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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구글)

니체의 『도덕의 계보』 비판


1. 니체 『도덕의 계보』의 전반적인 내용

2. 니체의 선악(좋음과 나쁨)의 개념 비판

3. 니체의 '원한심리' '노예도덕' 재평가

 

1. 『도덕의 계보』에 대한 전반적인 느낌

 도덕의 계보는 세 논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 제1논문을 다루겠다. 1논문의 주제는 '선과 악', 그리고 '좋음과 나쁨'에 관한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선과 악 개념의 계보, '좋음과 나쁨' 개념의 계보를 다룬다. 결론적으로 여기서는 '도덕적-비도덕'의 대립이 '-'의 대립이 아닌, '좋음-나쁨'의 대립과 동치되는 방식을 주장하게 된다. 즉 고귀한 가치평가 방식인 것이다.

 

2. 니체의 선악(좋음과 나쁨)의 개념

 니체의 주장대로라면 도덕적 개념인 선-악은 그저 고귀하지 않은 가치평가 방식인, 즉 원한의 심리학이 형성해 낸 노예도덕일 뿐이다. 노예의 도덕이라 함은 성적, 출세, 지위, 재산 등에서 비롯한 가치판단을 말한다. 그는 기존의 도덕을 노예도덕이라 칭하면서 기존 도덕을 도덕에 대한 우리의 도덕적 편견정도로 여긴다. 니체는 그 "노예도덕"을 주인도덕, 고귀한 도덕으로 대체시키려는 도덕의 이단아일 뿐이다.

 

 

3. 니체의 '원한심리' '노예도덕' 재평가

 기존의 도덕적 가치를 비판하는 일은 진보를 위해, 즉 현재의 상태를 지양하며 더 나은 미래를 향한 현재의 역동성에서 분명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기존의 도덕사, 도덕 틀 전체를 엎어버리는 것은 위험한 생각이며, 니체의 그 생각은 현재에 발 딛고 있지조차 않다.

 

..

 

지금까지 지상에서 도덕으로 칭송받은 모든 것을(도덕) 미심쩍게 여긴다.(p.14)

 

 

; 도덕, , 순종, 동정 같은 것을 걸림돌 정도로 여긴다. (순종을 걸림돌로 생각하였는지는 의문이 있지만.)

니체 ; 동정(동정, 동정도덕)을 비판 p.17 동정본능. 쇼펜하우어가 오랫동안 미화하고 신성시하며 세계 저편의 것으로 만든 '비이기적인 것'의 가치, 즉 동정본능, 자기부정본능, 자기희생본능의 가치... 이러한 본능에 대해 내게서 점점 더 근본적인 의구심과 점점 더 깊이 파고드는 회의가 생겼다...

-> 신성한 것, 선한 것으로써의 '동정'(희생) 있다.

 

니체 ; 우리 인간같은 인식하는 존재조차 자기 자신을 잘 알지 못한다. 여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한번도 탐구해 본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p.11)

 우리는 사실 우리 자신에게 필연적으로 낯선 존재로 있고,... 우리 자신에게 우리는 '인식하는 자'가 아닌 것이다...

 ->하지만 잘 아는 인간, 탐구해본 인간은 분명 있다. 그리고 인식가능하다.

 

 

 기존의 도덕적 가치를 비판하는 일은 분명 필요, 그러나 기존의 도덕사? 도덕 틀 전체를 엎어버리는 것은 위험한 생각.

 사람들은 이러한 '가치들'(기존의 도덕관념)을 주어진 것으로, 기정사실로, 아무런 무넺제기도 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겼다.(<-니체말)

 -> 이부분은 동의한다. 하지만 전체를 부정할수는 없지 않느냐... 분명한 것은 '선한 사람' '악한 사람'보다 훨씬 더 가치있고, 이는 조금의 의심의 여지도 없다. 문제제기거리가 안된다. 여전히 조금의 의심이나 동요의 여지가 없다.

 

선악과 좋음과 나쁨은 구분된다.

 

내가 이해할 수 있는 한에서 다루어본다.


본문)

니체의 저서 『도덕의 계보』의 서문과 제1논문을 바탕으로 하여 첫째, 『도덕의 계보』 의 구성, 둘째, 『도덕의 계보』 의 내용에 대한 본인의 입장을 써보겠다. 먼저 니체의 제1논문인 ['선과 악', '좋음과 나쁨']은 그 내용을 토대로 하면 총 17개의 상세 목차가 있다.[1] 구체적으로는 선과 악 개념의 계보, '좋음과 나쁨' 개념의 계보를 다룬다. 결론적으로 여기서는 '도덕적-비도덕'의 대립이 '-'의 대립이 아닌, '좋음-나쁨'의 대립과 동치되는 방식을 주장하게 된다.

 이어서, 니체의 『도덕의 계보』 에 대한 나의 전반적인 입장은 다음과 같다. 니체는 그의 저서 『도덕의 계보』에서 기존 도덕의 존엄과 이념을 심히 모욕하는 도발적 말을 하고 있는데, 니체의 그 망언은 도덕을 향한 존엄에 대한 희롱이며 일반 독자와 인민을 향한 엄중한 우롱적 도발로써 이는 절대 용납 불가능한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따라서 니체의 도덕을 향한 강도적이고 파렴치한 행위에 대처하여 강한 대응(감정적인 것을 포함한)을 취하는 것은 너무나도 응당한 처사라고 생각한다. 나는 본 감상문을 너머 이후 소논문에까지 이어서 이 도덕의 존엄을 건드린 대가가 얼마나 비싼지를 골씨에 사무치도록 깨닫게끔 시도할 것이다. 먼저 니체가 기성 도덕에 대해 어떠한 발언을 하였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니체는 『도덕의 계보』 제 1논문의 전반에 걸쳐 기존의 도덕, 사제적인 가치평가방식, "무력감에서 비롯된" 증오, 사제의 복수심, "원한", 노예반란 등을 평가절하한다. 동시에 독자로 하여금 반박하기 힘들게끔, 마치 제논의 역설과 같이 일목요연하지 않은 장황하고 어려운 단어, 복잡한 문장 구조, 모호한 문장, 불분명한 예시 등을 사용하고 있다. 만약 그가 자신의 생각을 단편적이고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였다면 복잡함이 줄어들어 강력한 반박의 가능성이 충분하였으리라 생각한다. 다시 돌아와, 니체는 위에서 말한 "원한"등의 도덕적 판단을 계속하여 비판하면서 "고귀한 자"라고 여겨지는 자들이 진실로 훌륭하고 실은 그것만이 도덕적인 것임을 피력하고 있다. 그 근거와 나의 반박은 다음과 같다.

 1. "좋음이라는 판단은 호의를 받은 사람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사람들'자신(고상한 자, 강한 자)에 의해서 비롯된다.  좋음과 공리주의는 무관하다. "

 -그렇지 않다. (좋음) 그 자체는 공리성을 비유하자면 선의 기로써 내포하고 있다. 한자식으로 표현하자면 선즉공리 (善卽功利) 인 것이다. 니체 역시 그 주장의 근거가 모호함으로 나 역시 그 근거는 추상에 머무르겠다.

 2. " '도덕적', '비이기적', '공평무사한' 이라는 말을 등가의 개념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편견이자 고정관념, 정신병이다."

 -그렇지 않다. 도덕적과 비이기적, 공평한 등의 표현은 좋은 것, 선한 것의 범주로써 한 소속의 것이다.

 3. "어원학적으로 '좋음'은 고귀한, 귀족적임을 의미하고, '나쁨'은 비열한, 천민적임을 의미한다."

 -니체의 편견이다. 애초에 계보학을 철학적 방법론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부적절했다. 이는 도덕적 단어의 발생사에 가설적 성격을 지닐수밖에 없으며. 뒤로 갈수록 더 많은 추측에 의존할 뿐, 아무런 귀납적 인과성을 찾을 수 없다.

 4. '가련한, 가난한, 무력한, 비천한, 고통 받는, 비천한.. 등 만이 선한 자이며, 고귀하고 강력한 자 등은 영원히 사악한 자이다.'라는 식의 니체의 비아냥거림.

 -가난하거나 부유하거나, 약하거나 강하거나, 천하거나 "고귀"하거나 등의 구분이 선악을 구분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기성 도덕을 비판하기 위한 니체의 비아냥이다. 대체적으로 부유하고 "고귀"한 자들이라는 집단 속 사람들이 해악을 더 많이 저지를 뿐이다. 

 5. '"원한 자체가 창조적으로 되어 가치를 낳을 때 도덕에서 노예반란이 시작된다.", "고상한 도덕이 자기자신을 의가양양하게 긍정하는 데서 생겨나는 반면, 노예도덕은 애당초부터 '외부적인 것', '다른 것', '자기자신이 아닌 것'을 부정한다. 그리고 이 부정이야말로 노예도덕의 창조적인 행위이다."

 -기존 도덕의 가치를 평가절하하는 가장 대표적인 니체의 망언이다. 니체는 귀족주의적이며, 계급주의적이고, 노예제도와 노동착취를 정당화하고, 자본주의와 탐욕, 전체주의를 "고귀한" "원한"이라는 말 한마디에 정당화 및 지지하려는 아주 위험한 이데올로기를 지니고 있다.

 -도덕에 있어서 "원한"은 선의 수행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원동력적인 역할을 한다.

 -속칭 고상한 도덕은 자기 자신을 의기양양하게 긍정하는데서 생겨난다고 하였는데, 여기서부터 문제가 있다. 속칭 고귀한 자들의 이 의기양양함과 자기긍정은 어떤 통제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결국에 그것은 의기양양과 긍정을 너머 자만, 억압, 욕심, 착취, 자기기만, 권위주의 등 인간의 언어로 형용할 수 있는 모든 부정적 의미의 것으로 넘어간다.

 -출신성분이 좋은, 즉 고귀한 사람들이 스스로 자기긍정하고 행복한 사람으로 여긴 이유는 말 그대로 "출신성분"이 좋았기 때문이지, "고귀한"사람 속 자체에 선 내지 좋음의 성질이 본성적으로 또는 후험적으로 깃들어있는 것은 아니다.

 6. "고귀한 인간은 '좋음'이라는 기본개념을 먼저 자발적으로, 즉 자기 자신에게서 생각해내어, 거기에서 비로소 '나쁜'이라는 관념을 만들어낸다."

 -"좋음"이라는 개념은 그 자체로 관념으로써 존재한다(마치 하늘 위에 부유하듯). 인간의 의지나 인간의 가치판단으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좋음' '도덕적'인 것은 발견되는 것이다. 고귀한 인간이나 고귀하지 않은 인간 모두 좋음이라는 개념은 직감적으로, 통찰적으로, 직관적으로, 육감적으로 알고 있다. 좋음의 반대로써의 악은, 그 인간으로써 가져야 마땅한 최고 단계의 관념, 행동, 가치관에 반하는 행동일 뿐이다.

 7. "어린 양이 큰 맹금을 싫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그것이 어린 양을 채어가는 큰 맹금을 비난할 이유가 되지 않는다"

 -니체의 반동적이고 반도덕적, 반인륜적 만상을 여실히 보여주는 문구이다. 니체가 말하는 고귀한 자(맹금)은 착취자, 범죄자, 욕심/이기주의자 이다. 상식적으로 우리는 이들을 '좋은'사람으로써 받아들일 수 없지 않겠는가? 어린 양은 그 자체로 선하다고 할 수도 없지만, 나쁘다고 할 수도 없다. 맹금 역시 그 자체로 선하거나 악하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어떤 행동을 하느냐에 따라 선한 맹금이 되고 악한 맹금이 되며, 선한 양이 되며 악한 양이 될 수 있다.

 8. "보복하지 않는 무력함은 '선함'을 바뀐다. 소심한 비겁함은 '겸허로 바뀐다."

 -보복하지 않는 무력함 자체가 선한 것은 아니다. 가치중립적이다. 만약 나쁜 것에 대해 보복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악이 된다. 만약 나쁜 것에 대해 보복한다면 그것은 선한 것이 된다. 그리고 '보복'이라는 의지적 관념이 생기게 된 근인이 진정한 나쁜 것, 나쁜 것의 원인이 된다.

 9. "약자들 역시 언젠가는 강자가 되고자 한다. 이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완전히 맞는 말은 아니다. 약자들이 원하는 것은 모두가 강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평등, 즉 단 한 명의 약자도 없는 강자의 사회를 원하지, "고귀한"사람처럼 수탈하고, 착취하고, 억압하고자 함이 아니다. 니체는 왜 이런 것에 대해 비아냥거린단 말인가?

 니체의 주장대로라면 도덕적 개념인 선-악은 그저 고귀하지 않은 가치평가 방식인, 즉 원한의 심리학이 형성해 낸 노예도덕일 뿐이다. 그는 기존의 도덕을 노예도덕이라 칭하면서 기존 도덕을 도덕에 대한 우리의 도덕적 편견 정도로 여긴다. 결론적으로 니체는 그 "노예도덕"을 주인도덕, 고귀한 도덕으로 대체시키려는 도덕의 이단아일 뿐이다. 기존의 도덕적 가치를 비판하는 일은 진보를 위해, 즉 현재의 상태를 지양하며 더 나은 미래를 향한 현재의 역동성에서 분명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기존의 도덕관념 전체를 엎어버리는 적으로 돌리는 것은 위험한 생각이며, 니체의 그 생각은 현재에 발 딛고 있지조차 않다.

 도덕적 가치들(기존의 도덕관념)은 이미 세상 위에 주어진 것으로, 기정사실로 간주되어야 한다. 문제제기 역시 불필요하다. 분명한 것은 '선한 사람' '악한 사람'보다 훨씬 더 가치 있고, 이는 조금의 의심의 여지도 없다. 니체는 진정 악한 자를 "고귀한 자"로 둔갑시키고자 작업했다. 심지어 니체는 인민의 적- 그저 괴뢰 호전광, 전쟁광일 뿐인 나폴레옹을 위대한 사람, 위버멘시의 대표자로 둔갑시킨다. 만약 나폴레옹이 위버멘시라면 북한왕국 역시 위버멘시 왕국이지 않겠는가? 우리에게 있어서 진정으로 고귀한 자-위버멘시는 현재의 입장에서 보자면 체게바라, 우고 차베스, 룰라 다 실바, 실바도르 아옌데,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노먼 볼로그 등의 사람이지 단지 왕, 귀족, 위정자, 재벌, 자본가, 대통령, 독재자 따위의 지위로써 될 수 없다.



[1] 철학사상 별책 제5권 제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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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모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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