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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로티의 신실용주의 진리론 비판”

 

요 약 문

제출자 : 

 

 현대적 맥락, 특히 실용적 맥락에서 보자면 철학은 현실의 삶에서의 의미성이 많이 떨어진다는 인식이 지배적인 듯하다. 특히나 전통철학의 경우가 그러하다. 이렇게 현실과는 거리감이 있는 철학의 가운데서 과연 어떻게 해야 철학이 현실에 유의미하며 실천적일 수 있을지, 또 가치 있고 의미 있으려면 어떤 태도를 지녀야하는지에 대한 의문에서 본 논문은 시작한다. 따라서 철학에 관한 철학이기도하다. 논문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서론에서는 철학에 대한 일반의 인식에 편승해 전통철학 일반에 대한 비판이 있을 것이며, 신실용주의적 사고를 미래 철학의 대안으로써 희망적이게 제시할 것이다. 본문에서는 실용주의 사조가 의미하는 바, 그리고 리처드로티의 신실용주의가 이전의 고전적 실용주의와는 어떤 특징점이 있는지를 서술하게 된다. 그리고 그 특징을 기반으로 한 로티식 신실용주의만의 진리론을 개괄하고 그 진리론의 지지기반이 되는 몇몇의 근거들을 파악해 비판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전통철학과 신실용주의 양자 모두 일면적임을 주장하며 전통철학의 이념인 표상주의와 정초주의, 신실용주의의 이념인 반표상주의와 반정초주의의 통합을 결론으로 내세우게 된다. 
 

 우선 표상주의라 함은 인간이 보편적으로 지니고 있는 인식체계, 예를 들면 마음, 정신, 감각과 같은 것들이 우리 외부의 대상을 사실 그대로 표상가능하다는 식의 이념을 지닌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표상능력을 바탕으로 지식과 진리를 정초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정초주의적 입장이다. 로티는 이러한 표상주의, 정초주의적 이념이 장구한 역사를 지닌 전통 철학적 사조에 깔려있다고 보고 있다. 그런데 로티는 몇 가지 이유를 들어 앞서의 것들을 거부하며 반표상주의, 반정초주의를 주창한다. 그 주장의 기초에는 언어에 관한 그만의 독특한 관념이 자리 잡고 있다. 가장 특징적인 근거는 언어의 우연성과, 표상주의 또는 정초주의의 실천적 비효율성,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의 공약불가능성이다. 이들 근거에는 대체로 인간 공통된 인간 본성에 대한 부정이라는 반표상주의적 관념이 관통하고 있다. 필자는 이들 근거를 비판하며 역으로 전통철학의 이념의 유용성을 다시 끌어오고자 노력할 것이다.


 그런데 앞서 말한 것처럼 철학이 실천적이고 현대적 맥락에서 일반에 의미가 있기 위해서는 전통철학적 사조만으로는 당연히 부족할뿐더러 신실용주의적 사조만으로도 부족함이 있다. 즉 전통철학은 생각에 매몰되어 지극히 사변적이고 현학적 논제만에 머무르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실천과 현실에의 이행 가능성이 지극히 낮으며, 신실용주의 철학은 지극히 개방적인 반면 정초주의적인 사고의 강력한 실천력을 간과했기 때문에 비현실적이게 된다. 이념, 이론, 학문이 의미가 있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현실 속에 쓸모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이념이 현실적이 되기 위해서는 실천력을 지녀야 한다. 실천력을 지니기 위해서는 철학도 그러하고 여타 학문도 그러하듯 정치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어야한다. 정치란 당파성과도 같다. 당파성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특정 사조, 패러다임, 공유하는 토대를 가지고 있어야한다. 그 공유의 토대는 바로 정초적 경향을 통해 도출된다는 점이다. 필자는 이런 흐름에서 두 이념통합에 대한 필연성의 근거로 이분법적 사고의 필연성, 지식의 두 층위, 그리고 직관의 정당화를 제시해보고자 한다.


※ 주요어 : 실용주의, 신실용주의, 프래그머티즘, 리처드 로티, 정초주의, 반정초주의

 

1. 서론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일반적 사람들이 지니는 철학에 대한 통상적 생각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개인의 삶, 국가, 공동체, 세계에 관련된 진리를 파악하거나, 또는 개인이나 단체가 특정한 문제에 봉착했을때 그것을 해결해줄 실마리를 제공해주는 구원자의 역할 등이 그것이다. 최소한 철학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것을 탐구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며 그 중 일부는 철학을 구원자나 영도체(領導體)로서의 기대감을 가지고 있기도 한 듯 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철학이나 철학자에게 그러한 기대감이나 의존을 나타내지 않는다. 즉 현대 공동체가 지닌 중요한 문제나 개개인이 직면한 심각한 문제를 해결해주거나 최소한 그 실마리를 제공해줄 능력을 철학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으로 여긴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현대의 우리들을 대개 사실, 기술, 과학적 사고로부터 나온 지식이나, 그런 지식에서 도출된 상식을 판단기준으로 지닌 채 살고 있으며 그런 판단기준의 유용성, 합리성 역시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부터 존재해온 체계의 철학, 예를 들어 플라톤의 천상계, 이데아,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능태, 현실태, 형이상학,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神), 칸트의 내면성, 선(善)의지와 같은 것들과 또 현재 철학 내에서 생산되는 몇몇의 논의들에 대해 현실에의 삶과의 큰 괴리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면 철학은 그저 현학적인 논의들을 만드는데 그치는 것처럼 일반인들에게 보이는 것이다. 


 이에 대한 본인의 입장을 설명하자면 철학이 절대적인 영도체인 듯 추종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철학이 아예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는 의미에서 앞서 말한 일반인들 중 중도적 입장 정도일 것이다. 다만 평소 은근히 느끼고 있던 행복과 좋음의 기준, 올바름의 문제, 정의와 부정의의 문제, 갈등이나 사랑 등 삶의 처세술에 문제 등에 대해 최소한 한 실마리 정도는 줄만한 것으로 기대했으며 말미에 이르러서는 이에 대해 선고(宣告)받거나 완벽히 정초(定礎)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런 기대감과 확신은 철학이라는 학문이 답이나 해결의 실마리를 제시해주지 않는다는 현실을 알게 된 순간 무너지기 시작했다. 현실의 삶에 있어서 너무나 무기력하다는 회의감을 느꼈고 그로부터 철학이라는 학문에 대한 회의감, 원망, 그리고 추상적이긴 하지만 반(反)철학적 감정이 나왔다.


 이처럼 혹자는 본인과 같이 철학에 입문한 후 철학에 대해 회의감이나 무가치함, 그저 사변적이고 현학적, 관념적이라는 느낌을 받으며 고생하는 경우가 더러 있을 것이다. 그런데 철학에 대한 이러한 문제는 철학자체의 타고난 문제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철학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런데 사실 철학은 현학적이거나 사변적일 수밖에 없다. 철학적 논의의 속성이 원래 그러하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흘러온 철학의 주류를 차지한 특정 경향은 아마 플라톤이나 그 전후를 이래로 지금까지 계속 유지되어온 듯한데, 그래서 철학이 무가치하다거나 현실과는 전혀 동떨어진 채 관념적, 현학적 논의만 한다는 말도 일면 맞는 말이다. 그러나 철학이라는 학문에서 하는 논의가 우리의 삶과 전혀 상관없다고 결론짓기에는 인류 수천 년의 역사와 함께해온 학문에게 상당히 무례한 표현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철학의 어느 지점에서 삶과 현실에의 유용성을 찾을 수 있을까?


 본인은 근현대에 들어서서야 드디어 철학이라는 학문이 사변이나 관념, 현학의 영역을 뛰어넘어 유용성의 측면에까지 발전 및 발디딤했다고 생각하는데 바로 그 돋음의 시작점이 바로 실용주의(pragmatism)인 것이다. 즉 이제는 단순히 현학적인 논제들을 양산하는 죽은 과거의 모습에서 벗어나 철학에 대한 회의감을 극복하고 실제 삶과 관련한 진리나 지식을 구축하는 방법론이나 학문적 태도로서, 더 나아가 개인과 공동체가 직면한 사적·공적 문제에 대한 해결책과 실마리를 제공해주는 인문학적 도구이자 철학적 방법론으로서의 철학적 실용주의야말로 철학이라는 학문의 새로운 진보적 변곡점, 삶이나 현실과 만나는 지점인 것이다.


 그러나 철학이 진실로 진보적, 실천적이고 실용철학적이기 위해서는 실용주의가 그 전부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분명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점이 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회의감의 원흉이기도 했던 주류철학의 사변적, 형이상학적 논의를 구성하는 아주 기저의 이데올로기 내지 원리가 그것이다. 이것을 리처드 로티를 비롯한 실용주의철학자들은 '표상주의', 또는 '정초주의'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이 표상주의, 정초주의적 원리는 제거되어야 하는 최대의 적이다. 하지만 지식, 학문적으로 정초하고자 하는 태도가 없이는 진보나 실천적이기는커녕 혼란만이 있을 것이다. 실용주의자들의 말마따나 고정불변하며 시간과 공간을 관통하는 지식체계나 이론, 즉 진리가 없다고 한다면 세상에 그것만큼 불안하고 살떨리는 일이 또 있을까 싶다. 그러한 상태는 진실로 견딜 수 없는 상태이며 본인은 없다는 생각만으로도 불안해 차마 견딜 수 없음을 느낀다. 마치 재난이나 재앙, 대 혼돈 속에 들어서 있는 것과 같은 기분을 느낀다. 그러나 어제 동녘하늘에서 해가 떠 서쪽으로 졌고 오늘도 그러한 것처럼 그러한 불안을 뒤로한 채 세상은 여전히 잘 움직이고 있다. 여전히 볼펜은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며 버스는 연료의 연소와 힘과 가속도의 법칙에 따라 잘 굴러가고 있다. 즉 진리의 존재를 비판하는 실용주의적 태도도 현실의 반영에는 일면적이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본인이 이 논문을 통해서 주장하고자 하는 바는 철학이 진실로 실용적이고 더 나은 방향으로 진보하기 위해서는 실용주의의 반정초주의적인 태도와 주류철학체계의 정초주의적 이념이 함께 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본 논문에서는 우선 가장 최신의 실용주의 철학자이자 서구철학사를 대대적으로 비판하며 새로운 형태의 실용주의인 신실용주의를 만들었으며, 또 그에 기반하여 진리론, 정치철학 등을 전개한 현대 영미철학자 리처드 로티(Richard Rorty, 1931~2007)의 이론을 중심으로 논문을 전개할 것이다. 본론에서는 로티의 진리론의 개요를 자세히 탐구한 후 로티의 진리론이라 할 수 있는 반정초주의가 정당화되는 주요한 세 가지의 근거를 서술할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실용주의의 반대격이라 할 수 있는 주류철학체계의 정초주의적 이념, 그리고 로티 철학의 주요한 세가지 근거를 함께 비판하면서 정초주의와 반정초주의를 통합하는 과정을 시도할 것이다. 통합의 근거로 본인은 이분법적 사고의 필연성, 지식에 두 층위가 있음을 주장하게 될 것이다. 먼저 본론의 긴 작업에 들어가기에 앞서 실용주의란 무엇인지에 대해 본문의 서두에서 간단히 밝혀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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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생활을 존중하는 것이 상대방의 사생활을 존중하는 사실이라는 것을 얼마 전 깨달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래의 일을 기억해둔다..

얼마 전 작년부터 같은 수업을 들었던 한 타과생 여학생과 연락이 되었다. 전공 강의였는데 내 눈에는 참으로 수수하고 예쁜 여학생이었다(그 분 스스로는 그런 이미지가 아니라고 말을 했). 첫 학기 수업에서는 그냥 그렇게 눈에만 들어왔다. 실습이 있어 수업을 한달 넘게 빠지기도 했었다.

어쨌든 그렇게 어영부영 한 학기가 지나고 다음학기가 찾아왔다. 그때는 졸업을 코앞에 둔 시점에 졸업논문을 쓰고 있었는데, 그렇게 교수님을 찾아뵙고 검토를 부탁드리며 연구실과 강의실을 오가며 지냈다. 그런데 그렇게 지내다가 우연찮게 그 여학생을 또 보게 되었다. 게다가 지하철 같은 칸에서 종종 마주치는 일도 있었으니.

라디오에서 한번쯤 흘러나왔던 적 있던 송창식의 다음과 같은 가사의 노래가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말을 해도 좋을까
사랑하고 있다고
마음 한번 먹는데
하루 이틀 사흘

돌아서서 말할까
마주서서 말할까
이런 저런 생각에
일주일 이주일

맨 처음 고백은
몹시도 힘이 들어라
땀만 흘리며 우물쭈물
바보 같으니

화를 내면 어쩌나
가 버리면 어쩌나
눈치만 살피다가
한달 두달 세달

맨 처음 고백은
몹시도 힘이 들어라
땀만 흘리며 우물쭈물
바보 같으니

화를 내면 어쩌나
가 버리면 어쩌나
눈치만 살피다가
한달 두달 세달

호감이 있었다.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런데 가사처럼 되어버렸다. 故 김광석씨께서 옛날에 이런 말을 했다. 노래 가사를 계속 들으면 운명이 그 가사처럼 되어버린다는 유머가 알게 모르게 있어 슬픈 노래는 되도록이면 부르지 않는다고. 그 말이 맞았던 것일까? 한달 두달 세달 나는 그렇게 눈치만 보다가 졸업을 해버렸다. 하여 그저 어떤 마음속 신기루이겠거니 잊기로 마음먹는데 그사람이 계속 생각났다. 그래서 참 이래도 되는것인가 싶었지만 그 여학생을 수소문하기로 했던 것이고, 믿기지 않게도 결국 연락이 닿았다.

카카오톡 대화를 했다. 나는 그 여학생을 조금이나마 알고 있었지만 상대는 나를 전혀 모르는 상황이었고 하여 너무 진지하게 말을 걸면 부담스러워할 것이고, 반대로 또한 너무 가볍게 이야기를 한다면 마치 장난인 것처럼 생각할것 같아 고민이 컸다. 그런데 내 대화가 그분에게는 너무 가볍게 들렸던 것일까? 아름다운 것은 참으로 어려우며 진심이라는 것도 전해지기 참으로 어려운 것이라. 결론적으로 며칠간 연락이 안되더니 결국에는 대화가 끝이 나고 말았다. 요 며칠간 나 혼자만 쓸떼없는 설렘을 느꼈었구나 싶다.

계속 연락하며 한번 만나보기라도 해달라 이야기해보고 싶었지만, 내딴에 그것은 참 보기 안좋은 모습으로 생각되었다. 내가 호감을 느끼는 상대방에게 예의가 아니지 싶었고, 내가 좋아했던 사람이었다면 그 사람을 계속 부담스럽게 하는것 보다는 그 사람의 미래를 축복해주며 마무리하는 것이 상대를 향한 진실되고 바람직한 모습이리라 생각했다. 물론 상대방은 아무 생각이 없는데 나 혼자 설레발을 치는 것이리라는 생각도 있었다.

오늘 나는 설렘과 답답함의 극단의 끝에서 또 다시 외로운 사람이 되어버렸다. 제자리로 돌아온 것이다. 주변 사람들의 나에 대한 총평을 종합하자면 "자기 주관이 뚜렷하고 좋은 사람이지만 외로운 사람"이란다. 헤겔식의 표현을 유치하게 빌려보자면 나는 뚜렷한 자기 주관이라는 것에서 시작해 좋은 사람이라는 보편성을 얻고 궁극에는 외로움이라는 제자리로 돌아오는 존재인가보다.

사랑고백이라고 하기도 전에 끝난 경우이지만. 계속해서 송창식씨의 가사가 머릿속에 맴돈다. 부탁드릴 수만 있다면 곧 18일에 있을 송창식 선생님의 쏭아 라이브공연때 이 곡 한번만 부탁드려야겠다. 우연찮게도 그 여학생의 성도 송창식씨와 같은 송씨였다. 오늘 저녁은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고 또 만나게 되면 주리라 하며 구입해놓았던 페루산 쵸콜릿을 안주삼아 포도주나 실컷 마시고 잠들것이다. 잠깐이지만 연락이 닿아 설레였던, 그녀의 미래에 항상 축복과 행운이 가득하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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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모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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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가 마르크스의 망령이라고 한다면.

추억은 추억의 망령이라고 할수 있겠다.


이제는 그만 훌훌 털어 버려야겠다.

추억의 망령으로부터 벗어나야지.


일단, 이 망령에 관한 소설 한편, 소설아닌 소설 한편을 써야겠다.

달은 정령 망령이었던 것같다.


있는듯 없는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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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모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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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의 꿈은 무엇인가요?" 하고 누군가 말하면 어렸을때라면 보통은 판검사, 장군, 대통령, 경찰, 소방관, 가수, 국회의원, 선생님 등 이랬다. 꿈에 대한 생각의 폭이 추상적이고 비좁다는 것이다. 삶에 대한 미래의 희망은 경험에 비롯됨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허나 나이가 들더라도 그 시절의 꿈은 이상으로서 삶의 한 축에 자리 잡고 있다는 뜻에서 꿈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다만 현실적인 어떤 것에 발목이 잡혀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러한 것들이 (나름 괜찮은 직장으로의) 취직, 혹은 회계사, 세무사, 공무원, 교사, 안정적인 직업 등 비록 궁극의 목적(잘 사는 것?)은 아닐지언정 중간 목적지 혹은 수단으로 바뀌게 된다.

 그런데 내게 있어서 고민, 잘 모르겠는 것이, 앞서서처럼 한창 어렸을 때 꿈꿔왔던 꿈은(천문학자, 군인, 경비아저씨, 성우... 뭐 그 외에도 화가, 조각가.. 참 많았다.) 진즉 버려졌는데, 그 이후 어떤 삶의 궁극의 목적을 향해 갈수 있게끔 삶을 지탱해줄 중간 목적, 즉 수단으로서의 꿈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스스로게는 궁극의 목적 뿐이 없는 것이다. 나에게 그 궁극의 목적이란, 누구나 당연히 받아들일 수 있는 것, 바로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다. 아마 이 꿈은 나의 삶의 궁극 목적이기도 하지만 모든 사람의 삶의 궁극 목적으로 있을 것이다.


 여기서 내가 생각한 나의 행복한 삶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일까? 사랑하는 이성과 오순도순 살기 좋은 남향과 서향이 탁 트인 방 한 칸이 내 집으로(전세나 월세가 아닌) 있고, 조그만 경차 한 대 정도 운영할 수 있으며, 일년에 한 번씩은 한반도의 태백산맥 종주를 하면서 자연을 느끼고, 일년에 일주일 정도는 여행으로 시간을 할애하며, 한 달에 한번씩은 좋아하는 예술가의 공연이나 전시를 보러 갈 수 있으며, 일주일 중 날 좋은 하루 정도는 밤하늘의 별을 보러 어디론가 부담없이 떠나며, 때때로 집 근처에 편한 친구가 있어 부담없이 맥주나 커피 한 잔 하며 담소할 수 있는 삶이다. 너무 대단스럽나?  작금의 현실을 비추어 보자면 사실 바라는게참 많하기는 하다. 그렇다면, 딱 하한선을 말해보겠는데, 일주일 중 주말 이틀은 완전한 나의 시간으로 사용하며,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 할 방 한칸과, 그리고 그 사람과 함께 할 취미 한개, 그리고 친구 정도는 유지할 수 있는 삶이면 충분하다.

 나는 요즘 한창 중앙대학교 도서관에서 시간을 쓰고 있는데, 그곳에서 사람들이 공부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토익, 회계, 세무, (건축, 수질, 환경 등 전공 관련) 기사, 한국사, 보통의 영어 등이 대부분이다. 그들은 이렇게 공부를 해서 회계사가 되고, 세무사가 되고, 9급 내지 7급 공무원이 되고, 유치원 교사나 중등학교 교사가 되고 혹은 교수님의 추천이나 선배들의 도움으로 중견 이상의 기업이나 연구소로 갈 것이고, 혹자는 공기업으로 빠질 것이다. 그리고 또 누군가는 계속 끝없는 공부를 하겠지.

 그렇다면 나의 경우, 행복한 삶의 최소한의 충족 요건인 일주일에 주말 이틀을 온전히 내 시간으로 영유하면서,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 할 방 한칸, 함께 할 취미, 친구 정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라면 어떠한 수단이라도 상관이 없다. 다만, 대학병원, 고시학원, 건설업, 이벤트회사, 출판사, 판매원 등등 내 몇몇의 아르바이트와 계약직 일을 하면서 느꼈던 것이(내가 경험한 삶에 한해), 그런 최소한의 행복한 삶은 차치더라도, 그 수단 자체에 도무지 적응을 할 수 없었다는 데 문제가 있었다. 부정의, 부당함 등의 갈등이 있거나, 몸이 너무나도 고되어 일이 끝난 이후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가 힘들거나, 사람 자체에 염증을 느끼게 되거나(특히 서비스업이 그러하다), 조직의 위계질서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등. 더불어서 직업의 물불을 가리지 않는 손 치더라도 내 딴에는 대한민국 땅에서 그런 소소한 삶을 누를 수 있는 직업이 공무원, 대기업, 창업의 성공, 혹은 적당한 중견 기업으로의 취직 등 너무 한정적여 보인다는 사실이 필자를 두렵게 한다.

 위와 같은 내 입장에서의 "행복한 삶"의 최소 요건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 승리하여 "한 자리"를 차지하거나, "영특한 머리"가 있어서 "비경쟁적 혹은 저 경쟁적 영역"을 창조 및 발굴해내어 시장이나 노동가치에서 독점적 지위, 혹은 독창적 지위를 지닐 능력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이도 저도 아니라면, 금수저 하나쯤은 물고 태어나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도무지 "행복한 삶"이라는 나의 꿈을 이룰 길이 묘연해 보인다. 허나 나에게는 당장 치열한 경쟁에서 승리를 쟁취할만한 "경쟁력"이 아직까지는 그다지 있어 보이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영특한 머리"도 아닌것 같다는 그러한 현실의 내 모습, 그리고 그러한 경쟁력과 영특함을 갖추기 위해서는 또한 엄청난 자본과 시간이 필요한데, 그 엄청난 투자를 받쳐줄 자본과 시간이 내게 없다는 한계가 압박한다.

 나는 이런 고민과 문제의 원인이 그저 내 자신에게만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물론 영어나 취업스터디, 잘 쳐주는 자격증 공부, 이력 한줄 쓸만한 대외활동이나 해외 봉사활동, 어학연수 등 을 등한시한 내 잘못도 있지만..ㅠㅠ) 허나 고민의 진짜 뿌리는 정치와 교육에 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당장 내 삶이 행복하지 못한 직접적 원인은 나 자신에게 있겠지만, 간접적이기는 하지만서도 근본적인 원인은 국가, 국가 속의 정치와 교육, 그리고 더 궁극적으로는 이들을 구조화하는 구성체인 인간 모두에게 있다고 나는 판단한다.

 청소부 일을 할지라도, 경비원 일을 할지라도, 편의점에서 소위 "한갓" 판매원으로 일할지라도, 남들이 하기를 기피하는 3D업종- 건설이나 제조업 등 의 일을 할지라도, 그래서 그 노동의 과정 속에서 나의 정체성이 잠시 소외된다고 할지라도, 그 노동이 끝난 이후의 시간은 온전히 나의 사적 자아를 창조하고 삶의 사적 가치를 끌어올릴 수 있도록 정치가 그것을 구조적으로 백업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국가에서 구조적으로 백업을 해주면서 개인의 사적 자아성취, 가치 창조를 할 수 있게 도와준다면, 직업 쏠림 현상이라든지, 고교 졸업생의 70%가 대학을 진학한다든지 하는 현상은 획기적으로 줄어들 것이다. 국가가 행하는 백업이란 이런 것이다. "최소한의 행복한 삶"(내 집 한 칸 걱정없이 가질 수 있으며, 주말 이틀은 온전히 자기의 시간으로 활용할 수 있으며, 취미 한개 정도는 부담없이 가질 수 있어야 하며, 더욱더 양보하자면 최소한 의식주의 걱정은 없는 상태)을 모든 국민이 누릴 수 있도록 임금의 하한선을 설정하고 노동법을 제정하는 일이다. 부당함을 느끼는 조직이라면 언제든지 고발을 하거나 일을 그만두고 다른 좋은 조직을 찾아 나설 수 있도록 사회보장제도와 노동의 유연성을 확보하는 일이다. 어떠한 일을 하든 서로 존중하며 인간적인 대우만을 받을 수 있도록 구체적인 인권법으로 모든 노동자를 보호하는 일이다. 그리고 교육은 그러한 인간을 양성할 수 있도록 인간 내면에 바탕을 만들어주어야 한다.

 이것이 과연 어려운 일인가? 그렇지 않다. 사회구성원들의 결단과 용기만 있으면 지금의 경제력으로 충분히 실현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리고 국가, 정치, 사회, 경제야말로 정말 "잘, 제대로" 돌아가는 모습일 것이며, 그렇다면 실질적으로 사회주의이니, 자본주의이니, 자유주의이니 하는 이데올로기의 싸움도 무의미할테다. 그것이 진정 행복한 사회이며 국가의 존재이유, 궁극의 목적이지 국가속에 내재된 인륜적 요소라고 할 수 있다. 더불어 교육은 정치적 이념에 휘둘리지 않고, 그런 바람직한 사회를 구성하는 구성원들를 양성하는 역할을 해야지만, 진짜 "살기 좋은 세상"이 만들어질것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동물중에서도 인간을 구별할 수 있는, 그리고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인간의 모습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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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모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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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이 되면 라디오에서 들리는 장작 타는 소리가 정말 좋다. 지금도 라디오를 듣고 있다. PC어플이나 모바일 어플은 아날로그 라디오에서의 라디오 특유의 잡음이 없다. "찌잉-" 하는 고주파 소리나, "자글자글-" 하는 식의 장작 타는 소리라든지.

 라디오를 듣는데 그런 잡음이 없으면 무엇인가가 약 2% 부족하게 느껴진다. 오히려 완벽한 것이 아니라, 그런 잡음은 라디오를 듣는데 필요한 하나의 소스와 같다. 그 아름다운 소스가 버무려진 라디오를 청취하기 위해 나는 디지털이 아닌 아날로그 라디오를 고집한다.

 날씨가 풀리고 봄이 오면 라디오를 듣는 모임을 하나 만들고 싶다. 이 추운 겨울에 산에 올라가 라디오를 듣는 고생을 하는 사람은 나 하나면 족하다. 봄부터 가을까지 진행되는 모임을, 한강이나 서울 시내가 어느 정도 보이는 동네 동산이나 한강에서 와인과 맥주, 또는 커피와 커피포트를 싸들고 밤새도록 라디오를 듣는 놀이를 만들고싶다.

 사람이 몇 명 모이면 프로그램도 기획해서, 1. 함께 공감하며 듣기, 2. 직접 선곡하여 노래를 공유하고 공감하기, 3. 일일 DJ가 되어 보기, 4. 단파 라디오를 통해 해외 라디오를 청취하기 등. 말 그대로 새로운 형태의 놀이를 만들수도 있을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이런 모임이 활성화되면 그 속에서 악기를 함께 연주할수도 있고, 이런저런 담소도 나눌수 있다.

 시간대는, 왜 꼭 새벽이어야 할까? 내 경험상 밤 9시부터 새벽 4시까지가 사람의 감성이 가장 풍부해지고, 또 도시의 감성도 풍부해지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사람에 따라 다소 피곤할수도 있지만, 그 시간대가 어둠의 아름다움을 느끼기 충분한 시간대이며 사람의 마음이 가장 너그럽게 열리는 시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허나 이렇게 생각해도 역시나 내게서 사려져간 수많은 기획들처럼 상상에만 머무를 수밖에 없다. 이렇게 저렇게 말해보아도 함께 하고자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이번 설에는 (늘 그랬듯이) 어디 갈 일도 없으니 라디오와 통기타를 하나씩 들고 한강과 63빌딩이 보이는 동산에서 라디오를 들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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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모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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