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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반도 핵무장에 대한 단상, (보론: 종속이론에 대한 논의)

국제정세를 보면 알 수 있다. UN이 얼마나 비도덕적이거나 무기력한지에 대한 부분을 말이다.

국가(나라)는 존엄성을 지닌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큰 나라이든, 작은 나라이든, 도시국가이든. 마치 개개인의 인간 생명성이 절대 존엄한 고귀성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개개의 나라 역시 규모, 경제력, 종교 등을 떠나 오직 국가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 존엄성을 보장받아야 마땅하다. * 이것은 자연 법칙이 아니라 당위로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명제이다.

사실상 이것을 실현시키는 것이 UN의 정당한 역할이었다. 그러나 UN은 실질적으로 그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이에 따라 필자는 핵무기만이, 강국이 소국을 함부로 대하지 못할 수 있는 열쇠, 즉 상호 주권과 존엄성을 보장할 수 있는 열쇠라고 이해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 핵무기야말로 국제 분쟁에 있어서 최종적인 '법관', '판단자' 역할을 할 수 있다.

생각해보면 다음과 같다. 상호 간 확증 파괴가 가능할 만큼의 핵무기를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비윤리적 액션을 취할 수 있겠는가? 혹은 어떤 조건이 있어야 국가 상호 간(관계에 있어서) 비윤리성을 절대적이고 항구적으로 제거할수 있는가?

이를테면, 팔레스타인 민족이 지금과 같은 상태에서 재래식 핵탄두를 보유하고 있었다면? 아니, 애초에 이집트, 시리아, 리비아 등 중동 국가들이 핵무장을 했더라면 영국과 미국 등에 의해서 지금처럼 중동이 피폐해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만약 팔레스타인이 핵무장을 하고 있었다면, 지금처럼, 침략자인 이스라엘과 유대인들로부터 고향을 약탈당하고 빼앗기고, 주권과 자유를 잃는 상황은 없었을 것이다.

남아메리카 전체가 확증 파괴가 가능할 만큼의 핵무기를 보유한 국가들로 구성되어 있었다면, 과연 미 제국의 자본이 남미를 경제적으로 종속시키는 일이 가능하기나 한 일이었을까?

티벳 민족이 한 서너 개의 핵 탄두라도 지니고 있었다면 지금처럼 민족이 강제로 병합되는 일이 발생했을까? 단연코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까지 예시나 사례로 제시한 것들 모두 사실상 모두 UN에서 적절히 개입하여 국제 사회의 정의(justice)를 다시금 바로 세웠어야 했던 일들이다. 결국 각종 이해관계로 인하여 UN은 제 기능을 못한 것이다.

결론은 이렇다. UN 회원국 모두 평등하게 핵무기를 보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핵 무기만이 지구의 최종적 헌법이자 세계 헌법이 될 수 있다. 흔히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린다는 말을 하고는 한다. 대국이 소국을 건드리는 순간 최소한 한두발의 핵무기라도 날릴 수 있는 꿈틀거림의 힘은 쥐어줘야 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역시 북한과 중국에 정당하고 옳게 대응하기 위해서는 핵 무기를 개발하고 무장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비로소 북한의 협박과 공갈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고, 중국의 야만성에 대하여 저항할 수 있으며, 궁극에는 동북아시아의 국제관계에 있어서 균형과 정의, 항구적으로 윤리성을 지닌 국제 관계를 수립할 수 있을 것이다.

진정한 평화는 힘의 균형에서만 가능하다.

*평화에 대하여, 그리고 종속에 대하여.
모두가 무기를 내려놓고 밥 잘 먹고 잘 살게 하는 것이 최선의 평화일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지금의 자본주의 경제구조 속에서 '밥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하다. 바로 이윤율을 의한 희생이다. 이를테면, 저렴한 임금의 노동시장을 필요로 한다거나, 혹은 생태나 인간 건강에 파괴적일 수 있는 행위들을 규제하는 다양한 규정들을 완화하여 다국적 기업에게 유리한 입지를 제공한다거나, 또는 많은 수요를 창출하여 큰 시장이 되어야 하는 것 등이다.

혹자들은 지금의 구조는 그러한 약탈적 구조가 아니라고들 한다. 그러나 근본을 보자면 과거와 비교했을 때 외연만 달라졌을 뿐, 본질은 그대로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노예와 주인의 관계,가 근러자와 기업가의 관계로 바뀌었을 뿐이다. 국제관계에서는, 종속된 국가와 거대국가(혹은 자본기업 또는 기축통화를 장악한 거대자본주의국가)의 관계로 그 외연만 바뀌었을 뿐이다. 다시 말해, 그저 약탈의 다름 아닌 그 구조가 가시적인 잔인성에서 비가시적인 잔인성으로 변모한 것일 뿐이다.

다시 돌아와, 핵무장이 아닌 방안으로는 즉, 지금의 국제정치의 비윤리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힘을 가진 자(국가)가 힘을 적게 가진 자(국가)에게 힘의 불균형으로 인한 어떠한 손해도 초래하지 않을 것임을 우선적으로 천명하고 확증해주어야 한다. 이를테면, 미국이 북한에게 주권을 보장할 것임을 확증하는 것이며, 중국이 티벳에게 주권 보장을 확증하는 것이다. 또한,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주권 보장을 확증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국가 간 약속은 어떻게 보장하는가? 바로 내가 약속을 어길 시 나를 처벌하거나 제재할 수 있는 확실한 수단을 상대에게 주는 것 뿐이다.)

하지만 미국, 중국, 영국 등을 위시한 강국들은 국제사회에서 그렇나 액션을 취하지 않는다. 따라서 현재의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가능성 있는 열린 위험성(정치문화경제적 존속, 체제 존속의 위험, 주권의 위협 등) 을 감수하고 무기를 내려놓으라는 것은 참으로 한심한 주장이 아닐 수 없다. 즉, 세계가 급진적으로 국제 정치구조의 변화를 동시적(* 동시적이라는 것의 성격은 아주 중요하다)으로 보여주지 않는 이상 약소국들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별로 없는 것이다.

한편, UN 상임 이사국을 비롯한 핵무기 보유국들이 핵포기 선언을 동시적으로 하고 동시적으로 파기하는 것을 상상해보는 것은 어떠한가? 그리고 범 세계적 상호불가침 조약과 평화조약을 맺는 것은 어떠한가? 사실상으로 참으로 비현실적이라 할 수 있따. 더 강한 무기를 가진 나라가 조약한 무기르 ㄹ가진 나라에게 먼저 무기를 내려 놓으라 한다면 받아들일 수 있는가? 아닐 것이다.

정리하자면, 지금의 비윤리적 국제정세는 치킨게임과 같다. 미국, 중국, 이스라엘, 영국 등은 대형 덤프트럭을 몰고 있고 한국, 팔레스타인, 북한 등은 소형 모닝을 몰고 있다. 그런데 이 와중에 주변 사람들이 모닝을 몰고 있는 사람더러 먼저 핸들을 돌리거나 브레이크를 밟으라고 한다. 모닝을 몰고 있는 사람 입장에서는 열린 위험성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상징적 비유이지만 결국 지금의 이 치킨게임에서 빠져나올 방법은 양자 혹은 전체가 동시에 핸들을 돌리거나(핵무장을 포기하거나), 혹은 자본주의 체제나 비윤리적 국제관계에 대한 근본적 변화를 도모(브레이크 밟기) 하거나, 혹은 힘의 균형(동시 핵무장)을 통해 치킨게임의 가속도를 줄임으로써 갈등을 방지하는 방법 뿐이다. 이중에 (이상적이 아닌 현실적으로) 그나마 가장 현실적이라 할 수 있는 길은 후자라고 필자는 판단한다.

최악은 부딪히는 것이고 차악은 어느 한 쪾이 어떤 형태로든 지배다앟거나 종속당하는 것이다.

*추가: 종속에 대하여
종속이론이 폐기됐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필자의 생각이 일정 부분 종속이론의 영향이 들어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폐기됐음'이라는 것 역시 아직 그저 사태를 바라보는 하나의 입장이나 방법일 뿐, 그것이 확증된 것은 아니다. 하물며 자연과학이론마저 반증가능한 시대에, 사회이론을 가지고 이미 폐기된 이론이니 주장에 설득력이 없다는 이유로 이를 비판한다면, 그것은 확증편향이 아닐 수 없다.

*반론에 대한 반론
반론으로 제시된 코스타리카의 사례에 대한 반론을 하겠다. 코스타리카는 인텔이라는 거대 자본 회사에 개방한 이후 과감한 투자와 인푸라 확충으로 결과적으로 치안수준, 국갖거 인프라, 소득 등이 남미에서는 손 꼽히는 나라가 됐다는 사례이다. 다시말해, 인텔에 의해 교역량이 증가하고, 인프라가 갖춰지면서 물류의 중간지대로서 역할도 하게 됐다는 점이다. 그리고 선진국 그룹과 개도국 그룹 간 소득격차가 어떻게 변하는지에 대한 연구의 결과, 종속이론이 폐기되었다는 반론이다. 즉, 종속 이론대로라면 코스타리카는 실패 사례가 되었어야 한다는 점이다.

해당 부분에 대한 반론 내지 보론을 하자면 다음과 같다.
즉, 거대 자본의 유입이 성공적으로 정착한 경우도 없지 않다. 그러나 성공적이지 못했던 부분을 우선적으로 논하고 해결해야 그 말의 순서가 맞을 것이다. 100% 성공이 아니면 그 이론이 참이 아니며(연역적 성공사례가 아니며), 또한 실패 사례를 통해 진보하는 것이 이론과 탐구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즉 99%의 실패 중 1%의 성공이 있었다고 하여 그 1%의 실례를 근거로 이론이 옳았다고 말할 수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우리는 99%의 실패사례에 주목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99%가 성공했다고 하여도 마찬가지이다. 1%의 실패 사례가 있다면 그 이론은 (연역적으로) 틀린 것이며, 따라서 여러 방향에서 그 원인을 찾아 해결해야 한다. 만약 1%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해결할 수 없다면 우리는 그 이론을 폐기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코스타리카의 사례는 종속이론이 현실을 잘 해석해주고 있음을 오히려 방증해주고 있다.

다시 돌아와, 어떻게 보면 성공적인 사례들은 자본의 독점과 종속 심화라는 현상으로부터 물론 지혜롭게 극복한 사례라고도 말할 수 있을 뿐, 그것이 종속이론의 실패를 증명하는 것은 아니라고 판단한다. 그러니까, 다국적 자본주의에로 편입된 결과로 반전되고 향상된 부분이 있는 반면 종속된 부분도 또한 있다는 것을 우리는 보아야 한다. 많은 사례에서 발전된 부분의 이면에 종속된 부분의 폐해가 드러나고 있다.

일례로, 에티오피아의 경우, 커피 자본의 유입과 함께 전체적인 자본의 총량은 늘어났지만 커피 재배면적의 증가로 인해 식량 곡물 생산량이 감소하였고 이에 따라 때때로 기아에 시달리는 현상을 겪게 되었다. 커피 재배로 받는 푼돈 몇 달러로 겨우 입에 풀칭르 하는 현상이 있으며, 이마저도 해외 식량곡물을 수입하기 위해 쓰이고 있는 상황이다.

또 다른 사례로, 우리가 현재 가지고 놀 수 있는 축구공, 농구공, 운동화 등 많은 부분이 현재까지도 개발도상국에서 제작되고 있다. 단 돈 몇 백원에 제작되거 그 곳 노동자들이 받는 돈은 하루 2~3달러에 불과하다.

현재 남아프리카에는 수많은 GMO 작물들이 실험 및 실제적으로 재배되고 있다. 경제적으로 해외 선직국 및 거대 시장으로 수출하기에 유리한(수요가 있는) 상품들을 위주로 생산하고 있따. 모산토 또한 GMO로 인한 토양오염(DNA오염)으로 인해 GMO 영향을 받지 않은 작물을 키우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는 상황이다. (이는 종의 다양성을 해치는 잔인극악무도한 행위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커피가 이토록 일반화되고 때로는 놀라울만치 저렴하게 마실 수 있는 것은 바로 개발도상국들의 자본 종속이라는 원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네슬레의 분유 사태를 한번 살펴보자. 이 역시 자본 종속의 폐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남미에서 물(수도사업)의 민영화로 인한 폐해도 적잖이 드러나고 있다. 이 역시 해외 거대 자본의 유입으로 인한 결과이다.

우리나라는 어떠한가? 외국인 노동자들을 절며한 값에 들여와 최저임금에 노동을 부리고 있다. 이것도 종속이다. 개성공단은 어떻나가? 역시 종속이론으로 바라볼 수 있다. 중국으로, 베트남으로 우리의 공장을 이전하는 것은 어떠한가? 이것 역시 종속이다. 기업들이 공공연히 자행하는 최저가 입찰제, 단가 후려치기, 하청의 재하청, 비정규직 근로자 등 모두 경제 구조적 힘을 독점적으로 쥐고 있는 기업들로부터 행해지고 있는 자본의 폭력이자 종속이다. 이는 곧 종속 및 독점 강화의 현상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필자는 자본의 종속을 다름 아닌 바로 다음과 같이 정의내리고자 한다. '값 싸고 저항할 수 없는 힘 없는 노동을 경제적이라는 이유로 활용하는 행위 일체'를 뜻한다. 더 나아가, '한 개체를 목적 그 자체가 아닌 수단으로서 대하는 행위 일체'를 필자는 종속이라고 정의내리겠다.

우리나라에서 시급 1만원을 주고 노동자를 고용한다면, 우리가 공장을 베트남으로 이전하든 중국으로 이전을 하든, 똑같이 우리나라에의 1만원에 상응하는 대가를 그들에게 지불해주어야 한다. 이것이 윤리적이며 공정한 것이자 올바른 것이고 정의이다. 그런데 실상을 그렇지가 않다. 경제논리와 시장논리에 따라 다만 합리적으로 의사결정을 할 뿐이다. 그리고 이렇나 합리성과 이윤율에 반대되는 이론을을 그들은 이미 폐기된 이론이라고 치부하며 거부하고 있다.

국내에외는 여전히 이 종속으론을 연구하고 이를 통해 현상을 해석 설명하려는 사람들이 필자를 포함해 여전히 많이 있다. 국내외의 여러 이슈들을 적절히 해석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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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모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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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지하듯 192명의 무고한 시민이 희생되었던 대구 지하철 참사는 2003년 2월 18일에 일어났다. 오래전 일이지만 나는 여전히 그날을 생생히 기억한다. 그때 나는 중학교 2학년이었으며 참사의 슬픔으로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여하간, 뉴스를 보면서 문득 떠올랐다. 당시 대통령은 김대중 대통령이었고(2월 24일까지 재임), 노무현 대통령의 재임은 그 다음날인 25일부터이다. 원칙적으로 보면 김대중 대통령의 재임 당시에 벌어진 참사이다.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은 공공부문 민영화를 추진했던 인물이다. 항간에서는 그 사태의 원인을 공공부문 민영화 등을 비롯한 당시의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의 한 일환으로 이어졌던 1인 승무, 인력감축, 교육원 폐지 등으로 보기도 한다.

이러한 객관적 사실를 앞에 두고 나는 지난 2003년의 사태와 지난 2014년의 사태를 비교해보고 싶어졌다. 2003년의 사태에 우리는 어떻게 대응했던가? 김대중 정부 역시 국민 생명 보호의 의무를 저버렸고, 박근혜 정부 역시 국민 생명 보호의 의무를 저버렸다. 그런데 그 당시에 대통령과 정부에게 책임질것을 지금과 같은 수준으로 엄중히 요구했었나? 무능한 정부를 비판하는 목소리보다는 슬픔에 젖어 사회 전반이 우울감에 빠져있었던것 같다. 그리고 그 슬픔은 분노로 바뀌지 않고 슬픔으로 끝났다. 즉, [2003: 1단계 사태->2단계 슬픔->3단계 슬픔]의 구조를 가진다. 오늘날은 참사의 슬픔이 분노로 바뀌었다. 즉, [2014:1단계 사태->2단계 슬픔->3단계 분노 -> (이후 각종 탄핵사유가 드러나며) -> 4단계 폭발]로 이루어졌다.

그때와 지금은 무슨 차이가 있길래 슬픔이 분노로 이어지지 못했을까? 왜 그때는 정부의 무능을 비판하는 항의의 집회가 아닌 추모집회만 있었을까? (뉴우스의 댓글은 나의 댓글이 아님)

http://news.naver.com/main/read.nhn…


2017.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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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모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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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23&aid=0003286408&sid1=001


자녀 양육, 이제는 국가가 책임져야 하지 않을까?
유치원도 중요하지만, 우선 국공립 보육원(영.육아원:0~18세)을 늘려야 한다. 즉 두 가지 방향에서 인구정책을 진행해야 한다는 것. 유치원이야 허다하게 나왔으니 차치하자.
유치원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보육원이다. 보육원 아이들의 양육권자는 국가가 되어야 한다. 보육교사의 수를 늘리고 교사당 학생 수는 대폭적으로 줄이는 식으로 양육의 양질을 보장해야 할 것이다. 
미성년 시기의 실수로 혹은 원치 않는 이유로 낳은 아이를 버렸다거나 방치하여 살해했다는 기사를 심심찮게 보았을 것이다. 거의 일주일에 한번은 보는 것 같다. 이런 아이들을 a to z 까지 국가가 맡아 양육한 다음 나라에 필요한 인재로 만들어야 한다. 성년이 될 때까지, 아니 독립하여 자립할 준비가 될 때까지 보육원은 한 아이의 집이 되주어야 한다. 군인이 필요하면 군인, 기술자면 기술자, 과학자면 과학자.
플라톤의 공동양육이 생각나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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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아주 오래전부터 누군가에게는 '빼앗을 자유'가 있었고, 또 누군가에게는 '빼앗길 자유'뿐이 없었다. 그런 잘못된 구조 덕분에 그 누군가는 부자가 되고 또 누군가는 가난한 자가 되었는데, 그 계급적 구조는 단절되지 않은 채 지금껏 계속 이어져와 노력이 부자를 만드는게 아닌 부자가 부자를 만들고 돈이 돈을 만드는, 바로 지금의 시대를 만들었다.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 진정한 자유주의자라면 다음의 슬로건을 가지고 투쟁을 해야한다. 극단적으로 변화해야 한다. "부자에게는 빼앗길 자유를, 가난한 자에게는 빼앗을 자유를...!"


박근혜 대통령


민족의 원흉, 박정희 괴뢰수당


이명박 전 대통령


괴뢰정권의 만행 1


괴뢰정권의 만행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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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에 와서는 교육의 사회통합 기능 내지 정치적 기능이 중지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사람들이 말하던, '개천에서 용난다' 라는 말이 더 이상은 아닌 시대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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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육 본연의 기능은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이 통용된다.


1. 건강한 시민생활에 필요한 기초지식과 수준 높은 전문지식 함양 기회 제공

2. 사람됨의 교육을 통해 바람직한 사회변화에 헌신하는 동량을 길러냄

  ->교육의 어떤 내재적 가치를 중시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교육현실은? 학교나 대학에서 교육 본연의 기능의 상실된 채,

1. 경제적 기능만을 강조

2. 자연 공교육의 정치적 기능 부정, 교육 본연의 기능이 외면되는 환경 조성.

3. 교육의 계급화를 격화시키는 장소로 변화됨

->교육의 어떤 내재적 가치가 중시 안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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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경향으로 인해 발생되는 지금 교육현실은 다음과 같은 문제를 안고 있다.

1. 교육의 계급화로 사회통합 기능을 약화시킨다. 이는 교육이 사회의 불평등을 해소하기는 커녕 격화시키게 된다.

2. 교육 본연의 가치가 뿌리내릴 여지를 원천적으로 말살한다. 이로 인해 지속가능한 사회 건설에 필요한 사상과 지식을 생산, 전파, 인재육성이 어려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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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앞서 가장 처음 서술하였다시피 교육에는 그 본연의 기능이 있는데 지금의 교육현실은 그와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지 못하여 두번째 경향과 같은 교육현실의 문제가 발생하였. 이처럼 지금의 교육현실이 위와 같이 내재적 가치를 중시하지 않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1. 기업의 탐욕 : 정부가 공교육 재정을 감축하게 되면 자연스레 공교육의 양질이 지금의 교육현실과 맞물려 떨어지게 된다. 이는 곧 피교육자들의 '교육'이 민영화, 시장화 될 것이다. 곧 말할 부유층의 탐욕으로 인해 학교는 자신들의 탐욕을 채우게 되고, 그 학교의 탐욕코스를 통과한 부유한 자녀들이 채워진 기업들은 역시 그 동안 탐욕을 위해 소비한 것을 채우기 위해 또 '기업' 또는 '경제인'으로서 탐욕을 행하거나 지지하게 된다.


2. 부유층의 탐욕 : 정부의 공교육 재정감축으로 인해 공교육의 양질이 저하된다면 위에서 말한 것처럼 교육을 받기 위해서는 자연스레 교육시장이 형성될 것이다. 그리고 속칭 부유층의 가정에서는 이런 사교육을 충분히 부담할 수 있게 된다. 또 학교의 탐욕에 따라 등록금도 비싸질 것이다. 부유층은 이러한 비용 역시 부담 가능하다. 그렇게 되면 부자학교, 부자대학이 탄생하게 되고, 이것은 또 탐욕적 기업과 탐욕적 학교와 연결되어 부자계급의 지속이 가능하게 된다.


3. 학교와 대학의 탐욕: 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돈이 있어야 한다. 현재의 교육현실로는 공교육만으로는 어림없고, 등록금은 너무 높다. 그렇기 때문에 배우기 위해서는 가정배경이 높은 집안의 학생이거나, 어떻게 해서든 그 비용을 부담할 수 있는 사람만이 남게 된다. 이는 곧 가정배경이 높은 집안의 학생이거나 어떻게든 그 비용을 부담할 수 있는 사람만이 기업이나 지배계급에게 쓰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학교는 부유층의 탐욕을 이용해 자신들의 탐욕을 채울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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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리해보자면, 보면 인간의 탐욕이 가장 근본적인 시작점이며, 애초에 교육이라는 것이 그것을 통제하고 인간을 더 인간답게 만들어가는 순기능을 해야 하지만, 그 기능을 해내지 못하는 교육에 의해 인간의 탐욕은 억제되지 못하여 계속 사회속에서 '사람의 탐욕~>정부~기업~부유인~학교~등등' 돌고 돌며 악순환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운 것에 비유할 수 있겠다. 하지만 우리세대의 선인들은 첫 단추를 잘못 끼운 채 너무나 오랜 시간 동안 그 삐뚤어진 상황을 방치한 채 오히려 계속 진행해왔다. 바로잡기 위해서는 잘못된 단추에 껴진 사람들의 희생이 필요한 것인데, 그 이미 껴진 채 자리잡은 기득권자들은 희생하기를 거부한다. 그렇기 때문에 바로잡기는 더 힘들어지며 힘들기에 바로잡기를 시작하는 것조차 힘들고 시간은 또 계속 흘러간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삐뚤어진 단추는 점점 더 멀리 나아갈 것이며 그럴수록 바로잡기는 더 힘들어진다는 악순환에 또 빠진다. 더 나아간다면 과연 이게 삐뚤어진 것인가(옳은 것인가), 굳이 바로잡아야 하는가라는 의문에서 결국에는 그 삐뚤어진 게 옳은 것이 되어 버리는 '새드엔딩의 지속'이 되어 버릴지도 모른다고도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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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모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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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구글)

니체의 『도덕의 계보』 비판


1. 니체 『도덕의 계보』의 전반적인 내용

2. 니체의 선악(좋음과 나쁨)의 개념 비판

3. 니체의 '원한심리' '노예도덕' 재평가

 

1. 『도덕의 계보』에 대한 전반적인 느낌

 도덕의 계보는 세 논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 제1논문을 다루겠다. 1논문의 주제는 '선과 악', 그리고 '좋음과 나쁨'에 관한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선과 악 개념의 계보, '좋음과 나쁨' 개념의 계보를 다룬다. 결론적으로 여기서는 '도덕적-비도덕'의 대립이 '-'의 대립이 아닌, '좋음-나쁨'의 대립과 동치되는 방식을 주장하게 된다. 즉 고귀한 가치평가 방식인 것이다.

 

2. 니체의 선악(좋음과 나쁨)의 개념

 니체의 주장대로라면 도덕적 개념인 선-악은 그저 고귀하지 않은 가치평가 방식인, 즉 원한의 심리학이 형성해 낸 노예도덕일 뿐이다. 노예의 도덕이라 함은 성적, 출세, 지위, 재산 등에서 비롯한 가치판단을 말한다. 그는 기존의 도덕을 노예도덕이라 칭하면서 기존 도덕을 도덕에 대한 우리의 도덕적 편견정도로 여긴다. 니체는 그 "노예도덕"을 주인도덕, 고귀한 도덕으로 대체시키려는 도덕의 이단아일 뿐이다.

 

 

3. 니체의 '원한심리' '노예도덕' 재평가

 기존의 도덕적 가치를 비판하는 일은 진보를 위해, 즉 현재의 상태를 지양하며 더 나은 미래를 향한 현재의 역동성에서 분명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기존의 도덕사, 도덕 틀 전체를 엎어버리는 것은 위험한 생각이며, 니체의 그 생각은 현재에 발 딛고 있지조차 않다.

 

..

 

지금까지 지상에서 도덕으로 칭송받은 모든 것을(도덕) 미심쩍게 여긴다.(p.14)

 

 

; 도덕, , 순종, 동정 같은 것을 걸림돌 정도로 여긴다. (순종을 걸림돌로 생각하였는지는 의문이 있지만.)

니체 ; 동정(동정, 동정도덕)을 비판 p.17 동정본능. 쇼펜하우어가 오랫동안 미화하고 신성시하며 세계 저편의 것으로 만든 '비이기적인 것'의 가치, 즉 동정본능, 자기부정본능, 자기희생본능의 가치... 이러한 본능에 대해 내게서 점점 더 근본적인 의구심과 점점 더 깊이 파고드는 회의가 생겼다...

-> 신성한 것, 선한 것으로써의 '동정'(희생) 있다.

 

니체 ; 우리 인간같은 인식하는 존재조차 자기 자신을 잘 알지 못한다. 여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한번도 탐구해 본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p.11)

 우리는 사실 우리 자신에게 필연적으로 낯선 존재로 있고,... 우리 자신에게 우리는 '인식하는 자'가 아닌 것이다...

 ->하지만 잘 아는 인간, 탐구해본 인간은 분명 있다. 그리고 인식가능하다.

 

 

 기존의 도덕적 가치를 비판하는 일은 분명 필요, 그러나 기존의 도덕사? 도덕 틀 전체를 엎어버리는 것은 위험한 생각.

 사람들은 이러한 '가치들'(기존의 도덕관념)을 주어진 것으로, 기정사실로, 아무런 무넺제기도 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겼다.(<-니체말)

 -> 이부분은 동의한다. 하지만 전체를 부정할수는 없지 않느냐... 분명한 것은 '선한 사람' '악한 사람'보다 훨씬 더 가치있고, 이는 조금의 의심의 여지도 없다. 문제제기거리가 안된다. 여전히 조금의 의심이나 동요의 여지가 없다.

 

선악과 좋음과 나쁨은 구분된다.

 

내가 이해할 수 있는 한에서 다루어본다.


본문)

니체의 저서 『도덕의 계보』의 서문과 제1논문을 바탕으로 하여 첫째, 『도덕의 계보』 의 구성, 둘째, 『도덕의 계보』 의 내용에 대한 본인의 입장을 써보겠다. 먼저 니체의 제1논문인 ['선과 악', '좋음과 나쁨']은 그 내용을 토대로 하면 총 17개의 상세 목차가 있다.[1] 구체적으로는 선과 악 개념의 계보, '좋음과 나쁨' 개념의 계보를 다룬다. 결론적으로 여기서는 '도덕적-비도덕'의 대립이 '-'의 대립이 아닌, '좋음-나쁨'의 대립과 동치되는 방식을 주장하게 된다.

 이어서, 니체의 『도덕의 계보』 에 대한 나의 전반적인 입장은 다음과 같다. 니체는 그의 저서 『도덕의 계보』에서 기존 도덕의 존엄과 이념을 심히 모욕하는 도발적 말을 하고 있는데, 니체의 그 망언은 도덕을 향한 존엄에 대한 희롱이며 일반 독자와 인민을 향한 엄중한 우롱적 도발로써 이는 절대 용납 불가능한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따라서 니체의 도덕을 향한 강도적이고 파렴치한 행위에 대처하여 강한 대응(감정적인 것을 포함한)을 취하는 것은 너무나도 응당한 처사라고 생각한다. 나는 본 감상문을 너머 이후 소논문에까지 이어서 이 도덕의 존엄을 건드린 대가가 얼마나 비싼지를 골씨에 사무치도록 깨닫게끔 시도할 것이다. 먼저 니체가 기성 도덕에 대해 어떠한 발언을 하였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니체는 『도덕의 계보』 제 1논문의 전반에 걸쳐 기존의 도덕, 사제적인 가치평가방식, "무력감에서 비롯된" 증오, 사제의 복수심, "원한", 노예반란 등을 평가절하한다. 동시에 독자로 하여금 반박하기 힘들게끔, 마치 제논의 역설과 같이 일목요연하지 않은 장황하고 어려운 단어, 복잡한 문장 구조, 모호한 문장, 불분명한 예시 등을 사용하고 있다. 만약 그가 자신의 생각을 단편적이고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였다면 복잡함이 줄어들어 강력한 반박의 가능성이 충분하였으리라 생각한다. 다시 돌아와, 니체는 위에서 말한 "원한"등의 도덕적 판단을 계속하여 비판하면서 "고귀한 자"라고 여겨지는 자들이 진실로 훌륭하고 실은 그것만이 도덕적인 것임을 피력하고 있다. 그 근거와 나의 반박은 다음과 같다.

 1. "좋음이라는 판단은 호의를 받은 사람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사람들'자신(고상한 자, 강한 자)에 의해서 비롯된다.  좋음과 공리주의는 무관하다. "

 -그렇지 않다. (좋음) 그 자체는 공리성을 비유하자면 선의 기로써 내포하고 있다. 한자식으로 표현하자면 선즉공리 (善卽功利) 인 것이다. 니체 역시 그 주장의 근거가 모호함으로 나 역시 그 근거는 추상에 머무르겠다.

 2. " '도덕적', '비이기적', '공평무사한' 이라는 말을 등가의 개념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편견이자 고정관념, 정신병이다."

 -그렇지 않다. 도덕적과 비이기적, 공평한 등의 표현은 좋은 것, 선한 것의 범주로써 한 소속의 것이다.

 3. "어원학적으로 '좋음'은 고귀한, 귀족적임을 의미하고, '나쁨'은 비열한, 천민적임을 의미한다."

 -니체의 편견이다. 애초에 계보학을 철학적 방법론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부적절했다. 이는 도덕적 단어의 발생사에 가설적 성격을 지닐수밖에 없으며. 뒤로 갈수록 더 많은 추측에 의존할 뿐, 아무런 귀납적 인과성을 찾을 수 없다.

 4. '가련한, 가난한, 무력한, 비천한, 고통 받는, 비천한.. 등 만이 선한 자이며, 고귀하고 강력한 자 등은 영원히 사악한 자이다.'라는 식의 니체의 비아냥거림.

 -가난하거나 부유하거나, 약하거나 강하거나, 천하거나 "고귀"하거나 등의 구분이 선악을 구분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기성 도덕을 비판하기 위한 니체의 비아냥이다. 대체적으로 부유하고 "고귀"한 자들이라는 집단 속 사람들이 해악을 더 많이 저지를 뿐이다. 

 5. '"원한 자체가 창조적으로 되어 가치를 낳을 때 도덕에서 노예반란이 시작된다.", "고상한 도덕이 자기자신을 의가양양하게 긍정하는 데서 생겨나는 반면, 노예도덕은 애당초부터 '외부적인 것', '다른 것', '자기자신이 아닌 것'을 부정한다. 그리고 이 부정이야말로 노예도덕의 창조적인 행위이다."

 -기존 도덕의 가치를 평가절하하는 가장 대표적인 니체의 망언이다. 니체는 귀족주의적이며, 계급주의적이고, 노예제도와 노동착취를 정당화하고, 자본주의와 탐욕, 전체주의를 "고귀한" "원한"이라는 말 한마디에 정당화 및 지지하려는 아주 위험한 이데올로기를 지니고 있다.

 -도덕에 있어서 "원한"은 선의 수행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원동력적인 역할을 한다.

 -속칭 고상한 도덕은 자기 자신을 의기양양하게 긍정하는데서 생겨난다고 하였는데, 여기서부터 문제가 있다. 속칭 고귀한 자들의 이 의기양양함과 자기긍정은 어떤 통제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결국에 그것은 의기양양과 긍정을 너머 자만, 억압, 욕심, 착취, 자기기만, 권위주의 등 인간의 언어로 형용할 수 있는 모든 부정적 의미의 것으로 넘어간다.

 -출신성분이 좋은, 즉 고귀한 사람들이 스스로 자기긍정하고 행복한 사람으로 여긴 이유는 말 그대로 "출신성분"이 좋았기 때문이지, "고귀한"사람 속 자체에 선 내지 좋음의 성질이 본성적으로 또는 후험적으로 깃들어있는 것은 아니다.

 6. "고귀한 인간은 '좋음'이라는 기본개념을 먼저 자발적으로, 즉 자기 자신에게서 생각해내어, 거기에서 비로소 '나쁜'이라는 관념을 만들어낸다."

 -"좋음"이라는 개념은 그 자체로 관념으로써 존재한다(마치 하늘 위에 부유하듯). 인간의 의지나 인간의 가치판단으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좋음' '도덕적'인 것은 발견되는 것이다. 고귀한 인간이나 고귀하지 않은 인간 모두 좋음이라는 개념은 직감적으로, 통찰적으로, 직관적으로, 육감적으로 알고 있다. 좋음의 반대로써의 악은, 그 인간으로써 가져야 마땅한 최고 단계의 관념, 행동, 가치관에 반하는 행동일 뿐이다.

 7. "어린 양이 큰 맹금을 싫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그것이 어린 양을 채어가는 큰 맹금을 비난할 이유가 되지 않는다"

 -니체의 반동적이고 반도덕적, 반인륜적 만상을 여실히 보여주는 문구이다. 니체가 말하는 고귀한 자(맹금)은 착취자, 범죄자, 욕심/이기주의자 이다. 상식적으로 우리는 이들을 '좋은'사람으로써 받아들일 수 없지 않겠는가? 어린 양은 그 자체로 선하다고 할 수도 없지만, 나쁘다고 할 수도 없다. 맹금 역시 그 자체로 선하거나 악하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어떤 행동을 하느냐에 따라 선한 맹금이 되고 악한 맹금이 되며, 선한 양이 되며 악한 양이 될 수 있다.

 8. "보복하지 않는 무력함은 '선함'을 바뀐다. 소심한 비겁함은 '겸허로 바뀐다."

 -보복하지 않는 무력함 자체가 선한 것은 아니다. 가치중립적이다. 만약 나쁜 것에 대해 보복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악이 된다. 만약 나쁜 것에 대해 보복한다면 그것은 선한 것이 된다. 그리고 '보복'이라는 의지적 관념이 생기게 된 근인이 진정한 나쁜 것, 나쁜 것의 원인이 된다.

 9. "약자들 역시 언젠가는 강자가 되고자 한다. 이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완전히 맞는 말은 아니다. 약자들이 원하는 것은 모두가 강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평등, 즉 단 한 명의 약자도 없는 강자의 사회를 원하지, "고귀한"사람처럼 수탈하고, 착취하고, 억압하고자 함이 아니다. 니체는 왜 이런 것에 대해 비아냥거린단 말인가?

 니체의 주장대로라면 도덕적 개념인 선-악은 그저 고귀하지 않은 가치평가 방식인, 즉 원한의 심리학이 형성해 낸 노예도덕일 뿐이다. 그는 기존의 도덕을 노예도덕이라 칭하면서 기존 도덕을 도덕에 대한 우리의 도덕적 편견 정도로 여긴다. 결론적으로 니체는 그 "노예도덕"을 주인도덕, 고귀한 도덕으로 대체시키려는 도덕의 이단아일 뿐이다. 기존의 도덕적 가치를 비판하는 일은 진보를 위해, 즉 현재의 상태를 지양하며 더 나은 미래를 향한 현재의 역동성에서 분명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기존의 도덕관념 전체를 엎어버리는 적으로 돌리는 것은 위험한 생각이며, 니체의 그 생각은 현재에 발 딛고 있지조차 않다.

 도덕적 가치들(기존의 도덕관념)은 이미 세상 위에 주어진 것으로, 기정사실로 간주되어야 한다. 문제제기 역시 불필요하다. 분명한 것은 '선한 사람' '악한 사람'보다 훨씬 더 가치 있고, 이는 조금의 의심의 여지도 없다. 니체는 진정 악한 자를 "고귀한 자"로 둔갑시키고자 작업했다. 심지어 니체는 인민의 적- 그저 괴뢰 호전광, 전쟁광일 뿐인 나폴레옹을 위대한 사람, 위버멘시의 대표자로 둔갑시킨다. 만약 나폴레옹이 위버멘시라면 북한왕국 역시 위버멘시 왕국이지 않겠는가? 우리에게 있어서 진정으로 고귀한 자-위버멘시는 현재의 입장에서 보자면 체게바라, 우고 차베스, 룰라 다 실바, 실바도르 아옌데,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노먼 볼로그 등의 사람이지 단지 왕, 귀족, 위정자, 재벌, 자본가, 대통령, 독재자 따위의 지위로써 될 수 없다.



[1] 철학사상 별책 제5권 제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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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모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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