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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람 장소: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관람 일시 : 2014-04-11 금요일 14시부 18시까지.

 

 4 7일,  교육실습기간이었으나 주말 시간과 11일 하루가 학교일정으로 휴무를 하였기에 11일에 시간을 내 미술관에 방문했다. 예술철학에 손을 댄 이유이기도 하지만 본인은 예술, 미술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 관심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스스로 자비를 들여 미술관을 간다는 것도 거의 처음 있는 일이었다. 처음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기억에 나지 않을 만큼 거의 흔치 않은 일이다. 그래서 이번에 좋아하든 싫어하든 그 실체, 좋아한다면 좋아하는 이유를, 싫어한다면 싫어하는 이유를 명확히 짚고 넘어가는 기회로 삼고 싶었다. 미술관을 가기에 앞서 미술관이란 곳에 대한 최근의 기억을 더듬어 생각해보니 자극적 광고에 이끌려 방문하게 된 대림미술관의 라이언 맥긴리 사진전이 있었다.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 가보니 그리 큰 감흥이나 기억거리를 남겨주지는 못했다. 오히려 해당 작가에 대한 반감이 생겼던 경험이 있다. 과연 이번 전시회는 어떠할까 기대와 불신을 함께 가지고 갔으니 그날의 기억을 천천히 회상하며 정리해본다.


 그날 본 관람회에서 본 전시회는 총 6개이다. 자이트 가이스트 시대정신, 한진해운 박스 프로젝트, <쉬린 네샤트>, 알레프 프로젝트,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건립 기록전, 현장제작 설치 프로젝트(최우람)가 그것이다. 총 관람시간은 오후 2시부터 오후 6시까지, 4시간이 소요되었으나 모든 전시회를 관람하기에 4시간이라는 시간은 약간 짧은 감이 있었다. 가장 처음 본 전시는 자이트 가이스트 시대정신이다. 1층과 지하 1층에 이어 크게 전시되어 있었다. 이어서 <쉬린 네샤트>(가장 오랜 시간 소요), 한진해운 박스 프로젝트, 현장제작 설치 프로젝트(최우람), 알레프 프로젝트, 국립현대미술관 건립 기록전 순으로 이어졌다. 첫 번째, 자이트 가이스트 시대정신에서는 다양한 작가의 다양한 모습을 지닌 그림과, 조각, 설치품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여기서 나는 대체적으로 작품이 보여지는 모습과 주제간의 불일치의 문제를 겪었다. 다시 말해 작품을 바라봄으로써 주제, 특정 테제 등 내용을 끌어내지는 못했다. 다만 감정적으로 끌리는 것들은 더러 있었다. 정확히 끌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이 끌림의 느낌은 분석도 안되고, 정의 내리기에도 마땅하지 않은, 서술이 불가능한 성질의 것인 것 같다. 그렇게 끌림을 느낀 작품들은 대체로 거대한 유화 그림작품이었다. 캔버스지가 하나로는 부족해 세 개, 네 개를 이어 만든 작품들도 있었다. 예를 들자면 장화진 작가의 지배자’, 오병욱 작가의 내 마음의 바다’, 문범 작가의 천천히 같이등과 같은 것이 있다. 이 외에 감정적 느낌은 없지만 한번쯤 나의 시야가 머물던 몇몇 설치품도 있었고 그저 스쳐 지나간, 즉 무가치하게 인식되어 나로부터 버려진 물건도 많았다.

 지하 1층에서도 자이트 가이스트 시대정신이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작품이 걸려 있었다. 행위예술을 표현한 알 수 없는 설치품도 있었고(노동의 방, 인유의 방, 태도의 방), 앞서 말한 것처럼 서술 불가능한 어떤 감정에 이끌려 오래 쳐다본 것이 아니라 그저 이상하기에 기괴하기에 오랫동안 내 시야에 머물렀던 작품도 있었다. 예를 들자면 오경환 작가의 천공(우주구멍)이라는 작품이 있겠다. 생각해보건대 이처럼 이상하고 기괴하다거나 희한하다거나 하는 식으로 내게 다가왔던 유화 작품들은 어떻게 하면 가지고 있는 이 물감을 가장 무가치한 방식으로 소비하는가를 경쟁하는듯한 식의 인상만을 나에게 주었다.

내가 감정적 끌림을 느꼈던 유화작들, 그리고 신기함과 그 신기함을 넘어 아름답다라고 까지 느꼈던 <필립 비슬리>의 착생식물은 예술이었다. 반면 이상함이나 기괴함으로 다가온 유화, 의도를 알 수 없는 설치품, 시대적 저항의식을 상징화한 <쉬린 네사트>, 한진해운 박스프로젝트 등은 최소한 내게 있어서는 예술이 아니었다. 이상함과 기괴함이라는 감정적 이끌림을 위해 예술을 한다고 하기에는 그 가치가 적을 뿐더러 낭비가 심하다고 느꼈고, 나는 그런 기괴한 감정을 너머 아름답다라는 느낌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창조적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진 특이함, 특별함, 이상한 어떤 것들은, 그리고 그 완성을 통한 만족은 그저 그 사람 하나에 머물 뿐이다(예술로 포장된 객기, 가짜 예술). 예술이라 함은 서술 불가능한 감정적 끌림에 관해서 어느 정도의 보편성을 지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쉬린 네샤트>의 전시는 정치나 사회의 영역이지 예술의 영역은 아닌 것 같다. 예술은 그런 사회적 문제나 정치적 문제를 모티브로 하여 예술의 영역인 그 느낌을 이끌어내는데 도구적으로 쓰일 수는 있지만 주객이 전도되어 그 예술의 목적이 사회, 정치적인 것이 되어버린다면 그 작품은 예술로서의 순수성이 오염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예술이 아닌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표현물일 뿐, 예술로서의 위치를 스스로 버린 셈이다.

한진해운 박스프로젝트(집 속의 집 속의 집 속의 집 속의 집)는 아무리 의도하고 억지로 살펴보아도 내게 아무런 감정적인 것을 주지 못했고 아름다움도 느끼지 못했다. 그저 구체적인 동시에 추상적인 표현물이었다. 보편적으로 아름다움을 전해주지도 않으며 앞서 말했던 서술 불가능한 느낌도 주지 못했다. 그런 추상적 구체적 표현물이 예술이 아님에 대해서 당장은 딱히 서술할 방법을 못 찾았지만 굳이 쓰자면 예술이라기에는 쫌 아닌그런 것이었기 때문이다. 마무리하자면, 이번 관람을 통해 예술은 무엇이고 어떤 것이 예술이고 어떤 것은 예술이 아닌가?’ ‘예술이라 불리는 것은 어떤 가치를 지니나’, ‘내게 있어서 어떤 것을 주는가?’에 관해 생각하는 시간도 함께 가졌지만 역시나 이 부분에 대해서는 서술로써 표현이 불가능한 영역인 것 같다. 그래도 일차적인 판단을 해보자면 감정적 발화를 준거 삼아 판단해야 마땅할 것 같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또 개개인마다 예술의 정의, 예술의 가치가 달라지기에 마음에 들지 않았다. 회의와 예술적 방종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즉 절대보편적 진리가 분명히 있다고 생각하는 나의 입장에서는 감정적 발화를 준거 삼아야 한다는 나의 일차적 결론은 당장은 쓸 수밖에 없지만, 그렇게 한다면 또 예술이 상대적인 것이 되기에 나 스스로 받아들이기 힘들어지는 딜레마에 빠진다. 당장 감정적으로는 나의 감정적 발화만의 진리요 모든 것의 기준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것은 독단과 아집이기에. 아름다운 것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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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 경제와 삶의 현재인 이 자본주의체제 속에서 경쟁과 독점은 서로 밀접하게 묶여 있다. 그래서 자본주의적 경제체제의 본 모습을 알기 위해서는 경쟁과 독점의 역사적 인과성을 함께 묶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첫째, 경쟁의 개념을 알아보고, 둘째, 독점의 개념을 알아본 뒤 마지막으로 자본주의의 발전 경향성, 즉 자본주의 체제의 역사성과 함께 경쟁과 독점의 필연적인 인과관계를 알아보고자 한다.[1]

 

  1. 경쟁의 개념

 경쟁은 언제나 있어왔다. 경제적 개념에서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 교육 등 삶 전반에 걸쳐 통용되는 개념이기도 하다. 여기서는 경제적 측면을 중점으로 서술해볼 것이다. 우선 고전에서의 경쟁개념은 이상적 개념이었다. 즉 초과이윤을 배제하고 시장가격을 실현 가능한 최저의 수준으로 끌어내릴 수 있는 도구로 생각했다. 또 적극적인 가격 경쟁을 통해 재화의 가격을 수요와 공급의 항구적 균형점인 ‘자연가격’에 일치시키는 힘으로써 이해되었다. 마치 자연법칙과 같이 경제사회의 질서와 안정, 도덕적 당위성을 보장하는 것으로 여겨졌다.[2] 하지만 이 고전적인 경쟁 개념은 경쟁의 과정적 측면에서 분석한 것이지 경쟁의 세속적 목적 측면에서 본 것은 아니다. 경제에 있어서 경쟁을 하는 이유는 살아남기 위해서, 즉 더 많은 이윤을 추구하기 위한 포석적(布石) 차원의 것이다.

 

 시장 내에서의 경쟁의 구체적 모습은 잠재적 고객을 포함한 고객을 확보하고, 이를 통해 매출을 증대시키며 최종적으로는 이윤을 높이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한다. 예를 들자면 가격인하, 제품차별과, 광고, 서비스 강화, 기술개발, 진입장벽 설정 등이 있겠다.[3]

그리고 경쟁의 상태에 따라 시장의 상태를 개념적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완전경쟁시장(무경쟁상태-무독점상태), 독점시장, 불완전 경쟁시장이 그것이다. 완전경쟁은 다수의 판매자와 다수의 구매자에 의해 특정 재화의 수요와 공급이 이루어지는 상태이며 그 특정 재화의 시장에 진입이 비교적 자유로운 상태이다. 불완전경쟁시장은 완전경쟁시장과 독점시장이라는 양 극단 사이에 존재하는 과도기인 시장으로 완전경쟁시장보다 경쟁이 덜한 상태를 말한다. [4] 경쟁, 과점, 독점이 혼재해 있는 상태이며 현실의 상태이기도 하다. 독점시장은 경쟁이 없는 상태로(완전독점의 경우) 시장에 상품을 공급하는 주체가 단 하나뿐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1. 독점의 개념

독점은 말했듯이 어떤 재화, 서비스를 판매하거나 생산하는 사람이 단 한 명인 상태를 말한다. 어원적으로도 독점(monopoly)은 모노스(monos(only))와 폴레인(polein(to sell))의 합성어이다.[5] 따라서 앞서 말한 것처럼 특정 재화나 서비스의 시장에 경쟁자가 존재하지 않거나 거의 없는 것에 가까운 상태다. 독점상태에서 독점자는 생산량과 가격을 마음대로 설정할 수 있고 독점적 지위의 보전을 위해 진입장벽을 높이는 행동을 취할 수 있다.

 

 독점은 두 가지 관점에서 해석해볼 수 있겠는데 좌파적 관점에서의 독점과 우파적 관점에서의 독점이 있겠다.[6] 좌파적 관점에서의 독점은 인민 전체가 주인이 되어 경제적 권리를 “인민 전체로서”, 즉 공유한다는 의미에서의 독점이며 고전파의 이상적 개념에서의 독점이다. 본인이 생각하기에 이는 인류가 추구해야 할 가장 궁극적인 경제체제이며 독점은 필연적으로 우파적 관점에서 좌파적 관점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고 느껴진다. 우파적 관점에서는 자본가 또는 능력 있는 사람이 경제적 권력을 독점하게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상태, 자본가적 입장에서 독점을 바라보는 것이다.

 

 삶에 있어서 극단이나 치우침에는 언제나 폐해가 있는 것처럼, 경제에 있어서도 독점은 좋은 점과 폐해를 함께 가지고 있다. 독점을 잘못 통제하게 되면 자원, 재화의 부적절한 배분을 발생시키고 국가 전체나 인민의 행복을 저해시킬 수 있다. 이를테면 독점 상태에서는 재화의 가격이 비합리적인 수준으로 상승할 수도 있고, 경쟁이 없기 때문에 품질, 서비스 등에 대한 경영자나 직원의 노력도가 떨어질 수 있다. 그리고 정경유착의 결과를 초래할 수 있으며 대기업과 중소기업간 균형 발전을 저해할 수 있다.[7]

 

이러한 독점은, 독점 자체의 본성이 옳고 그르냐를 떠나서 현 시점에서 독점이 어떤 문제를 야기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말하건대 ‘독점’은, 독점화의 경향은 본성적으로 내재해 있고 더불어 ‘경쟁’을 내부에 포함하고 있으면서도 결과적으로는 경쟁을 지양하는 속성을 지닌 것 같다.[8] 뒤에서 자세히 이야기하기를 시도해보겠지만 어찌 보면 자유경쟁의 귀결로서 독점이 나왔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우선, 자본가의 입장과 비자본가의 입장에서 독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자본가의 입장에서 일단은 독점이 바람직해 보인다. 자본가의 표면적인 존재의 목적, 즉 비본질적이며 억견(doxa, 허상, 상상, 신념)로서의 목적은 이윤을 최대로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한 점에 한해 경쟁의 승리와 자본가의 시장독점은 바람직하다. 하지만 본질적이며 궁극적인, 에피스테메(episteme, 최고선, 지식)로의 목적에서 보자면 독점은 바람직할수도 있고 바람직하지 못할 수도 있다. 자본가의 초월적이며 본질적인 행위 목적은 나를 위해 또는 소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이타심을 위한 것, 전체의 행복을 위한 것, 인민의 ‘행복 표준편차’가 최소화 되도록 하는 것, 공리적 행복의 추구이다. 그렇기 때문에 앞서 말했듯 독점 그 자체를 가지고는 좋다거나 나쁘다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전자의 측면에서 보자면 앞서 말한 자본가의 모습은 비본질적 모습을 보이며 억견이며 허상이다. 따라서 바람직한 것이 못되며 후자의 측면에서 보자면 자본가는 최고의 선, 공리적이며 궁극적인 행복을 추구하고 있으므로 바람직한 것이 된다. 전자의 경우는 재벌기업이 되겠으며 후자의 경우는 공기업이 될 것이다. 이런 기본 패러다임에 입각해 본인은 최종적으로 모든 경제 기반은 후자의 독점적 형태로 나아가야 함이 마땅하다고 본다.[9]

 

사실, 자본가의 표면적 목적으로서의 이윤추구 또한 그 자체로 좋다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 같다. 이윤은 무언가를 판매한 뒤 일체의 비용을 충당한 뒤 남은 잔여자본을 말하는데, 재화의 원래 가치에서 얼마만큼의 이윤율을 설정하였느냐도 문제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 이윤이 어떻게 분배되었느냐 하는 것이다. 기계제 공업을 예로 들어 만약 이윤이 투하된 자본(자본가의 돈 뿐만 아니라 노동자의 노동력 역시 포함)에 비례하여 정확히 1/n로 돌아가지 않고 일부가 빼돌려져 자본가에게 들어간다면 그것은 즉 자본가의 잉여가치가 되는 것이며 그렇게 잉여가치를 남기고자 하는 목적의 이윤추구라면 나쁘다고 말할 수 있다. 현실에 있어서 대부분의 자본가는 이처럼 잉여가치를 남겨 왔다.


  1. 자본주의에서의 경쟁과 독점의 관계

 정리하자면 자본주의에서 경쟁과 독점은 상호 배타적이거나 분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10] 경쟁은 본질적으로 독점이다. 경쟁상대를 배제하려는 과정 자체가 본질적으로 경쟁적이다. 자본가는 경쟁자를 배제하기 위하여 스스로의 생산성을 향상시키고 효율을 높이고 최종가격을 인하하며 잠재적 구매자를 끌어들이고자 노력한다. 그 일련의 과정이 경쟁이다. 그 과정까지는 소비자에게 바람직한 것이며 법으로 억제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다만 그 경쟁의 결과로서 독점이 어떻게 변화하는가, 그리고 독점화된 재화의 속성이 필수재이냐 사치재이냐 등에 따라 억제가 필요할 수도 있다.

 

 자본주의 발전의 흐름에서 경쟁과 독점의 상관성을 보자면 서구의 자본주의는 대체로 19c 말에서 20c 초를 경계로 하여 자유경쟁자본주의에서 독점자본주의로 바뀌어갔다. 소수의 독과점 기업이 시장을 지배하고 나아가 국가 경제를 지배하는 형태로 바뀐 것이다. 이렇게 된 데에는 몇 가지 계기가 있다. [11] 첫째, 돈을 벌기 위해서는 경쟁을 해야 했으며 그 경쟁에 대한 승리의 결과로 소수 기업이나 자본가가 시장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둘째, 새로운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조선산업, IT산업, 중화학 산업 등과 같이 자본의 막대한 집적을 필요로 하는 산업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를 감당할 수 있는 대자본가가 시장을 꾸리게 되었다.

 

다시 풀어서 설명하자면 자본주의 속의 이 경쟁은 처음에는 생산수단을 지배(독점)하고자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생산수단을 바탕으로 노동력을 얻기 위해 경쟁하였으며 얻은 후에는 노동력을 지배 또는 자본가에게로 귀속(독점)해왔다. 처음에 이는 자본가 개인적이며 국지적 형태의 소유이자 독점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소유를 향한 경쟁과 승리가 반복되면 소유는 집적되며 그 집적을 바탕으로 더 큰 경쟁을 하여 승리, 점점 더 증대되어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자본가의 몸집은 초기 자본에 비해 대단히 커지게 되었다. 그리고 19c 중 후반에 이르면 경쟁을 통한 이런 독점의 획득은 그 경계를 국민국가 전체에까지 확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자본가는 더 몸집을 불려 국민국가라는 울타리를 넘어서고자 한다. 그 울타리를 넘어서는 순간 다시 경쟁이 시작되는 것이다.[12] 그 경쟁은 한 국가 내 자본집단간 경쟁을 너머서 초 국가적 자본집단간 경쟁이 되었고 그 모습은 지금의 현실이기도 하다.

 

 자본은 특정 국가에 핵심성분을 두지만 이윤의 극대화를 위해 타 국가로까지 영역을, 시장을 확장해나간다. 자본주의는 이러한 성장, 확장을 멈추지 않는다. 멈추는 순간 자본주의는 무너지기 때문이다. 어쩌다 자본주의는 경쟁을 하게 되었고 독점을 하게 되었나 그 역사 속 필연성 안의 경쟁과 독점의 인과성을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그 이유로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성장을 향해가게 되어 있는데, 자본가가 추구하는 이윤, 잉여가치율은 자연본성에 따라 필연적으로 하락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리라. 그리고 지금에 와서는 자본주의의 속성인 그 성장경향을 보존하기 위해 자본가들은 ‘금융자본’이라는 이상한 방법까지 나오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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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보론으로서 ‘마땅함’이 무엇인지에 대해 언급해야만 할 것 같다. 마땅함은 다음과 같은 의미이다. 가장 올바르다고 여겨지는 목적을 벗어나지 않는 행위가 올바른 것이다. 즉 타고난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는 것이다. 자동차라면 안전하고 빠르게 잘 달리는 것, 컴퓨터라면 오류 없이 잘 작동하는 것이다. (어떤 토대나 패러다임으로써의 가정) 올바르다고 여겨지는 목적이나 행위가 무엇이더냐 말하자면 그것은 평등, 그리고 행복함이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자면, 의사의 경우는 환자를 치료하는 것-자기 있는 힘껏 최선을 다해 치료하여 이롭게 하는 것이 목적이며, 선생의 경우는 교육을 통해 바람직한 인간상을 만들어가는 것이 목적이며, 변호사의 경우는 억울하고 또 법적인 구명이 필요한 사람을 최대한으로 도와 법적 사회적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 그 목적이다. 대통령, 정치인은 자기희생을 바탕으로 오로지 인민과 국민의 전체적 행복 증진을 위해 헌신 하는 것이 그 목적이다. 여기서 지금 주요하게 다루고 있는 자본가나 기업가의 경우는 최저의 가격으로 최고 품질의 것을 널리 퍼뜨리는 것, 그럼으로써 소비 및 소유에 대해 공리적 이익과 행복의 증대를 가져다 주는 것이다. 영리를 추구하거나 물질적 대가를 얻는 것이 목적(최종적으로)인 직업(또는 행위)은 없다. 아니, 개인에 따라 그런 것에 목적을 두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기능적으로나 이상적으로 생각해볼 때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여겨진다. 그런 바람직한 목적을 벗어나 어떤 행위 또는 직업을 그 행위 또는 직업 자체의 최고의 바람직한 목적이 아닌 것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써 행하는 행위 자체는 결코 올바른 것이 아니며 따라서 제도적으로 엄벌에 처해야 한다. 우리가 다루고 있는 경쟁과 독점이라는 주제에서 보자면 이상적 행위에 부합하는 결과를 산출하는 독점만을 제한하는 독점금지법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올바름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돈을 벌기 위해 의술을 하는 사람을, 평생직장이라는 비루한 목적을 위해 선생 등의 공무원을 하고자 하는 사람을, 처벌받아야 마땅한 사람을 변호하고 있는 변호사를, 인민과 국민의 전체적 안위와 행복을 위해 헌신하지 않고 수상한 목적과 다른 책동을 위해 일하는 위정자를, 최고의 가격으로 최저의 것을 퍼뜨려 최대의 이익을 남기고자 하는 장사치와 기업가들을 색출해 제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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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나드 마넹 - 선거는 민주적인가


선거제도가 바람직한가?

 

 

(사진: 구글)

본론1 : 대의민주제가 진짜 민주제가 아닌 이유.

민주주의 본연의 의미의 탐구를 통해 바라본다면:

현실을 바라보았을 때:

 

본론2 : 추첨이라는 민주주의 방식을 현대에도 적용 가능할까?

 

 

2. 보론2 : 엘리트주의에 관한 입장

여기서 말하는 엘리트라 함은 플라톤적인, 철인적인 것을 의미하고, 그 철인이 많은 인민을, 철인으로서, 엘리트로서 끌어 올려주어야 하고, 즉 동굴에서 강제로 끌고 나오는 것, 즉 이데아를 향하게끔 하는 것, 이것이 본인이 말하는 엘리트다. 그리고 이것이 엘리트 본연의 모습이리라. 하지만 우리는 현재에 발 딛고 있는 존재다. 따라서 우리는 우선적으로 엘리트 본연의 모습과 더불어 현재의 엘리트 모습이 어떠한가를 교차시켜 보아야 한다. 만약 지금의 엘리트가 본연의 모습과 일치한다고 하여도 엘리트들은 그 본연의 기능으로서 엘리트주의를 정당화할 수 있으며, 불일치한다고 하여도 마찬가지로 엘리트 본연의 기능을 근거로 하여 엘리트주의를 정당화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세계의 자칭 엘리트들은 실로 본연의 엘리트가 아니며 그저 사이비 엘리트일 뿐이다. 현재의 엘리트라고 정의되어진 것들이 사이비이기 때문에 엘리트주의” ” 라는 논의가 생기게 된 이유이다. 엘리트 본연의 기능으로서 진짜 엘리트들은 지금의 사이비엘리트들을 처리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이것은 의무가 아니라 엘리트로서의 본능이다.

이런 흐름에서 당장의 엘리트주의는 (사이비 엘리트로서) 반대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본연의 엘리트로서의 엘리트주의를 우리는 결단코 지지할 수밖에 다른 길은 있을 수 없다. ‘엘리트주의라는 이름으로 엘리트가 논의의 것이 되는 이유는 바로 이 엘리트에 대한 정의의 차이 때문이다. 엘리트를 문제 삼는 이들은 지금의 속칭 엘리트(사이비엘리트)를 엘리트라 정의내리고 이들의 권위적이고 리더십적인 모습이 바람직한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그런 사이비의 것들은 바람직하지도 않고 그들의 권위와 리더십은 정당하지도 않다.

 

3. 보론2 : 지식의 실천과 정치적 실천은 상호 일치되어 있느냐 분리되어 있느냐?

지식의 실천과 정치적 실천은 그 정체가 서로 붙어 있느냐 분리되어 있느냐의 성질의 것이 아니다. 지식의 실천과 정치적 실천은 그것을 행하는 사람의 의지에 따라 분리될 수도 있고 함께 할 수도 있다. 우리가 물어야 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 과연 지식의 실천과 정치적 실천이 분립되어 있는 것이 바람직 하느냐, 혹은 양립되어 있어야 바람직 하느냐 하는 것이다. 논란의 여지가 없게도! 지식의 실천과 정치적 실천은 서로 일치되어야 함이 마땅하다. 다만 우리가 발 딛고 있는 현실의 사태가 지식의 실천과 정치적 실천을 분리시켜 놓았을 뿐이다. 그리고 양자가 분립된 데에는 엘리트, 즉 사이비 엘리트의 책임이 아주 크다. 그리고 그 사이비 엘리트를 진짜 엘리트인 양 대한 우매한 민중들 역시 그 책임은 아주 크다.

양립된 상태가 좋은 이유 : 지식은 그 자체로는 좋은 것이다. 학문 역시 그 자체로는 좋은 것에 속한다. 반면 돌, , 나무 등등의 것들은 그 자체로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이다. 그 자체로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속성의 것들은 그것을 지닌 사람이 어떻게 어떤 의도를 가지고 사용하느냐에 따라 좋아지거나 나빠진다. 그 자체로 좋은 것의 것들도 마찬가지다. 그 좋은 것을 지닌 사람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좋음의 속성을 지닌 그것을 수단으로 사용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좋은 것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나쁜 것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말하자면, 그 자체로 좋음의 속성을 지닌 지식의 실천(내가 생각하기에 지식은 지식이고 실천은 실천이다. 그런데 지식의 실천이라 함은 지식인으로서 그 지식을 물리적 형태로 표출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을 예를 들자면 논문, 강의, 저술 등이 있겠다. 그리고 그러한 지식의 실천적 결과물 가운데 좋은 것도 있을 것이며, 그저 그런 것도 있을 것이며, 분명 반동적이거나 나쁜 것도 있을 것이다. 그 중에 좋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즉각 현실에의 반영이 되어야 한다. ‘현실에의 반영이라는 것을 운영하는 사람들이 바로 정치인이다. 그리고 반영하는 것은 정치적 실천이다.

분립된 상태가 나쁜 이유 : 그런데 지식의 실천과 정치적 실천 양자가 분립된다면 정치적 실천의 주체자들은 지식이 부재한 채 무엇인가를 현실에 반영하고자 할 것이다. 거기서부터 현실의 문제가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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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구글)

니체의 『도덕의 계보』 비판


1. 니체 『도덕의 계보』의 전반적인 내용

2. 니체의 선악(좋음과 나쁨)의 개념 비판

3. 니체의 '원한심리' '노예도덕' 재평가

 

1. 『도덕의 계보』에 대한 전반적인 느낌

 도덕의 계보는 세 논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 제1논문을 다루겠다. 1논문의 주제는 '선과 악', 그리고 '좋음과 나쁨'에 관한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선과 악 개념의 계보, '좋음과 나쁨' 개념의 계보를 다룬다. 결론적으로 여기서는 '도덕적-비도덕'의 대립이 '-'의 대립이 아닌, '좋음-나쁨'의 대립과 동치되는 방식을 주장하게 된다. 즉 고귀한 가치평가 방식인 것이다.

 

2. 니체의 선악(좋음과 나쁨)의 개념

 니체의 주장대로라면 도덕적 개념인 선-악은 그저 고귀하지 않은 가치평가 방식인, 즉 원한의 심리학이 형성해 낸 노예도덕일 뿐이다. 노예의 도덕이라 함은 성적, 출세, 지위, 재산 등에서 비롯한 가치판단을 말한다. 그는 기존의 도덕을 노예도덕이라 칭하면서 기존 도덕을 도덕에 대한 우리의 도덕적 편견정도로 여긴다. 니체는 그 "노예도덕"을 주인도덕, 고귀한 도덕으로 대체시키려는 도덕의 이단아일 뿐이다.

 

 

3. 니체의 '원한심리' '노예도덕' 재평가

 기존의 도덕적 가치를 비판하는 일은 진보를 위해, 즉 현재의 상태를 지양하며 더 나은 미래를 향한 현재의 역동성에서 분명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기존의 도덕사, 도덕 틀 전체를 엎어버리는 것은 위험한 생각이며, 니체의 그 생각은 현재에 발 딛고 있지조차 않다.

 

..

 

지금까지 지상에서 도덕으로 칭송받은 모든 것을(도덕) 미심쩍게 여긴다.(p.14)

 

 

; 도덕, , 순종, 동정 같은 것을 걸림돌 정도로 여긴다. (순종을 걸림돌로 생각하였는지는 의문이 있지만.)

니체 ; 동정(동정, 동정도덕)을 비판 p.17 동정본능. 쇼펜하우어가 오랫동안 미화하고 신성시하며 세계 저편의 것으로 만든 '비이기적인 것'의 가치, 즉 동정본능, 자기부정본능, 자기희생본능의 가치... 이러한 본능에 대해 내게서 점점 더 근본적인 의구심과 점점 더 깊이 파고드는 회의가 생겼다...

-> 신성한 것, 선한 것으로써의 '동정'(희생) 있다.

 

니체 ; 우리 인간같은 인식하는 존재조차 자기 자신을 잘 알지 못한다. 여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한번도 탐구해 본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p.11)

 우리는 사실 우리 자신에게 필연적으로 낯선 존재로 있고,... 우리 자신에게 우리는 '인식하는 자'가 아닌 것이다...

 ->하지만 잘 아는 인간, 탐구해본 인간은 분명 있다. 그리고 인식가능하다.

 

 

 기존의 도덕적 가치를 비판하는 일은 분명 필요, 그러나 기존의 도덕사? 도덕 틀 전체를 엎어버리는 것은 위험한 생각.

 사람들은 이러한 '가치들'(기존의 도덕관념)을 주어진 것으로, 기정사실로, 아무런 무넺제기도 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겼다.(<-니체말)

 -> 이부분은 동의한다. 하지만 전체를 부정할수는 없지 않느냐... 분명한 것은 '선한 사람' '악한 사람'보다 훨씬 더 가치있고, 이는 조금의 의심의 여지도 없다. 문제제기거리가 안된다. 여전히 조금의 의심이나 동요의 여지가 없다.

 

선악과 좋음과 나쁨은 구분된다.

 

내가 이해할 수 있는 한에서 다루어본다.


본문)

니체의 저서 『도덕의 계보』의 서문과 제1논문을 바탕으로 하여 첫째, 『도덕의 계보』 의 구성, 둘째, 『도덕의 계보』 의 내용에 대한 본인의 입장을 써보겠다. 먼저 니체의 제1논문인 ['선과 악', '좋음과 나쁨']은 그 내용을 토대로 하면 총 17개의 상세 목차가 있다.[1] 구체적으로는 선과 악 개념의 계보, '좋음과 나쁨' 개념의 계보를 다룬다. 결론적으로 여기서는 '도덕적-비도덕'의 대립이 '-'의 대립이 아닌, '좋음-나쁨'의 대립과 동치되는 방식을 주장하게 된다.

 이어서, 니체의 『도덕의 계보』 에 대한 나의 전반적인 입장은 다음과 같다. 니체는 그의 저서 『도덕의 계보』에서 기존 도덕의 존엄과 이념을 심히 모욕하는 도발적 말을 하고 있는데, 니체의 그 망언은 도덕을 향한 존엄에 대한 희롱이며 일반 독자와 인민을 향한 엄중한 우롱적 도발로써 이는 절대 용납 불가능한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따라서 니체의 도덕을 향한 강도적이고 파렴치한 행위에 대처하여 강한 대응(감정적인 것을 포함한)을 취하는 것은 너무나도 응당한 처사라고 생각한다. 나는 본 감상문을 너머 이후 소논문에까지 이어서 이 도덕의 존엄을 건드린 대가가 얼마나 비싼지를 골씨에 사무치도록 깨닫게끔 시도할 것이다. 먼저 니체가 기성 도덕에 대해 어떠한 발언을 하였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니체는 『도덕의 계보』 제 1논문의 전반에 걸쳐 기존의 도덕, 사제적인 가치평가방식, "무력감에서 비롯된" 증오, 사제의 복수심, "원한", 노예반란 등을 평가절하한다. 동시에 독자로 하여금 반박하기 힘들게끔, 마치 제논의 역설과 같이 일목요연하지 않은 장황하고 어려운 단어, 복잡한 문장 구조, 모호한 문장, 불분명한 예시 등을 사용하고 있다. 만약 그가 자신의 생각을 단편적이고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였다면 복잡함이 줄어들어 강력한 반박의 가능성이 충분하였으리라 생각한다. 다시 돌아와, 니체는 위에서 말한 "원한"등의 도덕적 판단을 계속하여 비판하면서 "고귀한 자"라고 여겨지는 자들이 진실로 훌륭하고 실은 그것만이 도덕적인 것임을 피력하고 있다. 그 근거와 나의 반박은 다음과 같다.

 1. "좋음이라는 판단은 호의를 받은 사람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사람들'자신(고상한 자, 강한 자)에 의해서 비롯된다.  좋음과 공리주의는 무관하다. "

 -그렇지 않다. (좋음) 그 자체는 공리성을 비유하자면 선의 기로써 내포하고 있다. 한자식으로 표현하자면 선즉공리 (善卽功利) 인 것이다. 니체 역시 그 주장의 근거가 모호함으로 나 역시 그 근거는 추상에 머무르겠다.

 2. " '도덕적', '비이기적', '공평무사한' 이라는 말을 등가의 개념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편견이자 고정관념, 정신병이다."

 -그렇지 않다. 도덕적과 비이기적, 공평한 등의 표현은 좋은 것, 선한 것의 범주로써 한 소속의 것이다.

 3. "어원학적으로 '좋음'은 고귀한, 귀족적임을 의미하고, '나쁨'은 비열한, 천민적임을 의미한다."

 -니체의 편견이다. 애초에 계보학을 철학적 방법론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부적절했다. 이는 도덕적 단어의 발생사에 가설적 성격을 지닐수밖에 없으며. 뒤로 갈수록 더 많은 추측에 의존할 뿐, 아무런 귀납적 인과성을 찾을 수 없다.

 4. '가련한, 가난한, 무력한, 비천한, 고통 받는, 비천한.. 등 만이 선한 자이며, 고귀하고 강력한 자 등은 영원히 사악한 자이다.'라는 식의 니체의 비아냥거림.

 -가난하거나 부유하거나, 약하거나 강하거나, 천하거나 "고귀"하거나 등의 구분이 선악을 구분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기성 도덕을 비판하기 위한 니체의 비아냥이다. 대체적으로 부유하고 "고귀"한 자들이라는 집단 속 사람들이 해악을 더 많이 저지를 뿐이다. 

 5. '"원한 자체가 창조적으로 되어 가치를 낳을 때 도덕에서 노예반란이 시작된다.", "고상한 도덕이 자기자신을 의가양양하게 긍정하는 데서 생겨나는 반면, 노예도덕은 애당초부터 '외부적인 것', '다른 것', '자기자신이 아닌 것'을 부정한다. 그리고 이 부정이야말로 노예도덕의 창조적인 행위이다."

 -기존 도덕의 가치를 평가절하하는 가장 대표적인 니체의 망언이다. 니체는 귀족주의적이며, 계급주의적이고, 노예제도와 노동착취를 정당화하고, 자본주의와 탐욕, 전체주의를 "고귀한" "원한"이라는 말 한마디에 정당화 및 지지하려는 아주 위험한 이데올로기를 지니고 있다.

 -도덕에 있어서 "원한"은 선의 수행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원동력적인 역할을 한다.

 -속칭 고상한 도덕은 자기 자신을 의기양양하게 긍정하는데서 생겨난다고 하였는데, 여기서부터 문제가 있다. 속칭 고귀한 자들의 이 의기양양함과 자기긍정은 어떤 통제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결국에 그것은 의기양양과 긍정을 너머 자만, 억압, 욕심, 착취, 자기기만, 권위주의 등 인간의 언어로 형용할 수 있는 모든 부정적 의미의 것으로 넘어간다.

 -출신성분이 좋은, 즉 고귀한 사람들이 스스로 자기긍정하고 행복한 사람으로 여긴 이유는 말 그대로 "출신성분"이 좋았기 때문이지, "고귀한"사람 속 자체에 선 내지 좋음의 성질이 본성적으로 또는 후험적으로 깃들어있는 것은 아니다.

 6. "고귀한 인간은 '좋음'이라는 기본개념을 먼저 자발적으로, 즉 자기 자신에게서 생각해내어, 거기에서 비로소 '나쁜'이라는 관념을 만들어낸다."

 -"좋음"이라는 개념은 그 자체로 관념으로써 존재한다(마치 하늘 위에 부유하듯). 인간의 의지나 인간의 가치판단으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좋음' '도덕적'인 것은 발견되는 것이다. 고귀한 인간이나 고귀하지 않은 인간 모두 좋음이라는 개념은 직감적으로, 통찰적으로, 직관적으로, 육감적으로 알고 있다. 좋음의 반대로써의 악은, 그 인간으로써 가져야 마땅한 최고 단계의 관념, 행동, 가치관에 반하는 행동일 뿐이다.

 7. "어린 양이 큰 맹금을 싫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그것이 어린 양을 채어가는 큰 맹금을 비난할 이유가 되지 않는다"

 -니체의 반동적이고 반도덕적, 반인륜적 만상을 여실히 보여주는 문구이다. 니체가 말하는 고귀한 자(맹금)은 착취자, 범죄자, 욕심/이기주의자 이다. 상식적으로 우리는 이들을 '좋은'사람으로써 받아들일 수 없지 않겠는가? 어린 양은 그 자체로 선하다고 할 수도 없지만, 나쁘다고 할 수도 없다. 맹금 역시 그 자체로 선하거나 악하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어떤 행동을 하느냐에 따라 선한 맹금이 되고 악한 맹금이 되며, 선한 양이 되며 악한 양이 될 수 있다.

 8. "보복하지 않는 무력함은 '선함'을 바뀐다. 소심한 비겁함은 '겸허로 바뀐다."

 -보복하지 않는 무력함 자체가 선한 것은 아니다. 가치중립적이다. 만약 나쁜 것에 대해 보복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악이 된다. 만약 나쁜 것에 대해 보복한다면 그것은 선한 것이 된다. 그리고 '보복'이라는 의지적 관념이 생기게 된 근인이 진정한 나쁜 것, 나쁜 것의 원인이 된다.

 9. "약자들 역시 언젠가는 강자가 되고자 한다. 이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완전히 맞는 말은 아니다. 약자들이 원하는 것은 모두가 강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평등, 즉 단 한 명의 약자도 없는 강자의 사회를 원하지, "고귀한"사람처럼 수탈하고, 착취하고, 억압하고자 함이 아니다. 니체는 왜 이런 것에 대해 비아냥거린단 말인가?

 니체의 주장대로라면 도덕적 개념인 선-악은 그저 고귀하지 않은 가치평가 방식인, 즉 원한의 심리학이 형성해 낸 노예도덕일 뿐이다. 그는 기존의 도덕을 노예도덕이라 칭하면서 기존 도덕을 도덕에 대한 우리의 도덕적 편견 정도로 여긴다. 결론적으로 니체는 그 "노예도덕"을 주인도덕, 고귀한 도덕으로 대체시키려는 도덕의 이단아일 뿐이다. 기존의 도덕적 가치를 비판하는 일은 진보를 위해, 즉 현재의 상태를 지양하며 더 나은 미래를 향한 현재의 역동성에서 분명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기존의 도덕관념 전체를 엎어버리는 적으로 돌리는 것은 위험한 생각이며, 니체의 그 생각은 현재에 발 딛고 있지조차 않다.

 도덕적 가치들(기존의 도덕관념)은 이미 세상 위에 주어진 것으로, 기정사실로 간주되어야 한다. 문제제기 역시 불필요하다. 분명한 것은 '선한 사람' '악한 사람'보다 훨씬 더 가치 있고, 이는 조금의 의심의 여지도 없다. 니체는 진정 악한 자를 "고귀한 자"로 둔갑시키고자 작업했다. 심지어 니체는 인민의 적- 그저 괴뢰 호전광, 전쟁광일 뿐인 나폴레옹을 위대한 사람, 위버멘시의 대표자로 둔갑시킨다. 만약 나폴레옹이 위버멘시라면 북한왕국 역시 위버멘시 왕국이지 않겠는가? 우리에게 있어서 진정으로 고귀한 자-위버멘시는 현재의 입장에서 보자면 체게바라, 우고 차베스, 룰라 다 실바, 실바도르 아옌데,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노먼 볼로그 등의 사람이지 단지 왕, 귀족, 위정자, 재벌, 자본가, 대통령, 독재자 따위의 지위로써 될 수 없다.



[1] 철학사상 별책 제5권 제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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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모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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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후2시 사랑니 발치 끝.
잇몸 속애 들어있는 매복 사랑니

위치는 우측 아래.

마취주사도 조금 아프다.
마취후 5-10분정도 기다렸을까.
칼로 죽죽 째고 이가 보이자 팬치로 당긴다.

안뽑힌다. 의사쌤의 손이 덜덜 떨린다. 안뽑힌다.
조금 더 째고 드릴로 이에 구멍을 낸다. 팬치로 답아뺀다. 안뽑힌다. 의사쌤의 손이 또 덜덜 떨린다. 다시 드릴로 이에 구멍을 내고 뽑기를 여러 차례 반복. 이야 빨리좀 뽑혀라... 하고 생각했다.

온몸에 힘이 들어가고 등과 발 손에는 식은땀이 줄줄 흐른다. 마취가 되어 아프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두렵다. 뜨거운 피가 입가에 튀겼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이는 전혀 뽑힐 생각을 안하고, 내 입안이 온통 칼질과 피범벅으로 난장판이 되어 있을것을 상상할 즈음 의사쌤이 지친듯 포기하는듯 일어선다. 속으로 생각했다. 난 망했구나... 그런데 끝났다고 얼굴에 씌운 수술보를 치운다.

어느새 뽑혔네. 시계를 보니 두시반.. 한 이삼십분쯤 흘렀다. 마취대기시간까지 하면 뽑는 시간만 이십분정도 걸린듯 싶다.

절개부위는 실로 꿰매지 않았단다. 자연스레 붙는게 건강에 좋다나...

거즈를 물고 일어서니 아뿔싸, 앞이 보이질 않는다. 어질어질하다. 다시 온몸에서 식은땀이 나고 어질어질 눈도 안보이며 서있기조차 힘들어진다. 병원 담당실장의 발치후 안내를 듣는둥 마는둥 건성을 대충 들어넘기고는 비틀거리며 4층 계단을 내려왔다.

미치는듯 싶었다. 몸에 피가 부족한가? 그렇게 나는 거리에 병자처럼 한시간을 식은땀 흘리며 앉아있을수밖에 없었다.

한시간이 더 흘러 마취가 풀리기 시작한다. 거즈는 4시까지 물고 있으라 했으니 아직 삼십분은 더 물고 있어야 한다.

아프다. 군대까지 다녀온 남자지만 입에서 신음이 절로 나온다. 고통스럽다. 병원처방 약을 먹는다. 조금 나아지는가싶더니 다시 아프다. 소용없다. 약국으로 달려가 진통제를 사먹었다. 조금 낫지만 여전히 참기힘든 고통이 몰려온다. 아프다. 고통아 이러지말고 차라리 내 모가지를 깔끔하게 쳐라 싶은 생각이 든다.

얼마간 흘렀을까 저녁 8시가 넘어 통증은 많이 진정되었다. 피는 계속 흘러 예비로 준 거즈를 물고 일찍 잠을 청했다. 점심 이후로는 물만 마셨다. 저녁도 안먹고... 벌어진 절개부의 틈새로 음식물이 낄까봐 먹을 수 없었다. 물만 닿아도 미치는듯 시린 통증이 몰려왔기 때문이다.

새벽에 일어나 물고있던 2차 거즈를 빼었다. 처음것과 마찬가지로 핏덩어리가 나온다. 다행이 입안에서 피비린내는 줄었다. 냉동실에서 손바닥보다 작은 얼음팩을 꺼내 문지르며 다시 잠에 들다.

아침을 거르고 아침겸 점심으로 수술 후 첫 끼니를 한다. 죽이다. 입이 쉬이 벌어지지 않아 죽과 멸치조각으로 식사를 한다. 왼쪽으로 대충 식사를 하고 꿀떡꿀떡 삼켰다.
맛있다. 조촐하지만 이렇게 맛있을줄이야.

먹고 아주 조심스레 양치를 한다. 어제 상처부위에 물이 닿았을때 느껴졌던 시린고통이 또 느껴질까 두려워 오른쪽 치아는 닦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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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모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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