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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너무 불편하다.

구입한 모델은 CFCS-145이다.
가격은 8만 4천원이다.

앞 쏠림이 상당히 심하다. 그립부가 상당히 짧아서 파지가 매우 불편하며 사용 시 손목 피로를 금방 일으킨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안정적인 파지감은 저가 라인인 펠릭스 모델(4~5만원대)이 월등히 낫다.. 120을 쓰다가 150을 써보고 싶어 구입한 것이거늘..

신제품인데 이리 실망을 주더냐..

아부가르시아 신제품 개발자는 혼 좀 나야 하겠다.


아래: 기존 저가 라인 펠릭스와 파지감 비교.


혹시 이 글을 보는 사람이 있거든, 색이 마음에 안들더라도 색 포기하고 그냥 저가 펠릭스를 살 것을 권한다. 2021 신제품 펠릭스 컬러즈는 가격 값을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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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모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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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아부가르시아 케이지필드 펠릭스 낚시대이다.
모델명: CFFS-120
명칭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총 길이는 120cm이다.
구멍치기용으로 가장 적합한 길이이며 그립의 안정성을 최적으로 지녔다. 위 사진처럼 파지시 그립부가 거의 팔꿈치까지 커버하여 상당한 안정감을 준다.

좌대 뿐만 아니라 구멍치기에 있어서도 적합하다. 150cm 모델도 있으나, 해당 길이 모델은 색상이 노란색 뿐인데, 일단 노란색은 불호가 큰 색상이었다.

그래서 근래에 새로 나온 아부가르시아 케이지필드 컬러즈 제품을 들여왔다.
모델명: CFCS-145
145cm이다.

단, 그립부가 너무 짧아 사용이 매우매우매우 불편하다.. 후회한다. 색상을 포기하더라도 안정적인 파지를 선택할걸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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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모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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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2019년 8월 즈음) 고려대학교 커뮤니티에서 정은혜씨의 민주당 비례대표와 의원직 승계 대한 비아냥과 인격모독이 판을 쳤던 적이 있다.
최근에 고려대학교에사 세종캠에 대한 혐오주의와 천박한 엘리트주의가 다시금 기어 오른다는 기사를 보고,
그때의 일을 회상하며 글을 정리한다.

"신라대는 어디에 있는 대학인가요? 농담 아니고 진짜 처음 들어보는 대학인데"
"역시 고려대보다 신라대"
"줄을 잘 서니까 신라대 나와서 금뱃지도 다네요ㅋㅋ"
"중립기어를 넣으려 해도 적폐 냄새가"
"서울에서 신라대 가는 것도 드문 일인데 신라대 나와서 국회의원 하는 것도 참"
"학력세탁이 예술이네 순식간에 하버드생 행"
"정치권 줄 서니까 강력한 추천서 받고 명문대도 갔군요 ㅋㅋ"
"신..뭐요?"
"집에 돈은 정말 많나 보네요. 후원금 내면서 딸 밀어넣은 모양새인데"

위의 사례들 모두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실제로 했던 진술들이다. 이처럼 학벌로 비꼬며 사람을 모욕주는 것은 정말 지극히 비열하고 지성인으로서 어울리지 않는 행태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개인의 후천적 노력, 능력으로 지금의 위치에 있는 것을 수 있는데, 학벌로 비꼬는 것은 참으로 저급하고 천박한 행동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다.

신라대를 나와도, 아니 지방 전문대를 나왔다고 하더라도, 후천적 노력으로 좋은 위치에 오를 수 있는 것이니까.

고려대, 서울대 나왔다고 다 인간됨이 훌륭한가? 그렇지 않다고 본다. 사람 탈만 썼을 뿐 그 똑똑한 두뇌로 더 독버섯같고 이기적이고 금수같이 행동하는 종자들을 우리는 무수히 보아왔다. 학벌을 가지고 차별하고 이렇게 놀리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도리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즉 학벌주의는 참으로 편벽되고 수구같은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

회상해보자면 정은혜씨는 그래도 나름 신라대에서 연세대 대학원, 하버드대 대학원싸지 졸업할 실력을 키웠다고 보여진다. 필자가 보기에도 이 정도 하려면 자본도 자본이지만 학부 수준과 실력을 극복하기 위한 개인의 피나는 노력 없이는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연세대나 하버드대 정도면 입학도 쉽지 않을 뿐더러 그냥 돈 내고 다닌다고 졸업장 주는 곳도 아니라고 판단한다. 또한 경력을 보더라도 아래서부터 차근차근 올라온 사람이라고 판단된다. 청년 정치인, 청년 정책단장.. 공부만 잘한다고 바로 들어가는 자리 아니다.

추천서와 관련하여, 인맥이 작용했을 수 있다는 혐의도 있다. 그런 혐의는 십분 이해를 한다. 또한 대학원 입학이 학부 난이도와 비교해 수월하다는 점은 옳다. 하지만 소위 '급' 낮은 학부 출신일수록 명문 대학교에서는 대학원 입학 시 본 교의 교육과정을 무사히 마칠 수 있을지를 더욱 엄격히 따지게 된다.(면접에서) 또한, 진학이 쉽다고 졸업까지 쉬운 것은 아니다. 졸업을 위한 논문도 마찬가지이다. 졸업논문은 학교 및 지도교수의 명예와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졸업논문의 지도교수 도장은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관련하여 종합해보자면 정은혜씨는 최소한 정치학 분야에 대한 석사급의 전문성 내지 실력은 갖추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인맥과 관련하여도 첨언하자면, 일단 인맥이 성공적이기 위해서는 그 사람에 대한 조직 내부적인 인정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특히 정은혜씨의 경력/이력을 보면 그러하다.

우리는 고려대학교에서 또 다시 천박한 엘리트 의식을 만나게 되었다. 세종캠에 대한 배제의식과 폄하를 볼 때부터 심히 느낀 부분이다. 참으로 적나라하고 노골적인 천박한 엘리트 의식이 판을 치고 있다.  고려대학교 학생들은 학벌 하나를 가지고 그 사람의 이전과 이후의 모든 노력을 폄하하는 경향이 있으며, 평생의 꼬리표로 낙인 찍어버리는 행동을 한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의식에서 제거해야 할 거만과 엘리트 의식이다.

정치에 관심 있는 학생들이 이처럼 편협하고 천박한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앞으로 고려대학교 출신의 교우가 정치를 하게 될 때 표를 주어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부분에 대한 증거로 보여지기도 한다.

인간의 격이라는 것은 성실성으로 표현될 수 있다. 하지만 성실성만이 사람됨을 전적으로 대표하는 것도 아니고, 또 성실성과 좋은 학벌이 항등식으로 성립하는 것도 아니다. 비례대표와 의원직 승계의 근본적 문제를 가지고 비판하는 것은 타당하다. 그러나 한 사람의 인생을 학벌 하나만을 가지고 평가절하하고 낙인찍는 것은 참으로 비열하고 천박한 엘리트의식, 우얼의식의 다름이 아니다.

서울대, 고려대 등 명문대 출신에게 나라를 맡기는 것이 두려워진다. 그 좋은 이성능력을 가지고 얼마나 또 사람을 도구적으로 조종하고 가르치려들고, 간사하게 자기 권력과 이익을 탐할지 뻔히 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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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모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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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반도 핵무장에 대한 단상, (보론: 종속이론에 대한 논의)

국제정세를 보면 알 수 있다. UN이 얼마나 비도덕적이거나 무기력한지에 대한 부분을 말이다.

국가(나라)는 존엄성을 지닌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큰 나라이든, 작은 나라이든, 도시국가이든. 마치 개개인의 인간 생명성이 절대 존엄한 고귀성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개개의 나라 역시 규모, 경제력, 종교 등을 떠나 오직 국가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 존엄성을 보장받아야 마땅하다. * 이것은 자연 법칙이 아니라 당위로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명제이다.

사실상 이것을 실현시키는 것이 UN의 정당한 역할이었다. 그러나 UN은 실질적으로 그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이에 따라 필자는 핵무기만이, 강국이 소국을 함부로 대하지 못할 수 있는 열쇠, 즉 상호 주권과 존엄성을 보장할 수 있는 열쇠라고 이해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 핵무기야말로 국제 분쟁에 있어서 최종적인 '법관', '판단자' 역할을 할 수 있다.

생각해보면 다음과 같다. 상호 간 확증 파괴가 가능할 만큼의 핵무기를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비윤리적 액션을 취할 수 있겠는가? 혹은 어떤 조건이 있어야 국가 상호 간(관계에 있어서) 비윤리성을 절대적이고 항구적으로 제거할수 있는가?

이를테면, 팔레스타인 민족이 지금과 같은 상태에서 재래식 핵탄두를 보유하고 있었다면? 아니, 애초에 이집트, 시리아, 리비아 등 중동 국가들이 핵무장을 했더라면 영국과 미국 등에 의해서 지금처럼 중동이 피폐해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만약 팔레스타인이 핵무장을 하고 있었다면, 지금처럼, 침략자인 이스라엘과 유대인들로부터 고향을 약탈당하고 빼앗기고, 주권과 자유를 잃는 상황은 없었을 것이다.

남아메리카 전체가 확증 파괴가 가능할 만큼의 핵무기를 보유한 국가들로 구성되어 있었다면, 과연 미 제국의 자본이 남미를 경제적으로 종속시키는 일이 가능하기나 한 일이었을까?

티벳 민족이 한 서너 개의 핵 탄두라도 지니고 있었다면 지금처럼 민족이 강제로 병합되는 일이 발생했을까? 단연코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까지 예시나 사례로 제시한 것들 모두 사실상 모두 UN에서 적절히 개입하여 국제 사회의 정의(justice)를 다시금 바로 세웠어야 했던 일들이다. 결국 각종 이해관계로 인하여 UN은 제 기능을 못한 것이다.

결론은 이렇다. UN 회원국 모두 평등하게 핵무기를 보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핵 무기만이 지구의 최종적 헌법이자 세계 헌법이 될 수 있다. 흔히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린다는 말을 하고는 한다. 대국이 소국을 건드리는 순간 최소한 한두발의 핵무기라도 날릴 수 있는 꿈틀거림의 힘은 쥐어줘야 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역시 북한과 중국에 정당하고 옳게 대응하기 위해서는 핵 무기를 개발하고 무장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비로소 북한의 협박과 공갈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고, 중국의 야만성에 대하여 저항할 수 있으며, 궁극에는 동북아시아의 국제관계에 있어서 균형과 정의, 항구적으로 윤리성을 지닌 국제 관계를 수립할 수 있을 것이다.

진정한 평화는 힘의 균형에서만 가능하다.

*평화에 대하여, 그리고 종속에 대하여.
모두가 무기를 내려놓고 밥 잘 먹고 잘 살게 하는 것이 최선의 평화일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지금의 자본주의 경제구조 속에서 '밥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하다. 바로 이윤율을 의한 희생이다. 이를테면, 저렴한 임금의 노동시장을 필요로 한다거나, 혹은 생태나 인간 건강에 파괴적일 수 있는 행위들을 규제하는 다양한 규정들을 완화하여 다국적 기업에게 유리한 입지를 제공한다거나, 또는 많은 수요를 창출하여 큰 시장이 되어야 하는 것 등이다.

혹자들은 지금의 구조는 그러한 약탈적 구조가 아니라고들 한다. 그러나 근본을 보자면 과거와 비교했을 때 외연만 달라졌을 뿐, 본질은 그대로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노예와 주인의 관계,가 근러자와 기업가의 관계로 바뀌었을 뿐이다. 국제관계에서는, 종속된 국가와 거대국가(혹은 자본기업 또는 기축통화를 장악한 거대자본주의국가)의 관계로 그 외연만 바뀌었을 뿐이다. 다시 말해, 그저 약탈의 다름 아닌 그 구조가 가시적인 잔인성에서 비가시적인 잔인성으로 변모한 것일 뿐이다.

다시 돌아와, 핵무장이 아닌 방안으로는 즉, 지금의 국제정치의 비윤리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힘을 가진 자(국가)가 힘을 적게 가진 자(국가)에게 힘의 불균형으로 인한 어떠한 손해도 초래하지 않을 것임을 우선적으로 천명하고 확증해주어야 한다. 이를테면, 미국이 북한에게 주권을 보장할 것임을 확증하는 것이며, 중국이 티벳에게 주권 보장을 확증하는 것이다. 또한,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주권 보장을 확증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국가 간 약속은 어떻게 보장하는가? 바로 내가 약속을 어길 시 나를 처벌하거나 제재할 수 있는 확실한 수단을 상대에게 주는 것 뿐이다.)

하지만 미국, 중국, 영국 등을 위시한 강국들은 국제사회에서 그렇나 액션을 취하지 않는다. 따라서 현재의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가능성 있는 열린 위험성(정치문화경제적 존속, 체제 존속의 위험, 주권의 위협 등) 을 감수하고 무기를 내려놓으라는 것은 참으로 한심한 주장이 아닐 수 없다. 즉, 세계가 급진적으로 국제 정치구조의 변화를 동시적(* 동시적이라는 것의 성격은 아주 중요하다)으로 보여주지 않는 이상 약소국들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별로 없는 것이다.

한편, UN 상임 이사국을 비롯한 핵무기 보유국들이 핵포기 선언을 동시적으로 하고 동시적으로 파기하는 것을 상상해보는 것은 어떠한가? 그리고 범 세계적 상호불가침 조약과 평화조약을 맺는 것은 어떠한가? 사실상으로 참으로 비현실적이라 할 수 있따. 더 강한 무기를 가진 나라가 조약한 무기르 ㄹ가진 나라에게 먼저 무기를 내려 놓으라 한다면 받아들일 수 있는가? 아닐 것이다.

정리하자면, 지금의 비윤리적 국제정세는 치킨게임과 같다. 미국, 중국, 이스라엘, 영국 등은 대형 덤프트럭을 몰고 있고 한국, 팔레스타인, 북한 등은 소형 모닝을 몰고 있다. 그런데 이 와중에 주변 사람들이 모닝을 몰고 있는 사람더러 먼저 핸들을 돌리거나 브레이크를 밟으라고 한다. 모닝을 몰고 있는 사람 입장에서는 열린 위험성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상징적 비유이지만 결국 지금의 이 치킨게임에서 빠져나올 방법은 양자 혹은 전체가 동시에 핸들을 돌리거나(핵무장을 포기하거나), 혹은 자본주의 체제나 비윤리적 국제관계에 대한 근본적 변화를 도모(브레이크 밟기) 하거나, 혹은 힘의 균형(동시 핵무장)을 통해 치킨게임의 가속도를 줄임으로써 갈등을 방지하는 방법 뿐이다. 이중에 (이상적이 아닌 현실적으로) 그나마 가장 현실적이라 할 수 있는 길은 후자라고 필자는 판단한다.

최악은 부딪히는 것이고 차악은 어느 한 쪾이 어떤 형태로든 지배다앟거나 종속당하는 것이다.

*추가: 종속에 대하여
종속이론이 폐기됐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필자의 생각이 일정 부분 종속이론의 영향이 들어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폐기됐음'이라는 것 역시 아직 그저 사태를 바라보는 하나의 입장이나 방법일 뿐, 그것이 확증된 것은 아니다. 하물며 자연과학이론마저 반증가능한 시대에, 사회이론을 가지고 이미 폐기된 이론이니 주장에 설득력이 없다는 이유로 이를 비판한다면, 그것은 확증편향이 아닐 수 없다.

*반론에 대한 반론
반론으로 제시된 코스타리카의 사례에 대한 반론을 하겠다. 코스타리카는 인텔이라는 거대 자본 회사에 개방한 이후 과감한 투자와 인푸라 확충으로 결과적으로 치안수준, 국갖거 인프라, 소득 등이 남미에서는 손 꼽히는 나라가 됐다는 사례이다. 다시말해, 인텔에 의해 교역량이 증가하고, 인프라가 갖춰지면서 물류의 중간지대로서 역할도 하게 됐다는 점이다. 그리고 선진국 그룹과 개도국 그룹 간 소득격차가 어떻게 변하는지에 대한 연구의 결과, 종속이론이 폐기되었다는 반론이다. 즉, 종속 이론대로라면 코스타리카는 실패 사례가 되었어야 한다는 점이다.

해당 부분에 대한 반론 내지 보론을 하자면 다음과 같다.
즉, 거대 자본의 유입이 성공적으로 정착한 경우도 없지 않다. 그러나 성공적이지 못했던 부분을 우선적으로 논하고 해결해야 그 말의 순서가 맞을 것이다. 100% 성공이 아니면 그 이론이 참이 아니며(연역적 성공사례가 아니며), 또한 실패 사례를 통해 진보하는 것이 이론과 탐구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즉 99%의 실패 중 1%의 성공이 있었다고 하여 그 1%의 실례를 근거로 이론이 옳았다고 말할 수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우리는 99%의 실패사례에 주목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99%가 성공했다고 하여도 마찬가지이다. 1%의 실패 사례가 있다면 그 이론은 (연역적으로) 틀린 것이며, 따라서 여러 방향에서 그 원인을 찾아 해결해야 한다. 만약 1%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해결할 수 없다면 우리는 그 이론을 폐기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코스타리카의 사례는 종속이론이 현실을 잘 해석해주고 있음을 오히려 방증해주고 있다.

다시 돌아와, 어떻게 보면 성공적인 사례들은 자본의 독점과 종속 심화라는 현상으로부터 물론 지혜롭게 극복한 사례라고도 말할 수 있을 뿐, 그것이 종속이론의 실패를 증명하는 것은 아니라고 판단한다. 그러니까, 다국적 자본주의에로 편입된 결과로 반전되고 향상된 부분이 있는 반면 종속된 부분도 또한 있다는 것을 우리는 보아야 한다. 많은 사례에서 발전된 부분의 이면에 종속된 부분의 폐해가 드러나고 있다.

일례로, 에티오피아의 경우, 커피 자본의 유입과 함께 전체적인 자본의 총량은 늘어났지만 커피 재배면적의 증가로 인해 식량 곡물 생산량이 감소하였고 이에 따라 때때로 기아에 시달리는 현상을 겪게 되었다. 커피 재배로 받는 푼돈 몇 달러로 겨우 입에 풀칭르 하는 현상이 있으며, 이마저도 해외 식량곡물을 수입하기 위해 쓰이고 있는 상황이다.

또 다른 사례로, 우리가 현재 가지고 놀 수 있는 축구공, 농구공, 운동화 등 많은 부분이 현재까지도 개발도상국에서 제작되고 있다. 단 돈 몇 백원에 제작되거 그 곳 노동자들이 받는 돈은 하루 2~3달러에 불과하다.

현재 남아프리카에는 수많은 GMO 작물들이 실험 및 실제적으로 재배되고 있다. 경제적으로 해외 선직국 및 거대 시장으로 수출하기에 유리한(수요가 있는) 상품들을 위주로 생산하고 있따. 모산토 또한 GMO로 인한 토양오염(DNA오염)으로 인해 GMO 영향을 받지 않은 작물을 키우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는 상황이다. (이는 종의 다양성을 해치는 잔인극악무도한 행위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커피가 이토록 일반화되고 때로는 놀라울만치 저렴하게 마실 수 있는 것은 바로 개발도상국들의 자본 종속이라는 원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네슬레의 분유 사태를 한번 살펴보자. 이 역시 자본 종속의 폐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남미에서 물(수도사업)의 민영화로 인한 폐해도 적잖이 드러나고 있다. 이 역시 해외 거대 자본의 유입으로 인한 결과이다.

우리나라는 어떠한가? 외국인 노동자들을 절며한 값에 들여와 최저임금에 노동을 부리고 있다. 이것도 종속이다. 개성공단은 어떻나가? 역시 종속이론으로 바라볼 수 있다. 중국으로, 베트남으로 우리의 공장을 이전하는 것은 어떠한가? 이것 역시 종속이다. 기업들이 공공연히 자행하는 최저가 입찰제, 단가 후려치기, 하청의 재하청, 비정규직 근로자 등 모두 경제 구조적 힘을 독점적으로 쥐고 있는 기업들로부터 행해지고 있는 자본의 폭력이자 종속이다. 이는 곧 종속 및 독점 강화의 현상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필자는 자본의 종속을 다름 아닌 바로 다음과 같이 정의내리고자 한다. '값 싸고 저항할 수 없는 힘 없는 노동을 경제적이라는 이유로 활용하는 행위 일체'를 뜻한다. 더 나아가, '한 개체를 목적 그 자체가 아닌 수단으로서 대하는 행위 일체'를 필자는 종속이라고 정의내리겠다.

우리나라에서 시급 1만원을 주고 노동자를 고용한다면, 우리가 공장을 베트남으로 이전하든 중국으로 이전을 하든, 똑같이 우리나라에의 1만원에 상응하는 대가를 그들에게 지불해주어야 한다. 이것이 윤리적이며 공정한 것이자 올바른 것이고 정의이다. 그런데 실상을 그렇지가 않다. 경제논리와 시장논리에 따라 다만 합리적으로 의사결정을 할 뿐이다. 그리고 이렇나 합리성과 이윤율에 반대되는 이론을을 그들은 이미 폐기된 이론이라고 치부하며 거부하고 있다.

국내에외는 여전히 이 종속으론을 연구하고 이를 통해 현상을 해석 설명하려는 사람들이 필자를 포함해 여전히 많이 있다. 국내외의 여러 이슈들을 적절히 해석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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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생애와 저술 

2   사상적 배경지식-데카르트 답습 

3   생각과 감각의 관계

     3.1   감각론

     3.2   상상론

 

4   말브랑슈의 신 

     - 유일한 참된 원인으로서의 신 cf) 기회원인론

5   말브랑슈와 인간의 자유

6   신 안에서의 영원한 진리의 파악

7   말브랑슈, 스피노자, 데카르트, 버클리(말브랑슈의 업적) 

 

 

1   생애와 저술

  1638년 파리 생. 라 마르셰(La marche)대학에서 철학을 공부, 그곳에서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대해 비호감, 이후 소로본에서 신학을 공부.

  1664년 목사로 임명되는 해에 데카르트의 유고 <인간론>을 접한다. 데카르트 철학에 큰 감명을 받고 데카르트 저술에 관한 공부를 시작. 

  말브랑슈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에, 보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플라톤주의, 아우구스티누스주의적인 전통 강하게 이끌리게 된다. 데카르트주의와 아우구스티누스주의로부터 받은 영감을 결합한 것이 그의 철학의 특징이다. 데카르트의 철학이 도달한 대부분의 견해가 모두 참이며 이 철학이 경험과 실재를 해석하는 도구로서 아리스토텔레스주의보다 훨씬 우위에 있다고 주장한 점에서 데카르트주의자이기도 하다. 말브랑슈는 철저한 기독교 사상가이다. 

  그는 데카르트주의의 철학을 새로운 종합을 구성하기 위한 도구로 간주하면서도, 아우구스티누스주의적인 전통[1]에 따른 철학자라는 인상을 준다. 그래서 단지 데카르트주의자, 단지 아우구스티누스주의자라고 분류하기에는 어패가 있다. 말브랑슈는 이 두 부류에 모두 속한다. 말브랑스 스스로는 자신의 철학은 아우구스티누스와 데카르트 그리고 스콜라철학의 반대가 종합된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사상에서 중세 스콜라 철학의 영향을 받았음 부인하기 어려워 보인다.

 

A.   생애

        i.        말브랑슈는 1638년 파리 생.

        ii.        라 마르셰(La Marche) 대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철학 공부-흥미를 가지지 못함.

        iii.        소르본에서 신학 공부.

        iv.        1660년 오라토리오 수도회 가입.

        v.        1664년 목사로 임명. 바로 그 해 데카르트의 유고작 [인간론]을 접한다.

        vi.        이어서 데카르트 철학에 큰 감명- 본격적인 공부 시작.

 

B.   저술

        i.        [진리의 탐구] (1674-75)

                 착각과 오류의 원인들을 탐구하면서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올바른 방법에 관하여 논의하다.

        ii.        [진리의 탐구에 관한 설명] (1678)

                  진리의 탐구에 이어 등장한 저술

        iii.        [자연 및 은총론] (1680)

                  기회원인론의 주장을 초자연적인 질서에 적용하는 것과 인간의 자유를 신의 은총의 효력과 조화시키는                      것 등의 주제가 다루어지다. 1689년 말에 가톨릭의 금서목록에 오르게 된다.

        iv.        [기독교적 성찰] (1683)

        v.        [도덕론] (1684)

                  오직 하나의 참된 도덕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기독교의 도덕이며, 스토아 학파와 같은 다른 도덕적 체계들                    은 참된 도덕성의 기준을 만족시키지 못한다는 주장을 펴다.

        vi.        [형이상학에 관한 담화] (1688)

                   말브랑슈 자신의 체계를 요약하여 설명하다

        vii.       [운동의 전달에 관하여] (1692)

                  순전히 과학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다.

        viii.      [신의 사랑에 관하여] (1697)

                   보쉬에(Bossuet)가 대단히 칭찬하였던 페늘롱(Fenulon) 신의 순수한 사랑에 관한 이론을 논의하다.

        ix.        [기독교 철학자와 중국 철학자의 대화] (1708)

                   신의 현존 및 본성과 관련된 주제를 다루었다.

        x.        [물리적 전() 운동에 관한 고찰] (1715)

                  말브랑슈 최후의 저술이며 얀센주의를 대변하는 부르지에(Boursier)의 말브랑슈에 대한 반박서인 [창조에                    관한 신의 활동 또는 물리적 전 운동에 관하여] (1713)에 답하기 위하여 쓰다.


[1] 아우구스티누스는 교부학 혹은 교부론의 대표자다.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중세의 사고 형성에 큰 역할. 플라톤의 위계질서의 원리(감각, 그림자, 이데아..)를 따름. 이를테면 가장 낮은 것은 물체, 그 다음 인간의 영혼, 그 다음 신. 이런 식. 그리고 신만이 가장 탁월한, 완전한 존재, 피조물은 불완전한 존재. 지식이라 함은 이처럼 불완전하고 변화하는 것으로부터 얻을 수 없다. 불완전하기 때문에. 

 

2   사상적 배경지식-데카르트 답습 
  말브랑슈는 두 종류의 실제가 있다고 말한 데카르트의 구별- 즉 정신적이고 비연장적인 실체와, 여러 가지 다른 형태로 변형될 수 있으며 운동 가능한 물질적인 실체 또는 연장성 사이의 구별을 받아들인다. 

  물질적인(비정신적인) 실체와 연장성[2]을 동일시함으로써 그는 물체의 성질에 관한 한 데카르트와 동일한 결론을 이끌어낸다. 그러나 이 사실이 감각적 지각들을 검토하면서 말브랑슈가 단지 데카르트의 주장을 그대로 따랐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물체에 관하여 상당히 자세히 검토함으로써 물체의 특징들을 나름대로 지적하고 있다. 

  또 말브랑슈는 진리를 탐구함에 있어 지켜야만 하는 몇 가지 규칙들을 제시한다. 이중 가장 중요한 일반 규칙은 우리가 확실한 관념을 지닐수 있는 대상들에 대해서만 추론을 해야 하며, 가장 단순하고 쉬운 것으로부터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데카르트를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는 감각은 서로 다른 네 가지 요소로 구별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네 가지란 1. 대상의 작용(예를 들면 개체의 운동과 같은), 2. 감각기관 및 신경-두뇌의 변화, 3. 정신 내에서 일어나는 감각 또는 지각, 4. 정신이 내리는 판단. 이 그것이다. 이에 대한 부가설명은 없다. [3]


[2] 외부 공간에 대한 느낌. 물질적인 것. 

[3] 이런 요소들은 함께 별현되고 또 순간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이들을 혼동하여 감각이 순전히 나의 정신 내에서 일어나는 정신적 사건이며, 나의 육체 또는 다른 어떤 곳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는 점을 잊어버리곤 한다- 오류. 그리고 이는 어떤 위계적 모습이라 볼수 있지 않을까 싶다.

 

3.   말브랑슈의 오류론-오류의 원인으로서 감각

말브랑슈에 따르면: 오류는 인간의 비참함의 원인.

즉(다시 말해) 이 세계에 악을 만들어 내는 것의 원인은 잘못된 원리-즉 오류에 있다.

  But) 이 말은 인간이 필연적으로 오류에 빠진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말브랑슈는 사람은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존재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 능력을 지닌 존재). 그 가능성에 대한 일반규칙이라 할수 있는 것은 데카르트의 그것과 유사하다. 이를테면 이런 것 : 우리는 자명하게 파악한 것을 제외하고는 다른 어떤 것에도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독실한 기독교도가 되기 위해서는 무조건 믿는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철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명하게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말브랑슈는 오류의 원인에 대해 검토하면서 먼저 인간의 지각능력을 살펴본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지각능력은 세가지 것이 있는데 : 상상력(상상력은 뒤에서 다른다), 순수오성[4], 감각이 그것이다. 이 요소들은 함께 발현되고 순간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혼동, 즉 오류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말브랑슈에 따르면 인간을 속이는 것은 감각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선입견이 우리를 속인다고 한다. 풀이하자면 사물과 우리 사이의 관계에서 물자체로서의 사물의 본성은 실제로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이 아닌데 우리의 선입견이 그것을 실제로 확실히 나타난다고 판단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말브랑슈의 말을 빌려 예를들자면, 온기를 느낄 때 우리는 온기를 느낀다고 믿는 사실 자체에 의해서 속임을 당할수 있다. 그 온기가 그것을 느끼는 정신의 외부에 있는 것이라고 판단한다면 우리는 속임을 당한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그는 감각은 서로 다른 네 가지 요소로 구별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는 반드시 감각을 동반하는 자연적 판단 또는 자동적 판단, 그리고 비록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가능한 한 억제하여야만 하는 임의적 판단을 구별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즉 이것이 우리 자신의 선입견이라고 할수 있다. 

  결론적으로 감각에 대한 말브랑슈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 우리의 감각능력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물체들과 우리의 육체 사이의 관계를 알려주는데에는 충실하지만, 감각은 물자체로서의 물체들이 어떠한가를 우리에게 알려줄수는 없다. 감각능력은 오로지 건강과 생명을 보존하는데에만 사용해야 한다. 우리의 감각능력은 오로지 우리의 육체의 보존을 위하여 주어진 것일 뿐이다.

 

 Cf) 추가사항 : 말브랑슈는 생리적인 과정도 감각에 포함된다고 말한다. 신경조직: 동물정기가 통과하는 미세한 관 또는 통로. 외부의 대상이 우리의 감각기관에 영향을 미치면 신경조직의 말초적 표면이 운동을 시작하며 동물정기가 이를 두뇌에 전달한다. 그리고 그런 생리적 과정에서 이 동물정기는 두뇌에 어떤 흔적들을 남긴다. 두뇌의 섬유조직에 찍혀있는 흔적들- 그리고 인간은 이런 흔적들에 영향을 받아서 일종의 정신적 심상을 낳게 되는 것이다. 이때의 심상은 비자발적 심상이다. 기계론적 설명과 같다. 그리고 그 흔적들은 상호 영향을 끼친다. 이러한 흔적의 결합은 생명의 보존을 위해 필요한 것이다. 이를테면 위험에 대한 태도. 이를테면 63빌딩에서 아래를 내려다봄으로써 아래로 떨어질 위험이 있다는 흔적, 거대한 바위가 어떤 물체 위로 떨어지며 부서지는 모습의 흔적, 이런 흔적들은 상호작용하여 죽음이라는 개념으로 확장되게 된다. 

 

4.    말브랑슈에게 상상력이란?

  상상력은 물체에 대한 심상을, 그 물체가 현존하지 않을 경우에도, 즉 우리가 지금 그 물체를 실제로 지각하고 있지 않을 경우에도 산출하고 재산출하는 능력이다. 이 상상력은 오류의 다른 근거 또는 원인이다. 상상력의 산물은 일반적으로 감각보다 약하지만 때로는 그 상상력의 산물이 매우 뚜렷하여 생리적인 관점에서 볼 때 감각과 똑 같은 호소력을 지니는 경우도 있다. 이럴 경우 우리는 오류에 빠지게 된다. 이 상상력에 관한 논의는 [진리의 탐구] 3장에 있다. 말브랑슈에 따르면 몇몇 사람들의 두뇌는 전혀 중요하지 않거나 비교적 별로 중요하지 않은 대상으로부터 매우 깊은 흔적을 받아들인다고 한다. 이 자체는 잘못이라고 할수 없으나 만일 상상력이 이러한 흔적들에 의해서 지배된다면 이는 오류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감각과 상상력의 오류는 육체의 본성과 성향으로부터 생겨나며 정신이 육체와는 무관하다는 점을 인지함으로써만 알 수 있다고 본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만일 물체에 대한 심상이 그 물체와 우리와의 관계가 아니라 물자체로서의 물체를 나타낸다고 판단한다면 우리의 판단은 오류에 빠지게 된다.

 

 

5.    말브랑슈의 신- cf)기회원인론[5]

-유일한 참된 원인으로서의 신 

앞에서 외부의 대상이 우리의 감각기관을 자극하며 동물 정기가 두뇌의 섬유조직에 흔적들을 만들고 그 만들어진 어,,, 심상이나 관념들은-상상 등- 이러한 생리적 과정에 기인한 것이거나 그 결과인 것인데,

 다시 말해 정신이 동물 정기의 움직임을 일으킬 수 있으며 그 결과로 경우에 따라서는 상상력이 자극되거나 아니면 육체를 이루는 각 부분들이 움직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신과 물체 중 어느 하나도 결코 다른 하나에 직접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말한다. 육체로부터 정신이 독립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또 이상하게도 그들 둘 사이는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음을 말한다. 말브랑슈는 이를 둘 사이의 상호작용이 아닌 대응관계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정신은 사고하지만 육체를 움직이지는 않는다. 육체는 신에 의해서 정신에 적합하도록 만들어진 일종의 기계일 뿐이다. 정신이 육체에 힘을 불어넣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 물리적 사건과 정신적 사건 사이의 대응관계- 말브랑슈는 양자 사이의 어떤 필연적인 연결, 인과성을 찾을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우리 자신이 팔의 움직임의 자연적인 원인임은 분명한 것이나 결코 참된 원인은 아니라는 것이다. 적절한 비유일지는 모르겠지만 이를테면 시계가 움직일 때 시계의 시침과 분침과 시침에 대한 자연적인 원인은 침 아래 있는 나사와 부품, 테옆들이지만 그것이 결코 근본적인 동자(動者)는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팔을 움직인다고 해도 그것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동물 정기를 통해서 자신의 손가락을 움직이려면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팔을 움직일 수 있겠는가? (즉 어떻게 움직이는지는 모르고 움직이니까 움직인다 또는 감각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 이를테면 내가 그렇게 감각하니까) 이런 사실들은 나에겐느 매우 명백한 것으로 보이며 단지 모든 것을 감각적으로 받아들이려는 사람들은 이를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깊이 있게 생각하여 받아들이려는 사람은 이를 명백하게 깨닫으리라 나는 생각한다  즉 진정한 인과적 행위자는 자신이 행위하고 있다는 사실(우리는 사실만 알 뿐이다)과 , 어떻게 행위하고 있는가를 모두 인식할수 있어야만 한다는 가정을 하고 있다. 이렇게 말한다.  참된 원인이란 우리의 정신이 그 원인과 결과 사이에서 어떤 필연적인 연결점을 지각할 수 있는 그러한 원인이다. 우리는 생각하며 움직일수 있으되 왜, 어떤 이유로 생각하며 움직일 수 있는지는 모르는 것이다. 말브랑슈의 결론은 : 참된 원인이 된다는 것은 창조하는 행위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어떤 인간도 그러한 창조하는 행위자가 될 수 없다. 신이 그런 능력을 인간에게 전해줄수도 없다.[6] 그러므로 신이 팔을 움직여야겠다는 나의 의지 작용을 기회로 삼아 나의 팔을 움직인다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다. 신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일어나는 모든 것을 의욕한다 (창조주로서의 신은 모든 의욕을 행함에 있어서 자신 이외에는 다른 어떤 궁극적 원인도 지니지 않는다.)

 

  예를 들어 a 뒤에는 항상 b가 뒤따른다고 생각해보자. 이 질서는 항상 보존된다. 이 질서가 왜 보존되는지 우리는 모른다. 겉으로 볼때는 a 뒤에는 항상 b가 따르기 때문에 a가 b의 원인처럼 보인다.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 왜 그런 질서가 보존되는지는 모른다. 그 질서가 보존되는 힘이야말로 진짜 b의 원인이다. 그 보존은 신만이 할 수 있다. a는 그저 신의 활동기회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a와 b 사이의 결합과 관련하여 반복적인 연속성의 관계 이상의 것을 발견할수 없다. 그리고 이것은 정신과 육체의 관계에서도 적용된다. 

 

6.    말브랑슈와 자유

  말브랑슈에 따르면 오직 육체들의 창조자만이 육체들을 움직이는 자가 될 수 있다. 말브랑슈에 따르면 우리 스스로는 장소를 바꾸거나 팔을 움직이거나 단 한마디의 말조차 할수 없다. 우리 스스로는 아 우주 안에서 가장 미미한 변화도 만들 수 없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육체를 움직이는 것, 팔 움직이는 것과 같은, 이 가능하다고 생각했을까?

그의 말처럼 신이 유일한 참된 원인이고 우리의 모든 의지 작용의 원인이라면 우리 인간의 자유는 부정되어야 한다. 그런데 말브랑슈는 인간의 자유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 자유를 부정하지 않기 위해 말브랑슈는 인간의 자유와 참된 유일원인으로서의 신을 조화시키고자 한다. 그 논증에 대한 이해는- 본인은 감각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으로서 누군가에게 이해시켜 줄만큼 납득하거나 이해할수 없었다. 그렇기에 생략한다.

 

  먼저 그는 가정한다: 신은 정신적인 피조물의 내부에 자신을 향한 성향을 심어놓았다고. 이 심어진 성향이 어떤 성향인가 하면 선 일반을 향한 성향이라. 본성과도 같은 것이다. 그런데 우리 세계는 유한한 세계이다. 그렇기에 지금 상태의 우리는 유한한 선이나 유한한 선들의 집합만을 추구할 수 있는데, 유한한것은 유한하기 때문에 우리는 결코 만족할수 없게 되는 것이다. (참고로 여기서 말하는 우리가 선 일반을 향한 성향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는 본성적으로 행복을 획득하려는 성향을 지니고 있다는 말과 같은 의미이다. ) 그런에 아까 말했든이 유한하기 때문에 어떤 유한한 선도 선 일반, 즉 궁극인, 즉 최고 성향의 완전한- 무한한 선에 이를수 없다. 이는 유한한 세계 안에서의 인간의 타락의 발생을 초래한다. 그리고 그렇게 타락은 무지, 무질서, 오류를 낳고, 또 우리의 상태를 바로 의식하지 못하게-즉 오류라는 큰 패러다임 틀 속에 있게끔 만든다.

 

 말브랑슈에 따르면 이 최고의 무한한 선인 완전한 선, 즉 완전한 행복, 궁극적 행복은 오로지 신 자신에 의해서만 충족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돌아와 말브랑슈는 지금까지 이렇게 말해온 일련의 본성이나 성향, 선-행복을 추구하고자 하는, 신에의해 심어진 그 기질을 자연적 성향, 자연적 운동들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고 이 패러다임 안에서의 자유라는 것은 말한 것처럼 그러한 경향을 통해 특정한 끝맺음-신의 선- 에 이를수 있게 만드는 능력인 한에서의 자유가 있는 것이다. 이 경향은 저항할 수 없는 것이다. 심어진 자연적 본성이자 성향이니까. 따라서 특정한 유한한 선과 관련해서 볼떄, 즉 유한한 의 체계-그 패러다임 내에서 한해, 유한한 것을 통해 끊임없이 무한함을 찾으려는 움직임 몸부림- 그 틀 속에서의 몸부림, 비록 불가능하지만 갈구하는, 불가능하기에 다양한 방식으로 찾아가는 틀 속의 다양한 몸부림의 방식에 한해, 우리는 자유롭다는 것이다. 

 

  참고로 말브랑슈는 만약 우리의 본성이 아담과 이브의 범죄에 의해서 타락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정신의 기본적 경향성들을 직접 인식할수 있었을 것이라 말한다. 즉 타락 이전의 인간은 심신병행론적인 법칙들의 작용을 유보시킬 수 있는 초자연적 능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타락 이후에는 인간 두뇌의 주된 부분에 흔적들을 남기는 물리적 사건들의 연쇄가 필연적으로 두뇌에서의 생리적 현상들보다 앞서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물체들이 인간의 두뇌에 흔적을 남길 때마다 정신의 운동이 그 결과로써 뒤따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7.   말브랑슈의 정신과 관념 관계

 말브랑슈에 따르자면 어떠한 작용에 의해 정신이 얻게 되는 사물에 대한 여러 관념들은 그 관념에 대응하는 물체로부터 생겨난 것도 아니며(철저히 단절되어 있기 때문에) 그리고 인간의 정신 자체로부터 생겨난 것도 아니다. 인간 자신으로부터 생겨난다고 한다면 이는 신의 창조적 능력의 지님을 전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정신 내부에 태초부어 있었던 완벽한 본유관념이 있었다고 볼만한 근거도 없다고 생각한다. 말브랑슈는 우리가 지니는 관념들을 타당하게 설명하기 위해서 성 아우구스티누스[7]의 권위를 빌어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우리는 신 안에서 모든 것을 파악한다

 말브랑슈는 우리가 신의 안에 있는 우리의 관념들을 파악할 수 있다고 전제나 공리로서 가정하는 것 같다. 그 관념 안에서 우리는 영원한 진리- 정확하게는 진리의 관념들을 파악할 수 있다. 

 

8.   말브랑슈 사상의 의의와 영향

A.   말브랑슈 사상의 의의

 말브랑슈의 사상은 완전한 원인으로서의 신을 도입한다는 점에서 중세 신학자들과 별반 다른 것 같지는 없다. 하지만 혹자는 그를 데카르트와 스피노자 사이를 연결하는 인물로서 간주하는, 나름 후한 역할자로서의 가치를 부여하기도 한다.

 그리고 데카르트를 따르고 있으면서도 데카르트와는 다소 다른, 즉 일말의 독창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 그 일말의 독창성이라 함은 명백히 신 중심적이고 신 존재에 대한 전제적 패러다임을 지니고 있다는 것과, 물체-감각(육체)-정신 사이의 인식관계를 신이 보증해 준다고 하였던, 그래서 정신과 육체 사이의 상호작용이 가능하고 그것을 신이 보증해준다고 말했던 데카르트와는 달리 물체와 정신 사이의 완전한 단절을 주장했다는 점이다. 

 즉, 정리하자면, 말브랑슈의 사상이 유용하든 무용하든 의미나 가치가 있든 없든, 독창적이거나 독자적인 생각을 했다는 바로 그 점에 한해 의미를 둘수도 있을 것 같다는 것이 나의 입장이다. 즉 인간의 생각 지평의 다양한 확장 가능성을 증명해주었다는 점.

 

B.   말브랑슈의 영향

  말브랑슈의 사상은 종교계에서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그 예로 오라토리오 수도회의 토마신이라는 신학자, 베네딕트 수도회의 인물인 프랑수아 라미, 제수이트 교도인 이브 마리 앙드레, 수학자이며 물리학자인 한 르네 페데, 학자 존 노리스 등에게 지지받고 이용되었다는 점이 있다. 그리고 말브랑슈의 사상은 경험론에 반대하는 많은 학자, 저술가에게 이용되었다.


[4] 두뇌 안에 외부의 대상에 대한 구체적인 심상을 형성하지 않고도 그 대상을 인식하는 능력.

[5] 말브랑슈의 기회원인론은 마음 혹은 정신과 육체의 관계에서 육체를 정신의 원인으로 보거나 아니면 마음이나 정신을 육체의 원인으로 보는 입장 또는 상호 연결되어 있다는 두 이원론적 입장을 넘어서서 신이 정신과 육체의 모든 활동의 근본적 원인임을 주장하는 철학이다. 이 입장은 철저하게 신 중심적이어서 마음 혹은 정신의 가장 중요한 관계는 육체와 맺어지는 관계가 아니라 신과 맺는 의존관계에서 그 모든 원인을 찾으려고 하였다.

[6] 아마도 신에 대한 전지전능성에 기인하는 것일듯.

[7] 그는 모든 것을 의심하는 '나'의 존재의 확실성에서 출발하여 회의론을 반박하였는데, 이 확실성은 후에 데카르트가 '나'의 확실성에서 자기 학설을 세웠던 발상과는 달리, 영원한 진리, 즉 이데아로서 영혼의 내면에 스며든 신의 빛(라틴어 illuminatio)에 의한 자기 존재의 확증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는 세계가 신의 이데아에 따라 그 의지에 의해 창조된 것이고, 원죄를 짊어진 인간은 악을 행하는 자유를 가질 뿐이며, 구원은 오로지 신의 은총에 의해 가능하고, 이 구원의 대상이 누가 되는가는 신의 영원한 예정에 의한 것이며(예정설) 교회가 이 은총을 매개한다고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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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모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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