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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 거짓말에서 나타난 폭력성의 문제 - 인간 본성과 관련함.

( 사진 출처는 네이버 영화정보)

 

 영화는 대한민국에서의 일종의 학교폭력인 왕따 현상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등장인물은 다음과 같다. 현숙(모), 만지(자), 천지(매), 미란(자), 미라(매), 김화연, 수경, 그리고 반 아이들이다. 이들을 피해자, 가해자, 방관자로 구성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현숙(모), 그리고 천지의 자(姉) 미란은 방관자이자 피해자이다. 딸 천지가 자살을 하기 전부터 어머니엑 넌지시 던져주었던 여러 가지 실마리와 단서, 암시를 놓쳤다. 또는 인지하지 못했기에 본인이 판단하기에는 일차적으로는 방관자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천지 어머님의 실책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갑자기 무엇을 계속하여 사달라고 한다거나,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다소 우울감이 느껴지는 식의 이질적 분위기 등이 그것이다. 또한 방관의 결과로 피해자가 되었다. 허나 천지 어머니가 방관을 하게 된 것의 이면에는 근본적 원인으로 사회구조적 모순이 있으니 비판만 할 수는 없을 것이며 뿐더러 실질적 원인은 가해자에게 있지 피해자에게 있는 것은 아니다. 가해자에는 화연, 수경, 미라가 해당된다. 피해자는 직접적 피해자로 천지가 있으며 간접적 피해자로는 현숙(모), 만지(자), 미란이 속한다. 방관자로는 반 아이들 전체가 해당되는데 만약 가해자의 범위를 가해 조력자, 방관자, 피해방어자로까지 확대한다면 가해자의 범위는 더욱 늘어나게 된다. 


 어떤 원인이 되었든 결과적으로 피해자인 천지는 약자화(化) 되었고 그렇기에 그는 제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게 된 것 같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피해학생 스스로가 나 자신을 능동적으로 보호할 능력이 있음을 깨우치도록 하는 조치가 교육적으로 그리고 사전 및 사후적으로 필요할 듯하다. 더불어 보호받을 수 있음 역시 깨우쳐야 한다. 궁극적으로는 보호법규와 처벌법규의 강화가 필요하다.
 관련하여 고대의 학자 플라톤은 올바름, 훌륭함의 완성을 위한 체육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체육은 몸을 건강하게 하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정신의 훌륭함(올바른 정신)과 건강한 육체는 항상 함께 따라가야만 한다. 관련하여 영화의 피해자인 천지의 모습을 보면, 천지는 착한 심성을 가졌으나 건강한 육체, 즉 외부로부터의 불의에 대항할 수 있는 전투적, 격정적 품성은 지니지 못한 측면이 있다. 다시 말해 주인공 천지의 경우는 심성이 참 부드럽고 선하게 잘 길러진 것으로 보이지만 외부로부터의 어떤 불의에 항거할 수 있는 건강한 육체, 즉 전투적, 격정적 기개는 다소 부족했다. 만약 정신 상태가 훌륭하지 못한 경우는 가해자와 같은 악한 심성을 지니게 되어 그에 따라 행동한다. 심지어 악한 심성에서는 반성의 능력도 떨어져 영화 속 인물 미라, 화연, 수경 등과 같이 제 스스로가 악한 행위를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지각하지 못하게 된다. 더욱이 그런 악한 심성에 주지하듯 체대를 준비하는 등의 학생들 대다수의 모습과 같이 전투적이고 격정적인 육체마저 추구한다면 일탈, 혹은 범죄, 폭력의 전형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학교폭력 및 왕따라는 세태 앞에서 해야할 일은 다음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사후적 조치일수도 있겠지만 아이들의 습성을 파악하여 못된 정신적 상태를 지닌 아이들로 하여금 올바른 정신적 상태를 지닐 수 있게끔 선택적 인성교육 강화를 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아이들에 한하여 전투적이고 기개적인 육체를 추구하지 못하도록 체육교육이나 운동에 있어서의 참여를 제한해야 할 것이다. 참고로 맹자는 호연지기를 기르라고 했다. 결론적으로 중요한 것은 학생의 심성을 바른 쪽으로 교양시키되 그 바른 심성이 침해받지 않도록 균형있는 체육교육이 함께 가야 한다는 것이다. 반대로 못된 심성을 지닌 아이들은 그런 불균형을 바로잡는 방향으로 교육을 제한 및 조정해야 할 것이다. 


 다른 맥락에서 왕따 현상과 그 원인, 대책을 말하자면 한 부모 가정(천지의 가정이 그 대표적 사례이다.) 등에 대한 정책적 지원이나 관심의 시스템 미비일 것인데 이는 결정적으로 국가차원의 잘못이 크다. 부조리, 불의의 원인, 책임은 국가로 이어진다. 천지의 어머니, 그 가정이 아이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이유는 다름 아니라 삶의 팍팍함에 있다. 당장 하루 벌어 자식과 살림을 꾸리기도 힘든 상황에 여유라는 것이 쉽게 나올 수 있었을까? 그렇지 않으리라. 그리고 왜 그런 가정이 국가 시스템 속에서 보호 및 관심을 받지 못하는 것인가? 왜 삶이 궁핍한 것인가? 그것은 바로 지금 그리고 여기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구조적 모순 때문일 것이다. 자본주의의 모순, 그리고 그러한 것을 방관한 주체, 바로잡기를 요구하는 우리들의 목소리를 무시한 주체가 바로 기성 권력자들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런 기성 권력자의 권력을 유지시켜 주는 힘은 결국 국민 총체이기에 그 원인은 다시 우리 국민 개개인에게로 돌아간다. 그 국가의 구속은 근본적으로는 인간 자체, 우리 모두의 잘못이다. 


 사실 권위주의적, 그런 환경에서 (경쟁, 적자생존) 그런 것들을 보고 자란 아이들, 집단주의적 문화. 개개인의 성향은 다소 덜 중시되는 경향. 집단과 화합. 국가주의, 민족주의 등이 이러한 것이다. 동양권, 특히 우리나라는 그것이 심하다. 여전히 집단주의적, 경쟁과 적자생존을 조장하는 천민자본주의적 패러다임이 만연하며 이는 전 근대적, 중세적, 원시적, 구태적 패러다임이다. 이런 사고로부터 벗어날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도 어떤 정명에 있어서 어긋나는 행동을 하도록 해서는 아니 될 것이니, 즉 이를테면 학생은 학생다워야 할 것이며, 교사는 교사다워야 할 것이며, 아이는 아이답고, 어른은 어른답고, 이처럼 이상적 본질과 일치되어야 한다. 즉 실제 사물에 붙여진 이름과 그 내실은 일치되어야 한다는 것이 정명이다. 각기 이름과 위치에 부합하는 책임과 의무, 그리고 그 관계 사이의 예를 벗어나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중세의 소위 ‘암울’하던 분위기를 벗어던지더니 결국 낭만주의니 무엇이니 하는 세기말 비엔나, 퇴폐문화 즉 데카당스가 횡횡하였다. 일종의 합리성에 대한 반발이자 인간 방종의 극치인 것이다. 그러한 방종은 결국 테러리즘을 촉발하여 인류의 큰 비극인 1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게 되었다. 따라서 현재 직면한 학교폭력 문제 등을 비롯한 다양한 사회적 문제 앞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권위주의 및 집단주의적인 경향으로 벗어나는 것과 정명사이의 균형의 추구일 것이다. 


 특히나 많은 사람을 만나고, 또 중등학교에서 시간강사를 하는 요즘, 영화를 보면서도 그랬지만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좋은 생각이면 괜찮겠는데 회의적인 생각이다. 바로 인문, 인간의 본성에 대한 깊은 불신이 그것이다. 참 복잡한 심정이다. 상호간 진심이 소통하지 못하는 세상, 덕으로 소통되지 못하는 그런 세상이다. 영화 제목이 왜 우아한 거짓말일까? 그럴듯하게 포장된 삶이지만 실상 거짓말이 하나의 생존법칙화 되어버린 것이다. 인간이란 그런 것 같다. 유학의 표현을 빌리자면 소수의 군자나 성인, 대인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은 소인에 머무른다. 그것이 타고남인지 후천적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보여지는 결과가 예부터 그러했다. 좀 더 높은 가치, 즉 편파성 혹은 당파성을 뛰어 넘는 인륜적이고 좀 더 높은 가치의 추구, 예를 들면 평화, 공평무사, 도덕추구, 정의, 이런 것들을 따르는 것이 과연 인간 본성적으로 가능할까? 행복은 그런 가치 위에서 구축될 수 있다. 특히 학교폭력이나 왕따 현상은 도덕성 추구, 정의의 문제, 그것과 결부된 인성, 심성의 문제와 관련이 깊다. 하지만 그런 대체(大體)를 따르는 인간은 언제나 소수였고 그 소수는 결국 피해자가 된다. 


 이런 현상과 관련하여 고대 중국에서 통일(좀 더 높은 가치 추구를 위한 기반 - 그 반대는 분열이 될 것이다) 혹은 부국강병을 위해서는 선진단계로의 이행이 필요했는데 그것이 바로 변법이다. 그 변법이라 함은 행정조직, 조세, 병역, 형사처벌, 경제관계 등에 관한 각종 법률의 마련을 뜻한다. 말하자면 고대 중국의 최초 통일자는 진시황, 즉 진나라였는데 이 진나라에서 시행한 변법은 상앙이라는 인물이었다. 그 인물은 결국 한비자의 법가정책을 따르는 인물이었고, (비극적이게도 통일 이후 곧 분열되었지만) 통일전쟁에서의 승리를 가져다 주었고 잠시나마 인민의 삶에 평화가 깃들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역사를 보다보면 느껴지는 바가 많다. 돌이켜보면 인문, 인간 가슴에 아로 새겨진 인간만의 아름다운 무늬, 그러한 것은 모두가 주지하듯 사실상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당위성이며 인위적인 가치이다. 인위적, 당위적이라 함은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는 뜻이니, 그러한 좋은 가치를 바로 세우기 위한 유일한 방도는 법과 체계, 강한 정책, 감시와 통제로서 사람들이 엇나가지 못하도록 바로잡는 것뿐이 없는 것이 아닐까?

 

 -20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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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의 계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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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니체전집 14)

저자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 지음
출판사
책세상 | 2002-02-10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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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도덕의 계보> 번역 비교

비교: 홍성광 번역, <도덕의 계보학>, 연암서가

      김정현 번역,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 책세상 - <도덕의 계보> 편


- 총평: 내용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는 홍성광 선생님의 번역이 깔끔하다. 김정현 선생님의 번역은 원전의 느낌을 살리는데 중점적이다.


 이를테면 홍성광 선생님의 번역에서는 문단의 구분이 깔끔하게 되어 있으나 실제로 독일어 원전에서는 그러하지 않다. 아예 몇 페이지가 한 문단, 혹은 한 문장으로 구성된다(몇 페이지에 이르는 긴 문장-독일어 고전의 특징). 이를 그 내용에 따라 홍선생님이 구분해 놓은 것이다. 김정현 선생님의 번역은 내용을 매끄럽게 전달하기 보다는 원전의 느낌을 보존하는데 중점적으로 작업이 된 듯하다. 즉 김선생님의 번역은 원전의 것을 되도록이면 그대로 따르고 있다. 앞서서 홍선생님이 해놓은 문단 구분이 없이 원전 내용을 그대로 살려, 읽어보면 몇 페이

지에 걸쳐 문단 구분이 없게 된다.


 전체적으로 홍성광 선생님의 번역은 일반의 독자가 읽기 쉽도록 의역과 문단 구분을 자주 사용했다. 이는 사실 단어나 문장의 의미를 전달시키고 이해하는데 있어 논란이 있을 수 있겠지만 독자를 이해시키는데 있어서는 한결 수월한 편이다. 김선생님의 번역은 아무래도 이해에 중점을 두었다기 보다는 원전 판본 대용으로 쓰이기 위함인 듯하다. 따라서 이러한 점을 감안할 때 학술적 참고로 쓸 목적이라면 김정현 선생님의 번역본을, <도덕의 계보>의 수월한 이해, 독해를 위함이라면 홍성광 선생님의 번역본을 선택하는 것이 현명할 듯하다. 


문장 번역 비교 - (1) (동일 문장)

연암서가, p.12

"이 논박서에서 문제되고 있는 우리의 도덕적 편견에 대한 나의 생각은 <인간적인 것, 너무나 인간적인 것-자유로운 정신을 위한 책>이라는 제목의 잠언집에서 최초로 불충분하게나마 임시로 표현되어 있다."

책세상, p.338

"―우리 도덕적 편견의 기원에 관한 나의 사상은바로 이것이야말로 이 논박서에서 문제가 되는 것인데― <인간적인 , 너무나 인간적인. 자유정신을 위한 책 Menschliches, Allzumenshliches. Ein Buch Fur freie Geister>이라는 제목의 저 잠언집에서 최초로 불충분하게 잠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문장 번역 비교 - (2)

연암서가, p.14

"굳이 털어놓고 싶지 않지만 나는 유독 의심이 많은 사람이라 도덕을, 말하자면 지금까지 지상에서 도덕으로 칭송받은 모든 것을 미심쩍게 생각한다."

책세상, p.340

"내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나 자신의 특유한 의심 때문에―이것은 다시 말해 도덕에, 지금까지 지상에서 도덕으로 찬양되어온 모든 것에 관계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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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모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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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세월호 사건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일이 이제는 지쳤으니 그만하자고, 이미 사고의 원인은 밝혀졌고 이상 진상조사라고 할것도 없다고 말이다. 이런 생각을 쓰거나 말하는게 참으로 위험한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지만, 소위 "정의" "양심" 여론에 밀려 소신을 밝히는데 두려워해서야 그것이 올바른 사회이겠나 싶었다. 덕분에 욕을 먹기는 했지만 말이다.


  생각은 그렇다. 이미 밝혀질 것은 밝혀졌다. 입법자와 법체계의 안일함, 운수회사 일당의 불법, 선장 이하 선원의 무능력, 해경 정부기관의 미흡한 대처... 이것이 세월호를 키운 것이다. 이게 사실이고 여기서 이상 다른 원인이나 진상조사를 밝힐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나아가 다른 사고 원인을 조사하자고 한다면 과거 천안함이 미군 잠수함과 부딪혀 침몰했다는 식의 가치 없는 선동에 불과함을 자인하는 꼴이다.


 진짜 원인은 현재 정치판에 군림해 정치양반들의 계보를 잇고 있는 그런 부조리한 인간들을 알고도 뽑아준 바보 같은 우리에게 있었다. 알고도 홍준표를 당선시켰으며 알고도 이명박을, 알면서도 박근혜를 뽑은 것이다. 진짜 책임은 조직이나 사회 속에 들어가면 당파성이나 이해관계에 휘말려버리고 마는 부조리한 우리에게 있었다. 도덕적 개인과 비도덕적 사회라고 학자 니부어가 그랬던가. 어쨌든 부조리한 사회를 만든 것은 사회구성원이다. 따라서 나는 어떤 부조리한 인간을 뽑았으니 잘못이 아닌 것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총체적 난국은 우리가 키운 것이다. 


 국가, 정부를 하나하나 떼어놓고 살펴보자면 거대하고 어마어마한 철옹성일 것만 같은 국가는 실상 우리 개개인들일 뿐이다. 스스로를 반성해야지 비판의 화살이 나를 반성하는 계기를 만들지 못한 다른 , 대신할 , 탓할 대자, 정부, 국가를 향해 날아가서야 근본적 해결이 원만히 진행되겠느냐 하는 생각이 있었다. 이에 나는 세월호 사건을 가지고 광화문에 나아가 외치고 거리행진하고, 이미 밝혀진 것을 억지부리듯 '진상조사' 외치지 말라고 것이다. 


 국가테러를 자행할 것이 아니면, 저런 식의-애매한 합법적 시위로는 사회를 변혁할 없다. 역사를 보건대 알지 않은가? 정치기관의 일정 기능이 마비되거나 아주 히스테리컬한 충격을 수준의 국가 정치'테러' 아니라면 국가는 눈도 깜박이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동안 많이 겪어왔지 않았나? 작게는 ,,고등학교에서부터 대학교 구조조정 문제까지 말이다. 그때 우리 학생조직의 말이 통하던가? 학생이, 노동자가 단식투쟁을 하고 삭발투쟁을 한다고 해서 원하는 바를 근본적으로 쟁취해냈는가? 아니다 결코 그렇지 못하다.


 세월 이후 우리 앞에 남은 것은 진상조사도 아니고 세월호 인양도 아니다. 우리 앞에 남은 과제는 우리 스스로 고통을 잊지 않고 반만년 꾸준히 기억하며 타자가 아닌 스스로를 반성하는 것이다. 그리고 관련자를 색출해 처벌하는 것이다. 그리고 경제나 여타 이익을 위해 방치하거나 완화시킨, 사회 전반에 깔려있는 부실한 법체계의 강화이다. 그런데 앞서서처럼 거대한 국가테러를 통해 사회를 바꿀 용기가 없다면, 위와 같이 남은 과제의 완수를 위해 저렇게 시위를 하며 사람들을 만성적 피로로 내몰며 자신들의 품속에서 멀어지게 것이 아니라 전략적으로 변화시켜야만 한다는 것이 요점이다. 


 좌파는 약자의 편이라고 하였던가. 그리고 정치는 당파성이라고 했던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는 약자 편인 자가 좌파고 강자 편인 자가 우파고... 그런 식의 안일한 이분법적 대립이 진짜 부조리의 원인이라 분석한다. 진짜 우파는 바로 좌파의 편에만 서있는 또는 우파의 편에만 서있는 - 소소한 당파성을 이룬 자들이다. 진짜 좌파는 당파로 우리 사람, 우리 인간people, 우리 인류를 끌어안고 인류의 입장에 서있는 사람들이다. 사람을 끌어안은 진짜 좌파는 감정이나 감성에만 치우쳐서도 아니 되며 이성이나 이론, 경제성에만 치우쳐서도 아니 된다. 소위 "뜨거운 심장" "차가운 두뇌" 같이 지녀야 한다. 인류 당파, 이분법이라고 할라치면 이것이 진짜 쓸만한 이분법 아닌가?


 
그런데 눈에 우리 대한민국에는 그런 좌파란 없다. 여당도 야당도 세월호도 모두 우파뿐이다. 한쪽에서는 경제적 이해관계나 당장의 이익, 사욕에 눈이 멀어 자신의 의무와 인간적 감수성을 망각하여 만연한 부조리에 부패해가고 있다. 반면 "정의" 외치는 다른 한쪽에서는 감성이나 감정에 빠져 여타 공리적 이익이나 경제적 가치에는 소홀한 수천억의 혈세를 낭비하며 세월호를 인양하자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과연 누가 옳다고 자신 있게 말할 있을까? 참으로 비극적인 1 사고를 생각해보며 역시 반성의 계기로 삼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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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모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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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관계가 점점 더 가물어가는듯 하다. 친구든 지인이든 그냥 아는 사람이든 아무튼. 연락을 기준으로 해서. 요즘 안좋은 일은 아닌데- 단 나한테만 안좋았던 일도 있고(그 사람에게는 안좋은 일이 아닐테니까) 뭐 좀 마음의 상태가 현상학적이라고 해야할까?


 물리적으로 떨어져 보기 어렵게 된 경우도 있고, 먼저 연락하지 않으면 연락이 오지 않는 경우도 있고, 연락을 해도 미적찌근하게 대하여 언짢았던 경우도 있고, 소속에서 벗어나 더 이상 집단의 동질감을 느낄수 없게 되기도 하고, 아니면 우연한 기회로 만나 참 잘해보고자 했는데 또 순전히 우연한 그러나 안좋은 모습은 아닌 이유로 단절되기도 했다. 아무튼 이런 말라감의 모습...어떤 모습으로 관계가 소원해지고 사람관계가 가물어가든 아무튼 나쁜 모습이나 이유는 없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알 수 없는 이유, 나만 모르는 이유로 인해 마치 가뭄에 물이 말라가듯 사라졌다. 


 그렇게 못된 사람인가?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떤 사실을 가지고 어떻게 판단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나 스스로가 못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다. 내가 잘못한 경우도 참 많지만, 그래서 자주 반성한다. 


 인간관계가 가물어가면 갈수록 다른 사람에게 나도 모르게 상처나 피해를 주지 않게끔, 혹은 어떠한 허물이나 흠이 보이지 않고자 더욱더 노력한다. 실상은 부족함 투성이의 사람이고 그것을 제 스스로 아무리 가리고자 노력하더라도 새어나간다. 나도 모르게 피해를 준다. 그래서 그러면 그럴수록 나는 내 옷깃을 더욱 꽉 조여맨다. 피해를 주지 않고자 노력하고 허물과 부족함이 없는 것처럼 보이고자 노력하는데도 불구하고 사람이 떠나가는게 지금의 상황인데 하물며 허물과 부족함이 그대로 새어나가며 때때로 피해와 상처마저 준다면 얼마나 더 쉽게 떠나가버리고 말것인가. 그런데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래서 여기에 더해 피해를 주지 않게끔, 무엇을 빚지는 일없도록 갚을 것을 갚고 은혜를 보답하고, 정 안되면 말로, 마음속으로라도 감사하며, 잠자기 전에 그 사람의 앞날에 행복과 운이 가득하기를 마음속으로, 진심으로 기원한다. 그런데 내가 이렇게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그에 비례해 주변사람도 떠나가는것 같다. 아니 나의 이러한 노력과 무관하게, 사람관계의 메마름은 시간에 비례하는듯 보이기까지 한다. 


 도서관 학생증을 빌려주어 좋은 시설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준 친구에게 진심으로 감사하고, 궁금한 철학적 난제나 오류에 빠져 있을때 종종 도와주며 말도 안되는 나의 뻘소리를 묵묵히 받아주는 한 선배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며, 잊지않고 때때로 페이스북으로 소식을 전해주는 백암고 1-9반 아이들이 고맙다. 정말 오래간만에 연락을 해도 잘 받아주는 선배에게도 감사하고, 비록 종교는 안믿지만 아침마다 성경구절을 보내주는 분께도 감사하며, 가끔씩이나마 안부연락을 주고받는 대전 사는 군대 친구도 고맙고..ㅋㅋ 백수가 되어 집 안밖에서 거의 밥버러지같은 처지가 된 나에게 여전히 지원해주시는 부모님께 감사드리고. 택배찾으러 갈때 기분좋게 맞아주는 경비아저씨도 고맙고, 지금은 미국에 유학중이지만 귀국할때마다 꼭 한번씩 연락주는 참 좋은 친구에게도 고맙고, 군대에서 뻘짓했을때 도와준 군동기와 선임, 간부도 고맙고, 휴가나왔을때 힘내라고 응원해주던 해군출신 아저씨, 출판사에서 알바할때 진심으로 잘대해준 그분들도 고맙고, 얼마전 그만둔 편의점 점주님, 알바할때 힘내라고 다독여주던 손님, 대학교 1학년 당시 교회에 염증을 느껴 욕하며 박차고 나왔을 때 1시간 반 먼 거리에 있는 학교까지 와서 배터지도록 떡볶이를 사줬던 목사아저씨, 농담도 많이 하지만 좋은 말도 많이 해줬던 조교이자 동기, 잠깐이지만 연락받아준 그녀에게도. 아무튼 이 외에도 하루에 한번씩 생각나는 사람도 무지 많네. 나 혼자만 다 기억한다.


 나름대로의 노력음 함에도 불구하고 사람관계가 말라간다면, 그렇게 말라가고 있으니 나는 정말로 못된 사람인거다. 악한 사람이고, 사악한 사람이고, 의도했든 아니했든 누군가가 떠나가거나 소원해질만큼 피해를 주고 상처를 주는 사람이다. 나는 정말로 그렇게 못된 사람이다. 나쁜 사람이다. 내가 좋은 사람이라면 지금 내 마음의 상태가 이렇게 현상학?적이지 않을텐데 그렇지 못하니 좋은 사람은 아님이 분명하다. 개똥벌레가 맞네맞어 맞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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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모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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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변

나비 그리다 2015. 3. 20. 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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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명 정도였는데 다 정리를 하고 나니까 90명 정도로 줄었다. 어차피 연락 안하고... 연락하더라도 안만날 사람들은 또 지워나가야지.

굳이 사람을 많이 알 필요는 없다. 연락처도 그렇고. 1. 가족, 2. 친구, 3. 애인(없지만), 4. 일 관계자.

1. 가족은 기본이다. 모두가 떠나가고 남은 자리에는 가족뿐이... 가족이 다 못채워주는 허전함은 분명 있지만.

4. 일할때는 일과 관계된 사람들의 연락처만 있으면 된다. 허나 일이 끝난다면 역시 그들 연락처도 정리해야지. 마음이 잘 맞는 사람이 있다면 두어도 좋겠지만. 나한테는 한 명 있나?

2. 마음맞는 친구 몇 명. 마음이 안맞는데 억지로 연락할 필요도 만날 필요도 없다. 마음맞는 친구가 여럿이면 좋지만, 적어도 문제될 이유는 없다.
다만, 이 지독한 흑석동과 상도동에서 벗어났으면 싶다. 이사온지 5년 되었나, 이 지역에는 친구가 한 명도 없어 적적하다. 가까이에 편한 친구가 있다는 것은 정말 큰 축복이다.
보론: 이성이면서 그냥 친구인 관계가 있을수 있을까? 여자인 친구나 혹은 남자인 친구... 글쎄 나는 그런 경험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안될것 같다.

3. 애인. 애인은 하나 뿐일 것이다. 애인이 안바뀌고, 변함없이 있을수도 있지만 아닐수도 있고, 그건 모르는 일. 어쨌든 애인의 연락처는 단 하나뿐이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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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모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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