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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출처: 아마추어 무선의 운용/송형석(HL1CG)


유형별로 본 아마추어무선

 같은 낚시꾼일지라도 피래미든 뭐든 낚는 재미를 최고로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강태공식으로 월척만을 기다리는 혹은 정신수양을 목적으로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며 낚시대 수집을 더 즐겁게 여기는 사람이 있는 등 여러 가지 타입으로 세분될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햄도 그 즐기는 형태에 따라 몇 가지로 분류해 볼 수가 있다.


1. 땜쟁이형

 기계나 안테나를 손수 제작하는데 흥미를 갖는 햄들을 일컫는다.

 무선통신부문의 짧은 역사가 증명하듯 통신기기분야의 발전도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어느 나라에서나 마찬가지겠ㅈ니만 초창기 햄들은 손수 기기와 ㅇ나테나를 만들어 사용하였으므로 햄은 곧 모두 땜장이일 수가 있었으나 최근들어 햄용 통신기기가 대량생산되면서부터는 기기에 대한 전문지식이 없는 사람들도 조작법만 익히면 간단히 햄생활에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추세 속에서도 스스로 부품들을 구해다가 기기를 만드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는 사람들이 있어 이들을 땜쟁이형으로 구분한다.

 자신이 몸소 만든 기기로 전파를 발사해서 세계의 햄들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을 때의 기쁨은 땜쟁이들만의 것일 수 밖에.


2. DX형

 가까운 거리에 있는 신호 좋은 햄들과의 교신보다는 햄이 희귀한 지역의 햄이나 먼 거리에 있는 햄과의 교신을 즐기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이들은 무슨 소리인지 웬만큼 신경을 써서는 알아 들을수도 없는 신호를 잡아서 남들이 흔히 할 수 없는 햄과 교신하는 것을 큰 자부심으로 생각한다.

 EXer가 되기 위해서는 끈기와 집념이, 그리고 눈물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하겠따.

 평상시 교신이 어려운 국과 교신이 되었을 경우 햄들은 "월척을 낚았다"고 표현한다.

 낚시꾼들이 월척을 낚을 때의 '손맛'에 이끌려 낚시터에 모여드는 것처럼 햄들 특히 DXer들은 이 황홀한 순간의 기쁨을 잊지 못해 밤을 낮삼아 주파수에 귀를 기울이기 마련이다.


3. Rag Chew형

 이른바 잡담형이다. 그 상대가 국내인이든 외국인이든 한번 만났다 하면 지칠 때까지 이야기를 하는 것을 즐기는 유형의 햄들을 말한다.

 어느 나라에선가는 Rag Chew 경기를 개최하여 이틀간인가를 꼬박 이야기한 햄이 1위의 영광을 차지한 예드 있다.

 장시간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튼튼한 목을 가져야 하는 것도 물론이겠고 지루하지 않을 만큼 다양한 화제와 언어구사능력이 요구된다 하겠다.


4. 수신 only형

 마이크를 잡고 직접 대화를 나누는 것보다 다른 햄들의 대화를 듣는 것에 더 많은 흥미를 갖는 사람들도 있다.

 하루 종일 주파수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햄들이 쏟아놓는 수많은 이야기를 통해 기쁨을 느끼는 이들-수신형의 햄들은 상당히 경제적인 햄생활을 한다고 할 수 있따.

 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아도 되므로 목이 아플 필요가 없고 여러 사람들의 대화를 통해 각종 정보도 얻을 수 있겠기 때문이다.


5. 위성통신, 마이크로웨이브 등 실험 연구형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하늘에는 햄들을 위해 쏘아 올려진 위성이 10개도 넘게 떠 다니고 있다.

 위성을 이용한 통신은 첨단의 통신방식으로 이를 유효하게 이용하기 위한 햄들의 연구가 계속되고 있다. 

 이 연구를 즐거움으로 삼고 나아가 미개척분야의 통신 방식개발에 앞장서고 있는 실험 연구형 햄들에 의해 아마추어 무선계가 발전되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6. 수집형

 Award든 QSL카드든 기기든 그것을 수집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는 사람들을 말한다.

 어렵기로 유명한 DXCC를 받기 위해서 혹은 희귀한 무선국의 QSL카들르 받기 위해서 혹은 골동품에 가까운 기기를 손에 넣기 위해서 이들 수집형의 햄들은 놀랄만한 노력을 한다.

 그렇게 어렵게 얻은 Award나 QSL카드나 기기들은 그들에게 더없는 재산이 되기 마련이며 햄생활에 활력소가 되어 준다.


 이 밖에도 다른 유형의 햄들이 있겠지만 대개는 이들 중의 어느 한 유형이며 어느 한 가지 유형에만 국한되지 않고 한 햄이 여러 가지 유형을 겸하기도 한다.

 이런 여러 가지 유형들은 햄이란 간단하게 무선통신을 취미로 즐기는 사람들을 의미하지만 그 무선통신을 즐기는 방식은 개성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고 그만큼 즐겨 가면서 새롭게 알아갈 세계가 많은 ㄱ싶이 있는 취미라는 점을 입증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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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 북스코프

지은이 : 이스마엘 베아

옮긴이 : 송은주


참 좋은 책을 얻었다. 집으로 가는 길 - 어제-오늘 이틀 간 푹 빠져


집으로 가는 길

저자
이스마엘 베아 지음
출판사
북스코프 | 2007-10-30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래퍼를 꿈꾸던 소년, 병사가 되다랩과 힙합을 좋아하던 아프리카의...
가격비교

보게 된 책이다. 지난 한기 내내 학교에서 공부를 하며 전공서와 학술서에 묻혀 살았던 것이, 그로 인해 이렇게 "아름다운" 책이 있었다는 것을 나는 전혀 모른 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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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1970년대 골목길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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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 윌 헌팅 (1998)

Good Will Hunting 
9.2
감독
구스 반 산트
출연
로빈 윌리엄스, 맷 데이먼, 벤 애플렉, 스텔란 스카스가드, 미니 드라이버
정보
드라마 | 미국 | 126 분 | 1998-03-21

감명깊게 본 영화 한 편이나,


또는 소설이나?


그런 것으로 인생의 전환점이 찾아올 수 있을까?


여태 수 많은 영화를 보아 왔으며 또 많이도 감동 받아 왔지만 여전히 내 삶은 비루하기 짝이 없다.


답답하다. 용기를 가져라. take a chance! 등등 


그런데 그게 그렇게 쉽지가 않다.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이 다르다. 혹은 잘못 알고 있기에 두려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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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평중 칼럼 - 종교 정치와 정치 종교
조선일보 2013-11-29일자 오피니언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전주교구의 대통령 퇴진 요구가 정치적 태풍을 부르고 있다. 박창신 원로신부의 천안함·연평도 발언까지 더해져 파장이 일파만파 一波萬波 다. 여야와 시민사회, 개신교와 불교로까지 전선이 확대되면서 폭풍의 계절이 밀려오는 중이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꼬인 데는 박근혜 대통령의 책임이 크다. 열린 정치를 외면하고 닫힌 통치로 일관한 탓이다. 대선 댓글 의혹도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도 못 막게 되었따. 철저한 수사와 책임자 처벌의 정도 正道로 풀지 않고 공안정국의 편법으로 대처한 청와대의 단견 短見 이 오늘의 화를 불렀다. 박창신 신부의 발언도 강경 대응보다는 공론 영역의 자정 기능에 맡기는 게 옳았다.

 정의구현사제단 파동은 종교와 정치의 관계를 성찰하게 한다. 이는 '성직자의 정치활동을 어떻게 볼것인가?' 하는 논젤ㄹ 포함해 신앙과 양심에서 비롯된 사회 참여의 정당성 문제로 확장된다. 정의구현사제단은 엄혹한 군사독재시절 민중의 십자가를 대신 짐으로써 민주화에 공헌했따. 우리 시대의 어른으로 존경받던 김수환 추기경의 존재와 함께 천주교를 빛낸 신뢰의 아우라를 쌓은 주역 중 하나였던 것이다.

 이는 암울했던 그 시대 다른 제도 종교와 성직자 다수가 정치권력과 유착해 종교정치의 길로 치달았떤 것과 대조된다. 사내 社內 정치와 관료정치에서 실세의 줄을 잡는 게 성공의 지름길이듯 종교정치에 능숙한 종단과 성직자는 권력자와 부자들을 중시한다. 세습과 비리로 얼룩진 개신교 대형교회와 종단정치에 빠진 불교 조계종이 밟았던 바로 그 길이다. 천주교와 정의구현사제단은 이런 종교정치에 저항하면서 오늘의 신망을 쌓았다.

 그러나 정의구현사제단은 87년 이후 차츰 한국사회의 진화와 어긋나는 길을 간다. 민주와 독재의 대치구도를 벗어난 다원사회의 출현이 일부 사제의 원리주의적 신앙과 충돌하기 시작한 것이다. 성직자가 신앙의 이름으로 각종 현안의 최종 판관을 자임할 때 저치종교가 태어난다. 정치조욕는 선악의 이분법으로 현실세계를 난폭하게 재단한다. 자신의 말과 행동이 곧 정치적 진리라고 선포한다. 그 결과가 독선이며 미망이다. 정치종교의냄새를 물씬 풍기는 박창신 신부의 천안함·연평도 강론은 사실과도 맞지 않고 공동체의 원리조차 위협할 정도다

 성직자는 정의를 말할 때 자계 自戒 하며 두려워해야 마땅하다. 정의는 원래 무서운 것이기 때문이다. 의 義라는 말에서는 중국 지식인 이중텐 의 지적처럼 피냄새가 진동한다. 의를 파자 破字 하면 창칼로 희생양을 제사지낸다는 뜻이다. 정의의 여신 디케(Dike)도 언제든지 칼을 휘두를 자세로 인간을 내려다보는 모습이다. 말끝마다 정의를 내세운 정치종교의 궤적이 사랑은 커녕 피비린내로 가득햇던 것은 우연이나 일탈만은 아니다. 

 서양 중세의 마녀사냥과 함께 십자군 원정은 가는 곳마다 약탈과 죽음을 불렀다. 알카에다는 이슬람 십자군의 이름으로 오늘도 대량 살육을 일삼는 중이다. 인도 역사는 정의를 앞세운 불교를 위시한 종교간 갈등으로 홍역을 겪었으며 21세기에조차 힌둑적 정의관인 카스트제도의 멍에에 시달리고 있다. 성리학의 유교 원리주의는 사문난적의 정의관으로 조선 사회를 질식시켰다. 정치종교로 타락한 지배적 종교가 인간의 삶을 파괴한 사례는 너무나도 많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라고 호소한 이유다. 성직자일수록 남을 쉽게 정죄해선 안된다. 오히려 자신이 틀릴 수도 있다는 두려움 앞에 몸을 낮춰야 한다. 진정한 신앙인은 타인과 세상을 부드럽게 대할 것이다. 종교인들은 자신의 신앙으로 우리 사회가 더 따뜻한 곳이 되었는지 자문해야 한다.

 모든 종교는 사랑과 자비를 외친다. 따라서 신앙인의 믿음은, 그것이 참된 믿음이라면, 삶의 현장에서 그 사랑과 자비를 증명해야 한다. 신앙은 신앙 자체로 정당화되지 않는다. 믿는 사람이 행하는 사랑의 실천으로 정당화될 뿐이다. 종교정치와 정치종교는 너무나 자명한 이런 삶의 진리를 거부한다. 대선 댓글 논란도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정치적 정의를 ㅁ라하는 종교인들은 '자신의 삶과 자신의 종교 안에서 정의가 실현되고 있는가?'를 먼저 물어야 한다. 단언컨대, 바로 이 질문이야말로 한국의 종교인들이 응답해야 할 최대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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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보예 지젝

http://youtu.be/Fp0uv3fnYgI




슬라보예 지젝

슬로베니아 출신의 세계적인 사상가. 철학에는 헤겔, 정치학에는 마르크스, 정신분석학에는 자크 라캉 연관.

(chapter1상처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지금부터 본 주제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한국의 역사는 파란만장했다고 들었습니다. 고통이 극심했던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의 만행을 잊기 위해 한국 국민들이 많은 노력을 했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니체가 항상 말하는 표준화된 공식을 전도하는 방식의 생각을 한국 국민들이 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많이 듣는 말에 이런 예기가 있죠 "용사하되 잊지는 말자". 그런데 제가 듣기로는 한국 분들은 "잊자 그러나 절대 용서하자 말자"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그 태도가 옳다고 생각합니다. 생각해보면 "용사하자만 잊지는 말자"라는 말이 좀 위선적이지 않나요? 사실 그 문구 자체가 상당히 교묘하고 인간들은 조종하는 논리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당신의 만행을 용서하겠지만 얼마나 끔찍한 짓을 했는지 영원히 기억하겠다"라는 사고도 여기에 담겨져 있습니다. 한국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도 포스트모던[1]적인 태도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포스트모던적인 태도라는 것은 사어를 치유하기 위해서 더욱 노력하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사실상 한반도에서 겪었던 이 고통은 완전히 극복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신분석학에 따르면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것들은 어떻게든 결국 치유해야 하는 상처이자 트라우마라고 지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반대의 생각도 가지고 있습니다. 상처라는 것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기도 합니다. 대한민국은 국민들이 상처를 받는 것이 두려워서 항상 국민들을 보호만 하는 나라가 아닐 겁니다. 상처받지 않는다는 것은 완전히 고립됐다는 것 아닙니까?

(chapter2 두 얼굴의 한국 사회)

'프랑코 베라르디[2]'라는 이탈리아 철학자가 있습니다. 이본께서 한국에 대한 여러 편의 글을 썼습니다. 말씀하시길, 20세가 말이 됐을 때 수십 년 동안 지속되었던 전쟁, 굴욕, 굶주림, 끔찍한 전쟁의 흔적들로 인해 한국의 물리적, 인류적 환경은 그야말로 폐허의 추상으로 환원되었고, 그리하여 강력한 현대 허무주의에 순응해버린 도시가 되어버렸다고 하면서 "대한민국은 세계의 그라운드 제로다", "동시에 지구적 미래의 청사진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어쩌면 한국 국민들이 식민시대와 625 전쟁, 독재정권, 굶주림과 같은 많은 상처가 있었기 때문에 자연적 물리적 멍에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고, 그래서 어느 문화보다 자연스럽게 디지털시대로 전환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한국이 비워진 문화적 공간에 두 가지를 동시에 담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한 편에는 극단적인 개인화가 담겨 있고, 다른 한편에는 공동의 정신이 서로 연결되어진 사회, 즉 케이블링된 사회가 공존하는 특이한 사회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한국의 외로운 개인들은 저마다 작은 디바이스 스크린을 통해 사진과 트위터, 게임을 통해 서로 공유하면서 부드럽고 지속적으로 서로 연계되고, 완벽하게 분리되면서도 완벽하게 이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가 동시에 지적하고 있는 것은 대한민국이 청년층과 중년층의 자실률이 높은 국가 중 하나라는 것입니다. 한편으론 늘어난 수입, 영양상태, 자유, 해외여행 등 모든 것들이 개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국민들의 일상생활은 사막화 가속화되고 개개인들은 더욱 개인화되었으며 고용이 취약해짐에 따라 끝없는 경쟁에 시달리고 있고, 어쩔 수 없이 소외되고 고립될 수 밖에 없다는 거죠. 이것은 바로 환경의 사막화와 마찬가지로 감성의 사막화로 이어질 수 있고, 감성의 가상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고독과 소외에 휩싸여 있기 때문에 이러한 환경을 거부할 힘조차 없을지도 모르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읽어드린 내용은 베라르다라는 학자가 대한민국을 묘사한 내용이었습니다. 그가 말하고자 했던 한국의 모습은 "worldless(세계 없음)"이라고 해석이 가능한데요. 대한민국을 "세계 없음"을 대표하는 곳으로 묘사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나치 반유대주의 시대에도 "world"세상은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나치군이 행했던 악행이 끔찍하기는 하지만, 적어도 적이 누구인지 상정하고 유태인 음모론도 제기하는 등 목표와 이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면서 나름의 세상을 만들었습니다. 일종의 인지적 지도 그리기를 했다는 거죠.

(chapter3 글로벌 자본주의의 폐해)

 그런데 위험한 자본주의는 세계 전반에 "세계 없음"의 이데올로기를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자본주의에 참여하는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 의미 있는 인지적 지도 그리기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자본주의야말로 세계 최초로 의미라는 것에 전체적인 그림을 깨버리는 사회경제 질서가 아닌가 싶습니다. 솔직히 자본주의라는 것이 글로벌 할 수 있을까요? 하나의 글로벌한 자본주의적 세계관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을까요? 원래 자본주의에서는 무얼 가르치나요? 기독교, 힌두교, 불교인들도 모두 자본주의를 채택할 수 있고 동서양 또한 자본주의를 채택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유럽의 경우, 자본주의는 근대화 작업을 통해 수백 년 동안 진행되었습니다. 수백 년 동안의 준비기간이 있었죠. 문화활동도 하고, 신화도 만들면서 많은 것들을 사회적 담론을 통해서 담아냈습니다. 하지만 무슬림 사회는 어땠을까요? 굉장히 짧은 시간에 급격히 어떤 보호막도 없이 급격하게 자본주의가 적용됐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 동안 그들이 유지했던 상징적인 우주 자체가 침범당하고 잔인하고 짓밟혔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대체할 만한 또 다른 근간을 만들어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일부 아랍국가에서는 문화가 완전히 붕괴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근본주의[3]라는 보호막을 만들어 낼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정신병적으로 혼미한 종교의 제 주장이 이루어졌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superego", "초자아[4]"가 부상하면서 이것을 신격화하고, 이것이 신성한 현실로 무슬림 국가들에게 자리를 잡았던 것이죠. 사실상 "초자아"의 부상이라는 것은 포스트모던주의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지나친 관용성과 유사점이 매우 많습니다. 다시 말해 신근본주의와 포스트모던주의는 공유하는 점들이 있다는 거죠. 이 희생이라는 것이 어떤 신성한 근본주의일수도 있고 아니면 지나친 자유방임일수도 있습니다. 만약에 신이 없다면 그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무효해질 수 있다는 것이죠. 자크 라캉[5]이라는 정신분석학자가 있습니다. 이분은 이러한 전통적인 사고를 완전히 뒤집었습니다. 그의 주장은, 신이 없다면 모든 것들이 다 금지될 것이고 신이 있다면 모든 것이 허용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이 라캉의 혁신적인 사고라고 생각합니다. 종교 중에서 근본주의자들을 살펴보면 종교를 통해 많은 것들을 금지하려 합니다. 그런데 만약 근본주의자들이 신의 이름으로 무엇이든 하겠다고 나서기 시작하면 그들을 못할 것이 없습니다. 폭탄테러를 한다든지 대량학살을 한다든지 이렇게 신의 이름으로 이루어질 때 가장 무섭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탈무드[6]에 대해 잘 아시죠? 탈무드에서 두 명의 랍비가 어떤 토론을 합니다. 논쟁에서 뒤지고 있던 랍비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 물어보자, 누구 말이 맞는지 물어보자"라구요. 신이 왔을 때 그가 말하려 하자 논쟁에서 승리하고 있었던 다른 랍비가 신에게 소리쳤습니다. "신이시여, 당신은 이 끔찍한 세상을 창조하고, 이렇게 망쳐놨으니 멀리 떠나버리십시오". 그랬더니 신이 "오마이 갓! 네 말이 다 맞다. 나는 너희들로부터 멀리 떠나 있겠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단지 일화에 불과하지만,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록 콘서트라든지 팝 뮤직처럼 집단적으로 어떤 파티를 즐기고 쾌락을 누리고 하는 것이 거의 종교적인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chapter4 전체주의를 경계하라)

이런 집단적인 "트랜스 현상[7]"은 어찌보면 굉장히 종교적인 성격을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이 신성함이라는 것은 굳이 종교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집단적으로 행하는 모든 의식에 우리가 신성함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게 되고, 그렇게 된다면 집단적인 행동이 얼마나 무서울 수 있는지 말해줍니다. 2012년에 한국도 비슷한 경험을 했죠. 강남스타일이 대히트 했습니다. 유투부에서 강남스타일 비디오 영상이 저스틴 비버의 비디오보다도 더 많은 다운로드 숫자를 기록했습니다. 실제로 10억 다운로드를 초과한 것은 역사적으로 최고치를 갱신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왜 이렇게 인기가 높았을까요? 인기만 높았던 것이 아니라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여 집단적 트랜스 상태에 빠졌다는 것이 굉장히 놀라웠습니다. 비틀지 이후에 볼 수 없었던 인기라고 생각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자기 아이러니"로 인해 집단적 무아지경과 아이러니가 접목되면서 이것이 폭발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겁니다. 실제로 강남스타일의 가사도 강남을 풍자하는 사회비판적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은근하게 체제 전복적인 발언을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외국어로 된 가사를 무조건 따라 하는 "모방" 모방을 라틴어로 "미메시스[8]"라고 하는데요, 강남스타일 자체가 통했다는 것이 아이러니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왜 강남스타일이 인기가 있을까 살펴봤더니 많은 사람들이 강남스타일을 역겨울 정도로 매력적으로 생각한다는 겁니다. 혐오하는 것 자체를 즐기는 거죠. 반복으로 시청하면서 자기가 이 우스꽝스러운 비디오를 혐오하는 것 자체를 계속 즐기는 겁니다. 우리가 북한을 보면서도 많이 조롱하죠. 예를 들어 지도자가 어디에 나타나든 전 국민이 일렬종대로 서서 박수를 치고 울먹거리는 모습을 보면 이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조롱거리로 삼습니다. 어쩌면 이 두 가지 모습은 동일하다고 생각합니다. 강남스타일에 열광하는 사람들이나 김일성 또는 김정일을 보고 열광하는 사람들이나 어쩌면 그 근간에 깔려 있는 건 비슷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한국에서 전통적인 지혜가 아직 많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근대화의 근간이 되어 왔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오래된 전통적 이데올로기도 이미 많이 변형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모더니즘의 기능변화가 이루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아시다시피 불교에서 가르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균형이라든지 아니면 젠틀함, 총체적인 것, 생태적인 것, 이런 것들을 설교하죠. 불교에서 말하는 "불가원 불가근[9]"이라는 것을 경험하게 되면 고삐 풀린 이런 시장경제에 대해서도 우리가 무관심해질 수 잇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볼 때에는 서구화된 불교 자체를 무조건 비판할 수는 없겠죠. 경영학을 일본에서 공부하게 되면 "일본식 불교"라고 할 수 있는 "", 선을 가르친다고 합니다. (번역 생략) 이 선을 가르치면서 희생이나 근면 같은 것들을 강조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chapter5 급격한 근대화 경험으로 인한 변화)

아시다시피 너무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서구적 소비주의가 문제시되고 있죠. 다시 말해 세계는 급격한 근대화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의미 자체의 수평선이 달라지고 있다는 것이죠. 문화 또는 사회가 전체적으로 바뀌게 되면서 후역사적인 인간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근대자본주의자들이 항상 주장하는 것은 노동자들은 아직도 19세기 말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바뀌어야 한다고 말하는 겁니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볼때에는 오늘날 사실상 자신들이 보수주의적이라고 믿는 준보수주의자들도 대화를 나눠보면 그들도 혁신을 원한다는 겁니다혁명을 원한다기보다는 전통적인 기존의 기득권적인 제도를 계속 유지하기를 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불교와 같은 동양사상을 포용하지만 한편으로는 시장의 효율성증대를 원합니다. 진정한 보수주의자들과 이야기 이야기해보면 글로벌 자본주의를 반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진보 자체의 어두운 면만 계속 부각시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보수주의자들은 급격한 발전을 반기는 반면, 과거에 그들이 가지고 있는 기득권적인 제도를 놓치고 싶지 않은 기질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의 역설적인 결론은 오늘날 가장 급진적인 좌파야말로 진정한 보수주의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면 이런 좌파적인 보수주의자들은 무엇을 위해 투쟁하고 있는 걸까요? 제가 두 개의 노골적인 사례를 가지고 설명을 드리고자 합니다. 제가 이제까지 봤던 다큐멘터리 중에서 가장 잔인한 다큐멘터리가 있습니다. 'act of killing(살육행위)[10]'라는 제목인데요. 죠슈아 오펜하이머 감독으로 2012년에 제작된 영상입니다. 이 다큐멘터리는 인도네시아 지역에서 촬영되었는데, 스토리를 보면 추잡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과거 민족학살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과거에 군인이었지만 지금은 존경받는 정치인 "안와르 콩고"에 대한 내용입니다. 1966년도 안와르 콩고는 그들의 동료들과 함께 공산주의 동조자라고 낙인찍힌 250만명에 달하는 중국계 인도네시아인들을 학살했습니다. 그런데 이 살인자들은 이 모든 행위를 거의 게임처럼 접근했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숙련된 살인자들과 그들이 만든 사회에 대한 영화라고 보면 됩니다. 실제로 승리한 다음 결국 공산주의 혁명은 실패했죠.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마어마한 학살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학살 자체가 역사적으로 숨겨야 하는 치부로 격하된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대량학살에 대해 자랑스럽게 말했다는 겁니다. 저는 이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현재 존경받는다는 정치인들이 출연해서 한다는 말이 어떻게 목을 졸라 죽이고 어떻게 여성을 강간하는 것이 최고의 방법인지 사람의 목을 자르려면 어디부터 하면 되는지, 남성은 어디부터 고문하면 되는지, 그리고 성기부터 고문을 해야 가장 고통스럽다는 등 이런 이야기들을 너무나 당당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방법이 최고의 고문방법인지를 너무나도 자랑스럽게 말하더라는 거죠. 이런 내용들이 실제로 극장에서 그대로 상영되었습니다. 정말 외설의 극치 아니겠습니까. 마치 SF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최악의 지옥같은 내용이었습니다. 인도네시아의 국영 TV쇼에서 '안와르 콩고'라는 사람이 출연해 고문의 스킬에 대해 말하기까지 했습니다. 효율적이고 실용적인 고문 방식을 강의하는 내용이었는데요, 진행자가 "어떻게 이렇게 혁신적인 방법을 고안해 냈나요?'하고 물으면 그가 더욱 자랑스럽게 이야기 하더란 말입니다. (번역 빠짐) 사람이 진정으로 사악해지기란 쉽지 않습니다. "내가 지금 하는 행위가 현실이 아니라 픽션이다"라고 스스로 믿어야 정말 사악해질 수 있다고 합니다. 이 경우, 이런 영화가 나왔다는 것 자체를 보고 이걸 만들어 낸 미국인들을 비판할 수도 있고, 이걸 수용하는 인도네시아 사람들의 윤리적인 가치를 비난할 수도 있을 겁니다. (제가 미국 영화사를 비난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미국 영화에선 항상 영웅이 등장하죠. 험프리 보가트와 같은 영화배우가 항상 영웅의 역할을 했습니다. 이것 자체가 매우 흥미롭습니다. 어쩌면 "상상 속의 정당화"라고도 할 수가 있겠죠. 그러니까 직접적으로 사악해지기보다는 간접적으로 사악한 행위였다고 생각합니다. 정말로 제가 공포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바로 이 영화에서 느꼈던 공보가 제가 생각하는 가장 끔찍한 우리의 도덕적 공격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나치인들도 홀로코스트를 진행할 때 비밀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공개적으로 알리지 않았습니다. 반면 이 영화에 나온 사람들은 TV쇼에 나와서 공개적으로 자신들이 어떻게 고문을 했는지 이야기하고 아무도 그것을 끔찍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 무섭다는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 것일까요? 제가 명확하게 설명하겠습니다. 저는 헐리우드 탓을 하는 게 아닙니다. "헐리우드의 영향"이나 "인도네시아의 원시성"에 책임을 돌리는 것도 아닙니다. 저는 글로벌 자본주의의 영향이라고 생각합니다

(chapter6 글로벌 자본주의의 영향)

 발터 벤야민[11] '자본주의성'은 하나의 종교와 같다고 말합니다. 진정한 자본주의자들은 굉장히 무자비한 기업가입니다. 쾌락주의자가 아닙니다. 진정한 자본주의자는 밤낮으로 일을 해서 자신의 부를 늘리려고 노력합니다. 발터 벤야민이 바로 그런 얘기를 한 것입니다. 자본주의자는 자신의 쾌락을 우리보다 더 많이 희생합니다. 그래서 저도 생태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우리의 이기주의를 넘어서는 어떤 동질감, 보다 숭고한 가치를 위해서 자기희생을 해야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과는 조금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환경을 파괴한 자본주의자를 한번 생각해 보십쇼. 장기적으로는 그 사람 자신에게도 그 피해가 돌아갈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이기주의자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너무나 헌신적으로 자신의 목표만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즉, 자신의 부를 늘리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어서, 전 세계를 파괴하는 것도 잊고 있는 것입니다. 자본에만 집중하는 것이죠. 그래서 여기서도 자본주의를 어떤 쾌락주의로 공격할 것이 아니라 어떤 변태적인 헌신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이기적이고 공리주의적인 차원에서 공격하는 것이 아닙니다. 살의를 추구하는 쾌락주의는 우리 사회의 잔혹한 사실이 아니라 하나의 이데올로기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이미 헤겔이 "정신현상학[12]"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헤겔은 '영적 동물의 왕국'이라는 표현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소위 말하는 숨겨져 있는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 아시죠? 우리가 보다 더 자본주의화 되면, 즉 우리가 이기주의적 시장에 대해 보다 더 이기적일수록 사회가 그만큼 이익을 얻습니다. 즉 최고의 위기는 무언가 선한 것을 행하려 할 때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본주의에서는 우리가 이기주의를 추구하면 할수록 그만큼 공동선()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의 모순인 사람으로 인해 단순히 자본주의적 이기주의를 어떤 글로벌 공통체로 연결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을 이기주의로 만든 영적 전체주의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chapter7 공적 영역을 존중하라)

중국에 마이클 유엔이라는 친구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5년 전 즈음, 중국 난징에서 일어났던 일에 대해 저에게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어떤 노인이 버스에서 넘어졌습니다. (버스가 넘어졌을 때) 그러자 어떤 젊은 남성이 다가와서 그 노인을 도와주고 일으켜 세워줬습니다. 심지어 다친 노인에게 돈을 줘서 택시를 타고 병원에 갈 수 있도록 해줬습니다. 그리고 2주 후 에 법원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그 노인이 자신을 남성이 밀었다고 하며 남성에게 소송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왜 젊은 남자가 날 도와줬겠느냐? 정상인이라면 노인을 도와주지 않는다. 아마도 나를 도와준 이유는 죄책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가 나를 밀었기 때문에... 그 노인은 승소했습니다. 그래서 그 남성은 큰 돈을 지불해야만 했습니다. 법원에서 설명하길, 일반상식에 따르면 "팽요"라는 이 남성은 노인을 넘어뜨렸고 그 죄책감 때문에 도와줬다는 겁니다. 일반인이라면 그처럼 친절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 법원의 논리였습니다. 선한 일을 했음에도 그것이 정상으로 간주되지 않고 오히려 의외인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니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요? 단순히 사람이 이기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선한 일을 해도 사회적인 기준이 이기주의를 기준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친구가 제게 말했습니다. 이러한 사건들은 중국의 여론조사와 비교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말입니다. 중국의 230대 젊은 사람들에게 죽어가는 사람을 길가에서 보면 멈추겠느냐 라고 물었더니 87퍼센트는 멈추지 않고 그냥 지나치겠다고 답했습니다. 그 사람이 혼자서 죽어가고 있다라고 말했지만 그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고 해도 도와주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질문으로 다친 사람은 도와주겠느냐 라고 물었더니, cctv카메라가 있는지 확인하고 만약 있다면 도와주겠다 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저는 주장합니다. 이건 더 철학적이고 복잡한 거라구요. 이는 공적 영역에 대한 재정의가 필요함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사라지고 있는 것은 개인적인 영역이 아니라 공적 영역입니다. 우리가 점점 더 어떤 상황이 되어가고 있냐 하면 우리가 한때 공적 영역으로 여겼던 것들이 이제는 사적인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겁니다. 또 하나의 예로 하드코어 음란물의 이야기입니다. 제 친구에게 들었는데 최근 유럽에서는 새로운 경향으 생겼다고 합니다. 소위 말해 "공공섹스"입니다. 이는 헝가리와 폴란드에서 유행하고 있다고 합니다. 한 동영상을 봤더니 남녀 한 쌍이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있는데 주변에 사람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의자에 앉아 갑자기 섹스를 하는 겁니다. 연출된 상황이 아니라 실제 상황입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조금 이상하다고 쳐다보긴 했지만 이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일상으로 돌아갔습니다. 신문을 읽는다든지 말이죠. 이러한 공개장소에서 성행위를 하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그들의 사적인 공간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고 있는 프라이버시는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디지털미디어로 인해서 통제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있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공적 영역이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차이를 느낄 수 있는 또 다른 예가 있습니다. 비슷한 것 같지만 굉장히 큰 차이가 있습니다. 노출증 환자인 "버버리맨"이라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알고 있던 버버리맨과 개인이 자신의 나체사진을 웹사이트에 올리는 것은 다릅니다. 전통적인 버버리맨은 여전히 공적 영역에서 노출을 감행합니다. 그런데 수백만 명에게 연결된 웹 사이트에서 자신의 나체사진을 올리는 것은 여전히 사적인 것으로 간주됩니다. 수백만 명이 그걸 본다 하더라도 말이죠. 그것이 공적 영역으로 간주되지 않는다는 것이죠. 이러한 이유에서 저는 내부고발자[13]로 유명한 "애드워드 스노든[14]"과 같은 사람들은 무조건 보호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우리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보호하는 것은 공적 영역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스노든, 어샌지[15], 메닝[16]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단순히 그들의 행위가 미국의 비밀 정보부에게 수치심을 줘서가 아니라 그들이 밝힌 폭로가 미국뿐만 아니라 중국, 러시아, 독일, 이스라엘과 같은 영향력 있는 국가들이 하는 일을 폭로했기 때문입니다. 메닝이나 스노든이 폭로한 사실을 우리가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폭로를 통해 우리가 이제는 더이상 이것을 묵과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스노든의 폭로가 주는 교훈은 글로벌한 것입니다. 이제 디지털화로 인해서 공적인 공간이 사유화 되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 어떤 의미에서 사유하느냐, 단순히 민간기업들이 그 공간을 통제하고 있고 컨트롤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독일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17]"의 사상을 인용하자면, 칸트는 "계몽주의는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이성의 공적인 이용과 사적인 이용을 모순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칸트에 있어서 국가기관 국가 관료주의는 공적인 것이 아니라 사적인 것으로 간주됩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어떤 특정 이해를 대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철학, 과학만이 공적이라는 것입니다. , 공적이라는 것은 우리가 어떤 논쟁을 할 수 있고, 어떤 집단적인 사적 이해의 제한을 받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칸트에게 있어서 이성의 사적인 사용은 바로 국가기관들이 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chapter8 지식인과 전문가의 경계)

유럽에서는 고등교육에 대한 개혁이 진행되고 있는데, "우리는 철학자가 필요없다", "불필요한 일을 하는 철학자는 필요없다.", "실제로 어떤 유용한 지식을 가져다 줄 과학이 필요하다."라고 말합니다. 프랑스에서 저를 반대하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하더군요. 예를 들어 파리 교외에서 시위가 벌어진다면, 심리학자들은 어떻게 그 군중을 완화시켜야 될지를 알아내기 위해 존재하고 또 사회학자들은 어떻게 시위를 조금 더 쉽게 통제해야 하는지 연구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말입니다. 여기서 문제가 뭘까요? 이것은 전문가의 일이라는 겁니다. 이런 일은 지식인이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지식인은 다른 사람이 정해놓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 자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그것이 올바른 접근법인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바로 지식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chapter9> 디지털 미디어의 갈등

 제가 주장하는 것은 오늘날 디지털 미디어에서의 갈등입니다. 인터넷으로 인해 공적인 이성의 영역이 이제는 직접적으로 사적인 그런 이득만을 얻는 공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인터넷이 위험한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클라우드 컴퓨팅 잘 아시죠? 클라우드 컴퓨팅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통제당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지나치게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 위험요소는 인터넷이 바로 국가기밀과도 연계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스노든 사건만 보더라도 실제로 어떤 기밀이 있는 것은 아니죠. 그런데 기밀이라는 것 자체가 또 기밀인 게 문제인 경우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특정 테이터가 접근 금지인데 이게 접근 금지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겁니다. 금지된 것이 뭔지도 알려주지 않는 것, 그것이 문제라는 겁니다. 제가 몇 년 전에 중국 언론에서 이런 보도를 한 걸 읽었습니다. 한 개인이 기소를 당했는데, 특정 정보를 수집했다는 죄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정보가 기밀이라는 것을 모른 체 수집했다는 거죠. 나중에 들어보니까, 정부가 기밀이라고 규명한 정보였답니다. 어떤 것이 기밀인지 조차 기밀이라는 게 문제인 겁니다. 제가 볼 때에는 이러한 잠재적인 위험은 매우 보편적이라고 생각됩니다. 두 번째는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것입니다. 디지털 통제를 통해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모든 개인의 사생활을 모두 들여다보고 있다고 걱정합니다. 하지만 그건 아닙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정부 당국이 너무 많이 알아서 걱정이 아니라 너무 몰라서 문제라는 겁니다. 데이터가 어마어마하게 수집되고 있죠. 하지만 이런 정부기관들이 이미 수집한 데이터를 가지고도 무엇을 해서 어떻게 분석하는지 모른다는 겁니다. 그러면 더 위험해 지는 거죠. because 수집된 데이터 중 해석이 잘못되면 멀쩡한 시민이 테러리스트가 될 수도 있습니다. 1930년대 소설 '시민 케인'의 모델이었던 윌리엄 란도 허스트라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소유한 신문사가 있었는데, 그곳 편집장이 너무 열심히 일을 하길래 휴가 한번 갔다 오라고 말했더니 그 편집장이 두려워서 휴가를 갈 수 없다고 답했답니다. 왜냐고 묻자 편집장은 "내가 자리를 비우면 모든 일이 엉망이 될까봐 두렵습니다." 라구요. 그러자 사장이 "걱정 말게. 자네가 일을 잘해 주었기 때문에 휴가를 다녀와도 회사는 아무 문제없을 걸세"라고 하자, 편집장은 "제가 없을 때 회사가 더 잘 굴러갈까봐 그게 더 걱정입니다"라고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정부가 사적인 정보를 무분별하게 수집하고 있다고 해서 우리를 잘 알고 있다고 오해하면 안됩니다. 오히려 어중간하게 또는 잘 모를까봐 걱정을 해야 한다는 겁니다.

(chapter10) 공적 영역을 위한 노력

 제가 언급하고 싶은 것은 내부고발자들은 바로 칸트가 말했던 이러한 공적이성을 유지시키는 선동자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부고발자들은 부패한 민간기업이 얼마나 많은 사악한 행위를 하고 있는지 폭로해야 합니다. 그리고 많은 정치인들이 어떤 범법행위를 하고 있는지를 폭로해야 합니다. 아시다시피 일부 담배회사는 담배에 중독성을 가진 마약류 물질을 집어넣는다고 하죠? 이런 것들을 폭로해 줄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비단 이런 민간기업에만 내부고발자가 필요한 건 아니죠. 공공기관들에도 이런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여러 제도하에서 일어나고 있는 부정행위들을 폭로할 수 있는 메닝, 스노든, 어샌지와 같은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제가 반미주의를 지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직면한 문제는 보다 더 급진적인 것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내부고발자들이 중요합니다. "스노든은 반역자 아닌가? 러시아에 기밀을 팔아넘긴 사람 아닌가?" 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사람은 세계시민인 겁니다. 제가 볼 땐 우리가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형성해서 민간차원에서 내부고발자들을 보호하고 지켜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만 내부고발자들이 반대 국가에 도망가서 국가 대치상황을 유도하지 않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유토피아지만 사실 그런 유토피아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초월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6개월 전에 브라질 상파울로에 방문했었는데 관광차원에서 저를 그곳 사창가로 데려 가더군요. 저는 아무 짓도 안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일종의 카페 같은 곳이었는데 매춘부들이 접대하는 곳이었습니다. 이 매춘부들을 살펴봤더니 대학교육까지 받은 젊은 여성들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선택권은 매춘부들에게 있었습니다. 그녀들이 남성 손님들의 매력을 훑어봤는데요. 그녀들과의 대화는 꽤나 진지했는데, 어떤 매춘부와는 철학자 "자크 라캉"에 대한 대화도 나눴습니다. 대화가 좀 통한다고 생각하면 여성이 먼저 제안을 합니다. "얼마를 내면 2차를 갈 수 있다"는 식으로 말이죠. 저는 그 경험을 하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매춘을 반대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제가 느낀 것은 적어도 이 클럽에서 선택권을 가진 사람은 고객이 아니라 매춘부라는 것이 매우 신선했다는 겁니다. 그 자체가 폭력적인 혁명일까요 또 혁명이라는 것이 항상 거대해야 할까요? 그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회적 역동성을 살펴보면 아주 사소한 것들로부터 변화가 촉발되고 아주 거대한 산사태와 같은 변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겁니다. 끝가지 제 강의를 들어주신 여러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1] 이성중심주의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를 내포하고 있는 사상적 경향의 총칭이다. 탈중심적 다원적 사고, 탈이성적 사고가 포스트모더니즘의 가장 큰 특징이다.

[2] 자율주의 전통 속에서 활동하는 이탈리아 마르크스주의 이론가이자 활동가. 주로 탈산업 자본주의에서 미디어와 정보 테크놀로지가 차지하는 역할에 초점을 맞춰 연구하며 활동하고 있다.

[3] 이슬람 교리를 정치, 사회질서의 기본으로 삼아 이슬람교의 원점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는 운동. 철저한 율법준수, 반외세, 특히 반서양문명, 반미가 특징이다.

[4] 자아와 함께 정신을 구성하는 것으로 프로이트가 생각한 정신의 한 측면이며 양심의 기능을 담당한다.

[5] 전통적인 프랑스 정신의학에서 출발하여 <프로이트 사상>의 해석과 그 이론의 실천에 새로운 면을 개척한 철학자. 프로이트의 <무의식>에 대한 그의 견해는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는 테제(thesis)로 집약된다.

[6] 유대인 율법학자의 구전과 해설을 집대성한 책

[7] trance. 마치 최면에 걸린 듯한 몽환적인 상태. 물질문명에서 얻지 못하는 정신적 만족감을 통해 균형을 되찾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을 뜻한다.

[8] 현실의 모방이나 재현을 가리키는 말

[9] 사람과의 관계에서 너무 가깝지도 말고 너무 멀지도 않게 적당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살아가는데 도움이 된다는 뜻

[10] 반성하지 않는 학살자의 인간성/다큐멘터리. 1965~1966년 인도네시아 학살의 가해자 중 한명인 안와르 콩고가 다큐멘터리 제작자 조슈아 오펜하이머의 요청에 따라 친지들을 모아 자신이 저지른 학살을 연극적으로 재연한 다큐멘터리이다. 1965년 인도네시아 쿠데타로부터 1년 뒤, 100만명이 넘는 사람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살해했다. 실제로는 군에 적대적인 인물이 대부분으로, 화교, 지식인, 노동 조합원 등이 있었다.

[11] 독일의 지평가. 방대한 지식과 정밀하고 독창적인 사색 방법론을 추구했으며, 유럽 근대를 상징하는 도시 <파리연구>를 일생의 업으로 삼았다.

[12] 헤겔의 대표적 저작. <정신 현상학>이란 '의식의 경험의 힘'을 말하며, 이는 우리의 의식이 여러가지 경험을 통하여 진리를 파악하여 가는 과정을 서술한 것이다.

[13] 내부고발자 : 조직 내부에서 저질러지는 부정, 부패, 불법, 비리, 예산낭비 등을 알게 되어 이를 시정하고자 내부책임자 및 감사부서에 보고 또는 폭로하는 사람을 말한다.

[14] CIA 하위직원으로, CIA가 전 세계 일반인들의 통화기록과 인터넷 사용정보 등 개인정보를 프리즘(PRISM)이란 비밀정보수집프로그램을 통해 무차별적으로 수집, 사찰하고 있다고 폭로하였다.

[15] 그가 창립한 위키리스크는 익명의 정보제공자가 제공하거나 자체적으로 수집한 사적 정보 또는 비밀, 미공개 정보를 공개하는 국제적인 비영리기관 사이트이다.

[16] 브래들리 메닝 일병은 폭로전문 웹사이트 '위키리스크'에 이라크전에서 민간인을 학살한 미군동영상을 폭로했다.

[17] 독일철학자이며 서유럽 근대철학의 전통을 집대성하고, 전통적 형이상학을 비판하며 <비판철학>을 탄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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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모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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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코마코스 윤리학

저자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출판사
| 2011-10-15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2,300년을 이어온 서양 윤리 사상의 정수! 아리스토텔레스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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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을 니코마코스가 정리한 것이다. 책의 1부의 핵심은 ''은 무엇인가에 대한 풀이이다.

 ''에 대한 개념, ''이란 모든 것이 목표로 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모든 활동은 선한 것을 추구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에는 여러 가지 ''이 있는데 그 '' 이외에 자존적이며 모든 선을 선이게 하는 '궁극적인 선'이 있을 수 있다고 한다. ''의 범주 안에 또 다른 ''이 있다고 하는데 그 말은 ''에도 등급을 메길 수 있다는 의미이다. (어떤 이데아같은 하나의 ''이 아닌 '인간적인 선'을 말하는 것으로 보면 좋겠다.)

 그런 ''을 연구하는 학문은 '정치학'이다. 정치학의 목적은 지식에 있지 않고 실천에 있다. 정치학은 가장 으뜸이 되는 '기술'의 범주에 속하는데, 왜냐하면 학문이나 교육의 정도를 정치가 결정하기 때문이다. (잘 결정하게끔 하는 기술)

 위에서 말한 그 정치란 것을 공부하는 정치학도가 되기 위해서는 충족해야 할 요건이 있다. 그것은 분별 있는 연령이야 한다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안 그런 사람보다 다방면의 교육을 두루 받아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으로 본 듯 하다. 정치학은 인간을 어떤 일정한 성격선한 인간, 고귀한 행위를 할 수 있는 사람)을 만드는데 심혈을 기울인다.

 위에서 선을 탐구할 수단으로 정치학을 이야기했다. 그러면 이제 정치학에서 탐구하려는 그 ''에 대해 다시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본다. '' '행복'이다. 그렇다면 그 '행복'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행복'이 무엇인지 잘은 모르더라도 확실한 것은 그 '행복'을 알기 위해서는 좋은 교육이나 정치학적 이해가 필요하며 그렇기 위해서 먼저 해당 사람이 좋은 습관 속에서 자랐어야만 한다. '행복'은 소나 말, 소년에게는 있을 수 없다. 태생적 한계나 연령 때문이다. '행복'은 온전한 ''과 생애 전체를 통하여 비로소 성취되는 것이다.

 다시 돌아와서, '행복'이라 했던 그 '', 일반적인 사람은 그걸 '쾌락'과 동일시한다. 그 동일시를 '향락적 생활'이라고 본다. 그 외 알아야 할 생활은 '정치적 생활', '관조적 생활'이다. 이어서 대체로 교양 있고 실천적인 사람들 중에 '명예 목적의 정치적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명예'''이며 '행복'이라고 본다. 더하여 '명예'보다 더 나은 것이 앞에서 말한 ''이기에 덕이 정치생활의 목적이라 할 수 있다. 그 덕은 인간적인 덕이다. (선도 인간적인 선이고 행복도 인간적인 선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칭찬받을 만한 정신상태를 ''이라고 부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데아'를 부정한다. 학문은 여러 분야가 있기 때문이라는 그의 말을 생각해보면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이르러야 할 영역의 목적이 하나라면 행동해야 할 '' 역시 하나이지만 그렇지 않다. 인간이 하는 행동, 일이나 영역은 다양하므로 행동해야 할 '' 역시 다양하다. '' '인간세상 내에서만 해당하는 것'인 듯하고, 다양하다.

                                                              -완성

          행복-목표            

  (좋은 습관)

  -바탕 

정치학-수단

 니코마코스 윤리학 2권의 주제는 ''이다. ''에는 교육에 의해 생기는 '지적인 덕'과 습관에 의해 생기는 '도덕적인 덕'이 있다. '도덕적인 덕'은 본성적인 게 아니다. 그리고 ''은 먼저 실천함으로써 얻게 된다. '기술'의 경우와 같다. 먼저 행함으로써 비로소 배워 알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 '먼저 함'이라는 '행동'이 계속 반복될 수 있게끔 하는 '좋은 습관'이 중요하다. '행동'은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적당한 정도여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을 '중용'의 상태에 있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또 만일 올바른 행동을 하고 절제 있는 행동을 하면 이미 올바르고 절제 있는 사람이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문법을 엄수하는 사람이 문법가가 된다는 것에 비유를 했다.

 이제, ''이란? ''은 정신활동의 산물인데 정신활동의 산물에는 '정념', '능력', '성품' 이 세가지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은 이 세 가지 중 하나인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성품'의 범주에 넣었다. 우선 아리스토텔레스는 세 가지 태도를 들었다. '과도' , '부족', '중용'의 태도이다. 세 가지 태도는 서로 대립한다. [과도중용부족] 그때 ''의 상태는 '과도''부족'의 중간상태인 '중용'의 상태이다. (중용은 덕의 특징) 예를 들어 명예심이 과도하면 허영이고 부족하면 비굴이게 된다. 그래서 '중용'은 모든 일에 있어 바람직한 것이고 부족하거나 과한 상태는 비난 받아 마땅하다고 말한다. 결론적으로

         덕은, [(좋은 습관으로 길러진 '중용의 태도')를 바탕으로 한 실천

      (정신활동인)                    이런 성품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세상을 선한 사람이 주체가 될 수 있는 세상이며, 그리고 인간은 진짜 ''할 수 있다는 전제를 한듯하다. 선과 덕의 토대를 만드는 수단으로서의 '정치학'을 말한 것과, 인간의 모든 행위는 선한 것을 추구한다는 것에서 그렇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정치학'을 하는 사람들이 모두 선할 수는 없는 노릇이며, 만약에 수단으로서의 정치학이 삐뚤어졌다면 바로잡아야 마땅하지만 그러나 바로잡을 수 있을 만큼 사람들은 동조해주며, 기존 사람들은 받아들일지 모르겠으니, 생각해 보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은 무엇, 무엇의 개념, 의미만 이야기하고 이해시키려 하나 실제와는 동떨어진 느낌이 있다. (실천과 해결을 할 수 없는 윤리학) 정말 실질적으로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 앞에서 어떤 보편적인 척도를 내려주지는 못하는 공론에 그치는 생각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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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뒤편

저자
조기영 지음
출판사
마음의숲 | 2013-09-30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고민정 아나운서의 그 사람, 조기영 시인의 첫 장편소설 [달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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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는 어느 새 내 생각의 시작이고, 중간이며, 마지막이 되어 버렸다. 나를 쪼개도, 나를 붙여도, 나를 덮어도 내 안에는 그녀가 있다."

 

하지만

 

"봄은 품으로 달려오지 못하고 저기 마당에 유령처럼 서 있다. 머뭇거리는 봄을 보며 나는 방 안에 겨울처럼 누워 있다.나와 봄 사이에는 ... 보이지 않는 강이 흐른다."

 

 

"자연의 신비를 간직한 채 피어나는 봄날의 꽃처럼, 시인의 가슴으로 피워 올린 한 편의 시처럼 나도 다시 피어날 수 있을까... 내 처지를 아는지 모르는지 봄은 무심하게 웃고 있다."

 

"이별은 육체의 고통보다 더한 아픔이겠지"

 

"이 허름한 육신의 자유. 허울뿐인 이 자유가 미끼처럼 내 앞에 던져지는 날이면 나는 그것을 물어 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남루한 숨을 내쉬며 눈을 껌뻑이고 앉아 있다. 깃발도 나침반도 없이 자유는, 날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 찬 욕망의 찌꺼기를 맴돌다 어느 순간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다..허무를 가득 채운 이 자유는 내 육체와 영혼에 계속 구멍을 내고 있다."

 

 조기영 시인의 작품을 통해 지금의 내 마음을 재구성해 본다. 저 멀리 있는 봄은 바로 그녀. 그녀와 나 사이에는 큰 강물이 흐른다. 그런데, 참 웃기게도 그 강물은 다름아닌 바로 나 자신이다. 나 자신의 '생각덩어리'가 그 사이를 막고있는 것이다...

 

 생각할 때마다 나의 가슴이 사무치도록 답답해지고 그 한 켠이 아려온다. 미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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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리주의

저자
존 스튜어트 밀 지음
출판사
책세상 | 2007-04-20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우리는 무엇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가. 프로타고라스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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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학-밀의 공리주의 2, 4장 참고하여 씀

 

 밀의 공리주의를 읽었을 때 솔직히 이게 무슨 말인가, 저자가 하고자 하는 요지는 무엇인가 하며 상당히 고생했다. 번역상의 문제인지 아니면 정말로 문장을 그렇게 쓴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문장이 억지스럽다고 느껴질만큼 긴 경우도 있고, 어렵게 나오기도 하며, 이 말이 여기서 왜 갑자기 나오는 것인가 생각하다 보면 단어 하나 하나만 보일 뿐 문장 자체나 글의 전체적인 흐름이 보이지 않았다. 우선 내 나름대로 요약을 해보도록 했다.  

 

  2장의 제목은 '공리주의란 무엇인가?'이다. 밀의 공리주의는 '쾌락' '행복'이라는 단어와 관련이 있다. 먼저 밀이 말하는 행복이란? 쾌락의 상태와 고통의 부재인 상태를 말하며, 불행이란? 쾌락이 상실된 상태와 고통이 존재하는 상태를 말한다. 그리고 밀에 따르면 옳음의 정도(level)는 행복을 증대시킴에 기여하는 정도에 비례하며, 옳지 못함의 정도(level)는 행복에 반대되는 것을 산출하는데 기여하는 정도에 비례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공리주의의 행복은 행위자 자신의 최대행복이 아니라 전체 행복의 최대량이 그 기준이라고 말한다. 이 최대행복의 원리에 따라 정리해보자면, 공리주의의 궁극적인 목적은 양과 질 모두를 고려했을 때 가능한 한 고통을 회피하고 쾌락을 충분히 향유하면서도 개인의 최대행복이 아닌 전체에 대한 최대행복을 추구하는 그런 쾌락이 그 목적이라 말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 행복을 정하는 쾌락에는 기준이 있다고 말한다. 만약에 기준이 있지 않다면 짐승이 느끼는 쾌락과 사람이 느끼는 쾌락이 같을 수 있고 그렇다면 인간에게 선이 될 수 있음직한 생활준칙은 짐승에게도 선이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인간은 짐승의 그런 욕정을 넘어 고도의 세련된 능력과 그것을 기준으로 한 쾌락 또는 생활준칙이 있다고 본다. 책에 따르면 에피쿠로스학파는 공리주의적 쾌락은 육체적 쾌락보다는 정신적 쾌락에 더 우월을 둔다고 한다.

 공리주의의 원리에서는 앞서 말한 것처럼 쾌락에는 그 기준이 있다고 하였는데, 이는 쾌락에도 여러 종류나 가치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밀의 공리주의에 따르면 공리주의는 어떤 쾌락은 다른 종류의 쾌락보다 훨씬 더 바람직하며 한층 더 가치가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고 말한다. 쾌락의 질적 차이를 말하는 것이다. 질적 차이를 정하는 기준은 어떤 사람에게 있는데, 그 사람은 두 개의 구분되는 또는 상반되는 쾌락 중에서 양쪽 모두를 경험한 사람이거나 아니면 거의 모두를 경험한 사람인 것이다. 그 사람이 어떤 도덕적 의무감이나 이해에 관계없이 그저 결연히 선택하는 쪽이 더 높은 가치의 쾌락이라는 것이다. 밀에 따르면, 양쪽 다 알고 있는 사람은 구태여 하등동물이나 바보천치가 되려 하지는 않을 것이기에 그렇다 설명하고 있다.

 만약에 인간이 높은 가치의 쾌락보다 낮은 쾌락을 선택하는 경우에는, 그런 경우가 종종 있기는 하지만, 그 경우에는 인간 자체가 모질지 못한 탓에 그것이 가치가 더 낮다는 것을 알면서도 보다 가까이 있기에 선택할수도 있고, 또는 어쩔 수 없게 된 경우(보다 높은 쾌락을 느낄 수 없게 되었을 경우 등)에 선택하는 수도 있다고 말한다.

 

 앞에서 말한 것을 다시 반복한다면, 두 개의 쾌락 중에서 어느 것이 가장 선호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또는 존재의 두 양식중에서 어느 쪽이 가장 쾌적한 느낌을 주는지의 문제에 관해, 그 도덕적 속성이나 결과는 별도로 치더라도, 양쪽 모두에 대해 식견을 지닌, 자격이 있는 사람들의 판단이 최종적인 것으로 인정되어야만 하며, 서로 다른 판단을 내릴 때는 다수의 판단이 최종적인 것으로 인정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4장은 '공리원리는 어떻게 증명되는가?'라는 제목으로 시작한다. 여기서 밀은 행복만이 목적으로서 바람직한 것이며, 행복만이 유일하게 바람직한 것이라고 말한다. 행복 이외에는 모두 행복으로 향하는 어떤 수단으로서 바람직할 뿐이라고 말한다. 동시에 그는 '그렇다면 무엇이 바람직한 것이냐?', '공리주의가 말이 되려면 가져야 할 그 근거는 무엇인가?' 라고 반문을 한다. 이 질문이 바로 "행복만이 목적으로서 바람직한 것이라고 말하는 그 '공리주의'에서 말하는 그 '행복'은 어떤 기준이며 어떻게 증명되는가?"에 대한 답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일반적인 행복이 왜 바람직한 것인가에 대한 근거가 자기 자신이 행복을 바란다는 사실 그 자체 외에는 없다고 말한다. 이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사실만으로는 부족한데, 밀이 말하길 행복이 행위의 유일한 판단 기준이고 행복 이외에 다른 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한다고 한다. 그런데 책에서는 갑자기 덕에 관련하여 계속 말을 하는데, 나는 이 덕에 대한 매우 길고 장황한 이야기들과 그 공리주의가 충족시켜야만 하는 그 필수조건(행복만을 바란다는 것을 증명하는것)간에 어떤 연결고리가 있는 것인지 정확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나는 그 '''행복'의 수단으로써 말한 것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결론을 말하면, 덕과 관련된 그 장황한 고찰결과 밀은 실제로 소망되는 것이 행복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결과가 나온다고 한다. 그 이외의 것은 수단일 뿐이다. 그 행복 이외의 소망되는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행복으로 향하는 것으로서 소망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행복이 수단이 되는 '금전'은 반짝이는 금속무더기 그 이상 바람직한 것이 아니며, 그 돈으로 살 수 있는 가치 이상의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본인은 사실 '공리주의'를 읽기 전에는 그저 막연하게 공리주의는 다른 도덕적 기준들에 비해 나름 괜찮은 'ㅇㅇ주의'다 라고만 받아들이고 있었다. 내가 알고 있던 공리주의에는 쾌락이라는 단어가 없었으며 단순히 "최대다수에게 '지속가능' '이익' '행복'을 줄 수 있는 행동이 ''이다"라고 말이다. 어떤 산술적인 도덕이었다. 예를 들자면, 제동기가 고장난 전차가 빠른 속도로 질주하고 있는데 멀리서 5명의 인부가 일을 하고 있으며 그 옆 비상철로로 방향을 돌릴 수 있는 상황이 있다고 하자[1]. 하지만 비상철로에는 인부 1명이 일을 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대로 질주를 하면 -5, 비상철로로 방향을 돌리면 -1, 그러니까 가치적으로 보자면 비상철로로 방향을 돌리는 것이 최대다수에게 지속가능한 이익과 행복을 준다고 본 것이다. 만약에 전 세계 인구가 100명이라고 가정하고, 그 열차사고로 95명이 남는 것과 99명이 남는 상황을 생각해본다면 당연히 99명이 살아있을 수 있는 세계를 택할 것 같다. 그것이 훨씬 그 사회에 전자보다 더 최대다수에게 지속가능한 이익과 행복을 줄 수 있다고 느껴졌다. 하지만 만약에 그 죽은 1명이 99명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50명이 죽을 일어날 전쟁'을 막을 수 있는 위인이었다고 하더라도(, 그들 5명보다 그 1명이 더 그 사회의 최대다수에게 지속가능한 이익과 행복을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고 하더라도) 그 행동에 대한 결과는 앞에서 배운 이중결과 원리에 따라 정당화될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나는 이것이 나는 공리주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공리주의는 그렇게 단순한 공리주의가 아니었으며 이번 계기를 통해 내가 찾고자 하는 도덕적 기준은 어떤 것인가 다시 한번 생각해본 계기가 되었다.



[1] 마이클샌델, 이창신 옮김, 정의란 무엇인가, 김영사, p.36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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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언적의 태극문변

 조선중기의 학자 정구가 이언적 주돈이 주희 등의 태극에 대한 학설을 모아 그 이론을 정리한 책.

 이 논변의 주요 부분은, 주돈이가 태극도설에서 말한 무극이태극을 육구소 육구연 형제가 유가의 정통이 아니고 노자의 학설에서 따온 것이라고 반박한데서 비롯된다. 육구소 육구연 형제는 이 글이 태극도설과는 부합되지 않음을 지적해 이것이 주돈이의 설이 아닌 타인의 설임을 강조하면서 주희가 주석한 내용을 포함시켜 공격하였다.

 조한보와 손숙돈이 육구소·육구연 형제와 견해가 비슷한 것에 대한 이언적의 해명이 돋보인다. 이 책의 간행으로 태극설의 체재가 주돈이주희이언적으로 이어져 이 학설이 정통임이 밝혀지고, 반면에 육구소·육구연 형제와 손숙돈·조한보의 학설은 이단으로 폄억(貶抑)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2. 이언적과 조한보와의 논쟁의 간략한 소개

 무극 태극 논쟁

 1517(중종 12) 영남지방의 선배학자인 손숙돈(孫叔暾[3])과 조한보(曺漢輔) 사이에서 성리학의 기본쟁점인 무극태극(無極太極)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다. 그는 약관의 나이에 이 논쟁에 뛰어들어 자신의 견해를 밝혔는데, 주희의 주리론적 견해를 바탕으로 두 학자의 견해를 모두 비판하여 자신의 학문적 견해를 밝혔다.

 이언적은 이 논쟁에서 이기론(理氣論)의 주리론적 견해로서 이가 기보다 우선적이라는 이선  기후설(理先氣後說)과 이기불상잡설(理氣不相雜說)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이기 논쟁에서의 이의 우위를 주장한 이우위설(理優位說)의 견해는 이황(李滉)에게로 계승되어 영남학파의 성리설에 선구가 된다. 이 일로 그는 일약 젊은 성리학자로서 명성을 쌓게 되었다. 이후 조광조 등이 그를 요직으로 천거하려 하였으나 사양하고 학문 연구와 독서에 치중하였다.

'무극태극논변無極太極論辯'에 관한 논쟁은 조선 성리학 철학사에 첫머리를 장식하는 논쟁이라 할 수 있다. 이 논쟁은 후일 이황과 기대승의 '사단칠정논쟁', 이이와 성혼의 '사단칠정논쟁', '인심도심논쟁'의 신호탄이 되었다.

 그는 호를 회재(晦齋)라 하여 주자의 뜻을 계승하고 그대로 따를 것을 결심한다. 그러나 주자의 입장을 그대로만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주자의 견해나 사서육경의 내용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하지는 않고 자신의 입장에서 독창적으로 해석을 가하기도 하였다.

 *시대적 배경 : 훈구와 사림의 대립 - 4대사화

               무너져내리는 국가제도 왕권약화

 

3. 인물들의 기본사상소개

-이언적과 조한보의 논쟁은 주륙논쟁의 연장선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논쟁을 통해 조선성리학의 터전을 굳게 다짐

이언적

조한보

주희견해 바탕

유학자였지만 노장철학이나 불교에 가까운 모습

태극은 초월적이기도 하지만 구체적 현실에 떠날 수 없음. 즉 도덕법칙(태극)은 보편적이기도 하지만 사람들의 행동 하나하나에 떠나서 있는것이 아님

만물의 본질 태극에는 일상을 넘는 초월적 무언가가 있음

 즉 도덕법칙인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에 사람의 구체적 행동 하나하나를 넘어서서 어딘가 초월적인 곳에 있음

진리를 꺠닫기 위해선느 내적 수련과 더불어 구체적 실천의 결과의 옳고 그름을 따져 바로잡아가는 외적 수양이 필요하다

자기 내면의 경건성에 바탕을 둔 수양을 통해서만 진리를 깨달을 수 있음.

 

4. 논쟁발생의 시대적 의의

 이언적은 조선조 유학, 곧 성리학의 정립에 선구적인 인물로서 유학의 방향과 성격을 밝히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그것은 주희(朱熹)의 주리론적 입장을 정통으로 확립하는 것이 그의 신념이기도 했다. 또한 사서육경과 그 중에서도 《대학》과 《중용》의 정신을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에 우선적으로 있다고 보았다.

 그는 조선시대 성리학의 정립에 선구적인 인물로서 성리학의 방향과 성격을 밝히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주희(朱熹)의 주리론적 입장을 정통으로 확립하여 이황(李滉)에게 전해주었다. 그에 의하면 이와 기는 서로 분리된 것으로 이가 기보다 우위에 있으며 이로써 기를 통제하고 다스려야 된다고 보았다. 당시는 정치적으로 기득권인 훈구파와 비교적 덜 부패했던 사림파가 있었으며 훈구파에 의해 사림파가 억압받는 입장에 서 있었다. 독창적인 이기론과 사회에 비판적이었던 것, 실천을 중요시한 점 등은 그대로 이황과 남인과 일부 북인 학파에게 전달되었다.

 

5. 태극논쟁의 그 구체적 내용

태극논쟁은 무극태극(無極太極)논쟁이라고도 한다. 구체적으로 성리학의 주요 개념 가운데 하나인 태극이 무엇이며 어떻게 체득할 것인가,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 실천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이언적과 조한보의 논쟁.

 

5-1. 태극논쟁의 근원인 주륙논쟁.

성리학은 중국의 주돈이, 장재, 소옹, 정호, 정이라는 사람을 거쳐 주희라는 사람에 의해 집대성되었는데, 주희는 이 과정에서 여러 사람과 논쟁을 벌였다고 한다. 그 가운데 육구연이라는 사람과의 논쟁이 있다. 이 주희와 육구연의 논쟁을 주륙논쟁이라고 한다. 여러 차례 논쟁이 있었는데 그 중 우리가 볼 것은 태극도설(太極圖說)’에 대한 이해를 중심으로 한 논쟁이다. 이 논쟁의 주제는 크게 네 가지다. 첫째, 태극도설이 주돈이가 지은것인지를 따지는 문제. 둘째, 무극이태극에서 무극이라는 표현의 필요성 여부 문제, 셋째, 극의 개념문제, 넷째, 태극도설의 연원문제 이다.

 

 

육구연

주희

1. 주돈이의 자작여부

의심 ㅇ

의심 X

2. 무극의 필요성

필요 X

필요 ㅇ

3. 극의 개념 문제

=

극 ≠ 중

4. 태극도설의 연원

노자의 학에서 비롯

노자의 학 반박

 

 

5-2. 이언적과 조한보

    1) 논쟁의 계기

    논쟁은 1517년부터 시작하여 그 다음 해까지 이어졌다. 당시 이언적 나이 27, 조한보는 50이 넘은 상태였다. 이언적의 글에 따르면 먼저 이언적의 외삼촌 손숙돈과 조한보 사이에 논쟁이 있었다. 이언적은 이 논쟁의 내용을(조한보가 손숙돈에게 보낸 망재의 무극태극에 대한 주자에 답한다라는 편지) 친구 사우당을 통해 읽게 되고, 이언적은 여기에 망재와 망기당의 무극과 태극에 대한 주장 뒤에 붙여 쓴다라는 비평을 남겼는데 그 글이 뜻하지 않게 조한보에게 전해지고 이비편에 대한 견해를 조한보가 먼저 편지를 통해 보내 오면서 논쟁이 시작됬다. 둘은 모두 4회에 걸쳐 편지를 주고받으며 논쟁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조한보의 문집이 불타 자료가 없다.

 

  2).조한보에 대한 이언적의 비평문

          조한보

     2-1. 태극은 바로 무극이다. 그러므로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의 무극은 무()이며 내적인 것이고 태극은 유()이며 외적인 것으로 나눌 수 없다.

     2-2 무극이태극은 큰 근본이자 통달한 도로서 나눌 수 없는 한 덩어리이기 때문에, 그 근본만 깨달으면 모든 사물의 이치를 다 갖추게 된다.

     2-3 무극태허(無極太虛)의 본체를 내 마음의 중심으로 삼으면 만물이 모두 내게 조아리게 되어 어떤 일이든 막힘이 없게 된다

     2-4 무극허태의 본체는 본래 적멸(寂滅)이다.

         이언적

   2-1 주돈이가 무극이태극이라고 한 것은 사물이 생겨나기 이전의 형체 없는 존재이면서 또한 실제모든 사물의 뿌리가 됨을 형용한 것

   2-2 이 이치는 비록 지극히 높고 묘한 것 같지만 그 참모습이 깃든 곳에서 찾는다면 지극히 가까운 실상속에 있다. 그 근본은 둘로 나눌 수 없지만 체용(體用), 동정(動靜), 선후(先後), 본말(本末)을 구별하지 않을 수 없다. 조한보처럼 구분없이 본다면 눈금 없는 저울이나 자와 같아질 뿐이다. 조한보의 견해가 이처럼 잘못된 까닭은 합쳐 보려고만 하고 나누어보기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2-3 그 견해는 바다를 건너려고 하면서 다리가 없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행각이며 하늘에 오르려고 하면서도 사다리가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견해이다.

   2-4 옜 선비들이 태극의 본체를 말할 때 적이감이라고 했다.

 

3). 이 같은 이언적의 비평을 본 조한보가 이언적에게 편지를 보내옴으로써 논쟁이 시작된다.(1)

             조한보

3-1. 무극이태극을 유무로 이해할 때 무라고 정의하더라도 없는 것이 아니어서 마음속에 신령스러운 근원으로 존재하는 것, 유라고 정의하더라도 정말 있는 것이 아니어서 마침내 점점 줄어들어 없어지게 된다

3-2. 모든 사물의 이치는 다 같다.

3-3. 감정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기 이전의 본 마음을 경으로 바로잡아 본체를 체득하고, 무극의 참세상에서 마음을 노닐게 하며 빈듯하면서도 신령스러운 본체를 내 마음의 주체로 삼는다. 따라서 존심양성을 통한 형이상학적 공부만이 필요할 뿐이다.

            이언적

3-1. 이 같은 견해는 노자가 무에서 나와 유로 들어간다고 한 것이나 부처가 말한 공과 같다. 기의 변화를 가지고 말한다면 그렇게 말할 수 있겟지만, 이 이치는 지극히 높고 지극히 묘하면서 우리 주변의 구체적인 것들 속에 원리로써 들어있다.

3-2 모든 사물의 이치가 같다는 견해는 아주 훌륭한 것같지만 옳지 못하다. 예를 들어 말 소 닭 개를 보면 그 각각의 본성이 다르기 때문에 맡은 일이 달라지는 것이다

3-3. 이러한 조한보의 견해는 무극태극을 마음 밖에 있는ㄴ 것으로 보고 그 사이에서 노닌 뒤에 주체로 삼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에 옳지 못하다. 하늘의 이치가 사람이 하는 일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 아니다. 해서 형이하학적인 것을 토대로 하여 형이상학적인 것으로 가는 하학이상달공부가 마땅하다.

 

4). 위의 것에 이어 이언적의 두번째 답장에 따른 논쟁 (2)

 두번째 답장에 따르면 조한보는 이언적의 견해를 받아들임으로써, “무극에서 마음을 노닐게 한다는 표현을 뺌. 더하여 본체는 적멸이라고 했던데서도 멸자를 뺀 답서를 보낸것으로 짐작. 그러나 조한보가 자신의 주장을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다.

               조한보

  4-1. 빈 듯하면서도 신령스러운 무극의 본체를 말한다면 허무가 바로 적멸이며 적멸이 바로 허무이다.

  4-2 경을 주로 삼아 마음을 보존하여 위로 천리에 이른다.

             이언적

  4-1 이것은 유가의 말을 빌려 이단의 학설을 말하는 것이다. 노장이나 불교의 허는 빈듯하면서 정말 아무것도 없는 것이지만 유가의 허는 빈듯하면서 있는 것이다. 노장이나 불교의 적은 고요하면서 마침내 없어지는 것이지만 유가의 적은 고요한듯 하면서 감음하는 것이다.

  4-2. 하학공부 없이 바로 상달천리한다는 주장은 불교의 깨달음에 관한 이론과 같다. (생략) 사람의 일이란 형이하학적인 것이지만 그 속에 들어있는 이치가 천리이기 때문에 그 일을 배워 그 속에 담긴 이치에 통하게 된다. 때문에 이치를 궁구한다는 것은 앎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몸으로 체득하여 실천하는 일이 중요하다.

 

5). 두번째 편지에 이은 세번째 논쟁 (3)

 두번째 편지에서 언급된 앎과 실천의 문제는 세 번째 논쟁을 통해 완전히 수양의 문제로 발전한다. 이언적의 세번째 편지에 나타난 조한보의 주장

        조한보

5-1. 경으로 내면을 곧게 하여 내 안에 들어있는 하늘의 밝은 명을 돌아보면 내 마음이 굳게 안정되어 움직이지 않게 된다.

5-2 내가 적멸이라고 한 까닭은 사람들이 헛된 환형을 참된 현실로 알고 있기 때문에 이런 잘못된 생각을 깨뜨리기 위해 쓴 것이다.

  5-3 하학을 통해 상달하는 일은 어린 아이들이나 하는것이요 호걸 같은 선비는 그렇지 아니하다

       이언적

  5-1. 그 말은 마음을 보존하고 본성을 기르는 공부를 말하는데, 이러한 공부는 아직 마음이 밖의 사물에 대해 움직이지 않았을 때의 공부로는 좋지만 그렇다고 하학공부를 소홀히 하면 직접 몸으로 체험하고 되돌아 살피는 실천이 부족하게 되어 일생생활이 인욕에 빠질 수 있다. (생략) 문을 나서지 않고 천리길을 가려는 것이며 발을 옮기지 않고 태산에 오르려 하는것과 같다.

  5-2 형체를 떠나 이치가 있는 것이 아니며 형기를 떠나 도가 있는 것이 아니다. 하람의 형체는 하늘이 준 것이며 그 속에 지극한 이치가 깃들어있다.

  5-3 공자도 노담에게 예를 물었으며 태묘에 들어갔을 때에는 모든 일을 물었다. 공자 같은 성인도 이렇게 하였는데 하물며 공자보다 못한 사람들엑 있어서랴!

 

 이 논쟁의 끝에 이언적은 조한보의 견해가 불교의 돈오와 같으므로 잘못을 깨닫고 유가의 설로 돌아오라고 한다.

 

6). 마지막 논쟁 (4)

 이언적의 편지에 따르면, 마지막 논쟁에서 조한보는 이언적의 견해를 받아들여 적멸이란 표현을 빼고 상달천리 아래 하학인사를 덧붙였다. 그러나 여전히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한다.

         조한보

 7-6-1 나와 모든 것은 같다.

 7-6-2 경을 주로 삼아 마음을 보존하는 공부를 해야한다

 7-6-3 공부 순서는 본체를 먼저 확립한 뒤에 하학인사해야한다.

       이언적

 7-6-1 이러한 논리는 그물의 윗줄만 보고 그 아래 펼쳐져 있는 그물의 눈들ㅇ르 따지지 않은 것이며, 피부를 빼놓고 뼈만 가리켜 사람이라고 하는것과 같다. 만물은 같은 이치에서 나오지만 이것과 저것, 취할 것과 버릴것, 좋은 것과 나쁜 것 옳은 것과 그른것의 구별이 없을 수 없다.

 7-6-2 경을 주로 삼아 내면을 한결같이 하고 이를 바탕으로 밖을 제어하는 것이며, 밖을 가지런히 해서 다시 내면을 기르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안팎에 모두 이루어지게 되니 어느 한 쪽의 공부도 그만둘 수 없다.

 7-6-3 하학인사경우에도 언제나 경으로 일관하는 것이다. 만일 조한보의 말대로 본체를 확립한 뒤에도 더 노력할 것이 있다면 이는 아직 본체를 확립한 경지에 이르지 못한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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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는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조한보는 만물의 본질인 태극이 자질구레한 일상생활을 넘어서서 초월적인 무언하에 들어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언적은 태극이 초월적인 것이기는 하되 우리가 살고 있는 구체적인 현실을 더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도덕법칙에 대한 것 : 조한보는 도덕법칙이란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에 사람의 구체적 행동 하나하나를 넘어서서 어딘가 초월적인 곳에 있다고 생각, 이언적은 비록 도덕법칙이 보편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사람들의 행동 하나하나를 떠나서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진리를 얻을 수 있는가: 조한보는 자기 내면의 경건성에 바탕을 둔 수양을 통해서만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 이언적은 경건성에 바탕을 둔 내적 수양과 더불어 구체적 실천의결과가 옳은지 그른지를 따져 잘못을 바로잡아 가는 외적 수양을 통해 깨닫는 것.

 

6.논쟁의 의의

6-1 철학적, 계승적 의의 : 이언적의 태극문변은 이황과 이이의 논쟁에 디딤대 역할을 하였다. 특히 리()를 강조한 이언적의 사상은 이황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이언적은 주희를 비롯한 중국 성리학자들의 사상을 이어받았지만 이에 그치지 않고 한국적으로 계승하였는데, 그것이 이 논쟁에서 잘 드러나 있다. 특히 주목할 만 한 점은, 조선 초기에 고려의 재배 이념이었던 불교와 노장의 사상을 성리학과 분리함으로서 성리학의 주자학적 기초를 단단히 하는 배경을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또한 자연에 대한 이해뿐 아니라 이를 인간에게 접목한 실천, 수양적 문제의 한국화를 이끌었다. 논쟁으로 알 수 있는 이언적의 사상은 만물에 앞서는 단순한 법칙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세계에서의 원리임을 강조하였는데 도덕적 실천이 자신 내부의 깨우침으로서 가능하기에 마땅히 이를 발현하여 바람직한 사회를 구현해야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인간의 구체적 행동 근거를 진리에 둠으로서 진리에 창조적 능동적 도덕성을 부여하였는데 이는 이후 중에 우선으로 하여 인간의 실천을 강조한 이황 사상에 기여하였다.)

 

6-2 사회적 의의 : 이언적의 활동 시기는 4대 사화 (무오, 갑자, 기묘, 을사사화)의 시기에 속하는데, 이 시기는 권력을 휘두르던 훈구파 기성 관료와 사림파 신진 관료 사이의 대립이 극에 달하던 시기였다. 각 사화 때마다 많은 양심적 도덕을 주장하던 사림파 학자들이 죽임을 당했는데 이언적 역시 을사사화 때 유배를 당하여 그곳에서 돌아오지 못하였다. 이런 시기에 이언적의 진리는 삶속에 있으며 이를 따르고 실현하기 위해 인간다움을 행하는 것이라는 주장은 훈구파를 향한 일침이었다. 또한 인간 본성이 바로 도덕 원리로서 본성의 발현을 통해 올바른 사회를 만들고자 했던 주장은 사림파의 정당성을 밝히는 것이자 최고 지위자인 임금의 품성을 바로잡아 국가의 도덕성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후에 도덕 실현의 수혜자인 백성을 근본으로 삼아야한다는 주장의 밑바탕이 된다.

 

7. 이언적 사상의 문제점

 

이언적의 사상과 도덕 국가를 위한 주장이 지닌 문제점은, 그 사상이 너무 관념적이어서 현실적인 적용이 어려웠다는 것이다. 당시에 점점 더 커지는 사회 문제를 바로 잡기에는 부적합했다. 예를 들어 한정된 토지를 다루는 토지제도를 개선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이언적의 사상 같은 관념적, 이상적 대안이 아니었다. 또 다른 문제로는 인간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단적으로 중시하는 이언적의 사상은 변화보다는 체득을 하여 개인이 변화하는 것을 강조하기 때문에 가치적 측면을 개인으로 돌릴 수 있는 것이다. 즉 사회의 문제가 사회의 요인이 아닌 부족한 인간의 요인으로만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관료의 부당한 녹봉은 사회적 문제의 결과가 아닌 그 관료의 수양 부족으로 인한 결과가 되어버릴 수도 있다. 또한 사회가 흔들리지 않도록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왕권을 강화하는 것이 결부될 수 있기 때문에 사회 변혁의 의의를 지닌 이언적의 사상은 오용되어 봉건 전제 국가에서 왕권을 지키는 사상이 될 수도 있다.

 

Cf)논의해 볼만한 점

 

1) 단군 신화와 최치원의 사상을 보자면 한국적 조화에 대한 주장이 들어있다. 그렇다면 이 태극문변과 사상적, 사회적 의의를 보자면 한국적인 조화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2) 태극도설의 이론적인 부분으로는 분리되어있지만 현실적으로는 하나인 에서 어느 한쪽에 대한 강조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결국 이 둘은 하나이기에, 정말 한국적인 실천 강조라면 이론적으로 구분하여 강조할 필요 또한 없지 않은가?

 

3) 이언적 사상의 문제점에서 나왔듯이(<이언적의 사상은 오용되어 봉건 전제 국가에서 왕권을 지키는 사상이 될 수도 있다.>), 이러한 성리학의 이기론은 결국 보수적인 구조로서 진보의 가능성을 과소 하는 것 아닌가. 조선 내의 성리학이 결국 극 보수적 성향을 띄는 것은 사상적 운명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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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모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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