌 그 관료의 수양 부족으로 인한 결과가 되어버릴 수도 있다. 또한 사회가 흔들리지 않도록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왕권을 강화하는 것이 理와 결부될 수 있기 때문에 사회 변혁의 의의를 지닌 이언적의 사상은 오용되어 봉건 전제 국가에서 왕권을 지키는 사상이 될 수도 있다.
Cf)논의해 볼만한 점
1) 단군 신화와 최치원의 사상을 보자면 한국적 조화에 대한 주장이 들어있다. 그렇다면 이 태극문변과 사상적, 사회적 의의를 보자면 한국적인 조화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2) 태극도설의 이론적인 부분으로는 분리되어있지만 현실적으로는 하나인 理와 氣에서 어느 한쪽에 대한 강조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결국 이 둘은 하나이기에, 정말 한국적인 실천 강조라면 이론적으로 구분하여 강조할 필요 또한 없지 않은가?
3) 이언적 사상의 문제점에서 나왔듯이(<이언적의 사상은 오용되어 봉건 전제 국가에서 왕권을 지키는 사상이 될 수도 있다.>), 이러한 성리학의 이기론은 결국 보수적인 구조로서 진보의 가능성을 과소 하는 것 아닌가. 조선 내의 성리학이 결국 극 보수적 성향을 띄는 것은 사상적 운명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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