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국가에서 본 윤리 - 2권, 6권, 7권을 활용하여
플라톤의 국가론 2권은 옳지 못한 것에 대해 정당화를 시도한다. '좋은 것'의 형태를 세가지 종류로 구분한다. 첫 째는, 오직 그 자체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좋은 것과(그 자체만) 둘째는 그것 자체 뿐만 아니라 그 좋은 것에서 생기는 결과물들 때문에 좋은 것(그 자체+그 자체의 결과물), 셋째에는 그 자체는 배제하고 보수나 명성 같은 결과물에 대해서 좋은 것으로 보는 것이다(결과물만). 대화에서 소크라테스의 제자는 그 중 어떤 것이 가장 올바른 것으로 보느냐 질문을 한다. 소크라테스는 좋은 것의 두 번째 형태를(그 자체+결과) 선택한다. 하지만 그의 제자는 현실은 그 자체로 보자면 까다로운 것으로 기피해야 할 것으로 보며 실은 보수, 평판을 통한 명성(결과물만)때문에 실천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의 제자는 이러한 현실을 옹호하기 위한 논변을 한다. 이를 위해 소크라테스의 제자는 아래 세가지 논의를 한다.
1. 사람들이 올바름을 어떤 것이라고 여기는지.
2. 좋은 것을 실천하는 모든 이가 그것이 불가피한 것이어서 마지못해 하는 것이지 결코 그것이 좋은 것이라는 이유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3. 그런 사람들의 생각이 온당하다는 것.(결론, 현실 정당화)
첫 번째로, 올바름(정의)가 어떤 것이라고 여겨지는지를 보면 '올바르지 못한 짓을 저지르는 것'이 '좋은 것'이며, '올바르지 못한 짓을 당하는 것'이 '나쁜 것'이라고 한다. 또 어떠한 사람도 올바르지 못한 행동을 할 처지에 놓이면 저지를 것이라 한다. 사람들은 올바름보다 올바르지 못함이 더 이득이라 생각한다.
두 번째로, 좋은 것(올바름)을 실천하는 이유로는 올바름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올바르지 못한 짓을 행할 수 없는 무능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행동이 '좋은 것' 그 자체여서가 아니라, 올바름은 사실 개인에게는 좋은 것이 못 되나 자신이 올바르지 못한 짓을 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좋은 것을 행하는 사람을 칭찬할 뿐이라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사람들은 올바른 것 그 자체를 하는 게 아닌 '올바른 듯' 보이는 것이 이득이기에 올바른 듯 보이려는 것 뿐이라 한다.
결론적으로 제자는 올바름을 행하는 사람과 올바르지 못함을 행하는 사람을 각각 극단적 상황에(올바름을 행하나 사람들은 올바르지 못하다 보는 상태, 올바르지 못한 것을 행하나 사람들은 올바르다 보는 상태) 두고 보았을 때 어느 쪽이 더 행복한가를 가늠하였을 때 올바르지 못함을 행한 사람이 행복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옹호로써「 만약 [신이 없다면or무관심이라면, 나쁜 짓을 해도 심판X], 만약[신이 있다면, 나쁜 짓->명예,부 얻음->명예,부를 바치며 신에게 속죄->회계->인정,정화]」이라는 신의 속성을 이용한다. 결국 올바르지 못하게 하거나 올바르게 하거나 같다고 말하며 끝맺는다.
이에 대해 본인은 '옳지 못한 행동에 대한 정당화'가 설득력 있게 느껴진다. 좋은 것을 하며 사는 사람은 손해를 보며, 좋지 못한 것을 행하면 이득을 볼 수 있는 지금의 현실이 그렇다. 또 신이 있거나 없거나 결국에는 같을 수 있다는 말은 상당히 설득력있어 보인다. 그 자체로써 '좋은 것(올바름)'을 하는 사람 역시 짚어보자면 내면에 어떤 이득( 자기만족, 선한 일을 하며 선하지 않은 일을 하는 사람을 보며 자신의 행동에 좋은 기분을 느끼는 것, 자기만족과 그 기분느낌을 올바르지 못한 일을 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가치보다 더 상위에 두는 것)을 바라며, 무의식중에 명성이나 평판에 대한 기대가 있으며 때로는 의식적으로 드러나나 그것을 애써 부정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생각한다.
6권에서는 국가의 통치자 또는 수호자가 갖추어야 할 조건들을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통치자들은 즐겁거나 괴롭거나 슬프거나 제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임이 판명된 사람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 사람은 서로 대립되는 성질이지만 그 둘이 대립되기에 공존 가능한 어떤 두 성향을 '잘 그리고 훌륭히' 갖추어야 하며 (약간의 정반합적인 모습) 그렇지 못할 경우는 배제해야 한다고 말한다. 궁극적으로는 가장 엄밀한 의미의 수호자로는 철학자들이 임명되어야 한다고 본다.
여기에 더해 플라톤은 위에 열거한 인격이나 성향이나 이전의 올바름에 대한 개념보다 더 중요한 '배움'이 있다고 주장하는데, 그것은 '좋음의 이데아'이다. 좋음의 이데아 덕분에 올바른 것 그 밖에 다른 것들도 유용한 것이 되는 것이다. 올바른 것들과 아름다운 것들이 왜 좋은 것인가를 결정한다고 한다. 이 외에 이데아에 대한 생각을 펼친다.
7권에서는 교육과 교육의 부족에 대한 현실을 어떤 동굴이론을 통해 표현하고자 한다. 요약하자면, 우리 같은 일반사람들은 동굴 속에 있으면서 바깥 빛에 의해 비치는 그림자만을 보면서 그것이 완전한 사실인양 살고 있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으며 그 바깥은 '이데아'세상이라고 가정한다. 그곳 동굴을 벗어나 이데아 세상을 확인한 사람을 철학자 또는 선각자로 보는 것 같다. 그리고 바깥 세상을 보고 온 사람은 저 동굴 안의 사람들이 바깥세상인 이데아를 알아야 하고 또 봐야 한다고 결론을 내리지만 암적응을 하는데 시간이 걸린다. 바깥을 보고 난 뒤 오히려 동굴 안의 것을 다수인 자신들과 같이 못 보니 동굴 안의 사람들은 그 바깥에 갔다 온 사람을 신뢰하지 않을 것이며 또 올라가지 못하게 할 것이라는 것과, 또는 암적응이 되어 동굴속에 비치는 그림자를 가장 예리하게 판단하여 예측하고 명예와 존경을 받을 것이기에, 슬기롭게 되기 위해서는 이데아를 보아야 한다는 것이 그 내용이다. 위의 사실이 진실일 때, 지금의 교육자들은 아직 이러한 이데아를 바라본 교육을 하고있지 않다는게 그의 요지인 듯 하다.
6권과 7권을 종합하여 보건대, 물질로만 이루어진,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을 바라볼 때, 서로 대립되는 성질, 예를 들어보자면 피곤함이 있기에 휴식이 좋은 것이고, 배고픔이나 식욕이 있기에 포만감이나 식사가 좋은 것이고, 병이 있기에 건강이 좋은 것과 같이, 이렇게 서로 다른 성질의 것이 대립되기에 조화가능한 것이며, 플라톤이 말한 통치자의 조건 역시 이들 대립되는 성질을 적절히 갖춘 사람이 적격이라는 말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인간은, 더하여 철학자 역시 사람이기에, 인간인 그 누구도 통치자로써 조화로움을 갖출 수 없는 것 같다. 7권의 이야기는 모두 우리가 사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며 그 너머에 더 '좋은 것'의 세상인 이데아가 있다는 것을 가정하는데서 출발하는 것처럼 보인다. 세상은 단순히 물질로만 이루어져 있으며, 우리의 정신, 영혼, 이데아, 신 등의 개념은 이러한 수많은 물질들의 조합이 만들어낸 개념일 뿐이라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가치나 의미도 주지 못할 것 같다.
'카테고리 정리 > 길게 쓴글(두번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현대 예술의 난해함, 그리고 우리가 추구해야 할 자세는? (0) | 2014.07.17 |
---|---|
흄의 도덕에 관하여 (0) | 2014.02.04 |
니코마코스 윤리학 . 아리스토텔레스 (0) | 2013.11.24 |
밀, 공리주의 (0) | 2013.11.22 |
이언적의 태극논쟁 (0) | 2013.11.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